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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31일 목요일

반증과 발전, 그리고 통신의 자유

몇 번 서술한바가 있지만 스포츠를 좋아하는 건강한 사람이 된 이면에는 나름 도와주신 분들이 많았던거 같다. 원래 그 분들의 의도는 그렇게 좋은 것 같지 않았는데,결과적으로 내가 가장 싫어했던 모습을 내 자신에게서 지워버리는 훌륭한 습관을 가져다 준 듯 하다.그 분들은 음성적인 성향의 정치현실이나 종교 아니면 음성적인 지인들이었는데, 그런 모습에서 내 자신을 발견하고는 그렇게 살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것 같다. 

영국의 철학자 포퍼(Karl Raimund Popper 1902 - 1994)는 과학이론이 객관적이라는 것은 환상이며 가설일뿐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반증에 열려있어야 하며, 아인슈타인이 위대한 이유는 스스로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반증하는 과학자이기때문이라고 말한다.

도대체 모든 사람들의 생각을 내 뜻대로 만든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끊임없이 다른 의견들을 억누르는 정치권력이나 종교권력, 경제권력 작게는 패거리문화까지 합의를 도출하는것보다 지배와 복종관계를 추구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신이 병든 것과 과학적이지 못한 것이 분명히 연관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국가 정보기관같은 곳에서 누군가의 통신의 자유를 간섭했을때 나타나는 문제점은  여러가지인듯 하다. 첫째, 사회발전의 기반이 되는 다양한 의견들을 음성적으로 숨게 만든다. 둘째, 국가에너지와 공권력의 낭비가 생긴다. 내 자신의 경험으로는 누군가가 어떤 음성적 간섭을 하면 그 간섭을 알고 있으면서도 조심하거나 음성적으로 숨기지 않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 상황을 인지하고 있는 내 자신이 상황을 유도해 나가는 실질적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웃기는 생각까지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통신의 자유를 침해해서 얻은 실익이 별로 없을 수가 있다는 생각까지 든다. 셋째, 내밀한 정신적 에너지 싸움에 몰입하게 됨으로써 외부로 향해야 할 발전지향적인 가치를 뭉개버리는 폐단이 생길 수 있는듯 하다. 마치 외부침략에 대응못하고 내분으로 망해버리는 공동체를 실현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도 든다.

권력이나 영향력등에 지나치게 집착을 하게 되면 상황판단이 객관적으로 인지되지 못하는 일이 있는데, 기묘한 일에만 신경쓰다가 자신도 망가지고, 공동체도 망가뜨리고 하는 불상사는 이제 자제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열심히 뭔가를 해 볼려고 해 봐서 아는데, 음성적인 환경은 정신을 많이 어지럽히는 경험을 했던것 같다. 이런 환경에서 창의성이 어떻게 발현될 것이며, 문제가 표면화되는 것을 막아버리는데, 어떻게 발전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2016년 3월 30일 수요일

모욕감과 독선(Dogmatism)

어느 날 덩달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니 냉장고문에 쪽지가 붙어있었다. "엄마 모욕감"

이념과 종교의 독선(dogmatism)에 빠져버린 사람들의 공통점은 타자(他者)에 대한 배려가 없거나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훈련된 자기암시의 기술로 끊임없이 자신이 정당하다는 인식을 구축해나가는 문제점이 있는듯 하다. 실제로 이런 상황은 북한이나 IS같은 과잉이념이나 과잉종교에 빠진 집단 또는 종교에 심취한 이들에게 많이 발견되는 심리적인 문제인듯 하다.

한 번은 학생들이 공공도서관 컴퓨터에서 내 구글블러그를 볼려고했더니 블러그가 유해블러그로 지정되어있다는 화면이 뜬다고 하여서 가봤는데 실제로 그랬다. 동영상촬영을 해놓고 관리감독기관인 교육청에 전화를 해서 이 문제를 확대시키겠다고 말하니 담당자는 그러지 말아달라고 비명을 질렀다. 순간 위에서 지시한 문제가 있지 애꿎은 담당자에게 무슨 죄가 있겠냐싶어 그냥 묻어두었다.

정치지도자를 그만두고도 꾸준히 국민들의 원성을 인식하지 않은체 뜬금없이 언론에 등장해 자화자찬을 하던 이상한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원한을 가질문제가 아니라 정신적 또는 심리적인 문제가 있음을 느끼기도 한다. 이념이나 종교에 심취하게 되면 자기암시의 능력이 꾸준히 증대하긴 하는데, 타인의 판단이나 보편적인 사회감정으로는 큰 문제가 있는 생각들을 반복적인 자기암시로 꾸준히 정당함을 굳히는 작업에 능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북한의 침략적인 행태나 발언이 한국측이나 미국에서 비롯된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국가적 사회적암시로 마인드컨트럴해나가는 북한의 행태를 보면 이념이나 종교적독선은 타자에 대한 배려나 적어도 객관적인 관점을 갖추지 못한 문제가 있음을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근본적인 문제는 다양한 교육과 교양등이 부족한 문제가 있음을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종교에 심취한 지인들이나 정치인들에게 공통된 문제를 느낀것이 분명히 자신이 문제의 근원임을 느끼면서도 주변이나 타인이 문제라는 생각을 반복하는 점인듯 하다. 한 번은 만나기만 하면 자신의 종교를 이야기하던 지인이 있었는데, 그런 이야기를 자주하면 함께 자리를 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자 "당신이 전화를 받고 나왔잖아 그러니 당신이 문제지"그러더라 그래서 한바탕 웃음을 선사했던 기억이 있다. 또 몇번은 부지런히 찐득거려 전도를 할려고 시도하다가 내가 먼저 기운차게 접근하면 자신들의 성취욕구가 배신당했음을 느끼는지 날더러 자신들을 괴롭히거나 모욕하지 말라고 소리치는 상황을 몇 번 경험하기도 했다. 어느 때 대단히 뻔뻔스럽다고 생각되는 정치인들의 내면을 알고보면 종교적인 독선이 깔려있는 경우가 많은데, 독선이라고 생각하는게 나같은 평범한 사회인의 관점이지 그들은 그들만이 고집하는 진리가 있는것이 당연했다. 물론 그것이 정당함은 판단할 문제가 아닌듯 하다. 판단은 보편적인 사회감정에 크게 벗어났을때 판단되어야 정상적인듯 하다.

북한, IS, 과잉종교는 타자를 모욕하는데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모욕당한다는 독선과 암시에 능한듯 하다.

