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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27일 토요일

리더 / 섀클턴


히딩크감독이 한국의 월드컵팀을 지도할때, 한국팀이 정신력은 강한데 체력이 약하다는 전통적인 평가와는 반대로 한국팀은 체력은 강한데 정신력이 약하다고 평가한적이 있었다. 파노라마처럼 지나간 주변의 수많은 사건들을 생각해볼때, '더 나아간다'는 명분으로 얼마나 많은 '인간적인 것들'이 희생되어 왔는지에 대한 생각이 들때가 있다.

희생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선량하지도 않고, 진정성도 없으며 오직 부글거리는 욕망을 위해 앞장서서 달렸던 리더의 시선이라면 히딩크와 같은 통찰력이 생길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나쁜 리더는 공명심과 같은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본질적인 목적을 잊는듯 하다. 더 나쁜것은 그런 욕심은 구성원들에게 포착되게 마련이고, 중대한 약점으로 존재하며 모든 구성원들이 그 리더가 선 자리를 향해 경쟁을 하는듯 하다. 그래서 나쁜 리더는 자신이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착각을 하지만 사실상 그 권력을 지켜내기 위해 구성원들과 경쟁을 하며, 목적을 잊은 리더와 목적을 잊은 구성원, 목적을 잊은 집단이 삼위일체가 되어 파국으로 치닫는듯 하다.

그래서 나쁜 리더가 있는 집단은 항상 바쁘고 재촉하는데, 뭔가가 잘 안되는 성향이 있는듯하다.열심히 일한다는 생각은 했으나 실상은 집단의 구성원들과 투쟁을 해왔던 리더들을 생각하면 원인과 결과의 정확한 연계성을 보여주기도 하는듯 하다.

비숫한 시기에 북극과 남극을 탐험했던 스태팬슨의 칼릭호와 섀클턴이 이끌었던 인듀어런스호의 결말은 리더의 중요성을 알려주는듯 하다.

섀클턴은 항상 낙천적이었다. 아무리 위급하고 어두운 상황에서도 대원들이 의지를 상실할까봐 낙천성을 잃지 않았다. 권위를 생각하지 않고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았는데, 주방장으로부터 대장이란 이유로 특별대우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면 몹시 싫어했다. 침낭과 같은 긴급물품을 배급하는데 있어서도 대원들보다 더 나쁜 것을 먼저 차지했다. 대원을 선발할때 어떤 뛰어난 재주가 있는 것을 선발을 위한 척도로 삼은 것이 아니고 어울려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지 질문을 했다.  

수개월동안 조난을 당했을때 칼럭호의 승무원들은 거짓말하고 도둑질하는 일상속에서 팀이 붕괴되어 전원 목숨을 잃는 결말을 보여줬다. 하지만 인듀어런스호는 섀클턴이라는 리더의 희생과 의지로 전원 무사귀한하는 결말을 보여줬다.

국가라는 배의 승무원들에게도 섀클턴과 같은 리더가 필요한듯 하다. 국가의 본질적인 목적을 아는 리더는 통찰력이 있으며 구성원들도 협력하여 따르는듯 하다. 나쁜 리더는 선량한 구성원도 무기력하게 만드는듯 하다. 한반도에서 필요했던 것은 이념이 아니라 좋은 리더였던것 같다. 구성원과 투쟁하지 않는 리더, 구성원과 심정적으로 격리되지 않는 리더, 솔선수범하는 리더가 필요했던것 같다.

북한을 보면 본질적인 목적이 없는 국가와 리더가 없는 국가의 결말을 보는듯 하다. 북한과 대칭사회인 한국에서 북한을 비교의 척도로 삼아 '어느 선'에서 만족할 것을 말한다면 나쁜 결말을 볼것 같다. 사회의 밑바닥에 살다보면 많이 안좋은 상황이 예고됨을 알고 전율이 느껴질때가 있다. 어떤 학습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작은 집단의 구성원들도 수직적 권위에 물들어 있다. 그리고 구성원 누구도 그런 리더에 협력하지 않을려는 모습을 보인다. 문제가 있으면 문제의 해결책을 찾지를 못하는듯 하다. 그냥 자신이 분위기를 이끌고 있다는 상상력만 있는듯 하다.

