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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30일 월요일

한국의 이념과 윤리적 바탕


자본주의는 개인의 무한한 이익의 추구가 본질이다. 개인의 이익이 공동체의 이익으로 집합되는것으로 봐서 분명히 자본주의의 발달은 인류사회에 공헌하는 바가 컸던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자본주의 시장이 발달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많은 사상가들은 자본주의가 화폐축적수단을 이용하여 끊임없는 욕망의 함정으로 사람들을 타락시킬것이라고 예측하였다.

마르크스의 과학적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타락과 부패의 결과물이며, 타락한 자본주의에 대하여 증오심같은 감정적인 문제가 개입되어있는 감정의 산물이기도 한것 같다. 마르크스시대의 자본주의는 부패와 타락의 정점에서 많은 사람들의 공분(共憤)을 사고 있는 배경과 가난에 시달린 마르크스의 개인적인 사정이 맞아떨어진 점이 있었던듯 하다. 게다가 산업혁명이 무르익고, 과학적인 발견이 가속화됨으로 과학적인 추세가 급속도로 확장되던 시절에 영리한 마르크스는 민중의 감정과 자신의 불만, 사회적 추세를 절묘하게 결합시킬 수 있었던 인재였던듯 하다.

극도의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이 꾸준히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을 생각해 보았다. 항상 미국의 풍부한 자원과 전성기때 축적된 자본은 한국이 미국식 자본주의를 흉내낼수는 있어도 결과물은 결코 같을 수 없다는 한계를 보여주는것 같다. 게다가 미국은 다민족,다인종국가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사회전반적으로 '애국'과 '세계평화'을 강조하는 분위기를 사회이념으로 투입시켜서 미국식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사상적으로 보완하고 있는듯 하다.

독일의 사회학자인 베버( Max Weber 1864 ~ 1920 )는 자본주의가 급속하고 완전하게 타락할 수 있는 이념임에도 불구하고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서구사회의 또 하나의 사상적 배경인 개신교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영향이 있다고 하였다. 종교개혁 무렵에 캘빈이 주장했던 성실,근면, 금욕으로 근면하게 재산을 축적해야 한다는 캘비니즘은 자본주의가 무한한 욕망과 개인적인 일탈로 종말을 맞이하지 않도록 지탱해주는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인간이 가장 중요하다'는 이념의 윤리적바탕을 잃어버린 과학적사회주의(공산주의)의 종말은 필연적인듯 하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와서 '먼저 해결해야 할 인간중심 또는 공동체중심의 본질적인 바탕의 개선없이 '신자유주의'라는 명분으로 사회발전을 과거로 회귀시키는 추세가 생기기도 하는것 같다. 원래 신자유주의란 정부가 노를 저어주지 않고 키잡이 역할을 하는 건설적인 의도였지만 이념의 바탕이 되어줄만한 더욱 '근본적인'윤리사상이 부재(不在)하여 마르크시즘(공산주의)과 같이 부패와 일탈로 종결을 짓는 예정된 수순을 밟고 있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언급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캘비니즘과는 안드로메다 만큼의 거리가 있던 종교적 윤리를 정치에 개입시켰던 지난 정부의 일탈은 두고 두고 후유증을 남기는것 같다. 윤리적 바탕이 없는 이념대립으로 한국사회가 63년전과 같은 과오를 되풀이 해서는 안될듯 하다. 북한의 예에서 보듯이 '인간을 생각하지 않는 이념'이란 천천히 사회공동체를 무너뜨리는 머리좋고 인내심이 많은 적군인듯 하다.

2013년 12월 27일 금요일

한국에서 이념의 양극화 / 그 곳엔 섬이 있다.


노조도 없고, 기업도 어려운 곳에서 고용주와 종업원의 어려움을 함께 느끼면서 한국경제 안에는 '섬'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것 같다. 국가의 제도적 지원도 없고, 이념적인 지주도 없고, 소수의 그들만이 옹기종기 모여서 꾸려가는 한국경제의 '섬'이 있는것 같다.

한국에서는 매스컴이나 사회과학의 학리적(學理的)인 해석이 적용되기 힘든 곳이 있는데,소외된 제3의 노동시장을 형성하는 제3의 기업영역(소기업등)들이 그런것 같다.

