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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28일 화요일

고돠꾜 쏵시간 / 핀란드의 교육개혁

고돠꾜 쏵시간(고등학교 수학시간)에 대학을 포기하고 푸쉬킨의 소설 [대위의 딸]을 읽고 있었다. 코사크 반란군 대장인 푸카초프가 수비군 대장의 딸을 도와주며 사랑하게 된다는 이야기였는데, '반란'에 관점을 두지 않고 '사랑'에 관점을 두고 책을 읽었다. 국어시간에 독후감을 써냈는데, 그런 사랑(마리아에 대한 표현하지 않는 마음)을 하고 싶다고 써냈으니 여선생님이었던 국어샘은 잘 썼다고 칭찬을 하였다. 학생으로서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후회없는 고돠꾜시절을 보낸듯 하다. 나중에 주입식교육에 몰입을 해봤는데, 한없이 피폐해져갔다.

몇일전 문학경기장에서 한 군인이 걸그룹의 춤을 그대로 따라하는 장면이 화제가 되었는데, 정말 찰 추었다. 심지어는 걸그룹보다 낫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런데 누군가 군인으로서 품위를 위반했다는 민원을 넣었다. 즐겁게 춤을 출 수 있는 군인이 정상인지 그런 장면에 민원을 넣은 사람이 정상인지는 알아서 판단해 볼 일이다.

열살무렵 나의 부친이 트럭을 몰고 위험한 강원도 산길을 떠났다. 나를 태워주기를 바랬지만 그렇지 않아 마당에서 우울하게 흙을 만지며 놀고 있었다. 십리이상을 갈법한 시간에 부친이 다시 돌아와서 태워주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였다. 가족이 함께 타고 다니다 몰살한 일이 한 두번이 아니기때문에 그런 것이니 이해하란 말씀이었다. 평소 무뚝뚝하고 하루 종일 가야 한 마디 하는 부친이 그런 세심한 마음씀씀이를 보여주는 것에 감동하여 그날 이후 나는 내내 부친을 좋아하였다.  

시몬느베이유가 어렸을때 부모님과 옵바랑 전철을 타고가다가 갑자기 옵바랑 함께 겨울 스타킹을 벗었다. 그리고 덜덜떨면서 많은 승객들이 듣도록 떠들었다. "우리 부모님은 날씨도 추운데 왜 스타킹을 못신게 하는거지? 옵바 너무 춥다 그지?" 승객들은 시몬느베이유의 부모님을 쳐다보며 험악한 인상을 썼고, 몇몇은 욕을 하였다. 요즘 같으면 아동 학대로 체포될 판이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자상하게 웃고 있었고 그 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후환이 없었다고 한다.

툭하면 수소폭탄을 날리겠다고 협박하는 국가의 지도자들은 어떤 교육을 받았을까. 그리고 그런 국가의 영향으로 함께 경직되어 있는 국가에서는 어떤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을까.

교육에 대해서 최첨단을 걷고 있는 핀란드가 이번에는 국영수에 관한 주입식교육을 폐지하겠다고 공언하였다.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있는 것은 교육시킬 필요가 없고 그 대신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철학, 역사등의 교육을 강화시키겠다고 한다. 그러잖아도 열등한 사람들의 능력도 필요하기 때문에  경쟁식의 레드오션교육보다는 블루오션교육을 체택한 핀란드의 교육시스템에 대해서 경이로운 면이 있었는데, 이 참에 한국교육을 더 부끄럽게 만들고 있는듯 하다. 사고하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못한 사회가 장기적으로 낙관적일 수는 없는듯 하다.

철학은 이제 유행이 아닙니다. 철학없이 성찰하는 삶을 살아가기란 무척 어렵습니다. 철학에는 자신을 성찰하고, 인간을 바라보며 가능성을 탐구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의회에는 국가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그곳에서 진지한 토론을 나누고, 심도 있게 생각을 견주어야 하며, 국가의 사상이 만들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국가철학 없는 민주주의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 호세무히카 - 

한참 체제경쟁이 심각할 무렵 남북한에서는 서로에게 우리쪽으로 투항하라고 권고하였다. 서로에게 투항할 필요가 없는듯 하다. 철학과 인간성으로 투항하십시오.

