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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22일 토요일

피케티와 노동현장 그리고 동양철학까지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만 읽으며 두고 두고 봐야할 책들을 적어둔 목록이 꽤 되어서 사보고 싶었던 책을 대량으로 구입하였다. 그 중에 프랑스의 젊은 경제학자인 토마 피케티가 지은 [21세기 자본]도 있었다. 자본이 돈을 버는 속도가 노동이 돈을 버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기 때문에 빈부격차가 심해진다는 피케티의 이론은 실생활에서 너무 생생하게 느끼는 문제였다.

심지어는 위의 문제를 생생하게 느껴보기위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노동현장을 경험하고는 그 조악함에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었으며 그때마다 나에게 남겨줄'돈'을 벌지못한, 나아가서는 교육을 시켜주어 '비평적인 사고'를 키워준 부모님을 원망(?)을 하지 않을수가 없었던것 같다. 

노동현장에서 노동시간이 지켜지지 않는것은 다반사고 더 나쁜것은 그 조악한 현장에서 인간의 탐욕과 관련된 살벌한 투쟁이 일어나는것도 다반사였는데, 특히 젊은 노동자들과 경쟁에서 이길수 없는 연령이 많은 근로자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은 이리보고 저리보아도 삶의 본질은 고통이라는 불교철학을 실감나게 해주었다. 그때마다 하루 여섯시간 근로제나 주4일 근로제와 같은 탄력적인 근로시간이 활성화되면 체력적으로 열세인 노령의 근로자나 학업이나 미래에 대한 투자를 병행해야 하는 젊은이들을 외국인 노동자대신 근로현장에 흡수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곤했다.

젊었을때 열심히 일했는데, 늙었을때도 열심히 일해야 하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곳이 한국의 노동현장이라는 사실을 알면 피케티보다 훨씬 선험적으로 자본소득의 위력을 체험한 한국인들은 많았을것 같다. 물론 이런 문제를 거론하는것은 이념과는 전혀 관련이 없고 더 많은 실업자를 구제하거나 노동현장에 활력을 주어서 국부(國富)의 증대에 기여할 수 있다는 관점으로 해석해야 할듯하다.

이미 피케티의 저서가 전세계에 뿌려지기시작할때부터 마르크스와 비교되는 충격적인 비난을 받기 시작했는데, 갈등론자인 마르크스와는 전혀 관련이 없고, '문제의 치유'라는 균형론적인 관점으로 해석되어도 전혀 무리가 없을듯 하다. 내 자신이 조악한 노동현장에서 국가와 부모를 원망하는 시간 보다는 어떻게 이 문제를 개선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는데, 피케티의 생각도 그러했을거라고 생각한다.

이 즈음에서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한국에서 천대를 받는 철학에 관한 사치스러운 이야기를 하자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쓴 피케티의 책을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잠깐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을 통계와 합리적인 논리로 풀어나가는 학문의 중요성은 인류가 모두 망하느냐 모두 생존하느냐 하는 단순하고 극단적인 문제에 관심을 집중하는 황당한 종말론적인 종교에 비할 수 없이 중요한 문제인듯 하다. 피케티의 연구와 같은 시도는 어떻게든 문제를 파악해서 새로운 세계로 가는 길을 열어보자는 매우 긍정적이고 인간적인 노력, 현실적인 가치를 보여주고 있는듯 하다.

나는 종종 동양철학이나 동양사상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곤 한다. 이념문제와 관련해서 토로해 온 글들이 서양철학이나 서양사상을 많이 인용해 오고 동양철학이나 동양사상에 대해서는 적대시 수준으로 인용을 기피해 온듯 하다. 그러면서도 그 이면에는 동양적인 것을 많이 생각해온듯한 흔적이 보인다는 생각을 남의 글 읽고서 생각하듯이 생각하곤 하였다.

