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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28일 금요일

불경기와 소비 / 케인즈


어느 대기업이 운영하는 스키장의 고객이 예년에 비해서 절반 이상이 줄었다고 한다. 내 생각에는 민간의 소비경제가 위축된 탓도 있고, 입지조건과 고객들이 사용하는 교통수단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스키장으로의 진입통로를 부실하게 만든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수익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인지 새로운 시설투자를 하지 않아서 고객의 외면을 더 받는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는듯 했다.      

자유시장경제에서 발생하는 대공황과 같은 시장실패현상의 해결을 위해 정부의 간섭을  주장한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즈( John Maynard Keynes 1883 ~ 1946 )는  불황일때는 수익을 기대할 수 없는 기업들이 돈을 빌려 투자를 하지 않을것이기 때문에 통화량을 늘리는것보다 정부가 직접 대규모의 소비를 하는 총수요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하였다.

미국의 루즈벨트대통령은 케인즈의 이론에 따라 뉴우디일정책이라는 정부에 의해서 총수요를 확장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하지만 이차대전이라는 비극적이지만 어마어마하게 총수요를 증대시키는 역설적인 사건이 발생함에 따라서 '정부에 의한 총수요정책'이 큰 효과를 보게 되었던것 같다.

케인즈는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해 현재의 소비를 줄여 미래를 위한 저축으로 전용함으로써 생기는 소비절감효과는 승수효과를 일으켜서 실제로 감소시킨 소비액보다 몇배의 소비액을 감소시키는 효과를 일으킨다고 말한다.  지난 정부가 4대강에 잘못 투자한 비용이 발생시킨 부(負)의 효과를 생각해 보면 21조원이 민간 소비에 동원되었다면 100조원이 넘게 발생시킬수 있는 소비를 희생시켜버린 사건이 된듯 하다.

케인즈는 불황일때는 개인의 소비도 줄지만 기업도 투자를 줄이는데, 기업은 개인보다 훨씬 예측이 불가능하고 변덕스럽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기업의 투자는 개인의 소비성향에 종속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개인의 소비에 비해서 투자량이 크고 계획과 진행의 시간이 길어서 시차가 느린 까닭에 정부의 경제정책에 빠르게 응답할 수 없는 문제가 있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4대강의 문제점을 '먼 훗날 좋은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말하며 미래에 평가를 유보했던 이전 대통령의 언급은 이런 대규모 투자와 결과의 시간차를 인식한 것으로 생각된다.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장기적인 정책이나 대규모의 정책에 대한 맹점을 파악한 언급이었던것으로 생각될수도 있을것 같다. 왜냐하면 한국의 별 볼일없는 소시민도 이 사건을 이렇게 합리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세상이기 때문인듯 하다.

케인즈는 불황이 깊어서 소비자가 일제히 주머니를 닫아버리면 수요를 증대시키는 몫은 정부의 일이라고 하는데, 그보다 소비자의 주머니를 열어주는것이 더욱 합리적인 방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케인즈가 제시했던 의견과 반대 의견을 내놓아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근간이 된 프리드먼의 항상소득 가설에 따르면 저소득층의 소비성향을 진작시키는것이 소비를 증대시키는 효율적인 방법이 될 수 있는듯 하다.


한국의 경제문제와 경제정책의 중심에는 아직도 이념적 프레임이 자리잡고 있어서 저소득층의 소비성향증대를 위한 방법이 좌파적인 정책으로 오인받는 문제는 없는게 좋을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2014년 2월 27일 목요일

