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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28일 월요일

판 옵티콘(원형감옥)의 감시탑


언젠가 남한에 침투한 북한의 특수부대대원이 신비한 일을 겪고 종교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다. 그 이야기를 듣고는 그 사람의 안정된 삶에 대한 욕망과 신념을 수호하고자 하는 의지를 은근히 저울질 해 본적이 있었다. 

프랑스 철학자 푸코(Michel Foucault 1926 - 1984)는 원형감옥안의 감시탑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는 죄수들은 감시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스스로를 규율하는데, 근대사회에서는 여러분야의 권력이 판 옵티콘처럼 조직되어 있으며 이런 권력망을 인식하는 개인은 감옥의 죄수들과 같이 스스로를 통제한다고 말한다.하지만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은 언제든지 감시 당하는 위치에서 감시할 수 있는 위치로 이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 못한 사회는 전체주의 사회라고 말한다.

푸코의 이야기는 민주주의 사회나 전체주의 사회가 모두 감시탑이 존재한다는데 촛점을 맞추고 있는듯 한데, 그렇다면 민주주의 사회나 전체주의 사회 모든 곳에서 존재한다는 감시탑의 목적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모든 사회에서 존재하는 만큼 감시의 목적은 보편적이고 일반화된 이유에서 찾아봐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국가정보기관은 국익을 위해 감시를 하고 있다는게 일반화된 목적이고 다른 부문에서 존재한다는 감시탑은 그 부문의 이익을 위하여 감시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것 같다. 그러나 감시탑이 본래의 목적과는 다른 이유로 사용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봤는데, 감시자와 피감시자 사이의 에너지 흐름에 촛점을 맞춰보면 당사자들의 손익(損益)에 간과할 수 없는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알 수 있을것 같다.

만약 감시탑의 기능이 정적(政敵)을 무력화시킬려는 목적이거나 피감시자를 무력화시켜서 감시자의 권력을 강화시킬려는 목적이라면 민주주의에 어울리지 않는 기능을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나아가서 피감시자가 감시자의 위치로 이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 닫혀있는 사회라면 개인의 자율성이 심각하게 손상을 입는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자존심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하지만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관점의 영역에서만 있는 것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인식의 범위가 좁아서 또는 보편적인 욕망이 판옵티콘의 권력이랑 완전히 다른 방향에 촛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당당하게 자유의지를 말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푸코의 말을 빌자면 근대사회의 시민들은 여기저기에 조직되어있는 감시망속에서 그 감시망을 스스로 인식하며 스스로를 통제하는 감시자가 되어 일상적인 경제활동, 준법, 도덕적행위, 교육등을 수행한다고 말한다. 미리 알아서 숙이고 있다는 뜻인것 같다.

2014년 7월 26일 토요일

공포국가(horror nation)와 계몽국가(enlightenment nation)


도감청등의 통신간섭에 관한 정보를 좀 얻고자 국회내의 의원회관을 방문했다가 2층 정현관에서 어린이 국회에 참여하러 온 어린이들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 "너희 세대들은 우리 세대처럼 살지 말아라"하고 소리 없는 속삭임으로 당부했다. 공포영화를 보고 나와서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화사한 모습을 보고 영화속의 상상에서 갑자기 깨어난 느낌을 받았던것 같다.

그러고 보니 요즘 여러곳에서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것 같다. 연이은 참사들때문에 어두운 분위기인데, 관련된 종교 교주의 시신(屍身)이 티브이 비쳐지기도 하고, 그리 밝고 아름답지 못한 그 주변인물들의 이상한 확신에 찬 모습까지 매스컴에 비쳐지면서 '황혼에서 새벽까지'라는 좀비가 나오는 공포영화의 제목을 연상했다. 거기다 이념이나 종교적인 확신에 찬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념으로 어두운 비극들을 둔감화 시키는 장면을 목격할때면 내 자신은 '호러네이션'에 발을 딛고 서 있다는 생각이 든다.

