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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30일 월요일

한국의 이념과 윤리적 바탕


자본주의는 개인의 무한한 이익의 추구가 본질이다. 개인의 이익이 공동체의 이익으로 집합되는것으로 봐서 분명히 자본주의의 발달은 인류사회에 공헌하는 바가 컸던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자본주의 시장이 발달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많은 사상가들은 자본주의가 화폐축적수단을 이용하여 끊임없는 욕망의 함정으로 사람들을 타락시킬것이라고 예측하였다.

마르크스의 과학적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타락과 부패의 결과물이며, 타락한 자본주의에 대하여 증오심같은 감정적인 문제가 개입되어있는 감정의 산물이기도 한것 같다. 마르크스시대의 자본주의는 부패와 타락의 정점에서 많은 사람들의 공분(共憤)을 사고 있는 배경과 가난에 시달린 마르크스의 개인적인 사정이 맞아떨어진 점이 있었던듯 하다. 게다가 산업혁명이 무르익고, 과학적인 발견이 가속화됨으로 과학적인 추세가 급속도로 확장되던 시절에 영리한 마르크스는 민중의 감정과 자신의 불만, 사회적 추세를 절묘하게 결합시킬 수 있었던 인재였던듯 하다.

극도의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이 꾸준히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을 생각해 보았다. 항상 미국의 풍부한 자원과 전성기때 축적된 자본은 한국이 미국식 자본주의를 흉내낼수는 있어도 결과물은 결코 같을 수 없다는 한계를 보여주는것 같다. 게다가 미국은 다민족,다인종국가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사회전반적으로 '애국'과 '세계평화'을 강조하는 분위기를 사회이념으로 투입시켜서 미국식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사상적으로 보완하고 있는듯 하다.

독일의 사회학자인 베버( Max Weber 1864 ~ 1920 )는 자본주의가 급속하고 완전하게 타락할 수 있는 이념임에도 불구하고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서구사회의 또 하나의 사상적 배경인 개신교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영향이 있다고 하였다. 종교개혁 무렵에 캘빈이 주장했던 성실,근면, 금욕으로 근면하게 재산을 축적해야 한다는 캘비니즘은 자본주의가 무한한 욕망과 개인적인 일탈로 종말을 맞이하지 않도록 지탱해주는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인간이 가장 중요하다'는 이념의 윤리적바탕을 잃어버린 과학적사회주의(공산주의)의 종말은 필연적인듯 하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와서 '먼저 해결해야 할 인간중심 또는 공동체중심의 본질적인 바탕의 개선없이 '신자유주의'라는 명분으로 사회발전을 과거로 회귀시키는 추세가 생기기도 하는것 같다. 원래 신자유주의란 정부가 노를 저어주지 않고 키잡이 역할을 하는 건설적인 의도였지만 이념의 바탕이 되어줄만한 더욱 '근본적인'윤리사상이 부재(不在)하여 마르크시즘(공산주의)과 같이 부패와 일탈로 종결을 짓는 예정된 수순을 밟고 있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언급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캘비니즘과는 안드로메다 만큼의 거리가 있던 종교적 윤리를 정치에 개입시켰던 지난 정부의 일탈은 두고 두고 후유증을 남기는것 같다. 윤리적 바탕이 없는 이념대립으로 한국사회가 63년전과 같은 과오를 되풀이 해서는 안될듯 하다. 북한의 예에서 보듯이 '인간을 생각하지 않는 이념'이란 천천히 사회공동체를 무너뜨리는 머리좋고 인내심이 많은 적군인듯 하다.

2013년 12월 27일 금요일

한국에서 이념의 양극화 / 그 곳엔 섬이 있다.


노조도 없고, 기업도 어려운 곳에서 고용주와 종업원의 어려움을 함께 느끼면서 한국경제 안에는 '섬'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것 같다. 국가의 제도적 지원도 없고, 이념적인 지주도 없고, 소수의 그들만이 옹기종기 모여서 꾸려가는 한국경제의 '섬'이 있는것 같다.

한국에서는 매스컴이나 사회과학의 학리적(學理的)인 해석이 적용되기 힘든 곳이 있는데,소외된 제3의 노동시장을 형성하는 제3의 기업영역(소기업등)들이 그런것 같다.

철도 민영화문제로 한참 소란스러운데, 나름 정부와 철도노조와의 대결은 대통령이 존경한다는 대처의 정책(대처리즘)으로 표현되는 신자유주의 정책과 언젠가는 정치적인 주도권을 얻을 수 있는 야당의 이념적인 바탕이 될 수 있는 국가사회주의 이념의 대결로 비화되는것 같다.

영국의 대처수상은 복지과잉으로 침체된 영국경제를 자유경쟁시장 정책의 부활로 되살려놓고, 아르헨티나와의 포클랜드전쟁을 승리로 이끈 업적으로 영국인들의 존경을 받기도 하였다.  영국이 가장 필요로 하던 시절에 근면이 최고의 가치였던 빅토리아여왕 시대의 전성기의 영국으로 돌아가자던 대처수상의 호소는 옛 영화를 꿈꾸는 영국인들의 자발적인 동조를 이끌어내는데 부족함이 없었던듯 하다.

하지만 생각해보건데, 아직은 한국인의 근면성이 문제가 된다거나 과잉복지의 문제를 안고 있는것은 절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보수당의 거물이었던 이노크 파월이 진부한 이야기를 계속하자 "건설적이 되시오 이노크 건설적으로 .........."라고 외친 대처수상의 심중에는 시급한 현실개선의 의중이 담겨 있었던듯 하다.    

철도의 민영화가 가져다주는 의미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시민들은 안정된 고용환경과 작지않다고 느끼는 급여수준을 가진 철도노조원들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 마음속에는 비판이 아니라 시민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호소하는 마음이 담겨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는것 같다.

이념적인 프레임은 중요하지 않은것 같다. 이념에 대한 반론을 학리적으로 풀어내는 여유도 없는것 같다.추운 겨울날 폐지가 잔뜩 담긴 수레를 끌고 교차로를 가로질러 가면서 교통순환을 막는 노인의 얼굴에서,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젊은 날의 패기가 일찌감치 고개숙인 심리적 안정감(?)으로 자리잡는 젊은이들의 고민어린 얼굴에서  한국의 미래를 보는것 같다.

한국에는 정치가도 모르고 학자들도 모르는 '섬'이 있는것 같다.

2013년 12월 26일 목요일

국가경제와 개인경제의 균형발전 / 리스트


철도민영화문제로 정부와 철도노조와의 대립이 심각한듯하다. 비효율적이고 만성적자에 시달리는 철도에 자유주의 경쟁시스템을 도입하려는 정부와 공공재적인 성격이 강한 철도를 민영화시켜서는 안된다는 국가사회주의적인 입장의 대립으로까지 비화되어 한국에서 발생하는 이슈는 이념대립으로 확산된다는 '법칙성'을 보여주는듯 하다.

아담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 경제학이 경제이론의 바이블로 통용되던 시절, 다른 유럽국가보다 후진적인 경제구조를 가진 독일의 경제학자들은 독일의 경제는 독일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연구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른 유럽과는 달리 시민혁명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계몽전제군주인 프리드리히대왕등에 의한 하향식 근대화과정을 거친 독일로서는 국민의 경제적인 영역에 국가라는 집합체가 차지하는 비중이 클 수밖에 없는 여건을 가지고 있었던것 같다.

개인은 국가의 세포같은 존재라는 국가유기체설을 주장하였던 헤겔처럼 독일에서는 프랑스나 영국같은 유럽국가와는 달리 국가와 같은 공적영역의 위상이 다른 성향이 있었는데, 경제학에 있어서도 예외가 없는듯 하다.

당시 독일의 역사학파경제학자 리스트(Friedrich List 1789 ~1846 )는 개인과 국가는 분리된 형태의 독자적인 개체들이 아니고, 개인의 생산력은 국가나 민족공동체의 영역과 결합되어야 총체적생산력이 극대화될 수 있다는 총체적생산력이론을 내놓았다. 리스트는 정치, 사회, 제도, 법,도덕, 관습같은 정신적인 생산영역과 농업, 상업, 공업같은 물질적인 생산영역의 결합으로 총체적인 생산력이 증대된다고 하기도 했는데, 국가와 개인, 정신적인생산력과 물질적인 생산력이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지속적으로 발전하도록 국가와 국민이 항구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동태적 균형이론을 제시했다.

한국에서는 통계로 잡힌 경제성장률과 시민의 체감경제성장률이 다른것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대기업과 경공업의 해외진출로 산업공동화현상이 일어나서 실업률이 높아지고, 국가의 부(富)와 국민 개인의 부가 일치하지 않는 현상을 보이는데,국가의 경제와 개인의 경제가 심각하게 불균형한 현상을 보이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 청년실업도 문제고 중장년실업도 문제인 현실에서 일은 도대체 누가 하고 있는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눈에 밟히는 현실은 어렵기만 한듯하다. 풍부한 자원과 기술력, 거대한 내수시장을 가진 미국의 경제시스템은 한국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개인경제의 최소한이 언제나 준비가 되어있는 미국에서는 국가와 개인의 총체적인 균형을 고려해야하는 부담이 없을듯 하다. 하지만 한국의 개인경제는 국가경제와 유기적으로 결합되지 않으면 무력해지는 문제가 있는듯 하다. 어떻게보면 한국의 정치나 공적영역이 어떤 일을 해도 국민들에게 욕을 먹을 수 밖에 없는, 총체적인 어려움에 골머리를 앓을수밖에 없는 태생적인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한국이기도 한것 같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경제문제는 이념문제와는 다른 관점으로 보는것이 시급한듯 하다. 개인을 위한 국가의 역할도 더 중요하게 고려되어야하고, 개인과 국가가 전혀 다른 영역으로 생각되어지지 않도록 소통도 자유로워야 하며,개인의 애국심이나 공동체적인 관심도 더 고려되어야 할듯 하다.

독학으로 경제학을 공부하고, 독일연방의 관세장벽을 철폐하여 독일통일의 기반을 마련하고도 현실의 생활고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리스트의 인생도 불균형한듯 하다.  

2013년 12월 24일 화요일

용(龍)을 요리하는 법 / 청년실업


어떤 사람이 전문가에게서 용을 요리하는 법을 배웠다.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과 정열을 투자해서 용을 요리하는 법을 모두 배우고 나서는 가산을 탕진해버렸다. 애써 배운 기술을 막상 써먹으려하니 용을 잡았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이 기술자는 용을 요리해보지 못하고 일생을 마쳤다.

- 장자 -

크리스마스 전야(前夜)인데 많이 한산한것 같다. 청년실업문제는 심각하고, 도서관마다 토익과 공무원수험생들로 넘쳐난다. 생산현장에는 외국인 노동자들로 북적인다. 청년실업자들에게 생산현장에서 12시간 주야교대로 근무하면서 경제활동도 하고 자아실현도 하라는 말은 가혹한것 같다.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는 자국(自國)의 기준으로 한국에서 번 돈은 한 탕의 큰 소득일 수 있는듯 하다.

잠시 용을 요리하는 법을 배우다가 써먹을데가 마땅치 않아서 용을 잡는 법을 가르치면서 생계를 유지했던 경험이 있다. 용을 찾는 일을 포기하고 대형마트에 캐셔로 일하고 있는 이를 안 만날 수 없는데, 만날때마다 죄송스럽다.  

2013년 12월 21일 토요일

타인의 관점을 이해하는 교육 / 피아제


내 자신은 본의 아니게 전혀 성격이 다른 일터를 뛰어다니며 적응을 하는 습관을 잘 들여놓은것 같다. '불협화음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어내기 위해서 시도했던 일이지만 '타인의 관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좋은 훈련도 되는것 같다. 이력서를 쓸때마다 '나는 이곳에서 무엇인가 배울것이다'라는 글귀를 집어넣곤 하는데, 겸허한 마음으로 타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다면, 나에게 이보다 풍요로운 삶이 있겠나 싶은 생각도 든다.


어제는 탈북자 한명이 재입북을 해서 한국사회의 냉혹함등을 비판하는 좌담회를 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만나본 탈북자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유추해보건데,재입북한 탈북자의 관점과 그런 관점이 키워지게된 배경, 심지어는 발전과 인류공영이라는 원대한 이상과는 전혀 다른 세계로 가버린 북한사회, 그리고 아직도 고민할 것이 많은 한국사회까지 이해되는 점이 있었던것 같다.

어느 날 일터에서 생산성을 위해서 기계처럼 움직이고, 기계처럼 생각하며, 기계처럼 봉급을 계산하는  동료를 심하게 타박한적이 있는데, 경영주에게는 정말 뛰어나게 일을 잘 한다는 칭찬을 제보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 동료에게 마음의 여유는 좀 갖고 일을 하자는 이면적인 충고를 한 경험도 있다. 경영주나 종업원이 각자 원하는것을 위해서 기관차처럼 질주하는 열기를 꺾을려고 했던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면서 마음이 복잡했던 경험도 있다.

어린이의 인지발달에 관한 연구로 세계적인 권위자인 스위스의 심리학자 장 피아제 ( Jean Piaget 1896 ~ 1980 )는 어린아이의 인지구조는 다섯가지 단계로 나누어서 발달을 하며, 각 단계는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출생에서 만 2세까지는 감각운동단계로 반사와 협응으로 행동하며,바라보는 대상의 영속성을 깨닫기 시작하는 단계라고 말한다. 2세에서 7세까지는  전 조작단계로서 자기가 좋아하는 과자나 인형을 엄마에게 선물하는, 타인의 관점이 아닌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보이다가 소꿉놀이같은 가상놀이를 하면서 타인의 입장을 공감하고 이해하는 능력이 확장된다고 말한다. 만6세에서 7세 사이는 구체적조작단계로서 논리적인 사고를 하기 시작하고, 12세 정도가 되면 자신의 경험에 상상이나 상징을 개입시켜 연역적인 추론이 가능해지고, 청소년기에 대부분의 능력이 완성된다고 말한다.

물론 최근의 학자들은 심리학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정지된 구분개념이 아닌 연속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한 사회가 발전하고 성장하는데는 교육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누구나가 이해하고 있는 문제다. 발전과 공영이란 목적의식을 벗어난 이념적인 교육, 그래서 더욱 단조로워진 내용의 교육들이 어린아이의 성장과정에서 얻어내야하는 사고의 발달과정을 억압하는 문제가 심각한 것은 문제인것 같다. 북한의 교육은 어린아이들에게 더욱 다양한 대상들을 접하지 못하게해서 말하자면 피아제가 말한 인지구조의 발달단계에 심한 장애를 초래했다고 할 수 있을것 같다.

때로는 이것이 한국사회에서도 공연하게 일어나는 문제이기도 한데, 이념적프레임에 갖힌 사람과 어떤 협상도 불가하거나, 어떤 종교의 열렬한 신자가 객관적인 사고를 하는 능력을 상실했다거나 하는 문제는 발달단계에서 손상을 입거나 아니면 다시 퇴보해버린 인지능력탓이라고도 할 수 있을것 같다. 이런 인지능력의 발달을 방해하는 요인은 곳곳에 널려 있는데, 세뇌, 권위, 권력, 통제, 사회의 추세,선전활동, 매스컴등의 억압이 원인이 되기도 하는것 같다.

북한사회보다 자유로운 한국사회를 이해할 수 없고 적응할 수도 없는 탈북자, 인간보다 돈을 우선한다고 느끼게 만든 한국사회등 모든것이 이해되는 면이 있다.  

2013년 12월 18일 수요일

한국사회에서 정치토론이 불가능한 이유 / 롤스


정치는 국민의 일상속에서 회피할 수 없는 현실로 존재하는듯 한다.그래서 정치는 일상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정치선진국과는 달리 정치적토론에 장애를 느끼는 경우가 많은듯 하다. 서양의 정치선진국의 시민들은 '정치란 합의점을 찾아가는 관계'라는 관점에 익숙해져 있지만 한국의 시민들에게 '정치란 권력투쟁과 이념갈등의 대립'이라는 관점이 바탕이 되기 때문인듯 하다.

한국의 시민들은 정치토론의 장에 들어설때 자신이 또 하나의 갈등관계를 만들고 있다는 불안한 예측을 하기 쉬운듯 하다. 물론 짧은 민주정치의 역사속에서 불안한 경험을 했던 이유도 있을것 같다. 

정치철학자인 롤스(John Rawls 1921 ~ 2002)는 민주시민에게 필요한 정치적인 자세로서 '공적 이성'이 필요하다고 말한적이 있다. 롤스가 말한 '공적 이성'이란 상이한 성질이거나 심지어는 대립적인 성향이 있는 신념들일지라도 협력과 조화로서 사회가 유지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일치된 합의를 끌어내어 지속적인 사회의 유지와 발전에 기여하도록 하는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이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분파나 이익집단등을 위한 이성은 '공적'이라고 할 수 없는데, 분열과 이기심이 지배하는 사회는 롤스의 '공적이성'이 역할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못된다고도 할 수 있겠다.