양들의 침묵 / 에리히 프롬


언젠가 일터에서 평생을 상하관계의 압박으로 시달리다가 처음으로 관리직이 된 직장상사와 충돌을 한 적이 있었다. 오랫동안 권위적인 분위기에서 억압받고 살아 오다가 이제 억압된 심리의 탈출구를 찾은  상사의 심리상태에 대해서 적나라한 비평을 서슴치 않았기 때문에 상사는 혼돈과 증오심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몽고의 침략에 대항하여 싸우던 고려 하층민들의 애국심은 지배층에 대한 증오심이 침략자에 대한 증오심으로 치환된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편 요즘 러시아의 소치에서 동계올림픽이 열렸는데, 국민의 통합된 의식을 고양시키고 사회적 불만을 해소할려고 금메달에 집착하는 푸틴과 선수들이 획득하는 메달에 열광하는 러시아 국민들의 모습은 언젠가 한국인들의 경험이기도 한 탓에 낮설지 않은 장면이기도 한것 같다.

사회심리학에 큰 영향을 끼친 독일 태생의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 (Erich Fromm 1900 ~ 1980 )은 인간은 사회적으로 고립되거나 추방되는 상황에서 가장 큰 고통을 느낀다고 말한다.  에리히 프롬은 고독감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인간의 메카니즘으로서 권위주의,파괴성, 자동화기계등을 이야기한다.

1, 권위주의 메카니즘은 가학성의 형태로 나타나거나 반대인 피학성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한다. 인간은 자아의 독립성을 포기하는 대신 가학적이거나 피학적인 상황을 통해서 타인에게 심리적인 에너지를 수입하며 그런 관계를 통해서 서로에게 의존하는사회적 연대감을 유지할려는 의도가 있다고 한다.

2, 파괴성의 메카니즘은 상대방에게 적대적이면서도 그런 적대적인 관계에 의존하는 가학성과는 달리 상대방을 파괴하거나 제거할려는 의도가 있는데, 이런 심리상태를 이용하여 하층민들을 적들과의 싸움에 이용하였던 정치적인 역사가 꽤있었던것 같다.   

3, 자동화 기계의 메카니즘은 대중사회인 현대사회에서 개인이 자신의 주체성을 잃어 버리는 현상을 말하는데, 자신이 수행하지 않고 관중으로서 스포츠에 열광하며 고독감을 해소하는 현상을 생각해볼 수 있을것 같다.

이념적 연대감이나 종교적 연대감의 의식 속에서도 고독감이 작용하고 있는듯 한데, 실제로 에리히 프롬이 이야기하는 세 가지 메카니즘을 모두 발현시키는데 이념이나 종교가 큰 공헌을 하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것 같다. 대중의 에너지를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종교인과 복종과 순종으로 정신적인 평안을 구하고 의지하는 신자들, 이념을 구실삼아 적에 대한 적개심을 키우는 대중들, 하는 스포츠보다 보는 스포츠에 열광하도록 유도하는 정치적인 의도등은 대중들의 고독과 침묵을 잘 보여주고 있는것 같다.



2014년 2월 23일 일요일

염전노예와 자유의지 / 센



한국의 신안군 섬에서 일어난 염전노예사건에 관한 기사이다.소치올림픽에서 김연아선수의 고난과 마지막무대에 감동받은 국민들이 눈시울을 붉히고 있을때, 한국사회의 이면에 대조적인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던것 같다. 한 편으로는 사회문제의 중심에 서 있는 염전노예와 사회적으로 선망의 대상이 된 김연아선수가 같은 '인간'이라는 공통점 외에 인간에게 부여된 '자유의지'의 사용에 따른 차이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예가 되는것 같다.

