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wered By Blogger

2014년 1월 30일 목요일

편견으로 인한 손실 / 베커


한국에서 정치적으로 중도적 입장에 있는 사람은 50%가 넘는다. 하지만 중도파의 대부분은 나름대로 정치적 신념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좌우의 극단적인 대립이 보여주는 문제점에 대하여 감각적으로 반발하고 있는줄도 모른다. 교육수준이 높아져서 현명해진 시민들도 많은데, 오래된 관점들에 대한 혐오감이 시민들을 중도적인 입장으로 몰아붙이고 있는줄도 모른다.

어느 티브이 뉴스에서 유명한 만화영화 주인공이 대통령과 닮은게 화재가 되었다고 방영하여서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그 소식을 접하면서 먼저 생각나는 것은 적재적소로 분산되어가는 시민들의 관점을 좌우 이념대립의 장으로 집중시킬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공감과 비공감의 관점이 새롭게 탄생하여 국민에너지를 소모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행위에 대한 분석을 경제학의 주요 파라다임으로 내세웠던 미국의 경제학자 베커(Gary Stanley Becker 1930 ~ )는 차별집단에 대한 고용을 회피하기 위해 기업이 지불하는 비용을 '차별계수'라는 개념으로 학리화(學理化)시켰다. 예를들면 저임금으로 고용해도 되는 흑인들에 대한 편견때문에 고임금으로 백인을 고용하는 기업의 행태는 극한 경쟁의 시대에 옳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편견과 차별로 인한 사회적 손실은 여러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념문제는 차별과 편견으로 인해 발생하는 손실의 가장 큰 부분을 담당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라고 해도 사실이 그렇다면 결국 그런것이 되고, 그렇다고 해도 사실이 아니면은 아닌것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쓸데없는 곳에 채널을 낭비하여 호감뿐만 아니라 비호감까지 창출해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2014년 1월 24일 금요일

말과 정치 / 아렌트


성리학이 지배하던 조선시대에는 말이 없을것을 많이 강조했다. 대동법으로 잘 알려진 이원익선생은 나이가 어느정도 들때까지 말을 못해서 벙어린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말을 하기시작해서 사람들이 놀라워 했더니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많은가 하노라"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동물같은 군집생활이 아닌 사회생활이 삶의 본질인 인간이 어떻게 말이 없이 살 수 있겠냐만은 이원익선생의 일화는 '말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계몽적인 의도로 만들어진 일화가 아닌가 생각된다. 아마도 송나라의 문치주의(文治主義)적인 배경에서 만들어진 성리학을 통치원리로 받아들인 사회에서 자칫하면 담론(談論)중심으로 빠져들어가는 분위기를 경계한듯 하다.

어렸을때 부친은 항상 말을 아끼라는 조언을 했던 기억이 난다. 생각해보니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지 않는 편향적인 의사소통으로 신뢰감은 가질수 있을지언정 쌍방의 의사소통을 필요로하는 현대사회의 분위기로 봐서는 '험한 가시밭길'로 걸어가라는 주문을 한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때도 종종 있었던것 같다.

독일에서 출생한 유태인 정치학자 아렌트(Hanna Arendt 1906 ~ 1975 )는 말이 시작되는 곳에서 정치가 시작되고, 말이 끝나는 곳에서 정치가 끝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의회등을 통해서 국민의 의견을 반영해야 하는 정치적 피드백의 특성상 말(소통)은 정치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인것 같다. 그런데 이 '말'이 자주 문제가 된다. 정치에 있어서 '말없음'으로 인한 편향적인 의사소통은 아렌트가 말한바 있는 국민의 복종만을 구하는 권위주의나 전체주의라는 부자유스러운 정치시스템으로 인도하기도 하는것 같다. 한 편으로는 쉴새없이 허언(虛言)과 고성(高聲)이 오가는 정치현실을 목격하고는 환멸을 느끼는 시민들은 말이 없는 정치를 기다리기도 하는데, 그 말이 없음은 '불통'이 아니라 '신뢰'의 의미로 해석되어야 할것 같다.