철도 민영화문제로 한참 소란스러운데, 나름 정부와 철도노조와의 대결은 대통령이 존경한다는 대처의 정책(대처리즘)으로 표현되는 신자유주의 정책과 언젠가는 정치적인 주도권을 얻을 수 있는 야당의 이념적인 바탕이 될 수 있는 국가사회주의 이념의 대결로 비화되는것 같다.

영국의 대처수상은 복지과잉으로 침체된 영국경제를 자유경쟁시장 정책의 부활로 되살려놓고, 아르헨티나와의 포클랜드전쟁을 승리로 이끈 업적으로 영국인들의 존경을 받기도 하였다.  영국이 가장 필요로 하던 시절에 근면이 최고의 가치였던 빅토리아여왕 시대의 전성기의 영국으로 돌아가자던 대처수상의 호소는 옛 영화를 꿈꾸는 영국인들의 자발적인 동조를 이끌어내는데 부족함이 없었던듯 하다.

하지만 생각해보건데, 아직은 한국인의 근면성이 문제가 된다거나 과잉복지의 문제를 안고 있는것은 절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보수당의 거물이었던 이노크 파월이 진부한 이야기를 계속하자 "건설적이 되시오 이노크 건설적으로 .........."라고 외친 대처수상의 심중에는 시급한 현실개선의 의중이 담겨 있었던듯 하다.    

철도의 민영화가 가져다주는 의미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시민들은 안정된 고용환경과 작지않다고 느끼는 급여수준을 가진 철도노조원들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 마음속에는 비판이 아니라 시민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호소하는 마음이 담겨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는것 같다.

이념적인 프레임은 중요하지 않은것 같다. 이념에 대한 반론을 학리적으로 풀어내는 여유도 없는것 같다.추운 겨울날 폐지가 잔뜩 담긴 수레를 끌고 교차로를 가로질러 가면서 교통순환을 막는 노인의 얼굴에서,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젊은 날의 패기가 일찌감치 고개숙인 심리적 안정감(?)으로 자리잡는 젊은이들의 고민어린 얼굴에서  한국의 미래를 보는것 같다.

한국에는 정치가도 모르고 학자들도 모르는 '섬'이 있는것 같다.

2013년 12월 26일 목요일

국가경제와 개인경제의 균형발전 / 리스트


철도민영화문제로 정부와 철도노조와의 대립이 심각한듯하다. 비효율적이고 만성적자에 시달리는 철도에 자유주의 경쟁시스템을 도입하려는 정부와 공공재적인 성격이 강한 철도를 민영화시켜서는 안된다는 국가사회주의적인 입장의 대립으로까지 비화되어 한국에서 발생하는 이슈는 이념대립으로 확산된다는 '법칙성'을 보여주는듯 하다.

아담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 경제학이 경제이론의 바이블로 통용되던 시절, 다른 유럽국가보다 후진적인 경제구조를 가진 독일의 경제학자들은 독일의 경제는 독일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연구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른 유럽과는 달리 시민혁명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계몽전제군주인 프리드리히대왕등에 의한 하향식 근대화과정을 거친 독일로서는 국민의 경제적인 영역에 국가라는 집합체가 차지하는 비중이 클 수밖에 없는 여건을 가지고 있었던것 같다.

개인은 국가의 세포같은 존재라는 국가유기체설을 주장하였던 헤겔처럼 독일에서는 프랑스나 영국같은 유럽국가와는 달리 국가와 같은 공적영역의 위상이 다른 성향이 있었는데, 경제학에 있어서도 예외가 없는듯 하다.

당시 독일의 역사학파경제학자 리스트(Friedrich List 1789 ~1846 )는 개인과 국가는 분리된 형태의 독자적인 개체들이 아니고, 개인의 생산력은 국가나 민족공동체의 영역과 결합되어야 총체적생산력이 극대화될 수 있다는 총체적생산력이론을 내놓았다. 리스트는 정치, 사회, 제도, 법,도덕, 관습같은 정신적인 생산영역과 농업, 상업, 공업같은 물질적인 생산영역의 결합으로 총체적인 생산력이 증대된다고 하기도 했는데, 국가와 개인, 정신적인생산력과 물질적인 생산력이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지속적으로 발전하도록 국가와 국민이 항구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동태적 균형이론을 제시했다.

