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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31일 일요일

신을 믿는 신들

간혹 한국이나 외국의 거물정치인들이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듯 하면서도 이념이나 종교 아니면 자신이 살아왔던 경험에서 얻어낸 어떤 신념들을 맹목적으로 고수하는 것을 본다. 상황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자기 중심의 생각으로 국민을 응집시키기 위해서 폭압적이거나 교활한 수단도 심심치 않게 사용한다. 사실 근본적인 문제는 자아가 약한 정치지도자가 국민과 일체감을 가지지 못하고 국민과 자신을 갈등관계로 가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게 무엇인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몇일전 박전대통령이 구치소에서 읽는 [바람의 파이터]까지 문제삼았지만 과거부터 주욱 자신의 주관과 생각의 유연함을 만들 수 있는 기본적인 교양보다도 무엇인가 자꾸 의존할려는 속성에 강한 불만을 느껴왔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편이 어느쪽이냐를 문제삼기 이전에 나는 꾸준히 공리적인 남북한 정치지도자들의 마음을 기원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누가 정치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고  남북한을 협력하게 하거나 새로운 도약의 실마리를 찾아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은 강한 사람일까. 국민들이 신처럼 숭배하는 자격을 갖춘 사람일까. 하는 의문에 북한민들 말고는 아무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간간히 얻어내는 자료를 종합해볼때 신처럼 숭배받을 수 있는 어떤 경험이나 자질을 만들어 오지 않은 이유로 쉴새없이 인간적인 고뇌를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점에 있어서는 대칭적이면서도 비숫한 처지에 있었던 한국의 박전대통령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원래 인간이란 누구나 약하다.

신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나 각종 미신, 전기를 꾸며내는 사람은 인간의 약점을 너무 잘 아는거물급 사기꾼이거나 남은 물론 자신까지 속이는 정신이상자다. 그렇기 때문에 기형적인 자기암시와 타인암시를 행한다. 신을 만들어내는 사람과 '신'에게 통제, 조종당하고자 하는 사람은 병적 심리상태를 가진 상호보완 관계에 있다. 이 양자가 만나면 각종 미신이 만연하고 불건전한 부정적 암시가 활개를 치게 된다.

- 바이판의 [Clever Psychology]중에서 -

아마 국민이 정치지도자를 신으로 믿고 그 정치지도자들은 종교와 이념을 신으로 믿는 정신적 먹이사슬의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한편으로 여러기지 상황에서 민중들의 심리상태를 관찰해보는데, 대중은 상대적 박탈감, 욕망, 제대로 된 철학교육의 부재로 인한 열등감, 환상등과 친밀한듯 하다.

2017년 12월 27일 수요일

일본무도 중국무도 / 바람의 파이터

http://news.joins.com/article/22239116

박전대통령이 구치소에서 [바람의 파이터]란 책을 읽고 있다는 기사가 났다. 어릴때 방학기작가의 [타임머신]이란 만화를 재미있게 읽은적이 있고, 한국출신의 일본무도인 최배달 선생의 일대기를 그린 [비림의 파이터]란 만화를 재미있게 읽었던적이 있다. 나중에 방학기작가는 소설로 [바람의 파이터]를 구성해 내놓았는데, 간간히 명상적인 내용을 삽입시켜 책의 내용이 좀 맘에 안들게 되었지만 재미는 있었다.

한때 일본 젊은이들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최배달(최영의)선생이라는 대답을 많이 한 적이 있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한국인 출신인 최배달선생에 대한 일본 젊은이들의 민족적 편견을 이기고 남는 자기극복의지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다. 한때 일본 첩보원학교의 지옥훈련과정과 그 과정을 겪은 인재들이 일본 정계의 주요인사들이 된 일본의 성향이 부러워 모방해보기도 한 경험이 있는데, 극의(克意)에 대한 일본인들의 사랑은 유별난듯 하다. 아마 사무라이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는듯 하다.

[바람의 파이터]의 내용중에 최배달 선생이 태극권의 대가인 중국의 진노인이랑 겨루는 장면이 나온다. 태극권은 기(energy)를 사용하는 무술의 일종인데, 중국인들에게는 선도(禪道 또는 仙道)의 한 방편이자 건강을 위한 수단으로서 사랑받는 무술이기도 하다. 한때 검도를 하면서 태극권을 잠시 수련해봤는데, 곡선을 사용하는 부드러운 무술의 특성은 좋지만 가장 싫어하는 부분, 종교적 몽상과 결부된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 위험이 있는듯 해서 그만두었다.

일본무도는 당기는 성질의 굴근(詘筋)을 많이 사용하고 중국무술은 내뻗는 성질의 신근(伸筋)을 많이 사용한다. 한때 이어령 교수의 [축소지향형의 일본인]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었지만 일본무도는 검도와 유도에서 보듯이 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고된 자기단련으로 두려움이 없는 무심(無心)의 세계를 지향한다. 한 편 중국무술은 매우 확산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듯 하다. 한때 [동방불패]라는 중국 문학의 대가인 김용의 무협소설에는 거세하여 초인적인 힘을 얻는다는 내용이 설정되어 있는데, 그냥 금욕하여 무공을 높인다는 내용이 그렇게까지 처절한 방법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몸은 약하고 헬스장 다닐 여건도 안되는 처지에 책만 읽고서 이것 저것 잠시 경험해봤는데, 그냥 수많은 사람사는 세상중의 하나라는 생각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2017년 12월 15일 금요일

군사문화

북한을 이해하기 위해서 무(武)를 이해해야 하고, 무를 이해하기 위해서 사격훈련등을 열심히 하고 있는 중이다. 때로는 한국에서도 군사문화의 잔재가 남아있는 경우를 많이 보는데, 연장자들이 많은 집단에서 젊은 사람들의 충원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군사문화가 주는 심리적인 부담감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군사문화는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성을 양보하는 대신 편리성이 있기 때문에 쉽게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세월이 지나면 다른 방향의 생각을 막아버리는 불통의 도구가 되는 문제점이 있는듯 하다.


브라질 리우올림픽무렵 북한의 체육정책에 참견을 했다가 내 구글블러그를 김정은 위원장의 별장이 있는 북한의 원산에서 방문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스케이트나 사격은 국방체육으로서 북한에서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을 하고 있고, 나는 그 분야에 출중한 실력을 갖출 자세가 언제나 준비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지옥훈련이나 무인(武人)의 자세같은 경직된 생활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고 생활현장에서 그냥 부드럽게 움직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북한은 항일 유격전 국가의 정신적 전통을 이어받았다는 하루키교수의 말이 있었지만  같은 한민족으로서 항일무장투쟁의 정신적인 구속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음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기도 하다. 

근로시간단축문제

몇년전에 꽤 알려진 중기업의 생산현장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입사할때 장비기사(지게차)로 들어갔는데, 지게차기사들이 열흘을 못 버틴다는 악명높은 복잡하고 위험한 현장이라서 나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몸을 움직이지 않고 정신작용으로 하루를 버티는 것이 체질에 맞지않는다고 생각해 생산현장에 자원을 해서 일개미가 되었다.

야간수당 연장수당등이 겹치는 근로의 임금은 괜찮았지만 내가 일을 그만둔 이후 그 회사는 근로자를 구할 수 없어 파견근로회사에 근로자모집대행을 의뢰했다. 수당이 빠진 훨씬 적은 임금과 파견근로회사에 수수료까지 떼어주는 조건으로  8시간 낮근무를 할 근로자를 모집했는데, 금방 근로자가 충원이 되었다. 요즘 근로자들은 임금의 액수보다 근로조건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추측이 사실임이 판명되었다.


현정부는 근로시간단축을 강하게 추진하고 있는데, 꽤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휴일근로에서 수당이 겹치는 문제를 어느 정도 양보하는 입법을 제안한 것은 어느 정도의 교환조건을 내세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떤 조건을 내세우던지 근로시간단축은 시급한 문제인듯 하다. 기업은 단순한 계량적인 계산을 하겠지만 근로현장에서 일어나는 불협화음들은 대체로 근로시간이 과도한탓인 경우가 많다. 근로시간이 길면 근로자들은 비생산적인 갈등을 겪는 경우가 많다. 정신적,신체적인 피로나 자괴감등으로 이직률이 높아진다. 새로 충원된 근로자들을 숙련된 인력으로 교육을 시키는 비용도 계산을 해야하며 생산물인 재화와 용역의 품질문제도 생각을 해봐야 한다. 생산물의 품질에 클레임이 걸려오는 경우 대부분 피로에 지친 근로자들의 실수로 비롯되는 경우가 많았던것 같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기때문에 여유로운 집중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어디에서도 예외가 아닌듯 하다.

그 전에 하루 8시간 주 5일근로가 확실하게 지켜지나 임금은 대체로 만족스럽지 못한 근로현장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누구나 꽤 오래 일했던것 같다. 그리고 분위기도 좋았고, 무엇보다 근로자들은 일은 충실하게 하고 여가활동이나 가정생활에 충실했던 것 같다. 아마 통계를 내보면 적은 근로시간으로 장기간 근로하는 근로자의 재직시간(在職時間)이 많은 근로시간으로 금방 이직하는 근로자의 재직시간보다 월등하게 많을듯 하다. 

2017년 12월 2일 토요일

인간적 가치와 시장 / 마이클 센델

몇년전 뭔가 그래도 사회에서 대접받는 일들을 할 수 있는 여력이 없는 것도 아니었던것 같다. 반골기질이 있어서 그런지 젊음이 감당해낼 수 있는 여력이 있을때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이 가보지 않아서 이해할 수 없는 곳을 돌아보겠다는 이유로 열심히 일을 하고, 열심히 기업을 운영하고자 하나 한국사회에서는 침묵을 지키는 비주류의 세계에 발을 디뎠다.

지금까지 겪었던 일을 생각하건데, 한국은 죽을 힘을 다해서 일을 하는 사람들과 죽일 힘을 다해서 우월적 지위를 찾는 사람들로 양분되어 있는것 같았다. 구세대들, 종교적인 사람들, 이념적인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일반적인 도덕성을 초월한 신념으로 순종과 권위의 세계를 언제든지 오고갈 수 있는 수직적 삶에 익숙해 있었다.

저번글에서 아웃사이더가 된 부친을 따라서 아웃사이더가 되어가는 내 자신을 서술한 적이 있는데, 부친이 세상을 떠날 무렵 근처에 비숫한 처지의 노인분이 있었다. 자식을 세명이나 두고서 혼자서 투병생활을 하다가 얼마 안되어 세상을 떠났다. 아직도 그 노인분이 하신 말씀이 생생이 기억 나는데, 자식들이 생업에 바빠서 아무도 오지 않으니 내가 직장을 안다니고 있는 것이 내 부친에게 복이라고 말하였다. 그렇다. 삶에 있어서 옳은 것을 한꺼번에 선택하기란 힘겨운 것이다. 트럭운전을 하고 있다는 그 노인분의 귀여운 막내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자신의 바쁜 처지를 평생 비관하며 살 것 같았다.

시장경제가 냉정하게 지켜진다면 도덕성이 지켜질 수 없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내가 겪은 근로의 현장에서 시장논리에 의해서 인간의 가치는 기계적 장치 이상이 아니었던 것 같다. 말로 형언할 수 없이 힘든 삶들을 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서 조금이라도 우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그 우월성을 타인을 지배하는데 성의껏 사용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지금의 고통을 벗어나리라는 생각을 한다면 분명히 벗어나고 나서부터는 타인의 삶을 지배할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그 사람의 가치는 그런 세계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시장경제에서 나타나는 권력지향성, 부패등은 자율적인 인간들이 가진 속성이 아니고 노예들이 가진 습성이었던 것이다. 아마 얼마전 고위 교육 관료가 국민을 개, 돼지로 비유한 것은 그런 속성들을 비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한 개 돼지로서 자신이 그런 말을 할 처지는 아니지만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악의에 찬 정치판이 도덕적 신념이 범람한다고 말한다. 너무 많은 사람이 자기 신념을 지나치게 굳건하고 요란하게 믿으며 타인에게 그 신념을 강요하고 싶어한다는 뜻이다. 이는 우리가 맞이한 곤경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 현대 정치는 도덕적 논쟁이 지나치게 많아서가 아니라 지나치게 적어서 문제다. 오늘날 정치판은 도덕적 정신적 내용이 거의 비어 있기 때문에 과열되어 있다. 또한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중대한 질문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현대 정치에서 도덕적 부재를 나타내는 증거는 많다. 한 가지는 공적 담론에서 좋은 삶에 대한 개념을 추방할려는 시도다. 우리는 종종 당파분쟁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서, 시민이 공공의 장에 들어오면 자신의 도덕적, 정신적 신념을 접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의도가 좋더라도 좋은 삶에 관한 논의를 정치 영역에서 받아들이기를 주저한다면, 시장지상주의로 향하는 동시에 시장논리를 계속 유지하는 길을 닦는 셈이다.

- Michael, j, Sandel 의 [What money can,t buy]중에서 -

특히 한국에서는 인간적 가치에 관한 문제나 도덕적인 문제들이 이념논리의 방해를 받아서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지 않는 동안에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비정규직 차별이 심해졌으며, 하마터면 보수정부가 집권할 당시 최소한의 사회안전망까지도 무너질뻔한 위기를 겪은듯 하다. 시스템보다 중요한 것은 그 시스템을 구성하는 인간이다. 내 글에서는 북한이 항상 등장을 하지만 인간적 가치를 잃어버린 국가가 북한화 되는 것은 시간문제인듯 하다.