동양철학은 더욱 근본적인듯 하다.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자칫하면 과정의 합리성을 무시해 버리는 교조적이거나 종교적인 믿음으로 생각을 묶어버리는 문제가 있는듯 하다. 불교의 공(空)사상이나 도가의 무위자연(無爲自然),심지어는 불교나 도가 보다도 한 단계 합리성이 업그레이드된 유교사상조차도 근본적인듯 하다. 근본적인 것들은 다른 생각들을 배제하기 쉬운듯 하다. 한 시대의 사상으로 자리 잡으면 다른 세상으로 갈 길을 열어주지 않는 문제가 있는듯 하다.

지금 한참 문제가 되고 있는 광신적인 '이슬람 국가(IS)'의 광란도 더욱 근본적이라서 폐쇄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듯 하다. 개신교에서는 유교가 조선왕조의 폐단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폐단은 달리 생각함을 막아버린데서 문제가 비롯되는듯 하다. 유교의 문제는 모든 종교가 가지고 있는 문제와 일치한다. 동양철학이나 종교의 문제점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옳지만 명확하지 않은 문제가 중구난방으로 해석될 여지를 준다.'는 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서양의 사상들이 인류문화를 발전시킨 이유는 WHY, 왜, 어째서라는 실존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주기 때문인듯 하다. 변화와 발전은 끊임없는 의문과 해결책을 내놓는 '수고'에 의해서 이루어지는듯 하다. 이념이 종교화되면서 이런 '수고'를 막아버렸다. 알고 있고, 느끼고 있는 내용이지만 피케티의 저서는 문제의 해결책을 내놓는다. 조악한 상황에 생각없이 분노하기 보다 천천히 현실을 탐구해나가고 교정할 수 있는 여유를 주기 때문에 할 수 없이 33000원짜리 책을 사올 수 밖에 없었다.

책을 읽을 자유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국민에게 사상의 자유가 없으면 북한처럼 동토(冬土)의 왕국을 벗어날 수 없다. 학창시절 옌벤인민공사에서 출판된 철학책을 읽다가 포도청과 불협화음이 있었던 시절을 생각하면 많이 발전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세상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자유가 중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2014년 11월 21일 금요일

복수와 신뢰의 경제


언젠가 일터에 심각한 위해를 입히는 무뢰배가 있었다. 권력적인 지위를 얻고자 수험생활을 병행하던 모습이나 독실한 종교적 믿음을 가질려고 애쓰던 모습등을 생각하며 성장과정에서의 좋지않은 경험등을 유추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마음의 점을 찍지 못하고 점점 비뚤어져 간듯 하다. 상처입은 마음을 직장동료들에게 전가시키며 복수가 가져다 주는 달콤할것 같은 과실을 혼자만이 챙길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리고 일터는 비숫한 마음들에 의해 점점 피폐해져갔다.

시간이 흘러 비숫한 무뢰배를 보면 그 동료가 생각이 났는데, 종종 연락을 해서 근황을 물어보곤 하였다. 꽤 오랫동안 그러다가 어느 날 그 동료가 비명을 질렀다. "날 자꾸 괴롭히면 정말 가만히 안있을꺼야!" 한바탕 웃고나서 그 이후로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복수는 누구에게 앙갚음을 함으로써 억울함을 달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복수와 신뢰라는 것은 동전의 양면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라고 할 수 있다. 트러스트 게임을 이용한 실험에서도 나타났듯이 사람들은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고 앞으로 만날 일도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신뢰를 가지려는 경향을 보인다. 일반적인 경제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와 같은 맹목적인 신뢰는 비이성적인 것이지만 말이다. 

신뢰를 바탕으로 성립된 사회계약이 깨어졌을 때, 우리가 크게 분노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경향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사회계약을 깨뜨린 사람들에 대해 시간과 돈을 소비하고, 심지어 신체적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복수를 하려고 하는 이유는 이때의 분노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사회구성원들끼리 서로 신뢰할 수 있는 사회는 그렇지 못한 사회보다 엄청난 이점을 갖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높은 수준의 신뢰를 구축하려 노력한다.