한국에서는 통계로 잡힌 경제성장률과 시민의 체감경제성장률이 다른것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대기업과 경공업의 해외진출로 산업공동화현상이 일어나서 실업률이 높아지고, 국가의 부(富)와 국민 개인의 부가 일치하지 않는 현상을 보이는데,국가의 경제와 개인의 경제가 심각하게 불균형한 현상을 보이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 청년실업도 문제고 중장년실업도 문제인 현실에서 일은 도대체 누가 하고 있는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눈에 밟히는 현실은 어렵기만 한듯하다. 풍부한 자원과 기술력, 거대한 내수시장을 가진 미국의 경제시스템은 한국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개인경제의 최소한이 언제나 준비가 되어있는 미국에서는 국가와 개인의 총체적인 균형을 고려해야하는 부담이 없을듯 하다. 하지만 한국의 개인경제는 국가경제와 유기적으로 결합되지 않으면 무력해지는 문제가 있는듯 하다. 어떻게보면 한국의 정치나 공적영역이 어떤 일을 해도 국민들에게 욕을 먹을 수 밖에 없는, 총체적인 어려움에 골머리를 앓을수밖에 없는 태생적인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한국이기도 한것 같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경제문제는 이념문제와는 다른 관점으로 보는것이 시급한듯 하다. 개인을 위한 국가의 역할도 더 중요하게 고려되어야하고, 개인과 국가가 전혀 다른 영역으로 생각되어지지 않도록 소통도 자유로워야 하며,개인의 애국심이나 공동체적인 관심도 더 고려되어야 할듯 하다.

독학으로 경제학을 공부하고, 독일연방의 관세장벽을 철폐하여 독일통일의 기반을 마련하고도 현실의 생활고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리스트의 인생도 불균형한듯 하다.  

2013년 12월 24일 화요일

용(龍)을 요리하는 법 / 청년실업


어떤 사람이 전문가에게서 용을 요리하는 법을 배웠다.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과 정열을 투자해서 용을 요리하는 법을 모두 배우고 나서는 가산을 탕진해버렸다. 애써 배운 기술을 막상 써먹으려하니 용을 잡았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이 기술자는 용을 요리해보지 못하고 일생을 마쳤다.

- 장자 -

크리스마스 전야(前夜)인데 많이 한산한것 같다. 청년실업문제는 심각하고, 도서관마다 토익과 공무원수험생들로 넘쳐난다. 생산현장에는 외국인 노동자들로 북적인다. 청년실업자들에게 생산현장에서 12시간 주야교대로 근무하면서 경제활동도 하고 자아실현도 하라는 말은 가혹한것 같다.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는 자국(自國)의 기준으로 한국에서 번 돈은 한 탕의 큰 소득일 수 있는듯 하다.

잠시 용을 요리하는 법을 배우다가 써먹을데가 마땅치 않아서 용을 잡는 법을 가르치면서 생계를 유지했던 경험이 있다. 용을 찾는 일을 포기하고 대형마트에 캐셔로 일하고 있는 이를 안 만날 수 없는데, 만날때마다 죄송스럽다.  

2013년 12월 21일 토요일

타인의 관점을 이해하는 교육 / 피아제


내 자신은 본의 아니게 전혀 성격이 다른 일터를 뛰어다니며 적응을 하는 습관을 잘 들여놓은것 같다. '불협화음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어내기 위해서 시도했던 일이지만 '타인의 관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좋은 훈련도 되는것 같다. 이력서를 쓸때마다 '나는 이곳에서 무엇인가 배울것이다'라는 글귀를 집어넣곤 하는데, 겸허한 마음으로 타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다면, 나에게 이보다 풍요로운 삶이 있겠나 싶은 생각도 든다.


