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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31일 일요일

신과 개(GOD AND DOG) / 사막의 라이언

한참 주변이 어지럽던 시절, 나를 사찰하는 네트워크는 어디일까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정보기관과 치안기관이나 정부수반의 성격까지 고려했을때 종교네트워크까지 의심이 갔다. 어쨌거나 그 시절 나는 많이 성장을 했는데, 지금 터키의 운명이나 푸틴의 행보를 보면서 종교와 정보기관같은 하는 일의 경계가 추상적이면서 국기(國氣)를 어지럽히는 일에 대해서 경멸스러운 생각이 드는건 물론이었다. 거기다 생산근로의 현장에서 땀을 흘리거나 스포츠에 열중할때면 나에 대해서 작용하는 음성적인 부분들에 대해서 불필요악이라는 모진 생각이 들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못난 정치가 시키는데로 했던 연민을 가득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던것 같다.

한때 아랍인들에 대해서는 유목민들에 대한 감상적인 생각이 있어서 매우 호의적이었던것 같다. 게다가 어릴때 본 '사막의 라이언'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제국주의 침략에 항거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안소니 퀸이 배역을 했다)는 오랫동안 머리속에 남아서 한국 정치지도자와 비교 평가를 하는 척도가 되었던것 같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IS라는 신(GOD)을 개(DOG)로 만든 집단이 아랍 세계를 휩쓸고 다니면서 아랍에 대한 환상은 깨졌고, 라이언은 어디에도 없었다. 멀쩡하게 잘 살던 나라도 정치와 종교가 야합하여 암흑의 세계로 만들어 가는듯 하다.

왜 GOD라는 단어를 뒤집으면 DOG가 되는지 어원을 알것 같은 생각이 든다. 사실 종교인이나 신앙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적이 많았던것 같다. 좋은 이는 정말 신과 같았고, 조잡한 이는 정말 개와 같았던 것 같다. 구체적으로 실증되지 않는 영역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항상 선과 악이라는 극단적인 세계에 빠질 위험에 있는 것 같다. 종교와 정보기관, 정치가의 공통점은 형이상학적인 사고를 핑계로 악에 물들기 쉬운 성질이 있는것 같다. 조심해야 할 부분인것 같다. 이 시간 터키 어딘가에서 '사형' 심지어는 '참수'를 논의하는 정치가와 종교적인 시민이 있다면 심각한 문제인듯 하다. 게다가 푸틴이나 에도르안의 공작정치가 개입해 있다면 더욱 그럴것 같다. 

2016년 7월 29일 금요일

국가의 습관과 보수성

몇일전 구소련의 비밀경찰(KGB) 출신인 러시아의 대통령 푸틴의 정부가 터키나 미국에 공작활동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문제에 관해서 언급한 바 있지만 국가나 국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간의 습관, 그리고 그런 습성들의 고착화는 실제로 세계사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터키의 역사적인 쿠데타 습관이나 지정학적인 영향을 벗어날 수 없는 종교적 습관, 오랫동안 남진정책을 추진하면서 터키와 부딪혀야 했던 러시아의 터키에 대한 관계적 간섭등은 꽤 오랫동안 이해득실과 상관없이 인과관계를 맺어주는듯 하다.

왜 섬나라인 영국과 일본은 보수성이 강할까. 지정학적인 고립상태가 고착화된 습관을 지켜준 탓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혹자는 영국인이 미국으로 건너가서 프론티어정신의 개척성을 보여주었다고 말하지만 보수성을 견디지 못한 진보적인 청교도 집단의 탈출로 인식을 해야 할 것 같다. 미국의 공격적인 간섭을 받아서 문호를 개방한 일본이 스스로 강국이 되었다는 생각을 하자 보수적이고 국수적인 성향을 띄게 되는 것은 당연할 수도 있는듯 하다. 반대로 어떻게 생각하면 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는 보수와 진보의 투쟁이 끊일 수 없는 사정이 있는것 같다. 한반도에 대해서 좀 뼈아픈 문제는 강대국에 둘러쌓여 내부에너지의 팽창방향이 내부구성원 서로에게 향하는 문제가 있는듯 하다. 터키 국민들도 비숫한 덫에 걸려 있는데, 더 나쁜 것은 획일적이고 보수적인 종교마저 변화의 움직임을 억압하는 어두운 시대가 온 것 같다. 

