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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27일 금요일

유배지로부터의 사색 / 최용해

한때 북한의 2인자로도 알려져 있던 최용해 노동당비서가 백두산발전소붕괴의 책임을 물어 숙청되었다는 국정원발 뉴스가 있었다. 그 밖에도 청년정책에 관하여 김정은과 의견차이가 있는 이유도 숙청의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탄광이나 공장이 있는 시골로 추방되어 교화노동을 하고 있다는 추측인데 과연 다시 김정은의 은혜로 다시 재기 가능할 것인지는 의문이다. 북한의 혁명화교육이나 교화노동은 미래가치를 지향하지 않는 체제에 복종을 위한 순종적인 인간으로 변화시키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쉽게 표현하면 쓸모없는 인간으로 변화시키는 목적이 있다는 의미다. 1인 독재체제와 자유주의 국가의 관점의 차이는 이런 것인가 보다. 자유주의 국가일수록 미래지향적인 가치에 비중을 두고 쓸모있음을 판단하는듯 하다.

한반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이념문제를 거론하고 있는 내 입장으로서는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압박감이 유배지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곤 한다.. 언젠가 어느 어르신이 내게 정약용선생과 같은 유배생활을 한다는 생각을 하라고 조언했던 기억이 난다. 어떻게 하면 이 고립감을 창조적인 미래가치로 환원시킬 수 있을까 고민한 끝에 듣고 보이는 모든 것들의 문제점과 개선책을 생각해봐야 한다는 의지를 다진적이 많았다.

최용해의 유배는 사회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전혀 무용(無用)한 유배이고, 정약용선생의 유배는 현실로 적용할 수 없으되 훗날 호치민도 목민심서를 즐겨 읽었다는 소문이 있는만큼 사회적으로(즉 당대의 현실에서는) 무용하나 역사적으로는 대단히 유용한 유배였고, 나는 어떻게든지 현실적으로 유용한 유배생활을 할려고 애쓰는 형국이 되었다. 누가 뭐라한 것도 아니지만 이념적인 문제가 퇴행적인 길을 걷는 만큼 열패감(裂敗感)으로 시름 시름 앓곤 했다. 자신이 가장 노력한 곳에서 성과를 못보면 좌절하는 것은 누구나 당연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북한 사회가 참으로 놀라운 점이 있다면 결국에는 집권자 한 사람의 두뇌로 지탱을 하면서도 붕괴되지 않는다는 점인데, 역설적으로 표현하면 집권자가 능력이 있다는 궤변도 나올법 하다. 만약 집권자가 깨진 유리창이론의 깨진 유리창과 같은 역할을 하여서 온 국민이 동조와 모방을 하였다면 북한사회는 일찌감치 붕괴를 하였을 것이다. 김정일 시대에 집권자가 퇴폐적이고 감상적인 분위기가 심화되자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는 기회를 잃고 고난의 행군시기를 맞이한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국가를 발전시킬려고 노력하는 집권자는 인재를 미래가치에 바탕을 둔 교육을 시키도록 노력해야 하는데, 남은 여생을 공장이나 탄광노동자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최용해로서는 이미 버림받았다고 봐야할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항상 토로하지만 국가발전을 위해서는 인문학, 철학, 정치, 경제, 실무 모든 부문에서 다방면의 교육을 받은 인재는 절대적으로 필요한듯 하다. 모든 부문은 상호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결국 인간이 사는 세계의 일은 그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느냐 하는 점에 미래가 달려 있는것은 확실한듯 하다.