2016년 3월 28일 월요일

그림 그리기에 멍드는 팔도강산

어느 정치지도자가 국가정책을 결정하기 위해 합리적인 사고와 인내심에 의존하지 않고 이념과 종교적인 상상력에 의존하다가 대박이 아닌 깨박을 친 사건이 있었다는건 말하고 싶지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사실인듯 하다. 부끄러운 우리들 모두의 자화상인듯 하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횡포는 오늘도 북쪽에서는 계속되고 있는듯 한데, 북한은 제2의 고난의 행군을 맞아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 사력(死力)을 다해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중인것 같다.


인간의 삶과 사회의 존속이 생각과 상상력에 의존하여 유지되어 나간다고는 하지만 해도 너무한 장면이 한반도에서는 끊이지 않는듯 하다. 한편으로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정치지도자나 국가시스템이 그려주는 그림을 '이 세상의 모든 것'으로 이해하는 무지한 민중들의 처지는 참혹함 그 자체인듯 하다.

오래전 조그만 종교공동체와 그 속의 사람들의 행태를 본의아니게 면밀히 살펴본 적이 있었다. 종교인이 말하는 비전에 관한 기대감에 취해사는 신자들은 자신의 인생을 상상력대로 움직여나가는 기술이 발달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 중에서 인내하고 노력하는 이는 얻고자 하는 것을 얻어내고 있었고, 상상력에만 취해있는 이는 자신과 주변에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어있는듯 했다. 어쨌거나 세상의 일이 서로에 대한 호의적인 감정과 끊임없이 깨어있는 지혜가 없으면 별로 좋을일이 없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게되었던 것 같다.

종교에 심취한 지인이 자신이 하고싶은데로 타인의 정체성을 규명해버리는 일들을 본 적이 있었다. 일단 자신이 적개심을 가진 상대에게 적개심을 가지게 된 타당성을 추후에 추가해가면서 적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었던듯 하다. 그런데 한반도에서는 이런 일들이 개인에게 일어나는 일만은 아닌게 문제인듯 하다. 이념에 의해서, 때로는 종교에 의해서 적을 만드는 기술(skill)이 매우 발달해 있는듯 하다. 그 기술을 열심히 전수해주고 있는 기묘한 사람들에게 세뇌당하고 있는 민중들이 좀 더 합리적이면서 많은 일들에 대한 사고가 가능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가능하도록 계몽되어야 하는데, 구체적으로는 다방면의 독서와 스포츠등을 통해서 건강한 신체와 정신을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듯 하다. 

2016년 3월 25일 금요일

그림과 공장

몇일전 근처 화구(畵具)를 만드는 공장에서 생산직노동자를 구한다는 공고를 냈다. 그 광고를 보면서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자신이 하고 싶었던 그림 그리는 일을 시작한 여성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 여성을 비생산적이라고 비난하던 안정된 직장을 다니던 지인의 말도 생각났다. 생각해보면 분명히 예의 그 여성도 화구를 구입했을 것이다.

가끔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공장들을 다니며 '생산을 독려했다.'는 기사도 생각이 났다. 북한의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을 북한의 누군가가 소비했을 것이다. 물론 소비계층이 제한적이었을것이다. 그래서 생산량도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공장이 많지 않고 그 공장에서 일하는 노무자의 숫자도 적었을 것이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일하는 사람이 적었을 것이다. 그래서 북한은 경제력이 빈곤함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사회나 경제에 대해서 국민과 정치인이 어떤 테마에 주된 관심을 가지는지를 살펴보면 그 사회의 미래를 볼 수 있는것 같다. 일본이나 한국, 요즘의 중국은 생산을 많이 하여 돈을 버는데 집중을 하고 있는듯 하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기업가가 대부분이고 진보정치의 촛점은 노동자에 맞추어져 있고, 보수정치의 촛점은 기업가에게 맞추어져 있는듯 하다. 그보다 훨씬 다양한 사회의 여러가지 모습에 대해서는 생각하거나 발을 디디는 것을 죄악시하지는 않아도 사회에서 떳떳치 못한 삶을 살아가는 무임승차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듯 하다. 아마도 동북아시아의 획일적 분위기의 문화는 경제적인 관점에 모든 것을 집중시켜버리는 오류를 범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일본이 많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넘쳐나는 돈을 투자할 곳이 없을 정도로 내수(內需)가 침체하자 내수증진을 위해서 정부가 무상으로 돈을 지급하는 비상대책까지 세우던 일이 생각난다. 문제의 근원을 생각해보지 않았던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경제적부흥이 일본과 동북아시아의 자랑거리이던 시절에 수출로 많은 생산을 해서 국가와 국민이 돈을 벌면서도 사회와 문화의 다양한 측면까지 생각을 해보지 않은듯 하다. 수입을 하던 국가들도 스스로 생산해서 경제력을 증대시켜야 할 열망을 가지고 있었고, 동북아시아 국가들내부에서는 돈을 써줄, 즉 소비를 해줄 다양한 사회와 문화적 분위기가 조성이 안되어 있는 이중 딜레마에 빠져있은듯 하다.

한 예로 중국은 한국의 주된 수입국가였지만 한국에서 수입할 물건을 중국은 스스로 더 좋은 상품으로 생산을 하기 시작했다면 한국은 수출여건이 악화될 것이다. 게다가 생산과 수출에 집중을 하던 사회적 관점때문에 내수경제도 위축이 되는 상횡에 이르면 한국경제가 성장동력을 잃는 것은 당연한듯 싶다. 일본은 이미 이런 과정을 겪은 것으로 생각된다. 다양한 사회와 문화분위기와 그 속의 더욱  다양하고 소소한 부분들은 경제성장을 위해서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측면으로 봐도 획일성은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듯 하다. 

2016년 3월 24일 목요일

출세와 과시적 소비

한 번은 지인이 크게 출세를 했다고 자랑하고 있었다. 심술인지 장난기가 발동한 탓인지 그 지인의 상급자로 있을 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하겠다고 엄포를 놓아 그 지인을 뒤집어지게 한 사건이 있었다.

