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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31일 토요일

롤스의 중첩적 자유주의와 이념카르텔


정치철학자인 롤스(1921~2002)는 [정치적 자유주의]란 저서에서 자유주의 사회의 다양한 신념들을 공존에 필요한 협동조건으로 수렴해내는것이 '정치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합의가 필요한데, 이러한 합의는 모든 신념들이 인정할 수 있는 '중첩적 합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회의 다양한 가치를 수렴하기 위해서는 정치는 긍정적인 역할로 사회여론을 선도해 나가야 하는데, 이념을 통한 갈등유발적 사건들을 접하면서  이념적인 정치주체는 한국 정치의 문제아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끔은 그들 주체가 암묵적으로 상대적인 이념 카르텔을 형성해서 각 주체의 영속성에 공헌하고 있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심하게는 새디스트와 매저키스트의 공생이 느껴지기도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물론 그들 이념적 정치주체는 역할을 교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때가 종종있다. 

양쪽 다 롤스가 이야기하는 '중첩적 합의'를 끌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합의를 깨는 역할을 해내고 있는데, 한국사회에서 이념을 이야기하는 모든 정치적 주체는 없어도 되는 것들에 대한 지나친 관심으로 사회를 퇴보시키는  지하정치, 또는 정치적 마피아들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것이 아닌가 하는생각이 들때가 있다.


2013년 8월 29일 목요일

애국심과 자유의 조화 / 센과 테일러


이번에 있은 국정원의 이석기의원 압수수색사건은 극과 극의 대결인것 같다. 자유의지와 애국을 중시하는 시민들에게 큰 자극을 가져다 준 사건임이 분명한듯 하다. 둘 다 양립하여야 하는 중요한 가치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이념문제가 개입하여 둘 사이를 대립적인 가치로 양분화시키는 현상이 강하다. 사실 애국을 위해서는 자유의지가 중요하고, 자유의지를 위해서는 국가가 중요한것 같다.

학창시절 애국을 신앙처럼 생각하는 동료가 있었다. 나중에 인터넷 닉네임로도 애국자라는 별명을 사용하면서 자신은 국가를 위해 힘쓰는 수호자로서 자신을 동일화시켜나갔다. 한 편으로는 약자를 해방시키고 진정한 민주주의와 자유를 얻기위해 투쟁하는 투사로서 자신을 동일화 시켜나가는 동료도 있었다. 문제는 이 양쪽이 어느 누구도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에 헌신적인 모습을 그다지 보여주지 못하고, 결국 개인적 이익과 자신들이 연대하는 집단의 이익앞에 정지해버린 모습을 보여주면서,시작과 정상부터 일그러진 한반도의 정치현실을 대변해주는 작은 아류(兒類)로 행세하고 있었다.

사실 자유의지와 애국심은 서로의 가치에 헌신하는 중요한 문제다. 캐나다의 정치철학자 테일러(1931~ )는 애국심은 애국주의적인 동일화(patriotic identification)를 통하여 시민들에게 덕과 정체성을 고양시킴으로서 구성원간을 통합시키고, 통합된 연대의 안에서 개인의 자유는 현실화된다고 보았다.

인도의 노벨상 수상자인 경제학자 센(1933~)은 발전이란 경제학적인 GNP의 성장이나 경제발전이 아닌 교육기회나 사회보장, 의료보험등의 헤택을 통해서 자아를 실현하며, 그것이 참된 자유라고 이야기한다. 센은 민주주의가 발달하면 기아가 줄어든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는데, 국민이 국가를 감시하고 견제함으로서 국가가 국민의 호감을 얻기위해 일을 더 열심히하는 결과라고 한다.

한국의 관점으로는 위 두학자의 견해가 시민의 진정한 자유라는 공통된 목표를 지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파와 좌파 이데올로기로 채색이 되어 왜곡될 수 있겠다 싶다.

북한은 선전과 통제활동으로 애국주의적 연대감을 심어줄려고 시도했지만 국민의 국가감시기능이 전무함으로써 발전의 동기를 잃어버린 대표적인 예가 될수 있는듯 하다. 한국에서도 시민의 진정한 자유라는 목표가 정치인들에 의해서 이데올로기라는 가치로 대치될려고 하는 성향이 강한데, 시대를 역행하는 현상인듯 하다.

북한의 군인사(軍人事)



지난번에 소장파인 장정남이 노장파인 김격식을 밀어내고 인민무력부장으로 승진한 이후에 리영길이 상장에서 대장으로 승진을했다. 소장파로의 대폭적인 군인사 개편은 예고된 일이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바람직한 일이기도 한것 같다. 과거로부터의 경험이 전혀 무익한, 환언하면 성공한 체제가 아닌 북한으로서는 과거의 이념적인 군수뇌부를 그대로 유지시켜서는 안될것 같다.

북한군 고위급인사는 지도자가 바뀌면 함께 교체되는 성향이 강한데, 역설적으로 보면 그만큼 북한의 지도자는 북한군수뇌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해석을 할 수 있을것 같다. 선군정치에서 군사통제권은 군부와 북한지도자의 불가분한 밀착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자연스러운 인사의 어려움도 의미하는것 같다. 자유로운 정체(政體)인 한국에 비해서 저항을 각오한 도박이기도 하기 때문에 큰 변화가 아닌 순차적인 수뇌부의 교체만해도 그 의미가 상당한것 같다.

고황장엽선생이 망명할 당시도 김일성세대인 항일 빨치산세대에서 김정일세대로 북한수뇌부의 물갈이가 진행되던 시기였는데, 1.5세대라고 할 수 있는 고 황장엽선생의 입지가 당시에 매우 불안정했던것으로 생각된다. 북한정치사상의 대부로서 역할은 했지만 입지를 지켜줄만한 파벌이나 시스템, 주민들에대한 인지도 등이 없는 처지로서는 숙청이나 망명중의 한가지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는 생각이다.

