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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29일 금요일

대기업과 일몰경제(sunset economy)

핀란드의 노키아같은 거대재벌의 존재와 실패는 재벌의 산업적 의미와 국가의 재정경제적 의미가 동일시되어 한 국가의 운명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지 잘 보여 준 사례라고 할 수 있을것 같다. 거대 재벌의 존재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대규모경제의 법칙을 생각해봐도 그렇고 창의적인 투자의 힘을 생각하면 거대재벌의 튼튼한 자본력은 국가경제에 큰 힘이 되고 있음은 누구나 알고 있는듯 하다.

 핀란드는 노키아가 무너지고 나서 국가정책으로 유사한 분야의 밴처기업들을 성장시킴으로써 충격을 완화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생각보다 노키아의 주력상품들은 핸드폰과 같이 단순한 품목에 한정되어 있었고, 창의적인 혁신으로 탄생한 재벌인만큼 창의적인 혁신에 실패를 해서 일몰(sunset)당하는 현상은 당연한 것으로 봐야 할듯 하다. 한 편으로는 얼마전 한국의 거대재벌이 가족경영의 내분으로 시끄러웠을때 알고보니 창의적인 혁신보다는  서민의 상권같은 기존의 경제영역을 침식해가면서 회사을 키워온 성향이 심한것이 알려져 비난받은 일이 생각난다. 문제는 혁신에 실패해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오직 대규모경제의 법칙과 튼튼한 자본력이 있었을뿐이므로 이윤을 얻는 즉시 사내유보금(社內留保金)으로 축적시켜놓으면 두려울 것이 없는 영원한 경제마스터의 지위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대기업들은 사내유보금을 축적시켜놓을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독점기업이나 대기업의 이윤확장은 국가와 국민의 경제생활에 도움이 될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듯 하다. 투자를 하지 않고 자본을 묶어놓는 문제같은 적극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 문제를 생각해보지 않더라도 기업의 이윤과 국가와 국민의 경제가 전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아주 쉬운 예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나라에 스마트폰을 생산하는 기업 하나만 있어서 그 기업이 내수와 수출을 하여서 국민경제를 책임지고 있다고 가정하자. 어느해는 다섯개의 스마트폰을 생산하여 판매하고 만원의 이익을 얻었고 어느 해는 열개의 스마트폰을 생산하여 판매하고 오천원의 이익을 얻었다고 가정하면 기업으로서는 다섯개의 스마트폰을 생산하고 판매하여 만원의 이익을 얻은 해가 경영이 성공한 것으로 판단될 것이다. 그러나 국가경제를 전체적으로 보면 스마트폰을 열개생산하여 판매한 해에 경제규모는 두배로 성장을 하였다. 다섯개를 생산한 해보다 근로자도 두배로 고용을 했을 것이고, 그 근로자는 임금을 받아서 스마트폰을 살 것이고, 기업은 스마트폰을 더 만들어야 될 것이다. 그러면서 기업과 국가가 성장해 나가고 국민경제가 성장해가는 과정을 겪게된다. 그러니 기업의 이윤과 국가경제성장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인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이 생긴다.

한국경제의 문제는 이런 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창의적인 성향이 강한 대기업은 고용조차도 많이 할 필요가 없다. 마치 레몬 시장처럼 많은 국민들은 비효율적인 중소기업이나 비효율적인 치킨집이나 비효율적인 커피숍에 투자를 하고 없는 사람끼리 서로 경쟁하고 승부해야 하는 레몬시장이 벌어진다. 소수의 스마트한 경제영역과 다수의 우둔한 경제영역이 따로 형성되어 움직이는 이중경제구조가 만들어지는데, 저번에도 지적한 바 있지만 점차 스마트폰을 살 수 있는 여력이 있는 소비자가 감소하게 되는 문제는 급기야 스마트한 영역까지 무너뜨리는 결과가 되어 국가경제자체가 일몰(sunset)로 세팅되는 나쁜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대기업과 그렇지 않은 부문의 대립적인 문제도 아니고, 재벌을 편드는 정부와 그렇지 않은 자들과의 대립문제도 아니다. 더구나 우파와 좌파의 대립문제나 보수와 진보의 대립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상호 '연결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서 국가경제가 대기업에 의존하는 위험성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2016년 4월 23일 토요일