오래전 한국인들에게 출세의 지름길이라는 수험생활에 몰입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상대성의 민낯(naked face)을 깨닫고 말았다. 때 이르게 불행한 사건을 많이 겪은 탓인지 죽음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생각을 기반으로 출세라는 수직적인 관점을 갖게 되면 내 위에 있는 누군가때문에 계속되는 욕망에 시달릴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것 같다. 그 당시도 그렇지만 요즘도 법조계나 경제계에서 성공을 했다는 생각을 자각하게되면 더욱 상급의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정치계에 입문하는 것이 수순인것 같았다. 이익분배의 물길을 자기쪽에 유리하게 돌려놓기 위한 수단일수도 있겠고, 명예나 정치적인 권력이라는 마지막영역을 추구해보겠다는 욕심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곰곰히 생각하다가 내 스타일은 강남스타일이 아니고 강북스타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한 시라도 젊었을때 사회의 구석구석을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야 나의 관심사인 문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던것 같다. 그러나 나도 인간인 탓에 경제적 안정이나 지위에 대한 욕구에 번번히 무력하게 시달리곤 했다. 특히 사회의 저층구조속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정치와 사회에 대해 전체적인 이해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인문철학적인 교육이 부실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지위에 대한, 말이 통하는 사람들에 대한 욕구에 시달렸던 것 같다.

그런면에 있어서는 뭔가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만만치 않은데, 출세나 수직적인 상승을 위해 많은 것을 잃어가는 사람들, 가까운 지인들부터 유명인들까지 가깝거나 때로는 먼 곳에서 오랫동안 변화하는 모습을 주의깊게 살펴보곤 한다. 공통적으로 모두 늙어가는 것 같았다. 그것도 별로 멋있지 않게 늙어가는듯 했다. 어느 날 신호대기중에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오래전 나의 직장상사를 만났는데, 매우 권력적인 스타일이었던 과거와는 달리 초라한 어르신 한 분이 나를 발견하고는 시선을 외면하고 잰 걸음으로 피해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느 지인은 승진을 하기 위해 직장 상사의 보조에 맞춰 술 대작을 하다가 고등학생인 아이 둘을 남겨놓고 간암으로 개똥밭같은 세상을 먼저 버린것도 보았다.

바로 이 대목에서 나는 대단히 욕을 먹고 있는 여피족의 처지에 눈을 돌려보고 싶다. 그들은 아마도 귀중품들에 대해 역사상 가장 탐욕스러운 소비자들일 것이다. 여피족들이 그렇게 두들겨맞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이 구매하는 부와 권력의 상징이라는 것이 온갖 비용을 치르면서 소비의 경쟁을 벌이려는 기묘한 성향의 또 하나의 사례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부와 권력이 대량 소비에 의해 좌우되는 사회에서 위로부터 부과되는 준엄한 성공의 필요 조건이다.

그래서 소비주의 기풍에 자신이 충실하고 있음을 입증할 수 있는 자들만이 소비 사회의 상류계급으로 진입이 허용되는 것이다. 상승 이동의 가능성이 있는 젊은이들에게(뿐만 아니라 더도 말고 하층 계급으로 떨어지지 않기만을 바라는 젊은이들에게까지도), 과시적 소비는 성공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이득이라기보다는 성공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비용이다. 일류 디자이너가 만든 옷, 이태리 스포츠카, 레이저디스크, 고급 오디오 시스템, 블루밍데일에서의 쇼핑, 햄프톤에서 주말 보내기, 맥심에서의 오찬 - 이런 생활을 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자기가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며 버젓한 일자리를 구하지도 못한다. 

물론 그런 식으로 하다 보면 예금 통장에 잔고가 올라가는 대신 빚더미에 올라앉을 수도 있다. 교외의 공여 주택지에서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대신 결혼을 연기하고 아이도 없이 콘도미니움에서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별 도리가 있는가? 윗 사람들에 대한 충성을 입증하는 데 그보다 더 나은 방식은 없지 않은가? 

 - 마빈해리스의 [작은 인간]중에서 - 

어느 날 좀 특이한 방식의 과시적인 소비를 했다.  비싸지 않은 20대들이 입는 의복으로 모두 교체했다. 다행히 나이에 비해서 몸매가 바쳐주었다. 무엇보다 젊고 가능성에 모든 것을 미루어 버린 평등한 젊은 사회에 소속되어 있는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실제로 대접도 그렇게 받는것 같았다.   

2016년 3월 23일 수요일

독단(Dogmatism)

언젠가 막 성인이 된 여학생이 혼자 담배를 물고 울고 있었다. 고위장교였던 부친과 어머니가 사려없이 많은 사람들이 알게끔 공개적으로 교육의 이름으로 외동딸의 부족한 점을 질책한 직후였다. 저 가정이 정상적이지도 못했으며 딸의 마음속에 부모에 대한 원망을 넘어서 파괴적인 원한심까지 깃들것을 눈믈을 멈춘 딸의 눈에서 느낄 수가 있었던것 같다.   

종교에 충실한 사람들 중에는 타인을 도와주고서 스스로 감동해서 동네방네 그 사실을 떠들고 다니다가 도움을 받은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 현상을 보곤 하는데, 타인을 배려하지 못한 종교적 독단이 사람을 무지하게 만들고, 결국은 이웃과 원한관계까지 확산되는 현상을 보곤한다. 문제는 그 사람은 그 상황을 전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능력이 없으니 못되먹은 사람보다 무식한 사람을 더 상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어느 성현의 말이 그말이려니 이해가 간다.    

한 번은 타인에게 친절한 연배있는 사람과 함께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사나운 사람과 함께 있는것 보다 못했던 생각이 난다. 처음에는 아들과 갈등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의문을 품긴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단조로운 인생경험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정규교육과 다양한 사회교육이 부족한 탓인지 독단이 강했다. 이타성을 담은 행위는 그 독단을 교묘하게 감추고 있었던것 같다. 양파껍질이 벗겨지듯이 차츰 차츰 내면은 그의 아들을 비롯한 타인에게 파악되고 그 정체를 규명할 능력이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뭔지 모르지만 대단히 밉다는 생각을 하게 된듯 하다.

다양하고 건강한 사회교육이나 독서등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개방적이지 못한 구태의연한 태도와 부딪힐때마다 느끼는 점인듯 하다. 포괄적으로는 이념문제도 그렇고 종교문제도 결국 독단의 문제지만 정치인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정치인들의 상황판단을 제대로 못하고 자신만의 독단에 갇혀서 정치를 하는 모습이 정치인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으로 표현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뭔지 모르지만 공감대를 형성못하는 점이 매우 싫다는 것 같다. 그렇다고 사회의 저층(低層)에 있는 사람들의 독단이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열등한 이의 독단이라고 면죄부를 가질것은 아닌듯 하다. 사실 독단은 가질것을 제대로 가지지 못하거나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사회의 저층민들에게 더 강하게 나타나는듯 하다.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하는 문제처럼 그 독단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불행한 삶을 살고 있으며, 그 독단으로 좋은 정치적 피드백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눈이 멀게한듯 하다.

