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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30일 토요일

자기억제와 교육철학자들의 말들

오래전 꽤 오랫동안 낮시간을 이용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는 일을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밤에는 젊은 이들에게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라고 좋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처럼 내가 도덕성있는 인간이 아니라도 의사의 활동처럼 기호의 힘을 빌어서 좋은 이야기를 해본것 같다. 낮시간의 일은 대단히 '야성적인' 이들과 함께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좋게 표현하니 야성이지 자신을 억제해 본 적이 없는 삶을 살아 온 후유증을 일관성있게 보여주는 이들이었다. 노폭(老爆)의 경지까지 오른 노인분도 있었고, ADHD의 증상을 보이는 이도 있었다. 학력은 천차만별이었지만 공통된 특징은 하고 싶은 행동이나 말을 억제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다.

어떤 연배있는 사람을 만나서 대화하다 보면 그 사람의 과거의 행적이나 직업등을 대충 유추할 수 있는데, 책임감이 필요하고 신중한 판단을 필요로 하는 일을 한 사람은 말이 적거나 절제되어 있는 성향이 있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 일을 했으면서도 언행이 절제가 안되는 사람은 일터에서 크게 환영받지 못하고 박수 안 칠때 떠난 사람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모든 교육학자들이 이야기 하는 교육의 가장 본질적인 목적은 '이성과 도덕성의 함양'인듯 하다. 소크라테스는 "용기 있는 자가 선하면, 그는 또한 현명하다."라고 말하고 제자 플라톤은 선의 이데아를 지향하는 교육을 주장하고 있다.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습관이나 훈련을 통해서 선하고 도덕적인 존재로 훈련을 시킬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플라톤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아서 좀 더 실천적인(아우구스티누스의 교부철학에 비해서) 스콜라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나 교부철학자인 아우수스티누스는 인간 지성과 행위를 신앙에 통일되게 묶어 놓음으로써 도덕적인 함양을 추구하였는데, 토마스 아퀴나스가 좀 더 이성과 절제의 노력이 필요한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에라스무스는 인본주의를 중시하는 르네상스교육학자로서 신과 관련해서 보다는 쓸모없는 피조물(인간세상에서)이 되지 않기 위해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마르틴 루터나 캘빈도 중세크리스트교의 도덕적인 문제점을 보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신교를 확립한 목적만큼 교육에 있어서 도덕적인 실천을 중시하였는데, 루터는 엘리트 중심의 교육이 아닌 평범한 국민들 모두를 대상으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추구할 것을 제시했다. 중세 크리스트교의 부패로 개신교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구교인 카톨릭도 개혁을 추구했는데, 로욜라가 창립한 예수회를 중심으로 더욱 도덕적인 카톨릭으로 개혁하기 위해서 노력했고, 이런 노력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예수회의 교육은 인간공동체내에서 타인에게 봉사하고 하느님을 섬기는 방법을 가르쳤다.

사회계약론자인 로크는 학교교육을 대단히 비판하여 사회지배층으로부터 경계의 대상이 되고 가정교육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는데, 생각해보니 요즘도 학교교육을 비판하는 문제에 있어서 좌파나 우파의 개념이 개입되는 사실을 보며 제도권의 교육이라는 것이 사회계층이나 사회계급의 이해관계에 휘둘리는 원죄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듯 하다. 로크가 가정교육을 중시한 것은 부모의 원초적인 사랑이 개입하는 점, 당시 상류층의 삶이 지나치게 자유분방하고 산만한 점등을 들고 있었다. 프랑케는 '습관'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겼는데, 아리스토텔레스도 습관의 중요성을 이야기 한 적이 있었고, 프랑케의 말처럼 훈계와 교훈이 습관으로 익어야 교육이 성공적인 것은 당연한듯 싶다. 로크와 마찬가지로 사회계약론자인 루소에 대해서는 저번에도 이야기 한 적이 있지만 루소 자신이 독학을 하여 사상적인 세계를 구축한 만큼 자연중심적인 교육이나 대안교육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루소와 동시대의 사람인 꽁도세는 인간권이나 시민권을 이야기 하며 교육이 더욱 넓은 공동체에 대해서 가지는 의미를 이야기하고 있다. 언젠가 시몬느베이유나 그녀의 철학적인 스승인 알랭에 관해서 생각하다가 프랑스에서는 노동운동이나 다른 여러 방면에서 철학적인 관점과 기반이 튼튼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어떤 철학도 자칫하면 좌파와 우파의 이념개념으로 몰려버리는 한국의 빈한한 철학교육에 대해서 통감을 한 적이 있었다. 하물며 18세기에 사회계약론자들이나 꽁도세가 시민권을 넘어서 인간권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한국의 후진적인 교육철학이 정치적인 후진성에 크게 반영되고 있는 것은 크게 생각해볼 문제가 있는듯 하다.

엄격한 의무론자인 칸트는 교육은 다양한 인간의 자연적 소질을 조화롭게 계발시켜 인간성의 완성을 접근하도록 돕는 것을 일차적 과제로 삼는다고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해준다던가 타인에 대한 의무를 강조하고 있는데, 칸트나 고대그리스의 소크라테스계열의 철학자들은 절대적인 윤리성을 지향하는 절대론적인 철학자여서 교육에 대해서 엄격한 점이 있지만 상대론자인 다른 계열의 철학자들, 예를들면 공리주의자들과 같은 철학자들도 사회구성과 유지를 위한 규범으로써 교육을 중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어떻게 생각하면 교육의 궁극적인 방법이나 목적은 자기억제와 관련이 되어 있는듯 한데, 각자의 의무와 책임을 다함으로써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을것 같다. 만약 사회구성원들이 선동이나 대중조작에 취약하다던가 산만한 모습을 보인다면, 사회교육에 실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는 병리현상을 보이는 사람을 만날때면 가정교육이나 학교교육의 문제점을 생각하게 하는 것은 당연한듯 하다. 특히 권력지향적이거나 계층적인 상승욕구나 계급적인 구분욕구(계급은 계층이라는 개념에 비해서 더욱 경제적인 모습을 띄는 마르크스적인 개념이다)에 민감한 사회는 부실한 교육의 결과물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된다.

2016년 1월 29일 금요일

하방(下放)제도

중국에는 옛부터 하방이라는 것이 있었다. 관리가 되기위해서 낮은데로 임하여 백성의 삶을 체험하거나 영욕의 세상과 격리가 되어서 자아성찰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부여하는 것을 말한다. 1960년대 후반에는 문화대혁명 세력이 이 하방을 제도화하여 시진핑총리도 젊은 시절 다년간 시골의 토굴에서 하방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를 해석하기를 문혁세력이 이전 집권세력을 무너뜨린 지식인이나 대학생들의 매우 공격적인 개혁요구가 문혁세력에게 향하지 않도록 취한 조치라고도 한다. 하지만 순수한 의미로는 국가를 경영하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소양인 목민의 능력을 배양하거나 자신과의 싸움을 통하여 그릇을 크게 만드는 의도로서 사용된 방법인 것으로 알고 있다.