어떻게보면 시민들의 공적이성을 찾기위한 노력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은 조직의 규율에서부터 공적이성을 찾기위한 훈련이 계속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심지어는 사회보전의 역할을 시도했던 이념이나 종교도 '공적이성'을 찾기위한 노력이나 훈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회에 대한 헌신적인 자세와 신뢰가 깨져버린 이념이나 종교는 분파적인 성질로 변하여 사회분열을 견인하고 있는듯 하다.

공적이성을 찾거나 지키기위한 노력은 정치가나 공직자,법률가,시민들 모두가 노력해야 할 일인데,한국의 시민들에게는 '공적이성'의 정체에 대해서 크게 알려진바도 없을뿐더러 이념이나 종교, 지역간의 갈등과 같은 분파적인 관점이 시민의식속에 '공적이성'이 형성되는것을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때로는 시민들에게'공적이성'을 지도하고 모범을 보여야하는 공공의 영역이 앞장서서 '공적이성'의 형성을 방해하고 있는듯 하다.

분파의 갈등과 대립이 '이성'이 아니라 '감정'의 문제로 변하는 현상은 한국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인듯 하다. 경쟁, 출세, 권력, 지배, 투쟁등의 단어가 우월한 사회에서 '공적이성'은 '사적감정'에 밀려 발붙일 곳이 없을듯 하다.  

한국사회에서는 정치란 '이익의 배분과정'일뿐만 아니라 '공존을 위한 합의과정'이라는 인식이 빨리 자리잡아야 할듯하다

2013년 12월 14일 토요일

사회적 다양성 / 왈쩌


부와 권력,이념과 종교등의 공통된 문제점이 있다면 사회적 다양성을 억압하는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인듯 하다. 사회는 여러 가치가 맞물려서 효율성을 얻어내고 발전하기도 하는것 같다. 자유라는 가치가 좋은 점은 누구나에게 주어진 선택권으로 자신과 사회에 가장 바람직한 가치를 타협하여 찾아가도록 유도할 수 있는 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시사평론지 [뉴 리퍼블릭]의 편집인인 왈쩌(Michael  Walzer  1935 ~ )는 사회속의 경제, 예술, 정치, 교육등의 모든 분야에는 그 분야에 맞는 정의의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느 분야의 가치가 다른 분야의 영역에 침투하게 되면 사회적 불평등과 부정의가 생겨날 수 있다고 말한다. 왈쩌는 경제영역에 머물러야 할 돈이 다른 영역에 침투하는 현상을 심각한 문제로 보고 있는데, 예를들면 잘생긴 사람이 연예인으로 특화되어야할 영역에 많은 비용을 들인 성형수술을 하여 연예인의 영역에 침투하는 현상같은 것이 쉬운 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국사회의 다양성은 심하게 억압받고 있다는 사실을 많이 경험하곤 한다. 종교적인 이념을 구실로 이미 다양성을 완전히 잃어버려서 효율성까지 없어져 버린 북한사회는 커다란 변혁이 없으면 회복이 불가능한 경지에 이른 점은 누구나가 알고 있지만 한국사회도 다양성을 억압하는 면이 많은것 같다.

부와 권력이 한국사회에서 다른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이 되는것을 많이 경험하곤 한다. 만약 부의 영역은 경제의 영역이고, 권력의 영역은 정치의 영역이라고 사회의 한 가치로만 인식이 된다면 사회의 효율성을 위하여 공헌하는 하나의 영역으로서 평가를 받게 된다. 경제분야에서 일하는 주체는 부를 증대시키기 위하여 노력해야 하는 것이 사회적의무이며  정치분야에서  일하는 주체는 국민의 공리적 후생을 위하여 노력해야 하는 것이 사회적의무가 되는것 같다.

하지만 부와 권력이 다른 영역을 침투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의 가치는 부와 권력에 집중을 하게 되는듯 하다. 누구나가 재벌을 꿈꾸고, 누구나가 권력을 꿈꾸게 됨으로써  부와 권력의 영역속에서 또 다른 불평등이 존재하게 된다는 점을 왈쯔도 언급한 적이 있는데, 더 문제가 되는것은 그런 획일적인 가치에 온 국민이 집중하는 동안 사회의 다른 영역에 대한 노력은 소홀히 되는 것이 큰 문제인듯 하다.

시민들이 정치나 경제의 영역에 대한 신뢰감을 잃어 버리는 원인중 하나는 시민의 다양한 삶의 영역을 돌보지 않고, 이념이나 정치권 내부의 문제에만 집중하여 효율성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점을 어렴풋이 인식하고 있는 점이아닐까 생각한다. 표현의 수단이나 방법이 부족한 시민들에게는 "살기 힘들어 죽겠는데 싸움이나 하고 있다"라는 표현이나 "힘들어죽겠는데 자기배만 불린다."라는 표현으로 대신 하기도 하는것 같다. 

나아가서 자신의 영역속에 충실하지 못하고 투기적 불안감을 증대시키는 문제도 증대되는것 같다.사명감없는 경제인, 사명감없는 정치인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부(負)의 귀감이 되어 어느 곳에서 경제적인 한 탕이나 정치적인 한 탕을 꿈꾸면서 방황하는 시민이 있을지 모를 일이다.    

한국사회만의 더 큰 고민은 이념이나 종교같은 전체적이고 근본적인 영역이 사회의 다양성을 훼손하는 문제인것 같다. 사실 어떤 이념이 주류가 된다고 한들, 그 이념의 문제점을 개선하고자하는 움직임이 필연적으로 있게 마련이고, 어떤 종교가 원리적으로 지배하고자 하면 그 종교내부에서도 경직성을 이완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게 마련인데, 이념이나 종교로 인하여 다른 영역(부와 권력등)을 탐하는 구성원들에 의하여 사회가 획일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면이 있는듯 하다. 

사회의 공리적 가치를 훼손하는 범죄가 아니라면 시민 각자의 영역은 존중 받아야 할것 같다. 시민 각자가 추구하는 삶의 형태나 생각은 모두 소중한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율성이나 도덕성이라는 구실로 특정 가치가 사회를 지배할려는 움직임이 강한 것이 한국사회의 문제인듯 하다

2013년 12월 12일 목요일

장성택의 사형과 북한의 개혁



북한의 1인자인 김정은이 북한 시스템을 장악하는 것이 힘들다는 반증을 보여주듯이 2인자이자 고모부인 장성택을 사형시키는 변이 일어났다. 대내외적인 개혁요구와 개혁적인 장성택의 성향과 능력, 1인 집권체제 확립의 어려움에 시달리는 김정은의 조바심이 종합적으로 작용한 사건인듯 하다.

어쩌면 프랑스혁명 당시 자코뱅당의 공포정치를 보는듯 하기도 하고, 황태자인 형 양용과 측근들을 죽이고 아버지 수문제까지 죽인후에 황제가된 수양제(양광)의 사건이 떠오르기도 한다. 한 편으로는 김정은이 느꼈을 생각에 대해서 라이벌의식때문에 총명한 신하인 양수를 죽인 조조의 마음이 읽혀지기도 한다. 

태어날때부터 보고, 듣고,배우고, 느낀 환경이 1인 집권체제의 권력환경이 전부인 김정은으로서는 장성택이라는 존재는 권좌를 침탈할 수 있는 존재로만 보였기때문에 확실한 처형외에는 달리 대안이 없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한것 같다. 그래서 극도로 경직된 시스템일수록 점진적인 개혁을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자의적이던지 아니면 국제환경에 의한 타의적이던지 개혁적인 성향이 있는 김정은의 입장으로서는 1인 집권의 확립과 개혁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기위해 급진적인 개혁사태를 불러올 수 있는 장성택의 존재를 지워버리는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을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장성택 사형이후의 북한 정부는 한국에 대해서 도발을 함으로써 집권체제의 확립을 굳힐 수 있다는 의견도 많지만 어떻게 보면 김정은이 생각한 스타일의 개혁노선을 추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정통성의 불안 때문에 토목사업을 크게 벌이고, 대규모의 고구려 원정을 시도했던 수양제처럼 적어도 퇴보는 아닌 발전적인 성향의 개혁이 있을것으로 추측된다. 그 개혁방향은 토목사업과 같은 대규모의 사회간접자본의 구축일수도 있고, 시장경제의 점진적인 도입일수도 있는데, 어떤 방법을 선택하던지 절대 아래로부터의 자생적인 개혁은 허용하지 않고, 김정은이 생각한 방식의 위로부터의 개혁시도가 있을듯 하다.

선군정치로 유지되는 북한시스템의 특질상, 장성택과 군부중에서 군부의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는 김정은의 사정은 개혁조차도, 확고한 1인집권의 영역안에서 이루어지게 하겠다는 결의로 표현되는것 같다.

2013년 12월 9일 월요일

한반도의 수평폭력문제


수평폭력이란 강한 힘에 의해서 억압받은 누군가가 억압을 하는 당사자에게 저항을 하지 못하고, 자신과 동등하거나 더 약한 상대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현상을 말한다.

남아프리카의 정신의학자인 조셉 월피(Joseph Wolpe 1915 ~ 1997)는 신경증 환자들의 불안감과 공포를 없애는 방법으로서 작은 자극을 반복하면 내성이 생겨서 큰 자극에도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는 연구결과를 내 놓았다.

숙청당한 장성택과 그 주변인물들에 대한 북한주민들의 살벌한 여론에 대한 기사가 나왔다. 이례적이거나 특이한 상황도 아니기에 별 감흥이 없이 보고 넘겼다. 아마도 조셉 월피의 연구결과처럼 사회에 만연해 있는 비숫한 류의 상황들을 많이 접해서 내성이 생겼는지도 모를 일이다.

언젠가 직장 간부의 수평폭력에 대해서 생각한적이 있었다.카리스마와 권력지향적인 모습을 보이고 싶어하는 경영주 밑에서 항상 순종하면서도  부하직원들에게 매몰차게 대하였다. 부하직원들은 그에 대한 저항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사보타쥐를 하며 비능률을 유도하고 있었고, 회사는 점점 무너져가고 있었다. 이 문제를 경영주와 해당간부에게 논의해보았지만 자신들이 자각할 수 없게 녹아들어간 습관이라서 설득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기억이 난다.

때로는 잔인한 범죄의 희생자들이 대게는 사회적 약자라는 사실도, 이면에 과거 범죄자의 억압된 의식이 표면화된 수평폭력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경쟁을 비롯한 권력적인 관계나 상하관계를 중시하는 한국사회의 전반적인 모습에 수평폭력이 만연해 있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한반도는 수평폭력이 만연하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것 같다. 짧게 생각하면 내가 속한 공동체를 비하하는 내용 같지만 어쩔 수 없는 숙명처럼 주어진 조건을 합심하여 해결해야 한다는 치유책으로 냉철하게 판단하는게 좋을것 같다.

한반도는 조선왕조의 수직적인 사회관계를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일제치하라는 강력한 사회적 억압을 받은 경험이 있다. 한국은 작은 나라는 아니지만 주변 강대국에 의해서 국가에너지의 분출이 힘들어 지면서 내부투쟁의 에너지로 전환되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때로는 사회의 전반적인 억압속에서 군대라는 상하관계에 익숙한 집권자가 장기적으로 집권을 하였던 과거사도 한반도에서 만연하는 수평폭력에 힘을 실어 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국가의 발전과 국민의 공영(共煐)이라는 목표에 집중하지 못하고 권력적인 관점속에서 발생하는 수평폭력의 종국적인 사태를 북한의 장성택숙청사건에서 볼 수 있는데, 상하관계나  내부경쟁관계에 민감한 한국내에서도 이런 문제를 고려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문제에 대한 고려가 치졸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감정적인 문제가 아니라 국민의 사기와 국제정세를 헤쳐나갈 국가의 능력을 재 정립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비판도 아니고 정략도 아니며 능률성의 문제로서 고려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2013년 12월 6일 금요일

북한 개혁노선의 어려움



북한의 실세였던 장성택과 측근들에게 '당위의 당'으로 군림할려고 했다는 죄목이 적용됬다는 소식이다. 개혁노선이라는 것이 시스템을 지배하는 관점이 평등한 곳에서는 '개선'의 의미로 받아들여지겠지만 권력관계나 계층관계의 관점이 우월한 곳에서는 기존의 권력이나 상부 계층에 대해서 '위협적인 변화'가 될 수도 있겠다 싶다.

그렇다고 북한정치의 특성상, 1945년 10월 21일 프랑스 제헌국회에서 만장일치로 주석에 선임되고도 자신이 내놓은 정치개혁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자 사임하고 시골 상거의 자택으로 돌아간 드골처럼 진퇴를 자유롭게 할 수도 없는 문제가 있다. 이쯤되면 북한의 개혁없는 정치가 극단까지 오게된 이유를 알 수 있을것도 같다.

작게는 직장문화, 크게는 국가정치문화에서도 권력관계의 관점이 지배하는것을 종종 본다. 늦은 근대화와 일제식민지의 정신적인 잔재가 남아있을듯한 한반도에서 개혁이란 단어가 주는 의미는 개혁의 주체가 약했을때는 '저항'이란 단어로, 개혁의 주체가 힘을 얻었을때는 기존 시스템에 대한 '위협'이란 단어로 긴박하고 치열하게 표현되는것 같다.

어떻게 보면 개혁을 받아들이는 관점의 차이일수도 있는데, 이념적인 대립이 극단적으로 지배하는 한반도에서는 개혁을 하는 주체나 개혁을 저지하는 주체가 합리적인 관점을 가지지 못하는 문제가 있는것 같다. 한 편으로는 수직적인 상하관계보다는 수평적인 평등관계가 우월한 사회만이 변화와 발전을 기대할 수 있을것 같다.

2013년 12월 4일 수요일

개혁속도를 늦추는 북한 / 장성택


북한의 개혁파로서 군이나 당보다는 시스템위주의 정치개혁을 시도했던 장성택의 측근들이 숙청되고, 장성택도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는 소식이다. 그 자리를 최용해를 비롯한 군부인사와 김정은의 친위세력이 대신하고 있다는 기사도 보인다.

예상했던대로 폐쇄적인 북한정치의 특질상 개혁의 시동이 걸리면 쓰나미처럼 몰려올 수 있는 빠른 개혁의 물살을 김정은과 북한 군부는 모두 두려워 하는듯 하다. 개혁적인 성향이 있는 북한의 지도자 김정은은 군부와 장성택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했을것으로 추측된다.

김정은 집권의 후견인 역할을 했던 장성택의 권위는 김정은보다 북한 정치시스템을 일관(一觀)하고 있는 점과 개혁개방을 위한 대내외적인 요구가 강력한 북한의 사정으로 봐서는 김정은에게 부담스러운 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성택의 실각은 북한의 개혁개방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는 북한의 보수적인 군부의 이익과 권력을 배분할 수 없는 김정은 일인체제의 이익이 맞아 떨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을것 같다.

개혁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에 오히려 개혁 할 수 없는 상황, 시민적 가치같은 완충지대를 두지 않은 이념독재나 1인 또는 1당 독재정치의 경직된 시스템일수록 개혁이 힘들어지는 이유를 잘 보여주는것 같다.

2013년 11월 30일 토요일

보편적 정의의 부재가 낳은 불완전 정치시장


아직은 언론의 자유가 완전하게 보장받는다고 할 수 없는 분위기라서 그런지 정신적인 자유를 위해서라도 직업을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을 만날수 있었는데, 한국에서 유권자로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뿐 아니라 경제부문에서도 중요한 위상을 가진 많은 평범한 다수를 만나보곤 한다.

종교의 4대 종파가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고 나섰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이념문제가 발단이 된 사건에서 종교의 정치적 참여가 시사하는 의미는 생각보다 큰 것 같다. 건강하지 못한 사회에서 두 관념의 지나친 충돌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낳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념이 진리로 포장되어 한반도 민중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던것 만큼,의견이 다른 종교도 국정원의 선거개입사건에 대해서는 '진리는 하나'라는 진리를 보여주고 있는듯 하다. 그러나 때로는 종파간에 대립하기도 하고, 같은 종교 안에서 대립을 하는 종교가 국정문제에 관해서 국민의 의견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을만큼 위상이 있다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정치적인 피드백이 오가는 시장은 정보의 불균형상태가 심각한듯 하다. 말하자면 경제생활을 하고, 2세를 부양하는 평범한 생활인의 세계는 생각보다 이념이나 종교로부터 자유로운것 같다. 부정적인 표현을 하자면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에게 정치적, 종교적인 정보를 수용할 수 있는 여유가 없다고 표현하는것이 옳은듯 하다.