이슬람국가 IS의 만행들은 종교적인 독단이 낳은 사고로 봐야할듯 하다. 많은 지식인들이 문화의 충돌이나 이익관계의 충돌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이념이나 종교같은 것이 타자(他者)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면 독단을 낳고, 그 독단은 원한을 낳는데, 그 원한의 깊이는 말할 수 없이 큰 것 같다.  

2016년 3월 21일 월요일

사랑의 이름으로

오래전 티브이아침방송에 어떤 부부가 나와 고민을 토로하고 있었다. 아내가 잘해주는데도 불구하고 남편은 자주 자살을 시도한다는거였다. 두 부부사정은 심각했겠지만 그 방송장면을 보고 막 웃었다. 하필이면 그 당시에 미져리(Misery 1990)란 영화가 상영이 되고 있었고, 아내의 분위기가 영화의 여주인공을 연상케 했다. 반대로 남편은 선병질적이고 보호를 받기를 즐겨온 사람처럼 나약해보였던것 같다. 그러니까 정신적 주도권 싸움에서 다혈질이고 억센 아내가 항상 승리하는것 같았다. 아내는 집착하는 마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착각하고 있었고, 남편의 모든 것을 구속하였고, 남편은 그것을 참을 수 없어 자기파괴의 길을 택한것같다.

종교에 관해서 내 자신도 재미있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부친이 세상을 떠나고 남북한 문제에 대한 극도의 흥분된 정신상태에  있을때였는데, 한 원리주의 개신교회의 집요한 선교타겟이 되었다. 이것 저것 생각해볼것도 있고 해서 순리대로 교회를 다녔는데, 목회자와 수백명의 교회신자들은 나에 대한 정신적인 주도권을 갖지 못한 것을 알게되자 적대적인 감정으로 순식간에 반전하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이념의 세계도 그러하다는 판단이 확고하게 서게된것 같다. 물론 이후에 현실정치에서 큰 문제가 터질것도 어느정도 예측이 되긴했다. 

국민에게 잘 하겠다고 서둘러서 나서는 정치인, 직장을 위해서 몸과 마음을 다 바치겠다고 나서는 직장인, 사랑하는 이에게 목숨 걸고 집착하는 사람, 자식의 모든것, 심지어는 생각까지 대신 해줄려는 부모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결국 대상에 대한 진정한 배려가 없고, 신경증적인 집착을 앓고 있는 점인듯 하다. 좀 센, 그러나 정련하지 못한 특별한 군대생활을 한 사람들 중 원래 마음이 약한 사람들이 권위나 수직관계에 관하여 강한 집착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몇 사례 목격한 적이 있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면 한반도에서 이념문제가 비정상적으로 지배하는 이유는 사회가 신경증적인 집착을 앓고 있다는 결론이 나오는듯 하다. 그 집착의 이면에 일제식민시대가 있고, 권위적인 정치가 있는듯 하다. 사회가 자율성과 멀어질수록 퇴보하는 것은 이유가 있는듯 하다. 

2016년 3월 20일 일요일

태양의 후예

요즘 한국에서는 태양의 후예라는 티브이 프로그램이 인기다. 내 자신도 한국의 육군사관학교 근처인 화랑대근처에서 버스를 탈때마다 제복을 입은 육사생도들의 절제된 모습에 눈이 번쩍 뜨이는 상쾌한 경험은 한적이 많은것 같다. 한국의 마초적인 남성들을 넘어서 중년의 여성들까지도 군복을 입은 드라마속의 주인공들에 취해있는 이유는 이해가 간다.

그 동안의 티브이드라마들이 애정관계, 질투, 야심, 권모술수, 이혼같은 어둡고 끈적 끈적한 음성적 세계로 시청자들의 생각을 인도하고 있었던 현실에 대해서 군복입은 젊은 배우들의 절도있고 절제된 분위기는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것 같다. 사람은 항상 자신을 일깨우지 않으면 중년이 넘어서고 노년으로 갈수록 퇴행적인 성향을 보이는듯 하다. 아마 신체적, 정신적으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기는 한것 같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삶의 태도인듯 하다. 이미 무엇인가를 늦었음을 알고 포기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방치해버린 수많은 아제와 이모들이 군복입은 젊고 잘생긴 배우들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얻고 있을 수도 있겠다.

2016년 3월 17일 목요일

통신의 자유와 원칙의 중요성

http://hyeong-chun.blogspot.kr/2013/04/blog-post_14.html

언젠가 모국회의원이 사이버안보컨트롤타워를 청와대에 설치하자는 법안을 발의했을때 내 기준으로는 극렬하게 반대했다. 왜냐하면 민주적 통제가 안되고 대통령직속의 정보기관에 많은 권한이 집중되어 대통령의 정치적인 생명보다 긴 관료조직의 권력이 더욱 막강해질것을 우려했던것 같다. 그 전에 음성적인 정부(이념편향성이 있거나 종교편향성이 있으면 음울한 개구리처럼 우울하고 식견이 협소한 정책결정이 발생한다는 입장에 있었다.)에서 혼이 나 본 경험이 한 몫했던것 같다. 

상당히 오랫동안 내 글은 그 문제의 중심에 서 있었던것 같다. 그 법안을 발의한 의원분은 애국과 안보를 생각했을텐데 나는 그보다 원칙을 지켜주는 것이 근본적으로 더욱 애국과 안보를 생각하는 것이라는 판단을 하였던 것 같다. 지금 그 의원분은 공천에서 탈락하고 백의종군의 입장으로 돌아왔는데, 오랫동안 그리고 영원히 백의종군하는 입장에서 바라보건데, 그 법안이 현실화되었으면 앞으로 많은 자유의 가능성을 손상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백의종군하는 이의 자유(통신의 자유를 비롯하여)는 그야말로 익은 음식이고 내놓은 어린아이인것 같다. 잡귀의 온상이 된 내 핸드폰대신 잔돈뭉치를 들고 공중전화를 이용할때마다 품위도 없고 깔끔하지 못한 처지에 있기는 내 자신이나 정보기관이나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많았던것 같다. 공중전화로 비애국적이거나 안보에 반하는 통화를 했냐하면 그건 아니다. 그런 방어책이 없으면 정보기관이나 정치권력에 대한 위협감과 의심을 느끼게 되고, 마음이 집중이 안되어 생활자체가 지리멸렬해지는게 싫었기 때문이다.