권력, 권위, 경쟁, 복종, 종속 이런 단어들이 지배하는 곳에서 공포영화를 현실적으로 체험학습 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정치학자 아도르노(Theoder Wiesengrund Adorno 1903 -1969 )와 호크하이머(Max Horkheimer 1895 - 1943)은 [계몽의 변증법]이란 저서에서 비합리적인 미신적 믿음이 신화가 되어 사회에서 강력한 믿음을 얻어내기도 하고, 근대사회에서는 이에 반대하여 계몽이란 명목으로 합리성을 추구하게 되는데,이러한 계몽 역시 생각하지 않는 합리성이 되어 새로운 종교가 된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맹목적인 종교적 믿음과 맹목적인 이념적 의지가 한국사회를 지배하며 호러네이션을 만들어 가는듯 한데, 아도르노와 호크하이머의 말처럼 비합리적인 미신적 요소가 충만한 종교와 계몽적 합리성이란 명분을 앞세운 이념은 '따로 또 같이' 한국사회를 병들게 하는 것 같다. 항상 하는 생각이지만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게 만든 경쟁적이고 기계적인 능률성을 중시하는 교육의 효과는 한국을 호러네이션으로 건설하는데 크게 이바지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국회 정현관에서 웃고 떠드는 아이들과 나의 방문 목적을 함께 비유해가며 느낀바가 있는데, 아이들의 정신은 영리하며 순수하고, 어른의 정신머리는 멍청하며 혼탁하다는 생각을 하며 웃기도 하였다.

2014년 7월 24일 목요일

행복의 나라로


몇일전 무척 화가나고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생활을 위한 지극히 소시민적인 전화통화도 방해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크게 당황했다. 고민할 문제가 생긴 이유로 많이 귀찮았다. 나는 우리모두가 처한 상황들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들에 촛점을 맞추었다.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문제를 객관적으로 또는 근본적으로 탐구할려고 노력했다.나에게는 보수나 진보, 좌나 우로 여겨지는 경향속에 어느쪽에서도 배울점과 낙관적인 장점을 찾을 수 있는 긍정심이 있었던것 같다.

지나간 일을 생각해보면 나는 한국인이 안고 있는 고민의 최일선에 서 있었던것 같다. 이념대립의 와중에서 많이 어두운 삶을 살았던 부모님과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어린 시절, 비정규직의 최 일선에서 느꼈던 전체적이고 불안정한 문제,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 내 자신과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값어치 없는 지성의 세계, 이런 모든 문제들을 생각해보건데 개선을 위한 노력은 이념적인 프레임에 얽매여 어떤 반짝이고 창조적인 생각을 용납 하지 않는듯 하였다. 그렇다고 구태(舊態)를 반복하지 말라는 제안을 반복하는것도 또 다른 구태(舊態)로 여겨질 수 있도록 오랜 참견을 해왔던것 같다.

겸손하고 존중심을 가질려고 노력하는 나의 관점으로 보는 세상이 반드시 내가 살아가는 세상과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깨달음을 얻은것도 하나의 배움이었던것 같다. 내 마음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의 단기적(短期的)인 이해관계가 이리저리 얽혀서 한국(북한은 더욱 그렇다.)을 근근히 지탱해가는것을 보면서 국가라는 공동체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구성원의 일인으로써 많이 고민을 했을 뿐이다.

나는 참으로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는 생각을 위해서 개인적인 인생의 다른 모든 것을 포기했었다. 그렇다고 열정은 커녕 걱정만 있었던것 같다. 내 자신의 행복보다는 한반도에서 살고 있는 나와 어떤 인연(혈연적, 지연적 인연이나 그 밖의 여러가지 인연)을 맺고 있는 많은 남북한 백성들의 행복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해왔던것 같다.

인연과 이해관계의 얽히고 섥힌 관계는 내 자신도 모르는 부분이 많음을 추정해볼때 내가 변화하기를 지향하는 세상과 누군가가 지키고자 하는 세상이 충돌할 것이라는 생각은 예상한 바가 있다. 심지어는 그 충돌관계가 신뢰에 관한 경쟁으로 비화될것을 우려해 준수한 스포츠실력을 갖추어놓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제기하는 문제들이 정치적인 편견이나 이익들과 결부되지 않기위해 '이념'문제를 벗어나지 않도록 많은 고려를 해왔던것 같다.