호세무히카 우루구아이 전 대통령이나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대통령이 감옥의 독방에서 장기간 수감되어 있으면서도 정치적인 능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하방이라는 제도가 주는 의미랑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는듯 하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다년간 관찰,분석하기로 마음먹고 흔히 이야기 하는 서민들의 생활을 체험하다보면 안 보이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일도 있고, 자아를 객관적으로 현실과 독립시켜야 하는 어려운 상황을 겪기도 하는데, 이런 경험 역시 하방이 주는 의미랑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 자신이 한 한가지 경험을 이야기 하자면, 예전에는 상류층과 하류층, 부자와 빈자, 강자와 약자, 고용인과 피고용인등의 이분법으로 나눠진 사회적 구분, 특히 사회적 약자를 위한 진보 또는 좌파적 개념이나 기득권을 가진자를 위한 보수 또는 우파적인 개념의 구분이 전혀 무용(無用)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적이 하방과 비숫한 생활을 하면서 느끼기도 했던것 같다. 어떻게 보면 사회적인 약자나 하류층 시민들의 불행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분배나 복지등의 개념만 생각할 것이 아니고 당당한 시민으로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며 살아가고 책임도 함께 갖게하는 능력을 키워주기 위해서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많았던 것 같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일으키는 사회적 제도나 정치적인 행위에 분노를 느끼는 만큼이나 사회적인 약자로 여겨지는 이들의 무지(無知)로운 생각과 행위에 대해서도 분노를 느끼는 게기가 되었던 것이 하방과 비숫한 생활을 하면서였던것 같다. 좌절을 느끼는 사람들의 좌절감을 고스란히 함께 느껴 봤는데, 그것을 해결할 열쇠는 각자가 가지고 있었고, 그 열쇠를 부여하는 방법은 교육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건달과 스티브잡스

건달을 굉장히 싫어했다. 정치인이 건달같은 언행을 하거나 일터에서 건달같은 언행을 하는 사람을 보면 그냥 살아가는 한가지 방식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보니 친구들에게도 지나치게 진지한 사람이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나도 내 안에 건달심이 있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봐서 아는데, 그냥 생각하는 수고로움이 없는 편안한 길인것 같았다. 그러다보니 치열하게 배우는 것이 없어서 본질을 궤뚫는 관점같은 것이나 지혜같은 것이 생겨나지 않는것 같았다. 그런데 건달심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은 잘난척 하거나 허세를 부린다. 그리고 말이 함부로 나오고 행동이 함부로 나온다. 자제심이나 절제심과는 담을 쌓고 살아온 댓가인듯 했다.

평생을 건달로 살다가 나이들어 애처로운 눈빛으로 존경을 구걸하는 노인, 어려움을 겪지않고 정치인이 되어 시민들과 공감대도 형성못하고 말과 행동이 각자의 길을 떠나는 정치인, 삶의 고통에 일그러진 마음을 추스릴 방법을 찾는 백성에게 무조건 믿으면 된다는 종교인, 이들은 생각하는 수고를 덜어주는듯 하지만 편안한 길이라는 사기로운 세상으로 인도하는 마성(魔性)을 가진듯 하다. 건달들은 삶을 대하는 태도가 진지한 사람들을 비웃는다. 그러나 진지한 사람들의 에너지가 세상을 움직여나가는듯 하다. 건달은 세상을 무임승차한 존재감이 없는 존재인듯 하다.

반건달주의자중에 스티브잡스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말들을 했다고 한다.

"항상 갈망하라, 늘 바보처럼."
"언제나 우직하게, 하루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아가라."
"진정으로 일에 만족하는 길은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아직 그런 일을 찾지 못했다면 계속 찾아라. 포기하지 마라. 사랑하는 일을 찾아라."

2016년 1월 23일 토요일

몰입의 즐거움 / 일과 여가시간

자존감이나 자부심등을 얻어낼 수 없는 일을 자주 한 적이 있었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는데, 원래 가시수저를 물고 태어난 기질적 바탕에 직업의 수직적 계층구조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현업에 종사하는 이들의 어려움을 몸소 이해하고 많은 시간을 보내거나 때로는 그 장소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을 느끼면 환경에 동조되지 않도록 내 자신을 추스릴수 있는 의지력을 키우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 한 편으로는 자주 하는 일이지만 신체를 움직이는 일을 함으로써 부실한 체력을 단련시키는 즐거움도 얻을 수 있었다. 가끔 선거때가 되면 후보자들이 체험 삶의 현장을 촬영하듯이 서민 코스프레를 하면서 재래시장이나 청소현장, 가축의 분뇨냄새나는 축산현장등을 바람처럼 떠돌아 다니는 장면을 보는데, 표를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이 현장에서 애쓰는 서민보다 더 나아보이지는 않는다는 생각을 할때가 많았던것 같다.

사회적으로 저평가를 받는 일을 할때는 자존감이나 자부심과 결부된 몰입을 할 수 없는 문제가 있는듯 하다. 그런 일을 할때마다 자존감을 내팽개치고 자신을 비하시키며 동료들과 에너지싸움을 하는 이들을 많이 보는데, 일을 할 때 얻을 수 있는 금전적인 보상말고 '몰입의 즐거움'이라는 정신적인 보상을 전혀 얻어내지 못하는 상태는 사회적으로 저평가되고 있는 일들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이상적인 계몽이 있어야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알고보면 책임감과 권력이 함께 하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목적이나 자존감을 잃어버리고 주어진 지위가 원하는 의도를 내팽개치는 이들도 많은데, 어떤 일을 하든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역할분담을 맡은 바가 경시되어야 할 이유는 없는듯 하다. 내 생각이 다분히 이상적이라면 내 생각이 틀린것이 아니라 내 생각과 다른 생각들이 틀린 것인듯 하다. '이상'은 '추구하는 바'이기때문인듯 하다.

시카고 대학의 심리학,교육학교수인 미하이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교수는 [FINDING FLOW]라는 저서에서 몰입의 즐거움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저번에도 몇번 서술한 적이 있지만 흔히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노력은 고통을 준다'라는 인식을 뒤집어놓는 알찬 이야기들이 참 많은 것 같다. 실제로 내가 현장에서 느낀 바는 일 자체가 어려운게 아니라 자신과 타인의 자존감을 무시하고 결국에는 갈등관계나 방치된 정신상태로 빠져버리는 상태였는데, 칙센트미하이교수의 이야기들은 몰입을 함으로써 어떤 환경에서도 시간을 소중하게 보낼 수 있는 길잡이 역할을 해주는듯 하다.

바람직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면 구체적인 데서 출발하는게 좋을듯 하다. 여러 해 전에 나는 학생들을 데리고 기관차 공장을 견학했다.격납고처럼 거대한 중앙공장은 어찌나 먼지가 많고 시끄럽던지 고래고래 악을 써야 겨우 말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그곳에서 일하는 용접공들의 대다수는 자기가 하는 일에 애정이 없었고 시계를 보며서 빨리 퇴근 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일단 공장 문을 나서면 근처 술집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좀 더 적극적인 행동파들은 아예 자동차를 몰고 드라이브에 나섰다.