청년정책에 있어서도 최용해가 김정은과 의견차이가 있었다는 국정원의 첩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듯 하다. 현 북한군 장성들의 보수성(퇴보성), 무능함은 교육받은 지식의 내용과 양적인 면, 그리고 개선되지 않는 노년의 기질과 결합된 문제인 만큼 젊은 김정은과 불협화음을 보이는 점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된다. 최용해의 아버지 최현이나 할아버지 최화심이 군사적인 재능에도 불구하고 배운것이 없는 이유로, 최현은 초기 북한 인민군에서 최화심은 동북항일연군에서 공식적인 승진이 늦었다고 한다.그 때문에 최현은 최용해에 대한 교육에 신경을 썼지만 북한의 교육이라는 것이 이념교육과 군사교육에 일관하고 있어서 최용해도 조부나 부친과 별반 다름없는 무식한 세상에서 헤매다가 끝을 보게 된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언젠가 약간의 치매 증상이 있는 노인분을 유심히 본 적이 있는데, 의사표현의 능력이 부족하니 그 답답한 심정을 호전성(好戰性)으로 표현을 하고 있었다. 꼭 그 노인이 아니더라도 토론 문화나 자기표현의 문화가 부족한 한국사회에서 시민들의 감정이 울컥한 분노로 표현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북한군 장성들이 퇴행적인 모습을 보이면서도 북한에서 입지를 굳히고 있는 이유는 북한사회가 추구하는 선군정치와 같은 호전적인 문화와 상호작용하며 서로를 견인해주고 있는 까닭이라고 봐야 할것같다.

다방면의 자유로운 교육, 독서, 경험, 토론문화 이런 것들은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대단히 유용한 것들이다. 내 자신이 유배생활이 아닌 유배생활을 하면서 내 자신과 사람들을 관찰하며 그 필요성을 크게 느낀다.

2015년 11월 21일 토요일

IT분야의 노령근로자

어느 날 지방도시를 지나다가 50대 이상의 IT인력만 채용한다는 IT회사의 플래카드를 보았다.창업주의 발상이 참 좋아보였다. 언젠가 IT보안 기술을 배우기 위해 알아보던 중 어느 정도 나이가 있으면 직업으로 삼기에는 많은 장애요소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팀으로 움직이는 자율적인 조직구조에서 의사소통과 업무의 조화가 힘들수 있다는 기술학원원장의 말이 이해가 갔다. 서구유럽과는 달리 나이와 관련된 수직관계에 민감하거나 존대말구분이 강한 한국에서는 그럴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젊은 IT인력들은 연령이 많아지면 어떤 길을 가야할까 하는 궁금하기도 했는데, 선구적인 창업주의 창조적인 발상이 신선해보였다.

기업의 비용은 대체로 고정비용과 가변비용으로 나눌 수 있다. 고정비용은 생산을 하지 않아도 기업유지를 위해서 들어가는 기본비용을 말하고, 가변비용은 생산량에 따라서 변하는 비용을 말한다. 그런데 IT회사의 고정비용은 특별한 시설비용같은 것이 별로 안들고 기술인력비용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임금피크제가 사회분위기로 무르익는 요즘에 고령의 IT인력들을 다소 적은 임금으로 채용할 수 있다면 고정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일 수 있겠다 싶었다.

여기저기 돌아 본 운동장이나 일터에서 노령층과 젊은 층의 불협화음을 많이 보기도 하고 겪기도 한다. 즐겁게 운동을 하다가도 권세와 텃세를 부리는 노령의 스포츠맨과 그 점을 받아들이기 힘든 신세대의 불협화음때문에 위축되거나 없어지는 운동동호회를 본 적도 많고, 일터에서도 그런 모습을 많이 본다. 사회구조나 경제구조는 점점 수평화를 원하는데, 연령에 다른 수직적인 관계를 벗어나기 힘든 점은 한국이나 일본사회의 약점이기도 한것 같다.

노인이 많아지는 사회에서 노인인력을 어쩔 수 없이 필요로 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연령에 따른 갈등은 점차 개선되겠지만 2교대 6시간 근로제나 어렵거나 힘들지 않은 제조업분야에서 노령층의 인력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사회분위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2015년 11월 14일 토요일

환상적인 집단적 사고로부터의 자유

정신세계가 이념으로 갇히는 상황이나 집단적 사고에 개인의 사고가 매몰되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여러 분야를 '참여관찰'한 경험이 있다. 그 와중에 심신(心身)의 상태를 꾸준히 경쾌하게 유지하지 않으면 많은 어려움을 겪곤했는데, 그 때문에 스포츠랑 친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정신나간듯 한 권력자의 '이상한 행위'에 대응하여 나 자신을 지켜나간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비 이성적인 집단적 사고와 맞서는 행위는 꽤 여러번 꾸준히 해 온것으로 생각된다.