북한지도자가 군부에대해서 느끼는 위협만큼이나 인사행위도 극단적인 모습을 보일수도 있겠고, 제한된 직위에 북한지도자가 필요한 인맥을 확보하기 위해서 제로섬게임을 하지 않을수가 없는데, 폐쇄된 국가에서 지도자의 신임을 못받고 버려지는 고위급인사의 운명은 극단적일듯 하다. 이런 상황을 알고있는 구세대의 군  인사들은 연대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켜나고자 할텐데, 선군정치의 모습이나 군사적도발의 형태로 자신들의 권익을 지켜나가고자 할것 같다.

야당이나 비판세력에게 귀를 기울여야 하는 한국정부처럼 북한정부도 보수세력의 극단적인 선택에 신경을 써야하는 부담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것 같다. 개혁과 개방을 위한 노력이 일당독재체체라고 해서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님이 느껴진다.

2013년 8월 27일 화요일

불완전한 시민을 완전한 시민으로 / 스트라우스


투쟁상태에서 빠르게 화해상태로 넘어온 전 경찰청장의 변화를 보면서 이념문제의 덫에 걸려있는 한국정치인들의 '원죄'가 깊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철학자 스트라우스(1899 - 1973)는 참된 정치는 인간의 도덕적 덕을 실현하는데 있다고 보는데, 국민화합이 언급되는것을 보면서 도덕적 덕이 부분적으로 실현되는듯한 생각이 들기도한다. 도덕적인 변화가 명확히 드러난다면 부도덕한 과거도 명확해진다는 역설도 성립이 되니 문제이긴 하다. 

인간본성을 악하게 보는 사회계약론자 홉스는 악한 인간들끼리의 만인대 만인의 투쟁을 극복하기 위해서 국가가 필요하고 군주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반드시 인간은 권력의 통제하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독일의 헌법학자 칼 슈미트는 홉스가 주장하는 자연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서 적과 동지를 구분해주는것이 정치가 할 일이라고 말한다. 칼 슈미트의 권위적인 정체(政體)를 옹호하는 이론은 나찌정부의 이념적 바탕이 된 사실은 널리 알려져있다.

스트라우스는 도덕률을 중시하는 칸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도덕적인 덕을 실현하도록 노력해야하는 정치의 과제와 국가란 국민이 동화적으로 통합되어가는 과정이라는 루돌프 스멘트의 사상이 종합적으로 적용된다면 좋은 정치이념이 탄생할것 같다.

인간이나 사회의 현재상태를 정지된 개념으로 정의를 내린다는 것이 점점 바람직하지 않는 시대가 오고있는듯 하다. 정보통신이나 교통의 발달에 따라서 변화도 빨라지고, 변화를 추구하는 시대형성작용도 강력해지는듯 하다. 그만큼 정치의 끊임없이 투입되는 도덕적인 의무가 요구되는 시대인듯 하다. 올바른 길을 위한 정치인 스스로의 끊임없는 자기투쟁,국민에 대한 도덕적인 계몽으로 완전한 시민과 완전한 국가로 이끌어가는것이 정치인의 의무인듯 하다.

제대로된  정치적인 야망이 있다면 권력투쟁이나 이념투쟁의 덫을 내면으로부터 과감하게 벗어던질수 있도록 자신을 살펴봐야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타성을 깨고 변화하긴 힘들지만 진화와 발전같은 미래지향적 사고는 피할수 없는 숙명같은거라는 생각이 든다.

2013년 8월 26일 월요일

한국경제 일본경제


크게 납득이 가는 내용입니다. 일본이 문제가 없는것은 아닙니다. 기업내의 연공서열이라던가, 특유의 장인정신,관료주의나 형식주의같은 전통을 버리지못해서 창조경제를 활발히 못이루는 문제가 있습니다.게다가 저출산 고령화문제는 일본경제의 성장동력을 늦추고 있습니다. 자연재해도 일본을 괴롭히는 문제중의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인적자원밖에 없는 나라로서 총체적 위기극복능력은 세계최고입니다. 일본의 뿌리깊은 전체주의적인 성향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의 국가정책이 사익(私益)보다 공익(共益)우선의 정책을 펴게만듭니다. 일본인들은 정부를 주군(主君)으로 모시고, 정부는 국민을 주군으로 모십니다. 한국에 비해서 공리적(共利的) 사고가 바탕이된 경제정책은 위기대응방법을 유기적으로 연계시켜줍니다. 좌파우파논리로 나뉘어서 경제정책이 시도되거나 사익이 우선하여 스스로 맞물려가는 미국식 경제스타일을 가진 한국이랑은 많이 다릅니다.

미국은 풍부한 자원과 발달된 과학기술, 축적되어 온 인적투자로 인해서 완전한 자유방임에 가까운 경제임에도 경제는 살아있습니다. 특히 국방과학기술이 경제를 끄는 견인차역할을 합니다. 미국의 강한 국력은 세계도처에서 국방과학기술이 발휘될수 있는 자유로운 여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과는 많이 다른 경제기반을 가지고 있으면서 한국은 미국식 경제정책을 따릅니다. 미국유학파가 한국의 경제정책을 담당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한국은 인적자원만 있으면서도 그 인적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과거에 고시공부나 지금 공무원시험에 매달리는 노동인력의 실상만봐도 답이 나옵니다. 다른 필요한 부분에 인적자원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방법에 실패한 모습입니다. 한국의 인적자원 배분방식은 사익을 대단히 존중하는(?)성향이 있거나 완전한 자유방임에 맡기고 있는 모습입니다.

