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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27일 목요일

국민을 어지럽히는 패러독스


굉장히 이념적 성격을 띄는 동료가 있었다. 학창시절 내내 고요한 내가슴에 말벌처럼 날아와 쏘고 가곤해서 감정적으로 그 동료의 반대적인 성향을 띄고 싶었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생각해보건데 그 동료에게는 논리도 없고, 이성도 없었던것 같다. 오직 적개심만이 있었고, 가끔 자신의 감정을 반대편의 책임으로 뒤집어 씌우는 투사(projection)현상까지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동료가 요즘 많이 힘들다. 적어도 상대가 옳다는 것은 알길이 없는데, 자신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자신의 내면을 굳건히 지켜왔던 믿음이 파괴되는 아픔을 느끼고 있는것 같았다.

미국의 인류학자 베이트슨은 '이중구속 이론'이라는 것을 내놓았다. 부모가 자식에게 "너는 이제 어린애가 아니니까 스스로 해라."라는 말과 "너는 아직 어려서 안되."라는 상반된 구속성을 지닌 명령이 아이에게 혼란을 준다고 한다. 이것이 나중에는 정신분열의 원인이 된다고 한다.

성장과정에서 정의, 민주주의, 도덕,심지어는 이념이나 종교등의 가르침을 가치관으로 정착시킨 국민이 성인이 되어 현실과 부딪히면서 느낀 세상의 진면모(眞面貌)는 좀 충격적임을 부정할 수 없는것 같다. 사람들은 누구나 '세상'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자신의 어려움을 토로하곤 한다. 그러나 자신이 그 '세상'을 형성해 나가는 주체임을 인지하지 못한다. 아직도 국민들 마음속에는 자신들이 제대로된 민주주의 국가의 구성원이라는 개념이 자리를 잡은것 같지 않다.

언젠가 내자신에게도 아주 신뢰성없는 일들이 일어나곤 했다. 기분이 나빴다는 것 보다도 대응방법에 있어서 골머리를 앓았는데, 정치집단, 정보기관, 종교등등 너무 많은 불신의요소들에 대해서 대응을 한다는 것은 적어도 '나'를 힘들게 만들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일일이 신경을 쓸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많은 국민들이 '헷갈림'을 경험하고 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다. 더불어 그 시간이 별로 생산적이지 못할 것이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는것 같다.

이상과 현실이 접목될 수 있는 사회, 신뢰성 있는 사회는 발전과 번영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2013년 6월 25일 화요일

국가빈곤의 시작과 빈부격차


어느 날 큰 부자로 성장한 친구가 동창회 회식자리에서 부러워하는 친구들에게 한 마디했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밥 세끼 먹기는 마찬가지 아니야?"  

한국의 스마트폰 사용률이 월등히 세계 최고라고 한다. 스마트폰 제조 회사에서 국내수요의 확장을 통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는 전략이 성공한것 같다.  

1953년 미국의 경제학자 넉시는 [Problems of Capital Formation in Underderdeveloped / 저개발국가에서의 자본형성의 제문제]라는 저서에서 후진국과 선진국의 경제격차가 더 벌어질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후진국은 소득의 대부분을 소비를 위해서 사용하고, 저축을 하지 않아 투자할 자본형성이 되지 않는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다.

한국도 경제성장의 초기부터 저축을 강조해오고 있었는데 일본과 같이 경제성장이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르면 소비확대를 통한 내수시장의 활성화를 위해서 저축보다 소비를 강조해야 하는 상황까지 온다.그러나 생각보다 소비가 증가하지 않아 경제정책가들은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일찍 경제성장이 멈추기 시작하는 한국은 저축이 안되어 투자할 재원 확보도 어려워지고, 소비도 줄어 내수시장이 위축되는 두 가지 문제를 모두 안고 있지 않나 하는생각이다. 5000만이 넘는 인구를 가진 국가의 내수시장도 무시할 수 없는 규모라는 생각이다.    

어느 정도 성장이 이루어진 자본주의 국가에 있어서 내수시장의 활성화를 통한 경제성장의 가능성은 부자들에게서 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찾아야 할 것 같다.  가난한 사람들은 구매능력이 없다는 편견은 외국의 여러 회사들이 선진국에서 소비될듯한 상품을 후진국에서 소비되도록 시장을 개척해 나감으로써 부정된 사례가 많다.