오래전 꽤나 카리스마 있는 무술인이 주먹과 지모(知謨)로 제자들의 정신세계를 장악해 나가는 모습을 보고는 그렇게 생겨먹지 못한 내 자신을 돌아보기도 하고, 그렇게 맹랑한 삶을 살고 있는 무술인과 우둔한 제자들에게 뼈아픈 충고를 했던적이 있었다. 그 무술인은 자신의 인생을 왜 내가 참견하느냐고 따졌지만 이념적 사고에 갇히는 사회를 상당히 우려했던 생각이 있어서 사회방위를 위한 역할을 한다는 핑계로 기죽지 않고서 대응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런 사건은 여러번 있었는데, 원리주의 종교단체에서도 그랬고, 특수한 군인들의 집단에서도 그랬고,노인분들이 많은 일터에서도 그랬다. 권위가 집단적 사고를 만들어내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편안한 삶을 위해서' 자유를 억압당하는 불편함을 참고 살았는데, 나중에는 그것 때문에 힘든 상황이 꼬리를 무는 것을 보았다.

1960년대 초 미국 정보기관인 CIA가 역사상 희대의 엉뚱한 짓을 저지른 사건이 있었다. 쿠바에 피델 카스트로의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백악관에서 CIA주도로 케네디 대통령과 주요 인사들이 망명한 반공쿠바인들 1400명을 쿠바 남부해안에 상륙시켜 카스트로 정권을 붕괴시키는 계획을 짰다. 그리고 계획은 실행되었는데, 보급품을 실은 배는 쿠바 공군의 폭격으로 침몰하거나 도주했고, 1400명중 200명이 사망하고 1200명이 포로로 잡혔다. 원래 계획은 상륙하고 나서 쿠바 중부의 에스캄브라이 산악지대로 가서 몸을 숨기고 게릴라전을 하는게 계획이었지만 그곳은 상륙지점으로부터 15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고, 그 사이에는 뚫고 넘어갈 수 없는 늪지대가 지도상으로도 나타나 있었다.

2차대전때 일본군은 태평양전쟁에서 미군과 대략 10대 1의 교환비율로 인명을 경시하며 반자이(만세)돌격작전을 펼치거나 실패할 경우 전원 옥쇄작전을 펼치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했다. 특히 임팔작전같은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작전으로 수십만의 일본젊은이들이 제대로 된 전투를 치뤄보지도 못하고 이국땅에서 죽음을 당했는데, 작전을 지휘한 무다구치 렌야는 미국이 승리하는데 1등공신이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2001년에 스위스항공의 파산사태는 스위스항공의 고문집단이 성공에 대한 낙관적인 환상으로 의견이 일치하여 팽창전략에 대한 위험성을 누구도 지적하지 않았다는데서 원인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언젠가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던 엄청난 삽질(뻘짓 또는 비합리적인 사건)들을 통제하거나 지적할 수 없었을까. 가끔 정치권이나 경제권, 학계 모두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념성과 파벌성을 살펴보면 그 답은 나오는 것 같다. 심리학교수인 어빙 제니스(Irving Janis)가 1972년에 내놓은 집단적 사고에 관한 이론에 따르면 어떤 음모를 꾸미는 집단의 구성원들은 환상을 키우면서 소속감을 발전시키고, 행운에 대한 만장일치적인 믿음을 갖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망상이 반복되면 머리속에 현실처럼 자리잡게 되고, 그것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발현된다는의미다. 지난 한국정부가 종교적이거나 이념적인 성향이 지나치게 강한데 대해 반발한 것은 그런 우려 때문이었는데, 아쉽게도 우려한 것이 사실로 나타나고 말았던것 같다. 혹시라도 현 정부에서도 이런 문제점이 보인다면 시급히 개선되어야 할 문제인듯 하다.