이념과 종교가 지배하게 되는 사회는 의심과 판단이 과장되어 있는것 같다. 있지 않거나 있지 않을 일도 있다고 상상한다. 무의미하게 상상하는 습관은 비전이라는 명분으로 시야를 방해한다. 밀(John Stuart Mill 1806 - 1873)의 말처럼 좋은 사회는 토론과 대화에 열려있다. 음성적인 판단은 검증과 도전이 없는 가치를 만들어내고 보수적이라는 명분으로 사회를 퇴보시킨다. 많은 가치들이 사회속에서 표현되어야 하고 그것들이 옳고 그른가는 서로가 대립하면서 판단해 가는 것이 옳은듯 하다. 그런 방법은 실패를 통해서 성공을 하게 된다는 개인적인 성공이론 만큼이나 확실한 발전의 길인듯 하다.

이유없이 예방적인 차원으로 자유와 인권을 간섭할려는 시도는 서로를 신뢰하지 않는데서 생긴문제인듯 하다. 내 생각으로는 가장 정치하지 말아야 할 사람은 시민과 자신을 공감대를 형성하는 동일체로 보지 않고 별개의 '상대'로 생각하는 사람인듯 하다. 그에게 시민은 신뢰할 수 없는 적이며 지배해야 할 대상일수도 있는듯 하다. 그러나 자신이 생각하는 시민은 반드시 그런 형태로 나타나는 법칙이 있는듯 하다. 적대감은 적대감을 만든다. 한 번은 우연치않게 북파공작원문제에 연루가 되니 상상력이 풍부한 지인이 오랫동안 내가 자신에게 위협적인 존재라고 자기 최면을 걸고 있는것을 보고 원칙과 중심의 중요성을 재고(再顧)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음성적인 정부를 싫어하면서도 개인적으로 그런 일에 물려 있을것 같은 상황을 반성하였다는 의미다.

정부가 대테러방지법을 통과시키니 수사기관의 통신자료 수집에 관한 문제가 큰 이슈로 떠오른다. 원칙이 없는 시도에 자극을 받아서 너도 나도 관심을 갖는 바람직한 사태가 만들어지는듯 하다. 누군가 뭔가 국가를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아니면 서민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한다고 하지만 그 내면에는 지배욕과 권력욕이 내재되어있는지 모른다. 정부와 시민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며 그냥 양심을 가지고 원칙을 지키면 서로를 위해 예방이라는 과잉액션을 취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2016년 3월 16일 수요일

51대 49

언젠가 사설학원에서 경찰공무원시험과목인 경찰학개론을 강의한 적이 있었다. 그때 경찰이 되고자 하는 젊은이들에 대한 느낌은 프라이버시가 강하고 품위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일이 쉽지 않을것을 예감하고 있는지 수강태도조차 다른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에 비해서 긴장감을 가지고 있는듯 했다. 펜싱선수를 하다가 어떤 상관관계를 느꼈는지 대학입시대신 경찰공무원시험에 매진하던 여학생, 특출난 정의감때문에 학창시절 못된 급우를 혼내준 전력으로 면접시험에 계속 떨어지던 젊은이,발렌타인데이때 씩씩하게 커다란 초콜릿상자를 들고 사무실로 들어오던 여학생이 생각난다. 얼마후 젊은 경찰들이 고속도로에서 오토바이를 못타게 한다고 반대하는 시위로 오토바이를 타다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요즘 젊은이들의 자유의식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다는 생각을 하며 웃었다.

과거 한국의 정치현실에서 경찰의 공공성이 크게 손상을 입은 사실은 경찰조직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현실의 문제였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고객의 질이 나쁜 3d직종이라고 투덜대는 지인의 말이 공감이 갔다. 이상과는 다르게 현업에서는 자아실현이라는 사치스러운 직업철학보다 현실이 냉혹한 면이 있을듯 하다. 한 번은 경찰간부인 대학선배가 조폭을 체포하다가 크게 자상(刺傷)을 입은 사건이 있었는데, 정말 쉽지 않은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편 과거의 경찰은 정치현실의 특성상 정치지도자와 동일적인 성격이 강한데다가 사회에 사회의식자체가 없고, 다만 이념적인 논란이나 민주화에 대한 관점만이 사회의식을 지배했기때문에 합리성이 없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던것 같다. 생각해보면 과거 경찰직에 있다가 퇴직한 분들이나 가족분들은 국민과 자신들을 전혀 다른 영역의 사람들로 구분하는 모습을 간간히 보기도 하는데, 가지고 있든 가지고 있지 않던지 권력이라는 단어가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그 시절의 상황은 이해가 될 법하다. 정보기관과 경찰조직은 정치지도자가 부실하면 괜히 힘들어지는게 현실인것 같다. 충성하고 기여해야 할 대상이 국가와 국민이라는 사실을 자주 잊어버리게 만드니 또 한 분야의 나쁜 정치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겠다 싶다.

지금은 잘 모르겠는데, 실탄권총실력이 특출난 적이 있었다. 가끔 블러그에다 올리기도 했는데, 종종 경찰특공대 시험을 준비하는 젊은이들에게 총쏘는 법에 대해서 문의가 오기도 했다. 한국에서 특수부대사병과 장교를 골고루 체험하고 프랑스외인부대까지 복무한 젊은이가 실탄사격에서 불합격하여 번번히 시험에 실패한다는 말을 듣고 뭔가 한 가지가 더 필요할듯 한데 그것을 말해주지 못해서 답답한 적이 있었다. 말하자면 총쏠때 방아쇠를 빨리 당겨야 하는 마음보다 억제해야 하는 마음이 51퍼센트 더 많아야 한다는 감각같은 것인데, 내가 살아가는 현실이 좌파와 우파 사이가 51대 49인지 49대 51인지 헷갈리는 상황에 그 미묘한 부분을 비집고 들어가는 특출난 재주가 사격실력으로 표출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스케이트를 탈때도 특출난 균형감각을 보여주곤 하는데, 51대 49사이만 미묘하게 오고가면 가능한것 같다.  

한 번은 습관처럼 사격장에 가서 22구경탄을 쏠려고 했더니 실탄이 떨어졌다고 하였다. 그동안 왼팔로 쏘기 오른 팔로 쏘기, 45구경으로 원모양의 탄착군만들기등을 재미있게 보여줬다고 생각하는데, 순간 우울했다. 51대 49의 미묘한 상황이 여기서도 연출되는가 싶었다. 떳떳하지 못한 정치가  사격장까지 위세를 부렸는가 싶어서 실탄사격을 그만두었다. 가끔 누군가 나와 에너지싸움에서 이기지 못하면 테러범 보듯이 하는 모습을 보면서 51대 49를 생각해 보기도 하였다. 내가 선량한 시민인가 그렇지 못한 시민인가 하는 대답의 줄타기를 하는 경우가 생긴것 같았다. 