한국의 경제정책이나 교육정책등은 유기적으로 연계가 되지 않습니다. 좌파우파논리의 장벽, 포퓰리즘적인 정치, 헌신적이지 못한 정치윤리등이 문제입니다. 한국은 극단에 끌려다닙니다. 공리를 생각하면 좌파나 전체주의라고 인식합니다.
한국의 경제정책은 배제해야될것이 많은 '틀'안에서 이루어지기때문에 유기적인 연계성을 잃어버립니다. 저출산고령화문제는 한국이 일본보다 더 심합니다. 공무원말고는 안정된직장이 없습니다.한국인은 불안정한 삶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사실 일본은 강합니다.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일본에 뒤지기 시작하는것을 보면서 강한 일본과 약한 한국의 현실을 느꼈습니다. 일본에게 배울것이 많습니다. 공리(共利) 적 국가운영방식은 일본뿐만 아니라 핀란드같은 북유럽국가들도 크게 성공한 방식입니다. 한국의 정책프레임은 재검토되어야 합니다.  

2013년 8월 25일 일요일

정치와 종교가 의사소통의 합리성을 깨다


학창시절 이념으로 인한 냉전이 가져다준 비극적인 인간관계를 체험한 적이 있었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적색분자로 몰아 고발한 모양이었다. 뜬금없이 가택수색을 당한적이 있었고, 운동권 친구들에게는 백색분자로 오해를 받았다. 개인적인 문제로 이념에 대해 원한관계가 깊게 설정된 바탕위에 이념이 국론을 분열시키는 작용을 한 몸으로 다 받아서 체험한듯 하다. 

참으로 많은 시간들을 긴장하면서 살아온듯 한데, 한 편으로는 내면적인 성장을 일구어준 소중한 시간이기도 한것 같다. 그 이후로 죽 종교나 정치에 대한 시선이 냉정해지는 느낌이 들었는데, 정치와 종교가 대의적인 명분을 도구삼아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려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문제가 인식이 되기도 한것 같다.

이념이나 교리같은 눈에 보이지 않아서 검증할 수 없는 문제를 도구삼아서 시민들이나 교인들을 지배하는 구조가 눈에 들어온것도 험한 경험의 덕인듯 하다.

독일의 사회철학자 하버마스(1929~   )는 일상적인 생활세계에서 폭력과 강제에 빠지지않는 타당한 합의를 목표로한 의사소통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의사소통의 합리성이 추구하는 진리는 주관과 객관의 이원론에 기반을 두지말고 상호이해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사회체계나 국가체계를 믿고 의지하며 열심히 살아갈려는 시민들에게 편향적인 의사소통, 말하자면 자신의 것은 들어내보이지 않으면서 주욱 관찰자로서 작용을 하면서 에너지를 섭취하는 기생적인 존재가 이념적인 정치나 종교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많다.

내가 세금을 내면서, 아니면 십일조를 내면서 그 힘으로 나를 관찰하고 지배하는 여력을 만들어준다는 불공평한 상황은 알면 참기힘든 일이기도 한것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그런 불공평함에 익숙한 시민들은 타성을 벗어나지 못하는듯 하다. 어떻게 보면 대단히 한국적인 상황이기도 한데, 장기적으로 국력신장에 큰 족쇄가 될것 같은 생각이 든다.

2013년 8월 24일 토요일

이념과 정치적 준지대(quasi-rent)


"많은 실패를 겪더라도 최고의 자리를 바라보라" 역경을 이기고 미국의 대통령이된 링컨의 말이다. 가끔 사회의 여러분야에서 그 세계로의 진입장벽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것 같다. 정보통신의 발달로 많이 해소가 되어가는 느낌이지만 구세대의 감각은 '우리세계'의 의미가 생각보다 중요한것임을 느끼게한다.

언젠가 새로운 정치돌풍을 일으킨 국회의원이 갑자기 대통령후보로 거론되자 정치세계에 익숙하지 않음을 비평하는 기존 정치인의 비평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애매모호한 정체성을 비평하는 기존 정치인의 비평이 또 있었다.

모든 일에서도 그렇지만 정치적인 목표가 이타적이고 공리적이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그냥 익숙해지는 일중의 하나로 자리잡는듯 한데, "누가 되던지 되고나면 다 똑같다."는 정치에 부정적 관점을 가진 대부분의 시민들의 표현이 어쩌면 순리인듯 하다.

경제행위에서 어떤 이익집단이 새로운 구성원의 진입을 막음으로써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성향이 있는데, 이것을 경제학자 마샬은 '준지대'라고 표현하였다. 생각해보면 정치세계에서도 이런 준지대가 존재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변호사나 의사의 숫자제한등의 준지대행위는 직능집단의 의회진출이나 경제적로비등이 수단이 되지만 한국정치세계에서 준지대의 수단이 되는것은 '이념적 정체성'인듯 하다. 가장 포괄적이고 국민생활의 가장 정점에 있는것이 정치분야인 만큼, 변하지 않는 세계를 만들기 위한 이념의 장벽은 극히 장대한 넘사벽인것 같다.

그렇다고 준지대의 피해자인듯한 정치신예가 옳고 바르다는 검증을 하기 힘든 문제도 정치적 준지대를 막을수 없는 원인이 되는듯 하다. 앞서 링컨의 한마디를 소개했는데 노예해방이라는 초유의 업적을 이루었지만 최고의 자리에 연연한 모습에서 '덜 이타적인'목표에서 발생하는 링컨의 인간적 고뇌를 이해할 수 있을것 같다.  