집단적 사고의 문제점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예가 북한이란 사실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인과의 처참한 연결고리도 실증해주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서구사회에 비해서 집단적인 사고로 끌려들어가기 쉬운 전통을 가진 동북아시아 국가들의 미래에 대해서 신뢰가 가지 않는데, 먼 훗날 "내 생각이 맞았다"는 비극적인 말을 할까봐 두렵기도 하다. 국민 각자는 자율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그것들이 합리적인 조율과정을 거쳐서 '결정'되어야 하는게 이상적인듯 하다. 강력한 의견일치가 환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존재가치가 없을듯 하다. 그래서 사회가 발전할려면 다양한 의견을 수용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2015년 11월 13일 금요일

실무적 인간 (Homo practical man)

언젠가 운동장에서 운동을 하다가 낮익은 분이 있어서 인사를 드렸다. 만난적은 없고 신동아나 월간조선같은 잡지에서 서울시의 교통관련요직에서 일하시던 J선생에 관한 기사가 나왔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최말단 관료부터 시작하여 독서를 통한 실무능력을 키우고 공식적인 대학졸업은 60대에 하신 분이었다. 이력도 관료들을 비롯하여 많은 분들에게 귀감이 될듯하고, 나도 마음이 많이 끌려서 잡지기사의 사진을 꽤 오랫동안 기억에 담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성함도 꽤 특이하신듯 하다. 당시 그분은 얼굴이 안 알려져 있는 사정에 아는 척을 하는 이가 있어서 당황스럽기도 하고 반가워하기도 하셨던것 같다.

나중에 그 분에 관한 여러가지 사정을 알아보고, 내가 배우고자 하는 기본적인 현장을 가까이 하는 실무형 인간의 전형적인 실무형관료인점, 내가 무척 싫어했던 비실무적 집권자의 유일한 실무적 업적을 이루도록 도와준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좋은 분은 그저 좋은 분이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그 분 관련 기사를 자주 반복해서 보는 편이다.

이상하게 현장실무와 관련된 접촉을 하는 정치가나 고위관료들은 유능하고 사명감있다는 평가를 받는데 반하여 진보적인 성향, 즉 좌파적인 성향을 가졌다는 오해도 받게 만들기 쉬운 사회가 한국사회인듯 하다. 내가 좋아하는 실무형 정치지도자가 호치민이라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는 사회가 한국사회이기도 하다.실무형지도자나 민족주의자같은 이념중립적인 관점을 벗어나서 공산주의자라는 이념적인 평가가 중요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로뛰며 민생(民生)을 함께 느끼지 않는 지도자는 통찰력을 가질 수 없다는 관점만으로 호치민을 존경한다는 뜻이다. 공산주의라는 이념이 정당한 이념이 아니라는 내 관점으로는 좋지 않은 지도자이기도 하다. 호세 무히카처럼 조금 더 우회전 하면서 한 국가의 지도자로서 능력을 검증받은 이도 있다는 사실은 무척 중요한 사실이다. 이념이 중요한게 아니라 민생의 현장이 중요한 것같다.

파킨슨의 법칙때문인지 관료조직은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커지는 성향이 있는데, 한국에서는 경찰이나 소방조직같은 현장업무를 중시하는 관료조직조차도 단순하게 커지는 것이 아니라 관료조직내의 관리자만 비대화돠는 이상한 성향이 있는것 같다. 경찰조직에서는 간부계급이 지나치게 많아져서 계급은 간부인데 현장업무를 하는 일도 있고, 소방조직은 관리자만 많아지고 현장업무를 할 인원은 항상 부족하다고 한다. 한국사회자체가 실무형 인간을 천시하는 전통적인 습성을 가졌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고 느끼는 바 있지만 사회의 효율성면에서 따지면 아주 나쁜 현상인듯 하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저항적인 심정으로 가장 소홀히 대접받는 민생의 현장에서 일하면서도 그 와중에 어떤 무지(無知)스러운 인간도 관리자가 되고 싶어하는 성향을 가졌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사회가 아직도 지배와 피지배관계 또는 권력관계같은 비효율적인 전근대적관계에 병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한다.