가난한 국가나 가난한 시민들의 현실적인 소비이전에 그들의 경제적인 욕구를 인정해야 할듯 하다. 북한에서 선전 이슈로 내세웠던 "이밥에 고기국"이나 과거 한국 새마을 운동 노래속의 "잘 살아 보세"라는 구절 속에는 부에 대한 가난한 자들의 변함없는 욕망을 보여주고 있다.

욕망이 소비를 창출하고, 소비가 생산을 창출하는 원리를 생각하면 가난한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우파적 경제정책이나 욕망을 무시하는 좌파적인 경제정책은 모두 거론하기조차 무의미하다는 생각이든다.  

2013년 6월 21일 금요일

스펙과 레몬시장

언젠가 중고차를 구입하는데, 타이어도 짝짝이고, 한 두군데 긁힌 흔적이 있는 차가 구석에서 천대를 받고 있었다. 딜러에게 가격을 물었더니 팔릴 가능성이 없었던것 처럼 사장에게 물어보고 온단다. 열쇠를 달라고 해서 시동을 켜보니 엔진소리가 참 좋았다. 헐값에 사서 고장없이 10년을 타고 다녔는데 기름값만 썼다고 칭찬들을 하였다.

꽤 큰 회사에서 간부로 일하던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회사가 부도가 나서 쉬고 있는 중인데  자격증을 공부해볼려고 학원을 다니고 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듣고보니 허울만 좋지  제2인생의 서막을 여는데 전혀 도움이 되는 자격증같지가 않아 만류했는데, 자격증을 준비하는 학원동료들과 상호간에 자기최면을 지원하면서 끝까지 매달려 쓸모없는 자격증을 쟁취하고 말았다.

미국의 경제학자 에컬로프는 1970년 '레몬시장'이라는 논문에서 '정보의 비대칭 이론'을 내놓았다. 미국에서는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엉망인 중고차를 '레몬'이라고 비유한다. 중고차를 파는 사람은 중고차의 성능을 잘 알지만 사는 사람은 잘 알지 못하는 '정보의 비대칭성'이 존재를 한다. 좋은 중고차 가격이 200만원이고 나쁜 중고차 가격이 100만원이라면 이 시장에서 중고차의 평가액은 절충가격인 150만원으로 형성될 것이다. 파는 사람은 좋은중고차를 팔면 200만원짜리를 150만원에 팔아야 하기 때문에 50만원을 손해보게 된다. 때문에 중고차 시장에서는 나쁜 중고차인 '레몬'만 나오게 되는 '중고차의 그래샴의 법칙'이 형성된다.

사람도 마찬가지인것 같다. 사교육이나 어학연수, 정작 필요없는 스펙을 확보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들여놓고 보니 정작 '내 스펙 갈곳을 잃어'버린 젊은이들이 사회의 문제가 되고 있다. 6년전 대선전에 특정후보를 찬양하던 친구의 말이 생각난다. "저 후보가 경제를 살릴거야. 봐 스펙만 봐도 경제통이잖아."

시간이 흘러서 레몬의 껍질이 벗겨져서 신맛,쓴맛을 다 보게 되었는데 지나간 시간을 되 돌릴 수 없는게 문제다.  

2013년 6월 19일 수요일

감성대국에서의 신뢰감


사람은 남에게 속기보다는 자기가 생각한 감정에 스스로 속고 있다. "남이 나를 이러이러하게 생각하겠지!" 이와 같은 판단을 혼자 하지 말라. 상상을 버려라. 그렇지 않으면 악을 버릴 수 없다. 

- 독일작가 초케 -

창조적인 발전은 많은 상상력을 필요로 하지만 때로는 상상력의 세계가 어둠의 세계가 되는 경우가 많은것 같다. 넓게는 이념이나 종교의 세계, 좁게는 정보기관등의 내밀(內密)한 세계와 부딫히면서 많은 사람들이 상상력을 통한 자신의 감정에 속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더욱 나쁜 것은 그런 사람들의 심리를 조장하고 이용하여 어둠의 세계를 구축(構築)해나가는 괴이한 성질의 존재들인데, 이미 만연한 전염병처럼 느리게 한국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과학적 논리나 이성과는 거리가 먼 지난 정부의 성격이나 정책형성의 모습을 느끼면서, 한국사회와 오천만분의 일의 구성원인 내 자신의 모습에 위기감을 느낀적이 많았던것 같다. 스스로에 대한 신뢰감을 회복하기 위해 스포츠에 열중하면서 그냥 그렇게 불신의 사회에서 부유해가는, 불행하거나 행복한 국민들중 특히 행복한 국민들의 미래는 언제까지 보장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였다.