대중정치적인 성향이 강한 한국정치에서 여러가지 매스컴을 통해서 자신의 의견이나 존재를 표현하여 국민의 표심을 움직이려는 욕망도 문제지만 '신뢰성'이라는 명분으로 권위주의적인 정치시스템으로 흘러가는 분위기도 문제인것 같다. 어쩌면은 정치인이나 시민들 모두 중용의 평온함은 오래전에 잃어버린 한국사회의 극단적인 욕망에 휘둘리는것 같다.

2014년 1월 18일 토요일

갈등의 늪과 정의의 실현 / 맥킨타이어


이천만의 평화롭지 않은 영혼들을 양성해낸 북한의 위대한(?) 정치사상과 대칭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의 정치사상을 생각하면 이념이란것의 위력과 존재의 무용함에 놀라운 생각이 들때가 많다.

어느 형제가 병상에 누워있는 부친의 면전에서 유산싸움으로 크게 다투었다. 양쪽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서로 자기것을 너무 챙길려고 한다는 의견이었다. 그러면서 상대방이 양보하면 자신도 양보하겠다는 어줍잖은 정의감도 가지고 있는것 같은데,결국 상대방의 탓으로 양보 못한다는 각오를 하고 오랫동안 의절중이었다.

아무리 오랫동안 가까이한 지인(知人)이라도 나와 그의 좋은 관계를 경쟁관계로 인식하는 모습이 보이면 인연을 멀리하곤 했는데, 그때부터 시작되는 둘 사이의 갈등관계가 아직 미성숙한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아 건설적이고 창조적인 사고를 방해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던것 같다.

때로는 직장이나 여러가지 형태의 사회조직에서 '제대로된 종교적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온화하고 둥글게 처신하며 적응을 잘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아마 종교적인 믿음이 증폭되는 경쟁이나 갈등관계의 관심을 흐려놓는 작용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도덕철학자인 매킨타이어(Alasdair Mcintyre 1929~ )는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은 사회적 선을 실현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며,개인은 자신의 행위를 계속적으로 통찰해야 하고,과거로부터의 덕의 실현물인 전통을 계속적으로 개선시키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선을 향한 신념이 없는 인간은 경쟁과 갈등관계에 시달리기 쉬운것 같다. 비록 그런 부정적인 관계가 내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았어도 순간적으로 편승해버린 자신을 발견하는 경험은 누구나 했을것 같다. 너와 나의 탓도 아니고, 하늘을 돌다 떨어지는 별똥별의 탓도 아닌것 같다.

2014년 1월 16일 목요일

학습된 무력감과 학습된 낙관성 / 셀리그만


한국의 청년실업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힘든 일을 하기 싫어한다거나 경쟁에서 도태되었다고 말하기에는 더욱 심각한 근본적이고 심리적인 문제가 있는것 같다. 자신의 상황을 개선해보고자 하는 '의지력과 자신감의 상실'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는것 같은데, 이런 문제는 위험부담을 안기 싫어하는 인간의 특성상 어느 정도 사회적인 지위를 확보한 정규직 노동자들에게까지 만연하고 있는 문제인것 같다.

아마도 없어진 희망, 재기불능, 기득권의 수호라는 세가지 문제점이 국가경제의 역동성을 상실하게 만드는 결과에 있어서는 비숫한 역할을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후진국의 빈부격차가 고착화되어 영원한 후진국으로 머물수밖에 없는 현상이 한국에서 발생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미국의 교육심리학자인 마틴 셀리그만(Martin E. Seligman 1942 ~ )은 개와 사람의 실험을 통해서 부정적인 충격을 피할수 없는 상황이 반복될때 극복할려고 하는 의지를 상실하게 된다는 '학습된 무력감'이란 결과를 얻어냈다. 반대로 좌절하지 않고 성공하는 사람들에게는 '학습된 낙관성'이 있다는 사실도 증명해 내었다.