내 자신도 느끼지만 한 편으로는 정치적 관심이란 '한량과 같은 여유로움' 속에서만이 지속될 수 있다는것을 깨닫고는 이념적이거나 종교적으로 시민들의 정신세계를 전체적으로 지배할려는 자들에 대하여 비난하고 싶은 감정이 생기는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정치적인 시장도 자유경제시장과 마찬가지로 완전경쟁시장이 진리이고 독점이나 과점같은 불완전경쟁시장은 존재하지만 개선되어야 할 문제점인것 같다. 어째서 좌파 이념에 몰입하지도 않고 우파 이념에 몰입하지도 않으며 종교라는것을 더 풍요롭고 안정된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방식이나 지향해야 할 목적으로 생각하는 생활에 바쁜시민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정치적인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방식이 부족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파가 연합하여 기업과 재벌을 위해서 힘쓰고, 좌파가 연합하여 귀족노조를 만든다고 하기도 하고, 종교인이 연합하여 자신들이 추구하는 세상을 만들어 줄 정치인을 지원하기도 하는데, 소상공인, 자영업자, 비정규직 근로자등의, 이념과 종교적인 연합으로부터 소외된 시민들의 의사는 누가 대변하고 있었던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내 자신을 비롯한 한국의 소시민들에게는 정치적인 이념과 종교적인 이념의 대립은 천상(天上)에서 싸우는 신들의 전쟁으로 비유될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이런 국가적인 방황은 시민들에게 보편적인 정의를 정립시켜주지 못한데서 원인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2013년 11월 23일 토요일

광고와 정치이념 / 알튀세르


소금과 쌀은 광고를 하지 않는다. 수요의 탄력성이 수직에 가까울 정도로 작은 생필품이기 때문에 광고를 한들 수요량이 늘지 않는다. 그러나 수요의 탄력성이 수평에 가까운 사치품은 광고가 필요하다.

프랑스의 마르크스철학자인 알튀세르(Louis Althusser 1918 ~ 1990)는 정치는 국가권력의 유지를 위하여 정신적인 조작인 이데올로기를 사용한다고 말한다. 이데올로기를 통한 국가조작은 반드시 정치영역을 통하여서만 나타나는것이 아니라 스포츠를 통한 쇼비니즘의 앙양, 종교의 설교, 학교교육을 통하여서도 나타난다고 말한다.

마르크스주의의 무정부적인 성향을 저변에 깔고 있는 알튀세르의 의견이지만 사실상 자유주의 국가의 일상경제생활속에 이데올로기적인 억압이 깔려 있는것을 부정할수는 없다고 할것같다. 때로는 그것들이 긍정적인 작용을 하기도 하는데, 지금의 중년세대들이 어렸을때부터 보고 들은 흑백티브이 드라마의 풍요로운 모습은 이미지로 장치되어 경제적 풍요속으로 국민을 인도한 공로는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광고가 일상화 되어있는 경제부문과는 달리 광고가 필요없는 정치분야에서도 광고가 많은데, 공익광고와 같이 필요한 광고, 비젼만 담긴 전시적인 정책광고도 있고, 이데올로기적 성향이 담긴 국민교육도 광고와 같은 것으로 국민의 정신을 선도하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미지정치와 전시정치의 폐해는 이미 북한정부와 한국의 이전 정부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켰거나 심각한 문제를 진행시키고 있는듯 하다.

국민생활이란 생필품과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광고가 필요없을 정도로 수요의 탄력성이 아주 작은 상품인듯 하다. 그런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의제들이 이념장치에 의해서 광고되어서는 안될듯 하다.정치적 결정이 좀 더 합리적인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할것같다.

2013년 11월 16일 토요일

한반도 경제의 비정상적인 포토폴리오 / 토빈


정치란 이익의 배분과정이며, 이익은 경제부문으로부터 비롯되고 경제는 기업, 공공부문,가계가 순환시키는것이 아니고 개인이 순환시키는것이며, 결국 경제부문에서 개인의 후생을 증진시키는것이 정치의 최종목표중의 중요한 목표가 아닌가 싶다.

민간부문이 전무(全無)한 북한의 경제구조가 논할 가치도 없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현상은 말할것도 없고, 일찌기 저성장경제구조로 접어든 일본, 특히 일본과 같은 수준의 경제성장을 경험해보지 못하고 이른 저성장 시대를 맞이한 한국의 경제를 보면 정치가 국민 개인의 후생을 증진시키는데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표상으로는 경제가 성장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체감경제는 전혀 나아지지 않고 있는 점을 보면 경제의 목표는 국가의 부를 증진시키는데 있는것이 아니라 개인의 부를 증진시키는데 있다는 점을 잊은것도  경제성장이 가져다 주는 의미를 왜곡시키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자전거도로가 한강변으로 쭉쭉 뻗어나가던 어느 날, 경기도의 어느 중소기업단지로 차를 몰고 가고 있었다. 수동기어변속이 힘든 고개마루를 넘어서 뒤를 쫒는 거대한 컨테이너차의 눈치를 살피며 좁은 이차선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파손된 도로와 과속방지턱을 뛰어 넘으며 옛날 나환자촌으로 격리가 되어있던 지역을 중소기업단지로 만들었다는 삭막한 골짜기를 지나면서 한국에서 '생산'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를 생각하기도 하고, 중소기업의 생산현장이나 대기업 생산의 밑바탕인 협력업체의 생산현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대기업에 비해서 중소기업의 생산기능이 한국보다 우월한 나라다 그럼에도 일찍이 해외에 생산공장을 설치한 대기업이나 저부가가치산업의 해외이전으로 산업공동화현상이 벌어져서 높은 실업률과 저성장, 국가의 부(富)에 불구하고 가난한 국민으로 표현되는 경제왜곡현상이 벌어지고 있기도 하다.

미국의 경제학자 토빈(James Tobin 1918 ~ 2002)은 불확실한 상황하에서 사람들은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채권과 현금등에 분산투자를 하는 포토폴리오를 구성한다고 한다. 1981년 스웨덴 한림원이 금융시장의 포토폴리오 이론에 기여한 공로와 금융적 변수가 지출과 고용생산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분석한 공로로 노벨상을 수여했다. 그 장소에서 기자들이 포토폴리오 이론에 대해서 쉽게 설명해달라고 하자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고 표현한 말은 유명하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으면 떨어뜨릴경우 모두 깨어져서 큰 손실을 보기 때문에 한 곳에 집중된 투자의 문제를 표현하는 대명사처럼 여겨지고 있다.

생산 부문에 있어도 마찬가지인듯 싶다. 지속적인 대기업 육성정책의 문제점이라고 표현하면 대기업의 대규모 경제의 원칙과 끊임없는 리노베이션을 바탕으로 한 수익창출과 경제에 공헌한 공로를 폄하하는 표현이 될 수 있기에 중소기업육성에 소홀한 문제점을 토로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중소기업의 육성은 산업공동화 현상등으로 국부(國富), 엄밀히 따지면 국민 개개인의 부를 해외로 이전하지 않고서도 실물경제와 체감경제를 증진시켜 국민 개개인의 후생에 직접으로 기여하는 면이 있고, 대기업 위주의 성장이 가져다 주는 위험을 분산시킬수 있는 방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일찌기 성장과 분배문제의 이슈가 우파와 좌파라는 이념적인 이슈로 표현되어 온 한국에서는 좀 더 일찍이 중소기업과 생산부문의 문제점과 해결책이 수렴되기 힘든 상황을 겪었는데, 이런 문제가 일본보다 훨씬 빠르게 한국을 저성장 시대로 접어들게 한 이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념문제는 한반도에서 큰 아주 큰 폐악인듯 싶다. 중소기업을 살리자고 하면 대기업을 공격하는 의견으로 왜곡되고, 중소기업이나 대기업 협력업체의 생산직들의 고충을 토로하면 모든 고민을 중소기업이나 대기업이 책임져야 할 문제로 왜곡되기도 한다.

근본을 살펴보면 창조경제를 위한 자세란, 어떻게 하면 개개인이 모인 전체국민의 후생을 증진 시키기위해 블루오션적인 관점으로 문제의 해결책을 찾을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2013년 11월 9일 토요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저성장의 시작


언젠가 직장을 얻기위해 중소기업에 인터뷰를 하러갔다. 대표이사가 팔순의 노익장을 과시하며 현역에서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모습에 존경심이 생겼다. 부지런히 일하고 절약하며 자본을 축적하여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최고로 이끌어 온 세대들의 업적은 지금의 젊은 세대들의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내 자신의 존경심과는 달리 다른 젊은 임원의 나에 대한 적극적인 호의감에도 불구하고 대표이사와의 인터뷰는 나의 업무능력 보다는 나의 신변이나 가족사에 대한 이야기로 샛길로 서서히 어긋나기 시작했다. 정작 회사를 일구던 시절의 패기와는 달리 늙고 병들어가는 심신에 대해서 외롭고 아쉬운 여운이 남는 감정이 엿보였다. 작지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생기발랄한(아니면 생기 발랄할려고 애쓰는) 태도와 속도감있는 가치관을 가진 가난한 신입사원과 늙어가는 대표이사의 관심사는 고령화가 깊어가는 한국사회의 부조화한 모습을 대변하는듯 하였다.

한국의 중장년 이상의 새대들은 열심히 일을 하고 절약하여 저축하며 자본을 축적하고, 자식을 교육시켜 인적자본을 형성하는데 공헌을 하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대통령 선거에 즈음하여 노소(老少)간의 갈등이 표면화 될뻔한 일을 생각해보면 중대한 문제를 이념적 관점이 왜곡시키는 현상이 꽤나 깊은 그늘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해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적극유입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올린 바가 있다. 외국인 노동자가 '일해서 생산하는 문제'만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것 같다.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에서 받은 적지 않은 임금이 본국으로 송금되어 소비되고, 승수효과를 일으켜 해외 경제성장에 크게 공헌하는 문제는 한국의 경제성장에 도움이 안되는 결과를 가져올수도 있을것 같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유입으로 국내총생산(GDP)은 비약적으로 증가하겠지만 국민총생산(GNP)은 증가할 수 없는 결과가 생길수가 있을것 같다.

한국인의 근면한 기질과는 성질이 다른 외국인들의 대량 유입은 한국의 고성장시기에 공헌했던 노동성과들을 이루어낼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극단적으로 외국인 노동자들의 정치세력화로 결코 저임금일 수 없는 사태까지 온다면 적극적인 외국인 노동자유입정책이 바람직한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기업적인 관점은 이윤추구가 목적이기 때문에 삼성경제연구소의 기업적 관점은 국민의 통합적 관점을 대변해야 하는 정부의 관점이랑 많이 다를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더 아쉬운 것은 언어가 같은 북한 주민들의 노동력을 사용할 수 있는 방안은 북한 정부의 지극히 보수적이고 경직된 태도와 그에 대칭되는(대칭될 수밖에 없는) 한국의 보수적인 여론에 힘입어 전혀 논의되지 않는듯 한 현실이 아쉽다. 있는 새터민들 조차도 한국사회에 적응을 못하고 건전한 일자리를 찾아가지 못하는 현실은 한국의 장기적인 노동정책이 부재(不在)하다는 생각이 든다.

좀 더 일찍 복지정책이 이루어져 국내의 출산률을 높일 수 있었다면, 좀 더 일찍 남북한간의 경제교류가 이루어져 노동지향산업에 북한인력들을 사용할 수 있었더라면 하지않았을 국가적 고민들이 많았을것 같다.

노인이 되면 미래보다는 과거를 더 많이 생각하는 기질적인 성향이 생긴다고 한다. 개인의 이런 기질들이 모여서 국가의 기질을 이룬다고 생각해 봤을때, 한국의 미래, 특히 한국의 미래 경제성장에 관한 문제를 크게 고민해봐야 할 필요가 있는듯 하다. 외국인 노동자유입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글인듯 하지만 결코 그런것은 아니다. 출산률증대나 북한 노동력 사용등 다른 정책들을 애써 고려해보지 않고, 쉽고 편안한 결론으로 외국인 노동력을 생각하는 정책에 대해서 아쉬운 의견인듯 하다.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서 적대적일 필요도 없고, 적극적인 유입을 생각할 필요도 없으며 가까운 현실부터 개선하는것이 순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보수와 진보, 한국과 북한,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는 노장과 소장의 대립의 내란으로 혼란한 틈을 타서 덜컥 외부세력의 유입을 자발적으로 유도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비약해보기도 한다.


2013년 11월 3일 일요일

상상력이 넘쳐나는 한국적 사회가치 / 아론 벡


타고난 팔자인지 개선을 촉구하기위해 주어진 숙명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변에 머리좋고 상상력이 발달한 사람이 많은 편이다. 현실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일들을 말과 글로써 사실로 변환시키는 능력은 타고난것일수도 있지만 얕은 철학적 사고의 탓일수도 있고, 종교적 상상력이나 문리적(文理的)인 상상력이 오랜기간 연습되어 온 탓이기도 한것 같다.

전통적 한국사회에서 통용되던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전통의 잔상일수도 있겠고, 이과(理科)와 문과(文科)로 나뉘어진 교육체계에서 문과 지원자가 많고, 사회의 중요한 가치를 배분하는 역할을 하는 정치시스템내에서도 이과 출신이 전무(全無)해 보이는 현실은 한국적 사회가치가 좀 더 대중적이며 중심이 없이 흔들리는 현상에 조력을 하고 있는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의지력이 수반되는 상상력은 창조성과 연계되어 긍정적인 사회가치를 생산하지만 의지력이 수반되지 않는 상상력은 말과 글의 조력을 받아 실속없고 허구와 모순에 가득찬 세상을 만들기도 하는것 같다. 특히 끊임없이 이념문제가 사회가치에 개입하는 한국적인 현실은 경이로울 지경인데, 공(公)과 민(民)이 어우러져 거대한 사기극에 휘말려 있는듯 한 느낌을 지울수가 없는듯 하다.

미국의 정신의학자 아론 벡(Aaron T. Beck 1921~)은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만의 고유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틀을 발달시키게 되는데, 그것을 인지도식이라 하였다. 이러한 인지도식은 부정적이고 역기능적임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고 논리적으로 보이는것이 문제라고 한다. 사람들이 이런 생각에 집착함으로써 우울한 기분, 행동장애, 비생산적인 사고, 비합리적인 사고등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데, 이런 생각들은 생각하는 당사자(심해지면 환자) 본인에게는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사고로 생각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런 문제를 치료하기 위해서 아론 벡은 환자의 비합리적 사고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긍정적인 사고를 대안으로 내놓아서 설득시킬것이 아니고, 환자 스스로의 경험과 이성에 의해서 사고의 타당성과 유용성을 평가하고 개선을 시키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가끔은 한국적인 상상력들이 말과 글의 조력을 얻어서 비합리적이고 타당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주된 사회가치의 대접을 받으며 쉽게 개선되지 않는 현상을 보는데,내 자신의 개인사(個人事)에서도 그런 문제되는 사고를 가진 지인(知人)들때문에 고난을 치룬적이 많았지만 무엇보다 큰 문제는 이념과 같이 주된 사회가치로 자리잡아 누구도 치료에 손댈 수 없는 상태로 방치되는것은 문제가 심각한듯 하다.

이미 국가적인 사회가치가 되어 객관적으로 인지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 치유도 불가능해져서 어떤 종국적 결말을 보기 위해서는  짧게는 수십년, 길게는 백여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북한 사회에서도 볼 수 있지만 대칭적인 흐름을 유지하는 한국사회에서도 만만치 않은 문제로 방치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유의 학습


어느 날 어떤 방치된 농가에 차려놓은 초라한 가구공장을 보았다. 외국인 노동자 몇명이 철골재료를 용접하고 있었고, 서글서글하게 생긴 일본인 사장이 함께 일하고 있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한국보다 창업환경이나 고용환경이 안정된 일본을 떠나서 한국에서도 3D직종에 해당하는 분야에서 창업을 한 일본인 사장의 밝게 웃는 모습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안정된 환경일수록 가진 바탕이 없는 사람이 창업하기가 힘들었던 것일까. 아니면 가끔 바람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어서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기를 반복하면서 떠돌고 있는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한국에 온 새터민들중에는 고난의 행군시기에 지역주민의 30퍼센트가 사라졌다는 곳에서 탈북한 사람조차 한국에서의 생활이 오래되자 돈으로 시작되고 돈으로 끝을 맺는 자유시장경제의 메카니즘에 적응을 하지못하는 경우를 본것같다. 심지어는 한국에 정착하지 못하고 다시 북한으로 들어가는, 북한의 실상을 잘 아는 한국인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빈번하게 일어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직업교육 못지않게 자유주의 시장경제에서 살아갈 수 있는 가치관과 생활방식의 학습이 많이 필요했던것 같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유시장경제의 생활방식에 익숙한 일본인 사장과 갑자기 변한 환경을 맞이한 새터민은 한국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생각들을 학습한 '분량'에 있어서 비교할 바가 아닌것 같다.