그래도 그런 문제를 인지(認知)하고 교정을 요구하는 국민들이 희망이고 위안인듯 하다. 

신뢰감 없는 사회는 국민의 에너지를 분산시킨다. 필요한 일을 해야할 시기에 불필요한 문제에 에너지를 쏟도록 만든다. 그런 어두운 문제를 창조(?)했던 정치지도자와  정보기관은 한국전체의 입장에서는 고도의 적성세력(敵性勢力)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다. 분열된 사회를 긍정적으로 통합해야하는 무거운 과제를 지닌 정치지도자와 권력기관이기에 더욱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장기적인 국력상실을 막기 위해서 현 정부가  문제해결에 힘써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여야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사회존립의 문제로 봐야 할 것 같다.  

2013년 6월 14일 금요일

경로의존성에 갇힌 정치


휘발유 자동차에 익숙한 사회가 전기자동차등의 새로운 연료를 사용하는 자동차연구에 태만한 것처럼, 습관과 관성의 법칙에 따라 경제가 비효율적으로 움직이는 현상이다. 1985년스탠포드 대학의 경제학자 폴 데이비드가 만든 개념이다. 경제에서는 경로의존성이 혁신이나 창조성을 가두어두는 구태(舊態)의 악(惡)으로 입증된지 오래인듯 하다.

가끔 나이가 들어가는 친구들과 대화를 하다가 10분을 못 넘기고 마음을 끓이는 경우가 많다. 몸과 마음이 지나간 시간에 얽매여 진부하게 갇혀버린 모습을 자주 보는데, 꿈이 없는 세상에 갇혀서 시대가 지나간 가치들을 반복하여 주장하는 친구들을 볼때면 위태위태한 내 자신의 방어를 위해서도 대화를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사실 나이 들어서 웬만한 정신에너지를 갖추지 않으면 과거의 습관이나 기억을 탈피해서 새로운 생각을 갖기란 쉽지 않은것 같다. 술취한 사람이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제다. 편리와 안락을 구하는 인간의 본성상 개인적으로 경로의존성의 덫에 걸리는 일은 이상할게 없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경제분야와 정치분야를 망라한 사회의 모든 분야가 경로의존성에 구속되는 일은 심각하게 고려해봐야 하는 문제인것 같다.

반복학습을 통하여 관료사회에 입성한 사람들이 경로의존성의 덫에 걸리기 쉽고, 이념적인 사고의 틀속에서 정책의제를 탐구하는 정치인이 경로의존성의 울타리에 갇히기 쉬운 것 같은데, 자신을 자주 돌아봐야 할 필요성을 주기도 한다. 경로의존성에 매우 친화적인 북한정치는 말할 것도 없고, 덩달아서 북한정부의 의지에 대칭적으로 말려들어가는 한국정치의 경로의존성도 미래없는 세상으로 만들기에는 부족함이 없는듯 하다.

2013년 6월 13일 목요일

늙어감(老化)


작지 않은 나이인데 운동장에 머물다가,옳지 않은 일에 분노하다가 하는 내가 청년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자연스럽지 못하고 '패기'를 의도적으로 끌어내야 하는 시간이 오고 있지 않나 하는 두려움이 들때가 있다. 물론 나이가 들면 시야가 깊어지고, 삶에 순응하며, 타협도 곧잘 하게되는 수순을 밟는다는 것도 이해간다.

불우한 가정환경 때문에 부실한 군인이었던 적이 있었다. 추운 겨울 막사를 신축하느라 천막에서 생활하는 병사들이 페치카에 기름도 제대로 못때고 떨고 있었다. 알고 보니 피엑스차에 기름이 가득 담긴 기름통이 잔뜩 실려서 부지런히 반출되고 있었다. 어느날 간부 한 사람이 그 일에 협조를 구했다. 작대기 하나를 달고서 일언지하에 거절했는데, 이유인즉슨 상사의 불법적인 명령을 따르는 것은 지배와 복종관계라도 위법성이 조각되지 않는다는 형법이론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용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던 것 같다. 간부는 두말없이 명령을 철회하였는데 뜻밖에 대범한 사람이어서 더욱 잘 대해주었던 것 같다.

사실은 많이 걱정했지만 많은 가능성이 있는 젊음이 야비한 늙음에 복종해야할 이유가 있겠느냐 하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은 비리로 마련한 돈으로 사단장승진을 위한 비용으로 쓴다는 대대장에 대한 소문을 조롱하는 패기도 갖게 했던 것 같다.   