그런데 안 그런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그는 조라는 이름의 60대 초반 남자였는데, 크레인이면 크레인,컴퓨터 모니터면 모니터, 그 공장 안에 있는 기계 설비의 구조를 모조리 독학으로 꿰뚫은 사람이었다. 그는 못 고치는 기계가 없었다. 고장난 기계를 붙들고 말썽의 원인을 밝혀내어 기어이 수리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집에서도 가만히 있는 법이 없었다. 집 부근에 있는 자투리땅에다 부인과 함께 멋진 분수를 만들었다. 분수에서 뿜어 나오는 뽀얀 물보라는 밤마다 장관을 연출했다.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용접공들은 희한한 양반이라고 혀를 차면서도 모두들 조를 존경했다. 문제가 생기면 누구나 조에게 먼저 달려갔다. 직원들은 그가 없으면 공장문을닫아야 할 판이라고 이구동성을 말했다.

역사가 E.P.톰슨이 지적한 대로, 어떤 노동자들은 동료들처럼 선술집으로 몰려가지 않고 금싸라기 같은 휴식 시간을 문학 작품을 읽거나 정치 활동을 하는데 썼다.

생산과 유지 활동에 들어가고 남은 시간이 자유 시간, 곧 여가 시간인데, 사람들은 여기에 전체 시간의 사 분의 일을 쏟는다. 사람은 아무 할 일이 없을때 비로소 자신의 잠재력을 깨달을 수 있다고 고대의 사상가들은 주장하였다. 그리스 철학자들에 따르면 학문, 예술, 정치 같은 자기 개발 활동에 시간을 투여할 수 있을 때만 우리는 진정한 인간이 된다. 실제로 학교를 뜻하는 영어단어 'school'은 여가를 뜻하는 그리스어 'scholea'에서 나온 것이다. 여가를 잘 활용하는 것이 곧 학문하는 길임을 알 수 있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은 여가시간을 보내는데 많은 문제가 있는듯 했다. 학력과는 상관없는 교육들, 가정교육이나 사회교육, 독서등으로 시간의 가치를 이해하는 이들은 시간시간이 풍족한 모습을 띄고 있는듯 했다. 몸과 마음도 여유로워 보였고 침착했다. 하지만 여가시간을 빈곤하게 보내는 이들은 항상 빈한한 언행(言行)을 드러내곤 했는데, 결국 그런 언행으로 현실과 미래를 조작해나가는듯 했다. 한 편 그런 이들과 함께 하면서 정 반대의 길을 가기 위해서 리카싱이나 손정의 같은 기업가나 본받을만한 각 분야의 인물들에 대한 탐구를 하면서 균형을 맞춰 나가기도 했는데, 성공적인 인생의 공통점중에 하나는 이상과 주어진 시간을 잘 연계시키도록 몰입하는 인생인것 같았다. 

2016년 1월 22일 금요일

샐리와 앤 테스트

언젠가 오랫동안 육체노동만을 했거나 음주나 나이로 지적인 능력이 퇴행되어가는 이, 생각하지 않는 습관을 가진 이들을 보면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많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좋다 나쁘다 하는 가치판단이 아니고 현상을 이야기하는 중인데, 이념이나 종교등이 어떤이의 정신을 맹목적으로 지배할때도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볼때가 있다.

애리조나 대학의 앨런 산페이(Alan G. Sanfey)는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하였다.

4세정도의 아이들에게 한 눈에 봐도 캐러멜상자임을 알것 같은 상자를 보여주며 이 상자안에 무엇이 들었냐고 질문하면 캐러멜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상자를 열어 캐러멜이 아닌 연필이 들어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만약 다른 아이에게 이 상자를 보여주면 그 아이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할것 같냐고 질문하면 그 아이들도 "캐러멜"이라고 대답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자폐증이 있는 아이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면 자폐증이 있는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도 "연필"이라고 대답할 것이라고 했다

이 실험에 의해서 자폐증이 있는 아이들은 타인의 처지가 되어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런데 자폐증이라는 증상을 좀 더 연속적인 개념으로 살펴보면 협소한 세상에서 협소한 관점을 가지고 사는 이나 협소한 관심사를 가지고 사는 이, 단순하고 획일적인 교육을 받은 이들도 어느 정도의 자폐증세를 가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일상에서 많은 증거를 보아왔는데, 협동관계나 조화를 끌어내지 못하는 정신은 좁은 관점에 근거하고, 좁은 관점은 획일적인 교육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많이 보아왔고, 내 자신에게도 그런 면모를 느낄때가 많았던것 같다. 더구나 국가와 사회집단이 그런 면모를 보인다면 문제는 사회전체나 세계적인 문제로 비화될것은 당연한듯 하다. 

관심사

언젠가 하루동안에 평생을 막노동으로 살아 온 장년과 군 고위장교로 퇴직한 이와 만나 대화한 적이 있었다. 공통점이라면 극명하게 자신의 세계에 대해서 변화해 본적이 없는 완고한 가치관이 있었고, 다른 것은 평생을 서로 다른 관심사를 가지고 다른 곳을 돌아 보지 않고 자신의 갈길을 갔다는 사실이었다. 두 사람이 그래도 젊은 나에게 인생이 어떻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태도는 유사했다.

이 밖에도 청렴한 교육자로 살아온 사람, 경제적으로 성공한 재벌,자신의 정치적 의지를 실현시킨 정치가, 권력의지가 없이 세계평화에 힘쓰는 존경받는 외교관, 더 크게는 먹고 사는 일에 실패하고 투쟁과 이념에만 관심있는 국가, 성장동력을 잃어 버리지 않고 계속해서 변화를 꾀하면서 발전하는 국가 이들의 이면에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개인적 사회적인 관심사가 있는듯 하다.

관심은 집중을 낳고, 집중은 행동을 낳고, 행동은 결과를 낳는듯 하다. 항상 자신의 생각을 지배해 왔던 것들 그것들이 지금의 자신의 처지를 만들어 왔다는 사실을 알면 인생이란 후회할 것도 없고, 지키고자 하는 것도 없을 것이며 변화하고자 할때 마음대로 변화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일관성있게 그 길로 가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중요하고, 길을 찾아 주는 교육이 필요하며 그 교육은 갈 수 있는 다방면의 길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2016년 1월 16일 토요일

독서를 통한 교육 / 루소

언젠가 호기롭게, 무지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같은 감정을 가지고 함께 일하다가 그 무지함의 기세에 질려서 표현 그대로 경악을 한 적이 있었다. 흔히 극단적 진보주의자들이 말하는 약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배려나 '무조건적인' 분배라는 개념은 말도 안된다는 다분히 감정적인 분노가 섞인 판단을 하게된 계기가 되기도 하고, 냉철히 한 발 물러나서 생각하니 독서와 같은 폭넓은 교육이 우선되어야 한다는데 대한 아쉬운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학력을 불문하고 책을 멀리하는 사람의 무지함은 감당하기 어려웠는데, 더 나쁜것은 자신이 똑똑하다고 착각하며 목소리가 크거나 남성들같은 경우 나이가 들면서 음주와 같은 나쁜 생활태도가 약간의 치매상태를 만들어놓았다는 증거를 여기저기서 발견하기도 하였던것 같다. 가끔 "무식하다고 우릴 천대하느냐" 하는 반항을 받아가면서도 책을 좀 읽으라는 압력을 부지런히 넣었는데, 그렇게 말하는 나는 그렇게 말할려니 책을 안 읽을 수가 없었다는 생각을 하며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학교교육을 받지 못한 루소는 열정적인 독학으로 열심히 공부하였는데, 이런 저런 다양한 독학으로 일자리를 얻어내고 그러다보니 규범이나 규율, 심지어는 의무나 책임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생애를 살게되었고, 사회계약론과 국민주권주의라는 당시의 권위로운 입장에서는 대단히 "불손한', 그러나 인류에게 큰 영향을 끼친 자유주의 사상을 확립해내기도 하였다.