오래전 버스 운전을 하다가 겪은 재미없는 일이 있어 다시 생각해보았다. 한 술취한 노인분이 버스를 탔는데, 버스가 출발하니 잡고 있던 손을 놓치고 넘어졌다. 어떻게 저렇게 쉽게 넘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축하여 일으키니 2초도 안되어 "합의를 보자"고 하였다. 결국 조금 있다가 나타난 가족들로부터 별일 아니니 걱정말고 기사님 갈 길을 가시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 노인분의 반응 속도가 신기했다. 그냥 습성이 오래가서 본능으로 자리잡은듯 싶었다.

습성이 오래되어 본능으로 자리잡기전에 인간적 가치에 관한 논의는 이념이나 종교,특히 '돈'에 앞서서 논의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2017년 11월 28일 화요일

도덕성과 종교 / 마이클 센델

한국이 금융위기를 겪을 무렵 내 자신도 가장 패기 넘치던 시절을 가장 암울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 가운데 빛이 있었다. 그 전에 한때 남파공작원을 할 뻔 하다 북파공작원으로 젊은 시절을 보낸 부친은 지나친 정직함과 정(靜)적인 태도로 운수업을 하다가 실패를 하고 가족은 뿔뿔히 흩어져 온갖 비극을 맛보았다. 미군 비행장을 건설하는데, 다른 자동차 소유주들은 미군으로부터 연료를 필요량 이상으로 배급받아 남은 연료를 암시장에 내놓곤 했는데, 나의 부친은 남들이 다 하는 그런일 조차 하지 않아 주변 자동차소유주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곤했다. 인생을 살다보면 유연한 태도가 필요하다는 수단좋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지만 부친은 끝까지 침묵으로 일관했고, 그 가운데 간간히 깊은 마음씀씀이를 보여주곤 했다. 그러던 부친이 세상을 등지고 꼭꼭 숨어버렸다.

어느 날 부친이 큰 병이 났다는 연락이 왔다. 내가 할 일은 치료보다 옆에 있어주는 것 뿐이었다. 한반도 분단의 비극을 안고 떠나는 부친옆에 있으면서 문명과는 거리가 먼 곳이라서 뭐 할게 없을까 고민하던중 6개월동안 일본공작원훈련학교인 나까노학교의 훈련 프로그램을 본따 자기단련을 하고,무예에 관한 책 100여권을 읽으면서 느린 검도와 느린 무예훈련을 했는데, 짧은 시간에 얼마나 고된 훈련을 했는지 부친이 세상을 떠나고 문명세계로 내려올쯤 두리뭉실하던 신체가 체중이 20여킬로가 빠지고 정신이 모아져 시력이 좋아지고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부친이 마지막으로 다녔던 병원은 독일인 수녀가 운영하던 병원이었는데, 부친의 옆에서 잠을 못자고 책을 읽으면서 원장수녀가 잠을 못자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았다. 인간이 이타적인 마음을 지니면 저렇게 잠을 못자도 평화로운 모습을 지닐 수 있다는데 감동 받았다. 몇년동안 그 분의 사진을 가지고 다니면서 마음이 비뚤어지지 않도록 관리하고 카톨릭교회에서 영세도 받았는데, 결국 세속인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얕은 욕망들과 싸우느라 지금까지도 분주하기만 했던것 같다.

당시 나름 깊은 철학적 사고를 한다고 하는 나에게 많은 종교적인 사람들이 접근을 했는데, 대게 종교란 명분으로 욕망이 적절하게 합체된 변형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어서 나중에는 카톨릭교회도 냉담하고 종교랑 거리가 먼 삶을 살게 되었던것 같다. 간간히 무술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크리스찬이라고 엇갈고 크리스찬들에게는 나는 무술인이라고 엇갈았는데, 그냥 공학(工學/ engineering)을 공부하고 싶었다. 종교적 도덕이란 명분으로 이상하게 사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던 탓에 차라리 공학적 몰입으로 인한 부작위(nonintentional)가 최소한의 도덕적 가치를 지킬 수 있겠다 싶었다. 훗날 대통령들을 보면서 내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느꼈다. 도덕성이 결여된 종교는 그냥 욕망의 또 다른 배출구였을 뿐이었던 것 같다.

한 번은 순진한 크리스찬인 친구가 자신이 다니던 교회에서 동성애 반대운동을 하고 있으며 그 문제에 관한 입장좀 알려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말하고 싶긴하나 말해서는 안될 것 같은 말을 지금 하고자 한다. 대게 어떤 논제에 집중을 하는 것은 그 집단이나 개인의 관심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으면 그 사람과 대화를 많이 해보면 그 사람의 대화중에 자주 나오는 화제가 있는데, 그것이 그 사람의 관심사인 것이다. 나 자신은 별로 도덕적이지 않은 사람이지만 할 일이 많아서 비도덕적인 일을 별로 하지 못하고 있음은 내 관심사 탓일 것이다. 왜 하필이면 동성애에 그렇게 집중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 전에 어떤 교회를 가본적이 있는데, 그 교회는 형제님들과 자매님들의 관계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물론 훌륭한 가정, 순수한 사랑이라는 표현도 하고 있었다. 그것을 생각하면 동성애에 관심이 집중되는것도 무리가 아닌듯 싶었다. 자신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위반한 것이 동성애라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가치가 국가적 가치로 비화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다. 나는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해서 극도로 혐오하는 면이 있는데, 첫째 정권을 잡기위해 북파공작원을 이용해 선거운동을 했는데, 북파공작원을 폭력성을 가진 단체로 매도하고, 그 위세를 이용한 점에 있어서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둘째, 자신의 종교적 가치가 반공이라는 것을 비화시켜 통일작업이나 남북협력의 길을 막아버린 점, 셋째, 크리스찬임을 내세우면서도 보편적으로 비도덕적이었던 점, 넷째, 국정원등의 국가공동체를 위해서 사용해야 하는 정부기관을 자신의 정권유지를 위해서 대국민 공작정치에 사용했던 점등이다. 모든 사안에 대해서 옳지 않은 점이 있음을 일찍이 파악하고 막을려고 했는데, 내 역량의 부족으로 막지 못한 점이 아쉽기만 하다.

다음은 유명한 하버드 대학교수 마이클 센델(Michael J. Sandel)의 [WHY MORALITY]에 나오는 내용이다.  

한편 민주당은 공화당의 도덕적 성향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의 도덕적 판단을 거부함으로써 이러한 미덕의 정치에 저항했다. 공화당이 낙태를 금지하고 동성애자의 권리를 부인하고 교내기도를 장려할 때, 자유주의 진영은 정부가 도덕을 법률화하거나 국민의 도덕성에 관여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국가통치술이 영혼통치술로 전환되는 곳에 강압정치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치는 사람들에게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강요해서는 안 되며, 모두에게 자유로운 선택권을 부여해야 한다.

물론 마이클 센델은 현실적으로 정부가 도덕문제에 중립을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부연설명하고 있지만 보편적인 도덕이 아닌 독선과 아집으로 왜곡된 편향적인 도덕에 대해서는 공권력을 움직이는 힘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더구나 부정부패의 수단으로서 종교적 도덕이 사용되고 있다면 그것은 훨씬 큰 문제로 비화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종교적이고 부분적인 도덕을 내세워 국가공동체에 위해를 가함은 그 종교단체에도 자해(self-injury)적 결과가 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지난 날은 습관과 잘못된 판단으로 엄청난 결과를 보았지만 미래에도 이런 문제가 다시 발생한다면 국가적 자멸에 이르게 될지 모를 일이다. 북한이 가지고 있는 이상한 도덕적 오류를 한국도 가져서는 안되는 일이다.

2017년 11월 24일 금요일

노력과 잡음(파라젯 / noise)

"지금 겪고있는 힘든 상황을 벗어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겠지"하는 생각은 결국 기만이다. 좋은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다만 좋은 날이 오도록 노력할 뿐이다. 이념과 종교가 주는 파라다이스에 대한 약속을 믿을때 그 약속이 주는 평화로운 혜택을 입는 사람들은 '노력'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 기만당하고 자신이나 하느님, 또는 타인을 원망하며 삶을 종결짓게 될 것이다.

독일의 대문호 괴에테(1749-1832)의 철학적인 문학작품 [파우스트]에는 이런 말이 있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헤메고 있다], [쉽지않은 고생을 하고 온갖 학문을 닦고 그런데도 이 모양이야,가엾게도 나라는 바보가 옛날보다 조금도 영리하게 되어 있지 아니잖나.]    

파우스트의 고민은 인간 모두의 고민일 것같다. 그리고 그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서 메피스트의 꼬임에 넘어가지만 결국 고민은 고민으로 남을 뿐이다.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욕망이 존재의 이유고 의식의 저변에 자리잡은 인간의 한계일 것이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은 생존할려는 욕구의 덩어리고 인간은 많은 고차원적인 방법을 통하여 좀 더 생각하고 노력하며 생존할 뿐일 것이다.  

노력의 뒤에는 그 노력을 방해하는 잡음이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과학철학자 세르(Michel Serres 1930 - )는 완벽한 시스템은 없다고 말한다. 만약 있다면 파라젯(노이즈)을 배제함으로서 만들어낸 형식일 뿐이라고 말한다. 열린 시스템에서는 노이즈의 간섭이 있고 그 간섭에 저항하며 창조성이 정돈되어 간다고 말한다. 노이즈는 한낮 짐일 뿐이지만 존재하게 만드는 이유일수도 있다고 해석해도 될 것 같다. 

사회적 잡음을 차단시키는 국가시스템은 발전할 수 없으며, 고생해보지 않은 인간 역시 발전할 수 없다는 구체적인 해석을 해도 될 것 같다. 사회와 개인의 보수성은 노이즈를 원천 차단시킬려는 허황된 노력으로 정체와 퇴보를 만드는 원인이 된다. 북한 사회는 잡음을 제거할려고 스스로 고립시킴으로서 퇴보의 길을 걷고 있고, 한국사회 역시 이념을 구실삼아 안일하게 주저앉아 잡음 제거에만 힘쓴다면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태어나서 어려운 일을 겪고, 고민하며 발전해 나가는 것은 인간의 숙명일 것이다. 인간과 사회는 정적(停的) 시스템이 아닌 동적(動的)시스템임을 인식해야 한다. 어쩌면 진보와 보수의 적절한 대립은 서로 노이즈의 역할을 함으로써 사회발전의 도구가 되어줄 수 있음을 생각하게도 한다. 고민하는 것이 아무 생각없음보다 나을것같다. 

2017년 11월 19일 일요일

slow 부탄 quick 북한

1972년에 부탄의 국왕이 "나는 GDP가 아닌 국민들의 행복지수를 기준으로 나라를 통치하겠다"고 선언했고 부탄은 실제로 국민이 가장 행복한 나라가 되었다. 그런데 국명이 비숫하게 발음되는 북한은 비숫한 GDP를 가지고 국민이 가장 불행한 나라가 되었다. 인간에 가치를 둔 국가와 이념에 가치를 둔 국가의 차이가 아닌가 싶다.

활력이라는게 속도로 해결되는 것이가를 오랫동안 살펴보았는데, 그게 아닌듯 하다. 한국에서는 근로자들이 어느 정도의 임금을 받고서 노동생산성은 저조한데, 속도에 시달리고 있는 현장을 많이 보았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라는 명분으로 인생의 모든 여력을 갈아넣고 있었다. 많은 임금과 적은 노동시간으로 국가브랜드 1위를 달성한 독일은 기술이 발달하여 "외계인을 갈아넣었다"는 익살스런 오해도 받는다. 나찌시절과 같은 많은 진통을 겪으면서 '인간'을 소중히 여기는 국가를 만든 결과일 것이다.

욕망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속도는 한계가 있다. 한번은 수영과 스케이트같은 운동을 통하여 실험을 해봤다. 그러니까 천천히 하는 훈련을 해봤다는 것이다. 생각하고 보완할 여력이 있었다. 언젠가 한국빙상장에서 중국국가대표선수들이 훈련을 왔다가 느리고 보지못한 기술을 구사하는 내모습을 보고 넋이 빠지게 쳐다보던 생각이 난다. 원래 느리지만 근대화의 요구에 시달린 이후 느린것이 신기해진 중국의 생각을 읽는것 같았다.

한편으로 마음 아픈 일은 북한이나 한국이 주변정세로 인하여 빠른 근대화의 요구를 강요당한 일면도 있다는 것이다. 이념에 매몰되어 가면서 인간을 소홀하게 생각한 일들이 결국에는 경제성장의 하락, 경제성장률의 감소, 인구감소로 귀착될 것이라는 예상은 들어맞았다. 일본도 지나친 국가주의나 단체주의 사상이 인간의 가치를 대신하여 "나쁜 이념'으로 자리잡은 결과 이제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느리다는 것은 게으르다는 것이 아니다. 여유있게 효율성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효율성은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가끔 늙어서 죽을 날만 남은 사람들이 속도를 외치면서 성마른 얼굴로 허덕거리는 것을 보면 어떤 사람이나 시간과 욕망의 노예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여유를 찾지 못하면 타인에게 이용당한다. 독재권력이 생기는 이유중의 하나가 단기적 욕망에 구속된 사람들 때문이다. 평등을 구실삼아 독재권력밑에서 허덕이고, 영생을 구실삼아 종교적 억압에서 신음하고, 심지어는 한국에서 경제성장을 구실삼아 이상한 인간이 권력을 잡는 일도 있었다.

