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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 30일 토요일

보편적 정의의 부재가 낳은 불완전 정치시장


아직은 언론의 자유가 완전하게 보장받는다고 할 수 없는 분위기라서 그런지 정신적인 자유를 위해서라도 직업을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을 만날수 있었는데, 한국에서 유권자로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뿐 아니라 경제부문에서도 중요한 위상을 가진 많은 평범한 다수를 만나보곤 한다.

종교의 4대 종파가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고 나섰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이념문제가 발단이 된 사건에서 종교의 정치적 참여가 시사하는 의미는 생각보다 큰 것 같다. 건강하지 못한 사회에서 두 관념의 지나친 충돌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낳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념이 진리로 포장되어 한반도 민중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던것 만큼,의견이 다른 종교도 국정원의 선거개입사건에 대해서는 '진리는 하나'라는 진리를 보여주고 있는듯 하다. 그러나 때로는 종파간에 대립하기도 하고, 같은 종교 안에서 대립을 하는 종교가 국정문제에 관해서 국민의 의견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을만큼 위상이 있다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정치적인 피드백이 오가는 시장은 정보의 불균형상태가 심각한듯 하다. 말하자면 경제생활을 하고, 2세를 부양하는 평범한 생활인의 세계는 생각보다 이념이나 종교로부터 자유로운것 같다. 부정적인 표현을 하자면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에게 정치적, 종교적인 정보를 수용할 수 있는 여유가 없다고 표현하는것이 옳은듯 하다.

내 자신도 느끼지만 한 편으로는 정치적 관심이란 '한량과 같은 여유로움' 속에서만이 지속될 수 있다는것을 깨닫고는 이념적이거나 종교적으로 시민들의 정신세계를 전체적으로 지배할려는 자들에 대하여 비난하고 싶은 감정이 생기는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정치적인 시장도 자유경제시장과 마찬가지로 완전경쟁시장이 진리이고 독점이나 과점같은 불완전경쟁시장은 존재하지만 개선되어야 할 문제점인것 같다. 어째서 좌파 이념에 몰입하지도 않고 우파 이념에 몰입하지도 않으며 종교라는것을 더 풍요롭고 안정된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방식이나 지향해야 할 목적으로 생각하는 생활에 바쁜시민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정치적인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방식이 부족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파가 연합하여 기업과 재벌을 위해서 힘쓰고, 좌파가 연합하여 귀족노조를 만든다고 하기도 하고, 종교인이 연합하여 자신들이 추구하는 세상을 만들어 줄 정치인을 지원하기도 하는데, 소상공인, 자영업자, 비정규직 근로자등의, 이념과 종교적인 연합으로부터 소외된 시민들의 의사는 누가 대변하고 있었던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내 자신을 비롯한 한국의 소시민들에게는 정치적인 이념과 종교적인 이념의 대립은 천상(天上)에서 싸우는 신들의 전쟁으로 비유될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이런 국가적인 방황은 시민들에게 보편적인 정의를 정립시켜주지 못한데서 원인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2013년 11월 23일 토요일

광고와 정치이념 / 알튀세르


소금과 쌀은 광고를 하지 않는다. 수요의 탄력성이 수직에 가까울 정도로 작은 생필품이기 때문에 광고를 한들 수요량이 늘지 않는다. 그러나 수요의 탄력성이 수평에 가까운 사치품은 광고가 필요하다.

프랑스의 마르크스철학자인 알튀세르(Louis Althusser 1918 ~ 1990)는 정치는 국가권력의 유지를 위하여 정신적인 조작인 이데올로기를 사용한다고 말한다. 이데올로기를 통한 국가조작은 반드시 정치영역을 통하여서만 나타나는것이 아니라 스포츠를 통한 쇼비니즘의 앙양, 종교의 설교, 학교교육을 통하여서도 나타난다고 말한다.

