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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29일 화요일

마키아벨리와 시청각교육

가끔 정치적 권모술수를 목격할때면 마키아벨리생각이 난다. 인간은 악하게 타고 났다는 성악설(性惡說)론자이며 군주의 현실적인 통치방식을 절대적으로 옹호한 악인(惡人)이다. 그의 알려진 정치적 발언 몇 가지는 년년세세  좋지 않은 정치방식을 합리화 시키기위한 방편으로 정치인들을 교육시키고 있는 것 같다.

"군주는 사랑받지는 않더라도 사람으로 하여금 한을 품지 않도록 하는 선에서 두려운 존재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은 두려워하는 자보다 애정을 느끼는 자를 가차없이 상처지우길 잘한다.그 이유는 인간은 사악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온의(溫義)로만 연결되어있는 애정은 이해관계에 의해서 끊어져버릴 것이다. 단 두려워하는 자는 공포에 얽매여서 무시할 수 없게된다."

마키아벨리는 원래 피렌체의 이류귀족 출신이다. 그러나 신분에 비해서 유족한 가문이 못되었다. 원래 신분상승의 가능성을 전혀 염두에 둘 수 없는 하층민들과는 달리 통일신라의 육두품적인 반골성향을 마음에 품고 성장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더구나 그의 부모는 상당한 교양인으로서 시재에 뛰어났기때문에 마키아벨리는 일찌감치 부모의 영향을 받아서 사상적인 논제가 일찌감치 풀어야 할 화두처럼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가 살았던 15세기말에는 르네상스말기로서 이탈리아는 현란한 문화를 꽃피우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불안하여 프랑스국왕 샤를8세에 의해서 이탈리아가 정복당하는 굴욕을 20대에 직접 목격을 했는데,일찌감치 자리잡은 자유로운 사상의 정신세계가 침략자의 횡포에 충격받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 같다.

이때부터 마키아벨리는 현실적인 생존문제를 가장 큰 사상적 프레임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이런 배경하에 [군주론]이 씌어졌다. 그 유명한  "군주는 사자와 여우의 모습을 함께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명언이 이런 배경하에서 탄생했다.

어떻게 보면 '공자와 맹자의 사상같은 동양적 리더학에 비해서 철저하게 인간을 불신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한국정치는 샤를 8세에게 공략당한 이탈리아와 비숫한 배경과 해방후 갑자기 들어온 서양문화의 배경으로 마키아벨리의 리더학은 정치인들에게 쉽게 학습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2013년 1월 25일 금요일

북유럽의 겨울정서

겨우내내 햇볕을 멀리했더니 느끼는 기분이 봄,여름, 가을과는 많이 다르다.

언젠가 북유럽의 높은 우울증과 자살률이 복지정책으로 인한 개인적인 목표의식의 결여에 기인한다는 정치적 논거를 본적이 있다. 요즘 한국의 자살률등을 보면 반드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얼마전 영국에서는 사람들이 우울증약을 처방받아서 먹지 않고 세면기에 버리는 탓에 템즈강오염이 심각하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햇볕이 드믄 영국인의 정서는 항상 우울하다고 한다. 때문에 지중해의 밝은 태양을 가까이 하는 이탈리아나 프랑스와 달리 맛없는 영국의 음식에도 그런 환경이 개입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겨우내내 햇볕을 보기 힘든 북유럽의 겨울정서는 '우울함'이 아닐까 생각한다. 

2013년 1월 23일 수요일

요수도시(妖獸都市)

정한론(征韓論)을 내세워 한국민족에게는 좋은 평을 못들은 일본의 개혁가 사이코다카모리는 세이난 전쟁에서 패하고 자신을 따르던 대원들을 모두 귀향시켰다. 그 중 마스다쇼오따로라는 사무라이 대장은 귀향을 거부하고 사이고다카모리를 끝까지 따르려고 하였다. 대원들이 그 이유를 묻자 마스다는 말했다. "저 사람은 기묘하다. 하루를 만나면 하루의 사랑이 생기고, 사흘을 만나면 사흘의 사랑이 생긴다. "

주종(主從)의 밀접한 관계를 중시하는 일본 문화를 좋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는 없지만 마스다의 말 한마디는 사랑받는 지도자의 모습을 간략하고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오래전 어느 시민단체 홈페이지에 대그룹에서 퇴사한 어떤 사람이 도청과 감청으로 고민하고 있다는 글이 올라왔을때 스포츠로 내면의 굳건함을 다지고 성정(性情)을 깔끔하게 보존하라는 조언을 한 적이 있다. 내 자신이 뜻하지 않게 정보분야등의 밀사(密事)에 연루되어 본의아니게 이중적인 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감정과 대처방법을 조언한 것이다.