2016년 6월 24일 금요일

경제의 이중구조와 극단성 / 스티글리츠

한국의 길거리에는 폐지를 줍는 리어카가 부쩍 늘어간다. 조그만 상점의 간판은 이른 저녁에 불이 꺼져있다. 언젠가 호황기에 누렸던 생명력있는 저녁분위기는 점점 줄어간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인 문제라고 한다.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을 시차를 두고 경험하게 되는 약속은 이미 있었던듯 하다. 이제서야 세계 여기저기서 내수(內需)를 확장시켜 불경기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경제적세상의 중심이자 자유주의자들의 이상향인 미국마져도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중산층이 몰락하는 위기가 현실화 되었다는 여론이 지배적인듯 하다.

 세계은행 부총제였던 경제학자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미국경제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최근 반세기 동안의 미국역사를 보면 두 가지 미래가 보인다. 하나는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들 사이의 틈이 벌어진 사회, 다른 하나는 인기 있는 사람과 인기 없는 사람의 간격이 더 좁아진 사회. 나는 후자의 미래야말로 우리의 전통과 가치관에 적합한 유일한 희망이라고 믿고 있다.

 - 일본 경제저널리스트 히가시타니 사토시의 저서중에서 -   

그러더니 결국은 미국도 오바마대통령의 등장과 차기 대선주자로 나온 트럼프라는 인물의 등장으로 좌파 우파 프레임으로 몰입하게 되는 불상사가 생긴듯 하다. 중요한 것은 균형경제로 서로의 연결고리를 활성화 시키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가진자의 몫을 못가진자의 몫으로 분배되어야 하거나 가진자의 것을 지켜야 하는 문제로 관점이 맞추어져 있는듯 하다. 이런 관점이 활성화 되면서 대중조작이나 대중정치적 포퓰리즘은 힘을 얻게 마련인듯 하다. 이성보다 감정에 흔들리기 쉬운 자유주의 국가인 미국에서 트럼프와 같은 기이한 인물의 등장은 어쩌면 당연한 비극인지 모른다.

정보경제학자로 불리는 스티글리츠와 함께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에컬로프도 정보의 비대칭현상으로 벌어진 레몬시장을 말하고 있는데, 실제로 미국경제나 한국경제는 점점 이중구조화 되어가는 경향이 있는듯 하다. 마치 부촌과 빈촌의 차이가 극명해지는 것처럼 경제적인 세계도 구분되어져 가는듯 하다. 이런 문제는 결국 감정적인 문제를 확산시켜 정치적인 불안을 가져오게 되고, 또 좌파나 우파개념으로 문제를 해결할려는 시도가 나오게 될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절반의 내수시장만 확보함으로써 시장수요 확산과 그에 따른 경제성장에 도움이 안되는 결론을 보게 될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예측이 아니라 한국에서는 현실화 되어가고 있는듯 하다. 더 나쁜 것은 한국은 기업, 특히 대기업에 실질적인 정부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한다거나 방산비리를 정부가 이익집단에 포획당한 원인으로 잡지못하는 문제를 보면 정치와 경제의 상부구조에서만의 '이상한 연결고리'를 보는 느낌이다. 기본적인 물질적 자원이나 인적 자원이 풍부한 미국보다 아주 나쁜 상황에 처한 것이 한국인듯 하다.

한 편으로는 거대한 문제는 통제를 하지 못하면서 스티글리츠처럼 대화식교육은 커녕 자폐증환자처럼 자문자답으로 생각을 이어 나가는 불쌍한 시민이나 통제할려고 하는 못난 정치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간히 들기도 한다. (사실 내가 불쌍한 것이 아니라 한국정치와 시민이 불쌍한 상황이 된것 같다.)

스티글리츠도 [시장으로 가는 길]이란 저서에서 시장원리가 옳기 때문에 사회주의가 붕괴했다는 신고전학파 경제이론을 비판하고 있다. 경쟁시장을 받아들인 사회주의가 실패한 경우(러시아와 같은 동구권 국가)도 있다는 것이다. 내 생각이 항상 그렇지만 경제문제는 이념으로 해결할 문제는 아닌것 같다. 어떻게든지 현실적으로 발생하는 이중구조를 해소할 수 있는 연결고리를 찾아야 하고, 결국 전체 국민들의 공리적인 복리를 위한 대안을 만들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다시 대두될 위험이 있는 극우정권의 발생이나 그것에 대항하기 위한 좌파적 대안의 발생같은 이념적인 논란을 미리 방지해야 할 것 같다. 극단적인 것은 이상한 것이다. 결국 합의점은 찾지 못하고 내분이나 내란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2016년 6월 18일 토요일