2016년 7월 27일 수요일

터키군사쿠데타 실패이후 / 에르도안과 푸틴

터키쿠데타 실패의 이면에는 러시아가 에르도안에게 쿠데타가 발생할 것이라는 정보를 제공했다는 소문이 있는듯 하다. 한편 미국정보기관에서는 민주당해킹의 배후에 러시아 정보기관(FSB나 GRU)이 있다는 확신이 있다고 발표했다. 얼마전 한국에서는 정치지도자가 건설분야와 종교라는 자신이 몸 담고 있던 두 분야에 관련한 생각을 국가정책결정에 이입시켜 자신과 국민을 모두 곤경에 빠뜨린적이 있는데, KGB출신인 푸틴의 정부가 다른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정보전으로 해결할려는 익숙하고 쉬운길을 택했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터키문제에 관해서는 에르도안 정부가 서방측에 친화적인 성질을 갖고 있는 군사쿠데타를 막음으로서 러시아에 친화적인 길을 걸을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일 수가 있는듯 하다. 터키군사쿠데타에 관해서 미국과 유엔이 밝힌 입장처럼 에르도안 정부의 친러적인 편향성은 아직도 모호한 성향이 있는듯 하다. 게다가 에르도안 정부가 이란처럼 이슬람 원리주의 정부를 세운다면 북한처럼 어느쪽과도 친화적이지 않은 쇄국정책의 성향을 띌 가능성이 있을듯 하다. 이란의 호메이니는 친미적인 팔레비왕정을 무너뜨리고(심지어는 팔레비왕정을 수호하기 위해 미국은 끝까지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바 있다) 세운 정부라서 반미적인 성향이 강했던것 같다. 게다가 당시는 이념적인 대립이 뚜렷한 냉전시대였으니 반미국은 친소련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에르도안 정부의 성격은 대단히 개인적인 성향이 우선일 수 있을 것 같다. 호메이니처럼 종교권력이 개인권력을 압도할 수 있는 성향이 아닌 개인권력이 종교권력을 이용하는 성향일 것으로 생각된다. 오히려 이란보다 국수적(國守的)일 가능성이 있으며 협상과 조화보다는 지역분쟁에 앞장서는 세계평화의 골치덩어리가 될 가능성이 있을듯 하다. 더구나 터키는 중동최고의 군사강국이다. 에도르안 개인으로서는 서구의 도움과 쿠르드족독립운동의 긴장감을 이유로 건설한 국방력을 개인의 독재정권유지에 사용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지게 된 것 같다. 러시아의 푸틴정부가 터키군사쿠데타가 실패하도록 지원했다면 러시아에는 그다지 실익이 없는 일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어쩌면 정보전력을 쉽게 사용한 동기는 푸틴의 개인적인 습관이 동기인듯 하다. 터키의 국운이 에르도안이나 푸틴의 지극히 개인적인 성향에 의해서 어두워지고 있는것 같은데, 그래서 국민은 각자가 현명해야 할 필요가 있는듯 하다. 

2016년 7월 26일 화요일

한국제조업의 딜레마 / 여섯시간근로제

한 국가의 산업이나 경제의 근간은 제조업이다.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내수(內需)인데 한국경제는 이 두가지를 모두 박탈당해가는 느낌이다. 기술혁신과 같은 문제는 국내기술의 성장이나 국외기술의 도입등으로 쉽게 해결할 수 있기때문에 기술의 문제는 아닌듯 하다. 이면을 깊게 따지고 들어가보면 인간과 관련된 문제가 있다.

언젠가 가혹한 근로환경에서 일한적이 있었다. 근로자들은 수시로 잠시 사라졌다. 건강을 보전하기 위해서 쉬러간거였다. 생긴것 답지않게 건강한데다 회사내규를 착실히 지켜주는 내 자신은 꾸역꾸역 일을 했는데, 많지 않은 젊은 사람중의 한 사람으로서 모범이 될만했다. 얼마후 기업주는 한국에서는 노동임금이 비싼데다 과거에는 안그랬는데,요즘은 근로자들이 배가 불렀다는 불평을 하며 중국에 공장을 차렸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중국인들은 더욱 더 자주 사라졌다. 더구나 그 회사의 생산품과 비숫한 수준의 중국산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회사는 무너졌다. 중국에 있는 회사가 무너짐으로서 한국의 본사도 무너졌다. 살기위해 잠시 쉬러다니던 동료 근로자는 임금이 체불되자 공장굴뚝에 올라가서 자살소동을 벌여서 티브이스타가 되었다. 그 장면을 티브이로 보고 충격이 컸다. 그 당시 기술혁신이나 생산시설의 정비 특히 생산품의 품질을 개선할 생각을 안하고 근로자들의 노동력만 이윤추구의 근원으로 생각하는 고용주가 무척 어리석어 보였다. 먼 훗날 어떻게든 인간에 대해 신뢰할만한 자신이 서는때, 그리고 창업환경이 좋아지면 절대 저렇게 회사를 운영하지는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서 다시 제조업의 근로현장에 와보니 변한게 없다. 회사가 외국으로 나가는 대신 외국인 노동자가 많이 와 있었다. 근로환경은 여전히 안좋았다. 외국인 노동자는 적당히 임금을 체불하거나 지연시켜도 잘 참았다. 임금을 안준다고 밤에 사무실밖에서 서성대는 모습을 보고 늦게까지 경리를 보는 여직원은 무섭다고 했다. 사실 외국인 노동자는 좋은 사람도 많았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태국이나 스리랑카출신의 노동자들인데 예의바르고 한국인인 내가 신입으로 왔는데 알뜰살뜰 보살펴 주었다. 물론 어떤 외국인 노동자들은 눈빛이 사고칠 것 같아서 항상 거칠게 충돌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하는 외노자들도 있었다. 아마 그들도 험한 세상에 와서 부딪힌 삶이 모질다는걸 빨리 깨쳤을 것 같다.