정치지도자가 되겠다고 하는 정치인들이 하는 말들이 민생의 현장과는 너무 거리가 먼, 추상적이거나 전혀 공감대가 형성이 안되는 내용이라는 사실을 자주 깨닫게 되는데, 능력도 없어 보인다. 2세 3세의 능력이 창업주를 넘어서지 못하는 이유는 실무적인 인간으로서의 경험이 없는 탓이라는 생각을 한다. 특히 세습지배체제인 북한은 대표적인 예를 보여주는듯 하다. 

2015년 11월 7일 토요일

황혼에서 새벽까지 / 기다림

언젠가 좀비가 나오는 영화제목인 황혼에서 새벽까지라는 말이 굉장히 공포스럽게 머리속에 남기 시작했다. 아주 어려운 삶을 살던 시절에 '기다림'이라는 단어 하나에 매달려 시간을 죽였다. 그랬더니 즐거울때가 오기는 왔다. 역시 내 감수성이 조금 더 무뎌지고 세상을 보는 관점이 더 긍정적으로 변하면서 행복함도 찾아왔다. 행복하게 만드는 많은 원인들이 있었는데, 첫번째 운동이었고,두 번째 사교육 시장에서 젊은 이들의 밝은 모습을 볼때였다. 젊은 이들의 세계에서는 우울함 조차도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예비로 생각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운동장과 사교육 시장이 둘다 경쟁과 승부에 친하지만 나는 반골기질이 있어서 그런지 곧잘 흥이 나는 곳으로 만들어주곤 했다.

노인분들을 폄하하는건 아니지만 남은 세월을 젊은 이들의 그것과는 다른 또 다른 '기다림'으로 시간을 보내는 공허한 눈빛을 보면 공포심이 느껴지곤 한다. 자존심과 이상을 잃어버린 분들과 어떻게 상호교류를 하며 밝은 세상을 만드는 시도를 해야 할지 혼돈스럽기도 하고. 그런 노인분들을 볼때 나는 어떤 '기다림'을 가져야할지 혼돈스럽기도 하다.

언젠가 북한의 열병식에서 온갖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웃고 서있는 늙은 장성들을 보면서 공포심을 느낀적이 있다. 저 인격체들은 어떤 꿈을 꾸면서 살고 있을까.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보겠다고 한반도의 산야(山野)를 짐승처럼 기어다니던 이현상이나 하준수같은 빨치산 지도자의 이상과 저 인격체들의 현실과는 어떤 상관관계가 형성이 되어 있을까.인간이 해야 하는 일이란 업적을 남기거나 결과를 얻어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밝게 살아주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10여년을 반이념을 위해 많은 논리와 직관을 소모했는데, '교과서'같은 미래를 위한 교육수단에 다시 이념논리가 개입하는 어처구니 없는 현실을 보고 있는 기분은 참으로 우울하다. 마치 영혼이 없는 살아있는 시체인 좀비에게 쫓기다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새벽을 기다려야 하는 심정이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좀비는 영혼이 없지만 한반도의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념이 다른 영혼들을 추출해낸듯 하다. 내 눈에는 영혼이 없어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가슴에 황금색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사회주의 강성대국을 건설했다고 웃고 서있는 속칭 인격체의 모습을 한국에서는 경험하지 않기를 소망한다. 이것도 기다려야 하는가.

영혼이 빠져나간듯한 노인분이 잠든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그래도 살아 움직이며 세상을 휘질러 놓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러기는 힘들겠지만 어떤 노인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은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탐욕대신 꿈과 이상을 놓치지 않으며,당신도 후손도 즐거운 세상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드리고 싶다. 