우두머리와 갑질

독서를 통하든, 인생의 현장경험을 통하든지 많은 것을 안다는 것은 상황이나 환경을 좀 더 객관적으로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는듯 하다. 정치적인 권력을 놓고 투쟁하는 환경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누구나 알 수 있고, 참여할 수 있도록 허가받은 장(場)이지만 사회의 저변에서도 매우 권력지향적인 모습은 인간의 본질인듯, 허가받은 지위와 부조화스러운 권력을 지향하는 우스운 모습을 많이 목격하고 실소를 하는 일이 많은듯 하다.

어느 날 삶의 현장을 참여하다가 공감대보다는 흔히 표현하는 갑질(甲質)의 모습들이 보일때면 피식 실소를 하곤 하였던 경험이 많은데, 평등한 사회를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과제는 정치권력과 관련된 장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한국사회전반에서 병든 현상이라는 사실을 많이 목격하고 고민하곤 했다. 언젠가 어떤 생산현장에서 신입의 비정규직인 인력이 전혀 일해보지 않은 공정에 투입되어 실수를 하자 정당하지 못한 모욕적인 질책을 받는 장면을 목격하였는데, 노조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단기 근로자에 대한 부당한 대우가 매우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아울러 차후에는 이런 문제에 좀 더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결심을 굳히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도대체 그 부당하고 우스운 '꼴값'들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그것이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일까. 위계질서란 필연적이거나 필요악일까. 하는 의문을 가져보는데, 흔히 이야기하는 현대 사회의 새로운 조직체계인 수평적조직체계를 많이 사용하는 IT회사등에서는 좀 더 평등지향적이고 여유있는 근로환경이 주어지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그에 비해서 좀 더 연령이 많거나 교양이 부족한 것으로 생각되는 인력이 많은 다른 분야의 근로현장에서는 위계서열이 매우 진한 것을 목격하곤 한다. 그럼 위계서열의 상층인이 하층인을 통제하는 채찍은 무엇을 사용하는지 살펴보았는데, 비정규직근로자의 위태로운 지위나 급여등은 치명적인 약점이 되곤 하였다. 심지어는 종교인조차도 천국행 티켓을 볼모로 카리스마 있는 모습으로 신자들을 윽박질르는 모습을 목격하곤 정말 가지가지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듯 하다.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Marvin Harris)는 [작은 인간]이란 저서에서 에스키모의 우두머리는 사냥지점을 선택하는 뛰어난 사냥꾼으로 의미를 가지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집중시키는 의미 이상을 가지지 않는다고 한다. 또 쿵족은 우두머리가 있느냐는 질문에 "물론 우리에게는 우두머리들이 있지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우두머리거든요...... 우리 각자는 스스로에게 우두머리라구요."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브라질 인디언에게 우두머리란 밤에 야외에서 음식을 해먹는 동안 열심히 정찰해야 하는 책임이 있으며 인정을 베풀거나 절제를 하는데 있어서 모범을 보이고 타인에게 그런 모범적 태도를 권면하는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권면이다. 전혀 질책을 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한다고 한다. 말레이지아의 세마이족들의 우두머리는 인격적으로 존경을 받거나 여론의 대변자로서 의미를 가지는데, 외부에서 권한을 강화시켜볼려고 시도를 하였지만 그냥 위신있는 인물에 선을 넘지 않더라고 한다.

한 편으로는 동북 아시아의 깐족(한족/韓族)들 사이에서는 매우 권력지향적인 갑질이 형성되어 있는데, 특히 이천오백만이 넘는 인구를 가진 강력한 부족인 부깐족은 마르끄시즘(과학적사회주의)나 쭈지샤샨(주체사상)이라는 부족의 새로운 경전을 신앙삼아 우두머리가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부족의 삶을 지옥으로 이끈 현상을 목격하곤 하는데, 남쪽에 그래도 많이 개화된 깐꾹족(한국인)들도 권력적 성향의 잔상이 갑질이라는 형상으로 많이 남아 있다고 비꼬는 글을 언젠가 쓴적이 있는것 같다.