살아있는 생물체와 같은 정치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역시 살아있는 생물체와 같이 이타적이고 공리적인 목표의 계속적인 내면적투입이 있어야 할것 같은데, 쉽지않은 일인듯 하다.싱가포르의 국부(國父)인 리콴유처럼 처음부터 이념적인 바탕이 없는곳에서 시작하기는 쉬우나 이념적 준지대가 이미 형성되어있는 한국에서는 이념적 정체성이 없는 정치인의 여정이 많이 힘들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2013년 8월 23일 금요일

주체적시민과 계급이데올로기 / 그람시


몇일전 우체국직원의 민원처리태도에 대해서 아쉬운점이 있어서 국민신문고에 의견을 넣었다. 해당 직원개인을 겨냥한것이 아니고, 다른 금융기관과 비교되고 경쟁관계에 있는 우체국의 입지와 공공기관의 특징이 연루된 사안이었다. 몇개월전 진짜권총을 팔겠다는 제안이 와서 경찰청에 제보한 이후 국민신문고에 의견을 제시한것은 두번째인데 그다지 활력있는 제보활동을 하지 않는 조용한 소시민으로서 사는것 같다.

그런데 신문고에 올린 글을 다시 읽어보고 해당기관장분의 정성이 담긴 사죄의 전화를 받고 나서는  주체적인 소시민의 의견이 아닌 공공기관의 입지전체를 연루시키는 의견으로 확대될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좀 미안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이탈리아의 혁명적 좌파 정치가였던 그람시( 1891 ~1937)가 이야기한 '대항이데올로기를 만들어서 노동자들의 집단의식을 일깨우는 유기적 지식인'에 관한 이론이 생각이 났다.

쉽게 표현하면 공공기관과 시민의 관계가 정당한 서비스를 받을 권리관계를 넘어서 갑을의 지배관계로 비화되는 일이 일어난것 같았다.

그람시는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지 지식인 활동을 수행한다고 한다. 그런 활동에는 두가지 유형이 있는데, 첫번째는 예술가나 철학자, 또는 성직자처럼 도덕적이거나 이상주의적인 이데올리기를 따르므로서 편을 가르는 시류(時流)에 휩쓸리지 않는 방식으로 안온(安穩)함을 구하는 방식이 있고,두번째로는 한 시대의 헤게모니를 잡고있는 자본가들에 맞서는 대항마로서 노동자들을 결집시키기위해 '정당'을 만들어내는 지식인의 형태가 있다고 한다.

정보통신이 발달하고 교육수준이 높은 요즘시대는 그람시의 두번째유형의 지식인들이 의미가 없는것 같다. 마르크스의 계급적인 시민분류방식보다는 베버의 계층적인 시민분류방식이 훨씬 어울리는 시대가 도래한지 오래된것 같다. 예를들면 자본가이면서 교육수준이 낮은 시민과 노동자이면서 교육수준이 높은 시민이 공존하며, 어떤 계층을 싸잡아서 비판하다가도 가족이나 친구중의 누군가가 비판대상에 포함되어있다는 생각이 들어 슬그머니 억양이 낮아지는 시대인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는 여전히 좌파와 우파, 지배와 피지배라는 양면적인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같은데, 북한이라는 존재와 지식인들의 정치적인 욕망들이 어우러져 발생한 특이한 상황인것 같다. 사실 시민들의 현실과 기대는 훨씬 다양하지만 정치시스템을 통해서 산출물로 전환되어 나올때는 좌파와 우파라는 색깔로 이분화되어 나오는 고질적인 병폐가 보이는것 같다.

나는 왜 우체국에 민원을 제기했을까. 시민의 한사람으로서 친절한 도움을 받고자했지 민원인의 편에서 공공기관이라는 거대조직에 대항하는 장렬한 시민은 아닌듯 하다. 어떤 국가기관은 호국의 사명감을 띄고서 국민의 절반을 좌파로 매도하고, 시민은 각자의 권리를 행사하기위해서 촛불을 들고, 시위는 야당에 의해서 정치적인 색이 입혀지는 악순환을 보면 선량하고 다양한 민주시민의 요구라도 정치적인 활동에 의해서 정책수요가 왜곡되어버리는 현상이 있는것 같다.    


2013년 8월 19일 월요일

북한의 과학기술과 집중의 묘(妙)


우리는 최신과학기술을 자체로 연구개발하는 사업과 대외적교유를 통하려 받아들이는 사업을 주체적립장에서 우리의 실정에 맞게 유기적으로 잘 배합하여 나라의 과학기술을 발전시켜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시대와 혁명의 요구에 맞게 우리의 과학기술을 가장빨리 발전시키는 길입니다.
당의 과학기술중시로선을 관철하는데서 나서는 중요한 문제의 하나는 과학기술과 생산을 밀착시키는 것입니다. 현시대에서는 과학기술이자 생산이고 생산이자 과학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회경제생활에서 과학기술의 역할이 비상히 높아짐에 따라 과학기술과 생산이 밀착되고 일체화되는 것이 현대과학기술발전의 세계적 추세입니다.

- 조선노동당 출판사간[당의 과학기술중시로선을 철저히 관철할데 대하여] -

2003년도에 북한 노동당에서 출간한 책의 내용이라고 한다. 과학적사회주의와 주체사상이라는 이념의 실패,감성적이던 지도자의 성향등이 종합적인 원인이 되어 '고난의 행군'이라는 참담한 시절을 겪은 북한에서 정책방향의 오류를 크게 깨닫고 내놓은 책인듯 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과학기술 발전'을 유훈으로도 남겼다고 하는데,그동안 북한에서 만연했던 상징적이고 선전적인 정책방향이 정반대로 수정이 된듯하다. 미사일이나 인공위성발사에 성공한 결과를 생각하면 외부의 입장에서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북한으로서는 결과와 정책의지가 과학발전에 서로 상승동기를 주고  있을듯하다.