수십년동안 사회전반적으로 염전노예와 같은 '수동적인 자아'를 요구하는 분위기를 사회 곳곳에서 많이 보아왔는데, 사회정체(社會停滯)의 근간에는 자율의식을 잃어버린 개인의 정체(停滯)가 바탕이 되어 온것 같다. 염전노예와 같은 '수동적인 자아'는 탐욕의 에너지로 뭉쳐진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의 관계에서만이 만들어지는것이 아니고 이념문제를 생각하기위해 둘러 본 종교단체의 신도들에게서도 느낀적이 있는데, 한반도 전체적으로는 '이념'이 민중들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에너지로서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노벨상을 수상한 인도 출신의 경제학자 센 (Amartya Sen 1933  ~ )은 [development as Freedom]이란 저서에서 발전은 경제적인 부의 향상을 의미하는것이 아니고 이성에 따라 자신의 행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향상시키거나 인권침해나 빈곤과 같은 부자유를 '제거'하는 의미를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욕망이 자리잡으면 자아가 부실해지는 경험을 하곤 하는데, 경제적인 욕망에 의해서도 노예가 만들어지는 경우가 있는것 같다, 예를들면 염전주인은 '돈의 노예'가 되어 자신의 노예를 파생시킨 형국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경제적인 안정을 찾아서 수동적인 삶이라도 감내하겠다는 젊은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세태를 봐서는 노예를 만들기 위한 교육이나 사회분위기가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생각까지 비약해 보기도 한다.  

언젠가 상하관계가 심각한 일터에서 노예들 가운데도 작업반장이 있냐고 웃은적이 있었는데, 이념의 노예들 가운데도 작업반장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2014년 2월 20일 목요일

국정(國政)은 곧 심정(心政) / 밀


"배부른 돼지가 되는것 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는것이 낫다."고 말한것으로 유명한 미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 ~ 1873 )은 성악설론자이며 군주론을 옹호하는 사회계약론자인 홉스나 의무와 이성을 강조하는 절대주의 철학자인 칸트와는 달리 인간의 욕망은 나쁜것이 아니며 문제가 되는것은 욕망이 아니라 양심이 없는것이라고 말한다.

밀에 의하면 욕망은 독창성을 낳고 독창성은 사회를 발전시킨다고 말한다. 그래서 밀은 다수의 횡포가 있을 수 있는 민주주의정체에서는 항상 소수의 의견에 귀를 귀울여야 하며 토론과 대화에 열린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말한다. 밀은 인간의 욕망에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는 홉스나 칸트의 사상은 서양 크리스트교세계를 이끌었던 캘비니즘에서 자기의지를 부정하고 '신의 의지'에 따를것을 주장하는 분위기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직업소명설을 주장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정신적인 바탕이 된 캘비니즘이나 인간의 욕망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여 미국식 자본주의의 바탕이 된 밀의 사상 역시 현대 자본주의 사상에 큰 줄거리가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것 같다. 

밀은 조세징수의 방법에 있어서 누진세를 적용하던 미국에 비례세를 적용하도록 유도함으로써 복지국가와는 거리가 먼 미국을 건설하는데 영향을 끼친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에 칸트의 의무론은 독일인들에게 개인의 욕망을 억제하고 공동체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도덕적인 분위기를 유도함으로서 독일식 사회민주주의의 바탕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한때 독일에 시련을 안겨주었던 독일식 전체주의나 독일인들의 정직한 성향등이 칸트와 같은 사상가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생각까지 들기도 한다.

대체로 유명한 경제학자들의 대부분이 현실적으로 현대 자본주의 경제를 이끌었던 미국이나 영국의 경제학자들이 대부분인데 자본주의 경제는 그만큼 해결해야할 다양한 과제를 남겨놓는다고 해석해도 될것같다. 사람들의 믿음은 자신이 배운것과 접촉한것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것인데, 한 시대의 유명 사상가들이 어떤 방식으로 국가와 사회를 이끌고 있는지는 칸트나 밀이 자국(自國)에 끼친 영향에서도 어렴풋이 유추할 수 있을것 같다. 