마르크스주의의 무정부적인 성향을 저변에 깔고 있는 알튀세르의 의견이지만 사실상 자유주의 국가의 일상경제생활속에 이데올로기적인 억압이 깔려 있는것을 부정할수는 없다고 할것같다. 때로는 그것들이 긍정적인 작용을 하기도 하는데, 지금의 중년세대들이 어렸을때부터 보고 들은 흑백티브이 드라마의 풍요로운 모습은 이미지로 장치되어 경제적 풍요속으로 국민을 인도한 공로는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광고가 일상화 되어있는 경제부문과는 달리 광고가 필요없는 정치분야에서도 광고가 많은데, 공익광고와 같이 필요한 광고, 비젼만 담긴 전시적인 정책광고도 있고, 이데올로기적 성향이 담긴 국민교육도 광고와 같은 것으로 국민의 정신을 선도하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미지정치와 전시정치의 폐해는 이미 북한정부와 한국의 이전 정부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켰거나 심각한 문제를 진행시키고 있는듯 하다.

국민생활이란 생필품과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광고가 필요없을 정도로 수요의 탄력성이 아주 작은 상품인듯 하다. 그런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의제들이 이념장치에 의해서 광고되어서는 안될듯 하다.정치적 결정이 좀 더 합리적인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할것같다.

2013년 11월 16일 토요일

한반도 경제의 비정상적인 포토폴리오 / 토빈


정치란 이익의 배분과정이며, 이익은 경제부문으로부터 비롯되고 경제는 기업, 공공부문,가계가 순환시키는것이 아니고 개인이 순환시키는것이며, 결국 경제부문에서 개인의 후생을 증진시키는것이 정치의 최종목표중의 중요한 목표가 아닌가 싶다.

민간부문이 전무(全無)한 북한의 경제구조가 논할 가치도 없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현상은 말할것도 없고, 일찌기 저성장경제구조로 접어든 일본, 특히 일본과 같은 수준의 경제성장을 경험해보지 못하고 이른 저성장 시대를 맞이한 한국의 경제를 보면 정치가 국민 개인의 후생을 증진시키는데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표상으로는 경제가 성장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체감경제는 전혀 나아지지 않고 있는 점을 보면 경제의 목표는 국가의 부를 증진시키는데 있는것이 아니라 개인의 부를 증진시키는데 있다는 점을 잊은것도  경제성장이 가져다 주는 의미를 왜곡시키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자전거도로가 한강변으로 쭉쭉 뻗어나가던 어느 날, 경기도의 어느 중소기업단지로 차를 몰고 가고 있었다. 수동기어변속이 힘든 고개마루를 넘어서 뒤를 쫒는 거대한 컨테이너차의 눈치를 살피며 좁은 이차선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파손된 도로와 과속방지턱을 뛰어 넘으며 옛날 나환자촌으로 격리가 되어있던 지역을 중소기업단지로 만들었다는 삭막한 골짜기를 지나면서 한국에서 '생산'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를 생각하기도 하고, 중소기업의 생산현장이나 대기업 생산의 밑바탕인 협력업체의 생산현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대기업에 비해서 중소기업의 생산기능이 한국보다 우월한 나라다 그럼에도 일찍이 해외에 생산공장을 설치한 대기업이나 저부가가치산업의 해외이전으로 산업공동화현상이 벌어져서 높은 실업률과 저성장, 국가의 부(富)에 불구하고 가난한 국민으로 표현되는 경제왜곡현상이 벌어지고 있기도 하다.

미국의 경제학자 토빈(James Tobin 1918 ~ 2002)은 불확실한 상황하에서 사람들은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채권과 현금등에 분산투자를 하는 포토폴리오를 구성한다고 한다. 1981년 스웨덴 한림원이 금융시장의 포토폴리오 이론에 기여한 공로와 금융적 변수가 지출과 고용생산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분석한 공로로 노벨상을 수여했다. 그 장소에서 기자들이 포토폴리오 이론에 대해서 쉽게 설명해달라고 하자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고 표현한 말은 유명하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으면 떨어뜨릴경우 모두 깨어져서 큰 손실을 보기 때문에 한 곳에 집중된 투자의 문제를 표현하는 대명사처럼 여겨지고 있다.