2015년 11월 6일 금요일

보수적 성향의 원인

한국사회에서 진보와 보수의 문제는 거의 경제적인 기득권과 분배문제에 관해서 논의되는듯 하다. 그러나 자신의 이해관계를 떠나서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경제적인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자본가라고해서 무조건 보수적인 성향을 띈다거나 경제적인 약자가 무조건 진보적인 성향을 띈다는 생각은 전혀 옳지 않음을 경험으로 검증해본 적이 많다. 흔히 이야기하는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보수적인 성향을 띄는 사람들을 무척 많이 본다. 아니 대부분 그런것을 보았는데, 발전보다는 안일함을 구하는 태도로 인생을 살아가는 성향이 있는 이들은 노력과 발전에 관한 열정이 전혀 없다. 가장 대표적인 이들이 노인분들일 것이다. 그러나 젊은 세대들 중에도 그런 이들이 많은데, 여러가지 제도적인 문제와 경쟁에서 밀려나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삶에 대한 열정을 찾을 길이 없을때 보수적인 성향으로 눌러 앉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반면에 기업을 운영하는 이들에게서 진보적인 성향을 본 적도 많은데, 끊임없는 이노베이션에 관한 열정으로 변화를 갈망하는 이들도 많이 보았다. 그들은 자신의 열정에 국가제도나 시민사회의 변화가 보조를 맞춰주기를 바라는데, 그것이 뜻대로 안되면 열정이 없어지면서 보수적인 성향으로 눌러앉는 것도 보았다. 언젠가 어떤 중소기업에 잠깐 있었는데, 정작 퇴행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은 종업원들이었고, 항상 변화를 갈망하는 이는 고용주였던 것을 보았다. 고용주는 '항상 배운다'는 자세로 살아간다는 워크넷의 내 이력서와 나이 보다 젊어 보이는 사진을 참고하여 회사에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을 갈망하였는데, 막상 현장과 사무실등의 모습은 변화를 이야기하기에는 먼나라 일 같았다. 회사일의 체계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 기득권을 놓지 않는 간부사원부터 변화시켜야 하는데, 나이 든 간부사원들은 변화도 싫어하고 새로운 인물도 싫어하고, 열심히 일하는 것도 싫어하고 고용주의 논의도 싫어했다. 한편으로 중소기업의 고용주는 대기업과의 경쟁에서도 위축된 환경을 가지고 있는데, 열정이 없는 종업원들 때문에도 골머리를 앓고 있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그러나 종업원들의 입장에서도 중소기업의 고용환경은 대기업과 큰 격차가 있기 때문에 무조건 열정을 강요할 수는 없는것 같았다.

어설프게 엿본 대단히 혁신적으로 보이는 IT회사도 비숫한 고민을 하는듯이 보였다. 열정은 하부계층의 종업원들 보다는 간부사원에게서 느껴지고, 대기업과의 경쟁이 가장 큰 고민으로 보이는듯 했다. 오히려 대기업과의 경쟁에서 실패하면 기업주나 간부사원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회사의 혁신적인 변화보다는 개인적인 안일함을 구하는 보수성을 띌 가능성이 우려되기도 했던것 같다. 시차는 좀 있겠지만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성향의 결과는 번영이고, 보수적이거나 안일한 성향의 결과는 퇴보라는 원리를 생각하면 보수적인 성향은 사회공리적인 관점으로도 피해야 할 성향인듯 했다.

결론을 말하자면 보수성은 기득권때문이 아닌 좌절감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할것 같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이념적인 보수와 진보의 차이는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다. 시민 각자의 보수성은 국가전체의 퇴보를 가져 오는데, 일본은 그 대표적인 성향을 나타내고 있는듯 하다. IMF의 전망에 의하면 곧 일본의 일인당 구매력기준 국민소득을 한국이 추월할 것이라고 한다. 물론 한국정부나 일본정부에서 제공한 자료를 기반으로 전망을 하고 있지만 IMF에 제공한 경제적인 자료에서조차 일본은 조심스러운 보수성을 띄었을 것이다. 대체로 한국이 일본보다 덜 보수적이라는게 알려져 있는데, 그건 경제적인 후발주자로서 당연한 평가를 받는듯 하다. 하지만 요즘 추세를 보면 한국이 정치를 중심으로 혁신과는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장 문제는 정치적인 분위기와 노령층 인구의 증가, 청년실업과 같은 역동적인 에너지를 감쇄시키는 요인들이 많아지는 현상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보수와 진보의 논의조차도 있어서는 안될 것 같다. 혁신을 하고자 하거나 운명을 개척하고자 하는 개인들이 좌절을 하지 말아야 하는 국가를 만들어야 할 것 같다. 