아주 작은 차이에 의해서 극명하게 편이 갈리는 과잉반응현상은 미성숙한 사회의 현상인듯 하다. 

털리는 팔도강산

학창시절부터 내내 푸락치활동을 하면서 지내던 친구가 있었다. 물론 심증은 가나 물증이 없지만 가깝게 지내던 나도 옌벤에서 출판된 철학책을 보다가 포도청의 급습을 한 방 먹은 것은 물론이다. 그 이후에도 그 친구는 도움과 함께 뒷통수를 쳐주기를 멈추지 않았는데, 어차피 전정부시절 북파공작원문제나 이념문제 또는 종교적인 비판문제로  잡귀의 온상이 된 내 통신문제에 관해서 공중전화를 주로 이용하며 살며시 포기를 한 상태에다가 원리주의 기독교를  믿는 얼띤 친구의 처지가 딱하기도 하고해서 별로 문제삼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장소에서 만나든지 나를 만나면 테러범 만나듯이 도망가기 일쑤였는데, 저렇게 오버액션을 해서 어떻게 살아가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함께 운동을 하러 다니자고 회유를 하거나 좀 더 온건하거나 세련된 교회로 옮기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일단 신경력이 강화되고 객관적이고 개방된 장소에 있어야 멋있는 사람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한반도에서 이념문제가 논란이 된 것은 부실한 국민의 정신상태가 근본원인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처지에 개인적인 문제까지 신경쓸 여력이 없어서 이래 저래 귀찮고 바쁘기만 했다.

언론 기자들의 통신까지 수사기관에 털렸다는 기사가 났다.


이 정도면 한 국가의 정신상태가 갈때까지 다 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모든 촛점이 이념에 맞춰져 있는듯 하다. 나같은 지독한 반공주의자도 내 친구가 하듯이 사적인 감정이나 개인적인 권력욕구로 피해를 볼 수 있는 여지가 있을듯 하다. 조금 더 넓게 세상을 보면 편향성은 대칭성을 만들게 마련이고 싸울려는 자 상대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순탄하게 통합될 수 있는 국민을  결과적으로 분열시키는 역할을 작위적으로 할 필요는 없다는 의미다. 장기적으로 중립에 있을 사람들까지 시스템의 불안정함에 불만을 터뜨리는 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든다.

북쪽이 덜 떨어졌다고 남쪽까지 덜 떨어지면 어떡하라고 

2016년 3월 15일 화요일

음성적 사회

항상 왜 그랬을까를 생각하는 습관이 생겼다. 아마도 음성적인 사회에서 건강한 정신을 유지하기 위한 내면적인 선택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일터에서 연배가 있고 무지한 이가 쉴새없이 떠드는 모습을 몇개월동안 물끄러미 지켜본 적이 있었다. 무엇보다 재미있었다. 말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정신이 정상적이지 않은  길을 걷고 있거나 그 무지함이 가장 우려했던 백성의 모습이려니 하는 생각에 마음이 쓰린적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 자신은 오랫동안 그런 대상에 대해서 감정처리를 할 수 있는 훈련이 잘 되어 있는듯 했다.

한반도에서 이념문제는 상당히 음성적인듯 하다. 이미 양성적인 현실은 세계화를 달리고 있는데, 이념문제는 음습한 하수구속을 헤메는 기분이다. 한 때 원리주의 종교에 심취한 사람들의 집단을 가까이서 볼 기회가 있었는데, 집단 우울증 상태에 있는 것 같았다. 이념에 몰두하는 사람들의 모습 역시 그러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사람들에게도 인격이 있고,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는 생각은 항상 염두에 두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들일수록 에너지를 얻어내기 위해서 싸움을 거는 성향이 있는것 같다.

북한문제나 통일문제, 이념문제나 종교문제등을 양성적으로 유도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지만 내 자신의 확신이 강하지 않으면 예의 싸움에 휘말려 들어갈 위험이 있는듯 하다. 한 번은 살면서 자발적인 고생도 안해보고 자신을 통찰할 기회도 가져보지도 않은 지인이 나를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했는지 쉴새없이 에너지싸움을 걸어왔다. 그때마다 '시끄러우니 운동이나 하라'고 질책했다. 마음을 양성적으로 가지란 의미였다. 내 자신은 에너지를 빼앗기는게 아니라 그냥 비루한 자극으로만 느껴지고, 인간의 약점이 쉽게 파악될 뿐이었던것 같다.  

대체로 정보기관이나 치안기관같은 공권력도 그렇지만 사회 전반에 널려 있는 음성적인 분위기는 이미 정상적인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듯 하다. 시민 개인 개인을 생각해보면 양성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음성적인 인연이 공격적인 간섭을 해 오기 전에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성향이 있는듯 하다. 보이지 않고, 겪지 않는 세계는 생각할 이유가 없는듯 하다. 쓸데없는 상상으로 자신들의 삶을 낭비하지 않는듯 하다.

우울한 사람이 이웃을 힘들게 만든다. 그건 공권력도 마찬가지다. 우울한 사회의 정보기관은 시민의 정보를 무차별적으로 수집한다. 보호라는 명분으로 감시를 하지만 그 내면에는 에너지싸움에서 승리할려는 욕구와 권력의지가 있다. 따지고 보면 사찰기관원들은 또한 누군가의 노예가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이 함께 진화한다. 감시의 방법, 싸움의 방법, 대응의 방법,방어의 방법들이 함께 진화한다. 본심은 블러그글로 모두 표현하고, 이것 저것 부담스러운 점이 있어서 공중전화나 스마트폰이 아닌 전화를 가끔 이용하거나 외부 컴퓨터를 많이 이용한적이 있지만 다수의 사람들이 이런 귀찮은 문제에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야 하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이미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사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타고난 건강이 안 좋아서 참으로 오랫동안 스포츠에 정신이 팔려서 살다보니 음습한 대칭세계가 보이기 시작한듯 하다. 어느 날 병색이 완연한 지인이 눈치를 살살 살피면서 에너지싸움을 걸어왔다. 내가 가지지 못하고 자신이 가진것을 내세우며 내가 어두운 기분으로 전락할 것을 기대했다. 사실 그런 마음 자세로 살면 건강은 더 나빠질 것이라고 질책했다. 한편으로는 질책하면서도 그 분위기에 어느 정도 끌려들어감을 발견하곤 한다. 