어렸을때 사업에 실패한 부모를 따라서 강원도의 첩첩산골로 들어가서 살았다. 그 와중에 우리집에 찾아들어온 최후의 채권자는 [과학상식백과]라는 만화로된 어린이 과학전집을 판매한 월부책장사였다. 사업이 망해가는 분위기에도 비싼 전집류의 책을 들여놓은 부모들의 배짱도 지금 생각하니 대단했는데, 시골의 적막한 분위기속에서 형제들이 그 책을 누더기가 되도록 반복해서 읽으며 고등학교때까지 오랫동안 공부 안하고 성적을 거져 얻어냈던것 같다. 그런데 바로 옆집에 더욱 강자가 있었다. 현재 K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중인 최모교수의 부친이었는데, 학력도 없고 농사를 지으면서도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북한과 관련된 과거의 일때문에 매우 잦은 음주라는 결정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던 나의 부친을 아쉽게 한 기억이 난다.

어쨌던 최모교수의 집안은 그 부친의 독서를 통한 자녀교육으로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잘나가는 회사원, 교사, 교수등으로 크게 성공해서 빛을 보았다. 나는 이것 저것 닥치는데로 읽는 편이었고, 네살 연상의 최모교수는 교과서를 누더기가 되도록 반복하는 성향이 있었는데, 나중에 인생 스타일까지 독서스타일과 같은 것을 보니 습관이라는 것은 참 중요하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37세였던 때에 루소는 자신의 삶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킨 특이한 체험을 하였다. 1749년 10월 어느 따뜻한 가을 날에 그는 친구 디드로를 방문하기 위하여 파리에서 벵쎈느를 향하여 걷고 있었다. 그는 '메르뀌르 드 프랑스' 한 권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 잡지에서 디죵 아카데미가 내건 다음과 같은 논문상 광고를 보았다. "과학과 예술의 발전은 습관을 타락시키는데에 더 기여하였는가 아니면 순화시키는데 더 기여하였는가?"

"내가 이 글을 읽었을 때에 내 안에서 어떤 영감이 즉시 솟아나왔다. 나는 마치 나의 정신이 갑작스럽게 수천 개의 눈부신 빛에 의해서 혼란스러워지는 것 같았다. - 중략 - 나는 가슴을 일으켜세웠다. 나는 걸어 가면서 더 이상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가로수 아래 주저 앉았다. 거기서 약 반 시간 동안이나 흥분한 상태로 앉아 있었기 때문에, 일어섰을때에야 비로소 나는 양복 조끼가 흘린 눈물로 축축히 젖어 있는 것을 알았다.

- 연세대 교육철학연구회편 [위대한 교육사상가들]중에서 -

지적인 깨달음의 희열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장면인듯 하다. 실제로 나 자신도 경험을 한 적이 있는데, 나는 현실이 각박해서 느끼는 상대적인 감정이라고 속단해보기도 하였던 것 같다. 그렇더라도 읽을거리는 크게 유익하다는 생각은 다를바 없는듯 하다. 사회계약론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 도주생활을 하기도 하고 사회적 불안심리에 시달렸던 루소지만 인류에게 상당히 유익한 사람이었던것만은 확실한것 같다.

열정의 리더쉽 / 롬멜

어제 저우언라이에 대한 글을 썼는데, 저우언라이는 대단히 이성적이고 냉철했다고 한다. 마오쩌뚱은 대단히 격정적이고 충동적이며 투쟁을 좋아했다고 한다. 저우언라이는 그 반대로 질서있고 이지적인 방법으로 일을 처리해 나가며 마오를 보완했는데, 사실상 중국혁명의 성공과 그 이후의 변화에 있어 마오쩌뚱보다 저우언라이에 대한 평가가 우월한듯 하다. 역사를 보는 관점이 협소한 중국의 평범한 인민들중에는 선동이 잘 되는 무지한 인민들의 특성상 마오를 그리워하는 인민들이 많겠지만 뭔가를 알고 있는 인민들이나 서방의 지식인들에게는 중국은 사실상 저우언라이가 움직여나가고 있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던것 같다. 결국 4인방의 전횡을 막지 못한 것은 마오였고, 막은 것은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이었다는 사실도 실질적인 힘은 저우언라이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을 입증하는듯 하다.

냉정하고 침착하며 융통성있고 이지적인 방법들이 때로는 열정이 없는 것처럼 비춰지기도 하지만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표현대로 '조용한 열정'이라는 방법으로 에너지를 모아서 일을 처리하는 최선의 방법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미친듯이 들뛰는 자는 극단주의적 결말의 비극을 맛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반기문 사무총장의 생각과 같다. 꽤 오랫동안 북한에서는 '속도전'같은 구호로 인민들의 에너지를 끌어낼려고 노력했는데, 일상적인 구호는 어떤 자극도 주지 않았으며, 목적을 잃어버린 자아도취적인 상상은 상상에만 그친다는 사실을 입증했던것 같다. 뇌성벽력도 반복되면 자장가로 들리는 이치는 당연한듯 하다.

하지만 냉정하고 이지적인듯 하다가 망한 사람도 있는데, 2차대전때 젊은 장교인 롬멜의 기동전에 휘말려 프랑스를 패배하게 한 패탱원수가 그런 사람인듯 하다. 1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패탱을 비롯한 프랑스지휘부는 열정을 잃어버리자 매우 안일해졌는데, 그 점에 있어서는 영국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다행히 영국은 처칠이라는 그다지 인습적이지 않는 지도자의 도움을 받아서 독일과 맞섰지만 프랑스는 독일에 패하여 점령지의 신세로 전락하는 치욕을 보여주었다. 롬멜이 프랑스를 점령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기갑전력에 대해서는 영국에서도 존 풀러 대령이나 퍼시 호바트 대령이 견해를 피력했으나 군 내부의 보수주의자들의 횡포에 의해서 군을 떠나거나 한지(閑地)로 밀려나가는 수모를 겪었다고 한다. 1937년 후반에는 유명한 독일의 수투카급강하폭격기를 구경한 영국항공기제조사인 비커스의 수석 시험비행사가 영국도 그런 비행기를 생산해야 한다는 열정적인 보고를 하자 영국공군은 "귀관의 일에나 신경을 써라"라는 퇴행적인 답변으로 수모를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롬멜평전을 쓴 스웨덴의 군사학자 크리스터 요르젠센에 따르면 2차대전 전의 프랑스군에는 '장비도 넘쳐나고 덜 떨어진 개념도 넘쳐났다'는 표현으로 독일에 대한 안일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고 한다. 프랑스동부에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 마지노선을 만들어놓고 프랑스를 수호해줄 신앙처럼 여기며 기다리고 있던 프랑스에게 패탱이 전차로 아르덴숲을 돌파할 수 없다고 생각한 아르덴숲을 전차로 밀고 들어오는 롬멜은 '열정의 수준차이'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듯 하다. 독일은 1차대전의 패전원인을 되짚으면서 과거의 낡은 방식에 매달릴 이유가 없으니 기동전을 선택해야 한다고 한스 폰 젝트(Hans von Seeckt)와 같은 선견지명이 있는 장군들을 중심으로 프랑스의 패탱장군등의 견해와 대조된 능동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는 것이 크리스티 요르젠센의 말이다.