지난 몇년동안 한국의 근로현장을 보면서 북한과 상당히 유사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017년 11월 12일 일요일

활력의 가치와 북한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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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헌법강의를 듣다가 독일의 헌법학자 루돌프 스멘트((Rudolf Smend)의 헌법이론인 '동화적 통합론'부분에서 명상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교수님의 설명이 있었다. 당시 그게 무슨 의미인줄 몰랐다. 나중에 잠시 공무원수험생들이나 승진시험을 준비하는 분들에게 헌법을 지도한 적이 있었는데, 어느 정도 사회적 경험과 인생고민을 하고 난 후라서 '동태성'의 의미가 새롭게 인식이 되었다.

과학적 사회주의(공산주의)이론의 창시자인 마르크스는 어떤 상품의 진정한 가치는 그 상품이 지니고 있는 교환가치임에도 불구하고 그 상품 자체에 가치가 있다는,  속칭 '물신화(物神化)가 자본주의 사회에 깊이 내재해 있다고 말한다.

높이 솟아 오른 고층빌딩, 커다란 공장의 굴뚝, 첨단산업단지, 물류시설, 사통팔달로 뚫린 고속도로, 사람들이 붐비는 지하상가등 자본주의 사회가 이루어낸 경제적 규모들은 정지적인 관점으로 생각하기에는 그 이면에 무척 많은 역동성이 잠재해 있다. 바로 '움직이는 힘'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인생이나 국가의 생명주기는 움직이며 흘러가는 과정으로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스멘트의 이론은 '명상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본질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통찰하기 때문일 것이다.

북한사회가 정체된 이유는 바로 이 역동성을 만드는 '활력'을 무시한 까닭이고 한국정치에서 보수가 몰락하게 된 이유도 마찬가지다. 생명을 지닌 존재들은 활력을 끌어낼 수 있는 동기가 주어져야 한다. 자본주의가 성공한 것도 이런 동기를 부여하는데 성공한 까닭이고 자본주의가 실패한 점이 있다면 마르크스의 말처럼 물질이나 경제적인 부분들을 순환해가는 동체(動體 / moving body)로 보지 못하고 고정되어 있는 것 자체를 신앙화 시켰기 때문이다. 그런 물신화에 관한 말을 한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 역시 자본가와 노동자 관계를 기계적으로 해석하고 있고,  사회주의 혁명으로 변화를 이룬 후의 정지된 세계를 가정 함으로써 이념 자체를 신앙화 시킨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자본가들의 세계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 노동자들의 세계가 중요한 것도 아니다. 끊임없이 이윤을 추구하여 행복을 얻을려는 기업가의 움직이는 노력이나 열심히 일하여 경제적인 가치를 얻고 그것으로 행복을 만들어 내는 근로자의 노력이 모두 존중 받아야 하는 움직임이고 정부는 그 움직임들을 조화롭게 질서를 잡아줘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물신화 대신 이념을 신으로 모신 국가의 어두운 현실을 북한이 보여주고 있지만 한국도 하마터면 큰 일날뻔 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성질을 '활력'으로 보지 않고 '개인적인 이익추구'로 오해한 무리들의 부패행위가 한국의 발전을 정지시키고, 활력도 없이 죽은 사람의 사회를 끌고 나가는 북한이 존재하는 한반도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 북한은 오래전부터 인민의 활력을 끌어내기 위해 여러가지 선전 선동활동을 하고 있지만 좀 더 인간적이고 본질적인 측면에서 활력을 끌어내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2017년 10월 22일 일요일

활력(energy)은 인간의 목적 / 복지

나이를 먹으면 필연적으로 보수적 심정을 갖게 된다. 그것이 정치성향으로도 나타난다. 애석하게도 연령층이 높을 수록 복지가 필요하지만 편안함만 추구하는 인간속성이 악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복지에 대한 왜곡된 심정을 갖고 있는 보수적 정치인들을 지지하는 불합리성도 보여준다. 나이를 먹으면 그저 변화가 두려운 것이다. 젊은이는 복지여건이 갖추어져도 활력을 얻기 위해서 움직일려고 한다. '성과'를 목적으로 삼아 그저 움직이는게 좋은 것이다. 만약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부여하지 않고 복지만 제공한다면 어느 운동장 구석에서 하루 종일 농구공이나 축구공을 가지고 에너지를 발산하는 젊은이들을 보게 될 것이다.

경제 심리학자 댄 에리얼리(Dan Ariely)는 청년시절에 온 몸에 화상을 입고서 누워있으면서 장 폴이란 앵무새를 키웠는데, 그 앵무새는 수고가 필요한 먹이 상자속의 먹이만 구하더라는 경험을 말한다. 동물도 지적인 활동을 좋아한다는 증명을 해봤다는 것이다.

한국 노인분들이 과거 어렵고 권위주의적인 사회문화속에서 지나치게 타성적으로 살아온 결과 항상 '편안함'에 대한 그리움이 있을 것이다. 무위의 삶을 이상향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삶은 항상 고난의 연속이었고, 갈등의 연속이었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 일터에 와보니 일터의 근로시간이나 강도는 젊은이들 기준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역시 고난의 연속이었던것 같다. 몸과 마음의 능력에 비해 업무는 과도했고, 삶은 더욱 고통스러웠다는 것이다. 그래도 사회변화를 추구하는 진보가 싫은 이유는 열악한 환경에 자신을 적응시켜온 노력조차 헛된 수고일수 있다는 두려움도 한 몫 한듯 하다.

어느 날 돈에 집착을 하는 지인이 말하길,노인분들이 싸우거나 성을 내는 이유는 경제적인 부족에 시달린 이유라고 말한다. 나는 빙그래 웃었다. "그건 네 마음이지" 아직도 노력없는 부에 대한 환상적인 기대를 가지고 있는 철없는 지인의 생각인것을 알고 있었다. 이념이나 종교, 아니면 삶의 목적이라는게 사람들을 무위의 세계를 넘어서 어두운 무덤의 평온함으로 인도한다면 아무도 그것들을 추구하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자신과 세상의 변화를 통하여 '활력'을 얻고자 하는, 아니면 영생을 기대하며 더 오랫동안 활력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이념이나 종교로 유혹을 받은 것이다.

한 번은 노력에 비해 많은 복지를 얻어내고 있는 지인이 이제 막 노년기에 접어드는 자신의 신체사이클이 만든 순서대로 열렬히 보수정치를 지지하는 것을 보았다. 복지를 구하는 사람들을 적극 비판하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중얼 거렸다. "복지가 필요없는 것은 네놈이다."

언젠가 버스를 운전할때 노인분들이 시비를 건적이 있었다. 그러면 져주고는 혼자서 중얼 거렸다. "오늘도 승리감으로 인한 활력으로 하루를 버티시겠군"

젊은이들이나 노인분들이나 끌려다니지 않는 여유로운 일자리가 필요하다. 복지란 그런 것이다. 경제적 분배 어쩌고 하는 사람은 좀 생각해봐야 한다. 여유롭고 활력이 있는 일자리를 통하여 삶을 진행해 나갈수 있는 여건이 최고의 복지다.


언젠가 몇 번 제의한 적이 있지만 단시간의 일자리를 통하여 노인 고용을 증대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2017년 10월 21일 토요일

눈동자 / 믿음과 불안한 자아(ego)

지난 4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혼자서 동해안을 돌아다니다가 나곡해수욕장이란 앙증맞은 해변에 앉아 있었다. 정보기관 관련된 문제나 대통령에 관한 문제를 자주 거론하는 탓인지 어떤 계기가 있으면, 예를들면 국회를 방문한다든가 아니면 입장이 강력한 글을 쓴다든가 하면 어김없이 적대감이 없는 미행이 따라 붙었다.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별로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런데 나곡 해수욕장에서는 따라붙은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고된 훈련으로 단련된 멋진 눈을 가졌다는 생각이 들어서 접근을 했는데, 나를 두고 혼자 가버렸다. 훈련이 고된 사람들은 자아가 흔들리지 않는 눈을 가졌는데, 자신만 믿고 사는 외로운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종교를 철학적이고 올바르게 믿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념이나 종교에 순응하는 사람들때문에 머리 아픈적이 많았던것 같다. 한번은 스스로 통계까지 잡아본적이 있다. 도대체 분열적 행태로 대인관계를 갈등관계로 이끄는 사람들중에 속칭 '믿는 사람들'이 많은지 아니면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많은지를 문제삼아서 생각해봤는데, 학자들의 연구는 어떤지 몰라도 내 자신만의 통계로는 믿음을 구하는 사람들이 훨씬 불안한 행태를 보였던것 같다. 물론 그런 자신을 알기 때문에 믿음을 구하는것도 있을 것이다.

종교적인 믿음이 많은 대통령들은 불안한 자아를 보이기도 하고, 국정운영도 이상하게 산만해지는 성향이 있는데, 내 자신이랑 어떤 연관성이 있어도 좋고 나쁘고를 판단하기 보다는 도대체 왜 그랬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인 해리 설리반(Harry S, Sulivan 1892 -1949)은  정신질환을 병리학적인 문제가 아닌 삶속의 문제로 보았다. 설리반은 사람들이 어린 시절 어떤 욕구를 가지게 되고 그 욕구를 안전하게 충족해불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안전과 위협을 느끼면서 안전감과 불안전감을 경험하고 이것이 성격을 형성한다고 말한다. 이때 형성된 불안전감은 나중에 대인관계에서도 부적응문제를 일으키고, 부적응을 벗어나기 위해 방어기제를 발동하게 되는데, 이 방어기제는 이중인격, 몽유병,잠꼬대, 건망증등으로 표현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뜬금없이 별로 도덕적이지 않은데, 도덕적인 정부라고 자화자찬하던 전직 대통령이 생각나서 한 번 실소했다.

설리반의 연구에 따르면 부모의 명령이나 요구를 어겨서 불안전감을 경험하는 것보다 순응하여 안전감을 경험하는게 낫다는 아이의 계산은 나중에 참된 자아가 발달하는 것을 저해 시킨다고 말한다. 그래서 훗날 이 아이는 정신분열증에 걸릴 위험이 많아 진다고 말한다. 또한 아이의 아버지가 권위적으로 아이를 대하게 되면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을 비숫하게 생각하여 권위있는 아버지와 동일한 방식으로 윗 사람을 대하게 된다는 말도 한다.

설리반의 연구는 믿음의 습관이란게 때로는 편안하게 만들어 주기는 하지만 자아를 형성하는데 방해가 되기도 하고, 복종과 순응하는 자세는 산만한 분열적인 태도를 만든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겠다. 사람이 큰 일을 하기 위해서 왜 고된 시련을 겪어야 하는지도 답이 나오는 일이다. 맹자의 말처럼 뼈를 깎는 고통과 굶주림을 겪어보지 않고는 자신을 가누기조차도 힘든 자아를 갖게 될 것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다. 실정(失政)한 대통령보다 더 강한 그릇된 자아를 가지고 대통령을 움직였던 나쁜놈들 생각도 가끔 든다.

2017년 10월 13일 금요일

지켜보는 자 / 거울효과

직전 글에서 정보기관을 이용한 권력자의 대국민 공작에 관해서 매우 불쾌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지만 정보기관은 가장 편리하게 권력을 지킬 수 있는 수단으로서 이길 수 없는 유혹일 것이다. 전 대통령이 기무사령부 테니스장을 무료로 지금까지 이용할 수 있었던 것도 정보기관과 떳떳하지 못한 밀접한 인연을 맺고 있어서 그럴 수 도 있을 것이다. 서로 인용할 수 밖에 없는 끈끈한 과거와 현재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추측이다. 정보기관과 관련된 일은 외부에서 증명할 수 없는 문제가 있는 것이 또한 권력에 힘을 실어주는 일일 것이다.


에너지의 관점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국민을 관찰하는, 때로는 관찰을 넘어서 권력자를 위해 대국민 비밀공작을 하는 정보기관과 관련된 글을 몇 차례 쓴 적이 있지만 고도의 심리전문가가 배후에 개입했다는 소문이 있어서 심리학적으로 생각을 해봤는데, 국민을 다스리는 방법으로서 '거울효과'가 인용되었을 것이다.

아서 비만(Arthur Beaman)교수는 할로윈 데이에 아이들에게 사탕을 하나씩 가져가도록 하는 실험을 했다. 지켜보는 것을 모르도록 실험을 했는데, 33.7퍼센트의 아이들이 사탕을 하나 이상 가져갔다. 그리고 거울을 설치하고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하고 실험을 했는데, 8.9퍼센트의 아이들만이 사탕을 하나 이상 가져갔다.  - [Clever Psychology]중에서 요약 

거울효과는 부도덕한 행동을 줄이는 효과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거울로서 합의가 된 것이어야 할 것이다.

정보기관의 윤리나 가치는 스스로가 혹독한 자기통제를 거치지 않으면 지키기 어려운 점이 있을 것이다. 국민이 정보기관의 거울이 되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 권력자의 명령이나 이념등의 핑계거리가 주어진다면 쉽게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정보기관의 윤리일 것이다.