젊음이라는 것이 현실보다는 이상에 복종을 했을때 값어치가 있으며, 세월이 흘러서 진정 평온한 휴식의 수확을 거두어주는 단비가 될거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는 적이 많다. 지금 타협을 하게 되면 죽는날까지 타협을 하느라고 머리를 써야 하는 고민에 시달릴거라는 생각을 한다.

가끔 정보기관이나 검찰같은 권력기관의 소장파구성원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아갈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부심과 명예를 생각하며 발을 들여놓은 곳에서 수뇌부의 부정한 명령을 받아야 한다면 어떤 방법으로 처신을 할까.하는 생각이 든다.

동물의 경우에는 그 개체적 행복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활동은 생활을 파멸로 이끌어간다. 그러나 인간은 그와 아주 정 반대다. 개인적인 행복을 유일한 목적으로 하는 활동은 그의 생활을 마침내 파멸케 하고야 말 것이다. 

- 레오 톨스토이 -

세월이 흘러 몸은 가져가도 제발 마음을 가져가진 마소서 !
가끔 기도하곤 한다.


2013년 6월 12일 수요일

앙가주망(engagement)/사르트르


'앙가주망'이란 단어 속에는 원래 계약, 서약, 구속의 의미가 담겨있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이 단어 속에 사회참여, 정치참여라는 의미를 더 부여하고 있다. 어떤 단어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는 배경에는 그 시대의 고민이 담겨있는 경우가 많다. 자본주의 사상의 문제점이 제국주의나 군국주의적 패권주의로 반동적 결과를 가져온 시대에 나치의 지배를 받았던 프랑스의 고민을 사르트르가 부여한 '앙가주망'의 현실참여적 의미로 파악할 수도 있겠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사전에 본질이 결정되지 않은 자유로운 존재라고 하는데, 이러한 자유에는 선택의 책임이 따른다는 우리가 자유에 대해 흔히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때로는 수동적인 책임론을 넘어서 이상적인 사회변혁을 위해서 주어진 자유를 사용해야 한다는 능동적 책임론까지 이야기 함으로써 자본주의가 고민이었던 그 당시에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하는 의미까지 내포되어 있었다.

개인이나 사회가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새로운 문제를 파악하며 개선할려는 욕구는 당연한 것이고, 그러한 개선의 욕구는 자유를 가진 인간의 소명과 같은 거라는 의미가 '앙가주망'이란 단어 속에 담겨있는 것 같다.

이념이나 종교라는 두 관념적 단어가 한국인들에게 주는 복잡하고 불쾌한 경험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이념이나 종교가 나쁜 의도로 탄생하거나 전파된 것이 아닐수도 있다는 전제는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야 포섭된 개인이나 사회의 '의도'를 정의롭게 설명할 수가 있는것 같다.

문제는 이념이나 종교에 구속받는 동안 서서히 잃어버리고 있던 개인이나 사회의 책임감인것 같다. 개인과 사회는 편리(便利)를 위해서 받아들인것에 구속되어 버리는 악순환을 경험하는게 일반적이다. 모피와 털을 얻기 위해서 들여온 뉴트리아가 생태계의 문제거리로 떠오르는 것처럼 끊임없이 비판과 개선을 투입하지 않으면 매피스트가 부여한 '파우스트의 젊음'이 되어버린다.

개인적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생각을 강요하거나 설득을 할려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소극적으로 '문제점의 방어' 역할만 할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이유는 각자의 자유를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각자 책임질 수 있는 능력도 키워져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린아이와 같은 한국민'이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이념이나 종교의 그늘에서 비판하고 개선할려는 습관없이 쉬고 있다가, 퍼뜩 새벽별처럼 자아를 깨닫고는 폭발해 버리는 '격정의 습관'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책임감을 느끼도록 훈련되지 않은 결과인듯 하다.

 

2013년 6월 11일 화요일

다른 나라 사격선수


다른 나라로 이민가서  올림픽에 참가하고 싶은 생각을 하며 새벽마다 사격훈련과 스케이트균형훈련, 호흡을 위한 잠수훈련을 한지 5년의 시간이 지났다. 남에게 보여줄 수 있는 스케이트실력만 출중해졌다.