숨겨야 그렇고, 드러내도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밝고 활기찬 국가의 미래를 항상 염두해 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보이지 않는 관념인 이념의 선동에 의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기도 하고, 혹자는 이념을 권력을 얻는 도구로 이용하기도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의 만행은 여러군데서 나타나는 것 같다. 사람과 사람끼리 부딪혀서 생겨나는 많은 문제들이 표현하기 힘든 에너지의 대결이라는 생각은 누구나 짐작할 수 가 있다. 하지만  그 정체를 구체화시켜 표현하기도 어려울뿐더러 대처방법은 더구나 알 수 없는게 문제인것 같다.

대체로 수양이 안되어 있는 사람은 에너지를 스스로 생성하기 힘들고 타인에게서 약탈할려고 한다. 그래서 권력욕구가 생겨나고 명예욕구나 물질적인 욕구가 생겨난다.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이 사회의 기본가치에 끌려다니다 보면 그런 싸움에 휘말려들어서 기쁨과 절망을 교대로 맛보아야 하는 평범한 사람으로서 좋은 교육과 좋은 사람들을 가까이 못했던 것이 후회스럽기도 하다.

근본을 따지고 보면 강대국사이에서 생존해야하는 습성이 훈련된 작은 국가의 가슴아픈 역사속에도 원인을 찾아 볼수도 있지만 서로가 서로를 이겨야 하는 교육을 반복해서 받아야 하는 국민들에게 잘못된 교육이 가져다 준 나쁜 습성은 언젠가는 반드시 표면화되게 되어 있다는게 절망이다. 콩심은데 콩나는 법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곳, 내가 보는 것이 내 주체적인 '의도'를 앞질러서 나를 교육시킨다는 사실은 나와 내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비극적인듯 하다. 

2013년 1월 17일 목요일

시이저와 한국의 권위주의

몇 일동안 마음이 우울했다. 기분 전환을 해 볼려고 아침 저녁으로 '미스터 빈'이라는 영국의 유명 코미디물을 몇 개 보았는데 시청각교육의 힘을 느끼면서 천천히 희극적이고 해학적인 사람으로 변하는 것을 느꼈다. 신뢰감과 희극성은 상충되는 면이 있어서 적정선에서 중단함으로써 중용의 미덕도 함께 느낀 몇일이었다.

시이저는 군사적, 정치적인 천재였다. 일찌기 20세에 평민당의 마리우스를 추종하다가 마리우스가 죽자 권력을 잡고 반대파를 숙청하던 귀족파의 스루라에게 추방 당하였다. 스루라와 친한 지인의 도움으로 사면되자 스루라는 시이저가 마리우스 몇명이라도 맞먹을 거라고 한탄을 하였다.

시이저는 젊은 시절 방종하여 산더미같은 카드빚(?)때문에 애를 먹었지만 후년엔 인심이 두텁고 부하들을 이뻐하는 너그러운 사람이 되었다. 배짱이 출중하고 다혈질이라서 적도 많았다.

시이저는 갈리아를 정복하고 총독으로 있는 동안 식민지를 착취하여 부를 축적해 놓았다. 로마에서는 경쟁자인 폼페이우스가 원로원과 손을 잡고 시이저를 몰락시키려고 하였다. 시이저는 화해를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고 로마의 연회에 참석하였다가 도망을 했다.

루비콘 강가에 숨겨놓은 오천명의 부하군사들에게로 가서 망설이고 있었다. 그 때 알 수 없는 진군의 나팔이 울려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외치고 루비콘강을 건너고 로마로 진군하여 폼페이우스일당을 몰아내고  이집트와 소아시아를 정복하고 외쳤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Veni, vidi, vici)

조선왕조와 일제시대의 수직적인 권위주의를 경험한지 오래되지 않은 세대를에게 또 하나의 권위주의를 자리잡게 만든 것이 시이저의 영웅주의적인 전기같다.

옛날 사법고시합격기같은 것을 보면 'Veni, vidi, vici'가 수없이 등장을 하는데 생사의 갈림길에서 도박처럼 루비콘강을 건너와 승리의 진군을 했던 것과 비숫하게 탄생한 권력밑에서 파생된 또 하나의 권위주의를 몸에 익히며 스스로를 교육시켜온 세대들의 모습이 시대가 변함으로써 천천히 객관화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2013년 1월 13일 일요일

인연의 국론적(國論的)해석

깊이 생각해보면 사회가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 있다.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느 한부분의 불편함은 다른 부분의 불편함으로 전이가 된다. 예를 들어 한 부분의 경제적인 능력을 몰락시켜 수요를 창출하지 못하게 하면 다른 부분의 생산기능을 몰락시키게 되는 이치다.

우냐 좌냐, 부자를 위한 정당이냐 가난한 자를 위한 정당이냐, 정의를 내릴려고 하지만 결국에는 편향적인 성향이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보정하게 마련이다. 그렇지 못하면 나라 꼴을 엉망으로 만들고 나쁜 소리를 듣게 된다.