자유를 능동적으로 활용할수 있는 방법을 잃어버린 새터민들의 고민은 언젠가는 통일이 될 가능성이 한층 깊어졌을때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중대한 사회문제가 될 가능성이 있을것 같다. 그런 문제는 북한주민들만의 문제가 아닌듯 하다. 한국사회가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개인적인 실업상태가 계속됨으로서 능동적으로 사회경제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는 문제를 개인에게만 책임지울 일도 아닌듯 하다.

기회가 주어지는 나라에서 만들어 준 일본인 사장의 자신감과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나라에서 만들어 준 새터민의 좌절감이 극명하게 다름을 느끼며 겨울을 앞두고 낙엽이 스산한 거리를 위축된 모습으로 걸어가는 초라한 한국인이 눈에 띄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2013년 10월 27일 일요일

사이버사령부와 하버마스




지난 10여년간 이념문제나 통일문제에 관해서 의견을 표명하다보니 한반도의 가장 중대하고 근본적인 사안인만큼 온오프라인을 통한 불협화음이나 간섭등을 느끼는 적이 많았던것 같다. 때로는 가시적인 증거를 확보해 놓기도 하지만 신뢰감없는 행위에 연루되는 일이 싫어서 크게 문제삼지 않았던것 같다.

10여년동안 수없이 인터넷기사를 보면서도 댓글을 단 적이 2004년도쯤에 다섯번정도밖에 없는것 같은데 주장하는 문제의 설득력은 신뢰감에서 힘을 얻으며 그 기준은 내 스스로가 지켜줘야한다는 생각때문에 자기검열을 한 것같다.

물론 인터넷댓글로 의사소통을 하는 의견들이 신뢰감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민주주의적인 정치참여와 의사결정에서 정치적 공론장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독일의 사회철학자 하버마스(Habermas 1929 ~  )의 말처럼 인터넷을 통한 의사소통은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버마스는 이밖에도 시민은 소통을 통해서 구조에 저항해야 하며 입헌주의 국가에서는 헌법이 시민들이 애국심으로 연대하기위한 구심적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하버마스의 이야기에서 저항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남북의 대치상황에서 이념대결이라는 합리적인 논리를 내세울 수 있는 사이버사령부지만 장기적인 안목으로 인과관계를 살펴서 합헌성(合憲性)과 실리(實利)를 생각해 본다면 적절하지 않은 방법을 사용했던것 같다.

국정원의 인터넷을 통한 적극적 정치형성행위가 문제가 되어 국정원해체의 여론이 생기자 북한정부도 한 몫 거들어 국정원의 해체를 주장하고 있는데, 현실적으로 한국의 적성정부(敵性政府)인 북한정부가 국정원해체를 주장하면 그 의견이 한국에서 받아들여져서 국정원해체에 힘이 될것이라는 생각은 북한정부는 전혀 하지 않는것이 좋을것 같다. 오히려 국정원존립과 개선의 의지를 견고하게 만들어주는, 북한정부로서는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를 끌어낸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이처럼 원칙을 지키지 않는 일들은 원인과 결과를 반드시 연결시키고 마는것 같다. 신뢰감이 없는 전 정부의 여러가지 일탈이 상대적으로 전 정부와 대비해서 신뢰감이 보여질수 있는 현 정부의 신뢰감까지 연대해서 피해를 입히는 결과를 예측하지 못했다는것도 의문스럽다.

여러가지 정보가 개방될수 밖에 없는 정보화 시대에서는 신뢰감에서 설득력과 권력이 힘을 얻을 수 있는것 같은데, 사이버사령부는 인터넷으로 여론을 형성하는 개개의 시민들보다도 신뢰감을 지켜야하는 중대함이 더 큰것 같다.

위의 북한정부의 국정원해체주장의 예에서도 보듯이 정부나 정부기관은 국민여론과 대치상황이 되버린 후에는 신뢰감의 상실로 설득력과 권력을 잃어버릴수 있는 사태를 실리적인 입장으로도 생각을 해 봐야할것 같다. 불순세력의 부정적이고 공격적인 여론형성에 같은 방법으로 대응했다는 사이버사령부의 입장은 이해가 가지만 방법에 있어서 무게의 수준을 같이 낮추어버렸다는 점은 실패한 방법인듯 하다.

2013년 10월 24일 목요일

성장동력 / 하이젠베르크


가끔 현실적인 생활문제에 부딪힐때마다 내가 미력하나마 힘쓰는 문제들이 결론을 보여줄 것인가하는 문제에 대해서 회의감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그때마다 다른 길을 가더라도 더 나을것이 없어 보이는 과거의 경험들이 뜻밖에 큰 힘이 되어주곤 하는것 같다.

또 노력들을 일깨우는 성장동력중 하나는 세상의 모든 사물, 엄격히 말하면 사물이라기보다는 사건들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런것들이 시간의 움직임과 단절되어 정지되어 있는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양자역학에 관한 이론들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독일의 헌법학자 루돌프 스멘트(R.Smend  1882 ~ 1975)의 동화적 통합이론이라는 헌법이론을 생각했던 것만으로 움직이는 세상과 그것의 한 부분으로서 움직여야 하는 숙명을 지닌 내 자신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던것 같다.

독일의 과학자 하이젠베르크(W.K.Heisenberg 1901 ~ 1976)는 어느날밤 원자를 연구하다가 자신의 연구결과가 자연을 해석한 것이 아니고 자연을 '형성'하였다는 깨달음을 얻고서 놀랐다고 한다. 철학과 자연과학과 신학이 합체하는 진리를 엿보았다고 할 수도 있을것 같은데,동양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정중동(靜中動) 동중정(動中靜)의 원리와 같은, 세상이 정지되어 있는것 같지만 한 편으로는 끊임없이 모든 개체들이 세상을 형성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것 같다.

다음은 하이젠베르크의 제자인 오일러가 하이젠베르크가 우라늄 프로젝트에 관한 공동연구원으로 지원할것을 권유하자 나찌공군에 자원입대했음을 이유로 거절하면서 둘 사이에 오고간 대화다.

 선생님은 제가 승리를 위해서 자원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저는 승리의 가능성을 전혀 믿을 수 없으며, 둘째로는 국가사회주의 정권인 독일의 승리는 핀란드를 점령한 소련의 승리만큼 가공스러운 일입니다. 권력자들이 단지 좋은 기회가 왔다고 해서 자기들이 국민 앞에 선포한 모든 원칙을 하루아침에 뒤집어버리는 그 후안무치한 행동에는 더 이상 어떤 희망도 걸 수 없습니다. 물론 저는 사람을 살상하여야만 하는 그런 부대에 지원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사격을 하거나 폭탄을 투하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무의미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제가 원자에너지의 이용에 대해서 연구한다 해서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저는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내가 반박하였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파국에 대해서는 아무도 어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네도 무력하고 나도 무력할 뿐이다. 그러나 파국이 지나간 다음에는 여기서도, 소련에서도, 그리고 미국이나 어느 곳에서도 다시 생활은 계속될 것이지만, 그때까지는 매우 많은 사람들이 파멸할 것이 틀림없다. 유능한 사람, 무능한 사람, 그리고 죄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들이 수없이 죽어갈 것이다. 그렇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때에 더 나은 세상을 재건하기 위하여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별반 좋은 세상이 온다고 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전쟁은 거의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사실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적어도 몇 가지는  개선할 수 있을 것이고, 몇 가지 잘못은 시정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째서 자네는 그러한 자리에 있으려 하지 않는단 말인가?     

- 하이젠베르크[부분과 전체] -

선(善)을 향한 낙관적인 성장심(成長心)을 하이젠베르크의 대화에서 엿볼 수 있는데,선의의 노력이란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과도 같은 것임을 과학자인 하이젠베르크는 깨달았다고 할 수 있을것 같다. 그 깨달음은 또한 하이젠베르크뿐만이 아니라 내 자신을 비롯한 사회의 부분인 개인과 개인이 모인 전체인 사회의 깨달음이었으면 바람직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2013년 10월 17일 목요일

군(軍)과 이념


과학자가 에술가보다 고귀한 이유 - 과학은 예술보다도 훨씬 고귀한 천성의 인간을 요구한다. 그들은 단순하고 야심을 모르고 소극적이고 조용하고 죽은 다음의 명성에 마음을 쓰지 않으며, 모든 것을 무릅쓰고 일에 몰두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 프리드리히 니체 - 

이념이나 종교의 부정적인 문제를 생각하다보면 그런 관념들이 일으킨  편견과 오해의 적나라함에 반발하는 경우가 있다. 니체와 같은 직관을 가진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이념이나 종교가 인간을 주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마리오넷(꼬두각시 인형)으로 만드는 허위의식이라고 생각할만 했던것 같다.

이념이나 종교가 사회와 인간을 더 나은 방향으로 개조할려는 선의의 목적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종을 요구하는 또 다른 의미의 정신적 권력으로 작용하면서 시민의식 발달을 저해하는 작용을 하는것에 대한 반발심이 니체와 같은 철학자의 생각에서 보이는듯 하다. 어차피 그럴바에는 과학과 같이 무념 무상의 집중이 필요한 세계로 사람들의 의식을 인도하여 모든 편견을 떨쳐버리고 새롭게 시작하자는 의도가 엿보이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니체와 같은 이유로 군인과 과학기술자의 복잡하지 않은 내면을 사랑하기도 했던것 같다.  


군의 사이버사령부도 댓글공작에 한 몫했다는 기사를 보면서 정치적인 문제를 떠나서 군의 기질적인 순수함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기분이랄까 그런거 느꼈는데, 이념의 기만성에 지극히 반발하는 개인적인 입장으로는 군마저 그런 문제에 휘둘리는 모습을 보면서 사회분위기의 청정하지 못한 모습이 갈데까지 갔음을 생각해보기도 한다.

원래 북한이란 이념과 선군정치를 본질로 하는 집단이 존재함으로써 대척적인 성질을 띌수밖에 없는 한국군의 숙명과도 같은 모습은 이해하지만 방법에 있어서는 많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반공이란 이슈로 전의(戰意)를 끌어내기 보다는 애국(愛國)이란 이슈로 전의를 끌어내는 것이 훨씬 타당하고 세련된 세상에 살고 있다는것을 잊은듯 하다.

가장 오랫동안 이념의 부정적인 효과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정체(政體)가 북한이라는 점, 한국인들의 의식세계가 점차 그런 문제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점을 군(軍)도 빨리 인지해야 할것 같다.  

2013년 10월 11일 금요일

이념을 버리고 몰입을 찾아서


한 개인에 있어서 변화란 두렵고도 즐거운 경험인것 같다. 몸과 마음은 지나친 변화에도 지치게 되지만 지나친 정체에도 지치게 되는것 같다.

시카고 대학의 심리학교수 미하이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 1934~ )는 경험추출법이란 실험을 통하여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경험인 몰입에 관해서 연구를 하였다. 이 연구에 따르면 주관적이고 일시적으로 행복을 가져다 주는 활동은 식사,섹스,수다,사교활동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이러한 활동들이 행복을 위해서 최적인활동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여가나 운동같이 긴장과 이완상태, 과제의 난이도와 능력이 균형을 이루면서 몰입할 수 있는 상태가 가장 행복한 상태임을 보여주었다.

옛날 헬레니즘 철학의 양대 학파중 하나인 스토아 학파는 금욕과 이성이 필요한 아파테이아 상태를 행복의 조건으로 들고 있는데, 칙센트미하이 교수가 제시한 몰입의 상태가 쾌락주의 헬레니즘 철학인 에피큐러스학파의 아타락시아상태와 상반된 개념으로 표현되는듯 하다.

한 국가나 사회시스템도 시스템의 구성원인 개인들이 추구하는 행복의 방식에 따라서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시스템을 이끄는 개인의식의 종합체인 이념도 그와 같은 모습을 보이는것 같다. 이념이란게 개인이 만들고, 정치적인 주도자의 권력을 얻어서 세력을 확장시키곤 하지만 그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들의 동조나 적어도 '무저항'을 기반으로 확장되기 위해서는 비숫한 생각들을 하는 개인들의 무의식이 종합적으로 연결되어야 할듯 하다.

완전한 자유방임주의는 인간의 이기적인 속성과 결합하여 사회붕괴현상을 가져오거나 오랫동안 봉건적이고 정체된 사회가 사회변화를 요구하게 되는데, 과학적 사회주의와 같은 유물론적 사고는 탄생의 시대적 배경이 하나의 지배적 이념으로 작용하는것을 막을 수 없었으며, 한반도에서 가장 파란만장한 이슈가 되고 있음도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을것 같다. 

그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이 때로는 사회의 성장동력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사회구성원들에게 변화를 주지 못하고 권태와 심리적 무력감을 부여하게 되면 사회의 성장동력이 소진되는 현상을 보일 수 있는데, 북한이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한국도 이념문제가 소수의 정치 엘리트들(우파던지 좌파던지)에 의해서 사회의 지배이념으로 유지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는데, 빨리 덜어내야 할 사회의 부담으로 생각된다.  

자유로운 개인, 그러나 주체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이성적인 개인, 그래서 자발적인 공존의 협력을 끌어낼 수 있는 개인, 이러한 개인들이 모여 사는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2013년 10월 8일 화요일

가치없는 경쟁 / 필립 짐바르도


권력지향적거나 출세지향적인 지인이 있었다. 그러나 그 이면을 살펴보면 과거의 계급관계나 계층관계에 민감해질 수 밖에 없는 사회구조로부터 받은 트라우마가 잠재해 있는듯 싶었다. 누구나 존중받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과, 공영(共營)의 중요성을 습관으로 익힐 시간을 갖지못한 한국인들의 깊은 상처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권력지향적이거나 출세지향적인 사람들은 인간관계의 상호작용에 굉장히 민감하고, 윗 사람에 대해서는 과도한 충성심을 반복하며 자신보다 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냉혹한 평가와 대우를 서슴치 않는것 같다. 군주와 노예가 한 정신안에 머무르는것 같은 생각이 들때가 있다.

필립 짐바르도 교수(Phlip G. Zimbardo 1933 ~ )는 유명한 스탠포드 감옥실험(SPE)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내면에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선과 악이 함께 내재해 있다가 환경과 역할행동에 의해서 표면화 된다는 사실을 입증하기도 했다.

소소한 일상에서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악하거나 선하거나, 강자거나 약자거나, 가해자거나 피해자거나, 지배하거나 지배받거나에 대한 관심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가학적이지 못하면 피학적인 절망속에 자신을 던져놓은 사람들도 보았고, 상상력을 발휘하여 피학적인 절망을 깊은 한으로 승화시키거나 현실극복을 위한 에너지원으로 삼는 사람도 보았다.  

지배하는 보수와 지배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하는 진보의 대립같은 이념문제도 이런 뚜렷한 양가감정이 사회적으로 표현된 현상인듯 하다. 언젠가 어떤 종교의 사회적 비판이 심화되자, 핍박을 받아야지 다시 태어날수 있다는 해당 유명종교인의 논리를 보며 종교외부의 사회전체를 적대시해서 현실극복을 위한 에너지로 승화시키겠다는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적 감성'을 보는듯 하여 이념과 함께 종교가 한국사회의 내면성장에 좋은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한국사회가 우월감과 열등감을 속성으로 하는 경쟁의 굴레에서 방황할때 본질적으로 선량하거나 최소한 악하지도 않은 시민들을 썩은 사과로 만드는 썩은 상자역할을 하지 않는가 싶다.  

2013년 10월 6일 일요일

경쟁의 비용 / 사이먼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사이먼(Herbert Simon 1916~2001 )은 이전까지 경제학을 지배해왔던 기계적 합리성이, 경제주체인 인간이 가진 불완전한 정보, 인간의 본성이 내포하고 있는 비합리적인 충동과 비일관성에 의해서 제한받는다는 '제한적 합리성(bounded rationality)'라는 개념을 제시한적이 있다.

언젠가는 내 주변의 인적교류에 관해서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었다. 왜 어떤 사람은 만나면 기분이 안좋은지 곰곰히 생각해봤다. 그러고는 인간관계의 기본 바탕이 남과 비교하는데서 시작된 우월감과 열등감으로 가득찬 지인들과의 교류를 제한하기 시작했다. 짧은 인생인데 주변인들과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철학적인 의도가 있기도 하지만 능률성 문제를 생각해도 썩 좋은 일이 아닌것 같았다.

우선 경쟁과 비교는 협력이 필요한 인간관계를 적대적으로 만들어서 사회비용을 발생하게 하는것 같기도 하고,  마음의 여유를 빼앗아 창조적인 지적행위(知的行爲)를 방해하기도 하는것 같다.