- Dan Ariely의 [THE UPSIDE OF IRRATIONALITY]중에서 - 

가끔 북한은 한미연합훈련을 하거나 삐라살포등으로 북한체제에 대해 자극을 하면 남북의 신뢰관계를 흔들었다는 이유로 복수를 하겠다는 으름장을 놓곤한다. 물론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이나 북한체제에서 핍박받던 탈북자들을 생각하면 북한이 주장하는 논리의 정당성에 대해서 의문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듯 하다. 그런데 신뢰관계를 깬 문제의 중대성에 대해서 말하지만 그 이면에는 미래지향적인(?) 경제적 계산이 깔려 있음을 누구나 추측하는 바가 있을것 같다.

한국인들은 한이 많다고 한다. 대게는 인간적이고 평화로운 삶을 파괴한 것들에 대한 신뢰감을 상실한 문제에 근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개인적으로 인간관계를 피폐하게 하는 이들과 깊은 이야기를 해보면 상처받은 과거가 있음을 드러낸다. 국가적으로는 이념대립의 문제도 복수심이 이면에 아주 중대하게 내재해 있는것으로 생각된다. 더 본질적이거나 다른 문제에 대해서 관점을 돌려야 하는데도 이념문제가 개입하는 이유는 과거에 강한 자극을 주었던,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 자극이 바탕이 된 현실(남북관계같은)이 면면히 이어져 관점을 강하게 붙들어매고 있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하는듯 하다. 다만 치유가 안될뿐이라는 생각이다.

대중은 권위적인것 보다 신뢰감을 무너뜨리는 것을 더 싫어하는듯 하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우려감, 잡히지 않는 것에 대한 우려감이 더 큰 것으로 생각된다. 이념이나 종교적 일탈, 정치적 일탈, 사기등과 같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만연할 수록 사회의 신뢰감은 깨지고 복수를 위해 칼을 가는 한많은 생각들이 많아질것 같다.

2014년 11월 15일 토요일

국민을 통합시키는 선량한 절대가치


상대적 비교가 시민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맞는것 같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가는 정신들은 자신과 타인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인듯 하다. 우월감은 자신보다 우월한것을 만났을때 열등감으로 화(化)하는 장면을 많이 본다. 그 마음이 자신의 주변인들과 사회에 대한 적대적 감정으로 표현되는 장면도 많이 본다. 평생 우월감을 찾기 위해 노력한 이는 열등감을 느껴본 이일수 있으며, 자신보다 열등한 이에게 가혹하게 대할 가능성이 있다. 얼마전에 발생한 경비원분신 사건을 보면서 병든 '상대적 시민사회'의 모습을 보는듯 하였다.

언젠가 베트남 국민들이 부러웠던 적이 있다. 베트남 지도자는 국민의 감정을 절대적 가치에 묶어두고 있는듯 하다. 그 절대성이란 도덕감정, 국가목표등으로 해석된다. 이웃과 비교를 할려고 하다가도 지도자의 모습을 보면서 비교를 멈춘다. 장기적으로 비교심은 목표심을 흐트린다는 시민과 사회심리를 인용해보면 베트남의 숨은 저력이 느껴진다.

부탄국민은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국민이라고 한다. 부탄의 일인당 국민소득은 북한과 비숫하다. 그러나 부탄의 국왕은 자신이 스스로 전제정치를 포기하고 입헌정치체제를 도입하였다. 국민이 반대를 하는데도 후세의 국왕이 전제정치를 할 것을 우려한 이유라고 한다. 국민감정을 '선량한 절대가치'에 묶어놓을 줄 아는 지도자인듯 하다. 이에 반해서 북한의 지도자는 국민을 묶어놓는 절대성의 본질적인 가치를 오해하는듯 하다. 그런 면에서는 러시아의 푸틴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훌륭한 지도자들이 국민통합을 위해 절대적 가치를 이용했다. 링컨은 자유주의를 본질적 가치로 하는 미국에서 노예해방이라는 절대적 가치로 국민을 묶었고, 프랑스의 드골은 독일의 침략에 대항한 투쟁이란 절대적 가치로 국민의 정신을 묶어놓았다. 훌륭한 지도자를 판별하는 척도는 지도자가 발휘하는 절대가치의 성격인듯 하다. 