2014년 12월 20일 토요일

적대적 공생의 종말


진보정당이 헌법재판소 판결에 의해서 해체되면서 민주주의란 단어의 어원인 다수(Demo)가 지배하는 정체(政體)가 형성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좀 회의적인듯 하다. 공리주의자인 밀(John Stuart Mill 1806 - 1873)은 토론과 논쟁으로 상반된 가치의 대립속에서 세련된 진리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지금까지 상반된 가치의 대립은 있었으나 세련된 진리를 끌어내기 위한 토론과 논쟁은 없고, 맹목과 격한 투쟁의 종착지에서 소수의 이념정당이 '먼저' 없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이해되지 않는 소수자가 걸어 온 궤적만큼이나 어지러운 다수자의 앞날이 밝다고만은 할 수 없을듯 하다.

좌파가 없어지면 우파를 말할 이유가 없다는데서 새로운 시작이 기대되기도 한다. 국가란 어떤 상황에 직면한다고해도 정부주도적이든 아니면 국민의 개별적인 움직임이든 문제를 교정할려는 의도는 현실화된다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인듯 하다.

2014년 12월 19일 금요일

감정의 경제(economotion)


언젠가 추운 크리스마스 이브에 강변의 화려한 이국적 문화시설에 수많은 아베크족이 몰려 있는것을 보았다. 네온사인이 화려한 또 다른 세계를 구성하고 있었는데, 왠지 나와 관련이 없는 세상임에도 한파속에 그곳을 뚫고 지나가는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던것 같다. 

그 당시 겪었던 어둡고 냉혹한 외부세계와는 다르게 연인들의 사랑의 속삭임이 있었고, 그런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고용인들이 있었고, 그곳까지 사람들을 모이게 한 고급승용차들이 있었고, 그리고 잠깐이나마 안락한 광경의 위안을 받은 내마음이 있었다.

경제행위에 있어서 감정이라는 것은 참 중요한듯 하다. 때로는 감정이 비극을 느끼게 하는 동기가 되기 때문에 인간의 불완전함으로 매도당하기도 하는듯 하다. 내 자신 조차도 어렵고 힘든 시간에 내 자신을 무감동에 길들여 놓는게 강한 사람이 되는 길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던것 같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이 결심은 본능적으로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시간과 공간이 허락하는 곳에서 음악을 들을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아베크족의 연심(戀心)이 동기가 된 공간은 꽤 폭이 넓은 경제적 인연이 맺어져 있는듯 한데, 감정이 만들어 놓은 경제적 효과의 예를 보는듯 하였다. 사실 좋은 차를 비싸게 팔 수 있는 근원, 맛있는 음식을 비싸게 팔 수 있는 근원, 새로운 스마트폰을 사기 위해 줄을 서는 마음의 근원, 제주도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는 근원, 나 혼자 잘살겠다고 나라를 뒤집은 마음의 근원에는 인간적인 감정이라는 가장 본질적인 동기가 바탕이 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듯 하다.

요즘 땅콩회항사건과도 관련해서 운항정지 처분까지 받은 항공사의 손실은 항공사의 입장으로서는 '감정의 불경제'라는 효과를 경험하고 있는듯 하다. 피폐한 북한의 사정이나 천민자본주의 실태를 보여주는 한국사회도 인간적 감정을 소홀히 하면서 '감정의 불경제'효과를 보여주고 있는것 같다.   

감정적이라는 것은 인간적이라는 의미와도 상통하는듯 하다. 그런데 이런 인간의 감정이 많이 손상을 입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믿음과 신념이 지나치게 감정을 대체하는 사회속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 믿음과 신념은 더 나은 세계를 만들겠다는 목적으로, 약자를 위한다는  목적으로, 자유를 위한다는 목적으로, 천국을 가게 한다는 목적으로 감정을 대체할려고 노력한다.