사실 한국에서 경제적, 사회적인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은 성장이냐 분배냐하는, 과거로부터 지속된 이념과 관련된 내밀(內密)한 문제로 한정되어서 의제화되고 있는것 같다. 신자유주의 이념은 단순한 경쟁보다 기회를 열어주는 역할로 가치가 있으며, 복지주의란 복지가 발판이 되어 성장동력으로 작용하는데 가치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더 넓은 세계나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의지가 개인을 성장시키고, 개인이 모인 국가사회를 성장시킨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무력하게 길들어가는 이웃이 언젠가는 우리 모두를 힘들게 할것이라는 결과는 명확하게 예측될수 있을것 같다. 개인적으로도 겪어 보거나 겪고 있으면서 하는 생각이라서 절박하게 생각된다.  

2014년 1월 13일 월요일

수평관계와 국민감정의 안정 / 매슬로우


한국의 직장문화를 비롯한 모든 사회문화는 아직도 대단히 수직적이다. 수직적인 조직보다 수평적인 조직이 더욱 창의적이고 발전의 여지가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산업사회의 전형적인 수직적, 계층적인 조직구조인 '관료제'구조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지만  짧은 근대화 기간,불안정한 과거사로 시민의식을 배양하지 못하고 변화'와 '고착'의 경계선상에서 꽤 오랫동안 머무는것 같다.  


미국의 인본주의 심리학자 매슬로우(Abraham Maslow 1908 ~ 1970 )는 태평양전쟁의 발단이 된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공격  몇일후 기진맥진한 상태로 미국국가인 '성조기여 영원하라'의 어설픈 플루우트 연주에 발을 맞춰 행진하고 있는 스카우트 단원들과 노병들의 애처로운 모습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 날 이후 평화에 기여하는 심리학 연구에 인생을 바치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뿌리깊은 한반도의 정치적인 수직관계에 관해서 고민할것도 없이 '위계질서의 압박으로부터 해방'을 생각하며 아무도 하지 않을것 같은 직종에서 일을 해봐도 그곳에도 수직적인 관계에 관한 관점이 생계유지에 관한 관점조차  압도하고 있는 것을 보며 그 처참함에 매슬로우와 비숫한 비참한 심정을 가진때가 있었다.  

매슬로우는 인간의 욕구를 1.배고픔이나 갈증등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생물학적인 욕구,  2. 안전의 욕구, 3. 사회적관계에서 비롯되는 소속과 애정의 욕구, 4. 스스로를 아끼고 자신감을 가지는 존경의 욕구, 5.잠재력과 창조성을 발휘하는 자아실현의 욕구등 5단계의 욕구로 구분될 수 있다고 말한다.

뿌리깊은 수직적인 관계에 관한 관점은 지배와 복종관계,경쟁관계를 넘어서 자아실현의 문제까지 관여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는데,아마도 이런 행태가 한국사회에서 보수와 진보의 양분에 공헌하고 있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니까 쉽게 표현하면 '지배하거나 우월한 상태를 유지하고 싶은 보수'와 '지배를 벗어나고 싶거나 나아가서 보수를 이기고 싶은 진보'라는 양극화된 의식구조로 시민의 의식을 양분하고 있는듯 하다. 그리고 그런 관점속에서 성취욕구를 찾아내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는듯 하다.

복지가 되어있어 '조급한 경쟁'을 완화시키고, 좀 더 창조적인 사회문화로 시민의식이 유도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 전에 어느 위치에 있던지 사회를 움직여 나가는 시민 각자의 역할은 중요하다는 자부심이 시민각자에게 의식화 된다면 국민통합과 미래사회발전에 도움이 될것같다.

북유럽과 독일등에서는 극복을 한 선례가 있는것 같은데, 미리 인간의 본능을 이야기하며  포기할 것은 못된다는 생각이 든다. 문화를 창조하는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교육의 힘등 한국사회를 더욱 고귀하게 만들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키워드는 많은것 같다.    