2017년 10월 6일 금요일

이미지 파괴공작


과거 이명박 전 대통령때 국정원의 치밀한 대국민 심리전에 심리학자까지 개입을 했다고 한다. 아직까지 누구인지 증명을 할 수 없지만 상당히 전문적인 심리전테러를 몇번 당한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대중에게 알려져 있지도 않고, 정치적 야망도 없는 밑바닥에서 고생하는 인생이라서 심리전에 반응하지 않는 강한 인성을 가졌다는 사실을 상대도 깨쳤으리라고 생각한다.

몇년전 트위터계정을 시작하며 탈이념에 관한 글을 올리기 시작하자 나를 팔로잉하는 트위터들중에 이상한 이미지의 얼굴 사진들이 많았다. 만화와 같은 얼굴인데, 선명한 명도와 이목구비의 색체가 뚜렷해 충격적으로 괴이했다. 그 사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곧 깨달았다. 무채색을 좋아하고 블러그를 담백한 스킨과 배열로 꾸미는 내 성향을 인지하고 그 반대의 충격적인 사진의 인물들이 팔로잉한 것이다. 시각적인 자극이 강렬하여 통각으로 변해서 나로 하여금 진저리치게 만들 목적이었던것 같은데, 나는 생각보다 예민하지 않았다.

또 한번은 청와대 홈페이지와 경찰청 홈페이지, 유명 정치인들의 홈페이지에 좌파교수의 이름으로 내 이름의 누군가를 고발했는데 고발이 안 받아들여진다는 내용의 글이 연속적으로 올라왔다.


이런 식이다. 아마 내가 명망있는 유명인사였으면 피해가 컸으리라고 생각한다. 국민들은 이형춘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순간적으로 정체모를 범죄를 함께 연상 할테니 고도의 대국민 심리전 테러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유명하지 않았다. 혹시나 유명해질 것 같으면 안 유명하게 조절할 예정이었다. 잃을게 없는 자는 원래 용감했다.  

사물을 보거나 듣거나 하는 지각은 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심리공작을 하는 자와 심리공작에 반응하는 자는 같은 계열의 사람들이다. 그들끼리의 비위상하는 만찬이다. 가끔 친구들에게 전 정치지도자의 그로테스크한 행실을 말하며 부모가 어떻게 교육을 시켰기에 저렇게 그로테스크(grotesque)할까를 말하며 웃기도 많이 웃었다. 그렇게 하라고 시킨다고 하는 사람들도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왜 그렇게 이상한 짓을 했지?"하면서 의문을 품을 일이다.

2017년 10월 4일 수요일

지독한 권신(powerful courtier)

항상 1인자보다는 2인자가 무섭다. 1류의 인간은 1류의 인간을 고용하고 2류의 인간은 3류의 인간을 고용한다는 누군가의 명언이 있지만 권위적인 1인자는 아첨꾼을 이용하여 국가나 조직을 운영한다. 그런데 권위적인 1인자보다 한술 더 뜬다. 과거 한국의 권위적인 정부에서, 아니면 권위적이고 싶은 정부에서 정보기관이나 공안기관, 군조직같은 계선조직이나 관료조직의 성격이 강한 곳에서는 1인자에게 충성하는 아첨꾼때문에 조직 전체가 비난의 대상이 되거나 존립이 위태로운 지경까지 이르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권위적인 1인자나 아첨꾼의 명분으로 이념이 사용되어 피해자도 많이 생겼다. 

16세기말 영국의 엘리자베스왕조때 윌터 롤리라는 신하가 있었다. 청년시절 프랑스 구교도의 의용군에 참가하였고, 1580년에 아일랜드 반란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다. 1582년부터 궁정출입을 했는데, 잘 생기고 세련된 태도로 여왕의 사랑을 받았다. 북아메리카를 탐험하여 식민지를 건설하고 그 곳을 '버지니아'라고 호칭하여 여왕의 환심을 샀다.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는데, 공을 세우고 기니아를 탐험해서 많은 금은보화를 확보하는 큰 공을 세웠다. 그런데 나중에 어찌된 일인지 여왕의 노여움을 샀다. 능력있는 권신을 상징적인 왕이 질투했는지도 모른다. 여왕이 죽고 제임스왕이 등극하자 반역의 혐의를 씌워 3년간 런던탑에 가두었다. 그 속에서 이 잘난 신하는 세계사책을 썼다.

나중에 왕은 석방하여 서아메리카의 오리노코강지방으로 전설의 황금경인 엘도라도를 찾으라는 명령을 하였다. 사실 죽으라는 말이지 전설의 황금경은 그저 전설에만 있는 것이다. 결국 임무에 실패하고 돌아온 윌터 롤리는 처형 당했다. 처형 당하는 순간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는 도끼를 보고 웃으면서 말하였다. "지독한 약이지만 효과는 있다"

조직이나 개인이나 권위적인 1인자는 큰 골치거리다. 열정 가득찬 일을 해도 결국 모든 결론은 1인자에게 귀착된다. 과정이 1인자의 기분에 따르며 공도 1인자에게 귀속된다. 한국에서 보수정부가 들어서면 정치지도자는 항상 왕이 되고 싶어하기 때문에 권신도 등장을 한다. 결국 쓰임새가 허무하다. 집권자가 바뀌면 모든것이 헛된 일이 된다. 하지만 왕조적 권위에 길들여진 한국의 중년이상의 사람들은 국가라는 조직에서 아니면 기업같은 사회속의 조직에서 권신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 나간다. 권신도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을 깨쳐야 한다. 

2017년 9월 30일 토요일

꿈은 이루어진다 / 이마주(Image)

아이들은 꿈이 많다. 그것은 대체로 존중 받는다. 이루어질 시간의 여유분이 있다. 그러나 노인의 꿈은 자신도 타인도 무시한다. 시간의 여유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념을 실제와 연결시키는 시간, 꿈을 현실로 구체화할 시간이 없다고 한 사람의 주관적 우주가 붕괴되는건 좋지않다. 꿈과 현실의 본질을 알고보면 꿈을 이루어나간 것이 중요한게 아니고 꿈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생각으로 세상은 움직여 나간다. 관념과 실제도 명확히 구분할 수 없다. 느리거나 빠르거나 관념은 실제로 부지런히 이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면 시간만 있으면 이 세상에 못할 일이 없다는 것도 알게되고, 망상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도 알게된다. 무엇인가 얻어야 할 것이나 이루어야 할 것이 있다면 관념위에 있는 생각과 행동의 블럭들을 꾸준히 실제위에 옮겨놓을 일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 - 1941)은 인간의 지각은 대상으로부터 행동에 필요한 정보만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이마주(Image)로 만든다고 한다. 우리가 보는 세계는 우리가 필요한 것만 인식하고 있다고 한다. 세상은 이러한 무수한 이마주의 총체라고 말한다. 즉 우리들의 꿈이 만든 현실로 이루어진 것이 세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가끔 못살거나 힘든 사람들의 세계에 살면서 그 사람들의 인식세계를 관찰해보면 꿈과 노력의 차이라는 생각을 하게만드는 일이 많다.꿈꾸지도 않고 행동도 하지 않는다. 못사는 사람들일수록 싸움이 잦고 여유가 없으며, 꼰심(egotism)을 부린다. 제대로된 교육을 받지 못한 탓이다. 물론 악인이 잘 살거나 악인이 여유로운 일도 많이 겪는다. 심지어는 꿈이 권력을 갖는 것인데 온갖 고차원적인 구걸(begging)로 권력을 얻어 다른 이들의 소중한 꿈이 현실화되는 것을 말살 시키는 행위도 많이 본다. 신종거지로 파악될 일이다. 물질뿐만이 아니고 공정한 댓가 없이 권력을 얻거나 부리는 사람도 거지다. 자신의 꿈은 이루었으되 외모와 행위가 계속 빈한해 보이는 까닭은 이리보아도 저리보아도 걸인의 모습이다. 제대로 된 정치지도자라면 복지를 갖고자 하는 민중을 거지로 볼게 아니라 꿈을 이룰 기반을 마련해주도록 노력해야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보니 진짜 거지는 따로 있었다. 

이념이라는 관념의 공간위에 머물러 있는 국가나 수천만의 꿈이 무너지는 광경을 보고 있는 중이다. 파괴할려는 꿈도 이루어지고, 존재할려는 꿈도 이루어진다. 정치지도자나 국민 각자가 어떤 생각과 행동에 집중할려고 노력하는가에 따라서 결과는 달라질 것이다.

2017년 9월 24일 일요일

노인과 버스 / 메를로퐁티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의 건강까지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이 안좋은 통치자가 인민에게 끼칠 영향을 걱정하는 것이다. 더 심각하게 생각되는 것은 앞으로 점차 노화가 올 것이다. 삐걱대는 신체와 점차 말라가는 혈류등은 성마른 성격을 갖게하고, 그것이 기질을 온건치 못하게 할 것이 걱정된다.

한번은 서울 근교에서 버스운전을 한 적이 있다. 물론 생계도 중요하지만 수없이 거쳐가는 고객들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젊은 청년들과 너무 오랫동안 있다보니 내 생각과 신체는 나이에 비해 젊음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함께 에너지가 넘치고 희망이 넘쳤다. 한 편으로는 그것이 미안했다. 그래서 앞으로 특허일을 할 예정으로 기계와 친해질겸 중장비 면허나 대형자동차차면허등을 많이 취득해서 연장자들이 많은 일터를 찾았었다. 천국과 지옥은 그 차이였다. 청년들은 건강하고 희망이 있어서 온건하고,  연장자들은 미래가 없어서 더욱 이상의 눈을 뜨지 못하고 현실에 민감하며 성내거나 권위를 내세우는 면이 잦았다. 젊은이와 노인분들이 함께 이해하지 못하면 노인분들이 많은 미래는 어둠의 세계가 될 것이다.

버스 운행중에 운전기사에게 시비를 거는 분들은 90퍼센트가 노인이었다. 내가 어렸을때 생각했던 고정관념과는 달리, 서두르는 이는 노인분들었다. 항상 빨리 운행하기를 원한다. 이미 기울어가는 황혼을 알기에 더욱 현실을 서두르고 싶은 것이다. 거기다가 아픈 몸과 집안의 무위의 세계를  빠져나와 맞이한 버스라는 작은 사회는 노인분들의 마음을 점찍을 수 있는 유효한 공간이었다. 그래서 노인분들이 버스를 타면 아주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거나 아주 난폭한 모습의 극과 극을 보인다. 버스기사분들에게는 노인분들이 아주 무거운 짐이다. 마치 노인분들이 노년이라는 무거운 짐을 숙명으로 지고 있는 것처럼........

프랑스의 철학자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 1961)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삶의 기초는 신체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한 편으로 나는 이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는데,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운동을 챙길려는 태도는 내 자신과 사회의 분위기에 건강이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를 알기 때문이다.

2017년 9월 15일 금요일

북한이 예측불가능한 이유 / 전략의 혁신


요즘 현실적인 생계문제나 경제적 기대때문에 꽤나 장소를 옮겨 다니는데, 이런 행태를 정보전의 관점으로 보면 내 자신은 꽤나 관리하거나 파악하기 귀찮은 존재가 될 수 있겠다 싶다. 그러나 내가 사는 세상은 전략과 전술이 필요한 세상이 아니고 자발적인 혁신이 필요한 세상이라서 모택동이나 북한처럼 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할만한 비효율성은 최대한 피할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IT,전기,중장비,자동차등 기능적인 기술을 많이 접해볼려고 애쓰는 중인데, 사격이나 스케이트같은 스포츠를 통하여 '꾸준하면 통한다 '는 진리를 깨달은 이후로 할 것이 꽤 많아졌다.


자본주의 경쟁시스템의 문제도 그렇지만 비정규전과 모략술등으로 혁명을 시도하는 사회주의 전략전술도 자신에게 보다 상대에 대한 인식이 우월하게 지배함으로써 상당히 비효율적인 결과를 낳곤한다. 북한의 인재들이 별로 쓸모없는 이유는 이념과 군사지식외에는 별로 가진것이 없어서 모든 관점이 사회주의 혁명이나 전쟁에만 몰입을 한 상태일 것이기 때문이다. 돌발적인 장거리미사일 실험도 에너지를 빼앗기지 않는 비정규전의 방식으로서의 '돌발적인' 그리고 국력이 약한 국가가 가질 수 있는 비대칭의 '한 방'으로서의 장거리 핵미사일', 이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듯 하다.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은 아무리 새로운 길을 모색할려고 해도 현실은 약자가 강자를 극복할 수 있는 '비정규적인 전략'외에는 없다는 한계를 느꼈을 것이고, 북한의 군원로들부터 비정규전과 모략술 같은 전략 전술을 또는 전략전술만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있을 터였다.