이념이나  종교, 물질에 대한 집착은 그보다 훨씬 근원적인 인간의 감정, 달리 표현하면 더욱 인간적인 것을 잃어버리게 하는것 같다. 물리학자 에딩턴은 "물질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우리는 물질이란 상념의 응결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된다."고 말한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며 우리들이 '돈'이라고 하는 지극히 물질적인 존재와 그것들이 흐르는 경제의 배후에는 '인간의 감정'이라는 바탕이 있는듯 하다.

2014년 12월 6일 토요일

노인과 경제 / 아시아 경제의 몰락


오래전 낮에는 주물공장의 용광로에서 일하고 저녁엔 대단히 지적(知的)인 일을 한 적이 있었다.오랫동안 한국사회의 불합리한 현상으로 인정받는  노동현장의 모순따위는 생각해 본적이 없고, 타고난 부실한 심신(心身)을 교정하기 위해 낮시간을 보낼려고 했었던것 같다. 현장에는 학벌이 없는 젊은이 몇명이랑 그리고 많은 '노인'이 있었다.

명문대 출신의 엘리트인 동료들과 엘리트를 지향하는 젊은이들을 상대하는 밤의 일터랑 '문화적 차이'가 많이 나는 낮의 일터로의 전환은 몸과 마음의 순발력을 증진시키는데도 도움이 되었지만 폭넓게 사회와 인간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은 평생을 험한 노동일로 자식들을 대학까지 교육시킨 칠순의 노인분이었다.

특수부대의 훈련을 방불케하는 노동현장에서 수십년동안 견뎌온 깡마른 노인분은 식사시간에 당신은 자식들을 대학까지 보낸 훌륭한 노인이기 때문에 무식한 젊은 노동자들과는 한 상에서 밥을 먹을 수 없다는 완고한 고집을 빼놓고는 경이로운데가 있었다. 훗날 그 '무식한 동료'중 한 명은 회사가 부도가 나서 임금이 밀리자 공장 굴뚝에 올라가 자살소동을 벌이는 장면이 티브이에 중계되어 티브이 스타가 되는 블랙코미디를 연출했다.

바로 그때가 동네 아주머니들이 뭔지 모르지만 무서운 것이 문앞까지 왔다고 하던 임프(IMF)의 시절쯤 되었는데, 그 시절의 거시적인 근원을 하버드 대학의 경제학 교수 토드 부크홀쯔(TODD G.BUCHHOLZ)는 그의 저서 NEW IDEAS FROM DEAD ECONOMISTS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일본경제의 급속한 추락은 결국 주변국들을 모두 집어 삼켰다. 아시아의 호랑이와 용들은 재화의 상당 부분을 일본에 팔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구매를 멈추자 그들은 제품 가격인하는 물론이고 이익도 상당히 줄었다. 불행히도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 같은 나라들에서는, 아시아 경제가 영원히 고속성장을 할 것이라고 믿는 외국인 투자자들이 대주는 돈을 가지고 무분별한 소비를 행하고 있었다. 오만했던 그리스 비극의 영웅 이카루스처럼, 말레이시아는 세계 최고층의 건물인 페트로나스타워를 지었다. 1960년대만해도 아이티만큼 가난했던 나라가 말이다! 그러나 시장은 겸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다.1997년 아시아 주식시장은 폭락했고, 폭동이 반발하고 정치지도자들이 쫓겨났다. 

