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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28일 월요일

법률로써 사회주의를 막을려고 했던 한스 켈젠(Kelsen, Hans)

가끔 이념문제나 복지문제를 이야기하면 사회주의로서 오해를 받는 일이 많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은듯 하다. 왜냐하면 이미 사회주의나 자본주의를 떠난 인간주의에 기초를 한 생각을 풀어놓기 때문인듯 하다. 더구나 힘들게 사는 사람들 속에서 함께 공감을 하며 살아가다보면 무조건 세상이 뒤집혀져야 한다는 적의감보다는 왜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지를 냉철하게 판단할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좀 쉽게 말하면 못사는 것도 이유 있고 잘사는 것도 이유가 있으며, 못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그림에 대해서 한 편으로는 대단히 불만족한 마음을 품을때가 많다. 물론 경제적으로만 잘 사는 사람들이 그리는 마음속의 그림에 대해서는 더욱 큰 불만을 품고 있을때가 많다. 이미 내가 판단하는 기준은 이념이라는 가치보다는 마음과 마음을 바꾸는 방법(교육같은)에 점차 비중을 두어감을 느낀다.

독일의 법실증주의 헌법학자 한스 켈젠의 명논문인 [민주주의의 재정의] 읽다보면 한스 켈젠이 법실증주의자로서 2차대전이 끝나고 한참 팽창하기 시작했던 공산주의에 맞서서 민주주의를 지켜내고자 하는 의도가 보이며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법률로써만 해결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공산주의라는 새로운 가치에 대항하기 위해서 실증으로 맞서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좀 더 냉혹하게 표현하면 자본주의에서 생산수단을 취급하거나 소유할 수 있는 힘이 법률로써 주어졌으니 그것을 바꿀 수 있는 방법도 법률로써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물론 법률은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의 가치가 현실화된 결과물이니 사람들의 가치가 변하지 않으면 생산수단을 국유화하거나 사회주의 운동같은 강력한 힘을 가진 세력이 나올 수 없다는 경고도 하고 있는듯 하다.

공산주의가 형편없는 가치로서 대접받고 있는 요즈음엔 그다지 신경쓸 가치가 아닌듯 하다. 통일이라든가 복지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오직 미래를 위한 방법일 뿐이고 미래를 위한 선량한 가치가 법률로써 재생산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항상 있다.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판단을 바꿀려는 이들은 더욱 근본적이기 때문에 항상 경계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어떤 생각이 입법으로 구체화됨으로써 개혁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한스 켈센의 생각은 옳은듯 하다. 

2015년 9월 27일 일요일

일터의 비극 / 겔브레이스

20여년전 조그만 집단의 교주로 행세하는 카리스마넘치는 사람과 다툰적이 있었다. 가장 후련하고 간략한 한마디로 최종승리를 했다. "이런 짓 하지말고 어디가서 일을 해라."하지만 여기저기서 일을 해 본 입장으로서는 그 어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사기성(swindle)이 가미(加味)된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주변머리를 이해하고도 남았다. 자존심은 강한데 사람들에게 시달리기는 싫었던거다. 결국 "왜 내가 살아가는 방식에 참견을 하느냐"고 반박을 하면서 기운이 떨어졌다.

똑똑하던 초등학교 단짝이 수십년만에 자폐증환자가 되어 나타났다. 친구의 어머니에게 단순근로현장에서 일을 하도록 해보라고 권유했는데, 사흘만에 울면서 집에왔다. 일은 힘들지 않는데 사람들이 무서웠다는거다. 일이라는 것이 아니면 사회속에서의 삶이라는 것이 더불어서 맺어가는 인연으로 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내 책임을 생각했다. 훗날 또 다시 장기간 뛰어든 단순한 일터에서 오는 사람마다 무능하다고 괴롭히던 노인이 힘이 떨어지자 젊은 사람에게 구박받는 것을 보면서 관계의 악순환을 이해하고 복지의 중요성과 즐거운 근로현장의 필요성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케인즈 경제학자였던 갤브레이스(John Kenneth Galbraith, 1908년 10월 15일 ~ 2006년 4월 29일)는 미국과 같은 풍요로운 사회가 빈곤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까닭은 시스템의 결함으로 보고 있다. 겔브레이스는 이렇게 말한다.

"소비자의 욕망은 기묘하고 경박하고 혹은 부도덕한 원천에서 비롯되기도 하는데, 그러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이 사회에서는 선(善)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욕망을 채우려고 노력하는 과정 자체에서 또 다른 욕망이 만들어진다면, 욕망을 위한 노력이 '선'이라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소비자의 욕망을 채워 주기 위해 생산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다람쥐(소비자)가 혼자서 열심히 쳇바퀴 돌리는 것을 보고 박수를 치는 구경꾼(대기업)과 같은 처지에 있기 때문이다."