가끔 행복과 정의라는 두 단어가 시민들에게 얼마나 비중있는 단어로 받아들여질까 고민했던적이 있다. 아무래도 철학적인 교육이 부족하면 정의라는 이성적인 개념이 행복이라는 감성적인 개념에 압도당할 우려가 많은것이 현대 대중사회의 문제이기도 한것 같다. 행복이라는 개념을 말하는 사람은 많아도 정의라는 개념을 말하는 사람은 드믄것 같다.정의라는 단어는 왠지 무겁고, 의무감을 지우는듯 하며, 심지어는 투쟁과도 결부되기 쉬운 박복(薄福)한 단어인듯 하다. 그러나 고려할만한 가치가 있는 단어라는 사실은 누구나 부정하지 않고, 또 항상 현실에서 부족한 단어라는 사실도 부정하지 않을듯 하다.    

오늘 새벽 빗소리가 시끄러워 눈을 뜨고 불을 켜니 공허한 집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오랫동안 다져왔던 정의에 대한 개념보다 행복이라는 감성적인 개념이 마음을 흔드는 순간인것 같다. 이상과 고민이 인간적인 고독에 압도당하는 순간이 나에게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15년전의 어느 봄날, 불치의 암말기 판정을 받고 열차 플랫포옴에서 북녂하늘을 바라보며 담배를 꺼내 물던 부친의 모습도 생각난다. 정의라고 생각되어왔던 이념이라고 하는 인위적이고 이성적인 개념과 고향에서의 추억을 비롯한 행복이라고 하는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감성적인 개념이 충돌하여 감성적인 개념이 내 속에서 승리한 순간이었던것 같다. 그래도 그 순간은 항상 부족하고 짧고 강렬했었기 때문에 내 마음을 아직도 흔드는것 같다.        

행복이란 없는듯 하다. 그럼에도 지향해야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행복이라는 목표가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며 삶을 지탱해주기 때문인듯 하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항상 삶의 가장 저점(低點)을 찾아다닌듯 하다. 왜냐하면 행복하지 않은 과거가 항상 불행을 '각오'하도록 마음을 다져주었기 때문인듯 하다. 어떨때는 진정한 신앙으로 행복을 구하는 이들의 밝은 표정이 부러웠던적이 많다.

나는 파리의 한 복판에 살고 있다. 집을 나서면 나는 벌써 전원과 고독속에 들어간 것 같다. 그렇지만 내가 가야 할 길은 멀고, 또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에 만난 온갖 불쾌한 환경들이 내 마음을 우울하게 하고, 겨우 목적지에 도달할 때에는 벌써 그날 하루의 반이 고민 속에 지난 것이다. 그렇지만 목적지까지 갈 수 있다는 것만도 불행 중 다행인 것이다.

간사하고 악독한 인간들이 우글거리는 행렬로부터 빠져나왔다고 느낄 때에는 나는 무한한 기쁨을 느낀다. 그런데 자기자신이 나무 그늘이나 푸른 들판에 있는 것을 발견할 때면, 나는 내가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낙원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되며 또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나라고 생각하면 나 자신도 모르게 마음 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환희를 느끼게 된다. 

행복이라는 것은 항상 변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며 그것은 이 세상에서 오직 인간에게만 주어진 선물인 것같다. 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끊임없는 흐름 속에서 움직이고 있으며, 어떤 것이건 변하지 않는 모습을 지닐 수는 없게 되어있다. 

우리들 주위에 있는 것은 예외 없이 모두 소용돌이 속에 있으며, 나 자신도 그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다. 오늘 사랑하고 있는 것을 내일도 변함없이 사랑하고 있으리라고는 누구나 자신있게 말 할순 없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우리들 생활속에 행복을 원하는 그 자체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일시적이나마 정신적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그것을 즐기자. 우리들의 사소한 과실로 그 즐거움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 

- 루소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중에서 -

위에서 인용한 루소의 글은 루소가 "전 세계가 나를 박해하고 있다"는 피해망상에 시달리고 있을때 쓴 글이다. 18세기 후반의 부패하고 타락한 사회문명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던 루소가 정신적인 고독감을 이겨내기 위해 '행복'에 대해 고민했던 마음이 느껴진다. 지적(知的)인 루소보다 더 무지하고 스포츠를 좋아하는 내 자신은 루소만한 고독감을 느끼지는 않지만 한 인간으로서 '행복'이란 개념은 항상 고민하고 있는 단어임에는 틀림없는듯 하다.     