제조업의 근로현장에는 젊은 사람이 없다. 젊은 사람이 일을 안할려고 하는게 아니라 근로환경이 일할 동기를 만들어주지 않는다. 인간을 기계취급하는 근로현장에 있는것 보다 자신만의 여유가 있는 피씨방이나 호프집 알바가 낫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점차 무너져가는 한국제조업의 사정상 훗날 일을 할려고 해도 일을 할 곳이 없어질 위기가 왔다. 한 번은 연세드신 근로자 한 분이 대단히 권위적이고 사나웠다. 오는 신입마다 이상한 방식으로 내쫓았다. 이제는 체력이 바쳐주지 않아서 화가 나있는데, 그 일터마져 보전할 수 없으니 무척 힘들어했다. 자신은 일을 배울때 인간대접을 못 받고 배웠는데도 잘 견뎠으니 신입들도 그래야 된다는 것이다. 그 아둔함은 그 근로자분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제조업 전체의 문제인듯 하다. 제조업현장 어디서든지 국민소득 삼만불의 위용은 찾아볼 수 없었다. 찾아 본 회사가 중소기업들이지만 대기업은 중소기업의 하청생산으로 이윤을 보고 있는 처지에 뭐 가릴 것이 있겠나 싶다.

회사를 그만둘때마다 고용주들에게 인간을 좀 더 긍정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부탁하지만 당장 단기적이윤이 급한 고용주들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어 보였다. 특성상 IT회사등은 인간의 여유로운 창의성과 생산능률이 쉽게 연결이 되지만 그 밖의 기업들은 그게 쉽지않은듯 하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여섯시간근로제를 활성화시키고 최저임금을 조금 높히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제조업에서는 6시간근로제로 2교대, 3교대, 4교대까지 가능하고, 근로자들은 건강이나 일에 대한 즐거움을 보존할 수 있을 것 같다. 게다가 앞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없는 노인인력들을 수용할 수 있고, 젊은이들의 제조업유입도 가능해질것 같다. 여섯시간을 근로하고 남는 시간에는 각자가 자기 계발에 힘쓴다면 국가의 부담도 많이 줄어들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자신에게도 느껴보고, 많은 사람들을 보아왔지만 인간은 그렇게 기계적이고 부정적인 존재가 아닌듯 하다. 여유롭고 즐거운 근로환경에서 집중력이나 창의성은 훨씬 상승하는 예를 많이 보아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행복에 대한 욕구는 누구나 가지고 있고, 근로의 최종목적은 '행복한 삶'이다. 과거에는 지금 힘들면 행복한 시절이 온다는 희망으로 어려운 근로를 참고 견뎠지만 빈부격차가 커져서 상대적 박탈감이 커지는 요즘은 희망이 없어보인다. 더구나 스리랑카출신 근로자는 한국에서 삼년만 일을 하면 여기서부터 저어어기 지평선까지 땅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있어서 한국에서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일하지만 한국근로자에게는 그런 희망이 없다.

제조업의 근로현장뿐만이 아니다. 다른 분야, 심지어는 공무원이나 대기업근로자들까지도 행복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을 찾을 수 있는 안정된 직장을 찾았을뿐이지 인간으로서 필요한 근로의 행복함을 찾지는 못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자꾸 개돼지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지만 인간은 기계나 개돼지가 아니고 존중받아야 하는 존재다. 내 글에서 빠질 수 없는 이념이나 종교 이야기를 하자면 근로의 즐거움이나 인간으로서의 행복을 못 찾게 되면 이념이나 종교의 광기(狂氣)가 스며들어오는 것은 당연한듯 싶다. 희망없이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의 특성상 피안의 저 너머 확실히 검증되지 못한 것이더라도 몸과 마음을 맡기고 싶은 것이 당연하지 않겠나 싶다. 

2016년 7월 22일 금요일

신분상승과 수평적자유

1층위에 2층, 2층위에 3층, ..........10층위에 옥상, 옥상위에 태극기,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장마철이라 날씨가 안좋아서 그런지 뭔가에 구속되어있는 느낌이 나서 각 분야의 영문원서를 대량으로 구입했다. 시간도 어학실력도 모자르지만  없는 시간이나마 쪼개서 마음은 넓은 세계를 달리게 하고 싶었다. 한국에서 번역되지 않은 책들도 많은데, 지구촌 다른 곳의 생각들을 읽어보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았다. 심지어 하버드대학 출판부에서 출간한 한국사책도 구입했는데, 외국인의 관점으로 보는 한국역사가 매우 궁금했다. 터키 국민들이 자신들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불나방처럼 억압의 굴레에 스스로 뛰어든것처럼 외국인의 눈에 한민족들이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지 궁금했다.