마빈해리스와 여러 인류학자들의 참여관찰법에 의해 분석한 여러 원시부족들의 평등한 모습은 인간 본성이 위계질서에 친하다는 생각을 반론할 수 있는 근거가 되곤 하지만 요즘 새로운 사회과학이나 집단이론 조직이론등에서는 능률성을 위해서라도 좀 더 평화롭고 평등하며 여유있는 조직체계가 능률성을 가져 온다는 연구결과가 일반화 되어있고, 실제로 많이 적용되고 성과를 보고 있음은 물론이다. 구글이나 일본의 미라이 공업, 그외의 많은 기업들이나 많은 분야에서 수평적 조직체계나 평등한 조직체계가 훨씬 우수한 성과를 보인다는 증거를 많이 내놓고 있다. 많이 목격하고 생각해보건데, 갑질이나 수직적명령체계가 사람들이 목격하지  못하는 비능률을 가져오는 현상을 많이 목격하곤한다. 교육비용을 들여서 교육을 시켜놓으니 갑질에 덧정이 없어 퇴사해버리는 근로자와 새로운 근로자의 비숙련적인 실수, 우울한 조직문화가 가져오는 스트레스의 비능률, 갑질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목적보다 승진에 대한 욕망으로 목적전치현상을 보이는 현상등은 정치적 투쟁의 장에서뿐만 아니라 공무원조직, 군대문화, 일반회사조직등, 깐꾹족들의 모든 분야에서 개선되어야 할 점인듯 하다. 

2016년 4월 19일 화요일

서귀포 70리와 한국경제

어느 날 일터를 옮기는 인터벌 기간에 저가항공중에서도 최저가로 나온 항공요금으로 서귀포도서관에서 몇일동안 공학관련공부를 하다가 왔다. 많은 사람들이 제주도 여행을 꿈과 낭만으로 가득찬 소비여행으로 추억을 만들지만 가끔 제주도에 오면 지형이나 지질같은 주제에 테마를 가지고 버스나 도보여행으로 이리 저리 들쑤시고 다니곤 한다. 어렸을때 부친이 세계전도와 한국전도의 브로마이드판을 가져와 안방벽에 붙여놓은 이후로 대입학원에서 학생들 지리수업을 10여년 이상 한 경력에 내쇼널 지오그래픽잡지 정기구독까지, 여행을 하고자 하면 왕후의 테마에 걸인의 비용으로 꿈많은 청소년처럼 잘 돌아다니곤 한다. 공항리무진 버스가 좋은 호텔 안마당에서 승객을 태울때면 잠자리의 편안함이나 풍성한 소비패턴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곤 하지만 내 여건이나 선택에 대해서 지극히 만족함을 느끼곤 한다.

그러니까 내 정체는 감정적으로 일방적인 분배를 주장하는 좌파적 마인드가 눈꼽만큼도 없는 소시민이라는 사실이다. 2004년부터 뭔가 부조화스러운 문제가 일방적인 이념문제로 해석되는 성향에 불만을 품고 통일이나 비정규직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는데,이제는 좌파적인 정체성을 가진 반골로 이리저리 매도 당하는 늪에 빠져버린듯 하다. 그러나 내가 정당했던것 같다. 10여년이 지나서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뛰어들고 있는 현장에서 비정규직 근로자의 처우나 중소기업의 형편, 남북관계의 악화, 더욱 나쁜 것은 한국경제가 점차 악화되는 현상까지 목격하고 있어서 "거봐라 내 말이 맞았지"하기에는 너무 비관적인 사태에 무기력함을 느끼며 몸둘 바를 모르겠다.