거짓 움직임을 보여라. 적이 이것이 거짓이라 확신한다면 이 거짓 움직임을 진짜로 만들어라
- 고대 중국의 군사전략 36계 -

예기치 못한 일에 당황하지 않을 정도로 용감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 줄리어스 시저 -

전쟁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전략을 참 중요하게 생각한다. 나플레옹군과 프로이센군이 비전통적인 방식으로 승패를 주고 받았으며,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로마의 허를 찌르기위해 이 방식을 사용했으며, 무하마드 알리가 나비처럼 흐느적 거리다가 벌처럼 쏘면서 이 방식을 구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THE 33 STRATEGIES OF WAR 참조-

참으로 오랜 세월동안 같은 전략을 반복하다보면 그것이 일반화되어 상대는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한국이 북한의 돌발적인 행동에 무감각해진 이유인듯 하다. 북한은 더 늦기 전에 새로운 영역(경제적 영역이든 아니면 실용적인 과학기술영역이든)을 개척하여 새로운 전략으로 상대를 대해야 할 것 같다. 물론 상대없는 자발적인 혁신이라면 그보다 좋을 것이 없을 것같다.

2017년 8월 26일 토요일

달밝은 밤에 / 이순신

어렸을때 다니던 시골 국민학교 교무실에 [성웅 이순신]이라는 두꺼운 만화가 아주 많이 있었다. 그리고 아주 많이 읽었다.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집권시절이었는데,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자신의 이미지를 이순신장군과 동일시 시킬려고 많이 노력했던 것 같다. 그도 그럴것이 어릴적에 남로당 간부였던 형 박상희가 준 이순신 장군 전기를 무척 감명깊게 읽었다고 한다. 그리고 훗날 남로당출신 군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때 남로당소속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소령지위를 박탈당하고 백의종군한 적이 있었는데, 아마 그때의 자신의 모습과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때의 모습을 동일시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예의 그 만화에는 이순신 장군이 잠을 자면서 꿈을 꾸었는데, 신령스러운 노인이 나타나서 왜군의 기습을 알려주었다고 나와있다. 그러나 실상은 이순신 장군이 달밝은 밤에 북채를 베고 누워 자고 있었는데, 통상 달 밝은 밤에는 기습을 하지 않지만 왠지 모르게 안좋은 예감이 들어 병사들에게 특별한 경계를 지시했고, 실제로 기습을 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준비하고 있었던터라 쉽게 막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 항상 걱정하는 영웅의 끊임없이 반복되는 정성스러운 마음은 초합리적인 집중을 하도록 하였던 것 같다. 그 밖에도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를 쓰면서 창조적인 생각의 인연을 계속 엮어나간 것으로 생각된다. 녹둔도의 초급군관 시절이나 백의종군 시절에는 마음을 비우고 전체를 볼 수 있는 통찰력을 가지는 학습의 기회가 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목적이 뚜렷하고 간절한 영웅이 고난을 겪으면서 군신(軍神)이 되어가는 과정을 장군의 인생이 잘 보여주는듯 하다.  

영웅은 쉽게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없는 정성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비전을 이야기하고 미래에 대한 상상을 말하지만 정성들인 집중이 없는 생각들은 그냥 망상으로 떠돌다 가는듯 하다. 평범한 사람들이 흉내낼 수 없는 것, 그것은 비전이 아니라 정성인듯 하다.

2017년 8월 19일 토요일

활력이 필요한 시공간 / 프리드리히 라첼

고등학교시절 두권의 책이 행복을 주었다. 당시 학원사(學園社)라는 출판사에서 출간한 리차드 리키박사와 로저 레윈박사가 함께 쓴 인류학 서적인 [ORIGIN], 칼 세이건 박사의 행성연구서적인 [COSMOS], 이 두가지 책을 너덜 너덜해질대까지 반복적으로 읽었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자리잡은 이데올로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달리고 있었다. 리차드 리키박사가 750만년전 호미니드의 유골을 발견하면서 라디오에서 '다이아몬드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 온 루시'라는 팝송이 나와서 그 유골을 '루시'라고 이름 붙였다고 하는 낭만적인 순간에 어려운 가정환경이나 골육상잔의 국가정세가 눈에 들어 올리가 없었다. 꿈많은 학창 시절을 보내게 해 준 책들에 지금도 무척 감사한다.

훗날 사설학원에서 학생들에게 세계지리를 지도하고 있는데, 학생들이 도서관에서 무심코 내 이름을 검색했더니 내 구글 블러그를 유해블러그로 지정해서 접근 금지시켰다고 말해 학생들과 함께 막 웃었던 기억이 있다. 꿈이 있는 아이들과 꿈이 있는 어른이 지지부리한 권력을 비웃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증거 동영상을 채취하고 담당교육청에는  위에서 시켜도 그런 짓 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나서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러니 고립국 북한정부와 정신적인 고립국 한국정부가 얼마나 같잖아 보였겠는가 말이다. 요즘 지난 정부에서 있었던 국정원의 댓글공작에 대한 논란을 보면서 국가재정과 인력을 참 졸렬하게 사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의 엘리트 공작기관인 문화교류국을 폄하하는 이유도 내 머리속에 담겨진 시공간은 고립국 정부의 공작기관을 넘어선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로 어떤 나라가 발전을 하기 위해서는 영토와 정세를 넘어선 구성원들의 넓은 인식들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이념이나 적대감으로 생각의 족쇄를 잠글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독일의 정치 지리학자인 프리드리히 라첼(Friedrich Ratzel, 1844 1904)은 진화하는 유럽의 민족국가를 생물학적 유기체에 비유하였다. 그는 민족이 살아 있는존재의 집합체로서 개인의 라이프사이클을 반영하며, 다른 문화를 흡수하고 다른 영토로 확장하면서 그 자양분을 얻는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그는 식민지 획득이 국가에 이로우며 국경선이 규정되고 한정되어 있으면 바람직하지 않다고 제시하였다. 국가는 영토를 놓고 서로 각축을 벌여야 한다. 그런 여지가 차단되면 국가는 마치 노인처럼 쇠하게 되며, 민족 도한 시들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역사적 분석을 근거로 이 유기체 국가 이론을 확립하였고, 이런 견해를 학습잡지에 발표 하였다.

이런 관념은 머지 않아 그의 제자들을 통해 독일 정치에까지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나중에 이는 나치 이데올로기의 일부가 되었으며, 특히 카를 하우스호퍼(Karl Haushofer)라는 전략가가 이 이론을 적극적으로 선전하였다. '지정학(geopolitik)'이라는 용어는 그의 전매특허로서 악명을 얻게 되어 이후 수십  년간이나 학계에서 쓰이지 않았다.

- 미시간 주립대 교수 Harm de Blij의 [Why Geography Matter]중에서 -

북한이나 어느 정도의 한국이 이 지경이 된 것은 정신적 영토를 제한해 버린 교육정책에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프리드리히 라첼의 의견처럼 반드시 지리적 영토가 아니더라도 산업적 영토, 학문적 영토, 정신적 영토등의 새로운 인식과 확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넓게 생각하지 않는 구성원들만 있는 국가는 뭐 하나 제대로 생각하지도 않고, 제대로 되는 일도 없을 것 같다.   

2017년 8월 11일 금요일

점진적 개혁이 필요한 북한

http://hyeong-chun.blogspot.kr/search?q=%EC%8B%9C%EC%8A%A4%ED%85%9C&updated-max=2015-06-20T16:29:00-07:00&max-results=20&start=0&by-date=false

정신 못차리는 정부는 북한과 같이 한국의 운명에 큰 영향을 주는 국가의 존재를 간단하게 '낙인'찍는다. 좋거나 나쁘거나, 우호적이거나 적대적이거나 하는 감정적인 판단이 앞선다.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한국조차도 그렇게 비합리적으로 운영을 했기 때문이다. 보수정부 말기에 부패가 극에 달하고, 무엇보다 비합리적인 정치지도자의 파행이 계속되자 이젠 한국의 국가시스템이 붕괴될 위기가 왔다고 생각했는데, 민생의 회의감을 가장 먼저 느껴본 당사자는 내 자신이었다. 항상 위기분석은 폭이 넓을 필요가 있고, 합리적일 필요가 있다. '통일이 어느 날 새벽같이 찾아 온다'는 종교예언서같은 말로 현재의 위기를 표현할 것은 아니다.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허위의식으로 낙인찍은 마르크스의 말은 자신이 유물론을 내세운데 대한 반증의 표현이지만 프랑스의 철학자 알튀세(Louis Althuser 1918 - 1990)는 시민사회를 형성하는 모든 제도를 이데올로기 장치로 본다.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맹신으로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는 현상이지 이데올로기 자체가 판단의 대상은 아니었던것 같다.

북한사회는 좀 더 냉정한 시선으로 봐야 한다.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장치가 북한 시스템의 발전을 막아버렸을뿐만 아니라 역설적으로 지금까지 북한 시스템을 유지시켜 온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반드시 전쟁이 아니더라도 북한 시스템의 일시적 붕괴는 동북아 정세에 혼란을 가져 올 뿐만 아니라 한국의 일시적 혼란과 고통도 함께 할 수 밖에 없는듯 하다. 책임과 해결책은 북한 사회가 끝까지 짊어지고 갈 일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북한 시스템이 점진적으로 개혁해 가면서 한국과 교류관계를 확대해 가는 길인데, 남북한 간의 동질적 감정도 상처입지 않고 발달시켜 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 통일은 새벽같이 오면 안되는 일이다.

가끔 한국사회의 보편적인 시스템과 약간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는 종교시스템을 보고 있으면 추상적이고 비합리적인 방법으로 국가시스템을 병들게 하곤 있지만 특별히 자극적인 행위를 하지 않음으로써 적절한 화합을 하고 있는 것이 그나마 공생(共生)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듯 하다. 오래된 믿음들을 혁명적으로 뒤집을 필요는 없는듯 하다. 그러기에는 한국의 정세는 지리적 정세와 관계적 정세가 항상 살얼음판을 겪는듯 하다.  


언젠가 몇차례 언급한 적이 있지만 이미 자생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북한의 장마당같은 자본주의 시스템을 조금씩 제도화 시켜 양성화할 필요가 있고, 한국과의 경제협력으로 양국이 함께 좋은 방식(Win-win game)을 발전시켜 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  

2017년 8월 7일 월요일

AURA의 종말 / 벤야민

아우라(aura)는 후광이나 광채라는 의미의 그리스어인데 종교에서 장엄함의 표현으로 쓰인다. 때로는 성인들의 초상화에서 아우라가 표현되어 있기도 하고, 때로는 카리스마를 갖고 싶은 정치인이나 종교인들이 아우라를 구하기 위해 처절한 노력을 하기도 한다.  비합리적인 상상력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아우라를 구하기 위한 노력은 지위와 계층을 가리지 않고 넘쳐나는 경향이 있는데, 이념이나 종교에 잘 훈련된 백성들에게는 어느 정도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것 같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철학자인 벤야민 (Walter Benjamin 1892 - 1940 )은 아우라는 한 번뿐인 현상이며 '원본'에만 존재하지 복제품을 거치면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 편으로 벤야민은 역사적인 것에 불과한 이념을 1회에 한정된 사실로서 제시한 사진과 영화, 특히 파시즘영화같은 것의 위험성을 제시했다. 말하자면 대중을 혼망한 카리스마로 일시적으로 자극하여 선동하는 문제를 매우 싫어했던 것 같다. 이 때문에 벤야민은 훗날 나찌에 쫒기는 신세가 된다.

정치지도자가 이념적이거나 종교적인 색체가 강하면 덜컥 이 아우라에 의존하여 국민의 지지를 얻을려는 욕구가 강하게 된다. 본질적인 것을 구하기 위해서는 오랫동안의 '내공'이 필요하다. 노력과 고난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과거 성인들의 머리에 둘러진 아우라는 고난과 노력의 상징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언젠가 한 개신교인과 대화를 하던 중 '한국인은 신심(信心 / belief for God)이 강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실제로 그렇다. 한국인들은 이념이던 종교던 믿고 본다. 그리고 오랫동안 아우라를 간직하고 싶어한다. 벤야민의 말처럼 아우라는 그 시대에 획기적인 구원을 위해 나타났던 일시적인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위정자나 종교인들의 '수단'으로서 오랫동안 남용되기도 한다. 심지어는 일반인들의 직업세계에서도 정보의 비대칭성을 이용하여 아우라를 구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윗사람이 자신의 모습을 감추어서 카리스마를 얻어내고, 그것을 이용하여 하급자를 '사용'하기도 한다.

대통령이 집권초기에 아우라가 있었으면 그 아우라는 집권 말기에도 빛을 발휘해야 진짜 아우라다. 어설픈 인과의 안좋은 끝을 예측하지 못한 어설픈 능력이 아쉽다. 특히 철저하게 아우라에 의존한 정치를 하는 북한은 더욱 그렇다. 그 덕에 북한 정부는 지금부터 연착륙을 시도하지 않으면 큰 변혁으로 안좋은 끝을 볼 가능성이 많다. 허상에 의해서 지배되던 국가에서 허상의 실체가 드러나면 그 충격과 파장은 클것 같다.  

2017년 7월 22일 토요일

트럼프와 미국 정보기관의 불협화음


정치적 지위를 얻고자 하거나 상업행위를 할려면 쓸데없는 적을 만들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한다. 적이 있다고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노력이 더 들어간다고 한다. 미국의 트럼프대통령과 정보기관들이 불협화음을 일으키고 있다. 한 편으로는 이런 불협화음은 러시아 대통령 푸틴과 러시아 정보부가 의도한 목적이 달성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할 만하다. 우연히 이루어진 것과 의도하여 이루어진 것의 차이를 생각하면 의도하여 이루어졌을때 조직이나 개인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듯 하다. KGB출신인 푸틴대통령과 러시아정보국의 '의견일치'는 쉽게 추측할 수 있지만 사업가출신 트럼프대통령과 미국정보부의 '불협화음'도 쉽게 추측할 수 있는 일인것 같다.