내 스스로는 불합리한 이념적인 세뇌에 대해서 깊이 반발하는 입장에 있지만 한국의 역사속에서 그만한 원인과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긴 사건이 있었고, 그 분위기는 계속되고 있고, 역시 계속해서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미국식 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 경제 이념이 어떤 문제를 보이면 역시 적절한 시기에 교정이 되야 하는것도 순리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 경제정책의 이론적인 바탕이 되는 경제학자들의 유학처가 미국이냐 아니면 독일이냐에 따라서 실증적인 경제학 연구에 항상 덧붙여지는 직관적인 경제학 연구결과가 경제정책에 영향을 끼칠수 있다고 생각하면 미국 유학파들의 경제학 이론이 한국경제를 미국식으로 이끌어 온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흔히 자유롭기는 하나 평등은 많이 부족하다고 하는 한국사회의 밑바닥에 사는 사람이 인식하는 사회문제와, 평생을 정치인, 군인, 전문직, 기업인등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인식하는 사회문제는 많이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보고 듣는 세계가 자신이 생각하는 세계이고, 사회문제는 자신의 관점으로만 받아들여지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소통'이라는게 중요한지도 모른다.

한국의 현실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데, 그런 문제를 심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정치가나 경제학자들이 있었는지 의문을 느낄때가 많다. 내가 어려워서 내 주관적인 생각이 일반화 되는 문제가 있는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던져 보지만 어렵다는 생각은 민주주의가 좋아하는 '다수'의 심정인듯 하다.


2014년 2월 16일 일요일

생각하라 저 등대를 / 파스칼


사람들은 돈과 권력과 명예가 중요하다는것을 안다. 그리고 그것들을 위해서 많은것을 희생한다. 그것들은 다른것들을 희생하고 얻을만한 가치가 있는것이라는 시대와 환경의 가르침에 세뇌되어서 현실과 미래를 던져놓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상대적이다. 인간끼리 비교할때만이 가치를 발휘한다. 그 인간의 일생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다. 그래서 그 인간은 모든것에서 우월할 수 없다. 자기가 집중한 시간과 노력하는 부분에서만 비교우위를 갖는듯 하다.

그런 인간의 유한성을 어렴풋이 자각하는 많은 인간들이 더욱 근본적인것을 찾는다. 때로는 종교에서, 때로는 이념에서 그런것들을 찾을려고 노력한다. 더욱 근본적인 관점을 갖게되면 비교의 꺼리가 없어진다. 그래서 종교와 이념은 기본적으로 평등을 추구하는듯 하다.

17세기 철학자 파스칼(1623 ~ 1662)은 저서인 [팡세]에는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라는 문구가 있다. 그리고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다."라고 말한다. 파스칼은 무한한 우주와 위대한 자연앞에 선 자신을 비롯한 인간이란 존재의 무기력함과 고독함을 인지하고 있으며 사고하는 인간만이 위대하고, 사고할때만이 인간은 신에 이르게 된다고 말한다.

어두운 바다를 항해하는 배처럼 사람들은 등대의 불빛을 찾는듯 하다. 때로는 신에게서, 때로는 자신들이 창조한 생각의 구조물인 이념같은것에서 찾는다. 하지만 파스칼의 말대로 등대의 불빛은 인간 자신에게 있는듯 하다.

철학적이거나 인문학적인 사고를 키워주지 않으면, 또는 비판하거나 숙고하는 사고를 키워주지 않으면 어떤 이념이나 종교, 작게는 어떤 사람을 등대의 불빛으로 착각하고 광신(狂信)하는 수많은 광인(狂人)들을 양성할것 같다.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고민을 할만한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듯 하다.

2014년 2월 11일 화요일

창살없는 감옥, 의문없는 나라 / 알튀세르


어느 구태의연한 직장상사가 부하직원에게 윗사람의 지시는 맹목적으로 따르라고 지시하고 있었다. 부하직원들의 창조성이 필요없는 구태의연한 직장으로 가늘고 긴 생명력을 유지하고자하면 모르되, 동기부여와 혁신을 도구삼아 '중단없는 전진'을 하겠다는 목적이 있었으면 가장 무능한 직장상사가 되었을것 같다.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인  알튀세르( Louis Althuser 1918 ~1990 )는 고전경제학자들이 이론을 구성하기위해 사용한 다양하고 폭넓은 개념인'노동'이라는 개념을, 마르크스는 일반적이고 계량적인'노동력'이라는 개념으로 변환시켜서 그 당시 사회문제의 해답을 구했다고 말한다. 마르크스의 '노동력'이라는 개념에 담겨진 질문에는 그 당시 만연했던 자본주의의 고민이 담겨져 있었고, 그런 고민이 담긴 질문으로 사회문제해결의 실마리를 풀어나갈려고 했다는 것이다.