북한이란 국가는 굉장히 음성적이다. 그것은 이념때문인듯 하다. 그리고 몸과 마음이 건강하지 못한 지도층이 있다. 한국은 북한때문에 더욱 음성적이기도 하고, 스스로가 음성적인 사회로 빠져드는 성향이 있다. 저번 글에도 밝혔지만 동북아시아 자체가 그런 분위기고, 그 내면에는 수직관계의 권력의지가 바탕이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일본이 세계 제 2의 경제대국이 되고, 아시아의 네마리 용이 승천한다고 떠들썩할 무렵에 무엇을 보고서 서구사회가 종말이 온다고들 말했는지 모르겠다. 정작 문제는 과잉종교에 빠져 쇠락하는 이슬람 세계나 과잉이념이나 종교, 게다가 과잉권력의지에 빠져  쇠락하는 동북아시아인듯 하다.

언젠가 이리유카바 최가 저술한 [그림자 정부]라는 책을 훑어 본 적이 있는데, 음성적인 사회와 양성적인 사회는 개인의 의지에 따라서 선택이 가능한 세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배'를 위해서 헛발질을 하는데, 자신과 이웃에게 불편한 사람들인듯 하다. 

2016년 3월 12일 토요일

토끼와 경주/ 동북아시아의 권력문화

거북이가 토끼에게 말했다. "토끼 경주다!" 어느 웹툰에서 본 내용인데, 우리들이 흔히 상상하는 토끼와 거북이의 달리기 경주이야기가 아니고 토끼와 거북이가 함께 차를 타고 경주 톨게이트에 도착했을때 거북이가 한 말이다. 유치하지만 재미있었는데, 평소 많이 겪은 사소한 경쟁의 불합리성에 비하면 긍정의 해학이 담겨 있으니 즐거움으로 기여하는 착한 내용인듯 하다.

어찌어찌하다가 구세대의 여러가지 특수한 군대출신의 지인들과 본의 아니게 갈등을 겪은 적이 많았던것 같다. 자신과 싸우기 보다는 주변인들을 적으로 상상하는 관점에 몰입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이들을 만났던것 같다. 인간관계를 힘의 강약관계나 서열관계로 파악을 하고 있기 때문에 빨리 그 관계를 정립시킬려고 서두르는 탓인지 강한 사람은 쉽게 군림할려고 하고, 약한 사람은 쉽게 비급한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던것 같다.

오래 전 유신정부시절에 부친이 누군가 무고를 해서 검사심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검사의 권력이 서슬퍼렇던 시절인데도 아무 생각없이 부친은 담배를 꺼내 물었고, 검사는 기절초풍하며 여기가 어디라고 담배를 꺼내 무냐고 질책하였다. 부친은 아무 생각없이 담배를 다시 넣었다. 권력에 대한 민감하지 않은 반응에 좀 의외감을 느꼈던지 그 검사는 부친에게 이왕 꺼낸 담배니 피우시라고 재떨이를 앞에 놓아 주더란다. 수많은 생과 사의 고비를 넘긴 사람의 초탈한 마음은 권력관계도 같지 않아 보였던 모양이다.    

평등관계가 정착이 안된 탓인지 한국을 비롯한 동북아시아의 문화권은 서열관계에 관해서 좀 과장된 몰입을 하는듯 하다. 개인적으로도 그런 관계를 많이 느끼는데, 권력기관에 있는 사람들이나 권력을 지향하는 사람들중에 간혹 담백한 내 마음과는 달리 군림할려고 했다가 꼬리를 내리고 하기를 반복하는등 저 혼자서 전 난리를 치는 경우를 물끄러미 쳐다본 적이 많았다. 어떨때는 웃기지좀 말고 운동이나 열심히 하라고 조언을 해주곤 하는데, 아무래도 자식은 아비 닮는 모양이다.

일본인들의 성향에 대해서는 참으로 생각하는 바가 많다. 왜냐하면 건강부터 시작해서 공부학습 능력이나 심지어는 노자사상이나 장자사상, 논어 같은 중국발 철학조차도 일본인들이 쓴 책은 쉽게 풀이를 해놓고, 공감되는 부분도 많았던 것 같다. 언젠가는 단시간 수면법이나 집중력을 키우는 방법에 관한 책을 본 적이 있는데, 역시 일본인들이 쓴 책이었다. 대략 일본인들의 자기 단련이나 자기계발의 노력은 무사의 단련과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존경받아도 괜찮은 풍속일수도 있지만 그 내면에는 서로에 대한 내밀한 경쟁심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순수한 자신과의 싸움을 거쳐 궁극적으로는 극복해야 할 대상과의 '최후의 한 판'을 남겨놓은 모습이라고나 할 수 있겠다.

일본인들은 서로에게 눈 맞춤을 기피한다고 한다. 내 눈은 비교적 촛점이 잡혀 있어서 의미있는 해석을 좀 받는 편이었다. 여성분들에게 눈이 향하면 사랑에 빠진 눈으로 해석되고 언젠가는 대형마트에서 내가 자신을 쳐다본다고 투덜대며 지나가는 이가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그 이의 직업은 형사였다. 일본인들은 눈을 맞추는 행위를 경쟁과 도전의 의미로 해석하는 모양이다. 초탈하고 담백한 사회분위기보다는 과장된 의미를 두는듯 하다.

싸울려고 하는 자 싸울려는 상대가 나타나는듯 하다. 어쩌면 자신의 상상이 만든 현실적 결과물인지 모르겠다. 한국의 입장으로서는 숨가쁜 이웃들을 두고 있는듯 하다. 힘이 없으면 깡이라도 가지고 싸울려는 북한과 이웃에 대한 협력보다는 배타성이 강한 일본이나 다른 국가와 사회에 대해 종속성을 요구하는 전통을 가진 중국이 있다. 동북아시아는 평등관계를 지향한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결과적으로 우세함을 확보하는 미국이나 서유럽의 지혜로움을 극복하지 못하는 우매함이 있는듯 하다. 어쩌면 서구사회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형식을 타파하여 그것을 찾아내는 목표의식이 확고한지 모르겠다. 어떤 것을 선택하고 그것에 집중하면 다른 것에 대한 생각은 비어 가는 것이 진리라고 한다. 일심(一心)은 무심(無心)이라는 부처의 말을 빌어봐도 그것이 진리인듯 하다. 