젊은 롬멜은 전투중에 상부의 명령도 가끔 무시하는 융통성있는 태도를 취했는데, 결론은 구속받지 않는 융통성이 좋은 결과를 가져온 것으로 생각된다. 히틀러가 롬멜의 열정을 믿고 기갑부대지휘관으로 채택하자 많은 기존 지휘관들이 롬멜을 낙하산을 탄 것으로 여기고 시기하고 질시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 독일도 안일한 태도를 취했던 적이 있는데, 1939년 후반 독일이 프랑스점령계획을 모의하며 슐리펜계획의 복사판인 구태의연한 황색작전(Operation Yellow)을 계획했다고 한다, 반면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라는 젊은 장교는 낫질작전이라는 것을 고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기존 장성들의 반대로 만슈타인은 폴란드의 야전으로 쫒겨나고 황색작전이 채택이 되었는데, 황색작전에 관한 정보를 실은 비행기가 연합군의 수중에 불시착하면서 어쩔 수 없이 낫질작전으로 변경되었고, 아르덴 숲을 통과한 독일의 전차부대가 프랑스북부로 진격해서 마지노선의 배후를 공격한 낫질형태의 작전은 이런 우연한 상황이 조력하기도 헸다고 한다.

가끔 롬멜은 화력을 집중하기 위해서 측면을 방치하는 배짱도 보여줬는데, 방어에도 자신없는 쪽은 적의 허점도 보지 못한다는 판단에 근거한 것 같다. 프랑스의 군사력을 신뢰했던 처어칠은 프랑스내각과 회의를 하면서 이미 패배주의적 마인드에 빠진 프랑스인사들에 대해서 경악을 했다고 요르젠센은 표현을 하고 있다. 한참 열정으로 가득차 있던 전쟁의 초창기에 롬멜이 말한 명언을 몇 가지 살펴보면 좋은 지휘관의 열정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는듯 하다.

너 자신이 하고 싶지 않거나 할 수 없는 일을 남에게 부탁하지 마라
장비부족으로 부대원들이 고통을 받자 지휘관은 부대원과 고통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한 말이다.

전장에서의 승리는 먼저 공격하는 편의 것이며, 납작 엎드려서 상황을 지켜보는 자는 기껏해야 2등에 그치게 된다.

이번 전쟁에서 지휘관의 자리는 바로 이곳 전선입니다! 저는 탁상위의 전략을 믿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참모본부에 맡겨둡시다.
1만명의 프랑스포로를 잡고나서 기자들에게 한 말이라고 한다.

결국 망해가는 제 3제국의 운명에 따라 먼저 능동적으로 히틀러의 암살계획으로 먼저 망해버린 열정까지 보여줄 정도로 능동적인 군인이었던 롬멜은 열정의 화신인듯 하다. 맞서고 있던 영국군이 식수가 떨어지자 롬멜이 손수 백기를 들고 영국군진지로 가서 식수를 전달해주고 영국군은 백기를 들고 와 와인으로 보답했다는 여유로운 일화도 있다. 반면에 패탱은 전쟁에서 패배하자 좌파의 난동때문에 패배했다고 푸념했다는 여유없는 일화도 있다. 

2016년 1월 15일 금요일

교육으로 이념을 깬 덩샤오핑과 저우언라이

한국사회의 저변에서 느끼는 생각은 교육의 장기적 결과가 매우 부정적이라는 생각이다. 그다지 지적이지도 않고, 협동적이지도 않다. 교육자체가 국민을 투쟁적으로 만든다. 그 투쟁의 칼끝은 국민 서로에게 겨누어지거나 때로는 정부를 향한다. 국민서로에게 겨누어지는 칼끝은 자본주의적이라고 말하고, 정부에 겨누어지는 칼끝은 사회주의적이라고 말하는게 한국의 실상인듯 하다. 국민 서로가 존경하거나 지도자를 존경할 수 있는 국민은 교육이 만드는듯 하다. 그런면에서 보면 문화대혁명으로 피폐한 공산주의로 회귀할뻔한 중국을 구하기 위해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은 교육개혁을 가장 먼저 서둘렀는데, 현명한 지도자의 예를 보는듯 하다. 특히 저우언라이는 장칭일당(4인방)이 중국을 퇴보시키고 있을 당시 그 반대세력으로 탄압을 받으면서 교육개혁을 말했었다는게 덩샤오핑의 말이다.

1971년 전국교육사업회의를 소집할 때 저우언라이 동지의 처지는 매우 어려웠다. 1972년 그는 미국 물리학자들과 담화하면서 그해 중학교와 고등학교 졸업생들 가운데서 직접 대학생을 모집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상황에서 이 문제를 제기한 것은 아주 용감했다.

- 이중의 [저우언라이, 오늘의 중국을 이끄는 힘]중에서 -

덩샤오핑과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뚱의 이념적 통치방식에 함께 대응해 나가면서 1977년 중국의 대학입학 시험을 부활시켰다고 한다. 그 전까지 공산당의 추천에 의해서 대학을 입학하다보니 학생들의 나이와 학습능력이 천차만별이어서 대학교육의 질은 떨어지고, 학습환경도 나빴다고한다. 아마 한 나라의 장기적인 미래를 고민하는 지도자라면 교육이 가져다 주는 미래상을 그려보며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 같다. 일개 시민인 나 자신도 사회의 저변에서 생활하면서 교육문제를 국가의 가장 절실한 문제로 생각했는데, 특히 으스대며 남 보다 우월해질려고 하는 욕망만 있는 사람들이 정작 자신의 권리를 인정받지 못할 경우에 무기력하게 비급해지는 모습을 볼때면 노신선생의 우매한 '아Q'를 떠올리곤 했다. 권리를 주장한다고 해서 정부나 기업가같은 주로 권리주장의 대상이 되는 측에 불편한 영향을 끼친다는 오해가 있을 수 있지만 권리주장의 상대는 국민 서로가 된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민주국가의 모습이며 권리를 주장할때는 책임의식이 반드시 함께 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아직 국민에게 이해 안되는 교육적 미비의 결과인듯 하다.


1977년 여름 덩샤오핑은 교육개혁관련 회의를 소집하고, 그 해 12월에 대학입학시험을 실시했는데, 시험지는 종이가 부족해서 [모택동선집]을 인쇄할 종이를 특별히 배정했다고 한다. 훗날 중국국무원총리가 된 리커창은 1978년 첫 입학생으로서 현재의 중국을 이끌어가는 중심세력은 30년이나 40년전의 교육개혁의 혜택을 입은 사람들로 생각된다. 조금전 저우언라이가 미국물리학자들과 1972년에 대화를 했다고 했는데, 문화혁명당시 3000명이던 과학기술인력이 현재 3000만명정도로 늘어난 중국의 과학기술적 역량도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의 교육개혁의 혜택으로서 생각된다.