미국의 경제학자 솔로우(1924- )는 기술지식이 노동의 생산성을 높여서 경제를 성장시킨다고 말한다. 부존자원이 없으면서 경제성장을 이룬 일본이나 한국, 튼튼한 기초과학으로 유럽의 경제를 견인하고 있는 독일, 미국의 생산성등을 생각하면 과학기술은 국가존립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고, 다른 분야는 부차적인 문제라는 정의가 나올법도 한것 같다.


북한이 인공위성을 발사할 당시 한국도 러시아 기술의 도움을 받아 나로호를 발사했지만, 실패를 함으로써 다른 분야에서 한국이 월등한 현실과는 달리 인공위성발사가 보여주는 상징적인 의미때문에 한국의 과학기술과 비교하여 북한의 과학기술은 체제선전의 근거로 많이 이용된듯 하다.


사실 과학기술지식에 힘입은 생산력의 증대가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북한뿐만 아니고 한국까지도 정책결정자들이나 정책결정논의의 장에서도 이념문제같은 관념적이고 부차적인 문제들이 압도하고 있었던것 같다.


북한은 인공위성이나 미사일분야에 집중적으로 제한된 인적물적자원을 투입해서 목적하는 성과를 얻은듯 한데,한국은 잠시나마 많은 자원들을 비합리적인 정책의지로 낭비한 '사건'들을 보면서 '과학기술발전을 통한 생산성증대'라는 정책목표가 좀 더 선명해져야 할것 같은 생각이 든다. 


북한의 미사일이나 일본의 후쿠시마원자로등은 과학기술의 부정적인 가치를 선동하고 있지만 순환에너지의 사용기술이나 기존자원을 대체할 수 있는 기술의 개발등 대부분이 긍정적인 가치이고, 무엇보다도  한국은 일본처럼 과학기술지식없이 존재조차 할수없는 '태생적인 불리함'을 타고난 국가인듯 하다.



2013년 8월 18일 일요일

파라젯(노이즈)


우리는 흔히 노이즈마케팅이라는 말을 하는데 대척적인 반응을 끌어내어 마케팅대상물의 존재감을 확산시키는 행위를 말한다.

프랑스의 과학철학자 미쉘 세르(1930~)는 완벽하게 작동하는 역학적인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고 파라젯을 배제함으로써 만들어진 형식이라고 한다. 즉 파라젯이 존재하지 않으면 어떤 메시지도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즉 잡음으로 인하여 메시지가 존재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상대적인것이 존재함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동양철학적인 사고도 있는데,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개인이 고난을 벗어날려는 욕구에 의해서 성공하는 일이라던가,정치세력이 반대세력의 비판으로 인하여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거나, 편안할때가 세상을 뜰 시간이라는 말이 모두 파라젯과 연관이 있다고 할수 있을것 같다.

리좀(rhizome)/시작도 끝도 알수 없는



1984년 가수 최혜영씨의 노래다. 가사속에 "시작도 알 수 없고, 끝도 알 수 없네"라는 가사가 나온다. 노래를 듣다가 리좀이란 단어가 생각이 났다. 리좀이란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와 정신분석학자 가타리의 공저 [천개의 고원]에 나오는 단어다.

서양의 사고방식은 전통적으로 시작과 끝이 존재하고, 그것을 잇는 프레임이 존재함으로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연속성의 논리가 지배해왔다고 한다. 사고의 다양성 조차도 나무줄기에서 가지가 뻗어나가듯 중심프레임이 바탕이 된 다양성을 추구하고 있는데 리좀이란 단어는 다양성으로부터 중심 프레임을 뺀 n-1의 다양성을 표현하고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이야기하는 '천개의 고원'은 다양성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프레임의 제한과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어 새로운것을 창조할 수 있는 자유도 표현하고 있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동양철학적인 사고로는 영속성이나 공(空)의 성질, 허(虛)의 성질을 중시하는데, 프레임없는 사고란 서양철학보다는 동양철학적인 성향이 강하다고 볼수 있을것 같다. 스티브잡스는 창조적인 행위를 하기 위해서 동양철학에 심취하기도 했는데, 다양성과 창조성이란 잔을 비워야 채울수 있듯이 프레임이 없는곳에서 탄생할수밖에 없는것 같다.

내 블러그질이야 탈이념이라는, 이념에 또 하나의 꼬리를 문 근본을 가지고 있지만 이념적인 사고는 다양한 사고와 창조적인 사고를 제한함으로서 '발전'이라는지극히 자연스러운 행위를 방해하는듯 하다.  

2013년 8월 12일 월요일

정보기관과 대중사회


한국민 누구라도 북한이 이념적인 정체성을 유지했다고  보거나 북한의 공산주의가 성공한 사례라고 할 사람이 없는것 같다. 정보기관이 한국내에서 대북정보활동에 이념적으로 전념한다면 과거로부터의 타성이거나 그 대상은 아직도 어딘가 침투해서 한국사회를 우회적이고 완곡한 방법으로 분열시키는, 이념이 기반이 되지 않는 북한의 첩보활동일것 같다.

사회가 국제사회에서 생존해 갈 수 없을 정도로 정체되어 있다면 잘못된 점을 올바른 방향으로 시정하거나 개혁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는것은 당연한 것인데, 한국에서는 개혁의 움직임이나 정부비판의 논리를 냉전논리로 해석하는 면이 있고, 개혁을 원하는 주체도 자신들이 이념적 주체성을 가졌다고 착각을 하는 경우가 있는것 같다.