2016년 3월 5일 토요일

동북아시아의 몰락

미국 대통령후보인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미국을 떠나겠다고 말하는 유명인이 있었다. 트럼프의 말을 들어보면 그 불안정함이 많은 이들의 정서를 괴롭히고 있는듯 한데, 반대로 대중사회의 열기를 자극시키는 능력은 있는듯 하다. 미국사회는 인내심이 있는 소수의 3%의 능력자가 이끌어간다고 말하지만 나머지 97%의 대중은 선거를 통하여 정치지도자를 선출함으로써 궁극적인 권력을 행사한다. 그러니 신뢰성없는 대중이 신뢰성없는 정치지도자를 선출할 가능성이 많을듯 하다. 그래도 미국인은 전통적으로 자유수호의지가 몸에 베어있는탓에 워터게이트사건과 같은 일이 발생하면 '시민'으로서의 구실을 하는듯 하다. 그래서 미국사회는 꾸준히 창조적인듯 하다. 원래 자유주의의 큰 포괄적 범위안에서 진보와 보수를 규명하는 사회라서 그런지 문제의 타당성에 집중을 하는 성향이 있는듯 하다. 어떤 사회적문제에 대해서 이념같은 환상적인 문제로 오도(誤導)될 가능성이 적은듯 하다.

일본은 매우 단체주의적이다. 기업은 가족주의적이고, 일본인들은 정부의 정책에 순종적이다. 일본인들은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을 정부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을려는 마음으로 표현하는듯 하다. 축소지향적이거나 내향적인 습성대로 못마땅한 점이 있으면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기 쉬운듯 하다. 매우 단체주의적인 개인주의가 심각한듯 하다. 상궤를 벗어나지 않을려는 일본인들의 심리는 일본사회를 경직되게 만들었고, 다양성을 추구하는데 실패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서구화를 지향하던 일본인들이었지만 서구화될 수 없는 기질을 인식하고 있는탓에 서구화에 대한 열망이 과다했는지도 모르겠다. 내향적인 일본은 절대 보수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사회를 개혁시키지 못할 바에는 자신의 안위를 한 번 더 생각함으로써 고령화현상이 심해지는것 같다. 새로운 세대를 양성하고 새로운 세대로 인해서 환경이 뒤바뀌는 개혁적인 사태를 기성일본인들은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한국이나 중국이 일본과는 상관없거나 극복을 했다고 하지만 사회성향자체가 이상하게 일본을 순차적으로 닮아가는 성향이 있는듯 하다. 아마 동북아시아의 공통된 문화권의 영향 때문인지 과거 일본의 경제적인 부흥과 쇄퇴가 현실적으로 한국과 중국에 보이지 않는 밀접한 상관성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정치분야에 있어서 확실한 공통점은 어떤 형태로든지 '권위주의적'이라는 점인듯 하다. 중국은 정부가 자의적으로 권위적이며 일본은 시민이 자의적으로 권위적이다. 즉 일본은 알아서 복종하는 선에서 정부의 권위를 받아들이기때문에 평온한 모습을 보이지만 일본인들은 할복처럼 장기적으로 자신들을 소멸시켜나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은 중간상태를 보이는듯 하다. 그러면서 한국은 일본을 부지런히 닮아가는듯 하다.

한국은 보수적인 사회로 회귀할려는 일본의 모습을 배우면 안될것 같다. 한국은 일본과는 달리 이념문제가 사회개혁의 방해요소로서 작용하고 있는 불리한 점이 더 불리하다. 일본은 자신들의 한계때문에 서구화에 실패한듯 하다. 한국사회의 깊고 깊은 속내를 살펴보면 역시 장기적으로 위축될 가능성이 많을것 같다. 국가의 번영은 번영하고자 하는 국민의 의지를 기초로 한다는 점을 인식하면 젊은이들의 개척적인 사고나 노인분들의 끊임없는 자기개발과 혁신노력등이 한국사회에서는 매우 아쉬운듯 하다. 

2016년 3월 4일 금요일

엘랑 비탈 2

그럼 카리스마와 권위, 확신외에 도대체 무엇이 더 필요한가? 하는 의문을 품는 이가 많을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적인 문제인듯 하다. 사실 기업의 목표는 이윤창출이라고는 하지만 소비자에게 기여하는 바가 있을 경우에 반대급부로서 이윤이 주어지고, 정치의 목적은 정권창출이라고 하지만 국민에게 기여하는 바가 있을 경우에 권력이 주어지는 것이 옳은듯 하다. 만약 그런 가운데 기여분과 급부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불협화음이 일어나게 마련인데, 우리들이 흔히 보수와 진보의 척도로 삼는 분배냐 성장이냐 하는 관점은 어느 한 쪽을 선택하라는 극단적인 갈등론적 관점으로 결말짓게 되기 때문에 이념문제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는듯 하다.

발생하는 사회문제의 대부분은 정상성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진리인듯 하다. 문제를 인지한 사람들이 보정할려는 의지를 갖고 균형을 찾아서 시도한 일들이 지나치게 과장되었거나 사회적 타성이라는 깊은 늪에 빠져버린 대표적인 예가 이념논쟁인듯 한데, 한반도의 비합리적인 정신적 분위기는 자율적인 정신교육을 양성할 수 있는 역사적인 시간이 부족했던 탓인지 쉽게 이념이나 종교, 아니면 대중조작에 동조되어 버린다.

강한 정부나 거대한 재벌이 정치나 경제에 있어서 경직되고 단순한 상황을 만드는 문제는 이념문제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인듯 하다. 그것은 다양성과 다양성에서 비롯된 사회적생명력을 훼손시키는 문제가 있는듯 하다. 그러니까 누가 세상을 지배하느냐 하는 문제도 아니고, 누구에게 더 많은 것이 분배되어야 하는 문제도 아니며 사회와 자신(집단이든 개인이든)에게 기여하는 바가 있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한듯 하다.

인간은 식물이 아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진화하고, 도약해야 할 의지를 가지고 있다. 어떤 명분, 그것이 종교적이거나 이념적이거나 심지어 신에게 모든 것을 맡겨버린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어도 그 속내는 무엇인가를 빌어서 자율적인 의지를 갖고 싶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반도민들이 진즉에 인간은 동물이고, 가장 선명한 자의식이 있는 동물이라는 것을 이해했으면 북한과 같은 기묘하고 거대한 사회집단이 존재할 수 없었을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