가끔 조악한 일터에서 제대로된 종교적 믿음같은 절대가치를 지닌 이들이 일터의 분위기를 살려주고 있는것을 많이 본다. 반면에 비교와 경쟁이란 절대가치를 지닌 이들은 불평과 싸움을 일삼는다.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서 노력하는 지도자를 둔 시민은 배신감과 상실감을 느끼기거나 모방을 한다. 가진것이 없는 동료라도 비교하지 않는 마음을 가진이가 옆에 있으면 부담없이 즐겁다. 고관대작이라도 비교와 승부의 마음을 가진 이가 옆에 있으면 부담스럽고 싫다. 그런 이는 나 혼자 있어도 느낄 수 있는 행복을 파괴한다. 우월감과 열등감 둘 중에 하나를 느끼게 한다. 그런 이는 나만 파괴하는 것이 아닐것이다. 그런 이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지위의 경중(輕重)에 따라서 사회적 행복을 파괴하기도 하는듯 하다.

평등과 복지라는 절대가치가 선량함과 이타성이라는 도덕적인 절대가치를 내포하고, 비교심과 우열감을 버리도록 한다면 시민사회의 발전에 크게 공헌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과학적사회주의나 천민자본주의같은 이념적인 절대가치를 지닌 국가들이 무너지거나 혼돈으로 빠진 이유는 도덕적인 절대가치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인듯 하다.

훌륭한 목표를 가진 시민, 훌륭한 지도자를 가진 시민, 훌륭한 믿음을 가진 시민의 공통점은 마음을 선량한 절대적 가치에 두었기 때문에 비교하지 않는듯 하다.  

2014년 11월 14일 금요일

인간의 경제이론


가끔 경제학자의 경제예측은 전혀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실제로 한 시대의 주류적인 경제학자들의 이론이 그 시대의 경제적 풍토를 이끌기도 하고, 적절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으면 다시 새로운 이론으로 대체되기도 하는데, 그 와중에 경제이론은 맞지 않는다는 채찍을 맞기도 하는듯 하다.

시대의 발전과 경제이론의 발전은 동태적(動態的)으로 맞물려 가고 있으며 경제세계를 형성하고 발전해 나가는 동력이기도 한것 같다. 그러니까 경제학이론이 인간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부차적이고 종속적이라고 할 수는 없는듯 하다.  

그러나 항상 아쉬운 것은 경제이론이 과학성 또는 실증성이 있어야 한다는 명분으로 또 다른 신앙적인 도그마(독단-獨斷)를 형성해 가면서 몰림현상을 보인다는 문제가 있는듯 하다. 아담스미스의 자유주의 경제이론이나 마르크스 이론의 대립에 이어서 케인즈의 수정자본주의 경제이론이나 프리드먼의 신자유주의 경제이론이 대립하며 새로운 경제이론의 세계를 형성해 나가는데, 요즘엔 자본소득이 노동소득에 비해 월등하다는 피케티의 이론까지 등장을 해서 주류경제이론의 위상을 넘보는듯 하다. 

사실 새로운 이론의 탄생이란 과거이론의 문제점을 '수정'한다는 의미를 두고 있는듯 한데, 이념의 문제를 집요하게 탓하는 내 관점으로는 이념적인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하고 이념적인 세상을 견인하는 '주범'중 하나가 경제이론인듯 하다.