2014년 7월 18일 금요일

동조와 복종의 나라 일본과 북한


일본의 우경화현상을 생각하면서 북한의 '좌경화'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함께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원래 '극과 극'은 통하는 것이 있다고 두 국가의 이념적 편향성은 근본이 유사한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한국에서 일본과 북한이라는 양쪽 세력을 우려하거나 심지어는 공포감을 느끼는 감정은 쉽게 '뭉쳐지는'큰빗이끼벌레같은 성향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에서는 우파성향이 있다면 북한에 대한 우려를 호소하고 있고, 좌파성향이 있다면 일본에 대한 우려를 호소하고 있는듯 한데, 헤겔의 변증법적인 사고를 빌자면 정(正)과 반(反)은 있으되 합(合)은 좀처럼 도출되지 않는 어두운 상황은 한국을 둘러싼 양쪽의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국가들의 영향도 크다는 생각이 든다.

북한은 말할것도 없고, 일본이라는 나라도 정치학이나 사회학이 발달한 서양사회과학의 관점으로 보면 참으로 기이한 나라인듯 하다. 아니 어쩌면 국제사회의 작지 않은 하나의 세력으로써 '구분되는 정상성'으로 보아야 할지는 모르겠다. 일본은 자유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좌파정부가 들어서지 않는 국가인듯 하다. 그 이유는 두가지로 해석할 수 있을듯 하다.

첫째 일본인은 동조와 복종에 익숙해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인에게 있어서는 개인주의보다는 공동체주의가 훨씬 익숙한듯 한데 일본인들에게 공동체주의가 지향하는 목적은 합리적인 타혐과 설득을 중시하는 서양에서 지향하는 개인의 생존과 행복을 위한 공동체주의가 아닌 공동체를 위한 공동체주의 또는 습성과 본능에 의한 감정적 공동체주의에 가까운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솔로몬 애쉬(Solomon Asch 1907 - 1996)는 사람들은 결정을 내리기 모호한 상황이나 타인에게 배척당하기 싫은 이유로 쉽게 동조하는 성향이 있다고 말한다. 또 하버드 대학교수였던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 1933 - 1984)은 사람들은 자기에게 책임소재가 없는 이유로 비인도적인 명령에 쉽게 복종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한때 일본이라는 나라가 영원히 팽창할 것 같은 분위기가 있었던 시절에는 일본의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인 공동체주의가 경영에서 종신고용이나 가족주의로 나타나는 모습을 오우찌라는 교수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지향해야 할 경영문화의 하나로 여겨진지 얼마 안되는 듯 하다. 하지만 심각하게 빠른 속도로 변해가는 정보화사회의 세계문화는 종신이나 가족같은 전근대적인 분위기의 문화와는 함께 할 수 없는 면이 있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두번째로 일본의 우파는 이념을 위한 이념이 아니고 적어도 어떤 방식으로든지 일본인들의 공감대를 얻어낸것이 오랫동안 압도적인 정치세력으로서 존재하는 바탕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이런면에 있어서는 이념대립으로 인한 처절한 내전(內戰)까지 치룬 한국에 비해서 이념에 대한 관심이 그리 크지 않는 점이 이유가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북한은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한국보다 더 많이 표현하고 있는데, 역설적으로 일제식민지하에서 일본이 한반도에 가져온 '동조와 복종'의 습성을 떨쳐버리지 못한 사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북한민들은 습성에 물들어 있고, 북한의 정치는 집권을 위한 도구로 그 습성을 최대한 이용한 형국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이념적 분란을 압도하는 걱정거리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일본발 동조와 복종의 습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미워하면서 닮는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어떤 이념이 등장을 한다고 해도 그 이념이 편향성을 띄게 된다면 시민들을 동조와 복종의 어두운 세계로 끌어들일 여지가 충분히 있는듯 하다. 