잘나가던 법조인이 권력을 이용해 대형비리를 저질렀는데, 티브이 화면에 비추어진 모습은 어떤 과오나 좌책감이 보이지 않고 날카로운 눈은 살아있고 당당했다.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오랫동안 위에서 아래만 내려다보고 산 사람들의 풍모가 그대로 느껴졌다. 공부 잘 해서 큰 인물이 될거라는 칭찬과 더불어 최고 명문대학을 나오고 사법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고, 권력기관에서 승승장구하고 했으니 기가 꺾일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자신이 옥상이 되보니 태극기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 같다. 출세를 꿈꾸는 많은 사람들이 미쳐 모르는게 한 가지 있는데, 수직적 관점을 갖게 되면 자신의 아래에 있는 사람들때문에 기쁜만큼 자신의 위에 있는 사람들때문에 고통스러운 날이 반드시 오게 마련이다. 그러니 능력은 있으면 어떤 방식으로든지 상승욕구를 해결할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데, 그런 노력이 때로는 일탈행위를 낳기도 하는듯 하다. 물론 어떤 이들은 서민을 위해서 어쩌구 하면서 정치적인 노력을 하게 되는데, 그럴때도 조심해야 할 것은 그 길이 상승욕구를 해결할려는 시도로 발디딘 길인지 냉철하게 판단해봐야 할것 같다.

오래전 용광로에서 일하다가 작업복을 입은채로 퇴근을 하기 일쑤였는데, 많은 천대와 동정의 분위기를 확연하게 느꼈다. 그런데 그 복장 그대로 어느 일본계 회사에 가서 일자리를 요청하니 볼것도 없이 채용하고 시간이 지나서 관리자로 내정을 해놓았다고 귀띰을 해주었다. 무척 고맙기는 하지만 자유를 찾아서 사설학원에서 공무원이 되고자 하는 젊은이에게 행정학학습지도를 하였는데, 시험에 붙지 못하고 오랫동안 도서관에서 마주치는 젊은이들을 볼때면 그 일도 할 짓이 못된다는 생각이 들곤했다. 내 자신이 스포츠에 뛰어난 숨은 재능이 있었던것 처럼 그 젊은이들도 공부말고 무엇인가 다른 능력이 있었을 것이고 그 능력이 공부 잘 하는 능력과 동등한 대접을 받는 사회에서 살았어야 했던 것이다.

국민은 생각이 없는 개돼지가 아니다. 생각이 없도록 만드는 교육시스템이 문제고, 흔히 말하는 1%도 그런 교육시스템의 피해자인지도 모른다. 속칭 높은 자리에 있는 중년이상의 세대들, 공무원이 되어 안정된 직장과 신분상승을 노리는 수많은 대한건아들, 그리고 내 재능을 찾지 못하고 젊은 날을 방황한 내 자신이 모두 잘못된 교육시스템의 피해자인듯 하다. 나이가 들어 정신적인 방황을 멈추게 된 이유는 한가지 목표를 세운 까닭인데, 통일한국의 사격선수로 올림픽에 나가 봤으면 하는 목표였다. 목표를 이루는 일은 부차적인 것이고 운동을 할때 내 자신과 대화할 수 있는 수평적인 환경이 매우 좋았더라. 나이가 한참 먹어서야 수레바퀴아래를 벗어난것에 대해서 마음 상하지만 다른 길을 갔으면 가히 우리속에 갇힌 개돼지신세로 전락할 수 있을듯 했다.내 자신도 가끔 공무원이 된다거나 안정된 직장을 꿈꾸는 경우가 있었는데, 바로 저녁시간을 위해서인듯 하다. 사실 직업은 인간의 본질적인 무엇, 가정, 교육, 취미등등에 비하면 부차적인 것이어야 한다. 직업이 모든 것이 되면 그 속에서 상승욕구가 꿈틀되고 행복해야 할 일터를 레드오션(blood sea)으로 만드는 문제가 있는듯 하다. 

2016년 7월 21일 목요일

터키의 종교독재 / 복잡계와 단순계에서의 국민사찰

오래전 사찰의 쓴 맛을 본탓인지 국가가 정보기관을 통하여 국민을 어떻게 통제하는지에 관심이 많았다. 어떤 일을 하든지 어떤 장소에 있든지 말(정보)의 돌고 도는 모습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한 편의 즐거움이기도 했던것 같다.

실용적군부의 쿠데타를 진압함으로써 새롭게 신정일치(神政一致)국가를 이룬 터키의 에르도안 정부는 수만명의 공무원과 군인 경찰들에대한 대규모의 숙청을 감행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쿠데타를 진압하고서 어떻게 저렇게 수많은 반대세력에 대한 살생부를 작성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훌륭한(?) 정보기관이 있지 않고서야 그 명부를 작성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도 그렇지만 이미 오랫동안 이웃과 이웃을 감시하고 통제하도록 하는 네트워크를 달성했다는 사실은 경이로운데가 있는듯 하다. 내 자신도 생각을 해보면 그런 이웃을 알면서도 오랫동안 따뜻한 애정으로 어루만져준 사실이 있었는데, 그렇지 못한 이웃과 이웃들은 풀뿌리 국민분열의 초석이 될수밖에 없을 것이다. 엄청난 사회분열을 조장하는 에도르안 정부가 수명이 길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시오니즘의 이념으로 뭉친 '카차'라는 방대한 민간 정보원의 도움을 받은 이스라엘의 정보기관인 모사드(MOSSAD)나 이념적인 결집체였던 국민을 모두 정보원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구 소련의 정보기관인 KGB와 같이 터키의 에르도안 정부는 종교네트워크를 이용하여 국민을 사찰하고 살생부를 작성했을 것이다. 종교와 이념은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는 사회의 점차 복잡계로 넘어가는 정보네트워크를 단순계로 정리하는 훌륭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 같다. 에도르안은 정작 SNS를 통하여 국민에게 반 쿠데타를 요청했지만 이미 종교네트워크를 이용하여 '종교에 반대되는' 세력이 아닌 '자신에게 반대하는' 세력에 대한 통제를 오랫동안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터키가 서구사회와 가까워지면서 이루어놓은 경제적 발전과 민주주의 특히 국민통합은 종교독재의 시작으로 퇴보하는 것은 확실한듯 하다. 터키의 미래는 어둡다. 종교나 이념에 매몰된 국민이 어떻게 자기 발등을 찧게 되는지 잘보여주는 사례인듯 하다. 