어제는 탈북자 한명이 재입북을 해서 한국사회의 냉혹함등을 비판하는 좌담회를 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만나본 탈북자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유추해보건데,재입북한 탈북자의 관점과 그런 관점이 키워지게된 배경, 심지어는 발전과 인류공영이라는 원대한 이상과는 전혀 다른 세계로 가버린 북한사회, 그리고 아직도 고민할 것이 많은 한국사회까지 이해되는 점이 있었던것 같다.

어느 날 일터에서 생산성을 위해서 기계처럼 움직이고, 기계처럼 생각하며, 기계처럼 봉급을 계산하는  동료를 심하게 타박한적이 있는데, 경영주에게는 정말 뛰어나게 일을 잘 한다는 칭찬을 제보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 동료에게 마음의 여유는 좀 갖고 일을 하자는 이면적인 충고를 한 경험도 있다. 경영주나 종업원이 각자 원하는것을 위해서 기관차처럼 질주하는 열기를 꺾을려고 했던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면서 마음이 복잡했던 경험도 있다.

어린이의 인지발달에 관한 연구로 세계적인 권위자인 스위스의 심리학자 장 피아제 ( Jean Piaget 1896 ~ 1980 )는 어린아이의 인지구조는 다섯가지 단계로 나누어서 발달을 하며, 각 단계는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출생에서 만 2세까지는 감각운동단계로 반사와 협응으로 행동하며,바라보는 대상의 영속성을 깨닫기 시작하는 단계라고 말한다. 2세에서 7세까지는  전 조작단계로서 자기가 좋아하는 과자나 인형을 엄마에게 선물하는, 타인의 관점이 아닌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보이다가 소꿉놀이같은 가상놀이를 하면서 타인의 입장을 공감하고 이해하는 능력이 확장된다고 말한다. 만6세에서 7세 사이는 구체적조작단계로서 논리적인 사고를 하기 시작하고, 12세 정도가 되면 자신의 경험에 상상이나 상징을 개입시켜 연역적인 추론이 가능해지고, 청소년기에 대부분의 능력이 완성된다고 말한다.

물론 최근의 학자들은 심리학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정지된 구분개념이 아닌 연속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한 사회가 발전하고 성장하는데는 교육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누구나가 이해하고 있는 문제다. 발전과 공영이란 목적의식을 벗어난 이념적인 교육, 그래서 더욱 단조로워진 내용의 교육들이 어린아이의 성장과정에서 얻어내야하는 사고의 발달과정을 억압하는 문제가 심각한 것은 문제인것 같다. 북한의 교육은 어린아이들에게 더욱 다양한 대상들을 접하지 못하게해서 말하자면 피아제가 말한 인지구조의 발달단계에 심한 장애를 초래했다고 할 수 있을것 같다.

때로는 이것이 한국사회에서도 공연하게 일어나는 문제이기도 한데, 이념적프레임에 갖힌 사람과 어떤 협상도 불가하거나, 어떤 종교의 열렬한 신자가 객관적인 사고를 하는 능력을 상실했다거나 하는 문제는 발달단계에서 손상을 입거나 아니면 다시 퇴보해버린 인지능력탓이라고도 할 수 있을것 같다. 이런 인지능력의 발달을 방해하는 요인은 곳곳에 널려 있는데, 세뇌, 권위, 권력, 통제, 사회의 추세,선전활동, 매스컴등의 억압이 원인이 되기도 하는것 같다.

북한사회보다 자유로운 한국사회를 이해할 수 없고 적응할 수도 없는 탈북자, 인간보다 돈을 우선한다고 느끼게 만든 한국사회등 모든것이 이해되는 면이 있다.  

2013년 12월 18일 수요일

한국사회에서 정치토론이 불가능한 이유 / 롤스


정치는 국민의 일상속에서 회피할 수 없는 현실로 존재하는듯 한다.그래서 정치는 일상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정치선진국과는 달리 정치적토론에 장애를 느끼는 경우가 많은듯 하다. 서양의 정치선진국의 시민들은 '정치란 합의점을 찾아가는 관계'라는 관점에 익숙해져 있지만 한국의 시민들에게 '정치란 권력투쟁과 이념갈등의 대립'이라는 관점이 바탕이 되기 때문인듯 하다.