제주도 바닷가를 걸을때면 서귀포 70리란 노래를 흥얼거리곤 하는데, 흥이 나는 맬로디의 이면에 일제치하에서 진주 캐던 아가씨들이 위안부로 끌려가 없어졌다는 의미가 담긴 가사는 알고 나면 더욱 애절하다. 정부는 경제성장이 멈춰가는 대책으로 통화정책이나 재정정책과 더불어 구조조정도 함께 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희망찬 맬로디의 이면에 근로자들이나 중소기업이 더욱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는 의미의 구조조정에 관한 가사가 있다면 아주 애절한 문제인듯 하다. 현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비참해 내 자신도 꿈과 희망을 포기하고 싶을때가 있다. 일자리를 찾기 위해 아우성치는 근로자들, 비정규직근로자들의 나쁜 근로조건,창의성은 없고 저임금을 이윤과 연결시키는 빈곤한 중소기업,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들을 압박하는 대기업, 소비할 수 있는 여건이 고갈되어가는 소비시장에서 생산품을 생산하여 판매하려고 애쓰는 대기업, 구조조정이라면 가장 먼저 손을 대야 하는 공적영역, 국방관련비리를 포함하여 만연한 부패등을 생각하면 돈도 일자리도 경제성장도 생명력도 썰렁하게 빠져나가버린 황량한 땅이 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2016년 4월 17일 일요일

권력과 호혜적 교환

어느 날 지인이 직장동료들을 비난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비난할만 했다. 직장 상사는 부하직원들에게 해주는 것이 없으면서 독선적이고 권력적이며 동료들은 승진을 위한 암투를 벌이고 있었다. 더 나쁜 것은 말은 안하고 있지만 지인 자신은 승진에서 밀려난 이유로 스트레스를 받아 큰 병이 생긴듯 했다. 망가진 몸과 마음으로 직장 밖에서 에너지승리의 꺼리를 찾고 있었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찾아서 방랑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그 지인의 직장상사나 동료, 지인 자신조차도 베푸는 것 없이 에너지를 얻어내는데만 최선을 다하고 있는듯 했다. 얼핏 한 번 본 바로는 모두 힘든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리 사회의 힘든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듯 했다.

리처드 리는 한 가지 의미심장한 사건을 통해 호혜성의 그런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는 쿵족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커다란 소를 사서 도살해 선물로 나누어주기로 했다. 며칠 동안 반투 농촌을 돌아다니며 가장 크고 살찐 암소 한마리를 구해 갖다 주었다. 그러나 그의 쿵족 친구들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바보같이 속아서 완전히 엉터리 소를 샀다고 비웃었다. "물론 우린 그것을 먹기는 먹을 겁니다.그러나 배가 부르지는 않을 겁니다. 그걸 먹고 집에 가서 자면 배가 울렁거릴 겁니다." 그들의 말이었다. 그러나 리가 구해서 가져간 암소를 도살해 보았을 때 그 속에서는 두꺼운 지방층이 가득 들어 있었다. 나중에 쿵족 친구들은 자기들이 그 동물의 가죽에 대해서 리보다 더 잘 알고 있으면서 왜 그 선물에 대해서는 그렇게 깎아내렸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그렇습니다. 어떤 젊은이가 고기를 많이 잡아오면 그는 자기가 추장처럼 대단한 사람인 줄로 생각해요.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을 자기보다 못한 걸로 알아요.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겁니다. 우리는 잘난 체하는 놈은 못 봐줍니다. 그 오만이 언젠가 다른 사람을 죽일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가 잡아 온 고기에 대해서 항상 무시합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그의 가슴을 식히고 그를 예절 바르게 만들지요.

 - 마빈 해리스 [작은 인간]중에서 -

그래서 소명의식 없이 권력욕구충족에 급급하면 욕을 먹는 것 같았다. 더구나 북한 사회는 정치지도자가 기본적인 경제적 욕구를 충족 시켜주지 못하면서 즉 호혜적 댓가를 치루지 않으면서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는 기묘한 현상이 생겼는데, 오래 지탱할 수 없는 현실임을 명확한듯 하다. 한국사회에서도 정치지도자나 대중들의 마음 자세가 호혜적인 기반이 되어 있지 않으면 큰 문제가 생길 것은 분명한듯 하다. 내 자신만해도 병든 정신으로 눈치를 살피면서 에너지싸움을 거는 상대와 가까이 있어서 즐거운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때가 많은듯 했다.

마빈 해리스는 성악설론적인 사회계약론자 홉스가 리바이어던의 필연적인 존재에 대해서 말한 것을 이렇게 반론하고 있다.