독일의 정치사상가 아렌트(1906-1975)는 1차 대전이 끝나고 대중사회가 도래함에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원자적인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 이전에는 자기가 속한 계급이나 직능집단의 이익을 대변하여 조정할 수 있는 의회나 정당이 비중있는 역할을 하였지만 대중사회에서 대중의 원자성은 귀속감없이 내버려진 개인의 적막한 외로움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아렌트는 이런 대중의 공허함을 채울 수 있는 공동체적인 이념과 환상을 전체주의가 충족을 할 수 있기때문에 대중사회는 전체주의가 탄생할 수 있는 토양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북한주민들을 이념적 연대감으로 묶어놓고 있는 현상처럼 한국에서도 이념적인 연대감을 중시하는 현상이 있는것 같다. 한국에서는 공허한 마음을 가진 대중들이 종교와 같은 정신적인 연대감을 찾아서 헤메는 현상이 있는데, 이념이 비숫한 역할을 하고 있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현상은 대중적인 시민만의 문제가 아닌것 같다.  언론이나 지식인, 정책결정에 관여하고 있는 정당, 의회, 개별적 정치인이 모두 이런 덫에 걸려 있는것 같다. 지식인으로서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역할을 하는, 적어도 자신들은 '대중'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이념의 세상'이라는 오랫동안 길들어 온 본능과 타성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듯 하다.

첩보활동이나 정보활동에 집착하지 않고 유난히 이념에 집착하던 국정원의 정보활동을 생각하면 시민의 전체주의적인 연대감을 지향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때로는 이념적인 세상을 창출하여 조직의 미래를 보장받고자 하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국가이익'대신 '이념이나 종교'등의 비젼은 한국대중에게 연대감이라는 정신적인 만족도 주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실정(失政)과 사회정체(社會停滯)'라는 경험을 준것같다. 정보기관은 그런 경험에 크게 조력함으로서 시민들의 원성을 받고 있는데, 지금 그런 순간에도 '국익을 위한 정보활동'은 계속되고 있는지 의문이다. 집중력 없는 정보활동, 시민들의 촛불시위, 의회에서 민생을 떠난 정쟁등 엄청난 사회비용이 소모되고 있는것 같다.


2013년 8월 10일 토요일

은밀하고 위대해야 할 국정원


언젠가 작게는 정보분야와 스포츠분야의 한 부분으로, 크게는 이념이나 종교문제로  일상이 휘말려들어 가면서 크게 중요한 무엇인가를 깨달은 바가 있다. 어느 부문이던지 자신감있는 간섭과 공격적인 활동이 생성되면 그에 대응하기 위한 움직임도 생성된다는 점이다. 전혀 표면에 떠오를 이유도 없었던 문제가 공격적으로 '거론'되면서 상대적인 세력이 형성되게되는 메커니즘을 많이 경험하곤 한다.

어떤 문제의 개선을 위한 노력이 비합리적인 성격을 띄거나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대응에 호소하게 될때 의도했던 '개선'보다 훨씬 강력하고 급진적인 대응을 끌어내게 되고, 뚜렷한 '사회변혁'을 이끌어내게 되는것 같다. 이번에 있었던 국정원의 '대선과 관련된 정치공작'과 관련해서도 촛불시위를 끌어낼만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것을 인정할수밖에 없을것 같다. 정치적인 문제를 떠나서 민주주의와 관련된 근본적인 문제를 자극하면서 국민감정에 커다란 자극을 준것 같다.

가끔 지역감정을 일으키는 내용의 인터넷댓글을 보면서 분명히 북한의 사이버부대의 공작활동이거나 적어도 한국내에서 암약하는 이적세력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다. '공격과 그에 맞선 대응'이라는 간단한 섭리를 알게되면 절대로 호의적인 관점으로 볼수 없는 문제인듯 하다. 하물며 호국과 안보를 목적으로 하는 국정원이 그런 일을 한것은 아이러니한 일인것 같다.

정보기관의 공격에 대해서는 우선 전문적인 정보기관을 통해서 대응해야 한다. 비민주적 정권의 체제 전복과 분열 책동에 대응하는 선전적 캠페인은 단기적인 효과에 그칠 수 있다. 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이러한 위협이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세지 않다면 중장기적으로 둔감해져서 캠페인이 오히려 역작용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는 위협을 실제로 직접체험하지 못한 신세대들에게는 위협의 실질 정도와 관계없이 적이 '종이호랑이'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 중략 -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적이 엿듣고 있다'는 식의 선전활동으로 국민을 일깨워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며, 전문성이 있는 방첩활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방첩기관으로서는 취약점을 분석하되 이를 자체적으로 조용히 해결해야 할 것이다. 정치권은 이를 위하여 필요한 기반을 마련해야 하며, 정보기관 업무가 공격적으로 수행될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 국가안보와 관련된 분야에서 근무하는 이들에 대해서도 충분한 통제와 교육을 할 필요가 있지만, 거리의 일반 시민들까지 간첩으로 볼 필요는 없다.   

- 만프레드 빌케외 3인공저 [동독 슈타치의 침투와 서독의 방어] -  

말할것도 없이 다수의 국민을 상대로 하는 정보활동을 하기 보다는 대북정보활동이나 대외정보활동에 대한 목표와 역량을 뚜렷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한것같다. 이번 사건으로 당시 국정원수반의 의식수준과 국정원직원의 내부교육문제를 비롯하여 국정원의 전반적인 문제가 '심각하게' 드러난듯 하다. 이번 사건으로 주체세력이 어느편이던지간에 '헌법파괴'수준으로 문제가 커진다면 국정원과 국민의 절반 중 누구에게 책임이 있을지 생각하면 간단하게 답은 나오는것 같다. 개선되어야 할것은 국정원인듯 하다.