일터가 원하는 본질적인 결과만 달성하면 되는데, 사람들의 경쟁심, 권력적인 욕구같은 과도한 욕망이 개입하여 쓸데없는 일들이 발생하고 무능하지 않으나 무능한 구성원을 만들어 내는 악순환을 반복한다. 일터의 문제만이 아니고 어쩌면 경쟁으로 움직여 나가는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2015년 9월 25일 금요일

북한과의 구상무역(Barter trade)

일본과 같이 장기불황이나 장기불황에 빠져드는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1000원샵과 같은 저가일용품을 판매하는 곳이 늘어난다. 자주 그런 상점을 이용하다보면 큰 기술이 필요치 않은 일용품들이 중국이나 동남아등에서 만들어져 그 나라들의 제조업에 상당히 기여를 하고 있는 듯 하다. 점차 한국의 제조업들은 경공업분야에서는 설 자리를 잃고 있는듯 한데, 그래서 개성공단과 같은 정치적으로 불확실 하지만 경제적으로 남북협력의 돌파구를 찾을려는 시도가 있는듯 하다.

그런데 정치적으로 불확실한 남북의 상황이란 케인즈가 말하는, 인간의 심리가 경제를 구성하며 인간의 심리는 소비자나 기업가같은 경제주체의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불확실성'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 이상으로 개성공단에는 무리수로 작용하는듯 하다. 남북간의 어떤 정치적인 변화에 의해서 보따리를 싸서 오르 내리는 인질극같은 볼쌍사나운 광경을 연출하면서 존속시켜야 할 이유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오히려 그보다는 북한 자체의 경공업을 활성화 시키는 방법을 북한정부가 선택을 한다면 저가의 경공업제품에 대하여 한국이 소비시장역할을 해줄 수 있고, 물건과 현금이 즉각적으로 구상무역처럼 교환된다면 어떤 정치적 변화에도 경제적인 교환관계는 도도히 지속되리라는 생각도 든다. 아니면 북한의 지하자원과 한국의 공업제품간의 구상무역(Bater trade)형태의 교환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남한과 북한의 경제협력은 두 나라의 미래에 대한 유일한 돌파구인듯 하다. 통일이냐 아니냐 하는 궁극적인 문제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긴급한 문제인듯 하다.  

실질적 문맹과 대중정치

오래전 어느 현업집단에서 일을 할때 기이한 장면을 목격을 했다. 학력이 필요없는 일터라서 그런지 저학력의 노동자가 많았다. 그런데 연배있는 근로자 한 사람이 학벌이 꽤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권력지향적인 마인드를 꽤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의욕과는 달리 실질적인 능력이나 지혜가 없어서 다른 근로자들의 비웃음과 동정을 사고 있었다. 오래전의 배움은 현재까지 갈고 닦지 않으면 전혀 무용하다는 것을 몸소 실천하고 있었는데, 학벌 좋고 권력지향적인 마인드가 넘치는 젊은 사람들과 일할 때 느꼈던 무지함에 나이라는 깡패가 힘을 합쳐 일터를 퇴행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갈등관계가 협동관계를 압도하는 일터란 발전이 없는 것은 당연했다.

흔히 문맹이라고 하면 글을 읽을 줄 모르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실질적 문맹이라는 것이 있다. 글을 읽을 수는 있지만 책을 오랫동안 멀리하여 독해수준이 떨어져서 새로운 정보를 글로 접했을때 문장이나 문맥을 이해 못하여 글을 못 읽는 문맹자와 똑같이 행동하는 상태를 말한다. 한국의 중장년층의 실질적인 문맹상태는 OECD 최고라고 한다. 여가시간을 독서보다는 텔레비젼시청으로 보내는 중장년층 이상의 세대가 많은 것으로 봐서는 독서 안하는 전통이 세워진 것은 꽤 오된듯 하다.

예의 그 학벌있고 연배있는 근로자의 일상은 일이 끝나면 친구들과 만나서 음주하며 육두문자섞인 대화를 하는게 전부였다. 그런데 그 근로자의 행태와 주변의 행태를 물끄러미 생각을 하다보면 자꾸 북한사회가 연상이 되었다. 물론 떨쳐버려야 할 한국의 사회습관도 마찬가지다. 다양하고 풍성한 지적(知的)정보를 받아들이지 않을려고 하고 권위적수직관계라는 못된 습관만 몸에 밴 사람들이 이끌어 가는 사회란 극단적으로 북한과 같은 퇴행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당연했다.