2014년 7월 11일 금요일

피케티와 맨큐의 경제학


오래전 머리 좋은 직장동료가 주식투자를 하다가 실패하여 나락으로 떨어졌다. 10여년동안 가장으로서 역할을 처에게 맡겨놓고 고생하다가 전문직 시험에 합격하여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 주식투자로 인한 채무를 모두 갚고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자 다시 과거와 비숫한 시도를 하였다. 오랜만에 나에게 연락을 했는데, 배팅에 가까운 경제적인 시도를 하지 않고 소극적으로 생활하는 나를 비웃고 있었다. 자신이 곤란을 겪던 날, 끓어 오르는 배팅의 매력을 억누르기 위해서 '마음 다스리는 법'에 관한 책을 읽고 있을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한 편으로는 내 절친중에 스타일이 나와 같은 사람이 있는데, 평생을 질병과 같은 의도하지 않은 불운으로 고생하다가 엔지니어가 되어서 한국사회의 '을'보다 못한 '병'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병'의 대접을 받는 억울함은 자신이 토로한 불만이다. 열심히 일해도 생활이 안정이 안되니 공무원시험을 봤으면 하는데, 시험공부할 목돈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신 자본론'이란 저서에서  "역사적으로 자본이 돈을 버는 속도가 노동으로 돈을 버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기 때문에 부의 불평등은 심화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피케티의 책은 열풍을 불러 일으키고, 현실적으로 빈부격차가 심각해지고 있는 미국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소득재분배를 위한 자문을 얻기 위해 피케티를 초빙했다는 기사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부자에게 중과세를 부과할 것을 주장하는 피케티의 주장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버금가는 혁명적인 충격을 주었는데, 역시 '문제가 있는 경제현실의 개선'이라는 의미보다 '좌파적 경제이론'이라는  타이틀이 먼저 주어질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누구나 좌파, 우파에 관한 프레임이 짜여진 관점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특히 하버드 대학교의 그레고리 맨큐교수는 피케티의 주장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고 하는데, 맨큐교수의 저서 [ESSENTIALS OF ECONOMICS]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여러분은 경제학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실증적 주장과 규범적 주장의 차이를 항상 유의하기 바란다. 대부분의 경우 경제학은 경제가 어떤 원리에 의해 작동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종종 어떻게 하면 경제가 보다 잘 작동할 수 있는지를 제시하기도 한다. 만약 어떤 경제학자가 규범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면, 그는 과학자로부터 정책조언자로의 경계를 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미국의 트루먼대통령은 언젠가 제발 외팔이 경제학자를 만났으면 좋겠다고 이야기 한 적이 있다. 트루먼 대통령이 경제학자들에게 조언을 구하면, 그들은 항상 "한편으로는 이렇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다"고 답변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경제학자들의 답변이 종종 모호하다고 느낀 사람은 트루먼 대통령만이 아닐 것이다. 경제학자들의 이런 경향은 제 1장에서 살펴 본 경제학의 10대 기본원리의 하나에 기인한다. 여러분은 모든 선택에는 대가가 있다는 기본원리를 기억할 것이다.경제학자들은 대부분의 정책결정에 대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떤 정책은 효율을 위해 공평성을 희생할 수도 있다. 또는 미래세대를 돕고 현세대를 손해 보게 할 수도 있다. 정책결정이 쉬운 일이라고 말하는 경제학자가 있다면 그 사람 말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맨큐교수의 말대로 경제학자는 규범적이어서는 안되는듯 하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경제학 이론은 사회가치가 원하는 규범에 봉사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도구인듯 하다. 맨큐교수의 말은 냉철하게 사실관계를 규명해야 한다는  경제학자의 '규범'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트루먼 대통령의 언급에서 보듯이 규범적인 정책결정을 해야 하는 정치가로서는 좀 더 편하게 경제학자의 이론을 현실정치에 적용 시켰으면 하는 기대가 있을런지도 모른다. 정치가가 해야 하는 수고를 경제학자가 좀 더 많이 떠맡기를 기대하는듯 하다.

사실관계는 통계와 계량만 있는 것이 아닌듯 하다. 서두에서 언급한것 처럼 내 자신이 보고 들은 현실경제속에서 자본에 비해서 푸대접을 받는 노동의 가치를 피케티는 더욱 계량적으로 실증화 시킨듯 하다. 피케티의 이론이 빈부격차의 문제점을 교정하고자하는 내용이 있음을 이유로 규범적이라는 누명을 쓰고 있는듯 한데, 혹시 이런 우려의 내면에는 끊임없이 현대 인류의 '머리속의 진화'를 막고 있는 이념적 프레임이 바탕이 된 관점이 도사리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하늘로 걷는 길






하늘로 걷는 길

                         
한라산 중턱길을 홀로 걸었다.