생산 부문에 있어도 마찬가지인듯 싶다. 지속적인 대기업 육성정책의 문제점이라고 표현하면 대기업의 대규모 경제의 원칙과 끊임없는 리노베이션을 바탕으로 한 수익창출과 경제에 공헌한 공로를 폄하하는 표현이 될 수 있기에 중소기업육성에 소홀한 문제점을 토로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중소기업의 육성은 산업공동화 현상등으로 국부(國富), 엄밀히 따지면 국민 개개인의 부를 해외로 이전하지 않고서도 실물경제와 체감경제를 증진시켜 국민 개개인의 후생에 직접으로 기여하는 면이 있고, 대기업 위주의 성장이 가져다 주는 위험을 분산시킬수 있는 방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일찌기 성장과 분배문제의 이슈가 우파와 좌파라는 이념적인 이슈로 표현되어 온 한국에서는 좀 더 일찍이 중소기업과 생산부문의 문제점과 해결책이 수렴되기 힘든 상황을 겪었는데, 이런 문제가 일본보다 훨씬 빠르게 한국을 저성장 시대로 접어들게 한 이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념문제는 한반도에서 큰 아주 큰 폐악인듯 싶다. 중소기업을 살리자고 하면 대기업을 공격하는 의견으로 왜곡되고, 중소기업이나 대기업 협력업체의 생산직들의 고충을 토로하면 모든 고민을 중소기업이나 대기업이 책임져야 할 문제로 왜곡되기도 한다.

근본을 살펴보면 창조경제를 위한 자세란, 어떻게 하면 개개인이 모인 전체국민의 후생을 증진 시키기위해 블루오션적인 관점으로 문제의 해결책을 찾을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2013년 11월 9일 토요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저성장의 시작


언젠가 직장을 얻기위해 중소기업에 인터뷰를 하러갔다. 대표이사가 팔순의 노익장을 과시하며 현역에서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모습에 존경심이 생겼다. 부지런히 일하고 절약하며 자본을 축적하여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최고로 이끌어 온 세대들의 업적은 지금의 젊은 세대들의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내 자신의 존경심과는 달리 다른 젊은 임원의 나에 대한 적극적인 호의감에도 불구하고 대표이사와의 인터뷰는 나의 업무능력 보다는 나의 신변이나 가족사에 대한 이야기로 샛길로 서서히 어긋나기 시작했다. 정작 회사를 일구던 시절의 패기와는 달리 늙고 병들어가는 심신에 대해서 외롭고 아쉬운 여운이 남는 감정이 엿보였다. 작지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생기발랄한(아니면 생기 발랄할려고 애쓰는) 태도와 속도감있는 가치관을 가진 가난한 신입사원과 늙어가는 대표이사의 관심사는 고령화가 깊어가는 한국사회의 부조화한 모습을 대변하는듯 하였다.

한국의 중장년 이상의 새대들은 열심히 일을 하고 절약하여 저축하며 자본을 축적하고, 자식을 교육시켜 인적자본을 형성하는데 공헌을 하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대통령 선거에 즈음하여 노소(老少)간의 갈등이 표면화 될뻔한 일을 생각해보면 중대한 문제를 이념적 관점이 왜곡시키는 현상이 꽤나 깊은 그늘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해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적극유입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올린 바가 있다. 외국인 노동자가 '일해서 생산하는 문제'만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것 같다.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에서 받은 적지 않은 임금이 본국으로 송금되어 소비되고, 승수효과를 일으켜 해외 경제성장에 크게 공헌하는 문제는 한국의 경제성장에 도움이 안되는 결과를 가져올수도 있을것 같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유입으로 국내총생산(GDP)은 비약적으로 증가하겠지만 국민총생산(GNP)은 증가할 수 없는 결과가 생길수가 있을것 같다.