기업문화와 젊은이

얼마전 한국젊은이들이 어려운 일을 하지 않을려고 해서 젊은이들의 실업률이 높다고 말하던 어떤 정치인의 말이 있었는데, 직접 부딪혀보는 입장에서는 정치인들이 정치를 잘 하기 위해서는 장기간의 현장경험이 절실히 요구되는 문제가 보인다는 생각이다. 그러니까 중국의 하방제도같이 민생을 몸소 '처절히' 경험하고 정치를 해야 제대로된 정치적 마인드를 갖출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대중정치의 대중조작기술만 자신도 모르게 터득하는 문제가 있는데, 정치적기술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본질을 잃어버린 목적전치현상의 문제점이 생기는듯 하다. 혹자는 거시적인 외교, 경제문제등을 정치인이 보아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하지만 탑은 일층부터 쌓여지는것과 같이 국사(國事) 는 평범한 시민 개인들을 바탕으로 한다는 생각을 해야할 것 같다. 

 내가 좋은 젊은이들만 만났는지 몰라도 내 눈에는 건강하고 바른 정신을 가진 젊은이들만 보였던것 같다.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던 젊은이, 방학기간이나 휴학기간에 생산공장에서 땀흘리던 젊은이들에게서 기성세대들이 뭐라고 트집잡을만한 문제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던것 같다. 그 장소에 오지 않았던 젊은이는 무엇인가 두려워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어려운 직장생활에 있어서는 기성세대가 견딘 가혹한 기업문화를 젊은세대들에게 강요할 이유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직장을 다녀 돈을 버는 가장 큰 목적이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므로 삶의 일부분인 직장생활도 역시 행복해야 할것 같다. 그러나 다녀본 기업들중 좋은 기업도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일하고 싶어하지 않는 기업도 많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물론 그곳에서 근로자란 존재는 그냥 인간이 아닌 일꾼으로서만 존재한다는 문제가 있었던것 같다. 기성세대가 견뎠으니 신세대들도 견뎌야 한다는 강요는 옳지않은듯 하다. 문제는 개선되어 나가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가끔일본에 살아보지 않고서도 일본문화에 대해서 문제를 말하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문화는 가장 가까운 선진국이었던 일본의 문화를 많이 받아들인 점이 있는걸 생각하면 한국문화와 일본문화의 유사성과 더 나아가서 차이점을 찾아보기란 쉬운 일이다. 두 나라 문화의 가장 뚜렷한 유사점은 아직 지배와 예속이라는 동양적인 가치를 전혀 벗어버리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한참 경제가 성장하던 시절에 일본의 오우찌교수가 주장한 가족경영은 일본경제의 부흥에 큰 도움을 주었지만 시작은 '노예에서 가족으로의 편입'이라는 조금 더 발전된 경영형태이거나 서구적인 평등화로 가기전에 거쳐야 되는 진화의 한단계로 여겨졌던것 같다. 역시나 완전한 평등과 다양성을 이루지 못한 일본경제는 딱 그만큼의 관문에 막혀 성장이 중단된 것을 모르고 야마또 함상에서 미친듯이 대공포를 쏘는 병사들을 독려하기 위해서 머리띠를 질끈 동여매고 깃발을 휘두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정신을 벗어나지 못한 문제가 있는듯 하다.

기업인과 근로자, 정치인과 시민이 서로를 동등한 인간으로 볼때 마음의 여유가 생길것 같다. 나는  평생 일을 하지 않고 놀고 먹는 법이라고 외국잡지에 써있던 글을 자주 생각하는데, 그 해답은 일을 즐거운 놀이처럼 아주 즐겁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서로 유쾌한 마음을 가지니 일은 수월하고 건강은 보전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2016년 6월 10일 금요일

이념파라다임의 변화 / 동북아시아의 쇠퇴

참 오랫동안 우회적으로 이념 파라다임을 변환시켜야 할 것이라는 생각, 어쩌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그 길 밖에 없다는 '호소'에 가까운 글을 써 온듯 하다. 시민 행동의 프레임은 광의(廣意)의 이념, 즉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하는 것이 아닌 넓은 의미의 지도사상들에 의해서 사회가 유지되어 나간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사실들인듯 하다. 그러나 현실적이거나 감각적인 생활에 몰두하다보면 넓은 시야를 상실하고 내 자신의 이해관계에 관련된 문제로 생각의 폭이 협소해지는 것이 문제인듯 하다. 실제로 이념적 프레임의 정점에 서 있는 경제학자들이나 정치사상가들조차 자신이 살아 온 과거경험이나 처해있는 현실, 때로는 학문적인 명예같은 개인적인 전리품들을 위해서 이념 파라다임을 변화시킬려고 노력하는 것이 정치가들 못지 않은 듯 하다.

잠깐 파라다임이 무엇인지 짚고 넘어가보자.