한국의 시민들은 정치토론의 장에 들어설때 자신이 또 하나의 갈등관계를 만들고 있다는 불안한 예측을 하기 쉬운듯 하다. 물론 짧은 민주정치의 역사속에서 불안한 경험을 했던 이유도 있을것 같다. 

정치철학자인 롤스(John Rawls 1921 ~ 2002)는 민주시민에게 필요한 정치적인 자세로서 '공적 이성'이 필요하다고 말한적이 있다. 롤스가 말한 '공적 이성'이란 상이한 성질이거나 심지어는 대립적인 성향이 있는 신념들일지라도 협력과 조화로서 사회가 유지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일치된 합의를 끌어내어 지속적인 사회의 유지와 발전에 기여하도록 하는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이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분파나 이익집단등을 위한 이성은 '공적'이라고 할 수 없는데, 분열과 이기심이 지배하는 사회는 롤스의 '공적이성'이 역할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못된다고도 할 수 있겠다.

어떻게보면 시민들의 공적이성을 찾기위한 노력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은 조직의 규율에서부터 공적이성을 찾기위한 훈련이 계속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심지어는 사회보전의 역할을 시도했던 이념이나 종교도 '공적이성'을 찾기위한 노력이나 훈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회에 대한 헌신적인 자세와 신뢰가 깨져버린 이념이나 종교는 분파적인 성질로 변하여 사회분열을 견인하고 있는듯 하다.

공적이성을 찾거나 지키기위한 노력은 정치가나 공직자,법률가,시민들 모두가 노력해야 할 일인데,한국의 시민들에게는 '공적이성'의 정체에 대해서 크게 알려진바도 없을뿐더러 이념이나 종교, 지역간의 갈등과 같은 분파적인 관점이 시민의식속에 '공적이성'이 형성되는것을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때로는 시민들에게'공적이성'을 지도하고 모범을 보여야하는 공공의 영역이 앞장서서 '공적이성'의 형성을 방해하고 있는듯 하다.

분파의 갈등과 대립이 '이성'이 아니라 '감정'의 문제로 변하는 현상은 한국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인듯 하다. 경쟁, 출세, 권력, 지배, 투쟁등의 단어가 우월한 사회에서 '공적이성'은 '사적감정'에 밀려 발붙일 곳이 없을듯 하다.  

한국사회에서는 정치란 '이익의 배분과정'일뿐만 아니라 '공존을 위한 합의과정'이라는 인식이 빨리 자리잡아야 할듯하다

2013년 12월 14일 토요일

사회적 다양성 / 왈쩌


부와 권력,이념과 종교등의 공통된 문제점이 있다면 사회적 다양성을 억압하는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인듯 하다. 사회는 여러 가치가 맞물려서 효율성을 얻어내고 발전하기도 하는것 같다. 자유라는 가치가 좋은 점은 누구나에게 주어진 선택권으로 자신과 사회에 가장 바람직한 가치를 타협하여 찾아가도록 유도할 수 있는 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시사평론지 [뉴 리퍼블릭]의 편집인인 왈쩌(Michael  Walzer  1935 ~ )는 사회속의 경제, 예술, 정치, 교육등의 모든 분야에는 그 분야에 맞는 정의의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느 분야의 가치가 다른 분야의 영역에 침투하게 되면 사회적 불평등과 부정의가 생겨날 수 있다고 말한다. 왈쩌는 경제영역에 머물러야 할 돈이 다른 영역에 침투하는 현상을 심각한 문제로 보고 있는데, 예를들면 잘생긴 사람이 연예인으로 특화되어야할 영역에 많은 비용을 들인 성형수술을 하여 연예인의 영역에 침투하는 현상같은 것이 쉬운 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국사회의 다양성은 심하게 억압받고 있다는 사실을 많이 경험하곤 한다. 종교적인 이념을 구실로 이미 다양성을 완전히 잃어버려서 효율성까지 없어져 버린 북한사회는 커다란 변혁이 없으면 회복이 불가능한 경지에 이른 점은 누구나가 알고 있지만 한국사회도 다양성을 억압하는 면이 많은것 같다.