경쟁이란 개념은 원래 인간이 합리적 사고를 한다는 가정으로 탄생한 개념이다. 상당히 '비합리적'이었던 시대를 '과학'이란 이름으로 종식시키던 시절에 탄생한 경제학과 같은 사회과학의 파라다임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가 호응을 얻은 배경도, 계량적인 비용편익분석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경제학이 탄생한 배경도 '과학적 분위기'에 힘입은 바가 있는것 같다.

그러나 사이먼이 생각하는 것처럼 인간이란 합리성을 추구하는 비합리적인 존재임을 인정할수밖에 없을것 같다. 사이먼은 수학, 심리학, 통계학, 경영학등 다방면에 정통한 통섭형 인간으로서 인간이란 현 존재 또는 인간이 추구하는 것들이 생각보다 다양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학리화(學理化)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

때로는 계량적 합리성이라는 시대정신의 문제점을 이념이나 종교같은 내면적인 관념으로 대체시킬려는 사회적 시도도 보이지만 인간을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이념이나 종교 자체의 문제가 해결 안된 면이 있는듯 하다.

모든 성인들도 말한 바 있지만 경쟁은 자기자신과 해야 되는 일인듯 싶다.

2013년 9월 30일 월요일

공동체의 가치 / 아렌트




부산에서 60대의 여성이 숨진지 5년이 되는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다. 기초수급대상도 되지 않아서 사회복지공무원 조차도 찾아갈 일이 없었으니 국가나 사회공동체의 일원들이 모두 책임을 면하지 못할 일인듯 하다.

"보이지 않는 정부가 어두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만들어낸다."는 독일의 정치학자 아렌트(Hanna Arendt 1906 - 1975)의 말처럼 정부의 관심이 닿지 않는 곳에서 스러져가는 불운한 삶이 어딘가에 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2차대전이 끝나고 나치의 유태인학살에 대한 사후처리와 전범재판이 이루어지고 있을때 세계는 나치의 만행에 대한 비난과 유태인에 대한 동정의 여론이 크게 확산되고 있었다. 그러나 유태인 출신인 아렌트는 유태인 책임론을 들고나와 수천년동안 국가를 이루지 못한 유태인들의 반성을 촉구했다.

아렌트에 따르면 유태인은 수천년동안 타국의 재정을 관리하면서 부를 축적하는 노하우를 쌓아왔는데, 결국 타민족국가의 권력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시킨 부로 인하여 유태인을 사회에 기여하지 않고 부를 탐내는 수전노로 인식되도록 했다는 것이다. 유태인들이 이런 상황을 빨리 인식하고 국가를 결성했더라면 막을 수 있는 참사를 막지 못한것이 유태인의 실수라고 말한다.

아렌트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공동체에 속하여 권리와 의무의 상호작용을 꾸준히 유지하는데 있다고 말한다.

전쟁난민, 불법취업자와 같이 정부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어두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말고도 한 국가공동체의 테두리 안에서도 참사가 일어났다는 사실은 많이 불행한 사태인듯 하다. 아직도 우리세대까지의 시민들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권리나 의무에 관한 인식,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되는 행복이나 불행에 대한 인식보다는 공동체와는 완전히 별개의 개체로서 '나만의 행복', '나만의 승리'를 탐하는것 같다.

공동체와 개인이 서로 관심을 가지는 사회는 좌파적인 사회도 아니고 전체주의나 국가주의 사회도 아님이 시민들에게 인식되어야할 것 같다.

2013년 9월 28일 토요일

한국에서 빈사상태가 된 생산자들


언젠가 공무원인 지인과 사기범죄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세상에 정당한 근로와 거리가 먼 사기가 만연해 있다는 이야기가 오고 가고 있었는데, 대화중 공무원이란 직업의 안정성이 역설적으로 사기범죄와는 거리가 먼 청정구역을 만들었다는 지인의 공무원에 대한 변론이 있었다. 실제로 한때 친했던 공무원인 지인은 나를 포함한 공무원밖의 세상을 자신의 안정된 생활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인식하는 바람에 영원히 인연이 끊어진 경우도 있었다.

공무원의 내집단화를 비평하고자 글의 서두를 이렇게 시작한것이 아니다. 실제로 공무원의 안정성은 국민 모두가 지향해야할 '이상적인 삶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생산성의 바탕이 될 수 있다는것은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문제다.

니스카넨(W.A. Niskanen)은 비지니스맨들이 수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투쟁하듯이 관료들은 월급이나 특전, 권력, 권위, 퇴직후의 조건등을 위해서 투쟁한다고 말한다. 이런 조건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관청의 예산을 확장하는 방법으로 권력을 얻어내는데, 이번 정부의 대통령도 임기 초반에 공무원의 협조를  크게 구했을 정도로 단기적인 임기의 정치지도자가 장기적인 임기를 가진 관료들을 통제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것 같다. 언젠가 러시아 황제가 "러시아는 짐이 아니라 1만명의 서기들에 의해서 다스려진다."고 말했을정도로 1차적인 생산성이 아닌 세금을 소비하는 2차적인 생산성을 가진 관료들의 힘은 막강하다.

그렇다고 정치적인 집단이 관료들의 성향과는 반대로 국민에게 이익이 되는 게임만 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을 한국의 지난 정부의 4대강정책과 같은 예산을 낭비만하고 생산성이 전혀 없는 것으로 입증된 실책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공익과 헌신이라는 정치의 본래 목적을 찾아 복지에 예산을 투입할려고 해도, 이미 정치적 비지니스에 희생된 예산은 시차를 두고 정부를 괴롭히고 있는듯 하다.

복지라는것이 수혜자인 국민의 입장에서는 무척 필요한 것이다. 삶에서 공무원과 같은 안정성을 얻어낸다는것이 개인에게는 무척 소중한것이다. 미래에 대한 확신과 희망이 일터로 나가는 아침공기를 새롭게 해줄것이기 때문이다.

결국은 예산이 필요하다. 쉽게 표현하면 돈이 중요하다. 그 돈은 쾌락적인 소비를 위해서 욕망의 노예를 만드는 타락한 돈이 아니고 건전한 생산성을 통해서 얻어낸 건강한 돈인듯하다. 정부는 어떻게든 복지예산을 만들어내어 국민들의 생활에 이바지해야할 의무가 있지만 예산을 구성하여 재정적자를 이룬들 후대의 세대까지도 건강한 돈을 만들어내야하는 시달림을 받게 될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가끔은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이 생산성이 있는 일터에서 살고있을까. 어떤 정치지도자는 국가의 예산을 재생산을 전혀 하지 못하는 곳에 투입한 일로 비난받으며 골프를 치러 다니는 장면이 목격 되기도 하였다. 골프장에 캐디도 부가가치를 생산하고, 어제는 인근 골프장에서 경비를 구한다는 생활정보지 광고도 있었다. 낮에 스타벅스에 앉아있다가 밤에 출근하는 국민도 모두 생산의 현장에 있다.

예산이 처음으로 만들어지는 곳을 한강의 근원인 황지연못을 찾아가듯이 찾아가보면 그곳엔 2차산업의 생산현장이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세계에 무역활동이 멈추었을때  무역 의존도가 높은 한국이 타격을 입는다면 생산현장에서 문제는 시작되고, 세계에 식량기근이 왔을때, 한국인이 굶는다면 한국의 농업에서 문제가 시작된다.그러나 생산자들은 무기력하다. 정치적 게임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위해서,권력이나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을 위해서,그 외 3차산업이 발달한 선진경제구조의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증권시장, 부동산중계, 법률서비스등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돈의 원천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한다.

생산현장을 둘러보면 환경의 조악함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대기업 근로환경은 좋은데 안정을 보장받지 못하고, 영원히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돈의 원천인 비정규직이 너무 많다. 대기업의 하청업체나 협력업체인 중소기업은 근로여건이 나쁘고, 국민모두의 꿈인 안정을 보장받지 못한다. 언젠가 없는 살림에 사치품을 하나 샀더니 무척 아쉬워했던 어머니의 마음처럼 이익없이 낭비된 예산이 중소기업의 근로환경이나 근로자의 복지,시설설비에 투자되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정치인들이 얼마나 있을까. 이런 생각이 이념의 문제일까. 저런 조악한 환경에서 근로를 할려니 차라리 정신을 놓고 말겠다는 사람도 많이 보았는데, 어떤 젊은이는 군대가 행복했다고 하더라.   

한국의 성장동력이 멈추고 5년째 세계15위의 경제규모로 머물고 있는 까닭은 돈강(러시아의 돈강이 아니라 돈이 흐르는 강)의 발원지에서 돈이 만들어지지 않은 시차적 결과인듯 하다.


2013년 9월 27일 금요일

허상(虛狀)을 실상(實狀)으로 / 아들러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였던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 1870 - 1937)는 어린시절 학교앞 공동묘지를 지나가는것을 매우 두려워했다. 유전적인 질병으로 구루병을 앓아서 죽을뻔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죽음의 세계랑 친근한 공동묘지가 자신에게 의미있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서 의사가 된 아들러는 자신의 기억속에 존재했던 공동묘지는 원래 없던거라는것을 알게 되었다. 아들러의 기억외에는 어느 누구도 그 공동묘지를 본 사람은 없었다.

여기서 아들러는 사실  그 자체보다도 인간의 주관적 인식이 인간의 행동에 더 큰 영향을 주고 있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가끔 신앙심이 깊은 지인들에게 풍부한 상상력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없던 일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자신의 생각속에 고착시키곤한다. 때로는 긍정적으로 작용하여 인생의 밝은 비전으로 자리잡는 경우도 있지만, 어두운 기억들이나 비현실적인 정보들과 결합하여 평범하지 않은 사건과 인격을 낳기도 하는것 같다. 고요한 기도의 시간에 자신을 돌아보는 반성과 각오대신 인내가 수반되지 않는 기대와 상상이 자리잡는다면 문제가 될 수 있겠다 싶다.

게다가 평생 받아들여야 하는 정보는, 어떤 한 종류의 일관되거나 편향된 성향을 지님으로써 다양하고 비판가능한 사고의 훈련을 방해하는 문제가 있는것 같다.

신앙심깊은 지인이 한 가지 일을 끝내지 못하고 뭐든지 될것 같은 비전만 가지고 이일 저일 방황하는 모습을 보며, 또는 어린시절 마음의 상처를 준 사람의 모습을 자신의 주변인들에게 쉽게 찾아내어 회피하는 모습을 보며,크게는 정치적인 상상력과 종교적인 상상력이 결부되는것을 보며 허상을 실상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는것을 느낀다.

요즘 대학생들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반기문 사무총장이나 법정스님이라고 한다. 흔히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비전을 가지고 폭발적으로 현실화 시킨 분들은 아닌듯 하다. 조용하고 성찰하는 분위기의 멘토를 기대하는 심리가 반영된듯 하다. 한 편으로는 이념이나 종교가 주는 상상력에 취해서 허상을 쫓아 살아오던 습관을 가진 시민들의 사고가 점점 냉철해지는것 같은 생각이 든다.

살다보면 편히 가고자 할때 더 힘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인내심과 노력이 없는 상상력은 몽환적인 비전을 준다. 될것 같은데 안 이루어진다.

아들러는 병약한 신체적 콤플렉스에 좌절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여 정신과 의사가 되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내면적인 성찰을 통해서 자신의 내면을 정신연구의 기반으로 삼았다. 그래서 그런지 아들러는 열등감을 극복하는 태도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2013년 9월 23일 월요일

북한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선택과 존엄


북한의 퍼스트레이디인 리설주의 추문에 관련된 기사가 한국언론에서 보도되자 북한정부는 최고의 '존엄'을 해한 부당성을 성토하고 나섰다. 그만큼 북한으로서는 정치지도자의 존엄이 북한체제를 지탱하는 구심점이라는 사실을 입증한 셈이 된다.

북한은 과학적 사회주의나 주체사상과 같은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선택하면서 부차적으로 정치지도자의 존엄을 부각시켜서 인민을 통제하는 구심력을 견고하게 확립해온듯 하다. 과학적 사회주의를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선택한 모든 공산국가들이 이데올로기의 정당성을 잃어버리자 무너지고 말았는데,개인적인 수명이 짧은 지도자에 대한 우상화를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선택한 북한은 아직도 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니, 북한 지도부의 입장에서는  '현명한'선택을 하였다는 판단을 할법하다.

짧은 지도자의 생물학적인 수명을 혈연적인 승계로 보완하면서 체제를 유지하는 정치적 기술은 탁월한 면이 있는데,지도자가 바뀔때마다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견고하게 다지거나 유지하는 작업에 많은 국가에너지를 소비하는 '비효율성'을 생각하면 인민을 위한 경제발전을 우선의 과제로 삼은 현 북한정부의 결의가 무색해 보인다. 

터키의 지도자 캐말파샤는 자신에게 시스템이 집중되는 구심력을 확보했지만 '터키민족의 부흥'이라는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선택을 함으로서 좀 더 영속적인 터키민중의 지지를 얻게되고, 국가와 사회에너지의 낭비를 막은 효율성이 있었던것 같다. 더구나 개인이 오랜 구심점으로 역할을 하면서 일어날수있는 '혈연적인 승계'를 피하기 위해 자식도 따로 두지 않을정도로 장기적인 판단을 하였다고 한다.

터키는 아직 중동의 강국으로서 행세하고 있고, 케말파샤에 대한 터키국민의 사랑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북한의 전 지도자였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던 '통이 큰 정치'나 '강성대국'등의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현 지도자인 김정은은 다시 생각해봐야할듯 싶다. 지도자의 영속성이 국가시스템의 영속성을 견인하는것이 아니라 국가시스템의 영속성이 지도자의 영속성을 견인하는 현실을 빨리 이해해야할 필요가 있는듯 싶다.

최고의 존엄은 통일되거나 적어도 통일에 가까운 협력에 이른 한반도 민중의 영속적인 평화가 아닌가 싶다.  

2013년 9월 21일 토요일

정치사상과 휴머니즘 / 칼 슈미트


엘리자베스 1세의 신하였던 필립 시드니(1554-1586)는 외숙부인 레지스터를 따라서 스페인과의 전쟁에 참가하고 있었다. 당시 영국은 신흥국가로서 스페인이라는 대국을 맞아서 네덜란드지방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시드니도 이 전투에 참가해서 싸우다가 다리에 중상을 입고 출혈때문에 목이말라 물을 청했다.가져온 수통의 물을 마시려고 하는데, 옆에 빈사상태로 후송되어 온 한 병사가 물끄러미 시드니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드니는 물통을 병사에게 건네주며 "그대에게 더욱 필요한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시드니의 친구인 플크 그레빌이 증언하였다.

어느 날 간디가 기차를 타다가 신발 한쪽이 벗겨진 채로 기차가 출발하였다.  간디는 나머지 한 쪽 신발을 차창 밖으로 던졌다. 동행인이 놀라서 그 이유를 묻자 간디는 "서로 나누어진 신발 한 짝은 누구에게나 쓸모가 없지요. 그렇지만 저렇게 두 짝이 되면 누구에게나 쓸모가 있게 되지요.가난한 사람이 줍는다면 더욱 좋은 일이겠지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독일의 정치학자이며 헌법학자인 칼 슈미트(Carl Schmitt 1888 ~1985)는 적과 동지를 구분하여 '우리'라는 동질성을 가진 집단의 결속력을 다져가는 방식이 민주주의라고 한다. 당시 독일은 칼 슈미트의 이론에 의거하여 반유태주의나 범 게르만주의의 동질성을 추구하면서 내부민주화를 다지게 되었다.

어쩌면 위에 예시한 시드니도 외부집단인 스페인과의 전쟁을 통해서 동료애를 발휘하는 기회를 얻게되어 자신을 희생하는 민주주의적 가치를 보여주게 되고, 간디도 훗날 영국의 식민주의에 저항하는 지도자로서 인도민족에 대한 동료애를 보여주며 민주주의적 가치를 실현했다고도 할 수 있을것 같다.

그러나 칼 슈미트는 '인간성(humanity)'이 정치의 바탕이 될 수 없는 이유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이유란 인간성이란 처단해야 할 외부의 적 즉 동지가 아닌 집단을 처단할 수 없는 논리를 제공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칼 슈미트에  따르면 시드니의 동료애가 더 큰 인류애적인 범위에서 발휘되거나 간디의 무저항 비폭력주의는 대단히 "비 정치적인 행위'로 오해 받을 수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대단히 칼 슈미트 다운 발상인듯 하다. 칼 슈미트는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휴머니즘이라는 개념과 동등한 위치에 놓음으로서 둘의 가치를 대립시켜서 민주주의 같은 정치적인 가치가 휴머니즘 같은 더욱 근본적인 가치를 압도하도록 하는 나쁜 전통을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당시 독일뿐만이 아니다. 미국에서도 냉전시대에 정치적인 적이였던 공산주의가 무너지자 911사태를 도화선으로 이슬람세계를 정치적인 적으로 여기기 시작하였는데,이면에 불의나 테러에 대한 인간적인 혐오같은 휴머니즘의 감정은 정치적인 관점에 밀려서 서서히 표면에서 자취를 감추는 문제가 생기는것 같다. 물론 한국도 예외가 아닌듯 하다. 이념적인 정치적 갈등이 민주주의란 명분으로  정치의 주된 관점으로 휴머니즘을 압도하고 있는 기간이 무척 길다는 생각이 든다.