원래 파라다임(paradigm)이란 단어는 그리스의 범례(paradeigma)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미국의 과학자인 쿤( Thomas Samuel Kuhn 1922 - 1996 )이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저서에서 사용했다고 한다. 즉 과학자들의 연구결과는 새로운 이론의 창조보다는 현실에 있는 이론들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고 한다. 예를들면 천동설의 범위안에서 천동설을 뒷받침하는 이론들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기존의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하는 행위에 익숙해져 있다고 한다. 그러다가 갈릴레이나 뉴우튼 또는 아인쉬타인 같은 과학자들의 창조적인 연구결과는 근본적인 프레임을 깨고서 새로운 바탕을 탄생시키게 되는데, 이런 변화행위를 '파라다임'을 변화시켰다고 말한다.

이념이나 종교같은 일방적인 관념의 맹목적인 사회적 요구는  정신적인 감옥을 만들고 더 나아가 현실적인 감옥같은 영역을 경계지워놓는 문제가 있는듯 하다. 특히 매번 설파하는 문제지만 한반도는 그런 문제의 가장 큰 '피해자집단'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어쩌면 '동양적인 보수주의'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한계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일본의 쇄퇴는 그런 문제를 안고 있고, 한국도 마찬가지로 그 길을 따라가고 있는듯 하다. 몇번 설명한 바 있지만 일본인들의 정신세계는 새로운 파라다임을 탄생시키기 위한 시도에 있어서 매우 부족한 면이 있는듯 하다. 혹자는 노벨상수상자나 과학기술의 발전등을 이야기하며 일본의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만 사회분위기나 국민들의 인성자체가 자발적인 구속이든지 역사적인 습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의미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자 하는 과학적인 분위기는 미국의 프론티어정신과 같은 형태로 서구사회를 끊임없이 발전시켜 왔지만 동북아시아의 정신머리는 모방하고 뒤따라가면서 앞지르자는 비창조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문제가 있다. 특히 북한과 같은 변칙적인 사회는 매우 보수적이라서 새로운 영역 자체를 매우 두려워한다. 역시 개인적이고 감각적인 현실의 전리품들을 위해서 정치지도자나 엘리트들이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뭉개버린 탓일 것이다.

내 자신은 동양사상에 대해서 적어도 서양사상보다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들을 글로써 옮기지 않는 이유가 있다. 경험을 통해서 결론을 얻어내거나 바꿔나가는 경험론적인 사고가 아닌 있는 사실들만 검증해 나가는 연역적안 사고방식이 동양사상적인 분위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왜 그랬는지'에 관한 의문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듯 하다. 모든  사고의 과정을 뛰어넘어 결론부터 인정하라는 종교적인 비합리성을 요구한다. 그런 파라다임을 깨지 못하는 사회에서 이념이 들어와서 역시 종교화되는 문제가 있는것은 당연한듯 하다.

동북아시아의 관료주의, 상명하복의 위계질서, 사리사욕을 위한 정치적인 부패, 비공리적인 사회유지는 파라다임을 변화시킬 수 없는 동북아시아의 태생적인 결과물인듯 하다. 

2016년 6월 9일 목요일

권총사격(pistol shooting)

한국에는 현재의 북방영토를 15세기말에 개척한 김종서란 장군이 있었다. 김종서장군은 항상 장검을 방에 거치시켜놓고 있었다. 방문객이 무엇이 두려워서 칼을 가까이에 놓느냐고 질문하자 '내 행동이 어긋날걸 두려워해 나에게 겨누는 칼'이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그 정도의 철학은 아니지만 새벽기상과 더불어 사격연습을 하고 일과를 시작하는 습관이 있다. 그냥 방아쇠를 천천히 고르게 당기는 연습을 한다. 한 노인이 엽총으로 사람을 살해한 사건이후로 선수용총기를 영치하게되서 서바이벌총에다 무게추를 달아서 대신하고 있다. 다른 운동중에도 여유롭고 고르게 훈련을 하니 신기한 운동신경을 보여주는 경우가 있었다. 이유는 침착하게 움직여서 그런것 같다.

어느 날 우수한 사격실력을 가졌다는 걸 누군가 알게되면 위협적으로 보일건지 아니면 정련한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볼건지는 보는 사람의 세계에 따라서 달라질 것 같다. 