2016년 1월 9일 토요일

부드러운 신념과 정책결정

외교관련서적을 읽다가 보니 이런 내용이 있었다.

한 나라의 외교정책이 결정되는 과정에서 국익 못지 않게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정책결정자가 갖고 있는 가치관(values), 신념(beliefs, convictions)이다. 가치관이나 신념은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이 국익이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판단하는 단계에서부터 영향을 준다. 상대국가의 의도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추구하는 이익뿐만 아니라 그 나라 지도자들이 갖고 있는 신념이나 가치관도 이해해야 한다.

국가의 외교정책을 결정하는 지도자들은 어떤 주어진 국내외 상황에서 우선 상황을 인식하고, 이를 해석하며, 이를 토대로 방침과 태도를 결정하게 된다. 이렇게 상황을 인식하고 해석하는데 있어 결정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바로 그들이 깆고 있는 태도(outlook),신념,가치관,세계관(world-views),경험 등이다.

어느 나라에서든 집권자는 자기의 가치체계를 확대하고자 하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행동을 분석하는 데 그 나라 지도자가 갖고 있는 가치관, 종교적 신념등은 유용한 분석자료가 된다.

- 최병구 [외교 외교관] -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월남전당시 미군과 한국군의 전과에 대해서 인터뷰를 하는데, 두 나라 군대의 대변인의 태도가 많이 달랐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국군의 대변인은 용맹한 한국군이 베트콩과 월맹의 수괴들을 일거에 전멸시켰다는 표현을 한 반면에 미군의 대변인은 불가피한 상황에 의해서 상대방과 아군의 많은 희생자를 발생시키면서 xx지역에서 월맹군과 배트콩을 몰아냈다고 인터뷰하였다고 한다.

베트남 전쟁을 바라보는 두 나라 국민들의 시선을 인식하기도 하고, 적대감과 호전성을 부추켜서 아군의 사기를 끌어낼 것이냐 아니면 전쟁의 정당성을 인식시켜서 아군의 사기를 끌어낼 것이냐 하는 선택의 차이이기도 한듯 하다. 참전의 깊은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국민과 이해할 수 있는 국민의 차이를 대변하는 인터뷰이기도 한듯 하다.

정치, 경제, 외교등 국가정책의 모든 부문에 있어서 인간의 마음이란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이라는 표현들은 두 말할 나위없이 옳은 표현인데, 이념문제와 관련해서는 지나치게 이념시스템에 맡겨둘려고 하는 문제때문에 북한이나 한국이나 개혁의 시기를 놓치고 퇴행성을 띄는 경우가 많은듯 하다.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모든 관점을 권력관계에 두고 있는 정치지도자들이나 좀 더 부드럽고 공익적인 정치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국민들의 관점에 근거한 탓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래전 노인 분들과 가깝게 지낼 기회가 있었는데, 그 중에 리더가 되고 싶어하는 욕심이 강한 노인 분들이 종종 있었다. 그런데 학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그 '리더'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성마른 권력을 부리는데, 문제는 점점 경화(硬化)되어가는 지력(知力)을 극복하지 못해서 폭력적이 되거나 자기과시를 위한 행동만 하다가 주변인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기 일쑤였다. 그 시절 그 추억이 가져다 준 사회분위기가 권력관계인 탓에 누구나 작은 왕국의 제왕이 되고 싶어하는 욕구의 발현인 것은 이해가 가는데, 뭔가 수월하게 잘 되는 일이 없었던 것 같다.

권력지향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강한 권력에 대해서 복종하고 약자에 대해서는 지배할려는 성향이 강한듯 하다. 인간관계를 수직관계로만 바라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듯 하다. 그런데 그런 관점은 생각할 수고를 덜어주기 때문에 편안하기는 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댓가는 '불성실한 문제해결'이라는 결과로 나타나고, 그것이 사회나 국가전체로 보면 '퇴행성'이라는 느리지만 잔인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는듯 하다.

한 때 한국 최고의 엘리트학벌을 가진 젊은이들과 일해보기도 했는데, 수직적 인간관계에 대한 관점, 출세욕구등으로 굳어진 관점은 사회의 밑바닥에서 어떤 교양도 습득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상황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인간의 가치, 공익적 신념등을 교육 받지 못한 한반도의 민중들이 분단이 되어서도 혈기 맹랑한 자충수(自衝手)를 두고 있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교육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일제시대라는 암울한 시기가 더 암울했던 점은 한반도의 민중들이 어떤 인문철학적인 교육도 받지 못하고 기술교육이나 권력관계에 예민한 본능만 습득한 탓에 북한과 같은 어두운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가끔 매우 권력지향적이거나 국민들이 당면한 문제에 대해서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는 정치인들을 보면서 하는 생각은, 자칫하면 못난 국민들과 못난 정치인들이 상호작용하면서 장기적으로 국가와 사회를 퇴보시키겠다는 생각이 든다. 

2016년 1월 2일 토요일

아름다운 도전 / 오리아나 팔라치의 "아니오"

"산을 오르면 밥이 나오나 떡이 나오나?" 어떤 지인의 심금을 울려주던 명대사다. 요즘 히말라야라는 영화가 국민들의 심금을 울려주는데, 나는 오래전에 건강때문에 운동을 지나치게 하다가 자주 만나는 지인으로부터 끊임없이 비난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돈자랑과 안정된 생활을 자랑하는 지인에게 태어날때부터 모자랐던 건강을, 안정을 찾을 나이가 되서도 챙겨야 하는 이 불평등하고 불합리한 상황을 인식하고 불편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니 나는 건강을 갖게되는 대신 재산이 없고, 지인은 재산이 있는대신 건강을 잃게 되었다. 사람은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는 면에서 보면 누구나 평등한듯 하다.

아주 오래전 권력자들의 천적이라는 유명한 여성저널리스트 오리아나 팔라치의 인터뷰집인 [거인과 바보들]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다시 찾아보니 그 책의 서문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들어보라. 나에게 있어서는 인간의 존엄성의 가장 아름다운 기념비는 펠레폰네소스의언덕 위에서 보았던 것이 아직도 유일한 것이다. 그것은 동상도 아니었고 깃발도 아니었으며 "아니오"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oXc"라는 세글자였다.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나치 - 파시스트들의 점령하에 숲속에서 그 세글자를 새겨놓았다. 그리고 아무도 거기에 머무르지 않았던 30년동안 그 세글자는 햇빛이나 폭우에 퇴색하지 않았다. 그 당시 나치 - 파시스트 지휘관들이 흰도료를 범벅하여 그 글자를 지워버렸다. 그러나 즉각적으로, 거의 마력적으로 햇빛과 비는 그 흰 도료를 벗겨버렸다. 그러나 점점 그 세 글자는 완강하고, 필사적으로 지울 수 없게, 표면위에 다시 나타났다.