2013년 8월 7일 수요일

개인과 사회와 국가의 일체감 / 루돌프 스멘트


독일의 헌법학자인 루돌프 스멘트(R.Smend)는 국가란 개인과 사회가 통합되어가는 과정이라고 한다. 스멘트 이전에 독일의 헌법학계의 주류였던 칼 슈미트는 국가와 헌법은 주권자의 결단이라는 정지된 헌법관을 주장하였는데, 훗날 슈미트의 이론은 힘을 가진 주권자의 정체를 명확하게 규명하지 못함으로써 나찌정부에 기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국사회에서는 사회나 국가를 바라보는 관점이 분열적이고 정지된 느낌이 강한것 같다. 국정원 사태에서도 보듯이 정부기관인 국정원이 국민을 감시의 상대라는 관점으로 생각하여 국민과 정부는 완전히 분열된 개체라는 입장을 강하게 하고 있는것 같다. 물론 여기에 대응하여 정부를 비판하게 되는 개선의지도 '반정부 시위'라는 그다지 친화적이지 않은 타이틀을 얻음으로써 실제문제의 중요성에 비해서 근본적인 정의나 가치를 어느정도 상실하고 있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많이 배운 지인들, 특히 법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과 대화를 해봐도 사회현상을 권력과 지배관계의 관점이 기반이 된 해석을 하는것을 보면서 민주화가 급속도로 이루어진 한국에서 한국인들의 의식세계는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가 잠재해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사회의 이런 분위기는 직업분야나 스포츠분야,또는 학벌과 관련해서도 표현되는 경우가 있는데, 무엇보다도 특히 심한 부분은 이념이나 종교, 또는 지역감정분야인것 같다. 물론 제도적으로 서로 통합되거나 섞일 가능성을 차단하는 문제도 있지만 국민들의 마음속에 국가 시민으로서 아니면 더 나아가 세계시민으로서 자각을 할수있는 여유를 갖지못하고, 자기가 속한 작은 공동체의 유대감을 끊임없이 일깨워야 하는 문제가 있는것 같다.

대통령은 인문학의 중요성을 어필하고 있는데, 새로운 변화를 주도해나갈 인문학이란 각 분야의 분열을 종식시키고 '통합'을 선도해나갈 인문학이 아닌가 생각한다. 독일에 살아보지 않아서 명확히 규명할 수는 없지만 헌법과 정치와 국민의식이 분위기를 주고 받는 시대형성작용을 생각해볼때 독일의 건강한 민주국가로서의 발전, 독일의 위기극복능력, 무엇보다 독일통일의 힘은 칸트와 같은 인문학자와 피테와 같은 사상적인 지도자, 그리고 스멘트와 같은 헌법학자의 지도적인 역할에도 힘입은 바 있다는 생각이 든다.

2013년 8월 5일 월요일

국정원여직원 / 현실과 이상


http://www.fnnews.com/view?ra=Sent0801m_View&corp=fnnews&arcid=201308050100047530002375&cDateYear=2013&cDateMonth=08&cDateDay=05

국정원 여직원이 사실은 가녀린 여인이 아니고  7개월의 특수훈련과정을 이수했다는 소식이다. 호국과 안보의 이상을 위해서 감내했던 뼈저린 훈련과정이 이념정치의 도구로 이용당한  현실이 안스럽기만하다. 

특수임무수행자들의 고난도 그 근본을 알고보면 이념정치의 결과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 처지라서 싱그러운 젊음이 가치없는 생각들에 의해서 불태워져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항상 불만심을 가지고 있다. 이런 문제는 1950년에 남편을 찾아 입산해서 1963년 마지막 빨치산으로 체포되었던 정순덕이란 여인이 대한민국법정에서 사형을 구형받자"날 감형시키면 개놈들이다. 사형은 김일성이나 이승만에게 구형하라!"고 절규했던 그 심정을 국정원 여직원에게도 느끼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10여년전 특수임무수행자문제와 관련해서 좌파와 우파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 중심없이 오락가락하던적이 있었는데,미행을 당하면서도 상대가 어느쪽인지 몰라서 황망하게 대책을 못세우던 생각이 난다. 그때 생각하기를 좌파나 우파 어느 한쪽에 자정(自定)하면 정신은 천국의 쉼터에서 노닐겠다는 생각도 했다. 지금 사격이나 스케이트를 잘 하는것은 나름 숨은 이유가 있는것같다.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어려움은 국정원여직원, 정순덕여인, 내 자신이 모두 가지고 있는 공약수인듯 하다.

지금도 북쪽이나 남쪽에서 타인을 세뇌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을 보면 극히 못마땅한데, 언젠가 조폭보다 무서운 사람은 특수훈련을 받은 사람이고, 특수훈련을 받은 사람보다 무서운건 민활한 두뇌와 혀를 가진 지식인이나 정치인이라는 생각을 했다. 때로는 정치적위세에 눌려서 시대의 흐름으로 표현하는 대중들도 있지만 시대의 흐름은 바로 대중의 흐름이라는 사실을 빨리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북한에서는 바랄수 없지만 적어도 자유대한에서는 시민의 주체적인 사고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어쨌거나 국정원 여직원을 생각하면 약자의 이상이 강자의 현실에 제압당하면 몇배나 우스워지는것 같다.       