사회는 당시에 직면한 문제에 대해서 끊임없이 의문을 품고 그 해결책을 구함으로써 발전해 나가는듯 하다. 사회에 의문을 품고 의견을 제시하는 이는 반 사회적인 인물이 아니며 미래와 후손들의 번영을 위해서 애쓰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의문은 언젠가 해답을 내놓는듯하다. 지금 이 시대의 사회가 직면한 고민에 의문을 품어 본다면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답이 될 수 없다는 해답이 나올듯 하다.

생각하는 사람의 인식의 폭과 깊이를 바탕으로 의문의 폭과 깊이가 결정되고, 의문의 폭과 깊이에 의해서 해답의 폭과 깊이가 결정되는걸로 봐서는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앓고 있는 좁은 인식의 폭과 얕은 인식의 깊이를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는듯 하다.

좌파와 우파의 프레임에 막혀버린 정치사상의 폭과 깊이, 북한이라는 존재에 막혀버린 세계화의 폭과 깊이,의문과 비판을 제시하는 능력을 키워주지 못한 교육,완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언론등의 문제는 시차를 두고 미래의 번영에 역기능을 할것같다.

사회변화에 따른 의문을 제시하지 못했던 마르크스주의의 패망은 고민하지 않는 믿음이 얼마나 무용(無用)한것인가를 잘 보여주는 예가 되기도 하는듯 하다.

2014년 2월 9일 일요일

한국의 중소기업이 약한 이유 / 패턴의 덫


젊은 인재를 채용하여 끊임없이 혁신을 시도하는 대기업과는 달리 중기업이나 소기업으로 갈수록 구성원의 연령대가 높아지고, 업무는 기계적인 패턴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것 같다. 게다가 조직자체도 상명하복의 수직적 계층관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듯 하다. 잠시 재직했던 어떤 작은 기업의 경영주는 그런 문제점들을 극복할려고 무던히 노력했지만 본인과 오랫동안 터잡고 재직해온 고참직원의 습성때문에 변화를 보지 못한 경우도 본것같다.퇴직하면서 경영주에게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사원들에 대해서 좀 더 폭넓은 고민을 할것을 조심스럽게 제안했던 기억이 난다.

맥그리거(McGregor)라는 경영학자는 인간은 일을 하기 싫어하며 게으르고 이기적인 X론적인 인간과 책임을 맡기를 좋아하며 자율적인 규제가 가능하고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Y론적인 인간으로 나눌 수 있다고 말한다. 룬트스테트(Sven Lundstedt)라는 경영학자는 맥그리거의 X론적인 인간을 독재형 인간으로, Y론적인 인간을 민주형 인간으로 규정하였다.그리고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한 욕구와 잠재력을 지닌 인간을 Z론적인 인간으로 규정하였는데, Z론적인 인간은 상황에 따라서 여러가지 관리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중소기업이 강한 유럽의 강국들과는 달리 한국의 중소기업들이 혁신을 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로 민주화역사가 짧은 사회분위기 속에서 성장해온 세대들에 의해서 경직되게 운영되는 행태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때로는 생각과 습관은 별개의 문제일수도 있는데, 오랫동안 패턴에 익숙해 온 인간의 습성이 하루 아침에 개방적인 성향으로 바뀔수 있다는 가정은 상상에 불과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물며 사회의 정점에서 이념적인 패턴으로 국정을 운영하는 성향이 사라지지 않으면 사회전반에서 패턴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현상은 계속될거라는 생각이 든다.