2014년 1월 11일 토요일

조선의 통치원리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서 성장하며 늙고 소멸한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엮여있는 사회를 유지하는 생각의 틀인 사회사상도 생명체로서 생명주기를 가진 인간의 특성에 따라 생명주기를 가지고 있는듯 하다. 조선왕조는 단일왕조로서는 유래없는 500년이라는 세월을 지탱했다. 그러나 성리학적인 사회의 문리적(文理的)이고 비실용적(非實用的)인 행태가 500년이라는 공업(供業)을 끝내게한 원인으로서 평가되기도 하는것 같다.

조선의 성리학은 고려말에 안향과 이제현등의 학자가 원나라로로부터 도입을 했다고 한다. 유목민족인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는 남송인을 만인(蠻人)이라하며 천대했던 바와는 달리 충과 효로서 국가 통치이념에 이바지 할 수 있는 남송의 주희가 만든 성리학은 적극적으로 수용했던것 같다. 

고려말에 들어온 성리학을 공부한 신진사대부들은  신흥무인세력과 함께 조선을 창업하면서 성리학은 조선의 국가 통치원리로서 양명학이나 고증학과 같은 동류(同類)의 유학사상뿐만 아니라 천주교등 다른 사상이 조선 사회에 스며들지 못하도록 조선사회의 일관된 지배사상으로서 구실을 했다고 한다.

중국은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왕조가 교체되자 기존의 사물의 본질인 성(性)과 이(理)를 연구하는 성리학에서 마음이 곧 이치라는 심즉리(心卽理)사상을 본질로 하는 양명학으로 지배적인 사회사상이 교체되었다. 청나라에 들어와서는 검소하고 강건한 만주족들의 성향과 서양의 과학사상의 영향을 받아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중심 사상으로 하는 고증학으로 발전하였는데, 점차 구체적이고 실용적으로 변한듯 하다. 

양명학은 조선에 도입되어 정제두, 최명길과 같은 강화학파가 연구하였지만 사회사상으로 널리 받아 들여지기에는 성리학의 기득권적인 장벽이 너무 강했던것 같다. 고증학 역시 조선의 실학자들에 의해서 연구대상이 되었지만 성리학적인 조선사회에서 현실에 반영되지 못하였다.

생각해보면 조선 왕조 500년이 태동, 성장, 노쇄의 생명 주기로 이행하는 동안 통치원리인 성리학이 국가의 흥망성쇄와 불가분의 바탕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듯 하다.

사실은 조선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게 아니고 지금 이 시간에도 국가가 노쇄할때까지 무용(無用)한 통치원리를 놓지않고 있는 정부가 한반도에 있는것을 보면서 망령을 놓지 못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는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중국의 예에서 보듯이 통치원리의 변화는 국가나 왕조의 교체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것을 볼때 변화라는 것을 혁명과 유사한 의미로 받아들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변화하지 않아서 '공멸'이나 '외부세력에 의한 변화'까지 예상된다면 매우 불행한 사태가 될것 같다. 36년동안의 시간이 무언가 배우기에는 짧은 시간이 아니었던것 같다.

2014년 1월 7일 화요일

그때 그때 달라요 / 사르트르


언젠가 경제난으로 낮에는 화이트칼라일을 하고 밤에는 청소노동자로 일을 한 적이 있었다. 휴일날 청소노동자로 일한 곳의 고객으로 변신을 했다. 항상 마스크를 쓰고 일했던 곳이라서 직원 누구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는데, 나도 모르게 바닥에 떨어진 휴지를 줍다가 발각이 났다. 순간 습관이 실존을 본질화시켰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인 쟝 폴 사르트르 (Jean Paul Sartre 1905 ~ 1980 )는 미리 정해진 삶의 방식이란것은 없으며 인간은 그때마다 선택을 함으로써 자신의 본질이 결정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선택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져야 한다고도 말한다.