홉스적인 권력욕으로 가득 찬 쿵족 사람 하나가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제부터 이 땅과 여기에 있는 모든 것은 내 소유다. 그러니 반드시 내 허락을 받아야만 거기에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 도 한가지 조건이 있는데, 자네들이 그곳에서 잡고 채집하고 기른 것은 모두 내가 우선 차지해야 한다." 이 말을 들은 동료들은 그가 갑자기 미쳤다고 생각하고 얼마 되지 않는 자기 짐을 싸 가지고 2, 30마일을 걸어 나가서 새로 캠프를 만들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평등한 호혜성을 생활 속에 구현할 것이다. 왕이 되고자 했던 그 사람은 혼자 남아서 부질없는 지배권을 휘두르게 될 것이다.

2016년 4월 15일 금요일

경제적 실패의 발견

언젠가 건설기계장비기사로 일하기 위해 시청에서 열린 구인 구직 만남의 장에 발을 디딘적이 있었다. 그곳에는 관공서의 도움인력, 방송국촬영반, 구인회사, 구직노동자들이 발디딜틈이 많을 정도로 북적이고 있었다. 무엇인가 많이 비어 있는듯한 느낌이었다. 위에서 열거한 네종류의 인력들이 거의 비숫한 비율로 참여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장소에 구인회사가 많으면 경제가 활력이 있다는 의미고, 구직인력이 많으면 경제가 불황이란 의미고, 공무원이 많으면 큰 정부의 관료주의 문제점을 보여주고 있고, 방송국인력이 많으면 전시행정의 문제점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매우 나쁜 것은 구인회사와 구직인력의 참여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는데, 모두 경제적 생활을 포기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한 편으로는 일을 하지 않으려는 시민의 도덕성에 대하여 몇몇 보수적 정치인들의 비평이 있었는데, 현장에 직접 뛰어다니는 입장에서는 일자리를 찾고 생활을 해볼려는 시민들에 대한 적개심의 표현으로만 생각되었다. 경제가 활력을 잃어서 일자리도 없을뿐더러 일터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감을 느끼는 시민이 많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여러 일터에서 기존 근로자들에게 내 자신은 위협적인 존재였던 것 같다. 특히 나이 지긋한 근로자들에게는 더욱 그랬는데, 밀려나면 갈 곳이 없는 근로자들의 처지는 일인당 국민소득이 30000불 가까이 되는 국가라는 것이 믿겨지지가 않았던것 같다. 도대체 그많은 돈은 어디로 꼭꼭 숨었을까. 대형마트에서 스마트폰을 파는 영업사원이 나를 붙들고 신형스마트폰으로 바꿀것을 유혹하고 있었는데, 임금도 매우 낮은 처지에 젊은 이들이 입는 의복으로 대량교체한 시기였다. 내 소비가 의류공장 노동자의 임금으로 연결되는 것이 대기업의 이익으로 연결되는 것보다 낫다는 좌파적인 결정이 아니고 수요의 가격탄력성이 큰 상품에 대한 소비를 뒷전으로 미루는 합리적인 경제적 결정을 내려서 스마트폰은 절대 안 바꾸기로 하였다.

최저임금이 낮거나 일자리가 없을때 대기업의 스마트폰의 판매량은 어떻게 변할지 궁금했다. 조금 장기적으로 생각을 해보면 기업과 소비자들의 운명은 공생관계인듯 하다. 어느 쪽 편을 들어서 분배의 문제만 생각하는 이념적인 관점은 벗어나야 할듯 하다. 시민의 주머니에 돈이 있어야 기업의 물건을 소비하고, 공장이 돌아가며, 기업은 인력을 고용하고, 그 인력의 주머니에 돈이 들어오고, 그 돈으로 물건을 소비하고, 기업은 돈을 벌고, 시설을 확충하기 위해 투자를 하고, 물건을 소비하고 남는 넉넉한 돈으로 저축을 하여 싼 이자로 기업에 투자금을 빌려주는 경제적인 순환을 정치인과 경제인이 모를리 없을텐데, 이기심으로 관점이 협소해지고, 꼭꼭 숨어버린 전체적인 관점을 따라 순환되어야 하는 돈도 꼭꼭 숨어버린 모양이다. 