한국인의 근면한 기질과는 성질이 다른 외국인들의 대량 유입은 한국의 고성장시기에 공헌했던 노동성과들을 이루어낼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극단적으로 외국인 노동자들의 정치세력화로 결코 저임금일 수 없는 사태까지 온다면 적극적인 외국인 노동자유입정책이 바람직한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기업적인 관점은 이윤추구가 목적이기 때문에 삼성경제연구소의 기업적 관점은 국민의 통합적 관점을 대변해야 하는 정부의 관점이랑 많이 다를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더 아쉬운 것은 언어가 같은 북한 주민들의 노동력을 사용할 수 있는 방안은 북한 정부의 지극히 보수적이고 경직된 태도와 그에 대칭되는(대칭될 수밖에 없는) 한국의 보수적인 여론에 힘입어 전혀 논의되지 않는듯 한 현실이 아쉽다. 있는 새터민들 조차도 한국사회에 적응을 못하고 건전한 일자리를 찾아가지 못하는 현실은 한국의 장기적인 노동정책이 부재(不在)하다는 생각이 든다.

좀 더 일찍 복지정책이 이루어져 국내의 출산률을 높일 수 있었다면, 좀 더 일찍 남북한간의 경제교류가 이루어져 노동지향산업에 북한인력들을 사용할 수 있었더라면 하지않았을 국가적 고민들이 많았을것 같다.

노인이 되면 미래보다는 과거를 더 많이 생각하는 기질적인 성향이 생긴다고 한다. 개인의 이런 기질들이 모여서 국가의 기질을 이룬다고 생각해 봤을때, 한국의 미래, 특히 한국의 미래 경제성장에 관한 문제를 크게 고민해봐야 할 필요가 있는듯 하다. 외국인 노동자유입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글인듯 하지만 결코 그런것은 아니다. 출산률증대나 북한 노동력 사용등 다른 정책들을 애써 고려해보지 않고, 쉽고 편안한 결론으로 외국인 노동력을 생각하는 정책에 대해서 아쉬운 의견인듯 하다.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서 적대적일 필요도 없고, 적극적인 유입을 생각할 필요도 없으며 가까운 현실부터 개선하는것이 순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보수와 진보, 한국과 북한,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는 노장과 소장의 대립의 내란으로 혼란한 틈을 타서 덜컥 외부세력의 유입을 자발적으로 유도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비약해보기도 한다.


2013년 11월 3일 일요일

상상력이 넘쳐나는 한국적 사회가치 / 아론 벡


타고난 팔자인지 개선을 촉구하기위해 주어진 숙명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변에 머리좋고 상상력이 발달한 사람이 많은 편이다. 현실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일들을 말과 글로써 사실로 변환시키는 능력은 타고난것일수도 있지만 얕은 철학적 사고의 탓일수도 있고, 종교적 상상력이나 문리적(文理的)인 상상력이 오랜기간 연습되어 온 탓이기도 한것 같다.

전통적 한국사회에서 통용되던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전통의 잔상일수도 있겠고, 이과(理科)와 문과(文科)로 나뉘어진 교육체계에서 문과 지원자가 많고, 사회의 중요한 가치를 배분하는 역할을 하는 정치시스템내에서도 이과 출신이 전무(全無)해 보이는 현실은 한국적 사회가치가 좀 더 대중적이며 중심이 없이 흔들리는 현상에 조력을 하고 있는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의지력이 수반되는 상상력은 창조성과 연계되어 긍정적인 사회가치를 생산하지만 의지력이 수반되지 않는 상상력은 말과 글의 조력을 받아 실속없고 허구와 모순에 가득찬 세상을 만들기도 하는것 같다. 특히 끊임없이 이념문제가 사회가치에 개입하는 한국적인 현실은 경이로울 지경인데, 공(公)과 민(民)이 어우러져 거대한 사기극에 휘말려 있는듯 한 느낌을 지울수가 없는듯 하다.