항상 더불어 살아간다는 생각을 하면 구분할 이유가 없다. 생각이 깊은 정치인들이  이런 생각을 기반으로 정치를 하길 바라는 마음이 항상 있다.

2013년 1월 11일 금요일

아리스토텔레스/교육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세시대까지 정신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철학자이다. 그의 철학은 스승 플라톤의 이데아이론의 관념적인 성질에 반하여 '중용'과 '의지'를 중시여기는 실천적인 모습으로 탄생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와 필립포스대왕의 시의(侍醫)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마케도니아에는 경험주의적이고 유물론적인 이오니아의 자연학이 유행하고 있었다. 이오니아의 자연학은 정복군주로서의 활동을 시작한 필립포스대왕의 업적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인철학에 영향을 끼치고, 이는 또한 필립포스의 아들 알렉산더의 위대한 업적에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보이지 않는 이데아의 세계를 이론적 개념으로 정착시킨 플라톤 철학은 훗날 중세의 교부철학의 관념적 성향에 영향을 끼치게 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인 철학은 스콜라 철학의 실체적인 성향에 영향을 끼치게 됨으로써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철학은 스승과 제자의 철학이면서 후세에까지 원리주의자와 실천주의자의  대립적인 성향으로 면면히 계승되고 있는 것 같다.

알렉산더대왕의 궁정스승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와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를 철학에 대해서 모르는 고집세고 게으른 인간이라고 항상 질타를 했는데 항간에 곱사병을 앓았다는 소문이 있던 알렉산더에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주의 사상이 세계정복의 기치를 들게한 배경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알렉산더대왕을 생각하면 철학적 환경이나 사상적 환경등이 세계인들의 삶과 역사에 끼치는 영향을 비약적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게 하고, 스승의 이론에 반대하여 나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교육이란 순리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만 가치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하게도 한다.
 

2013년 1월 10일 목요일

시이저와 옥타비아누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최초의 황제이다. 옥타비아누스 이전의 로마는 원로원이 정치를 하였다. 갈리아정복으로 권력을 얻은 시이저가 황제가 될려는 야심을 가지자 공화파의 반대와 양아들 부르투스의 암살로 시이저는 죽음을 당하게 된다.

옥타비아누스는 시이저의 조카딸의 아들인데 시이저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시이저가 암살당했을때 나이는 열아홉이었고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2차 3두정치를 하였다. 레피두스가 죽고 안토니우스가 방종하게 놀아나자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수군을 무찌르고 로마의 평화(Pax Romana)시대를 연다. 로마인들은 그를 아우구스투스(존엄자)라 부르며 황제로 추앙하고, 이후 로마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스스로 황제가 되려다가 실패한 시이저와 옥타비아누스는 많이 달랐다.옥타비아누스는 시이저에비하여 훨씬 수수하고 온유했다. 시이저는 부하장수들에게 인심을 잘 쓰고 친구처럼 대했는데 후대에 많은 사람들이 시이저의 이런 행실을 본받으면서 벤치마킹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옥타비우누스는 경솔하거나 서두르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그의 말은 항상 [천천히 서둘러라]였다.  그는 또 '대담한 장수보다 안전하고 실수없는 장수가 훌륭한 장수'라고 말하기도 하고 '무엇이든지 충분히 잘 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속도'라고 말하기도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가정적으로 불행했으며 후처인 리비아는 권모술수가 깊었는데 그의 아들 티베리우스황제 이후 제위는 항상 음모의 대상이 되다가 네로황제 이후 줄리어스가의 혈통이 끊어졌다.

2013년 1월 1일 화요일

상징정책의 판타지


이제 마무리를 짓는 17대 대통령의 정부가 처음 출범할 당시에 가장 우려스러웠던 점은 국정이 상징정책위주로 운영이 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원래 미성숙한 정치문화란 상징성이 강해서 국민들에게 장미빛 환상을 가져다 주는데 치중하는 면이 있는데다가 종교적 비쥬얼을 정책에 반영하는 현상이 있었던것 같다.

이념이 주는 판타지에 휘말려 많은 댓가를 치루고 있는 한국민들이지만 습관처럼 떨쳐 버리지 못하는 판타지에 대한 의존은 시간과 말과 행위는 지나고 나면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무색하게 만든다. 정치인이나 종교인은 원래 판타지를 심어 주는데 익숙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두 가지 요소가 힘을 합하면 상상이상의 부(負)의 시너지효과가 나올 수 있는 면이 있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과학기술을 발전 시켜야 한다는 당위성이 호소력이 있는 논리로 다가온다. 판타지만 지배하게 되는 사회가 온다면 신뢰감 없는 망념(妄念)들만  잡히지 않는 빛의 모습으로 둥둥 떠다니는 사기로운 세상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