맹목적으로 대기업을 비난할 수 없는 이유도,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을 바랄 수 없는 이유도 좀 더 근본적인데 원인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인재들이 창업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All or nothing의 위험성 때문인것 같은데, 동창들과의 모임에 나가서도 어떤 보람된 일을 하고 있다고 해도 안정된 직장이나 기반을 잡지 못한 이유로 주눅이 들어야 한다면 그 이유에 대해서는 국가나 사회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2014년 2월 4일 화요일

루카스를 비판


대기업의 하청기업에 반복하여 하청을 받은 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저임금에 놀란적이 있다. 노동조합이 존재하는 대기업에서는 노동조합의 임금인상요구에 맞추어서 임금을 지급하고 비대해진 조직의 운영비를 지출하는것 보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치 않은 일들은 아웃소싱으로 처리하는것이 비용절감에 효과가 크다는 사실은 신자유주의 이념의 합리성을 지원하기위해 많이 사용되는 논리인듯 하다.

그러나 현장을 느끼는 근로자들과 학리적인 이론을 적용하는 이들의 비현실적인 논리는 일치할수 없는 부분이 많은것 같다.

기업의 규모는 크지만 상대적으로 고용의 효과가 크지 않은 대기업에 비용절감의 효과가 집중된다면, 게다가 대기업의 생산공장이 노동비의 절감이나 판로개척의 이유로 해외로 이전해 나간다면 가장 기본적인 국민의 경제생활에 이득이 없을것이라는 것은 확실한것 같다. 한편으로는 한국의 국내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내수위주의 경제구조가 아닌 수출지향적인 경제구조에서는 경제순환의 시작과 끝이 해외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 될것이다.

일본에 비해서 생각보다 훨씬 일찍 저성장 시대와 저출산 시대의 정체기로 접어든 한국경제의 문제라면 경제학자와 정치가들이 현실경제의 현장을 직접 보지 못하고 이념적이거나 학리적인 프레임을 바탕으로 경제정책을 운영해 온 문제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합리적 기대이론을 제기한 미국의 시카고학파 경제학자 루카스(Robert Lucas Jr . 1938 ~ )는 경제정책을 펴는 정부만큼이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이성적인 개인들이 정부의 정책을 예측하고 자신의 행동을 바꾸기 때문에 정부의 경제정책이 현실적으로 무용지물이 된다고 말한다. 예를들면 실업이 늘어서 임금을 낮추어서라도 일할려고 시도하는 노동자는 정부가 고용을 늘리고 경기를 활성화시킬것을 합리적으로 기대하기 때문에 임금을 낮추지 않고 기다린다고 말한다.

한국의 일인당 국민소득이 삼만불에 육박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느 장소에서도 삼만불의 번영을 찾아볼 수도 없을뿐더러 더구나 정부의 경제정책에 합리적으로 반응하는 지적(知的이고 이성적인 개인은 찾아볼수도 없었던것 같다.

어느 날 하청에 하청을 받은 기업체의 사장과 대화를 하였다. 저임금을 못버티면 직장을 옮겨야하는 (그러나 달리 갈곳도 마땅치 않은) 근로자와 마찬가지로 단지 주어진 시스템안에서 경제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서 하청업체를 차린 소박한 의도였다고 말한다.

경제학자의 이론이 정책결정자의 가치판단에 영향을 미친다면 경제학자의 이론도 계량적인 분석을 넘어서 어떤 목적이 있을텐데 그 목적은 '국민 개개인의 후생'이 아닐까 생각한다. 경제정책의 정점에 있는 정치가들이 좌파 우파 논리에 빠져 있거나 신자유주의 같은 경제학자들의 이념적인 논리에 휘둘리면서 한국사회와 개인들은 세사에 시달려서 번영은 별빛이 되어간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