세상은 다양해지고 있고, 인간도 다양한 토양위에 서있는만큼 다양한 존재인듯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은 감정적인 존재인만큼 다양해질 가능성을 안고 있으며,어떤 이론의 독단성에 휘둘릴만큼 의미없는 존재였던 시절이 지나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 지난 4월에 '세월호 사건'이라는 비극적인 재난이 있었는데, 조의를 표하는 한국인들의 정돈된 마음가짐이 경제를 위축시킨 예를 보아도 경제라는게 인간의 다양한 심정과 인연이 깊다는것을 말해주고 있는듯 하다. 예전 글에서도 많이 밝힌 바 있지만 자유주의 경제이론이나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이 보인 문제점은 인간과 인간이 살고 있는 경제계를 지나치게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만 해석할려고 했다는 문제점이 있는듯 하다.

10년전, 프랑스의 경제학과 대학생들은 자신들의 지도교수에 대항해 잠시 소규모의 학문적 저항운동을 일으켰다. 대부분의 경제학 이론에 포함된 너무나 심한 비현실적인 가정에 질린 그들은 수업을 거부했고 그들의 교수들이 현실과 동떨어진 경제학 이론을 가르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 교수들은 자연스럽게 이런 주장을 방어했고 학생들은 결국 자신들의 입장을 철회했다. 그러나 이 소란으로부터 마침내 하나의 학술지가 탄생했다. 처음 만들어질 당시 이 학술지의 이름은 <<탈 자페증 경제학(Journal of Post - Autistic Economics)>>이었고, 이후 <<현실 경제 리뷰(Real World Economics Review)>>로 바뀌었다. 이 학술지는 쓸모없는 수학적 묘기가 아닌, 실제로 영감을 주는 경제학 연구를 출판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 Mark Buchanan의 [FORECAST]중에서 -  

2014년 11월 9일 일요일

갈구가 누굴까 / 권력과 투쟁의 관점


어느날 눈이 맑은 맹구가 동료들과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조폭 아홉명이 들어와 함께 술을 마셨다. 덩치와 문신등이 맹구집단과는 매우 이질적인데 호기심을 느낀 맹구는 쳐다왔다. 그러자 조폭중 한 사람이 말했다. "너 갈구냐?" 무슨 말인지 영문을 모르는 맹구는 또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자 조폭이 또 말했다. "너 갈구냐?"아직도 이해가 안된 맹구는 계속 쳐다보다가 얻어맞았다. 울면서 맹구는 물었다. "도대체 갈구가 누구에요?"

다음은 오래전 어떤 리더쉽에 관한 서적의 추천하는 글에 씌여진 권력의 정점에 있던 정치인의 글이다.

마음에 와 닿는 책이다. 지구촌의 빈곤에 대해 저자의 절실한 문제의식이 느껴진다. 가난한 사람에 대한 연민도 절절하다 모두가 절망에 빠져 있을때 비전을 보고, 서로에게 힘을 실어주는 리더쉽이 해결책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힘이 생긴다.  

사실 그 책은 리더쉽의 과제로서 가난한 사람을 챙기라는 내용이 아니었던것 같다. 훨씬 더 리더쉽의 본질에 관한 문제를 제시한 책이었으며,모든 인간에 대한 이해에 포커스를 맞춘 책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하지만 훗날 결코 가난한 사람을 위한 정치를 하지 않았던 정치인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점을 맞춤으로서 대권을 위한 투쟁에서 표를 계산하고 있다는 의식이 엿보였다는 것은 나만의 생각인듯 싶다.   

사람들은 다양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듯 하다. 그러나 주류적 관점에 밀려서 맹구의 입장이 되기 쉬운듯 하다. 문제는 사적인 이익들을 위해서 비뚤어진 관점들을 형성해 나가는 사람들이 있다는게 문제인듯 싶다. 사회의 저점에서 내 자신이 맹구와 같은 입장이 되는 경우를 자주 경험하곤 한다. 사회의 상층부에서 일어나는 권력투쟁은 일반화 되어서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지만 사회의 모든 계층에 깊숙히 만연해 있는 권력투쟁의 관점은 리더쉽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절망적인지를 말해주고 있는듯 하다.