내 자신은 역설적으로 그 현업집단에서 일하는 동안 책을 가장 많이 읽었던 것 같다. 1년여에 100권이 넘는 책을 좀 서둘러서 읽었는데, 아마도 내 머리가 퇴행적으로 굳어가는 느낌을 받았던 것에 대한 반발심이었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위기의식을 느끼기도 했던 것 같다. 특히 정치적인 문제들을 생각하다보면 실질적인 문맹상태의 노인분들이 선거를 통하여 못마땅한 정치인을 통제하겠다고 말할때는 왜 한국사회에서 텔레비젼에 얼굴을 비치거나 쇼맨쉽이 필요한 대중정치성향이 만연하게 되는지 이해가 갔다. 한편으로는 시대를 능동적이고 발전적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정치인이 부족한 이유도 이해가 갔다.  

2015년 9월 19일 토요일

끝나지 않은 이미지 트레이닝

적은 연습량으로 몇가지 종목의 스포츠실력을 준수한 수준으로 높인 적이 있었다. 올림픽 수영 금메달리스트인 펠프스는 잠자기 직전과 잠깬 직후에 머리속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완벽한 레이스를 그려보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빼먹지 않았는데, 훈련을 하면서 펠프스가 조금 지쳐보이면 보우만 코치는 "비디오 테이프를 꽂아"라고 외치면서 펠프스를 기운나게 했다고 한다. 오래전 검도의 대련을 위한 이미지 트레이닝으로부터 시작해서 부드러운 수영, 스케이트더블푸쉬등을 위한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는 습관을 자주 들였는데, 실제로 상대가 필요한 실제연습을 하지 못한 검도는 포기했지만 혼자 연습할 수 있는 수영이나 스케이트실력은 크게 향상되는 효과를 보았던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며 양성적인 이미지 트레이닝이 아닌 수동적이며 소극적이고 음성적인 이미지 트레이닝에 걸려드는 경우가 많은게 문제인듯 하다. 나만의 문제가 아니고 정신세계가 빈곤한 모든 시민들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한동안 퇴행적인 환경, 미래에 대한 이상을 잃어버린 사람들, 과거지향적이며 보수적인 사람들, 탐욕적이며 이기적인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직장의 관리자일 수도 있으며 직장의 동료들일 수도 있고,표리부동한 종교인일 수도 있고, 매스컴의 일면을 장식하는 비리 정치인일 수도 있다)을 보며 그런 인간환경에 동화되어 가는 모습에 경악을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다급하게 독서를 통하여 돌파구를 찾기도 했던 것 같다.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내탓이오 내탓이라는 카톨릭의 진리도 있고, 좋아하는 책인 스코트 팩의 저서[끝나지 않은 길]에서는 자신을 통찰하고 극복하지 않고서는 자기완성으로 갈 수 없다고 하지만 평범한 일상속의 사람들이 얼떨결에 나쁜 환경의 이미지 트레이닝에 걸려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듯 하다. 좀 더 범위를 넓혀서 생각하면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이 빈곤한 북한체제속의 정치인이나 일반인들은 강력한 한계속에 갇혀 있을것이다. 자유로운 체제나 밝은 국가환경은 미래를 위한 이미지 트레이닝에 반드시 필요할듯 하다.  

2015년 9월 12일 토요일

정서지능과 권력

한국사회가 분열되는 습성을 가진 근본적인 이유는 공감능력의 상실때문이 아닌가 생각될때가 있었다. 사회의 어느 부문을 살펴봐도 더불어 살아간다는 생각을 가진 시민들은 드믄듯 하다. 우군과 적군, 위와 아래에 대한 구분이 강하다. 본질적인 목적에 대한 집중은 힘들다. 항상 싸움을 생각해야 한다. 누르는 자에 대한 저항, 상대편과의 승부에 대한 생각들로 어지럽다. 나중엔 그런것들이 진정한 목표가 된다. 직장에서 관리자는 일이 잘 되게 하는것 보다 가학성을 띄는 경우가 있다. 그저 윗자리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그것이 삶의 목적이고 언젠가 그런 날을 위해서 좋은 세월을 피학성을 지니며 와신상담하고 살았던듯 하다.

매우 지적(知的)이지 못한 동료와 관리자는 매우 권위적이다. 설득과 포용이란 개념은 아예 모른다. 공감능력은 없고, 그것은 정서지능이 없기 때문인듯 하다. 한국사회는 그런 모습을 골통이라든가 무뇌충이라고 표현한다. 그런 면에서 한국사회는 뭔가 한 발 늦었다. 20세기는 과학과 인지혁명의 시대였지만 21세기는 정서의 지혜나 감성공학이 각광받는 시대이다. 한마디로 인간답게 사는 것이 중요한 시대라는 것이다. 복지가 중요한 것은 경제적인 것을 나누는 문제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일을 해야 하고 일하는 시간이 즐거워야 한다. 복지라는 것은 일터의 즐거움과 생활의 즐거움을 모두 표현하는 단어인듯 하다.