트럼프는 경제인출신답게 국가이념이나 도덕에 대해 둔감하고, 직관에 많이 의존하고 있지않을까 하는 추측도 된다. 사업가의 직관과 정치인의 직관을 명분으로 미국정보기관을 관료주의적 기질이 있는 답답한 기관으로 무시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미국뿐 아니라 각국의 정보기관들은 국가이념이나 국가적 도덕관념은 중요하고, 철저하게 지키는 면이 있다. 정보활동이라는, 경계가 모호한 행위가운데 정체성을 지켜 나갈 수 있는 개인과 조직의 수호자로서 질서를 유지시켜주는 것이 국가이념과 도덕인듯 하다. 한국이나 북한의 정보기관들의 이념문제에 관해서 많은 언급을 했지만 이념을 핑계삼아 국민에게 등을 돌린 문제에 대해서 언급했던 것 같다.

자유주의 국가에서 그 자유주의란 특성때문에 자유주의 국가 정보기관의 활동력이 권위주의 국가의 정보기관에게 밀린다는 것은 불공평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유주의 국가의 정보기관들은 많은 내우외환을 겪으면서도 자유스러움을 무기삼아 목적으로 수렴하는 특징이 있는듯 하다. 


언젠가 처칠과 같은 정치인은 정보기관을 믿지 않고 스스로 직관적 결정을 했다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처칠의 직관은 자신의 견해와 일치하지않는 정보기관의 보고라도 '생각의 근거'로서 작용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애초부터 논의되지 않은 것들은 아무 관심도 받지 않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생각하면 권위주의 국가의 정보기관들, 특히 북한같은 폐쇄적 국가의 정보기관들은 자연스러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암살과 같은 무력에 의존하는 성향이 있는 듯 하다.

좀 오래된 냉전 시대의 모습이지만 자유주의 국가와 권위주의 국가의 정보기관의 결정절차를 비교할 수 있는 내용인데, 미국 정보기관은 대통령과는 독립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으며, 때로는 대통령이 정보기관의 '속을 썩이는 존재'가 될 수 있음도 알 수 있다. 물론 반대로 대통령에게도 정보기관이 정치활동에 속을 썩이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중요한 것은 선의적인 국가이념이 강력한 쪽이 옳다는 것이다.

소련 체제에서는 요구를 설정하는 권리를 정부 최고 수뇌부에 자리잡은 소수 지도자들만이 갖고 있다. 미국 체제가 지닌 장점 가운데 하나는 민간인이든 군인이든 설령 계급이 낮더라도 정보를 요구할 권리가 있으며, 일리가 있으면 상부기관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데 있다.  


미국의 국가 첩보예측(NIE) 작성과정
 
1.대통령 또는 국가안보문제 보좌관, 또는 CIA국장이 요구를 제출한다.
2.중앙첩보실 장관이 요구를 종합하여 수집기관(CIA,DIA,NSA )에게 작업을 넘긴다.
3.첩보기관은 데이터를 수집,분석하여 국가첩보예측의 원안을 작성한다.
4.국가 외국첩보위원회가 원안을 심사하여 최종적으로 국가첩보예측안을 작성한다.
5.다시 1번으로 피드백시킨다.


- 윌리엄 V. 케네디 [THE INTELLIGENCE WARFARE] 중에서 - 

개선을 위하여 / 끝이 없는 길

요즘 재미있는 경험을 했다. 정부가 바뀌어서 내 자신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을 정부가 개선할려는 시도를 하자 '생각할 일거리'가 없어져서 잠시 머리가 허옇게 세는 황망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말하자면 집중할 곳을 잃어버렸다는 의미인데, 한편으로는 '적대적 공생관계'의 의미를 어렴풋이 인지하기도 한것 같다. "이제 우리 세상이다!'하고 외쳐봤자 그 영역 안에서 새로운 분열이 싹틀 수 있는 위험을 인간 본성속에서 얼핏 인지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물론 현 정부의 정책이나 행태 중에서도 못마땅한 점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문제거리의 개혁을 시도할려고 했던 점은 비난할 수 없는 기본적 노력인듯 하다.

그동안 실용주의를 내세우면서 차라리 이념을 내세우는 것만도 못한 상황을 많이 보았는데, 철학이 없는 실용주의는 결국 이기적인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고, 이기적인 방향은 보수적 방향으로 가는 연결고리가 있었던 것 같다. 강력한 목적이나 강력한 개혁시도가 몰입을 끌어내고 사회를 개선시킬 수 있는 점은 개인과 마찬가지인듯 하다. 에디슨은 천재는 1퍼센트의 재능과 99퍼센트의 노력으로 만들어진다고 했는데, 99퍼센트의 노력과 몰입으로 만들어진 재능을 생각해볼때 천재는 100퍼센트의 재능 또는 100퍼센트의 노력으로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북한은 왜 이념을 놓지 않는 것일까. 이유는 몰입을 위한 수단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든다. 통합과 발전을 위한 몰입의 수단으로서 이념을 만들어내고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변화하는 현실을 따라가주지 못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자본주의 이념을 도입하면 구소련 붕괴이후의 러시아처럼 혼란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그래서 이념은 '수단'에 그쳐야지 '목적'의 위상을 가지면 안된다. 목적을 인민의 자유와 행복에 두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한 번은 어떤 종교단체들이(한 두개가 아니다. 대체로 팽창주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 서양발 종교가 그런데) 자신들의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이 난다. 그 세상이 이루어지면 또 다른 분열과 투쟁이 싹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물론 역사는 그래왔다. 원래 그런 세상이 중요했던 것이 아니고 그런 세상을 만들려고 아우성치는 과정에 편승했던 개인들의 단기간의 흥분,노력, 승리의 쾌감들이 중요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변화한 세상보다 중요한 것은 변화를 위한 노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2017년 7월 19일 수요일

핀란드의 젊은 두뇌 유출과 복지문제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7/18/2017071803627.html

어떤 관점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현상은 다르게 보일 수가 있다. 몇일전 인터넷 신문기사에 핀란드의 인재유출이 복지지출이 지나쳐 연구보조금등이 삭감된데 원인이 있다고 말한다. 과연 복지지출의 증대와  연구보조금등의 삭감은 밀접한 상관관계와 연계성을 띄고 있을지는 의문이다.

몇년전 핀란드에 관해서 많은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인구 550만도 안되는 나라에서 노키아같은 거대재벌이 탄생할 수 있었던 점, 노키아가 무너져도 핀란드는 별 문제가 없었다는 점이 핀란드의 탄탄한 경제시스템을 표현하고 있었고, 우수한 핀란드 인재가 많이 양성 되었다는 점, 공리적인 국민교육방식과  국가운영시스템은 많은 국가들의 본보기가 되었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많은 국가들의 우파적인 관점으로는 복지지출이 많은 국가라서 좌파적인 국가로 여겨지는 문제도 있었던것 같다. 복지지출에 관한 문제는 핀란드가 어떤 '약점'을 보이게 되면 그 약점의 원인으로서 가장 먼저 거론될거라는 예상은 했다. 핀란드의 복지는 복지 자체보다도 지나친 경쟁과 분열로 국민과 국가를 파탄으로 만들 수 있는 상황을 개선할려는 시도로 봐야 한다.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복지가 목적이라기 보다는 국가시스템의 항구적 발전과 인간으로서 존중받는 국민수준을 달성하자는 목적에 대한 수단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얼마전 한국의 경주보문 관광단지와 포항울산 공업단지등을 장기간 돌아본 적이 있었는데, 조선산업등 국가기간산업의 불경기와 관광산업의 불경기가 밀접한 현상을 보여줌을 체감한듯 하다. 산업단지 불이 꺼지면 관광단지의 불도 꺼져 있음을 실감했는데, 전체적인 활력의 범위내에서 문제를 인식하고 분석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복지는 국민의 삶과 능력에 활력을 주는 문제로서 분배의 문제보다 더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문제인듯 하다.

애초부터 인구 550만의 국가에서 주변국가에서 유치하고 싶은 인재를 양성해 냈다는 것 자체가 핀란드 교육의 우수함을 보여주고 있고, 타인보다 우월하거나 편안한 삶을 살도록 가르친 한국교육에서는 절대 발생할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교육시켜놓고 국가규모나 내수(內需 / domestic consumption)의 부족으로 훌륭하게 양성한 젊은 인재들의 일자리를 창출하는데 있어서 한계에 부딪힌 핀란드의 고민을, 핀란드가 지금의 수준까지 이르게 만든 복지정책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될 것 같다.

인재를 국내에서 소화할 수 있던지 유출하든지 일단 우수한 인재는 양성하고 볼일이다. 중국의 경제와 과학이 발달하게 된 이유는 장기적인 인재 양성의 프로젝트에 힘입은 바 크고, 일본이나 한국의 성장동력이 일찍 멈추게 된 이유는 다방면의 인재를 키우지 못하고, 정치와 경제가 집권화되어 있고, 수직관계 지향적이며, 출세지향적인 분위기에 힘 입은 바가 있다. 복지수준이 미약한 이유로 안정된 삶을 위해서 공무원시험에 뛰어드는 젊은이들이 대다수인 국가에서 유출할 인재가 있을리도 없지만 핀란드의 진정한 고민과는 다르게 복지탓을 하고 있는 한국의 기사분석은 최선을 다했던 핀란드정책가들에게는 전혀 참조할 가치가 없어 보일 것 같다.

2017년 7월 15일 토요일

출세와 대통령기념관

남부지방을 지나가다 대통령의 생가라는 간판이 보여서 시골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기념관이 있었다. 존경의 여부를 불문하고 대통령기념관이라는 것은 과거 출세주의 전통의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해당 대통령을 반대하는 국민이 절반에 가까운 이념국가인 한국에서 대통령기념관이 온전한 정서로 다시 찾아올 장소가 되기는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하물며 많은 국민들의 비난을 받고 있는 대통령기념관의 자판기 커피는 회전률과 유통기한을 생각해야 할 정도로 마시기 꺼려지는 면이 있었다. 그만큼 방문객이 없는 것 같다.

대통령이 걸어온 자취가 기념관 내외부와 팜플렛에 서술되어 있었다. 한국구세대의 의식속에 뿌리깊게 잠재해 있는 출세주의가 서술되어 있었다. 전통과 충절의 고장에서 어려운 유년시절과 학창시절을 보내고 적절히 공부 잘하고, 적절히 민주화 운동을 했으며, 샐러리맨으로 입사하여 대기업의 사장까지 승진하는 샐러리맨의 신화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런 문제까지 찐득거리며 비난할 건 못되지만 이념문제에 대한 오해로 해당 대통령과 그 당시의 정보기관 그리고 배후세력의 삼위일체적인 찐득거림에 세월을 낭비한 전력이 있는 몸으로써 유머스러운 보복을 취하고자 하는 의도가 내 자신에게 다분히 있는듯 하다.


언젠가 밝혔지만 이윤을 추구하는 습관이 되어있는 기업가가 국가의 경영을 맡는 문제는 사익(私益 / a private profit)과 공익(公益 , 共益 / a public profit)의 경계를 모호하게 여길수 있는 상황으로 악화될 여지가 있는듯 하다. 집중력이 대단하지 않은 바에야 피치못할 일로 생각이 되기도 한다.

출세주의나 수직적권력관계는 왜 문제가 될까.

의외로 많은 경영자들이 자기 자신의 역할을 하부조직에서 올라오는 아이디어들에 대해 "예" 또는 "아니오"라고 판단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사고방식은 회사 전체 분위기를 무기력한 상황으로 몰고간다. 그런 상황은 다음의 시가 잘 묘사하고 있는데, 이 시는 어느 날 런던 유니레버(Unlever)사의 게시판에 누군가가 핀으로 꽂아놓은 것이다.

이 나무를 따라
저 아래 뿌리에서부터 최고층의 왕좌까지
아이디어들이 넘쳐 올라가지만
내려오는 것은 "안 된다" 소리뿐

- Peter F.Drucker on innovation -

자신이 가진 재능과 결정력을 공익을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이 한국 구세대인듯 하다. 상승욕구만 있는데, 목적에 부합하는 온전하고 합리적인 결정이 내려질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관료출신이나 계급집단내에서 일하는 지인들과 대화를 해보면 계급주의를 혐오하면서도 자신의 관점은 계급의 잣대가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많이 포착하곤 한다. 그러니까 자신이 계급주의를 경멸하면서도 높은 계급을 지향하는 내면이 포착되는데, 결국 자신이 계급이 낮은 것이 고통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어려운 시절을 겪고서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가 아닌 제대로 일을 하기 위해서 어려운 시절을 겪었어야 했다. 

2017년 7월 11일 화요일

에르도안과 국민교육현장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의 독재정치행보와 터키국민들의 반응에 대해서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에르도안과 한국의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개발독재, 푸틴의 장기집권등의 행보가 서로 연결이 되어 있는만큼 터키인의 반응도 한국의 촛불집회와 유사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정보통신의 발달한 이유로 반응이 좀 빨리 나타나는 것 같다. 그런데 쿠데타의 위기를 SNS를 이용하여 진압한, 나름 세련된 에르도안도 외부에서 누구나 예측가능한 민주화 시위와 그에 따른 혼란은 예측을 하지 못한것 같다. 가진 자의 흐린 판단력을 보여주는듯 하다.