오리아나 팔라치는 그 "아니오"라는 말을 명심하라고 책의 서문을 끝내고 있었다. 그 당시 수많은 세계의 권력자들이 오리아나 팔라치와 인터뷰를 하지 않으면 세계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우스개소리가 들릴정도로 오리아나 팔라치는 권력에 대해서 인터뷰하고, 실상을 알리며 완강하게 비평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오리아나 팔라치의 아버지는 무솔리니에 대항하여 "행동당"이라는 레지스탕스조직을 이끌다 체포되어 나치의 가스실로 끌려가는 도중에 탈출했다고 한다.

[거인과 바보들]이 출판되었을 1970년대에는 전세계적으로 냉전시대였고, 이념분쟁과 더불어 이란에서 호메이니의 종교적인 정부가 들어서는 등 정치적인 억압이 훨씬 강한 시대였다. 권력에 대한 저항같은 내용이 오리아나 팔라치의 인터뷰를 바라보는 주요한 관점이었을 것인데, 지금 다시 새로운 관점, 처음에 언급한 내용과 관련된 관점으로 보니 오리아나 팔라치의 아버지와 관련된 과거 경험은 정치적인 억압에 대항하는 강력한 '아니오'라는 입장으로 관심이 집중되고, 결국 오리아나 팔라치의 대담한 행동을 이끌고 업적을 이루어내게 만들었다는 연결고리가 생각났다. 경험은 관심을 낳고, 관심은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가져다 주는 인간 삶의 메카니즘을 이해하게 한다는 생각같은 것이다.

무엇인가 나와 다른 것에 도전하는 누군가는 그 도전으로 삶의 방향을 이끈 어떤 경험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옳고 그르냐의 문제는 전혀 타인이 평가할 문제가 아니고 그 도전을 위한 열정 자체가 사회적 인습이나 유행, 억압등에 대해서 '아니오'라는 저항을 하고 있다는 사실, 그런 사실에서 인간의 가치를 다시 한 번 보게 해 준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다. 왜 나는 생각없이 남들과 똑같은 형태로 살지 못함을 자책하고 있는지 자신을 한 번 돌아봐야 할 것 같다. 사람은 원래 똑같지 않은듯 하다. 특히 건강에 관해 밝힌 내 입장처럼 원래 건강에 관해 가시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에게 운동만 하고 있음을 비난할 이유는 없는듯 하다.

권력은 물리적인 형태, 정신적인 형태등 다양한 형태로 발현된다. 우리는 잘 모르지만 대중사회에서 '일반적인 삶'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이 있는듯 하다. 그것에 대해서 '아니오'라고 말하며 무엇인가에 도전하는 삶은 그 자체가 아름다운듯 하다. 몇 가지 이미 밝혔지만 공부에 몰입하던 젊은이, 남극횡단을 하던 여성이나 노인탐험가, 그리고 과거의 경험때문에 끊임없이 세계의 권력자들을 괴롭히던 오리아나 팔라치, 이 모든 도전들이 아름다운것 같다.

자주 지인들로부터 잘 살아왔느니 못 살아 왔는니 하는 논쟁을 듣는다. 그럴때면 한 마디로 일축하곤한다. "인생은 짧고 나는 확실히 죽을 것이니 앉아서 뭉개지나 말자"라는 생각만 한다고 말한다. 언제가 안일한 태도로 돌변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마다 아니오(oXc)라고 하며 다시 내 자신을 추스릴 것이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는듯 하다. 

2016년 1월 1일 금요일

남극을 횡단한 젊은 그들

겨울이 오면 한 번씩 들춰보는 일기장의 한 페이지가 있다. 사실 일기는 안쓰지만 심각한 심신상태의 저하를 경험하는 시기가 되면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 매모하는 습관이 있는데, 요즘의 블러그질같은 것을 할 수 없을때는 일기인지 메모인지 모르는 비정규적인 글을 썼다.

꽤 오래 되었는데, 주변의 모든 것이 불행했다. 국가는 부도상태이고, 가족들이나 내 자신의 건강도 부도상태였다. 그런데 무력함에 화가 나 있었다. 특히 나쁜 한반도의 역사가 주는 위압감으로 위축된 부친과 관련해서 더욱 그랬던것 같다. 그래서 노동강도가 매우 센 주물공장의 용광로에서 불꽃을 바라보며 몇개월을 일했다. 힘든것을 모르고 체력이 좀 좋아졌는데, 추운 계절이라서 나름 따스함이 좋았고, 일기장에 스크랩해 논 프랑스 여성 페리에트가 혼자서 남극을 걸어서 황단했다는 기사를 보면서 스스로가 불평을 자제했다. 훗날 어떤 불우한 청년이 용광로에서 발을 헛디뎌 사망했다는 기사나 초등학교만 졸업한 그때 그 일을 함께 하던 동료가 회사가 부도가 나 임금을 못받자 빌딩처럼 높은 굴뚝에 올라가 뛰어내리겠다고 자살소동을 벌인 사건이 티브이뉴스에 방영됐을때는 가슴이 아팠다.

그 시절에 비하면 정신이 많이 약해진것 같아 스케이팅을 할 때 자세를 풀지 않고 장거리 운행을 하는데, 체력이 그다지 나빠지지 않았으니 정신력이 많이 문제인듯 하다.

그 당시 신문기사(스크랩은 해 놓았는데, 인터넷검색에도 안나오고,어느 신문인지는 모르겠다)에 의하면 로랑스 드 라 페리에트는 당시 39세, 한국나이로는 40세였다. [남극점 단신정복 첫 여성 페리에트]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뽑았다. 1300킬로미터를 130킬로그램의 짐수레를 끌며 55일간 행군을 했다고 한다.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그녀는 초속 100미터를 넘는 강풍과 영하 30도의 추위를 이기고 하루 평균 21킬로미터씩 걸어서 남극점을 밟았다. 미국 캠프인 패이트리어트 힐즈에 도착하여 두달만에 먹는 샌드위치와 디저트같은 부드러운 음식을 정신없이 먹었다는 내용도 있었다.

이 밖에도 34살의 영국여성인 팰리시티 에스턴(Felicity Aston)이 남극을 횡단한 수기인 [세상의 끝에 혼자서다]라는 책이 있는데, 지난 겨울에는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이 밖에도 레이널 파인즈라는 한국나이로 70세인 탐험가가 시각장애인을 위한 1000만달러의 기금을 모으기 위해서 남극을 횡단하겠다고 한 기사를 본 것 같다. 노르웨이 여성인 리브 아르네센도 39세에 혼자 1100킬로미터를 걸어 남극점을 밟고 한국나이 49세때에는 미국여성과 함께 3700킬로미터를 걸어 남극대륙을 횡단했다고 한다. 리브 아르네센은 모험에 불안이 따를지라도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녀는 늘 긴장했지만 자기가 남극에서 사고를 당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다 잘 되리라고 믿었다고 한다. 실용적인 관점에서 보면 불안한 마음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듯 하다.