아무것도 해 놓은 건 없지만 잠수용접 배울려고 하다가 직업학교에서 퇴짜 맞고(경쟁률이 높고,특수부대등 쟁쟁한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으니 오지도 말란다.), 비행기 조종 배울려고 고민 하면서 정신을 한가지씩 탈옥시키는 기쁨을 느끼기도 하였다.

특히 지난 정부 5년동안 이상한 일을 보면서 불끈 거릴것 같았지만, 생각하고, 댓거리 하면서 길들여져 간것 같다. 그러면서 한국인들의 마음이 이해되어 가기도 했다.  그렇게 길들여져 가는 것같다. 미워하면서 닮는다고 하는데 비난을 하는것 조차도 정신이 붙들려 있는 형국이다.

몸은 이 곳에 있어도 타국인의 눈을 가지면 더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애국자가 아니라고 비난할 일은 아닌것 같다. 천박하게 들끓는 열기보다 느긋하고 여유로운 냉철함이 도움이 되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이해해야 할 것 같다.  


2013년 6월 9일 일요일

주자와 현미밥


요즘에는 현미밥이 건강에 좋다고 많이들 찾는다. 하지만 옥같은 흰쌀로 지은 백미밥에 비하면 맛이 좋다고 할 수는 없겠다.

옛날사람들도 현미밥을 무척 싫어했다고 한다. 군대에서 각기병 환자가 많았는데 현미밥을 먹이니 각기병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아냈으면서도  거친 맛 때문에 일반 백성들도 잡곡밥을 먹을 지언정 현미밥을 기피했다고 한다. 아마도 요즘처럼 압력솥이나 전기밥솥같은 취사기구가 없었기 때문에 더 심했던 것 같다.

중국 한나라 무제때 공손홍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뜻은 크나 무식하다고 천대를 받다가 40에 공부를 시작했다. 나중에 재상까지 올랐는데 항상 검소해서 단벌 신사에, 현미밥을 먹어서 그 검소함이 더욱 빛났다고 한다.

남송의 대학자였던 주희(주자)는 성리학(性理學)을 만든 사람이다. 성리학은 사물의 본질인 성(性)과 이치인 이(理)를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고려말에  들어와 조선의 통치원리가 된 학문이다. 이(理)와 대립되는 기(氣)의 개념을 가지고서 기를 어떻게 대우 하느냐에 따라서 주리론(主理論)자와 주기론(主氣論)자가 대립하여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로 나뉘고, 영남학파는 동인으로서 기호학파는 서인으로서 대립하고, 동인은 북인과 남인으로 대립하고, 북인은 소북과 대북으로 대립하고, 소북은 청소북과 탁소북으로 대립하고,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대립하고, 나중에 사도세자 죽음을 놓고 시파와 벽파로 대립하고,오늘날까지 좌파와 우파로 그 기상이 면면히~~~~덩기덕 쿵덕

이야기가 엉뚱한 곳으로 흘렀다.

주자가 유명해진 이후 그에게서 학문을 사사받겠다는 사람들이 자주 찾아왔는데, 어느 날 호갱님(호굉이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주자는 검소해서 탈속반(현미밥)을 대접했는데, 이 호굉이란 자가 못먹을 걸 대접했다고 기분나쁜 얼굴로 떠났다. 하필이면 나중에 호굉이 어사가 되었는데 사사건건 주자를 잡고 늘어졌다. 주자학을 혹세무민이라고 모함하며 대역죄인으로서 목을 베어야 한다고 걸핏하면 상소를 올렸다고 한다.

하지만 주자는 성리학속에 안전장치를 해놨으니 바로 임금을 받들자는 충(忠)을 중시하는 내용이다. 그래서 다행히 귀양을 가서 객사했다고 한다.

선량하고 대의적인 목표와 동기가 사사로운 목표와 동기에 의해서 구축(驅逐)되는 현상을 자주 본다.

2013년 6월 7일 금요일

사회관계론과 공리(共利)

미국의 경제학자 베커는 미시경제의 분석영역을 인간의 경제적인 행위를 넘어서 사회적행위와 상호작용까지 확대한 공로로 1992년 노벨상을 받았다.