특히 이런 관점은 권위주의 정체(政體)를 겪은 연령대의 시민들에게 만연해 있는데, 결국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거나 어떻게서든지 리더의 마인드를 가질려는 노력이 느껴진다. 사실 리더쉽은 따라주는것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리더쉽에 관한 책을 부지런히 읽으며 리더가 될려는 사람들만 있는것도 문제인듯 하다. 물론 내 의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념적인 관점은 리더가 될려는 사람들에게 부족한 리더쉽을 메우기 위해 유용하게 쓰여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수가 없는듯 하다.   

요즘 어떤 유명 정치인이 예전엔 잘 모르고 투쟁에 대한 생각만 했는데, 중요한 것은 어떤 문제를 개선하는데 노력을 두어야 했었다는 취지로 말했던 내용이 생각난다.

일은 잘 할 생각을 하지 않고 권력과 권위만 챙겨 달라는 조폭같은 사람들속에서 맹구는 외롭다.도대체 갈구는 누구였을까?  

2014년 11월 7일 금요일

자폐적 세계(Autistic world)


서른 무렵에 초등학교때 친구 형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20여년을 잊고 지냈던 친구였지만 단짝이었고 공부도 잘 하였으며 예방 주사맞는것을 무척 싫어했다는 기억이 남는 친구였다. 갑자기 내가 사는 지방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으니 한 번 만나자는 연락이었다. 20여년만에 만난 어린시절의 친구의 모습은 처참했다. 총명했던 모습은 없어지고 어린아이같은 정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형의 말로는 자폐증세가 있어서 나와 함께 자주 만나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살리면 좋은 일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한다.

친구와 저녁을 먹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사실 내가 이런 저런 질문을 하고, 친구는 답을 하는 모양으로 대화를 해 나갔다. 어두운 거리에서 극장 간판의 무술 영화를 보며, 어릴때 무협만화를 좋아하던 친구가 생각나 친구에게 무술영화의 한 장면을 이야기 하는데, 친구의 두 주먹이 불끈 쥐어지며 부르르 떠는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인가 폭력과 억압에 쇼크를 입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남의 집안 일에 유난히 앞장서서 참견하던 어머니와 막내인 친구에게 자율적인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주지 않던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세명의 형들이 생각났다. 어린 시절 그 친구의 집 근처는 새벽을 알리는 닭울음소리 대신 친구의 울음소리로 하루 일과가 시작되었던 생각이 났다. 20여년만에 만난 친구의 어머니는 여전했다. 강하고, 오지랍이 넓었다. 어머니 자신이 평생을 짊어지고 가야할 막내의 불운한 삶이 본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듯 했다. 어머니와 형들은 막내에게서 에너지를 얻어낼때는 좋았지만 그것때문에 평생을 책임져야할 짐이 생겼다는 해석이 되었다.

사람은 살면서 에너지 전쟁을 겪는다. 아주 나쁜 상황은 태어 날때부터 에너지를 착취하는 자와 착취당하는 자의 관계를 감각적으로 깨닫지 못하고 자율과 책임이 없이 살아가는 상황인데, 이때 구성원의 절반이 의미없는 삶을 살아가는 상황이 전개되기도 하는 것 같다.


오랫동안 봉건적인 지배관계나 권위주의적인 권력관계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은 말이 시민이지 정신적으로 오랫동안 신민(臣民)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를 본다. 자율을 얻어내고자 하는 의지는 '저항'이라는 명분으로 족쇄가 채워지는 경우도 있는듯 하다. 어느 날 보편적인 삶(경제적 풍요, 가정같은)에 신경을 쓸려고 하면 불현듯 엄습하는 에너지지배를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 종교에 심취하기도 하고, 사업에 실패하면 모든것을 잃어버렸다는 착각에 자살을 하기도 한다. 자율적인 의지를 가진 자신의 진행중인 삶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는다.