한때 사르트르의 사상은 전체주의에 시달린 2차대전을 겪은 유럽에서 냉전질서의 새로운 구속으로 고민하는 젊은이들에게 이상주의적인 삶의 지침으로 유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새로운 삶의 지침을 마르크스주의에서 구한 사르트르는 프랑스에서 많은 지지층을 형성했던 사회주의 정체(政體)의 사상적기반을 마련해 주기도 했지만 '그때 그때 다른' 관점으로 보면 사르트르마져 이념의 구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습관이라는것은 참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듯 하다. 끊임없이 반복하거나 때로는 의도적으로 반복 세뇌시킴으로써 실존을 대체하는 본질로 자리잡게 만드는 좋은 수단이 되는것 같다. 끊임없이 깨어있는 의식이 없으면 쉽게 원하지 않은 길로 자신을 인도하것 같다.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의 오랜습관이 사고의 가능성을 좁히고 있는 한국에서 이념적 분란이 오래가고 있는것은 어쩌면 필연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2014년 1월 4일 토요일

베블렌효과와 비경쟁전략


프랑스의 사회학자 쟝 보드릴리야르(Jean Baudrllard 1929 ~ )는 사물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측면만을 고려하는 마르크스의 가치론을 비판하며 현대사회에서는 상징가치, 나아가서는 주관적인 선호가치가 더 중요시 된다고 말한다.

미국의 경제학자 베블렌(Thorstein Bunde Veblen 1857 ~ 1929 )은 그의 저서 [유한계급론]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우아하고 여유있는 모습을 모방하려는 사람들의 심리가 명품등의 고가의 특정재화를 소비하게 만든다는 배블렌효과를 언급한 적이 있다.

지인이 한동안 한국사회에 불어닥친 영어 광풍에 휩쓸려 만사를 제껴놓고 영어회화를 공부했는데, 세월이 지나니 무능한 미국사람수준이 되었다고 허탈하게 웃었다.

어느 날 주차장에 서 있는 외제차들 사이에서 빛나는 내 고물지프를 보다가 외제차를 소유한 많은 사람들이 의도했던 바와는 달리 문득 내 차가 목적도 있어 보이고 '구분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케이트장에서도 본의 아니게 저렴한 보급형 스케이트로 '특별한 기술'을 선 보이는 비경쟁전략을 보여주고 있는데, '자기만족의 기술'로 배블렌이 언급한 '현시적 선호' 에 시달리는 대중들을 경쟁에서 이긴것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에 미소를 지은적이 있었다.

경쟁과 모방은 현대사회 대중들의 개성과 능력을 억압하는 면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남북한의 오토포이에시스(autopoiesis)시스템


민생(民生)이란 소중한 1차적 가치를 이념이란 2차적 가치로 완전히 제압시킨 북한은 틈틈이 한국을 전복하고자 하는 의도를 공공연히 언급한다.그러더니 한국의 정치권에서는 그에 대응하기 위해서 국정원에 국민을 감청할 수 있는 권한을 합법적으로 부여하겠다고 한다.

칠레의 생물학자 바렐라(Francisco J. Varela  1946~ )는 구성요소가 먼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시스템의 작동에 의해서 구성요소가 산출되고, 산출된 구성요소에 의해서 다시 시스템이 재산출되는 순환관계를 갖는다고 말한다. 원래 내부와 외부라는 경계도 없는 것인데 시스템의 생성에 의해서 내부와 외부의 경계도 생성된다고 말한다.

한국정부의 전복을 공공연하게 위협하는 북한정부의 행태나 그것을 막기 위해서 국민의 중요한 자유권의 하나인 사생활의 비밀의 자유와 통신의 자유를 제한할 여지를 두겠다는 한국정치의 단면에는 국가나 정부가 지켜줘야 할 최상의 가치인 '민생'과 그에 대한 피드백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는듯 하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어딘가에 있는, 아니면 '있을 수 있는'현실의 세계랑 구분되는 이상적인 '이데아'의 세계가 있다고 말하더니 21세기에 한반도에서 꾸준히 그 세계를 보게 되는것 같다.

한반도의 정치는 이념을 이용해서 '그들만의 리그'를 꾸준히 생성해내고 있는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