민주주의란 가치는 휴머니즘이란 가치와 결코 동등한 위치에 놓을 수 없는 개념인듯 하다. 휴머니즘이 보다 근본적이고 포괄적인 가치로서 민주주의란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칼 슈미트를 비롯한 정치학자들이나 정치적인 인물들과 정치적인 사건들은 오랫동안 정치적인 명분을 위하여 휴머니즘을 희생시키고 있었던것 같은데, 호전적이고 불안한 상황을 겪은 현대민주주의의 고민이라고 할 수 있을것 같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지만 아담스미스가 인간은 무조건 이기적이라는 가정만 하지 않고, 휴머니스트인 인간을 가정했다면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가 발 붙일 수 있는 여지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아마 인간을 생각하는 경제이념이 탄생하여 극단이 반대편의 극단을 낳는 오류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많은 실패를 겪어야 합의점을 끌어내는 인간의 무지(無知)와 그 무지를 학문적인 포장으로 선동하는 학자들의 죄가 큰것 같다.


2013년 9월 12일 목요일

치유되지않는 사회의식 / 융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융(1875~1961)의 병원에 망상형분열증 환자가 나타났다. 이 환자는 융을 창가로 데려가서 "태양에는 페니스가 있으며, 그것이 움직임으로 인해 바람이 생긴다." 라고 말하였다. 4년이 지나서 융이 로마시대 미트라교의 기도서를 읽다가 같은 문장이 있는것을  발견하였는데, 그 남자의 교양수준이나 기도서가 출판된 년도를 생각하면 그 남자가 기도서를 읽을 확률은 없었다.

융은 위와같은 사례를 연구하면서 모든 사람들에게는 공통된 이미지나 주제를 품고있는 마음의 층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것을 보편적 무의식이라고 칭하였다.

요즘 들어와서 한국사회에서 이념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한국사회의 보편적인 무의식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육이오가 가져다 준 상처가 오랫동안 국민들의 무의식속에 자리잡은 이유도 있겠고, 지배와 피지배관계로 인한 상처가 오랫동안 국민들의 무의식속에 남아있는 까닭에 전자는 우파라는 명분으로, 후자는 좌파라는 명분으로 표출되기도 하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종교또한 경제적인 위상에 비해서 대단히 초합리적이고 비현실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과학적인 물질문명이 국민들의 의식속에 늦게 자리잡은 이유라는 생각이 든다. 종교와 관련된 면에 있어서는 신도라는 명목으로 귀신을 숭배하는 일본국민도 초합리적인 모습을 띄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이나 일본의 근대화기간이 짧은 만큼의 깊이인것 같다.

생각해보면 메시아에대한 기대는 역사적으로 한국만큼 간절한 나라가 없었던듯 한데, 과거에는 미륵신앙이라는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현대에는 이념이라는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하는 것 같다. 그 이면에는 수많은 외침과 싸우거나 계급적인 사회구조로 고통받던 민중들의 무의식이 면면히 표출된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념과 종교같은 내면적인 구속을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승화시키지 못하는 국민들에게 정부기관이나 지식인 또는 종교인들이 앞장서서 우파나 좌파의 영원한 대립, 망상적인 종교활동같은 '치유불가능한 상태'로 몰아가는 일은 없었으면 좋을것 같다.

2013년 9월 10일 화요일

동조와 복종 / 솔로몬 애쉬

가끔은 내 성격에서 경이로운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어느 자리에 있어도 그 상황과 동조를 잘하는 성향이 있다.아마 어린시절부터 안정된 가정환경을 모르고 자라서 그렇기도 하고, 성장을 해서는 개인적인 상황으로 어쩔수 없이 이일 저일을 산만하게 손을댄 습관때문인지도 모른다.

청년시절, 신자확보에 급급했던 어느 종교단체에 몇개월 앉아 있었다. 딱히 편한 시절도 아니었기에 신앙이 가져다 주는 마음의 평안함을 비롯한 여러가지 부가적인 수입을 탐하는 계산이 있었던것 같다. 그런데 몇개월동안 지극히 일체감을 가지고 종교인 이상의 신앙인으로 탈바꿈을 하는것 같았는데, 도무지 해당 종교인분의 설교 내용에는 공감이 안갔다. 초조해진 종교인분은 '순종'하라고 소리높혀 외쳤지만 순종이 안되는 상황을 낸들 어찌하냐고  함께 소리높혀 외치고나서 그만 두었다. 다음에 또 방문하니 맞지 않으면 오지 말지 왜 오냐고 또 소리높혀 외쳤다. 비용편익계산을 해보고는 시간이 많이 아까웠다.  

다른 종교, 다른 종교인과의 관계에서도 '순종'을 권유받는 일이 있었는데, 다소 어려운 환경에서 이성이 강해진탓인지 신앙과는 별개로 종교인들에게 찰떡같이 순종하는 양이 되주지 못한것에 대해서 다소 죄송스럽기도 한것 같다. 문제는 내가 아니고 많은 신자들의 공허한 눈빛인것 같았다. 평안하고 행복한 삶을 구하는 사람들,그래서 동조하고 복종하는 삶을 살면서도 구하고자 하는 삶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며 많이 안타까웠던것 같다. 한 편으로는 정신적인 권력관계를 엿본 까닭도 있는것 같다. 

이념이나 종교같은 보이지 않는 관념의  허구성에 깊이 반발하는 이유는 여러가지 과거의 경험들이 바탕이 된것 같은데, 인과의 법칙은 콩심은데 콩난다는 말처럼 진리인듯 하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인 솔로몬 애쉬(1907~1996)는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반응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타인을 따르려는 성향이 있는데,이것을 동조라고 말한다. 누군가의 의견이나 행동, 심지어는 표정, 자세,목소리까지도 따라할려는 성향이 생기는데 이를 카멜레온 효과라고 부르기도 한다. 때로는 이념이나 종교의 내부에서 유난히 결집을 요구하기도 하는데, 동조현상은 집단의 결집이 강할수록 심해지며 반발자가 생기면 급속히 와해되는 성향이 있다고 한다.

애쉬는 동조의 이유로 두 가지를 들고 있는데, 첫째는  결정을 내리기 힘든 상황에서 타인의 결정이 쉽게 참고 된다는 점이고, 두번째는 다수와 의견이 다를경우 집단으로부터 배척됨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편 사회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1933~1984)은 복종에 관한 실험을 했는데, 사람들이 자신들의 소신과 사회규범에 어긋날지라도 권위있는 인물의 명령에 복종하는 이유는 자신의 책임도 없어질뿐더러 자신의 행위에대한 결과보다는 복종관계를 더 중시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만약에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는 권위자의 합법성이나 동기에 허점이 보이거나 누군가 복종하지 않는것을 보면 복종행위는 훨씬 줄어든다고 한다.

솔로몬 애쉬와 스탠리 밀그램의 연구결과를 보면 일본의 군국주의와 독일의 홀로코스트처럼 왜 사람들이 집단으로 엄청난 비윤리적이고 비 인간적인 행위를 하게 되는지 이해를 할수 있을것 같다.  

실제로 이념과 종교는 동조와 복종을 본질로 하는것 같다. 실제로 동조와 복종을 이루고 난 다음에 목표가 변질될 경우 많은 폐해를 발생할 수 있는데,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일들이 이념과 종교같은 선량한 목적으로 탄생해서 동조와 복종을 이끌어낸 다음에 변질되어간 관념들의 부작용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고 하겠다.

주체적이고 스스로의 자아를 확립시킬 역사적 기회가 부족했거나 잘못된 교육으로 정신이 재산이나 명예,권력같은 저열한 가치에 지배를 받게된다면 동조와 복종현상이 일어나기 쉬운 바탕이 되기도 하는것같다. 정치인은 이념을 이용하고, 종교인은 신앙을 이용하여 동조와 복종을 이끌어내기도 하고  때로는 주체적이거나 반대하는 소수를 억압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거나 사회붕괴나 갈등의 수단으로 사용되는것 같다.   










2013년 9월 7일 토요일

한국에서 인적자원배분의 왜곡


80년대 한국에서 고시열풍이 불었다. 권위적인 정치환경에서 사회의 수직적차별에 민감했던 젊은 인재들이 너도 나도 고시에 뛰어들었다. 심지어 명문공대생의 많은 수가 법과목을 수강하고 고시에 뛰어들었으며 재학중에 3대고시를 합격한 어느 수재의 합격기는 그런 추세에 기름을 부었다. 어린시절 공학자가 꿈이었음에도 개인적인 상황때문에 수직적 또는 권력적 차별관계에 무척 민감했던 시절이라 2년정도 공부를 해보았다.그리고 오랫동안 그로인해 생계를 유지했는데, 직업의 사회공헌도에 대한 고려나 개인적인 적성과 관련해서 시행착오를 크게 겪었음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는 시절이었던것 같다.

90년대에는 미국에서 어려운 여건에서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얻은 어떤 공학자는 대덕연구단지에서의 열악한 환경과 열악한 처우로 공학박사학위를 얻는데 들어간 만큼의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 사법시험을 합격한 기사가 신문에 실린것을 보았다.

세월이흘러 많은 시민들이 '교양인'이되고 수직적인 사회관계가 점차 수평적인 관계로 바뀌며, 정보통신의 발달로 젊은이들의 불같은 열정을 끌어낼수 없을정도로 '고시'의 가치는 평범해진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안정된 직업인 '공무원'이란 직업에 관한 열풍이 생겨나 많은 젊은이들을 공무원시험공부에 열중하도록 만들고 있다.

아담스미스의 자유주의 경제사상,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케인즈의 큰정부주의 경제사상, 프리드먼의 신자유주의 경제사상이 경제학의 이념적 틀을 짜주면서 사회를 경제와 관련하여 이념적인 관점으로 견인했던것 처럼 고전학파와 신고전학파경제사상은 인간의 가치보다는 '생산성'과 '비용편익'의 계량적인 관점으로 견인했다.

노벨상수상자인 경제학자 베커(1930~ )는 '인적자본이론'을 내세워 시행착오를 겪는 경제학적 연구의 오류 이면에는 일을 하는 노동자인 '인간'에 대한 관심이 소홀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마르크스의 '노동자'를 위한 경제이론도 비판하고 있는데, 당위에만 그쳤지 실제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지 않은 면을 지적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도 특히 한국에서는 '노동자'의 존재가치나 처우개선을 위한 여론이 마르크스의 계급주의 경제사상에 연루되어 '좌파적인 의견'으로 왜곡되기 쉬운 문제가 있는듯 하다.

한국에서  인적자원배분이 장기적으로 왜곡되는 문제의 이면에는 다양한 직능집단이 국회에 진출하거나 또는 정당등을 구성하는 정치적 투입기능을 상실한 면이 있다는 생각이다. 대체로 법률이나 이념적인 사상학습을 받은 인문학적 인재들은 정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여론형성의 역할을 하기쉬운데 공학자나 기술인 또는 그밖에 여러 직능집단의 인재들은 정치적 센스와는 거리가 먼 인재로 취급당하는 면이 있다는 생각이다.

한국에서 '현업'과 관련된 인재들(흔히 이야기하는 노동자)들의 처우나 근무환경에 대한 요구는 '좌파'라는 누명을 쓰기 쉬운 이념적 프레임에 갇힌 정치환경이  한국의 인적자원 배분을 왜곡시키는 주범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매번 현업의 현장에서 심각한 문제를 느끼면서 살고 있지만 개선의 길은 한없이 먼 현실을 느낀다.

인적자원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기 위한 노력등이 국회를 비롯한 정치권내에서 정치인의 개인적인 이익과 연루된다면 더욱 개선의 여지가 없을듯 하다. 정치인은 한 시대의 주목받는 직업군들로 구성되어있기 때문이다. 사실 근원을 캐어보면 경제의 바탕은 '적재적소에서 일을 하는 인간'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은 진리인듯하다.   

미국의 꺼지지 않는 성장동력을 본받고자 하는 한국내의 견해는 미국의 경제가 오랫동안 탄탄하게 구축되어온 과학기술인적자원들로 지탱하고 있음을 잊은것 같다. 미국의 자유주의 경제의 모습을 말하기전에 햄버거와 콜라를 먹고 티브이를 보며 여가를 보내는 뚱뚱한 주민들의 이면에는 치열하게 노력하여 뛰어나게 성장하는 미국의 과학기술인력이 있다는 사실을 잊은듯 하다. 미국은 완전한 자유방임주의 경제라서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는것이 아니라 많은 자원과 실속있는 인적자원배분, 국방과학기술이 견인하고 있는 기술력등이 미국경제를 지켜주고 있는것 같다.  


2013년 9월 6일 금요일

도피로부터의 해방 / 에리히프롬


정신분석학자인 에리히프롬(1900~1980)은 한 사회의 경험은 특정무의식적인 내용이 의식화되는것을 사회적인 여과장치로 거르는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이런 사회적인 여과장치는 이데올로기속에 숨겨져 위험한 또는 위험하다고 여겨지는 사상에 대한 사회적인 억압이 생겨난다고 말한다. 에리히프롬은 이런 사회적인 억압을 도피하기 위한 메커니즘으로 권위주의, 파괴성, 자동화기계라는 사회심리학적 개념을 이야기 한다.

권위주의는 인간이 자아의 독립성을 포기하고 타인을 지배하거나 복종하는 관계가 되어 사회적인 고독감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한 용도로 발휘된다고 한다. 파괴성은 자신과 비교가 가능한 대상을 제거할려고 발휘되며, 개인이 자동화기계로서 역할을 하며 타인과의 갈등을 소멸시키고 고독감으로부터 보호받을려고 한다고 말한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이념적인 정치사건들을 보면서 이념을 대체시킬 정신적 해방구의 필요성이 시급하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한국에서는 권력과 권위,지배 이런 단어들이 제시하는 관점으로부터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하는것 같다. 조선왕조의 봉건적인 지배복종관계, 일제시대의 억압적인 통치, 연이은 권위주의 정부형태등으로 인해 시민의 자발적인 주체성이나 독립적인 사회정신을 함양하는 기회를 갖지 못한 탓인것 같다.

에리히프롬은 현대사회의 인간소외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랑의 기술'을 제안하며 사람들이 자신에게 '진실된 마음'을 쏟을것을 제안하고 있다. 에리히프롬이 이야기하는 사랑은 자신을 희생시키는 극단적인 형태도 아니며 자신에게 살아있는것을 전해주며 서로 관심을 가지고 이해하는 가운데 사회가 풍요로울것이라고 말한다.

한국사회는 격렬하다. 억압을 하거나 반발한다. 이기거나 진다. 동지가 되거나 적이 된다. 희생을 하거나 착취한다. 지배하거나 지배당한다.살거나 죽는다.

사실 한국의 격렬한 사회심리상태는 어떤 정신적인 도움도 받지 못했던것 같다. 억압하는 자는 격렬하게 비난받고, 맞선자는 영웅이 되며 사회정신을 이끌고 있었던것 같다. 종교는 사회정신의 부재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억압수단이 되기도 한다. 수고스럽더라도 자신이 중요하다는것을 인식하는 길만이 해방구로 나아가는 길인것 같다.

2013년 9월 4일 수요일

항상소득가설과 정부의역할


소비라는것이 저축에 비견하면 서로 희생관계에 있는 상대적인 악(惡)으로 취급받겠지만 국가경제를 종합적으로 생각하면 선(善)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듯 하다. 소비의 증대는 생산의 증대로 연결되고, 생산의 증대는 고용의 증대와 또다른 소비의 증대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일본과 같은 선진국의 경제는 국내소비가 정체되는 현상이 저성장의 주된 원인이라는것은 널리 알려져있다.결국 다국적기업과 같은 해외생산방식을 통하여 기업은 탈출구를 모색하지만 기업의 분배기능이 해외에서 이루어짐으로 해외노동자의 소득소비증대와 현지국가기업의 생산을 증대시키는데 기여하고, 자국의 경제는 공동화현상이 일어나는 문제가 있다. 자국민의 소비활동이 어느정도 보장되므로서 국부유출을 막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이 가능한것은 알려져 있다. 