에로스(Eros)와 정신머리

근래 몇 년동안은 중년이상 유명인들의 성추문사건이 자주 발생하는듯 하다. 성추문사건은 입에 담기도 민망하다는 이유로 공론적인 논의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면에서 한국사회에서는 가장 퇴행적인 모습을 보이는 분야이기도 하다. 이번 정부의 출범과 동시에 대변인의 일탈, 고위급 인사의 집단난교, 고위법조인의 병적인 일탈, 국회의원의 성추행, 급기야는 국정교과서를 집필하기로 한 학자의 성추행문제까지 발생하여 사회지도층이나 나이많은 사람들의 성윤리를 대변하는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듯 하다.

어느 날 나이 어린 여자친구가 많다고 고백하는 유명한 원로가수가 20대초반의 젊은 여성에게 입술을 내미는 장면이 인터넷에 뜨자 댓글을 다는 젊은이들의 증오심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어렸을때는 버릇없는 젊은이들이 문제였는데, 이제는 나이 든 사람들이 젊은이들의 윤리적인 비난을 받는 일이 빈번해진듯 하다. 언젠가 이념문제와 관련하여 나이 든 사람들의 '보수성'에 관해 관찰하기 위하여 노인분들이 많은 일터를 다녀봤는데, 노인들이 체면이나 자존심같은 것은 잃어버리고, 육체만 그럭저럭 움직이면 혼미한 정신에도 불구하고 야구동영상을 돌려보거나 여성들의 뒤를 쫓아다니는 추태를 부리는 장면을 많이 보았다. 간혹 젊은 사람들에게 보기 부끄럽다고 말리는 분들도 있었으나 요즘 노인은 많되 어르신이 없다는 가시돋힌 말들을 어렴풋이 느끼는 충분한 경험이 된듯 하다.

모든 조건이 다 갖추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지위를 제대로 얻지 못하는 지인이 있었다. 대화할때마다 성적인 내용에만 눈이 반짝이는 상태를 느끼고는 스포츠에 몰두하면 나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야말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말이 어울리는데, 정기(精氣)와 관심사는 제대로된 곳을 지향해야 한다는 생각에 아는척을 해봤다. 그러는 나는 고상하냐하면 그것은 아닌듯 하다. '일본의 성문화'라는 기사의 제목을 서둘러 클릭하고는 어쩔수 없이 일본 오사카성등의 여러 성벽들의 축조방식과 병력배치방식, 전투상황등을 공부해야 했던 익살스러운 경험이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불완전한 나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주변에 퇴폐적인 사람들이 있으면 질색을 하거나 스포츠에 일가견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조그만 업체를 운영하다가 고학력을 가진 중년직원들과 미인에 준(準)하는 여직원과의 얽힌 관계로 크게 곤란을 겪은적이 있었다. 마치 몇년전 주중 상하이 한국영사관을 쑥밭으로 만든 '상하이 덩씨'사건의 축소판으로 보면 되겠다. 예의 그 여직원이 말이 통하는듯 하다고 내게 자신의 가정사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내 연륜이 부족하여 그 이야기의 본질을 알아내지 못했던것 같다. 그 여직원은 아버지가 커가는 딸들과 조강지처를 두고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는 것이다. 성장과정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은 여직원은 성실한 남자를 만나 제대로 된 가정을 꾸미고 싶어했던것 같다. 그런데, 남자직원들에게 친절하게 대한다는것이 그만 동상이몽(同床異夢)상태가 되었다. 탐욕에 가득찬 중년아저씨들이 집적거리기 시작했고, 배신감을 느낀 여직원은 삼각관계, 사각관계, 오각관계를 형성해가며 분란을 일으키고 말았다. 결국 업체의 투자자까지 물려들어가서 헤매고 있었다. 얼마후 업체는 문을 닫았다, 직장을 잃은 그 중년 아저씨들은 두고 두고 나를 원망하고 있었다. 얼마후 전철안에서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이 내가 지나가자 아이의 이름을 일부러 크게 부르는 것을 돌아보았는데, 원하던 것을 얻었다는 표정을 짓고 있어서 내 나름대로 고개를 끄덕여 보았다. 