부와 권력이 한국사회에서 다른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이 되는것을 많이 경험하곤 한다. 만약 부의 영역은 경제의 영역이고, 권력의 영역은 정치의 영역이라고 사회의 한 가치로만 인식이 된다면 사회의 효율성을 위하여 공헌하는 하나의 영역으로서 평가를 받게 된다. 경제분야에서 일하는 주체는 부를 증대시키기 위하여 노력해야 하는 것이 사회적의무이며  정치분야에서  일하는 주체는 국민의 공리적 후생을 위하여 노력해야 하는 것이 사회적의무가 되는것 같다.

하지만 부와 권력이 다른 영역을 침투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의 가치는 부와 권력에 집중을 하게 되는듯 하다. 누구나가 재벌을 꿈꾸고, 누구나가 권력을 꿈꾸게 됨으로써  부와 권력의 영역속에서 또 다른 불평등이 존재하게 된다는 점을 왈쯔도 언급한 적이 있는데, 더 문제가 되는것은 그런 획일적인 가치에 온 국민이 집중하는 동안 사회의 다른 영역에 대한 노력은 소홀히 되는 것이 큰 문제인듯 하다.

시민들이 정치나 경제의 영역에 대한 신뢰감을 잃어 버리는 원인중 하나는 시민의 다양한 삶의 영역을 돌보지 않고, 이념이나 정치권 내부의 문제에만 집중하여 효율성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점을 어렴풋이 인식하고 있는 점이아닐까 생각한다. 표현의 수단이나 방법이 부족한 시민들에게는 "살기 힘들어 죽겠는데 싸움이나 하고 있다"라는 표현이나 "힘들어죽겠는데 자기배만 불린다."라는 표현으로 대신 하기도 하는것 같다. 

나아가서 자신의 영역속에 충실하지 못하고 투기적 불안감을 증대시키는 문제도 증대되는것 같다.사명감없는 경제인, 사명감없는 정치인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부(負)의 귀감이 되어 어느 곳에서 경제적인 한 탕이나 정치적인 한 탕을 꿈꾸면서 방황하는 시민이 있을지 모를 일이다.    

한국사회만의 더 큰 고민은 이념이나 종교같은 전체적이고 근본적인 영역이 사회의 다양성을 훼손하는 문제인것 같다. 사실 어떤 이념이 주류가 된다고 한들, 그 이념의 문제점을 개선하고자하는 움직임이 필연적으로 있게 마련이고, 어떤 종교가 원리적으로 지배하고자 하면 그 종교내부에서도 경직성을 이완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게 마련인데, 이념이나 종교로 인하여 다른 영역(부와 권력등)을 탐하는 구성원들에 의하여 사회가 획일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면이 있는듯 하다. 

사회의 공리적 가치를 훼손하는 범죄가 아니라면 시민 각자의 영역은 존중 받아야 할것 같다. 시민 각자가 추구하는 삶의 형태나 생각은 모두 소중한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율성이나 도덕성이라는 구실로 특정 가치가 사회를 지배할려는 움직임이 강한 것이 한국사회의 문제인듯 하다

2013년 12월 12일 목요일

장성택의 사형과 북한의 개혁



북한의 1인자인 김정은이 북한 시스템을 장악하는 것이 힘들다는 반증을 보여주듯이 2인자이자 고모부인 장성택을 사형시키는 변이 일어났다. 대내외적인 개혁요구와 개혁적인 장성택의 성향과 능력, 1인 집권체제 확립의 어려움에 시달리는 김정은의 조바심이 종합적으로 작용한 사건인듯 하다.

어쩌면 프랑스혁명 당시 자코뱅당의 공포정치를 보는듯 하기도 하고, 황태자인 형 양용과 측근들을 죽이고 아버지 수문제까지 죽인후에 황제가된 수양제(양광)의 사건이 떠오르기도 한다. 한 편으로는 김정은이 느꼈을 생각에 대해서 라이벌의식때문에 총명한 신하인 양수를 죽인 조조의 마음이 읽혀지기도 한다. 