옅은 눈보라는 발목을 감아 올리고,
관목들 사이로 산새는 보이지 않고 
바람만 울고 있었다.

지평선은 하늘로 가는 길 같았다.

순찰차는 눈이 많을거라고 막아섰고,
그래서 걷는 길인데
끝이 없는 길을 걸어갔다.

이상에 매료되어 현실을 망각한 사람처럼
한없이 걸어갔다.

지평선에서 세로선의 날끝을
딛고 서있는데,
가로선으로 하염없이 걷고 있을 사람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관목 사이의 바람처럼 울면서 걷고 있을 것 같았다.

- 이 형춘 -

2014년 7월 6일 일요일

예외상황끼리의 충돌 / 한국과 중국


한국이 중국 시진핑정부와의 교류를 강화 시키는 현실을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의 국공합작에 비교한 컬럼이다. 과거 중국의 국공합작이 결국 중국공산화의 결론으로 끝난것을 우려하고 경계하는 내용이 있다. 중국의 패권주의에 대한 우려와 전통적인 우방인 미국과의 연대가 무너질것을 경계한 내용으로 결론을 짓는다.

어쩌면 과거사의 반복이라는 교훈적 내용, 두 패권국가 가운데서 등거리 외교를 하는 입장으로 몰아버린 내용에 대해서는 누군가 이런 내용의 컬럼을 쓸 것이라는 예상을 한 바 있는듯 하다.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적시(適時)에 등장한 적절한 생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대국(大國)으로서 중국의 패권주의와 공산국으로서 이념에 바탕을 둔 패권주의를 혼동하는 내용이 있는듯 하다. 과거에 유행했던 '사회주의 혁명의 전파'라는 중국도 버린 이념적 패권주의를 이제와서 현재의 중국과 한국관계에 적용시킬 이유가 뭐 있겠느냐 하는 생각도 든다. 또 양국의 근린관계를 지향하는 문제는 두 나라의 패권주의에 얽혀있는 왜소한 한국의 현실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일본의 우경화를 경계하는 양국의 불행한 과거사를 해소하는 공통된 관심사가 담긴 문제인듯 하다.

독일의 결단주의 헌법학자인 칼 슈미트는 한 사회가 분열되었을때 공통의 적을 이용해 단결력을 강화시키는 현상이 있는데, 이런 상황을 '예외상황'이라고 한다.하지만 이런 비상상태를 정규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항상 안고 가야하는 상황은 아닌듯 하다. 과거 이차대전 종결직후 한국의 피동적인 위상이나 과학적사회주의의 공세가 긴박했던 냉전시기의 관점을 지금까지 끌고 다녀야 할 이유가 뭐 있겠느냐 하는 생각도 든다.

왜 항상 우리사회는 이념에 대해서 과장된 태도를 보일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해 본다. 만약 그런 태도가 정의감에 기초하지 않고 이기심에 기초하고 있다면, 내부의 타자(他者)를 공격하고 사회가치를 분열시키는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면 이것이 또한 '예외상황'을 만들어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지금은 국제정세 자체가 '예외상황'이 아닌데, 일본은 '예외상황'을 만들려고 하고, 한국과 중국이 그런 '예외상황'을 막을려고 하니 그것을 이유로 한국을 또 하나의 '예외상황'으로 유도할것 같은 생각을 본듯 하다. 지금의 상황을 좀 더 편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관점도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내에서 이념적 분란보다 더 심각한 '예외상황'이 어디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2014년 7월 4일 금요일

교육이 만든 고립국 북한




국가를 운영하기 위한 전략도 없고, 변화에 대한 감각도 없이 국제정세에 감각적으로 대응하는 북한을 보면서 잘못된 교육으로 다져진 비합리적 이념국가의 실상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장면인듯 하다. 동시에 비숫한 세계로 물려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하여 경각심을 가져야 되는 교훈을 일깨워주는 장면인듯 하다.