노소(老小)

한 젊은이가 해변에서 불가사리를 주워서 바다로 던지고 있었다. 지나가던 노인이 충고했다. "해변에 널린 불가사리를 다 살릴수는 없고 그렇게 몇 마리를 던져 놓는다고 뭐가 달라지겠나?" 젊은이가 대답했다. "이놈한테는 달라지죠"

진짜 젊은이는 덜 이해타산적이고 생각의 경계가 넓고 공감능력이 더 있는듯 하다. 아마 희망이 있어서 여유가 있는듯 하다.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비뚤어질테다'라는 글을 프린팅한 티셔츠를 입고다니는 것을 보고 막 웃었다. 실제로 좀 비뚤어진 젊은이였다. 그런데 내 눈에는 "내가 지금 비뚤어지고 있으니 나를 도와줘요"하는 응석어린 도움을 요청하는 것 같았다. 아직 바탕까지 비뚤어지지 않은 젊은이가 애쓴다고 웃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비뚤어져버린 것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자신과 세상을 보는 눈이 냉소적이고 부정적인듯 하다. 아침에 일어나서 '새로운 날'이라는 자극이 없으니 매일 하던 습관대로 사는듯 하다.

그 와중에 삶의 의미를 조금씩 찾아가거나 제대로된 종교적인 결심이 있어서 세상을 영속적으로 인식을 하거나 아니면 세상을 인식하는 경계가 넓어서 무한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덜 늙는 것 같았다. 삶의 철학이 없으면 젊어지겠다고 들뛰는듯 하다. 젊다는 의미를 무엇인가 소유할 가능성이 있다거나 육체적인 의미로 왜곡한다. 몸과 마음이 느려지고 있다는 인정을 하지 않고 순리를 벗어나니 폭기(爆氣)가 생겨 사나워지는듯 하다. 

2016년 6월 8일 수요일

이웃집 맬리스(malice) / 첩보물

몇일 전 이스라엘 정보국에 관한 영문원서를 한 권 인터넷으로 주문했다.주문하는 순간 경찰청의 파란색 경고화면이 잠시 스쳐갔다. 경찰청의 화면이지 경찰청에서 내 보낸 화면이 아닐 가능성이 많은듯 하다. 해킹 툴로 어떤 종류의 화면을 내 보낼 수 있는 인재는 널려 있는 세상이니까. 북한 문제나 국내의 이념문제 또는 통일문제등을 거론하면서 강력한 바이러스때문에 컴퓨터를 몇개 망가뜨렸다. 한 번은 일부러 방화벽을 열어놓고 곰곰히 생각해보는 태도를 보여주기도 해봤는데, 온라인상으로는 꽤나 관심(?)을 보여주는 이가 많은듯 하다.

 인간과 조직의 심리와 행태를 연구하는데는 첩보물처럼 훌륭한 자료도 없는듯 하다. 외국의 첩보자료들은 그 나라의 역사나 정치적 분위기, 주변국가와의 관계등을 종합적으로 설명해준다. 그러면 첩보자료를 공개하는 첩보기관들은 그런 자료를 읽는 독자들이 영악스러워짐을 예상하지 못했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첩보분야처럼 혁신과 미래지향적인 분야도 없는듯 하다. 과거자료를 공개하고 꼬리를 잘라버리거나 공개한 자료와 전혀 다른 방식을 선택할 것이다. 게다가 인터넷환경이 발달하는 시대에 첩보기술도 급격히 변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북한이 다른 분야는 제쳐두고 사이버부대를 대규모로 운영하는데는 이유가 있는듯 하다.

한국공안기관들은 일몰(sunset)되어가는듯한 국가를 회복시키고자 노력하거나 통일을 위한 여러가지 생각을 하는 노력에 있어서 별볼일 없는 일개 시민인 내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칫 잘못하면 입장이 매우 다른 방향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는데, 아마도 이념이라는 프레임에 갇히면 애국(愛國)과 매국(賣國)의 구분보다 극렬해지는 한국공안조직의 태생적인 문제일수도 있을것 같다. 

언젠가 이웃이나 지인들중 오래전부터 정보를 취해서 공안기관에 전달하는 사람들을 보는 경우가 있었는데, 일부러 의혹을 살만한 미끼를 던져놓고 거꾸로 내가 그 이들을 살펴보는 짖굳은 장난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나를 감시하도록 해놓고 그 사람을 거꾸로 관찰하는 영악스러운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내 목적은 한 가지였다. 어떻게 동족이 동족을 잡아먹을 생각을 수월하게 할 수 있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몸이 아프거나 에너지를 상실한 이웃들이 그런 방식으로 에너지를 얻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자신감이 무너져가는 국가의 내부 분위기는 서로에게 매우 공격적일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래서 호전적인 분위기를 독려하는 북한은, 이면에는 미래가 없음을 공개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