태어날때부터 보고, 듣고,배우고, 느낀 환경이 1인 집권체제의 권력환경이 전부인 김정은으로서는 장성택이라는 존재는 권좌를 침탈할 수 있는 존재로만 보였기때문에 확실한 처형외에는 달리 대안이 없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한것 같다. 그래서 극도로 경직된 시스템일수록 점진적인 개혁을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자의적이던지 아니면 국제환경에 의한 타의적이던지 개혁적인 성향이 있는 김정은의 입장으로서는 1인 집권의 확립과 개혁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기위해 급진적인 개혁사태를 불러올 수 있는 장성택의 존재를 지워버리는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을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장성택 사형이후의 북한 정부는 한국에 대해서 도발을 함으로써 집권체제의 확립을 굳힐 수 있다는 의견도 많지만 어떻게 보면 김정은이 생각한 스타일의 개혁노선을 추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정통성의 불안 때문에 토목사업을 크게 벌이고, 대규모의 고구려 원정을 시도했던 수양제처럼 적어도 퇴보는 아닌 발전적인 성향의 개혁이 있을것으로 추측된다. 그 개혁방향은 토목사업과 같은 대규모의 사회간접자본의 구축일수도 있고, 시장경제의 점진적인 도입일수도 있는데, 어떤 방법을 선택하던지 절대 아래로부터의 자생적인 개혁은 허용하지 않고, 김정은이 생각한 방식의 위로부터의 개혁시도가 있을듯 하다.

선군정치로 유지되는 북한시스템의 특질상, 장성택과 군부중에서 군부의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는 김정은의 사정은 개혁조차도, 확고한 1인집권의 영역안에서 이루어지게 하겠다는 결의로 표현되는것 같다.

2013년 12월 9일 월요일

한반도의 수평폭력문제


수평폭력이란 강한 힘에 의해서 억압받은 누군가가 억압을 하는 당사자에게 저항을 하지 못하고, 자신과 동등하거나 더 약한 상대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현상을 말한다.

남아프리카의 정신의학자인 조셉 월피(Joseph Wolpe 1915 ~ 1997)는 신경증 환자들의 불안감과 공포를 없애는 방법으로서 작은 자극을 반복하면 내성이 생겨서 큰 자극에도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는 연구결과를 내 놓았다.

숙청당한 장성택과 그 주변인물들에 대한 북한주민들의 살벌한 여론에 대한 기사가 나왔다. 이례적이거나 특이한 상황도 아니기에 별 감흥이 없이 보고 넘겼다. 아마도 조셉 월피의 연구결과처럼 사회에 만연해 있는 비숫한 류의 상황들을 많이 접해서 내성이 생겼는지도 모를 일이다.

언젠가 직장 간부의 수평폭력에 대해서 생각한적이 있었다.카리스마와 권력지향적인 모습을 보이고 싶어하는 경영주 밑에서 항상 순종하면서도  부하직원들에게 매몰차게 대하였다. 부하직원들은 그에 대한 저항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사보타쥐를 하며 비능률을 유도하고 있었고, 회사는 점점 무너져가고 있었다. 이 문제를 경영주와 해당간부에게 논의해보았지만 자신들이 자각할 수 없게 녹아들어간 습관이라서 설득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기억이 난다.

때로는 잔인한 범죄의 희생자들이 대게는 사회적 약자라는 사실도, 이면에 과거 범죄자의 억압된 의식이 표면화된 수평폭력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경쟁을 비롯한 권력적인 관계나 상하관계를 중시하는 한국사회의 전반적인 모습에 수평폭력이 만연해 있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한반도는 수평폭력이 만연하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것 같다. 짧게 생각하면 내가 속한 공동체를 비하하는 내용 같지만 어쩔 수 없는 숙명처럼 주어진 조건을 합심하여 해결해야 한다는 치유책으로 냉철하게 판단하는게 좋을것 같다.