아시아의 용들은 일본의 잘못된 경영에 운 나쁘게 휘말린 순진무구한 구경꾼에 불과한 것일까? 그들에게는 일본이나 심지어는 미국의 정부도 탓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심지어는 한국마저 일본과 러시아라는 두 거인의 몰락을 겪어야 했다. 그들은 특정 산업에 돈을 직접 대주면서 강철같은 손을 휘두르는 일본의 관료주의자들을 그대로 모방했다.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정치가의 친척이나 친구들이 특정부문만이 아니라 산업전체를 독점하는 정실자본주의 양상을 띄고 있었다.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같은 독재자들은 수십억달러의 돈을 가족 소유의 기업에 은밀히 대 주었다. 미국의 경영자들이 "주주가치 shareholder value'를 창출하는데 매진하고 있는동안, 아시아의 경영자들은 현대군벌들의 비위를 맞춰줘야 했다. 그 결과 경영자들은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 자회사 분사나 합병 파트너 모색등 재빨리 대처할 자유나 탄력성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더욱이 민간 금융회사들은 부동산거품에 기꺼이 동참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곤란에 처하면 정부가 구해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통화시장을 갖고 논 덕분에 그들의 혼란이 더욱 심해졌다.  - 중략 - 트레이더들이 달러화를 마구 팔면서 달러화의 평가절하를 이끌었다. 이것이 아시아 호랑이들의 재정을 고갈시키고 있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일본의 은행에 상당한 빚을, 그것도 엔화로 지명된 부채를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엔화 가치가 상승하면서 그들은 채무상환에 더욱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다가 1995년 미국정부가 태도를 180도 바꾸고는 트레이더들에게 달러가치를 높이고 엔화가치를 떨어뜨릴 것을 종용했다. 급변한 상황 덕분에 채무 부담은 줄어들었지만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갑자기 엔화 가치 하락이라는 사태를 맞은 일본이 이 호랑이들의 상품을 예전처럼 많이 구매해 줄 수가 없게 된 것이었다. 1. 정부의 과도한 개입, 2. 정실자본주의, 3. 달러화에 대한 미국의 태도 급변이라는 요소들이 치명적으로 결합하면서 아시아의 호랑이들은 뒷골목의 작은 고양이로 전락하고 말았다. 

아이엠에프의 구제금융시절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별이 떨어진 것이 아닌듯 하다. 그 이면에는 일본과 아시아 국가간의 경제적 긴밀성, 아시아의 정실자본주의, 아시아 국가들의 정경유착, 심지어는 더 근원을 살펴보면 인구의 노령화와 수직적 관료주의로 성장동력을 잃어가는 일본경제와 아시아국가들의 대중정치적 성향이 위기의 바탕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게한다. 잘은 모르지만 오랫동안 한 자녀 낳기 운동을 벌이는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경제나 일본의 사회성향을 그대로 답습해가는 한국이 무엇인가 큰 문제가 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듯 하다.

한국에선 빈번히 진보성향의 인사들이 노인폄하발언을 했다가 문제가 되곤한다. 아마 문제의 본질과 개선점을 집어내지 못하고 정치적 승부에만 집착을 했기 때문에 대중정치적 성향이 심해지는 부실한 정치여건에서 '기분을 건드려 표를 못 얻는' 재난을 당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인구 노령화와 노인과 젊은이의 세대갈등 문제는 뜻밖에 심각한듯 하다.

노인과 젊은이를 동시에 보면서 느끼는 바로는  노인은 심신의 약화로 급속히 보수화되는 문제가 있는데다가 노인세대가 만든 사회제도 안에서 역동성을 잃어버린 신세대들의 무기력도 한국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즈음에서 일본의 문제를 간략하게 표현하자면 보수성을 벗어나지 못하여 변화의 때를 놓쳐버린 문제가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의 의견이 현존하는 한국정치의 진보나 보수의 어느 한 쪽에 편향된 생각이라면 그것은 지나치게 정치시장적인 관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훨씬 본질적인 문제가 될 수가 있다.

어느 날 파인즈라는 68세의 노인이 한 겨울에 영하 70도까지 내려가는 남극을 탐험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디펙초프라라는 인도계 미국의사는 노인은 주변에서 늙는 이를 보기때문에 늙는다고 말한다. 좀 판타스틱한 말에 가깝긴 하지만 노인의 적극적인 사회참여라든가 혁신을 지향하는 노인의 태도는 정치뿐만이 아니라 경제적이고 개인적인 문제까지 아쉬운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노인은 열정을 가질때부터 그 만큼의 노인이 아닌듯 하다. 가끔 젊은이들과 함께 있으면 힘이 날때가 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미래에 대한 꿈이 내 마음도 울렁거리게 만들곤 한다. 어차피 살아가는 것이 꿈과 현실의 조합이라면 한 번 변화를 시도해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꿈은 현실에 대한 집착을 덜어주는 느낌을 받을때가 있다. 현실에 집착을 하면 늙는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어차피 시작된 노령화 국가지만 생각이 젊은 노인이 살아가는 국가란 노령화 국가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