100만명은 중요하다. 보수는 가진자와 매우 못가진자로 진영내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하다. 희망과 꿈이 없으면 최소한의 것을 지키거나 강자의 편을 들어야 한다는 처세술로 보수진영에 서는 이들을 많이 보았다. 유추해보건데 100만명은 살팍하게 흔들리는 다수를 수용함으로써 곧 1000만명으로 불어날 것이다.

하지만 우리사회의 분위기를 보면 정말 협동을 원하는지 의구심이 든다. 소수의 천재가 이끌어가고 다수는 잘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는 발상이 무섭기만 하다. 결국 경쟁력의 원천은 천재성에 기반을 둔다는 생각은 원인과 결과에 대한 극단적인 혼란의 산물이다.

- 후쿠다 세이지의 [INNOVATION OF FINLAND EDUCATION] 중에서 -

한번은 몇몇 사람에게 끊임없이 기운을 북돋아 줄려고 노력하다가 의지하는 마음과 얄팍한 이익을 취할려는 마음으로 살며시 편승해 오는 것을 보고 경악한 적이 있었다. 자율적인 노력을 소홀히하는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정치적 권력이나 종교적 믿음에 쉽게 의존하는 경우를 보았다고 할 수 있겠다. 스스로 사고하지 않는 나약한 대중은 강한 편에 서거나 강할 가능성이 확실한 편에 선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대중의 저항열기마저도 그렇게 반가운 일은 못되는듯 하다. 자율적인 교육이 바탕이 되지 않는 사회구성원들은 끊임없이 강해보이는 편에 설 것이기 때문이다. 협동심을 비롯한 철학적 교육은 중요하다. 터키는 종교가, 한국은 이념이 교육철학의 발전을 억압했고, 결과는 수직적 권력사회와 권력에 대한 욕망, 심지어는 파도처럼 저항하는 기세까지 낳았을 것 같다.

한국의 촛불 시위는 이성적이고 조용한 저항이었기 때문에 더욱 존경받고 터키의 비폭력 무저항 시위도 발전된 국민의식을 보여주는듯 하다.

2017년 6월 24일 토요일

법조계몽, 법조개혁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70622500086&wlog_tag3=daum



대법원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판사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책임과 권한이 즉각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법조문화의 특성은 매우 보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조계내에서도 대법원장사퇴의 요구가 있다면 적폐의 도가 지나쳤다는 현실의 반증이기도 한것 같다. 그러나 법조계의 일들은 '적폐'라고 하기에는 애매모호한 현실이 있는데, 양형에 따른 판단만 하면 되는, 외부의 긴박하고 다이나믹한 경제현장처럼 성과가 보여지지 않는 법조계는 꾸준히 변화하지 않는 옛사람을 양성해내는 중인듯 하다. 항상 걱정스러운 점은 법조계가 내집단화되어서 사회나 시대가 요구하는 개혁의 발목을 붙들고 늘어지는 일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생각이 다른 법조인들도 많은듯 하다.

18세기 프랑스혁명이 일어날 당시 프랑스인들에게는 먼저 계몽사상이라는 철학이 생겼다.

이성에 대한 프랑스인의 신념은 1세기 동안에 인간정신이 여러가지 우수한 성과를 거두었던 만큼 더욱 확고하게 되었다. 뉴튼은 지구와 천체의 복잡한 운동, 그리고 물체의 낙하 등이 하나의 단순한 법칙으로 일관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성이 해석기하학, 수학적 광학에서 개가를 올렸는데 정치와 형이상학에서 실패할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스피노자는 윤리학을 이론화했다. 이성이 이때까지 완전한 사회를 수립하지 못해한 것은 이성이 미신과 전통에 구속되어 인간활동을 지배할 자유를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이 진보를 거듭하는 데는 이러한 속박을 절단하고 아직도 사상과 관습을 좌우하고 있는 중세기적인 잔재를 일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악법이 불행한 사회를 조성했으며 정당한 법만 가질 수 있다면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왕국에서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하여는 전통적인 현존 관습을 버리고 단순하고 자연적인 규율로 대체하면 그만일 것이다.

디드로(Denis Diderot, 1713 - 1784 : 철학자)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고난의 간략한 역사를 소개하면 이러하다. 옛 적에 한 자연인이 있었는데, 어느때 인위적인 인간을 도입하였더니 그때부터 동굴 안에 내란이 발생하여 일생을 두고 계속되었다."

이 인위적인 인간 즉 전통과 미신을 가진 인간을 제거하면 동굴안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 앙드레 모로아 [프랑스사]중에서 -

아마 한국에서 무리지어 다니면서 사회개혁을 막는 세력이 있다면 이념세력과 종교세력 그 다음이 법조세력일 것이다. 어디서나 누구나 그런 것이 아니지만 작위는 부작위를 구축(毆逐 / expel)하고 행동하는 자가 무리의 정세를 지배하는 현실을 볼때 권력을 얻고자 하거나 권력을 지키고자 하는 무리의 일원은 다른 성실한 구성원의 소극적 태도를 압도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점을 생각할때  조직내부의 서열이나 계층구조에 압박받는 잠재적 개혁가도 많을 것이다. 대법원장 사퇴에 대한 요구는 현실보다 더 활발한 요구일 수도 있을 것이다.

가끔 민원을 담당하는 공공기관이나 법조계같은 관(官 / a public body)의 분위기변화를 살펴보면 정치권이 보수적이냐 개혁적이냐에 따라서 분위기가 많이 변한다. 쉽게 말하면 고객인 국민에게 친절한 정도가 달라진다. 그러니 개혁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문제는 조금 더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문제일 수가 있긴하다. 하지만 사회가 허황된 이념에 빠지는 것 만큼이나 개인의 철학이 더 근본적이고 주체적으로 발전해 나가야 할 과제가 있다.

생각해보면 매일 성경이나 불경같은 종교경전 한권만 받아들이는 사람의 보수성만큼이나 법조문과 법조문화와 같은 폐쇄적 세계를 접하는 사람들이 독단(dogma)과 아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 같다. 반드시 '적폐'라고 분노한 표현을 하기 이전에 법조계의 생태는 많은 국민들의 이해를 필요로 한다. 특히 대법원장의 문제는 수직적 권력관계가 '매우'강한 일본 사회에서 만들어진 법을 계수하고, 권위주의 정치권력밑에서 성장해왔던 법조인이 습관상 개혁적인 성향을 가질 수 없을 것이라는 추측은 할 수 있겠다.


모여서 무리지어서 어떤 세력을 형성하기전에 철학적 사고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감히 나에게' 아니면 '감히 우리에게' 같은 유치한 영웅적 태도는 한 발을 빼고 외부에서 바라보면 조롱거리가 될 정도로 사회구성원들의 생각은 많이 변한듯 하다. 이런 시대에 대법원장이나 검찰은 옛생각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외부에서 변화의 요구가 더 크게 자극되기 전에 스스로 변화하는 것이 자존심을 살리는 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자존심은 '공리적 헌신'이 담긴 철학이 바탕이 되어야 할 것같다

2017년 6월 22일 목요일

비밀공작네트워크와 정책

이념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종교네트워크를 관찰하는 일이었다. 20여년전 종교단체나 종교적 카리스마를 갖고자 하는 자들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선의의 목적이 없는 자들이 일반신자들을 네트워크로 이용하는 것을 보았다. 특별한 훈련이 되어 있다기보다 인내심으로 얼굴표정을 숨기고 지냈는데, 정부네트워크에 비하면 아기자기한 집단이라서 대외적으로는 크게 문제삼지않고 가능한한 남위에 군림할려고 하지말고 자세를 낮추고 살라는 충고로 대신했다. 수치심과 분노로 얼룩진 그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서 두고 두고 쓸데없는 자원낭비를 하겠구나 하는 염려가 들었다. 어떤 이는 왜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에 내가 참견을 하느냐고 앙앙거렸지만 먼저 욕망을 갖고 손짓을 한 것은 그 사람들이었다. 이런 상황은 미끼를 물었다는 표현이 적절한 것 같은데, 지금도 서로의 영악스러움에 얼굴이 붉어지는 추억이었던 것 같다.

더 엄청난 일은 훗날 9년동안 벌어진 일이었는데, 대통령이란 사람들이 국가정책은 엉망으로 실행하면서 종교네트워크나 공안기관의 네트워크를 이용해서 공작정치를 펴기에 바빴다. 관찰의 냉정함을 유지할려면 진영논리에 빠져서도 안되고, 국가의 미래를 엉망으로 만들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가능한한 바른 길로 가도록 유도해나갔다. 블러그로 관심을 끌면서 하고자 하는 말을 했는데, 권력의 힘에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서 떠돌아 다니면서 이일 저일을 했다. 한국의 사회적 자유가 세계 56위라는 말을 실감했는데, 30여국에서 내 구글블러그를 방문하는 외국의 고마운 이들이 없었다면 보이지 않는 감옥에 수감될뻔한 답답한 상황이었다.

로이 고드슨(Roy Godson)은 그의 뛰어난 저서[Durty Tricks or Trump Cards]에 이렇게 썼다. "비밀 공작은 후원자에게 책임이 돌아갈 수 없는 방법으로 조건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겠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비밀공작의 근본적인 원칙 : 효과를 거두려면, 그것은 잘 조율된 정책의 일부분이 되어야 한다." 그는 비밀공작을 '정책의 시녀'로 묘사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비밀공작은 정책의 대체물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행동을 원하는지를 결정하지 못한 정부가  - 지속적이고 공조된 방식으로 자원을 투입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단순히 모종의 행동만 취하고자 하는 정부가  - 사용했을 때, 보통 역효과를 낳기 마련이다. 또한 비밀공작은 다른 모든 수단이 실패한 뒤 단독으로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총알도 아니다. 이것은 외교나 군사, 경제적 수단과 공조하고 지원을 받아야만 한다. 

각국 정부는 사람들과 사건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더 넓은 차원의 대외정책을 보충하는 수단으로 비밀공작을 벌이고 있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일도 아니다. 기원전 3세기, 알랙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마케도니아 왕 필립포스 2세는 이런 말도 했다. "때로는 어떤 군대도 통과하지 못하는 산맥을 금을 짊어진 당나귀가 지나가기도 한다."

- Henry A. Crumpton의 [The Art of Intelligence]중에서 -

내가 금을 짊어진 당나귀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절대 공안기관이나 정보기관등을 정책의 목적을 잃어버린 정부가 사용해서는 안된다. 자료와 판단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고자 하는 일이 시원찮은데, 정보기관을 멋지게 이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보기관이 스스로의 가치관을 정립하지 못하여 용렬한 대통령의 정책에 춤을 추다 함께 망가져가는 상황을 보면서 참으로 많은 참견을 했던것 같다. 이건 추측이지만 얼마전 우회적으로 내 블러그를 들어오는듯한 이웃나라 정보요원이 한국의 정치인들을 농락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런 태도를 인지하지 못하고 꾀죄죄한 모습만 보여주는 한국의 구세대 정치인들이나 언론은 각성해야 할듯 하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몇년전 당시 야당쪽의 어떤 작가와 통화를 하다가 당시 대통령에게 예우상 존칭을 붙였다. 좀 현실적인 말인데, 한국과 같은 현실에 그렇게 블러그글을 통하여 정부수반과 밀접한 교감(적대적이든 친화적이든)을 했으니 내 전화가 도청이나 감청 당할 것을 항상 생각하면서 통화를 해야했다. 때문에 언제나 진심은 오래 남는 글로 표현하지 지나가는 말들은 지나가는 말일뿐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별로 진지하지 않았다. 때로는 장난도 곧잘 쳤다. 그리고 몇일 후 에릭이란 필명을 가진 어떤 블러거가 대통령의 남자들이란 제목으로 몇 사람의 이름을 언급했는데, 그 속에 모든 국민이 알고 있는 몇 사람의 이름과 내 이름이 함께 언급되어 있었다. 그렇게해서 공작전은 진영을 가리지 않는다는 증거를 얻어냈고, 쓸데없는 일에 에너지를 소모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절대 대응하지 않았다. 어쨌던 내 목적은 이념에 의해 다른 판단이 흐려지는 것을 막는것이다.


북한의 정보기관은 외교력과 자금력의 후원도 받지 못하는데다가 사상적인 감옥에 갇혀서 전혀 일을 할 수 없을 것이지만 한국의 정보기관도 어느 정도는 그런듯 하다. 사상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다른 공안기관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네트워크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수치스럽게도 별 볼일 없는 종교집단정도로 국가시스템을 운영할려고 했던 대통령들을 내 능력껏 막기위해 최선을 다 했지만 다신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 북한과 하향 평준화 될 가능성이 짙다. 그러잖아도 이념과 종교는 비숫한 성향이 있어서 적폐의 길로 방향을 바꾸면 아주 나빠지는건 마찬가진데, 그 둘을 이용해서 아기자기하게 한반도를 꾸려갈려고 하는, 아니면 했던 권력자들을 생각하면 괴이한 경험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연못가에서 아이들이 놀다가 돌을 던졌는데 연못속의 개구리가 맞아 죽었다.