일찌기 실용주의 노선을 택해 변화발전한 중국의 국가수반인 시진핑의 여유로운 모습, 비합리적인 국내정세에 여유를 잃은 한국, 맹방으로부터도 버림받는 완전한 고립국으로 거듭남을 알려주는 북한의 중국에 대한 비난의 장면들은 이념의 세계에 발을 디딘만큼 무너지는 국가의 운명을 표현하는듯 하다.

정치지도자의 폭넓은 국제정세에 대한 감각이 부재(不在)한채로 건국된 북한은 이념국가로서의 정체성만 다져나가기위해 서둘렀는데,북한의 건국지도자인 김일성은 북한의 수뇌부로 성장할 젊은 두뇌들을 이념정치적인 인물로 성장시키기에 집중했었던것 같다.

특히 선군정치를 표방하는 북한에서 북한군장성들의 엘리트교육코스는 다양하고 급속하게 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응이 불가능한 두뇌를 만드는데 크게 공헌한듯 한데, 해외유학파이고, 이념적인 강박관념이 덜 할 수 있는 현재의 북한지도자인 김정은이 개혁을 시도할려고 해도 국제적이거나 현대적인 감각이 없는 북한군 수뇌부의 긴장된 방해를 받고있다는 생각이 든다.

반드시 해외유학이 아니더라도 국내에서 다양한 정보활동, 예를들면 자유로운 독서나 해외방송등을 통해서도 국제정세에 대한 다양한 지식을 습득하는 길이 있는데, 한창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에 이념적이고 정치적인 인물로 성장받기를 강요받은 북한군 장성들의 비합리성은 변화를 위한 북한의 노력에 방해가 되는듯 하다.

그밖에 명백히 내 자신을 돌아볼 때,나의 인생에 대한 자세는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얻은것보다 독서를 통해 얻은 것이 더 많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작가나, 정치가 중에서 당신에게 가장 영향을 준 사람은 누구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대답하기가 무척 곤란합니다. 아니,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이야기를 끝내고 싶습니다. "나는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나는 아주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내가 읽은 책들이 내가 태어나고 성장한 환경과 어떻게 연결이 되었는지는 잘 모릅니다. 

정적(政敵)인 아데나워로부터 아버지 없는 사생아로서 비난받았던 독일의 빌리 브란트 수상이 저널리스트인 오리아나 팔라치와의 대담중에 이야기한 내용이다. 환경이 열악할때는 독서로서 좁은 관점을 돌파하는 방법이 있는듯 하다.

2014년 7월 1일 화요일

비합리적 신념의 그 사람


가진것을 자랑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자신이 그것때문에 행복하다는것을 알리고 싶어했다. 물론 내 블러그는 비뚤어진 신념들을 비평하고 교정하는게 목적인만큼 그 사람이 종교적 믿음으로 충만한 사람임을 회피하지 않고 생각해보았다.

주변의 누구도 그 사람이 신념을 표현하는것에 대해서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그 사람이 타인과 친밀감이나 공감대를 형성할려고 노력하지 않는 만큼 타인들도 그 사람의 신념에 대해서 공감대를 형성할려고 노력하지 않는듯이 보였다. 결국 사회적 관계에서 격리된 신념은 점점 배타적으로 익어갔다. 급기야는 자신의 신념에 동조하는 무리를 찾아 내집단화 시키며 외집단과 격리된 또 하나의 분열된 세상을 만들어갔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사람도 위와같은 상황의 분열된 집단사이에 서게되면 '어떤 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는데, 비합리적이고 독선적인 신념들은 중립적인 태도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듯이 보였다.

사랑의 삼각형 이론(The Triangular Theory of Love)을 발표한 오클라호마 주립대학 부총장인 로버트 스턴버그(Robert Sternberg 1945~ )는 사랑은 친밀감, 열정, 책임감의 세가지로 구성되어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시혜적(施惠的)이거나 한 발 더 양보해서 호혜적(互惠的)인 개념으로 생각한다. '사랑'을 이야기하는 종교적 믿음들은 그런 덫에 걸려 있는듯 하다. 사랑은 친밀감, 열정, 책임감을 동반하거나 전제로 하는 개념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함께 이해할 수 없는 독선이 된듯 하다.

사람들은 주거나 받을 수 있게 하는 사람보다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