한반도는 조선왕조의 수직적인 사회관계를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일제치하라는 강력한 사회적 억압을 받은 경험이 있다. 한국은 작은 나라는 아니지만 주변 강대국에 의해서 국가에너지의 분출이 힘들어 지면서 내부투쟁의 에너지로 전환되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때로는 사회의 전반적인 억압속에서 군대라는 상하관계에 익숙한 집권자가 장기적으로 집권을 하였던 과거사도 한반도에서 만연하는 수평폭력에 힘을 실어 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국가의 발전과 국민의 공영(共煐)이라는 목표에 집중하지 못하고 권력적인 관점속에서 발생하는 수평폭력의 종국적인 사태를 북한의 장성택숙청사건에서 볼 수 있는데, 상하관계나  내부경쟁관계에 민감한 한국내에서도 이런 문제를 고려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문제에 대한 고려가 치졸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감정적인 문제가 아니라 국민의 사기와 국제정세를 헤쳐나갈 국가의 능력을 재 정립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비판도 아니고 정략도 아니며 능률성의 문제로서 고려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2013년 12월 6일 금요일

북한 개혁노선의 어려움



북한의 실세였던 장성택과 측근들에게 '당위의 당'으로 군림할려고 했다는 죄목이 적용됬다는 소식이다. 개혁노선이라는 것이 시스템을 지배하는 관점이 평등한 곳에서는 '개선'의 의미로 받아들여지겠지만 권력관계나 계층관계의 관점이 우월한 곳에서는 기존의 권력이나 상부 계층에 대해서 '위협적인 변화'가 될 수도 있겠다 싶다.

그렇다고 북한정치의 특성상, 1945년 10월 21일 프랑스 제헌국회에서 만장일치로 주석에 선임되고도 자신이 내놓은 정치개혁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자 사임하고 시골 상거의 자택으로 돌아간 드골처럼 진퇴를 자유롭게 할 수도 없는 문제가 있다. 이쯤되면 북한의 개혁없는 정치가 극단까지 오게된 이유를 알 수 있을것도 같다.

작게는 직장문화, 크게는 국가정치문화에서도 권력관계의 관점이 지배하는것을 종종 본다. 늦은 근대화와 일제식민지의 정신적인 잔재가 남아있을듯한 한반도에서 개혁이란 단어가 주는 의미는 개혁의 주체가 약했을때는 '저항'이란 단어로, 개혁의 주체가 힘을 얻었을때는 기존 시스템에 대한 '위협'이란 단어로 긴박하고 치열하게 표현되는것 같다.

어떻게 보면 개혁을 받아들이는 관점의 차이일수도 있는데, 이념적인 대립이 극단적으로 지배하는 한반도에서는 개혁을 하는 주체나 개혁을 저지하는 주체가 합리적인 관점을 가지지 못하는 문제가 있는것 같다. 한 편으로는 수직적인 상하관계보다는 수평적인 평등관계가 우월한 사회만이 변화와 발전을 기대할 수 있을것 같다.

2013년 12월 4일 수요일

개혁속도를 늦추는 북한 / 장성택


북한의 개혁파로서 군이나 당보다는 시스템위주의 정치개혁을 시도했던 장성택의 측근들이 숙청되고, 장성택도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는 소식이다. 그 자리를 최용해를 비롯한 군부인사와 김정은의 친위세력이 대신하고 있다는 기사도 보인다.

예상했던대로 폐쇄적인 북한정치의 특질상 개혁의 시동이 걸리면 쓰나미처럼 몰려올 수 있는 빠른 개혁의 물살을 김정은과 북한 군부는 모두 두려워 하는듯 하다. 개혁적인 성향이 있는 북한의 지도자 김정은은 군부와 장성택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했을것으로 추측된다.

김정은 집권의 후견인 역할을 했던 장성택의 권위는 김정은보다 북한 정치시스템을 일관(一觀)하고 있는 점과 개혁개방을 위한 대내외적인 요구가 강력한 북한의 사정으로 봐서는 김정은에게 부담스러운 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성택의 실각은 북한의 개혁개방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는 북한의 보수적인 군부의 이익과 권력을 배분할 수 없는 김정은 일인체제의 이익이 맞아 떨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을것 같다.

개혁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에 오히려 개혁 할 수 없는 상황, 시민적 가치같은 완충지대를 두지 않은 이념독재나 1인 또는 1당 독재정치의 경직된 시스템일수록 개혁이 힘들어지는 이유를 잘 보여주는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