내가 제일 흥미로웠던 것은, 불안이 나를 마비시키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내가 어떻게 대처할까 하는 점이었다. 불안이란, 달리 말하면 흥분이다. 우리가 행복이라고 기억하는 것은 종종 새로운 것에 열중해서 흥분할 때이다. 우리는 더 나아가기 위해서 불안을 참아야 한다. 많은 이들이 자기 인생을 자기가 선택하지 않은 것처럼 살고 있고, 무엇인가를 할 기회가 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불안하지 않은 지역에서 절망과 같이 살아가기를 계속하면서 인생은 어쨌던 그런 것이라고 체념하게 한다. 불안을 즐기지 못하면 행복을 누릴 수 없다.

- 리브 안데르센 -

생각해보면 삶을 수동적인 태도로 살거나 의미없이 산다는 것은 불행할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해봤다. 그런데 리브 안데르센이 그 이유를 말해주는듯 하다. 

이스라엘 정보국 모사드 / 깊은 생각 깊은 곳에

원하는 주문, 하고 싶은 말, 중요한 생각들이 매주 주말이면 업그래이드 시키고 있는 블러그 글속에 가끔 담아 넣곤한다. 항상 전투적이거나 경직된 사고를 유지해서는 어떤 좋은 생각도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터나 운동장, 인간관계등에서 산만함속에서도 집중력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는데, 그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만약 내가 훌륭한 정보요원이라면 지극한 평범속에서 비범한 생각을 할 수 있는 노력에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지난 정부때는 나같은 평범한 인간의 역량도 무시하지 않고 경계를 해줘서 한 편으로는 역설적인 고마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주변 강대국의 정보기관들이 해외정보활동에 진력하는 동안 한국이나 북한의 정보기관들은 70년 가까운 세월을 이념과 관련된 관료적인 명령에만 충실한 것이 못마땅해서 자주 참견을 한듯 하다. 한 편으로는 한국시민으로서, 이성적인 인간으로서 중요한 '신념의 세계'에서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니고 더구나 대중적인 생각과도 교류할 수 없는(대게 대중은 무거운 정치적 세계에 관심이 없는게 문제다) 처지에 대해서 심한 독존감(獨存感)을 느꼈다. 평범하지만 기본적이기도 한 인간적인 관계인 가족관계나 친구관계들까지 혼란울 겪어서 더욱 심했던 것 같다.

그래도 해외의 동포분들인지 한글로 씌여진 블러그를 독해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외국분들인지는 모르지만 잊지 않고 내 구글블러그를 찾아 주시는 것만해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르겠다. 모사드가 활약하는 중동지방과 더불어 한반도는 세계평화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치는 지역이기 때문에 한반도의 이념관련 문제는 세계평화를 위한 열쇠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해외의 저명한 사회과학자가 트위터에 선팔해 오거나 종교와 같은 비합리적인 사고를 비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블러그를 방문해주던 바티칸의 어느 분에 대해서는 그냥 고맙기만 하다. 어쨌던 우리 모두의 목적은 하나인듯 하다. '한반도의 평화통일'인듯 하다.

모사드에는 데이비드 킴체라는 매너 좋고 생각이 깊은 공작관이 있었다고 한다. 규칙적인 운동을 통해서 20년정도 젊어보이고 탁원한 논리전개와 용의주도한 대처능력으로 동료들로부터 존경을 받기도 하고, 평범하지 않음 때문에 동료들에게 이질감을 느끼게 하기도 했다고 한다. 동료들의 표현에 따르면 킴체에게 '굿모닝'하고 인사를 하면 '얼마나 좋은 아침이란 말인가. 이 좋은 아침이 얼마나 남았을까'를 동시에 생각하는 타입이라고 한다. 킴체는 기획기관과 전략기관을 겸하는 사무실에 배치가 되어 동료직원들의 독특한 버릇을 간파했는데, 아마도 대상이 대외적이건 대내적이건 공작관의 관찰력은 습관일 수도 있겠다 싶다. 그 유명한 우간다의 앤테베공항 구출작전을 기획한 사람이 킴체인데, 모사드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유명하다.

킴체는 아랍과의 전면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음을 여러가지 정보를 종합해서 직감했는데, 이스라엘 군 정보기관인 아만은 전혀 그럴 우려가 없음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아만의 정보책임자들은 전쟁이 일어나도 최소 5일 정도의 조기 경보의 여유가 있으며 그 정도면 이스라엘의 공군이 6일 전쟁과 같은 승리를 확보할 수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그러나 킴체는 아랍 국가들은 '과거의 과오'로 부터 교훈을 얻었다고 생각했고, 표현하자면 상대방도 방법을 다듬어 나가는 개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한 편 시리아에서 이스라엘 전투기가 12대의 시리아 미그기를 격추시킨 사건이 있었는데, 이를 두고 아만은 전쟁이 일어나도 이스라엘이 승리할 수 있는 증거라고 판단했고, 킴체를 중심으로 한 모사드는 비공식적인 정보요원인 '캇차'가 이집트 최고 사령부가 적색비상사태에 돌입했다는 보고를 해 옴에 따라 이스라엘 국방부를 움직여 전쟁상태에 돌입하도록 유도했다. 갑자기 소집된 비상내각회의에서 군 정보기관인 아만은 오후 6시를 아랍의 공격시간으로 예측하였는데, 실제 공격은 1시 55분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이스라엘이 패배할뻔 했고, 나중에 아만 간부들은 대규모로 숙청 당하고, 모사드는 아만보다 우월한 정보기관으로 평가되었다고 한다. 모사드의 자미르 부장은 아만에 대해서 더욱 강력하게 전쟁위험을 강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책임을 지고 물러나기도 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아만과 모사드의 능력 차이는 민간 정보요원을 이용할 수 있는 모사드의 능력과 킴체와 같은 많은 정보들을 수집하여 그것을 종합해서 직관을 발휘할 수 있는 인물이 있는 모사드를, 군대라는 전문적이고 관료적인 성향이 강한 특징을 그대로 부여받은 군정보기관인 아만이 극복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지난 정부의 정보기관 활동과도 관련해서 지적한 적이 있지만 정보기관이 팀제와 같은 수평적인 조직으로 운영되는 조금 더 자율적인 조직이 아니고 정부수반의 비공리적(非共理的)인 명령을 정보기관의 수장이 그대로 부여받아 정보요원들에게 하달하고 일방적으로 그에 따르게 하는, 더구나 이념적이거나 종교적인 비합리적 가치속에 갇힌 명령에 따라야 한다면 정보기관이 아만과 같이 국가의 위태로운 존재로 전락하는 사태가 생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10여년전쯤 나같은 인간이 말하는 언외(言外)의 의미를 이해못하고 이적(夷敵)시하여 생활자체를 교란시킨 관료집단에 대해서 못마땅한 생각이 들기도했다. 정보기관의 간부들이 지나치게 자율적이면 한국과 같은 풍토에서는 정치적인 편향성을 갖기 쉽다는 생각도 들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사드와 같은 애국적인 동질성을 가져야지 킴체와 같은 인물이 자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10여년전부터 많이 생각했던 것인데 한국에도 아만과 같은 군정보기관이 있고, 모사드와 같은 일반정보기관도 있지만 이념적인 적성국가인 북한이 존재하는 한 대공활동(對共活動)은 필요하고, 생각의 방식과 행동에 있어서는 더욱 직관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