2016년 7월 17일 일요일

종교와 이념의 문화파괴행위(vandalism)

터키쿠데타의 와중에 시민들이 쿠데타군을 참수한 사건도 생겼다. 손쉽게 끔찍한  야만의 상태로 인간정신을 몰아넣을 수 있으니 알라는 위대하긴 위대한 모양이다. 아마 쿠데타군은 이러한 상황으로 터키문명이 흘러가는 것을 막을려고 했던 모양인데, 이런 상황의 희생자가 되 버린것 같다. IS가 걸핏하면 참수를 해서 그 동영상을 유포하며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더니 터키에서 그 모습을 다시 보게 되었다. 한반도에서 서로 죽창을 겨누는 끔찍한 전쟁이 일어난지 꽤 세월이 흘렀는데도 이념대립의 최전선에서 꽤 고생을 한 적이 있는데, 생각을 해보니 종교에 대해서도 만만치 않았던것 같다. 가장 현명해야 할 부분인데, 무지와 아둔함의 표상이 되버린 것이 이념과 종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 자신은 남과 다투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는 편인데. 생각을 해보면 이념문제나 종교문제로 다툰 기억만 있다. 상대가 옳고 나쁜 이야기가 아니고 이념과 종교에 관해서는 선과 악의 스팩트럼이 극단적으로 강해지는 이상한 현상이 생긴다. 아마도 독선과 아집으로 변한 까닭인지도 모른다. 어떤 대화도 통하지 않고, 타협이나 설득도 없는 정신세계에 매몰되어 있는 인간정신을 신뢰할 수 없었던 까닭인지도 모른다.

가끔 종교적인 지인들에게 연락을 하곤 하는데, 어떤 대화를 해도 어두워지고 극단적으로 흘러가는 성향이 있다. 종교와 이념은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 공감과 이해가 없는 것이 똑같다.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믿으면 그만이다. 정신은 믿고나면 자동장치에 의해서 해결될줄 안다. 고민도 할 필요가 없는듯 하다. 나와 같은 정신을 네놈도 같기를 바랄뿐이다.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고민할 수 있는 인문학과 철학에 대한 교육이 있었으면 종교와 이념이 문제를 일으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터키군부쿠데타실패와 역사적정당성

터키의 군부쿠데타가 일어나자 현터키정부의 성격을 생각할때 미국이나 유엔은 적어도 쿠데타측의 편을 들지는 않을 지언정 침묵이라도 할 줄 알았다. 그러나 즉각 민주적인 선거로 구성된 현 정부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내놓아 좀 의외였다. 혹자는 미국이 국익에 의해 반응한다는 평가도 있지만 유엔은 그렇게 해석이 안되는 점이 있었다. 아마도 쿠데타군이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줄만한 여건이 안되어 있다는 정보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쿠데타군이 일시적으로 승리를 한다고 해도 그 이후에 일어날 수 있는 종교적인 원리주의자들과 개혁파들의 투쟁이 내란으로 번질 위험이 있고, 한참 세력이 꺾이는 중인 IS(이슬람국가)세력이 내란의 틈새시장을 개척할 위험이 있다는 예측을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현 터키정부가 IS에 친화적인 이슬람원리주의 성격을 가졌기때문에 내란중 IS는 터키의 절반을 확보할 가능성이 있다는 예측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쿠데타의 시기가 별로 안좋았고(어쩌면 이런 문제로 쿠데타가 일어났겠지만), 육군보다는 공군쪽이 쿠데타의 주도세력이 되었다는 문제점이 있는듯 하다.

터키는 개혁파들의 오랜 쿠데타의 전통이 있다. 1908년 젊은 장교들이 주축이 된 청년투르크당이 진보와 통일을 외치며 무장혁명을 일으킨 적이 있는데(2차 입헌운동), 개혁과 더불어 청년투르크당의 성격은 패권주의를 주장하는 전근대적인 면도 있었다고 한다. 그날 이후 터키는 케말파샤라는 군사지도자가 쿠데타를 일으켜 의식있는 통치로 터키를 발전시킨 일이 있는데, 집권적인 통치에 대해서 그다지 거부하지 않는 민중이 많다는 점은 케말파샤의 존재때문에 생긴 역사적이고 의식적인 습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무슨 문제가 있으면 군사쿠데타가 잘 일어나는 이유도 매우 성공적인 군사쿠데타가 여러번 있었다는 역사적인 인식과 습관때문인지도 모른다. 청년투르크당의 쿠데타와 케말파샤의 등장은 개혁을 위한 쿠데타가 매우 좋을 수 있다는 인식도 심어주었기 때문인듯 하다. 물론 반대로 쿠데타로 만든 정부가 나쁘지 않을 수 있다는 의식도 함께 가져다 준 절묘함이 있는듯 하다.  