미국의 정신의학자 아론 벡(Aaron T. Beck 1921~)은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만의 고유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틀을 발달시키게 되는데, 그것을 인지도식이라 하였다. 이러한 인지도식은 부정적이고 역기능적임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고 논리적으로 보이는것이 문제라고 한다. 사람들이 이런 생각에 집착함으로써 우울한 기분, 행동장애, 비생산적인 사고, 비합리적인 사고등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데, 이런 생각들은 생각하는 당사자(심해지면 환자) 본인에게는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사고로 생각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런 문제를 치료하기 위해서 아론 벡은 환자의 비합리적 사고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긍정적인 사고를 대안으로 내놓아서 설득시킬것이 아니고, 환자 스스로의 경험과 이성에 의해서 사고의 타당성과 유용성을 평가하고 개선을 시키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가끔은 한국적인 상상력들이 말과 글의 조력을 얻어서 비합리적이고 타당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주된 사회가치의 대접을 받으며 쉽게 개선되지 않는 현상을 보는데,내 자신의 개인사(個人事)에서도 그런 문제되는 사고를 가진 지인(知人)들때문에 고난을 치룬적이 많았지만 무엇보다 큰 문제는 이념과 같이 주된 사회가치로 자리잡아 누구도 치료에 손댈 수 없는 상태로 방치되는것은 문제가 심각한듯 하다.

이미 국가적인 사회가치가 되어 객관적으로 인지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 치유도 불가능해져서 어떤 종국적 결말을 보기 위해서는  짧게는 수십년, 길게는 백여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북한 사회에서도 볼 수 있지만 대칭적인 흐름을 유지하는 한국사회에서도 만만치 않은 문제로 방치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유의 학습


어느 날 어떤 방치된 농가에 차려놓은 초라한 가구공장을 보았다. 외국인 노동자 몇명이 철골재료를 용접하고 있었고, 서글서글하게 생긴 일본인 사장이 함께 일하고 있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한국보다 창업환경이나 고용환경이 안정된 일본을 떠나서 한국에서도 3D직종에 해당하는 분야에서 창업을 한 일본인 사장의 밝게 웃는 모습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안정된 환경일수록 가진 바탕이 없는 사람이 창업하기가 힘들었던 것일까. 아니면 가끔 바람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어서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기를 반복하면서 떠돌고 있는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한국에 온 새터민들중에는 고난의 행군시기에 지역주민의 30퍼센트가 사라졌다는 곳에서 탈북한 사람조차 한국에서의 생활이 오래되자 돈으로 시작되고 돈으로 끝을 맺는 자유시장경제의 메카니즘에 적응을 하지못하는 경우를 본것같다. 심지어는 한국에 정착하지 못하고 다시 북한으로 들어가는, 북한의 실상을 잘 아는 한국인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빈번하게 일어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직업교육 못지않게 자유주의 시장경제에서 살아갈 수 있는 가치관과 생활방식의 학습이 많이 필요했던것 같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유시장경제의 생활방식에 익숙한 일본인 사장과 갑자기 변한 환경을 맞이한 새터민은 한국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생각들을 학습한 '분량'에 있어서 비교할 바가 아닌것 같다.

자유를 능동적으로 활용할수 있는 방법을 잃어버린 새터민들의 고민은 언젠가는 통일이 될 가능성이 한층 깊어졌을때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중대한 사회문제가 될 가능성이 있을것 같다. 그런 문제는 북한주민들만의 문제가 아닌듯 하다. 한국사회가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개인적인 실업상태가 계속됨으로서 능동적으로 사회경제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는 문제를 개인에게만 책임지울 일도 아닌듯 하다.

기회가 주어지는 나라에서 만들어 준 일본인 사장의 자신감과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나라에서 만들어 준 새터민의 좌절감이 극명하게 다름을 느끼며 겨울을 앞두고 낙엽이 스산한 거리를 위축된 모습으로 걸어가는 초라한 한국인이 눈에 띄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