2016년 4월 9일 토요일

왜 몰랐을까 그대 마음을 / 칼 로저스

타인들과의 사이에 어떤 갈등상황이 형성되면 우선 그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볼려고 노력하는 습관이 생겼다. 톨스토이가 말한 것처럼 '왜 그랬을까'를 생각하는 마음은 갈등상황에 감정이 개입되어 이성적인 사고를 방해하는 문제도 해결되고, 더욱 근본적인 사고를 하면서 문제의 본질을 찾는 노력도 성공적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이해득실의 계산을 하지 않도록 자신에 대해서는 냉정한 마음을 가질것이 요구되며 대상(나와 갈등상황에 놓여있는 상대방)에 대해서는 공감할 수 있는 온화한 포용력이 필요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는듯 하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은듯 하다.

대체로 권력관계를 기반으로한 사고에서 정치적 행위가 비롯되면 이해와 공감은 없고, 결정은 힘으로 하게되며, 본질적인 정치적 목적(국민의 복리같은)은 잊혀지게 되는듯 하다. 그래서 정치가에게는 끊임없이 국민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치료자의 입장과 같은 능력이 필요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는듯 하다. 사회의 저변에서 정말 볼품없이 살다보면 정치지도자가 될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이나 기존 정치가들의 말과 행위가 국민의 삶과는 너무 다른 세상을 노닐고 있는 것을 보면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느끼는데, 서로 공감능력이 없이 서로를 다른 세상에 놓여있는 존재로 보는 마음은 일반 시민들이 정치가를 보는 관점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심리학자 중에서 칼 로저스(Carl R. Rogers  1902 - 1987 )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렸을때부터 매우 엄격한 원리주의적인 청교도 집안에서 성장을 했다. 로저스의 부모는 그들이 원하는 근본주의 학풍을 가진 프린스턴대학의 신학대학원에 진학하면 로저스의 학비와 약혼녀의 학비까지 지원해주겠다고 했지만 로저스는 '영혼이 매수당할 것'이 두려워 부모의 제안을 거부할 정도로 스스로가 어려운 경쟁상황을 겪고 장학금으로 신학대학원을 수학했다. 나중에 컬럼비아대학원의 심리학박사과정을 졸업하고 심리학자로 일하게 되었는데, 로저스는 상담을 하면서 문제를 알고 있는 사람은 정작 내담자(치료를 받는 사람)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로저스는 상담중에 내담자의 고민에 공감을 하지 않고, 지시적인 상담을 하게 되면 빈껍데기 상담으로 로저스 자신의 정신마저 붕괴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내담자에게 이지적이거나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보다는 정서적으로 온화한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1957년에 발표한 [치료적인 성격변화를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라는 논문에서 로저스는 타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실천 덕목으로 1. 공감적인 이해, 2. 진실성과 일관성, 3. 긍정적인 존중 이렇게 세가지 덕목을 제시하며 타인과의 성공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 이 세가지 덕목을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정치적인 환경이나 교육적인 환경이 이념이나 종교같은 엄격한 사고에서 비롯되면 어떤 입장에 있던 정신적인 사고가 붕괴된다는 사실을 로저스 자신이 깨달은 것 같다. 정치가나 교육자, 그리고 대상이 되는 국민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자율적이며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사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내 자신도 인지하고 경험해봐서 아는데, 쉬운 일은 아닌듯 하다. 그러나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일인듯 하다.  

2016년 4월 3일 일요일

운동장의 현상주의 / 마하

오래전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무렵 운동동호회에 입회했다가 그만 둔 것이 여러번 되었다. 원래 마음을 열어놓기 위해 시작한 운동인데, 조금이라도 권위적인 모습이 느껴지거나 에너지싸움을 목격하게 되면 마음 둘 곳이 아님을 깨닫고 신속하게 그만두었다. 대게 운동동호회를 이끄는 사람들은 중년 이상의 연배가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간혹 구세대의 권력지향적인 꼰대성을 버리지 못하고 전혀 그럴만한 성질의 장소가 아닌 곳에서 권위를 내세우는 경우를 많이 본 듯 하다. 한 번은 투병중인 이의 기운을 북돋아주기 위해서 더욱 예의를 갖추었는데, 권위에 대한 복종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어 오랫동안 마음속에 훈련된 의식은 변할 줄을 모른다는 생각으로 실소를 한 적이 있었다.