경제학자 프리드먼은 항상소득가설이라는 이론을 내놓았다. 고소득계층의 경우 변동소득의 비중이 높고, 저소득 계층일수록 월급과 같은 안정소득의 비중이 높다고 한다. 때문에 고소득 계층은 절대소비액의 비중이 높지만 소비성향자체는 저소득계층보다 낮은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소비자는 예측 가능한 소득에 소비의 기준을 두기 때문이다. 즉 항상소득이 소비를 결정한다고 말한다.

프리드먼은 경제에서 정부의 역할증대는 세금을 증대시키고 민간소비를 억제함으로서 경제성장을 방해한다고 말하는데, 항상소득가설을 생각하면 국민들에게 가능한 균등하게 일정액의 소득을 보장해주는것이 경제성장에 도움이 됨을 알수 있다. 소수의 부자들의 소비가 다수의 일정소득을 가진 소비자들의 소비를 압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산층을 두텁게 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국에서는 중산층이 형성되기 어려운 원인이 정치분야에서 시작이 되는듯 하다. 좌파와 우파의 이념논리가 지배하는 한국의 정책결정구조에서는 특정 경제계급의 경제적 이익으로 여론을 몰고가는 문제가 있는듯 하다. 수렴은 없고 기득권수호나 투쟁만이 정치적 관점을 지배하는듯 하다. 한편으로는 계층이동의 가능성이 어느정도 폐쇄되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서로간의 흐름이 물흐르듯이 원활하지 못함으로서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국민에게 일정한 소득을 보장해주는 역할을 하는것이 경제를 살리기위해 노력해야할 정부의 역할이 아닌가 싶다. 많은 소득을 위한 적은 일자리의 창출보다 일정한 소득을 위한 많은 안정된 일자리의 창출등에 정부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때는 정부의 역할을 민간경제와 동일한 선상에 놓아 프리드먼의 구축효과를 작은정부를 위한 논리로 인용을 했지만 작은 정부의 문제점은 케인즈의 승수효과와는 별개의 문제로 같은 프리드먼에 의해서 주장된 항상소득가설이 보여주기도 한다. 여기서 큰 정부란 분배의 역할에 어느정도 능동적인 간섭을 하는 정부를 의미함은 물론이다.

간략하게 표현하자면 많은 국민들이 일정량의 소비를 안정적으로 하는것이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니 정부가 그 역할을 해야 된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 문제는 좌파냐 우파냐 하는 문제도 아니고 그냥 경제성장에 관한 문제일뿐이라는 의미이기도 한것같다.   

어휘풀이

변동소득/ 주식이나 부동산으로 인한 소득처럼 불안정한 소득
구축효과/ 정부의 조세수입과 투자가 민간의 소비와 투자를 밀어내는 효과
승수효과/ 정부투자가 고용과 소비와 생산을 연쇄적으로 늘리는 시너지 효과

2013년 9월 3일 화요일

후광효과의 정치


미국의 교육심리학자 에드워드 손다이크(1874~1949)는 어느 실험에서 군 지휘관들이 사병들을 평가할때 어떤 항목의 평가가 다른 항목의 평가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지나간 일이지만 정치지도자에게 몹시 큰 불만을 가졌던 적이 있다. 민간인 사찰과 관련된 문제였는데, 하필이면 개인적인 문제랑 때가 겹쳐서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할애한 문제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이면의 다른 문제가 보이기 시작했다. 대통령임기 시작부터 이미지에 커다란 손상을 입고 직무를 시작했을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미지, 과거사,정책스타일을 일치시키는 부정적인 후광효과가 의도적이든 또는 비의도적이든 정치지도자와 국민사이의 원만한 관계를 끊임없이 괴롭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이미지정치나 대중정치의 성향이 강한 국내정치의 특성상 당연히 있을수 밖에 없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확대되는 현상을 감당하기에는 좀 힘겹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신념과 목표의식이 약할때는 주변에서 압박해오는 낙인을 감당하기 힘든 경우도 있을것 같다. 반대로 이미지가 좋으면 긍정적인 낙인이 찍혀 정책수행이 훨씬 수월할수도 있고, 좋은 결과를 가져올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개인은 긍정적인 행위나 표정으로 사회적 가치를 높일수도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수가 있는데,후광효과는 누군가를 평가하는데 타당성과 신뢰성, 객관성등을 손상시키지만 감정이나 감각같은 비합리적인 요소가 개입되기 쉬운 사회적관계의 특성상 과거와 현재뿐만이 아니라 기대되는 미래의 상황들까지도 크게 영향을 끼치게 되는것 같다. 특히 정치지도자의 부정적인 이미지는 영향력의 크기를 생각해볼때 국가와 사회전체에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수도 있겠다 싶었다.

링컨대통령은 40대가 되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을 했는데, 긍정적인 후광효과는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것이 아님을 시사하고 있는듯 하다.

2013년 9월 2일 월요일

건강한 성격과 프로프리움


미국의 심리학자 고든 올포트(1897~1967)가 유명한 선배인 프로이트를 찾아갔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올포트를 환대했으면서도 올포트에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올포트는 부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먼저 깨기위해 기차안에서 만난 결벽증이 있는 소년의 이야기를 하였다. 프로이트는 조용히 듣고 있다가 올포트에게 갑자기 말하였다. "그 소년이 당신 아니요?" 올포트는 프로이트에 실망해서 신경증에 집중하는프로이트의 연구방식과는 반대되는 건강한 삶의 필요조건인 프로프리움이라는 개념에 집중하는 연구를 했다.

가끔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웰링턴장군이 항상 고민했던 "저 언덕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와 비숫한 의혹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는 경우가 있다. 한국에서 해결되지 않는 심리적 과제중의 몇가지를 곰곰히 생각해보는 가운데 인간심리의 여러 모습을 증명할수 있는 기회가 많은것 같다.

아마 프로이트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되어 형성된 관점을 가지고 타인을 바라보는 잣대로 삼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듯 하다. 프로이트의 신경증과 같은 인간의 부정적 심리에 중점을 둔 연구도 자신의 어떤 경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부정할수 없을것 같다.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반복적으로 느끼는 경험중에 하나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잣대로 타인을 평가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조금만 더 냉철하게 생각해보면 상대방이 나를 평가하는 모습으로 상대방의 내면을 알아낼 수 있는 경우도 많다.아마도 프로이트는 올포트가 결벽증을 경험해서 소년의 결벽증을 포착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듯 하다.

생각해보면 관점은 비숫한 사람들끼리만 공유하는것 같다. 그래서 '그들만의 리그'에서 심각하게 진흙탕을 튀기고 싸우는데, 외부에서는 저 사람들이 왜 저러는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불가능한적이 많은것 같다. 그렇지만 싸우는 사람들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 대한 인식이 확실하다. 때로는 자기들만 이해할수 있는 영웅도 만들어진다.  

올포트는 프로프리움에 대한 일곱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의미있는 삶을 살면서 자아감을 확장할것, 둘째, 타인과 좋은 관계를 맺을것, 셋째, 정서적으로 안정될것,네째,현실적인 판단력을 갖출것, 다섯째, 성공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할것, 여섯째,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것 마지막으로 일관성있는 삶의 철학을 가질것등이다.

소수의 개인이 건강하지 못하면 포착이 쉽고 치유도 쉽지만 집단이 건강하지 못하면 보편성으로 취급받으니 그것을 시대정신이라고 하더라

2013년 9월 1일 일요일

해결안된 믿음 / 레온 페스팅거


누군가 닭을 잡기 위해 털을 뽑았다.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닭이 벌떡 일어나 털이 뽑힌채로 숲속으로 달아났다. 결국 닭을 놓쳐버린 사람은 안타까운 심정에 중얼거렸다. "이 추운 날 털없이 도망가면 저만 춥지......"

지인중에 행동이 경망스러워 남에게 비난을 받는 이가 있었다. 누군가 직접적으로 그 문제를 이야기 하지는 않고 버럭 화를 냈던 모양이다. 그랬더니 빠르게 사고의 전환을 하면서 중얼거렸다. "지금 저 친구가 사정이 안좋아서 저렇게 화를 내는거야......"

때로는 마음의 장난으로 문제의 본질을 임기 응변적으로 회피하여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영원한 방황의 길로 빠져 드는 경우가 있는듯 하다. 해결안된 문제는 또 다시 찾아올 것이기 때문에 인생이 고난의 연속이란 말이 나오는게 아닌가 싶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1919~1989)는 '인지부조화이론'에서 사람들은 사고와 행동이 불일치하게 되면 인지부조화가 일어나 긴장을 유발하게되고, 긴장의 감소를 위하여 사고를 행동에 맞추어 나간다고 말한다. 그가 이 이론을 내놓은 배경에는 1950년대 한 사이비 종교사건이 발단이 되었다. 

한 사이비 종교교주가 자신이 신탁을 받았는데 지구 종말이 오고 신도들만 비행접시로 구출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사람들은 직장을 그만두고 모든 돈을 그 종교에 기탁을 했다. 그리고 그 소식을 전하려 애썼다. 그러나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교주는 신도들의 믿음으로 세상이 구원을 받았다고 발표를 했다. 사람들은 기뻐하며 축제를 했다.

이념과 종교에 대한 지나친 믿음은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는데 도움(?)을 주는듯 하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끊임없이 동조자를 찾아 헤멘다. 그 습관이 계속 반복되면 문제를 해결할 능력조차 없어져 버린다. 그것이 개인의 범주를 떠나서 사회나 국가의 전체적인 모습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2013년 8월 31일 토요일

롤스의 중첩적 자유주의와 이념카르텔


정치철학자인 롤스(1921~2002)는 [정치적 자유주의]란 저서에서 자유주의 사회의 다양한 신념들을 공존에 필요한 협동조건으로 수렴해내는것이 '정치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합의가 필요한데, 이러한 합의는 모든 신념들이 인정할 수 있는 '중첩적 합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회의 다양한 가치를 수렴하기 위해서는 정치는 긍정적인 역할로 사회여론을 선도해 나가야 하는데, 이념을 통한 갈등유발적 사건들을 접하면서  이념적인 정치주체는 한국 정치의 문제아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끔은 그들 주체가 암묵적으로 상대적인 이념 카르텔을 형성해서 각 주체의 영속성에 공헌하고 있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심하게는 새디스트와 매저키스트의 공생이 느껴지기도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물론 그들 이념적 정치주체는 역할을 교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때가 종종있다. 

양쪽 다 롤스가 이야기하는 '중첩적 합의'를 끌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합의를 깨는 역할을 해내고 있는데, 한국사회에서 이념을 이야기하는 모든 정치적 주체는 없어도 되는 것들에 대한 지나친 관심으로 사회를 퇴보시키는  지하정치, 또는 정치적 마피아들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것이 아닌가 하는생각이 들때가 있다.


2013년 8월 29일 목요일

애국심과 자유의 조화 / 센과 테일러


이번에 있은 국정원의 이석기의원 압수수색사건은 극과 극의 대결인것 같다. 자유의지와 애국을 중시하는 시민들에게 큰 자극을 가져다 준 사건임이 분명한듯 하다. 둘 다 양립하여야 하는 중요한 가치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이념문제가 개입하여 둘 사이를 대립적인 가치로 양분화시키는 현상이 강하다. 사실 애국을 위해서는 자유의지가 중요하고, 자유의지를 위해서는 국가가 중요한것 같다.

학창시절 애국을 신앙처럼 생각하는 동료가 있었다. 나중에 인터넷 닉네임로도 애국자라는 별명을 사용하면서 자신은 국가를 위해 힘쓰는 수호자로서 자신을 동일화시켜나갔다. 한 편으로는 약자를 해방시키고 진정한 민주주의와 자유를 얻기위해 투쟁하는 투사로서 자신을 동일화 시켜나가는 동료도 있었다. 문제는 이 양쪽이 어느 누구도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에 헌신적인 모습을 그다지 보여주지 못하고, 결국 개인적 이익과 자신들이 연대하는 집단의 이익앞에 정지해버린 모습을 보여주면서,시작과 정상부터 일그러진 한반도의 정치현실을 대변해주는 작은 아류(兒類)로 행세하고 있었다.

사실 자유의지와 애국심은 서로의 가치에 헌신하는 중요한 문제다. 캐나다의 정치철학자 테일러(1931~ )는 애국심은 애국주의적인 동일화(patriotic identification)를 통하여 시민들에게 덕과 정체성을 고양시킴으로서 구성원간을 통합시키고, 통합된 연대의 안에서 개인의 자유는 현실화된다고 보았다.

인도의 노벨상 수상자인 경제학자 센(1933~)은 발전이란 경제학적인 GNP의 성장이나 경제발전이 아닌 교육기회나 사회보장, 의료보험등의 헤택을 통해서 자아를 실현하며, 그것이 참된 자유라고 이야기한다. 센은 민주주의가 발달하면 기아가 줄어든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는데, 국민이 국가를 감시하고 견제함으로서 국가가 국민의 호감을 얻기위해 일을 더 열심히하는 결과라고 한다.

한국의 관점으로는 위 두학자의 견해가 시민의 진정한 자유라는 공통된 목표를 지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파와 좌파 이데올로기로 채색이 되어 왜곡될 수 있겠다 싶다.

북한은 선전과 통제활동으로 애국주의적 연대감을 심어줄려고 시도했지만 국민의 국가감시기능이 전무함으로써 발전의 동기를 잃어버린 대표적인 예가 될수 있는듯 하다. 한국에서도 시민의 진정한 자유라는 목표가 정치인들에 의해서 이데올로기라는 가치로 대치될려고 하는 성향이 강한데, 시대를 역행하는 현상인듯 하다.

북한의 군인사(軍人事)



지난번에 소장파인 장정남이 노장파인 김격식을 밀어내고 인민무력부장으로 승진한 이후에 리영길이 상장에서 대장으로 승진을했다. 소장파로의 대폭적인 군인사 개편은 예고된 일이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바람직한 일이기도 한것 같다. 과거로부터의 경험이 전혀 무익한, 환언하면 성공한 체제가 아닌 북한으로서는 과거의 이념적인 군수뇌부를 그대로 유지시켜서는 안될것 같다.

북한군 고위급인사는 지도자가 바뀌면 함께 교체되는 성향이 강한데, 역설적으로 보면 그만큼 북한의 지도자는 북한군수뇌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해석을 할 수 있을것 같다. 선군정치에서 군사통제권은 군부와 북한지도자의 불가분한 밀착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자연스러운 인사의 어려움도 의미하는것 같다. 자유로운 정체(政體)인 한국에 비해서 저항을 각오한 도박이기도 하기 때문에 큰 변화가 아닌 순차적인 수뇌부의 교체만해도 그 의미가 상당한것 같다.

고황장엽선생이 망명할 당시도 김일성세대인 항일 빨치산세대에서 김정일세대로 북한수뇌부의 물갈이가 진행되던 시기였는데, 1.5세대라고 할 수 있는 고 황장엽선생의 입지가 당시에 매우 불안정했던것으로 생각된다. 북한정치사상의 대부로서 역할은 했지만 입지를 지켜줄만한 파벌이나 시스템, 주민들에대한 인지도 등이 없는 처지로서는 숙청이나 망명중의 한가지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는 생각이다.

북한지도자가 군부에대해서 느끼는 위협만큼이나 인사행위도 극단적인 모습을 보일수도 있겠고, 제한된 직위에 북한지도자가 필요한 인맥을 확보하기 위해서 제로섬게임을 하지 않을수가 없는데, 폐쇄된 국가에서 지도자의 신임을 못받고 버려지는 고위급인사의 운명은 극단적일듯 하다. 이런 상황을 알고있는 구세대의 군  인사들은 연대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켜나고자 할텐데, 선군정치의 모습이나 군사적도발의 형태로 자신들의 권익을 지켜나가고자 할것 같다.

야당이나 비판세력에게 귀를 기울여야 하는 한국정부처럼 북한정부도 보수세력의 극단적인 선택에 신경을 써야하는 부담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것 같다. 개혁과 개방을 위한 노력이 일당독재체체라고 해서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님이 느껴진다.

2013년 8월 27일 화요일

불완전한 시민을 완전한 시민으로 / 스트라우스


투쟁상태에서 빠르게 화해상태로 넘어온 전 경찰청장의 변화를 보면서 이념문제의 덫에 걸려있는 한국정치인들의 '원죄'가 깊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철학자 스트라우스(1899 - 1973)는 참된 정치는 인간의 도덕적 덕을 실현하는데 있다고 보는데, 국민화합이 언급되는것을 보면서 도덕적 덕이 부분적으로 실현되는듯한 생각이 들기도한다. 도덕적인 변화가 명확히 드러난다면 부도덕한 과거도 명확해진다는 역설도 성립이 되니 문제이긴 하다. 