인간의 경제행위는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편익을 얻어내는데 목적을 두지만 그 '편익'이란 물질적인 것 이외에 사회적 평판이나 비난같은 것도 포함된다는 가정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의 주저인 인간자본(Human Capital)에서는 인간을 자본으로 설정하고, 이것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국가가 교육에 힘써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사람들이 이타적행위를 하는 이유는 동정심이나 자비심과 같은 인본(人本)적인 감정행위에 의한 것 이외에도 이기심을 충족시키는 또 다른 형태로 발현(發現)되는 것이라고 한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은 자신과 유사한 개체를 존속시키려는 특징이 있는데, 가족과 같은 사회집단 내에서 서로에 대한 이타심을 발휘하여 집단의 생존확률을 높이는 것이 본성이라고 한다.때문에 사회집단은 고유한 가치체계를 지니게 되고, 그 가치체계에 부응하여 다른 구성원을 돕는 것이 비난보다 칭찬이라는 사회적 효용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계산하는 '합리적 행위'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베커의 주장에 따르면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같은 인간의 자선행위를 기대하기 어려운 야박함이 있지만, 때로는 이타적인 행위를 하면서 뭔가를 간절히 바라는 인간의 심리를 이해할 수도 있겠고, 이타적인 행위를 하지 못하여 여러가지 '후환'을 당하는 인간의 행태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사회집단의 범위를 가족이나 지역사회를 넘어서 국가나 인류공동체로 확장시켜서 생각을 해보곤 한다.

가끔은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고 개인적인 사욕(私慾)을 챙기다가 찬란한 시간에 비해서 훨씬 장기간의 암울한 시간을 보내는 정치지도자의 모습에서 비경제적인 모습이 엿보이기도 하고, 현실의 안일한 안정을 위해서 폭넓은 성장과 발전을 포기하는 남북한의 정치행태에서 비경제적인 모습을 읽기도 한다.

사람 사는 세상은 정글과 같은 약육강식의 세계이고, 서로를 이겨서 생존해야 한다는 근시안적인 가치관을 심어준 교육은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시간차를 두고서 '후환'을 가져다 주지 않을까 싶은 우려가 있다. '이념적'이라는 이유로 공리(共利)의 중요성을 배제한 교육을 시키는 것은 국가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시정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2013년 6월 5일 수요일

군인(軍人)

           THE SOLDIER

RUPERT BROOKE(1887-1915)


If I should die, think only this of me,
That there's some corner of a forien field
That is forever England. there shall be
In that rich earth a richer dust concealed
A dust whom England bore, shaped, made aware,
Cave, once, her flowers to love, hre ways to roam,
A body of England's, breathing English air,
Washed by the rivers, blest by suns of home.

And think, this heart, all evil shed away,
A pulse in the Eternal mind, no less,
Gives somewhere back the thoughts by England given.
Her sights and sounds; dreams happy as her day;
And laughter, learnt of friends; and gentleness,
In hearts at peace, under an English heaven.

혹시 내가 죽는다면, 내게 관해 이것만을 생각해 다오,
외국전장에 영원히 영국인
어떤 모퉁이가 있다고. 그 풍요한 토지에
한층 더 비옥한 흙이 감추어져 있으리,
영국이 낳고, 형성하고, 깨닫게 하고,
한때 사랑스런 꽃들과 산책길을 주었던 흙이,
영국의 공기를 쉬고, 강물에 씻기고,
고국의 태양에 축복받았던 영국의 유해가,

그리고 생각해 다오, 모든 악을 떨구어 버린 이마음이,
영원한 마음의 고동이,영국이 준
사상을 어디선가에 되돌려 주고 있다는 것을,
영국의 풍경과 소리를;영국시절처럼 행복한 꿈을,
친구에게서 배운 웃음과 영국의 하늘 아래,
평화로운 마음속에 깃든 온후함을.

제국주의 시절, 대영제국건설의 기치아래 식민지전장에서 죽은 영국병사에 관한 시이다. 고향땅의 풍요로움과 행복이 고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일에 정당성과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듯 하다. 대영제국의 자손들이 한때 세계제국을 건설하여, 세계 곳곳에 뿌리내린 현실에 영국병사의 죽음은 오래도록 순수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듯 하다.

정치를 비롯한 여러 분야의 내밀함,섬세함, 퇴락함이 한국에서 희생한 순국선열들의 희생의 가치를 떨어뜨리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미를 사랑하되 사치에 빠지지 않고, 지혜를 사랑하되 의지력이 빈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재산을 사적과시의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공적 만족의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빈곤을 극복하려 하지 않는 것은 치욕이라고 생각하지만 빈곤을 불명예로 생각지도 않습니다. 
- 페리클레스 -

개인적인 빈곤을 극복하기 위해 애쓴 한국의 정치지도자들과 순국선열들의 인연은 악연인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