내 자신도 그렇지만 권위주의 정부시절을 많이 겪은 구세대들에게는 모든 것이 권력이나 지위, 그리고 그것들을 얻어내기 위한 에너지싸움으로 파악되는 경우가 있는듯 하다. 젊은 이들과 중년 이상의 세대들의 행태는 많이 다른듯 하다. 중년이상의 세대들에게는 학연과 지연, 지위와 권력, 비교와 우월등의 관점이 떠나지를 못하는듯 하다.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이자 철학자인 마하(Ernst Mach 1838 -1916)는 뉴우튼이 말하는 절대공간이라는 것은 없고, 모든 현상은 관측자와 관련지어 드러난다고 말한다. 마하의 이런 상대주의적인 관점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권위나 권력을 생각하는 이 그것들을 놓고 싸우기 마련이고, 스스로 에너지를 생성시키지 못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없이 타인으로부터 에너지를 취할려는 이는 에너지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이의 반발을 얻어내어 싸움을 하기 마련인듯 하다. 경쟁과 싸움은 자신과 하는 것이 가장 좋은듯 한데, 많이 싸워 온 세대들은 그런 태도에 익숙치 못한듯 하다. 좀 모나게 표현하면 머리가 나빠질수록 변화가 힘든 점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조건은 점점 나빠지는듯 하다. 그래서 보수적 사회는 더욱 보수성이 가속화될 우려도 있는듯 하다. 

2016년 4월 1일 금요일

확산지향적 사고

가끔은 출세지향적인 사고와 확산지향적인 사고 사이를 내 자신도 헷갈릴때가 있다. 출세지향적인 사고는 수직관계에 중점을 둔 사고, 확산지향적 사고는 수평관계에 중점을 둔 사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두가지 사고는 분명히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동일한 것을 얻어내기 위해 두가지 사고, 즉 확산지향적인 사고와 출세지향적인 사고를 선택을 하는듯 하다. 아마 그 동일한 것이란 개척정신과도 비숫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듯 하다. 달리는 자전거처럼 멈출 수 없는 삶의 특성상,항상 지향하는 바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부정적으로 왜곡된 사고가 출세지향적인 사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회의 저변에서 불행한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의 공통점은 확산지향적인 사고가 멈춰있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대게 실패하는 사람이 불행하긴 하지만 삶의 태도가 확산지향적인 사람은 실패조차도 인생의 한 과정으로 생각하는 그릇이 되는듯 하다.

한 번은 어느 작은 수출기업에 입사를 했다. 기업주도 열정적인 사람이었고, 내 자신은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터질듯 한 상태에 있었다. 어느 기업이든지 기업주마음은 세계를 달리고 있겠지만 간혹 사원들과 외부환경이 축소지향적일 경우 기업주가 동화되어 기업이 커지지 못하는 현상이 있는데, 그 기업이 그랬다. 창업시부터 함께 한 연배가 있는 사원들이 보수적인 태도로 안주하고 있었는데, 더 나쁜것은 어떤 변화도 적극적으로 막을려고 하는 문제가 있었다. 일보다도 사람과 부딪히는 일에 에너지를 낭비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솔직하게 문제를 이야기하고 그만두었던 기억이 난다.

잘은 모르지만 욕심과는 또 다른 성질의 생명력이 사람에게는 있는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어느 정도 안정된 직장과 같은 생활여건이 되거나 나이가 들어 생체활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확산지향적인 사고를 멈추는 성향이 보인다. 또 사회전체나 국가는 이념과 같은 관념에 갇혀있으면 확산지향적인 사고가 비집고 들어 올 틈을 주지 않는듯 한데, 극단적으로는 북한이 그런 문제에 걸려 있는듯 하고, 일본은 다양한 사회분위기 자체가 확산지향적이지 못한, 오래 전 이어령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축소지향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듯 하다. 한국은 출세지향적으로 왜곡되어 있는 분위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 그런 사고의 댓가는 퇴보라는 보답으로 돌아올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