그러니까 투르크를 구한 전쟁영웅 케말파샤를 꿈꾸는 많은 쿠데타후보자들이 있을 것이고 그렇게 만들어진 정부를 지켜야 한다는 많은 국민들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양쪽이 다 좋은 명분을 가지고 대립하다가 힘에 의해서 정의가 판단되는 문제가 있는듯 하다. 그러나 터키 사법부의 인재들이 어떤 방식으로 쿠데타에 가입했고, 왜 대대적인 사법부숙청까지 있는지는 의문이다. 분명한 것은 종교국가가 되어 팔레비왕시대보다 문화적, 경제적으로 많이 어두워진 이란의 전철을 밟지 않는게 좋을듯 하다. 

2016년 7월 15일 금요일

터키의 군부쿠데타

언젠가 스페인의 저널리스트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나는 걷는다]를 읽다가, 터키여행부분에서 쿠르드족의 독립운동과 대치하고 있는 터키군이 사실상 지방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긴장감을 이유로 원리주의적인 정부(예를들면 극우주의나 종교적인정부)가 탄생하기 쉬운 여건을 가지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터키의 정부는 이슬람원리주의를 표방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터키에서 세속적인 성격의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아마도 소통과 발전이 안되는 이념적인 압박이 있는 나라들과 비숫한 실용적인 요구가 있었던것 같다. 하필이면 몇일전 유명한 터키의 저널리스트가 내 트위터를 팔로잉한 일이 있었는데, 뜻밖의 국가에서 내 구글블러그를 방문하면 뭔가 한반도와 비숫한 고민을 하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하긴 했었다. 결국 터키에서 일이 터진듯 하다. 종교적 원리주의나 극단적인 이념은 자유와 민주를 표방하는 사회분위기에서 어울리지 않는 것은 확실한듯 하다. 

2016년 7월 14일 목요일

철학이 떠난 자리에

이념이 홀로 남아 뉘도 모를 한 때를 아쉽게도 한들 거리나니........

어제 철학에 관심이 꽂힌 지인이 독일의 칸트철학의 성격에 대하여 질문을 했다. 별로 아는 바가 없었지만 꼼꼼히 메모를 하는 지인에게 함께 생각을 해볼것을 이야기 하며 독일의 철학은 이성적(주의주의/主意主義)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독일은 외계인을 고문했다는 소문이 들릴정도로 과학이 발달하였으며, 독일국민성은 대체로 정직하고 강하다고 말했다. 어렸을때 부친이 독일병정처럼 지독한 놈이라는 비난을 하는 것을 들은적이 있는데, 그마저 이성적인 독일철학이 바탕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상상도 말했다. 시민혁명이 일어난 영국과 프랑스, 미국도 자유주의철학이 발달한 국가지만 일본과 한국은 그런 철학들이 없는 문제가 있다는 말도 했다. 

강력한 수직적사회에서 개인철학의 싹이 틀 수 없는 일본은 그렇다고 해도 한국은 조선시대의 찬란했던 문화와 철학은 계급사회에서 일반백성이 누리지 못하는 문제가 있는데다 일제시대의 문화적인 억압과 한민족의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기술교육정도만 받은탓에 해방이 되고나서 이데올로기에 흠뻑 빠진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개돼지란 욕을 먹고서 이불을 뻥뻥 걷어차고 잠을 못이루는 이유는 나에게도 반성할 점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도대체 인간으로서 왜(why)살아야 하는지, 어떻게(how)살아야 하는지 끊임없이 의문을 품지못하고 사는 틈새에 맹목적인 이념과 맹목적인 종교가 틈새시장을 공략한 것은 당연한듯 싶다. 만약에 말이다 만약에 남 보다 더 많은 것은 갖고 남보다 더 잘 먹고 잘 살아서 1%가 되는 것이 인생철학이라면 그 정도의 철학은 개돼지도 갖고 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철학이 있는 동물들의 고기도 먹어서는 안될것 같다. 그런줄 알고서 내 자신은 일찌기 채식중심의 식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익살스러운 생각이 든다. 

2016년 7월 13일 수요일

존경보다는 존중

수직적 권력관계는 여러가지 변형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특히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싸움을 통해서 상대방의 우위에 서고자 하는 움직임은 일반대중들이 잘 모르는 경우가 있는데, 섬세한 내면의 세계를 통찰하는 사람들은 그런 에너지 싸움을 민감하게 인식하기도 하는듯 하다.