전화를 감청하거나 미행하는 건 자유고 멋진 정보전의 표현일 수 있겠지만 잘못된 정치로 비극적인 삶을 진행해가는 국민들을 보면 좀 더 신중하고 인자하며 진지해야 할 분야가 정보분야인듯 하다. 

2017년 6월 21일 수요일

사격훈련과 감정신호 / 폴 에크만

50미터권총사격종목이 도쿄 올림픽때부터 없어진다고 한다. 금메달을 독식했던 진종오선수를 비롯한 아시아선수들에게는 실망스러운 결정이다. 현역선수는 아니지만 22구경 실탄권총사격종목이고 10미터 공기권총종목에 비해서 조금 더 재능이나 내면의 수양이 필요한 종목인것 같다는 내 나름대로의 판단을 하고 마음을 둘 수 있는 종목으로 여겼던 터라 함께 실망했다. 민간인이 총기와 친밀한 서양선수들에 비해서 동양선수들이 사격이나 양궁에 우세한 이유는 엘리트체육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를 이야기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좀 다른 이유도 있는듯 하다. 다른 종목들에 비해서 조금 더 절제와 수양이 필요한 종목이라서 동양의 전통적인 훈련방식이나 유전적인 재능등이 작용한듯 하다.


가끔 사회적 관계에서 정신이 혼돈스러운 일을 겪곤 하는데(정말 많이 겪었다. 그것도 고강도로), 그때마다 종교인이 신앙으로 돌아오듯이 정확한 사격이 가능한 멘탈로 돌아오는 습관을 키웠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건지는 알바가 아니고 내면세계의 평정심과 관찰력만 가져다주면 그것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모두 얻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과를 볼 수 있는 이상적인 순간도 염두에 두어야 하기때문에 올림픽에서 사격종목중 하나가 없어진다는 것은 진심으로 불쾌한 기분이든다. 사격은 할아버지가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거나 할머니가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기도 한다. 아마 평정심에서 잇점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사격을 염두에 두면서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습성이 생긴듯 하다. 얼굴표정으로 마음을 읽는 연구의 권위자인 폴 에크만(Paul Ekman 1934 - ) 캘리포니아대학 명예교수는 1960년대 후반 파푸아뉴기니의 원주민인 포레족과 미국대학생들과의 감정표현과 이해에 대한 교차실험을 했다. 서로 어떤 문명적인 교환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포레족과 미국대학생들은 서로의 얼굴 표정이 담긴 사진을 보고 서로의 감정을 정확히 판별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에크만 교수는 미국연방수사국(FBI)와 중앙정보국(CIA)등에서 범죄 용의자나 테러리스트의 표정 및 심리분석에 관한 조언을 맡았다.

사격과 명상같은 초합리적인 정신능력과의 연관성에 관심을 갖는 이도 있겠지만 장기간의 연습이나 마음에 두는 시간 자체가 명상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전 누구나 자주 쏠 수 없는 실탄권총과는 달리 스포츠권총은 진종오선수같은 엘리트선수를 극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근접해가는 연습실력과는 달리 진짜 경기에 임하면 달인과 평범한 사람은 분명 차이가 있었던것 같다. 아마 세상이치가 그럴 것이다. 어떤 일본 사업가가 돌 위에서라도 3년만 앉아 있어보면 깨닫는 것이 있다고 했는데, 지극히 일본인다운, 아니면 예의 동양인다운 발상이지만 사실 그렇다. 어떤 분야든지 1인자가 되는 길은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길 외에는 편법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고, 그 사실을 아는 바에는 속칭 '잔 머리'를 쓰거나 쓰는 사람을 보는 것이 불편해지는듯 하다. 

2017년 6월 17일 토요일

Why, 왜, 어째서

바로 직전 글에서 독서를 많이 한 모택동이 혁명지도자가 되었다고 서술했다. 그럴수밖에 없는게, 당시 위아래의 수직적 계층구조가 강한 사회에서는 사회현상을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인재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독서는 자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세계관을 좀 더 객관적으로 아니면 분석적으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다른 많은 세상을 경험함으로써 자아(自我 / ego)의 색체를 좀 더 엷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듯 하다.

한국에서 중산층이 붕괴되었다고 하는데, 좀 더 미래지향적인 중산층은 미처 태동되기도 전에 사라져갔다고 표현하는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가장 중요하고 포괄적인 문제는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수직적 권력관계와 이념과 종교로 편향화된 사고를 만들어낸 전통이라고 생각한다. 지배하거나 복종하거나 아니면 맹목적으로 믿으면 그만인 사회에서 개척정신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특히 동북아시아 국가들은 서양의 국가들에 비해서 합리적이고 분석적인 사고를 하지 않고 종합적 사고, 말하자면 두리뭉실할 수 있는 사고를 하는 습관이 있어서 사회발전에 많은 진통을 겪는듯 하다.

중산층 부모는 노동계층 부모에 비해 아이에게 책을 훨씬 많이 읽어준다. 중산층 가정에는 단순히 재미로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게 아니라, 아이가 책 속의 대상과 바깥 세상의 대상을 연결 지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중산층 가정의 아이는 아주 어릴 때부터 책 내용을 질문 받으리라 기대할 뿐만 아니라,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도 알고 있다. 부모는 아이에게 대상의 속성을 질문하고 그 특징에 근거해 범주화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노동계층의 아이는 책을 읽어주는 사람과 대화하도록 양육되지 않는다. 대신 "이제 너는 잘 듣는 법을 배워야 해"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 Richard E. Nisbett 의 [INTELLIGENCE]중에서 -

생각해보면 내 인생의 가장 후회스러운 시간중의 하나가 암기식 시험공부에 손을 댄 시간들이었고, 가장 생산적인 시간들이 이념이나 종교를 연구하기 위해서 사회집단이나 개인을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자아(ego)의 표현일 수 있지만 관찰 분석하지 않는 전통은 사회적 적폐를 남긴다는 증거를 한국사회 여러곳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요즘 계속 검찰권력에 대해 비평하는 편이지만 종교, 이념과 관련해서 맹목적인 복종이나 순종을 권유하는 습성을 가지거나 수직적 권력관계에 익숙한 사람들이 자율의식을 가지거나 도덕이나 윤리라는 개념을 더욱 진지하고 신중하게 받아들일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게 좋을 것 같다. 자칫하면 자신이 강요받았던 관계를 그대로 타인에게 강요할 수 있는데, 이런 관계는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습성에 길들여지게 될 것같다.

2017년 6월 15일 목요일

성공과 변화 / 그랜트 스터디(Grant study)

자동차로 반나절을 달리면 종단할 수 있는 작은 땅이지만 산이 많아서 그런지 지리적 특색이나 풍속 습관등의 차이가 꽤 있는 한국은 심리적영토가 꽤 넓은 편이다. 아마 그래서 지역감정이나 이념감정등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가끔 집에서도 심리적 영토를 넓히는 방법이 있는데, 다방면의 책을 많이 읽는 것이다. 어느 한 분야의 집중적인 학습으로 인한 전문가에 대한 환상이 깨진지는 오래되었다. 모택동은 젊었을때 책을 많이 읽을려고 중학교를 자퇴하고 다방면의 지식을 쌓고 혁명가가 되었다. 그리고 혁명의 전문가가 되고 혁명의 정신적 바탕인 이념의 전문가가 되면서 정신이 고착화되어 자신이 개혁시킬려고 했던 봉건적적폐를 답습하고 있었다. 북한도 모택동의 중국과 같은 패턴을 보이지만 더 오래 가고 있다. 아마 주은래나 등소평과 같은 개혁가의 등장을 막아버린 세습독재의 부작용이라고 생각한다. 김정은과 같은 집권자가 변하기전에는 중국과 같은 개혁이 없을 것 같다.

가끔 옛 친구들을 만나면 산전수전을 겪은 친구들과 그렇지 않은 친구들은 많이 다르다. 다른 세상을 보지 못할수록 생각은 옛생각에 머물러있는듯 하다. 다양한 삶을 취할려고 노력해보지만 외부세상에 온몸을 던져놓기까지는 다양한 삶은 경험하기 힘든일인듯 하다. 역사적 풍파가 많은 한반도에서 성공적인 삶의 이상형은 안주하는 삶을 사는 것이고, 최소한의 안전을 구하기 위해서는 출세를 해야하고, 어떤 지위를 얻어내기 위해서 아니면 지켜내기 위한 태도가 적폐적 현실로 발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성공적인 삶이란 무엇일까.

1938년 하버드대보건소의 알리 보크(Arlie Bock)박사와 클라크 히스(Clark Heath)박사는 하버드 대학교 졸업생중 몸과 마음이 건강한 268명을 선발하여 대학졸업후의 삶을 70년동안 추적했다. 그 결과 30퍼센트는 뚜렷하게 성공한 삶을 살고 30퍼센트는 뚜렷하게 실패한 삶을 살고 있었다. 이 연구는 그랜트라는 후원자의 도움으로 이루어졌기때문에 그랜트스터디(Grant study)라고 한다.

2차대전을 겪으면서 대부분 동일선상에 우월적인 행태와 지위에 있던 졸업생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삶의 명암이 점차 크게 차이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성공과 실패는 살아가면서 터득하는 삶의 기술에 의해 결정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랜트 스터디의 결론을 대충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성공적인 삶은 주관적 만족도, 객관적인 소득이나 지위, 성취여부, 여가 심신의 건강등의 척도로 보아서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
2) 우리가 흔히 드라마에서 보듯이 어느 한 충격적인 자극으로 인생행로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삶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습관이나 특성으로 인해서 성공이 결정 된다는 점 
3)삶에 있어서 없을 수 없는, 고통이라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긍정적으로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성공이 결정된다는 점
4)스스로를 빚어낼 수 있는 심리적 기술에 의해서 인생이 결정된다는 점

나름의 결론을 내리면 성공이나 행복이라는 것은 끊임없는 변화에 대한 투입(INPUT)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변화지 않으면 기회조차 오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보기도 한다. 

2017년 6월 10일 토요일

줄 수 있을때 받아야 하는 권력 / 마빈해리스

http://v.media.daum.net/v/20170610215708802?rcmd=r

한 보수정당의 대표가 망해가는 보수를 바꾸고 싶다고 말한다. 작금의 정치적 사태를 살펴보면 충분히 이해되는 절규다. 특히 보수진영에서 흔하지 않게 개혁을 추구했던 인물로서 진실성과 헌신성등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받고 있는듯 하다. 하지만 정권획득을 목적으로 한 정당이란 집단속에서 혼자만 갈 수도 없는 환경이라서 그만큼 고통이 심한 것으로 생각된다.

미리 결론을 말하자면 공동체내에서 권력을 얻는다는 것은 공동체에 기여하기 위한 수단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기존의 보수진영에서는 권력과 공리적 헌신을 다른 문제로 생각했기때문에 필연적인 결과를 얻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권력을 추구한다는 것을 이제는 누구나 쉽게 파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민도(The people's standard of intellectualize)가 향상된 점이 있다. 예전처럼 힘이나 술수로 권력을 얻어내는 시대가 점차 지나가고 있는듯 하다. 굉장히 바람직한 현상이기도 하면서 시장경제의 모습처럼 정치권력의 시장에서도 '주고 받는 교환 관계'가 중요한 거래방법처럼  흘러가는 면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여기에서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은 교환관계를 통해 사회적 복잡성을 구축해 가는 과정의 그 어느 단계에서도 주고받는 반응을 지배하는 유전적 통제가 전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 조상들이 손도끼와 굴봉을 만들도록 타고나지 않았듯이, 애덤 스미스등의 고전 경제학자들이 믿는 것처럼 <교환하고 거래>하도록 타고난 것도 아니다.

성관계를 통해 원시적으로 주고받거나 서로 털을 손질해 주는 것을 넘어서 교환의 영역을 확장해 가는 데는 하나의 단순한 행위 관계가 일반화되는 것이 필요했다. 즉 아파렌시스와 하빌리스는 자기에게 무엇을 준 자에게 자기도 무엇을 주면 그에게서 또 다시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배워야 했다.

- 중략 -

그러나 일단 문화적 도약이 이루어진 이후로는 교환 관계는 재빨리 진화하여 다양한 경제적 거래로 전개되었다. 선물 교환, 물물 교환, 교역, 재분배, 세금, 그리고 결국 구매와 판매, 봉급, 그리고 임금으로 세분화된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을 친구관계나 결혼으로 묶어주고 가족과 공동체, 그리고 더 고차원적인 정치 및 기업기구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교환이다. 

-  Marvin Harris의 [OUR KIND  WHO WE ARE  WHERE WE CAME FROM  WHERE WE ARE GOING ]중에서 -

생각해보면 남북분쟁의 비극속에서 한국을 지켜낸 보수진영과 민주화운동에 희생을 한 진보진영이 무엇인가 '주었다'는 명분을 가지고 정권획득을 위해 노력한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지난 10년의 보수정권이 보여준 것은 '가지려고만 하는 행태'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무능하면서 권력만 탐하는 모습이 민중들을 크게 각성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차후에 총선때도 한 번 더 평가를 받겠지만 이제는 정치적 관점자체를 변화시켜야 할 듯 하다. 아직도 보수정당의 한 끝에서는 국민의 고통보다는 이념을 운운하며 얻어낼려는 행위는 보수진영의 미래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