운동장에서 준수한(자꾸 준수한 스포츠실력을 가졌다고 말하는데, 실제로 그렇다)스포츠 실력을 뽐내다가 한동안 화려하고 날라다니는 점잖치 않은 복장으로 운동을 해봤는데, 주변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심지어 함께 운동하던 여성분의 극진한 관심까지 받게 되었는데, 염치불구하고 도망갔다. 운동이 더 좋아서 운동장에서는 운동만 해야겠다는 생각에 친절했던 분을 난처하게 만들었던것 같다. 그리고 복장도 건강하게 해야 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사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보니 공유한 지식과 그에 근거한 대화가 함께 하지 않으면 이성에 대한 매력을 못 느끼는게 내 경험인데, 입과 마음이 다르게 각자 각개전투를 하는 '정신머리'때문에 유명인들의 성추문 사건은 자주 일어나는듯 하다. 그저 건강한 혈기에도 건전하게 사는 젊은이들에게 미안할 뿐이다.

사랑의 비의.....올바른 길로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이 일을 어려서부터 시작해야 하며, 또 아름다운 육체에 접근해야 하는 것입니다. 맨 먼저는 그의 지도자가 바르게 지도한다면 한 육체를 사랑하며 거기에 아름다운 언설을 낳아야 합니다. 그 다음엔 한 육체의 아름다움이 다른 육체의 아름다움과 비숫하다는 것과, 또 아름다움을 본질에서 추구하고 보면 모든 육체의 아름다움이 결국 동일한 한 가지 것임을 믿지 않는 것이 크게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모든 아름다운 육체를 사랑하는 자가 되어, 한 육체에 대하여 가볍게 생각하여 그것이 지극히 작은 것이라고 믿음으로서 그 한 육체에 대한 강렬한 정욕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다음에 정신의 아름다움이 육체의 아름다움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안 됩니다.그리하여 누구든 정신이 아름다운 사람이 있으면 설사 그 용모가 그다지 환하지 못할지라도 만족하여 사랑하고 보살펴주며,그리하여 자식을 낳고 또 그 젊은이들을 훌륭하게 해 줄 만한 이야깃거리를 찾아 이야기해 주어야 합니다.이와 같이 하면 그는 더욱 우리의 여러 가지 제도와 법률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보게 되며, 도 모든 아름다움이 결국 하나의 동일한 연줄로 서로 결부되어 있음을 이해하게 되고, 따라서 육체의 아름다움이란 것이 보잘것없는 것임을 잘 알 수도 있을 겁니다. 그 다음에 그는 제도나 법률 같은 것으로부터 지식으로 나아가, 여러가지 다른 종류의 지식 속에 있는 아름다움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아름다움을 하나의 전체로서 바라보도록 하여 다시는 노예처럼 한 가지 것에 얽매여 한 소년이나 한 인간이나 혹은 어떤 한 가지 일에만 만족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 플라톤[플라톤의 대화]중에서 -

사회적으로 저평가를 받는 일을 할 때였다. 사람들은 항상 작은 이익에 얽혀 싸우고 서로를 경멸하고 있었는데, 유난히 한 중년여성이 단아한 모습으로 묵묵히 맡은 일만하고 있었다. 얼마후 갑자기 높은 직급으로 올라가 쓸데없는데 에너지를 낭비한 사람들을 무색하게 하고 있었다. 만약 퇴폐적이며 출세한 사람이 있거나 출세하여도 퇴폐적이거나 정신머리를 놓아도 지위를 보전할 수 있는 사회라면 끝이 보이는 사회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