2013년 8월 4일 일요일

공공선택이론 / 골프장의 경제


제주도 골프장이 부도위기를 맞이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어쩌면 일본에서 현실화된 골프장의 위기가 시작되고 있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동안 국가정책적으로나 지방자치단체의 유치노력으로 골프장이 증설되던 생각을 하면 씁슬한 웃음이 나온다.

언젠가 고갯마루에서 보이던 산등성이의 보기좋은 산림이 없어지고 골프장건설을 위해서 깎여나간 모습을 보고는 과연 필드에 나가서 골프를 칠 사람이 전체 국민대비 몇 퍼센트나 될것이며,골프는 스포츠로서의 역할을 얼마나 할 수 있을것이며, 수십년간 꾸준한 산림녹화사업으로 조성한 산림의 파괴비용, 좁은 영토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골프장면적등을 생각하면 골프장 업자의 비용편익과 골프장소비자의 비용편익을 넘어선 문제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골프장의 비효율성을 생각하면 미국의 경제학자 뷰케넌(1919~~)이 주장한 공공선택이론이 생각났다. 원래 시장경제원칙에 의해서 움직이지 않는 거대정부의 경제정책은 비효율적인 운명을 타고나서 정부실패현상을 가져오기 쉽다. 그런데 이러한 정부정책에 불합리하고 개인적인 정책의지가 개입되거나 이익집단의 로비, 불공정한 제도, 부패한 정책의지등이 개입하여 정부실패현상을 넘어선 자원의 비효율적인 배분을 가져온다는 이론이다.

결국 개인주의에 기초한 정책이라는 원점으로 돌아오는데, 합법적이고 제도적으로 거두어낸 국민의 세금으로 비효율적인 자원배분을 달성한다는 점에서 동기와 과정,결과가 매우 나쁜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고 하겠다.

국회나 정당같은 정치기구가 국민의 요구를 자세히 알수도 없을뿐더러 입법자들이나 정당정치가들의 개인적인 성향이 개입되면 위와같은 문제는 더욱 심화될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표를 얻어내기위한 인기영합적인 정책들이 미래를 예측하는 눈을 멀게한다는 생각이들기도 하는 대표적인 예가 골프장건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문제를 조금 전체적이고 장기적으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확산된다면 상당수의 '뻘짓'이 없어지리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2013년 8월 1일 목요일

실천과 현실을 위한 생각 / 듀이


미국의 철학자이자 교육학자이며 심리학자인 존 듀이(1859~1952)는 인간은 자신을 성장시키고, 위협적인 환경속에서 변화해가는 생물로 인식하고 있다. 인간의 사고인 관념과 지식은 현실에서 얼마나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서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지나친 관념과 지식이 현실을 왜곡시키는 현상이 많이 일어나는듯 하다. 이념이나 종교의 현실왜곡문제도 그런 현상의 하나이지만 개인적인 삶의 중간 중간에 아는 것과 생각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자신을 몰고감을 느끼면서 깜짝 놀랄때가 있다. 그럴때마다 구제방법으로 '기본으로 돌아옴'이란 처방을 하고 있는데 때때로 기본에 충실함이 유용한 처방이란것을 많이 느낀다.

미 항공우주국 나사에서 우주에서 사용할 볼펜을 만들기로 했다. 우주의 무중력과 저온상태에서는 기존의 볼펜을 사용할수가 없어서 많은 연구비를 투자해서 볼펜을 완성했다. 소련은 그냥 연필을 사용했다.

요즘 중국이 물부족문제로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힐것이라는 새로운 사실이 알려졌다. 추측이나 연구결과가 아닌 거의 사실로 알려지고 있는데, 가장 기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런것 같다. 중국경제에 관해서 수많은 경제학적 연구가 있었지만 '물'이 결정적인 역할을 할거라는 사실은 전문가들이 추측하지 못한듯 하다. 문제가 심각해지고 나서야 문제는 가장 기본적인데 도사리고 있다는 교훈을 주는것 같다.

듀이는 망치는 때리는 힘에 존재가치가 있고, 트랙터는 끄는 힘에 존재가치가 있다고 하는데, 기본을 찾으면 사물의 존재가치가 보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남북한 레저시설의 구축효과


기술을 익히려고 상경하는 길에 차창밖으로 장마에 휩쓸려간 자전거도로의 잔해를 보면서 기분이 씁쓸했던적이 있다.평범한 시민으로서 산업현장이나 일터의 조악한 환경등을 경험하기도 하고, 건강을 위해서 레저생활도 운동장에서 즐기는 처지라서 '노동'과 '레저'의 중요함을 모두 체험하는것 같다.


북한에서 확장하고 있는 레저시설이 부실공사로 몸살을 앓고 있다는 소식이다. 한국에서 엄청난 재정이 투자된 4대강이나 자전거도로가 만들어지는것을 보면서 생산시설에 투자되어야 할  재정이 레저시설과 같이 비생산적인곳에 지나치게 투자되고 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재정이 극도로 빈약한 북한은 형보다 더한 아우같다.

이윤추구를 전혀 하지 않고, 세금으로만 운영되는 정부가 레저시설에 재정을 과도하게 투자하므로서 생산시설에 대한 투자나 민간투자를 억제하는 프리드먼의 '구축효과'를 생각하기도 하였는데, 국가경제의 기본바탕인 생산성을 소홀히하는 정책결정자들의 성향을 생각해보기도 하였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에서 자전거도로를 만들 재정으로 조그만 실내스케이트장이나 수영장같은 국민건강에 필요한 운동시설이 몇개가 더 만들어질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북한의 마식령에 만들고 있는 스키장시설에 투자할 재정이었으면 시설이 노후해서 가동이 중단된 기초산업시설을 몇개를 더 가동할 수 있을까 하는 계산을 해보기도 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생각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