언젠가 서술한 적이 있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의 정권획득의 성공요인은 그 전에 보안사령관 역할을 하면서 정보의 비대칭현상(한쪽이 상대의 정보를 알지 못하고 어느 한 쪽만 상대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는 경우)을 적절히 학습하여 이용할 수 있는데 근거한다고 할 수 있겠다. 한 번은 이념과 관련하여 종교집단이나 정치집단이 개인을 포섭하는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서 다수와 에너지 싸움을 한 적이 있는데, 개인이 집단을 극복하기란 그리 쉬운일이 아님을 깨닫고는 권력을 갖는 이가 종교집단이나 이념집단의 원조를 간절히 기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인식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한 번은 직장내의 수직관계를 참다못해서 버럭 화를 낸 적이 있는데, 입바른 신앙인이 와서 화를 내시면 존경을 못받는다고 한 마디하였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밉다고 하는 말이 이런걸 두고 하는 말이었던가 싶다. 그이는 각자가 존중을 받게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지 내가 존경받는게 목적이 아니었다는게 내 의도라는 생각까지 미치지 못했던것 같다. 피식 웃고 말았지만 신앙의 독선적인 태도로 말이 바른 이들에 대해서는 조금더 마음을 비워볼 것을 권유하였고 적극적으로 무엇을 가질려고 하지말고 소극적으로 남에게 피해주는 간섭을 하지 않는 것이 바른 길이라는 사실을 에둘러 표현하기도 하였던것 같다.  

2016년 7월 10일 일요일

섬나라의 보수성

지리적 섬나라인 영국과 일본이 보수적인 분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헤매는것처럼 강대국 사이에서 헤매다 이념논쟁이나 벌이고 있는 관계적 섬나라인 한반도에서도 보수적인 분위기를 벗어나지 못하는듯 하다. 요즘 들어서 한국의 정부여당쪽에서도 중도실용으로 가자는 여론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은 그나마 실날같은 희망이 있는듯 하다. 보수성에 너무 시달렸던것 같다. 더구나 미래지향적인 자신이 없는 정부는 민간인 사찰등을 통해서 사회분위기를 억압하는 성향이 있는데, 어떤 간이 배밖으로 나온 인간은 그런 정부를 처절하고 불쌍하게 생각을 하는것 같았다. 그런 곳에서 살아가는 자신도 미래가 없으니까 그랬을것 같다.

언젠가 나를 이겨보겠다고 공안기관과 연계하여 나를 사찰하는 지인이 있었는데, 알고 있으면서도 오랫동안 사이좋게 지냈다. 이유는 기백이 없이 심신이 고달픈 지인이 너무 불쌍했던거다. 그것도 모르고 나에게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거냐고 묻더라 그래서 막 웃었다. 미래가 없기는 네놈이나 나나 대한민국이나 마찬가진데 내가 누구를 탓하겠느냐 싶었다. 그대로 가면 조로(早老)할테니 같이 운동이나 하자고 설득하였다.

늙어도 정의로운 꿈을 꾸는 자는 늙은게 아니다. 노인이 되면 편하게 살겠다고 안주하는 성향이 있는데, 그런 삶 자체가 무위의 고통일수가 있는듯 하다. 국가와 사회도 마찬가지인듯 하다. 

2016년 7월 9일 토요일

인본주의와 박애주의 교육의 필요성

18세기를 분기점으로 그 이전의 유럽에서는 신 중심의 종교적인 세계에 대한 개혁이나 이성적인 자각에 의해서 인본주의 교육이 중시되었고, 이후에는 루소와 페스탈로찌의 영향을 받아 박애주의교육이 중시되었다. 인본주의교육의 목표는 어린이에게 동물성보다 인본성을 도야하는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박애주의는 인본주의보다는 협동과 사회성, 또는 건강한 시민으로 양성하는 교육에 중점을 두고 있는듯 하다. 교육학의 학문적인 세계에서 니트함머같은 인본주의 교육학자는 인본주의와 박애주의를 대립관계로 보고 있지만 어떤 국가의 교육적인 분위기에서는 두가지 교육 사상이 절실히 필요한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이념을 중시하는 국가들은, 그 이념이 사회주의던 자본주의던 간에 인본주의와 박애주의 교육이 탄생하기 이전의 세계에서 인간의 가치를 소홀하게 생각했던 시절로 되돌아가게끔 만든 것 같다. 이념과 실용적인 경쟁에 집중된 교육이 어떤 결과를 보이는지 확실한 증거가 북한과 한국에서 보이는듯 하다. 특히 한국교육부의 고위관료가 민중을 개와 돼지로 표현할 정도면 우리 교육의 실상에 대해서 어떤 증거를 보여주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미 사회자체가 이념적으로 응집되어 교육사상이 망실된 북한처럼 한국의 엘리트들 사이에서 권력지향적인 생각, 자신과 민중은 다른 존재로서 민중을 평가할 수 있다는 비협력적인 사고가 만연되어 있을 수 있다는 문제인듯 하다.

인간은 없고 신만 있던 그 시절처럼, 인간은 없고 이념(더 세부적으로는 권력욕이나 경쟁심)만 있는 시절에 살고 있는 느낌이다. 이념이 신을 대신하는듯 하다. 