국가도 마찬가지인듯 하다. 지도자와 구성원이 개인의 이익보다는 공존을 위해서 노력하고,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며 세계인으로서의 자각에 임하여 생각하고 행동할때 자폐적 증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듯 하다. 이념문제도 자폐적 증세의 하나로 생각된다. 모든 자율적인 의식세계를 차단 시킨다. 그래서 자율적인 의식을 성장시키는 교육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공영을 위한 의식도 스스로가 일깨워 나가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느 연령 이상의 한국의 시민들은 시민이 아니라 신민이 많다는 생각이 불현듯 드는 경우가 많다. 경제적인 이익이나 이념적인 사고의 족쇄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율적인 시민의식이 성장하지 못하던 역사적인 사실들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는 면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 국가의 짐이 될 가능성도 있고, 그 전조를 여기저기서 느끼기도 한다. 적시(適時)에 필요한 변화를 얻어내지 못하는 국가는 자폐적증세를 지고 가야한다. 한반도의 절반은 그렇게 되었고, 세계가 부담해야 할  짐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2014년 11월 2일 일요일

간신(姦臣)과 바른 정치철학의 확립


서점에 들렸더니 모택동평전이 할인도서로 나와 있었다. 어쩌면 중국인에게는 영웅적인 존재지만 한반도의 통일에 지대하게 부정적인 공헌을 한 바가 있어서 이름만 들어도 울화가 치미는 존재인듯 하다. 살다보면 울화가 치미는때가 자주 있게 마련인데, 언젠가 간사스런 지인을 울화를 삭여가며 도전정신으로 지켜보는 강수(强手)를 두어서 모택동의 16자전법을 이해했던 적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서 명나라의 대표적 간신인 위충현이 특무기관을 이용해 국기를 문란하게 만드는 사건과 비숫한 사건에 피해자로서 연루가 되면서 드러나지 않는 문제거리에 대한 관심이 깊어진듯 하다. 그 당시의 곤란한 상황과 그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열심히 스케이트를 타던 생각을 하면 훌륭한 인생공부를 한것 같은데, 그 덕분에 요즘도 청와대 게시판이나 검찰청 게시판에 탈 이념을 지향하는 내 이름을 가진 존재를 마르크스주의자인 교수이름으로 탈법적으로(불법이 아닌) 비난하는 글을보면 그냥 많이 만연되어 있는 일이구나 하는 생각만 든다.


어쩌면 좋은 상황은 아니지만 누가 올린 글인지 규명할것도 없이(청와대게시판이 실명제로 운영되는지 잘 몰라서......)  "이해하고 있다."라는 간략하게 표현하는것이 가장 적절한듯 하다. 아마 상당기간 모택동의 전략대로 치고 빠지기를 반복할 것으로 예상된다. 요즘 뛰어나게 운동을 잘 하게 되었는데, 훌륭한 정치철학과 건전한 심신은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인듯 하다.

단언컨데 한반도 자체가 지나치게 병리적인 이념적사고로 물들어 있다고 용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저항과 단련'의 힘에 근거한다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해서 적대적 공생관계가 형성되어 가는구나 하는 생각도 하며 빙그레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이런 일이 지속되면 애초부터 별볼일 없는 나만 망하는 것이 아니고 국가의 존립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는 일이기에 교정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정의롭고도 유연하며 시끄럽지 않게 확산되어가야 할듯 하다. 솔직히 말하면 난 지난 정부때 한국이 쇄망의 입구에 들어서는 줄 알았다. 보이지 않는 간신은 정치현상인듯 한데, 무능한 지도자는 간신이 성장하는 토양이 된다고 한다. 맑은 근원, 올바른 정치철학만이 간신을 막아낼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2014년 11월 1일 토요일

북한의 체제유지노력의 전말


2차대전때 프랑스가 독일에 패전한 날, 프랑스의 수상 폴 레노는 처칠에게 전화를 했다. "우리 프랑스가 독일에 패배를 했습니다." 처칠은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 50기~60기에 달하는 구축함을 조달하도록 차관을 승인해 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때가 5월 15일이었는데, 루즈벨트는 차관을 빌려주기 위해서 하원의 승인이 필요하고, 몇 주일이 걸릴것이라고 거절했다. 