인간본성을 악하게 보는 사회계약론자 홉스는 악한 인간들끼리의 만인대 만인의 투쟁을 극복하기 위해서 국가가 필요하고 군주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반드시 인간은 권력의 통제하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독일의 헌법학자 칼 슈미트는 홉스가 주장하는 자연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서 적과 동지를 구분해주는것이 정치가 할 일이라고 말한다. 칼 슈미트의 권위적인 정체(政體)를 옹호하는 이론은 나찌정부의 이념적 바탕이 된 사실은 널리 알려져있다.

스트라우스는 도덕률을 중시하는 칸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도덕적인 덕을 실현하도록 노력해야하는 정치의 과제와 국가란 국민이 동화적으로 통합되어가는 과정이라는 루돌프 스멘트의 사상이 종합적으로 적용된다면 좋은 정치이념이 탄생할것 같다.

인간이나 사회의 현재상태를 정지된 개념으로 정의를 내린다는 것이 점점 바람직하지 않는 시대가 오고있는듯 하다. 정보통신이나 교통의 발달에 따라서 변화도 빨라지고, 변화를 추구하는 시대형성작용도 강력해지는듯 하다. 그만큼 정치의 끊임없이 투입되는 도덕적인 의무가 요구되는 시대인듯 하다. 올바른 길을 위한 정치인 스스로의 끊임없는 자기투쟁,국민에 대한 도덕적인 계몽으로 완전한 시민과 완전한 국가로 이끌어가는것이 정치인의 의무인듯 하다.

제대로된  정치적인 야망이 있다면 권력투쟁이나 이념투쟁의 덫을 내면으로부터 과감하게 벗어던질수 있도록 자신을 살펴봐야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타성을 깨고 변화하긴 힘들지만 진화와 발전같은 미래지향적 사고는 피할수 없는 숙명같은거라는 생각이 든다.

2013년 8월 26일 월요일

한국경제 일본경제


크게 납득이 가는 내용입니다. 일본이 문제가 없는것은 아닙니다. 기업내의 연공서열이라던가, 특유의 장인정신,관료주의나 형식주의같은 전통을 버리지못해서 창조경제를 활발히 못이루는 문제가 있습니다.게다가 저출산 고령화문제는 일본경제의 성장동력을 늦추고 있습니다. 자연재해도 일본을 괴롭히는 문제중의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인적자원밖에 없는 나라로서 총체적 위기극복능력은 세계최고입니다. 일본의 뿌리깊은 전체주의적인 성향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의 국가정책이 사익(私益)보다 공익(共益)우선의 정책을 펴게만듭니다. 일본인들은 정부를 주군(主君)으로 모시고, 정부는 국민을 주군으로 모십니다. 한국에 비해서 공리적(共利的) 사고가 바탕이된 경제정책은 위기대응방법을 유기적으로 연계시켜줍니다. 좌파우파논리로 나뉘어서 경제정책이 시도되거나 사익이 우선하여 스스로 맞물려가는 미국식 경제스타일을 가진 한국이랑은 많이 다릅니다.

미국은 풍부한 자원과 발달된 과학기술, 축적되어 온 인적투자로 인해서 완전한 자유방임에 가까운 경제임에도 경제는 살아있습니다. 특히 국방과학기술이 경제를 끄는 견인차역할을 합니다. 미국의 강한 국력은 세계도처에서 국방과학기술이 발휘될수 있는 자유로운 여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과는 많이 다른 경제기반을 가지고 있으면서 한국은 미국식 경제정책을 따릅니다. 미국유학파가 한국의 경제정책을 담당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한국은 인적자원만 있으면서도 그 인적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과거에 고시공부나 지금 공무원시험에 매달리는 노동인력의 실상만봐도 답이 나옵니다. 다른 필요한 부분에 인적자원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방법에 실패한 모습입니다. 한국의 인적자원 배분방식은 사익을 대단히 존중하는(?)성향이 있거나 완전한 자유방임에 맡기고 있는 모습입니다.

한국의 경제정책이나 교육정책등은 유기적으로 연계가 되지 않습니다. 좌파우파논리의 장벽, 포퓰리즘적인 정치, 헌신적이지 못한 정치윤리등이 문제입니다. 한국은 극단에 끌려다닙니다. 공리를 생각하면 좌파나 전체주의라고 인식합니다.
한국의 경제정책은 배제해야될것이 많은 '틀'안에서 이루어지기때문에 유기적인 연계성을 잃어버립니다. 저출산고령화문제는 한국이 일본보다 더 심합니다. 공무원말고는 안정된직장이 없습니다.한국인은 불안정한 삶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사실 일본은 강합니다.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일본에 뒤지기 시작하는것을 보면서 강한 일본과 약한 한국의 현실을 느꼈습니다. 일본에게 배울것이 많습니다. 공리(共利) 적 국가운영방식은 일본뿐만 아니라 핀란드같은 북유럽국가들도 크게 성공한 방식입니다. 한국의 정책프레임은 재검토되어야 합니다.  

2013년 8월 25일 일요일

정치와 종교가 의사소통의 합리성을 깨다


학창시절 이념으로 인한 냉전이 가져다준 비극적인 인간관계를 체험한 적이 있었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적색분자로 몰아 고발한 모양이었다. 뜬금없이 가택수색을 당한적이 있었고, 운동권 친구들에게는 백색분자로 오해를 받았다. 개인적인 문제로 이념에 대해 원한관계가 깊게 설정된 바탕위에 이념이 국론을 분열시키는 작용을 한 몸으로 다 받아서 체험한듯 하다. 

참으로 많은 시간들을 긴장하면서 살아온듯 한데, 한 편으로는 내면적인 성장을 일구어준 소중한 시간이기도 한것 같다. 그 이후로 죽 종교나 정치에 대한 시선이 냉정해지는 느낌이 들었는데, 정치와 종교가 대의적인 명분을 도구삼아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려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문제가 인식이 되기도 한것 같다.

이념이나 교리같은 눈에 보이지 않아서 검증할 수 없는 문제를 도구삼아서 시민들이나 교인들을 지배하는 구조가 눈에 들어온것도 험한 경험의 덕인듯 하다.

독일의 사회철학자 하버마스(1929~   )는 일상적인 생활세계에서 폭력과 강제에 빠지지않는 타당한 합의를 목표로한 의사소통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의사소통의 합리성이 추구하는 진리는 주관과 객관의 이원론에 기반을 두지말고 상호이해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사회체계나 국가체계를 믿고 의지하며 열심히 살아갈려는 시민들에게 편향적인 의사소통, 말하자면 자신의 것은 들어내보이지 않으면서 주욱 관찰자로서 작용을 하면서 에너지를 섭취하는 기생적인 존재가 이념적인 정치나 종교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많다.

내가 세금을 내면서, 아니면 십일조를 내면서 그 힘으로 나를 관찰하고 지배하는 여력을 만들어준다는 불공평한 상황은 알면 참기힘든 일이기도 한것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그런 불공평함에 익숙한 시민들은 타성을 벗어나지 못하는듯 하다. 어떻게 보면 대단히 한국적인 상황이기도 한데, 장기적으로 국력신장에 큰 족쇄가 될것 같은 생각이 든다.

2013년 8월 24일 토요일

이념과 정치적 준지대(quasi-rent)


"많은 실패를 겪더라도 최고의 자리를 바라보라" 역경을 이기고 미국의 대통령이된 링컨의 말이다. 가끔 사회의 여러분야에서 그 세계로의 진입장벽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것 같다. 정보통신의 발달로 많이 해소가 되어가는 느낌이지만 구세대의 감각은 '우리세계'의 의미가 생각보다 중요한것임을 느끼게한다.

언젠가 새로운 정치돌풍을 일으킨 국회의원이 갑자기 대통령후보로 거론되자 정치세계에 익숙하지 않음을 비평하는 기존 정치인의 비평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애매모호한 정체성을 비평하는 기존 정치인의 비평이 또 있었다.

모든 일에서도 그렇지만 정치적인 목표가 이타적이고 공리적이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그냥 익숙해지는 일중의 하나로 자리잡는듯 한데, "누가 되던지 되고나면 다 똑같다."는 정치에 부정적 관점을 가진 대부분의 시민들의 표현이 어쩌면 순리인듯 하다.

경제행위에서 어떤 이익집단이 새로운 구성원의 진입을 막음으로써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성향이 있는데, 이것을 경제학자 마샬은 '준지대'라고 표현하였다. 생각해보면 정치세계에서도 이런 준지대가 존재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변호사나 의사의 숫자제한등의 준지대행위는 직능집단의 의회진출이나 경제적로비등이 수단이 되지만 한국정치세계에서 준지대의 수단이 되는것은 '이념적 정체성'인듯 하다. 가장 포괄적이고 국민생활의 가장 정점에 있는것이 정치분야인 만큼, 변하지 않는 세계를 만들기 위한 이념의 장벽은 극히 장대한 넘사벽인것 같다.

그렇다고 준지대의 피해자인듯한 정치신예가 옳고 바르다는 검증을 하기 힘든 문제도 정치적 준지대를 막을수 없는 원인이 되는듯 하다. 앞서 링컨의 한마디를 소개했는데 노예해방이라는 초유의 업적을 이루었지만 최고의 자리에 연연한 모습에서 '덜 이타적인'목표에서 발생하는 링컨의 인간적 고뇌를 이해할 수 있을것 같다.  

살아있는 생물체와 같은 정치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역시 살아있는 생물체와 같이 이타적이고 공리적인 목표의 계속적인 내면적투입이 있어야 할것 같은데, 쉽지않은 일인듯 하다.싱가포르의 국부(國父)인 리콴유처럼 처음부터 이념적인 바탕이 없는곳에서 시작하기는 쉬우나 이념적 준지대가 이미 형성되어있는 한국에서는 이념적 정체성이 없는 정치인의 여정이 많이 힘들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2013년 8월 23일 금요일

주체적시민과 계급이데올로기 / 그람시


몇일전 우체국직원의 민원처리태도에 대해서 아쉬운점이 있어서 국민신문고에 의견을 넣었다. 해당 직원개인을 겨냥한것이 아니고, 다른 금융기관과 비교되고 경쟁관계에 있는 우체국의 입지와 공공기관의 특징이 연루된 사안이었다. 몇개월전 진짜권총을 팔겠다는 제안이 와서 경찰청에 제보한 이후 국민신문고에 의견을 제시한것은 두번째인데 그다지 활력있는 제보활동을 하지 않는 조용한 소시민으로서 사는것 같다.

그런데 신문고에 올린 글을 다시 읽어보고 해당기관장분의 정성이 담긴 사죄의 전화를 받고 나서는  주체적인 소시민의 의견이 아닌 공공기관의 입지전체를 연루시키는 의견으로 확대될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좀 미안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이탈리아의 혁명적 좌파 정치가였던 그람시( 1891 ~1937)가 이야기한 '대항이데올로기를 만들어서 노동자들의 집단의식을 일깨우는 유기적 지식인'에 관한 이론이 생각이 났다.

쉽게 표현하면 공공기관과 시민의 관계가 정당한 서비스를 받을 권리관계를 넘어서 갑을의 지배관계로 비화되는 일이 일어난것 같았다.

그람시는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지 지식인 활동을 수행한다고 한다. 그런 활동에는 두가지 유형이 있는데, 첫번째는 예술가나 철학자, 또는 성직자처럼 도덕적이거나 이상주의적인 이데올리기를 따르므로서 편을 가르는 시류(時流)에 휩쓸리지 않는 방식으로 안온(安穩)함을 구하는 방식이 있고,두번째로는 한 시대의 헤게모니를 잡고있는 자본가들에 맞서는 대항마로서 노동자들을 결집시키기위해 '정당'을 만들어내는 지식인의 형태가 있다고 한다.

정보통신이 발달하고 교육수준이 높은 요즘시대는 그람시의 두번째유형의 지식인들이 의미가 없는것 같다. 마르크스의 계급적인 시민분류방식보다는 베버의 계층적인 시민분류방식이 훨씬 어울리는 시대가 도래한지 오래된것 같다. 예를들면 자본가이면서 교육수준이 낮은 시민과 노동자이면서 교육수준이 높은 시민이 공존하며, 어떤 계층을 싸잡아서 비판하다가도 가족이나 친구중의 누군가가 비판대상에 포함되어있다는 생각이 들어 슬그머니 억양이 낮아지는 시대인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는 여전히 좌파와 우파, 지배와 피지배라는 양면적인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같은데, 북한이라는 존재와 지식인들의 정치적인 욕망들이 어우러져 발생한 특이한 상황인것 같다. 사실 시민들의 현실과 기대는 훨씬 다양하지만 정치시스템을 통해서 산출물로 전환되어 나올때는 좌파와 우파라는 색깔로 이분화되어 나오는 고질적인 병폐가 보이는것 같다.

나는 왜 우체국에 민원을 제기했을까. 시민의 한사람으로서 친절한 도움을 받고자했지 민원인의 편에서 공공기관이라는 거대조직에 대항하는 장렬한 시민은 아닌듯 하다. 어떤 국가기관은 호국의 사명감을 띄고서 국민의 절반을 좌파로 매도하고, 시민은 각자의 권리를 행사하기위해서 촛불을 들고, 시위는 야당에 의해서 정치적인 색이 입혀지는 악순환을 보면 선량하고 다양한 민주시민의 요구라도 정치적인 활동에 의해서 정책수요가 왜곡되어버리는 현상이 있는것 같다.    


2013년 8월 19일 월요일

북한의 과학기술과 집중의 묘(妙)


우리는 최신과학기술을 자체로 연구개발하는 사업과 대외적교유를 통하려 받아들이는 사업을 주체적립장에서 우리의 실정에 맞게 유기적으로 잘 배합하여 나라의 과학기술을 발전시켜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시대와 혁명의 요구에 맞게 우리의 과학기술을 가장빨리 발전시키는 길입니다.
당의 과학기술중시로선을 관철하는데서 나서는 중요한 문제의 하나는 과학기술과 생산을 밀착시키는 것입니다. 현시대에서는 과학기술이자 생산이고 생산이자 과학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회경제생활에서 과학기술의 역할이 비상히 높아짐에 따라 과학기술과 생산이 밀착되고 일체화되는 것이 현대과학기술발전의 세계적 추세입니다.

- 조선노동당 출판사간[당의 과학기술중시로선을 철저히 관철할데 대하여] -

2003년도에 북한 노동당에서 출간한 책의 내용이라고 한다. 과학적사회주의와 주체사상이라는 이념의 실패,감성적이던 지도자의 성향등이 종합적인 원인이 되어 '고난의 행군'이라는 참담한 시절을 겪은 북한에서 정책방향의 오류를 크게 깨닫고 내놓은 책인듯 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과학기술 발전'을 유훈으로도 남겼다고 하는데,그동안 북한에서 만연했던 상징적이고 선전적인 정책방향이 정반대로 수정이 된듯하다. 미사일이나 인공위성발사에 성공한 결과를 생각하면 외부의 입장에서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북한으로서는 결과와 정책의지가 과학발전에 서로 상승동기를 주고  있을듯하다.

미국의 경제학자 솔로우(1924- )는 기술지식이 노동의 생산성을 높여서 경제를 성장시킨다고 말한다. 부존자원이 없으면서 경제성장을 이룬 일본이나 한국, 튼튼한 기초과학으로 유럽의 경제를 견인하고 있는 독일, 미국의 생산성등을 생각하면 과학기술은 국가존립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고, 다른 분야는 부차적인 문제라는 정의가 나올법도 한것 같다.


북한이 인공위성을 발사할 당시 한국도 러시아 기술의 도움을 받아 나로호를 발사했지만, 실패를 함으로써 다른 분야에서 한국이 월등한 현실과는 달리 인공위성발사가 보여주는 상징적인 의미때문에 한국의 과학기술과 비교하여 북한의 과학기술은 체제선전의 근거로 많이 이용된듯 하다.


사실 과학기술지식에 힘입은 생산력의 증대가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북한뿐만 아니고 한국까지도 정책결정자들이나 정책결정논의의 장에서도 이념문제같은 관념적이고 부차적인 문제들이 압도하고 있었던것 같다.


북한은 인공위성이나 미사일분야에 집중적으로 제한된 인적물적자원을 투입해서 목적하는 성과를 얻은듯 한데,한국은 잠시나마 많은 자원들을 비합리적인 정책의지로 낭비한 '사건'들을 보면서 '과학기술발전을 통한 생산성증대'라는 정책목표가 좀 더 선명해져야 할것 같은 생각이 든다. 


북한의 미사일이나 일본의 후쿠시마원자로등은 과학기술의 부정적인 가치를 선동하고 있지만 순환에너지의 사용기술이나 기존자원을 대체할 수 있는 기술의 개발등 대부분이 긍정적인 가치이고, 무엇보다도  한국은 일본처럼 과학기술지식없이 존재조차 할수없는 '태생적인 불리함'을 타고난 국가인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