2016년 7월 8일 금요일

관점이 생기는 곳

기분이 아주 나쁠때 나쁜 관점이 생기고 세상이 부정적으로 보이는듯 하다. 특히 욕심은 하늘을 찌르는데, 충족이 안되면 부족하거나 약한이들을 보면 가슴이 미어지기보다 내 자신을 들러싸고 나를 궁지에 몰아넣는 나쁜 환경의 일부로 보이기도 하는듯 하다. 그래서 좋은 관점을 갖기 위해서는 자신의 '쾌적함'이 반드시 필요한듯 하다. 생각해보면 내 자신은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릴때 세상의 모든 것이 나쁘게 보이는 경험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나를 구원해준 것은 청소년들과 함께 있던 시간들, 공장근로자로 있던 시간, 운동을 하던 시간등이었던것 같다. 행복할려고 하는것 보다 마음을 비울 수 있는 환경이 좋은 관점을 갖게 했던것 같다.

어느 고급공무원이 민중은 개, 돼지라고 발언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성악설에 근거한 군주적인 지배를 찬양하는 사상가들, 마키아벨리나 홉스등은 당시에 무엇인가 몹시 시달리던 환경에 놓여 있었던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마키아벨리는 몰락한 귀족가문의 문재(文才)로서 당시 역사적인 환경이, 고향인 베네치아가 외부의 영향력과 침공에 매우 시달렸다고 한다. 가끔 북한의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건강관리를 잘 했으면 하는 생각을 하는데, 친북적인 이적 발언을 하는게 아니다. 군주와 같은 정치지도자가  건강이 나쁘면 부정적인 관점이 생기고, 얼마나 많은 북한 인민이 나쁜 영향력에 시달려서 고통을 받을까 하는 우려때문이다. 

2016년 7월 5일 화요일

검사동일체의 원칙과 검사의 죽음

한국의 모든 조직들이 효율성있는 수평체제로 개혁될때 가장 늦게 개혁되는 조직은 법원과 검찰일 것이다. 특히 검찰은 검사동일체원칙에 의해서 상명하복이 엄격하다. 꽤 오랫동안 검사는 영감님이라고 불리는 권력기관으로서 권력자체가 직업의 보람이었던 것 같다. 우리들 세대에서는 그런 매력때문에 열심히 법공부를 했다. 힘들고 억울한 일이 있어도 두고보자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공부하는 사람도 많았을것 같다. 나 자신도 어느 정도 그랬으니까. 그리고 그러다가 열이 올라 실패를 했으니까. 일단 법조인력이 되면 다시 변할 수 있는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을 것 같다. '그 세계'의 동일성은 심각할 정도로 강한것 같다.

한국에서 선배검사의 횡포로 후배검사가 자살한 사건이 생겼다. 진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밖에서 보는 세상과 막상 법조인력이 되고나서 보는 세상에 젊은 검사들은 많이 좌절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의 검찰은 기소권뿐만 아니라 수사권까지 가지고 있는 강력한 조직이다. 게다가 판덱텐체계인 독일법을 계수한 일본법을 받아들인 한국법조계라서 그런지 매우 보수적이고 권력과 계급지향적인듯 하다. 일본에서는 사회인습이라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지만 한국사람들은 성향이 좀 다른듯 하다. 더구나 신세대들은 더 수평적인 체제를 기대하고 있는듯 하다. 그런 괴리감이 검찰조직에서 표현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30대 초반의 검사는 자신이 왜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선배에게 폭력과 폭언을 당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입장이고, 중년의 선배는 우리때는 시키면 시키는데로 복종했는데,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입장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동양, 특히 일본은 근대화를 먼저 시작했지만 수직적 사회시스템을 교정하지 못한 관계로 낭패를 본것 같은데, 앞으로 한국도 비숫한 고민을 할것 같다. 이 사건은 권력적이고 수직적인 기성세대와 자유분방하고 수평적인 신세대의 갈등으로 보인다.  

2016년 7월 2일 토요일

영국과 한국의 브랙시트

일본이 보수성을 띈 사회분위기때문에 서서히 퇴보해가더니 영국이 결국 분열을 일으켰다. 스코틀랜드와 웨일즈, 북아일랜드는 잉글랜드의 보수적분위기에 반기를 드는것 같다. 전체적인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 대영제국의 패권적인 전통에 소외된 탓인것 같다. 그런데 런던의 투표결과는 잉글랜드 이외의 투표결과와 같다고 하는데, 지역적인 갈등보다는 진보와 보수의 갈등으로 해석하는게 적절할 것 같다. 더 깊이 생각해보면 신세대와 기성세대의 갈등으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투표결과가 지역적인 스펙트럼이 분명하고 수도권이 진보적인 한국과 비숫한 성향을 갖는듯 하다.

사회적인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는 과거지향적 사회는 분열된다는 교훈을 보여주는듯 하다. 사실 한반도가 통일이 안되는 이유는 과거 지향적인 이념때문인듯 하다. 지독한 북한의 그것과 어느 정도의 한국의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해가지지않는 대국을 건설해본 영국과는 달리 한반도는 과거를 그리워할 이유가 전혀 없는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