몇일후에 처칠은 루즈벨트에게 다시 연락을 해서 처칠 자신이 이끄는 영국은 끝까지 싸울것이지만 차기 정부의 수상은 영국이 패한다면 협상카드로 영국함대를 독일에 넘겨줄 것이며, 독일은 그 함대를 이용해 미국까지 위협할 것이라는 암시를 주었다.

프랑크왕국시절부터 이합집산에 능한 유럽에서의 전쟁이란 승자와 패자의 사정이 그렇게 냉혹하지 않은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데, 프랑스를 패배시키고도 독일의 식민정권을 세우지 않고 프랑스의 괴로정부인 비씨정부를 세운 독일의 선택이나 영국이 독일에 패배하고도 영국정부는 독일과 '협상'해서 독일에 이권을 넘겨줄 수 있다는 비교적 '관대한' 전쟁문화는 존재냐 소멸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극단적인 오리엔탈적 전쟁문화를 무색하게 하는듯 하다.

특히 민족적인 결집성이 강한 동양의 국가, 그 중에서도 근대이후 약소국으로 존재했던 한반도에서는 침략에 대해서 패배를 인정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냉혹한 댓가를 치루는지 일본통치하 36년을 거치면서 온 몸으로 익힌 절망적인 경험이었던듯 싶다. 이런 상황에서 이념으로 갈라진 북한정부와 한국정부는 각자 다른 선택을 하게 되는데, 아마 그 차이는 외세(外勢)나 외침(外侵)에 대해서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느냐 하는 문제로 더욱 큰 성향 차이를 나타낸듯 하다.

북한의 건국정부는 이념적인 성향과 더불어 민족적인 고립성이 한국정부보다 한층 강화된 모습을 보이는데, 북한 건국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공산주의자이면서 일본의 침략에 맞서서 중국정부나 소련정부에 공헌하던 인사들로 이루어졌고, 특히 그 인사들 대부분은 정치적 또는 외교적인 소양이 없는 군인출신들이었던 것을 생각해볼 수 있을것 같다. 

북한이 그렇게 문제삼았던 한국의 친미정부는 2차대전의 승전국으로서 세계 경제의 46퍼센트를 차지한 막강한 세계국가 미국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는데, 비교적 자유주의적인 분위기에서 협상이나 변화에 능한 인사들이 건국에 참여를 했고, 오랫동안 미국의 영향을 받게 되었던것 같다.

그러니까 북한과 한국의 차이는 엄밀하게 따지면 이념이외의 더 큰 변수가 개입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해외나 국제정세의 분위기를 읽고 대처할 수 있는 능력에 있어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었던것 같기도 하고, 북한의 호전적이거나 전투적이고 군사적인 건국인사들의 분위기가 건국의 분위기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도 있을것 같다.

더 나쁜것은 '외세'에 대해서 민감하고 과장되며 부정적인 관점이 북한에서 형성되어 지금까지도 주체사상을 거쳐서 '우리민족끼리'라던가 '체제유지'라는 구호에 오랫동안 의존하고 있는 북한의 변하지 않는 정신문화인듯 하다. 그 이면에는 중국이나 일본과 대등할 수 없는 한계를 인식한 약소국의 비극, 그리고 열세를 인식했을때 종속으로 직결된다는 외세에 대한 민감한 공포감등이 북한체제를 끊임없이 수렁속으로 밀어넣고 있는듯 하다.

사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인간의 특성상, 변화와 통일이 과거의 나쁜 경험과 습관을 일시에 사라지게 만드는 명약처방이라는 것을 인지하기도 힘든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