예일대학 심리학교수인 셀러베이(Peter Salovery 1958 ~ )는 정서적으로 지능적인 사람일수록 자신이 고용한 근로자가 더 큰 만족을 느끼도록 하며 의사소통이 원활하며 미적감각을 가진 결과물을 산출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위 아래만 생각하는 즉 권력관계만 생각하는 사회속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속에서 어떤 산출물이 나올 수 있을까. 사람들은 나쁜 기분에 젖어 있다. 위에 서 있건 아래에 서 있건 나쁜 기분은 마찬가지다. 정서지능이 없어서 머리가 안돌아가기 때문이다.

언젠가 유명 정치인이 사회의 평범한 일상을 사는 나 자신의 시각으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황당한 말을 많이 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말들을 대충 살펴보면 복지가 나라를 망하게 한다거나 젊은 이들이 아무 일이나 안할려고 한다는 등 그런 말들이었는데, 그때 느낀 생각은 어려움을 겪지 않은 정치인의 문제점이 심각하다는 사실이었다. 국민의 행복은 본질적인 목적이다. 국가는 정치인이 다스리라고 만들어진것이 아닌듯 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정치인이 있다면 요즘 매우 중요한 지능중 하나인 정서지능이 파탄난 상태로 있는 인물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2015년 9월 10일 목요일

작은 대왕

언젠가 연배가 있는 사람들끼리 모인 일터에서 패기가 없어진 사람들이 더욱 권력적일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더 큰 권력에게는 복종하는 전형적인 소인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 편으로는 그런 집단은 고립상태를 심화시키면서 외부영역과의 교류를 단절하고 스스로 꾸려나갈려는 움직임이 큰 경향이 있었다.아마도 에너지의 고갈로 진취적인 사고를 결여한 탓인것 같았다.

어느 날 중국의 승전기념열병식의 귀빈석 귀퉁이에 초라하게 앉아있는 최용해 북한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의 모습을 보면서 연로한 집단의 권력을 보는 것 같았다. 더 큰 권력의 귀퉁이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인물이 본국으로 돌아가서 어떤 태도를 보여줄 것인지가 궁금하기도 했다.

인간이 권력지향적이 되는 이유는 에너지를 만들어 줄 사명감과 철학이 빈곤해서인것 같다, 권력자는 구성원들을 통제함으로써 내부에너지섭취를 위한 조건을 충족시키고, 나아가서 더 큰 외부에너지 유입을 위해서 호전성을 띄게 되는데, 대게 바른 에너지 생산의 과정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국가들이나 다른 세력들의 저지행위로 실패하고 퇴행성을 띄게 되는것 같다.

북한만이 문제가 아닐뿐더러 노령화되어가는 동북아시아 국가들이나 수직적인 권력관계의 습관에 빠진 동북아시아 국가들에게 사회붕괴를 안겨줄 위험신호로 해석해도 좋을 것 같다.  

2015년 9월 5일 토요일

카토흉내내기

고대 로마의 정치가 카토(Marcus Porcius Cato)는 자영농 출신으로 포에니 전쟁에 참가했다. 다른 병사들과는 달리 몸과 정신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 전투중에 물만 마시고 음식은 일체 손을 대지 않았다. 당시 로마는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페니키아의 식민지 국가로서 페니키아가 망한 후에도 북아프리카에서 상업국가로 크게 번성했던 카르타고와 경쟁을 하고 있었다. 카토는 카르타고에 사절로 다녀온 이후에 카르타고와 로마와의 숙명적으로 함께 할 수 없는 운명을 직감한 것으로 생각된다. 카토는 많은 연설을 했고, 전해오지 않지만 연설집도 책으로 엮어졌다고 하다.

카토의 연설에는 항상 "카르타고는 반드시 멸망 시켜야 한다."는 말로 끝을 맺는다고 한다. 카르타고와는 전혀 상관없는 연설도 반드시 이 말로 끝을 맺었다고 한다. 카토는 80세의 나이에 그리스원전을 읽기 위해서 그리스어를 공부했다고 플루타르크영웅전은 기록을 하고 있다. 카토의 배움은 끝이 없고 늙을 틈도 없는듯 하였다. 결국 죽기직전에 포에니 전쟁을 통하여 로마가 카르타고를 멸망 시키는 것을 보았다.

"한반도는 반드시 통일 되어야 한다."

카토 흉내를 내봤다. 카토흉내를 내 본것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공복에 운동을 하면 지구력이 샘솟는다는 사실도 스스로 입증해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