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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8일 화요일

도덕성과 종교 / 마이클 센델

한국이 금융위기를 겪을 무렵 내 자신도 가장 패기 넘치던 시절을 가장 암울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 가운데 빛이 있었다. 그 전에 한때 남파공작원을 할 뻔 하다 북파공작원으로 젊은 시절을 보낸 부친은 지나친 정직함과 정(靜)적인 태도로 운수업을 하다가 실패를 하고 가족은 뿔뿔히 흩어져 온갖 비극을 맛보았다. 미군 비행장을 건설하는데, 다른 자동차 소유주들은 미군으로부터 연료를 필요량 이상으로 배급받아 남은 연료를 암시장에 내놓곤 했는데, 나의 부친은 남들이 다 하는 그런일 조차 하지 않아 주변 자동차소유주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곤했다. 인생을 살다보면 유연한 태도가 필요하다는 수단좋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지만 부친은 끝까지 침묵으로 일관했고, 그 가운데 간간히 깊은 마음씀씀이를 보여주곤 했다. 그러던 부친이 세상을 등지고 꼭꼭 숨어버렸다.

어느 날 부친이 큰 병이 났다는 연락이 왔다. 내가 할 일은 치료보다 옆에 있어주는 것 뿐이었다. 한반도 분단의 비극을 안고 떠나는 부친옆에 있으면서 문명과는 거리가 먼 곳이라서 뭐 할게 없을까 고민하던중 6개월동안 일본공작원훈련학교인 나까노학교의 훈련 프로그램을 본따 자기단련을 하고,무예에 관한 책 100여권을 읽으면서 느린 검도와 느린 무예훈련을 했는데, 짧은 시간에 얼마나 고된 훈련을 했는지 부친이 세상을 떠나고 문명세계로 내려올쯤 두리뭉실하던 신체가 체중이 20여킬로가 빠지고 정신이 모아져 시력이 좋아지고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부친이 마지막으로 다녔던 병원은 독일인 수녀가 운영하던 병원이었는데, 부친의 옆에서 잠을 못자고 책을 읽으면서 원장수녀가 잠을 못자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았다. 인간이 이타적인 마음을 지니면 저렇게 잠을 못자도 평화로운 모습을 지닐 수 있다는데 감동 받았다. 몇년동안 그 분의 사진을 가지고 다니면서 마음이 비뚤어지지 않도록 관리하고 카톨릭교회에서 영세도 받았는데, 결국 세속인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얕은 욕망들과 싸우느라 지금까지도 분주하기만 했던것 같다.

당시 나름 깊은 철학적 사고를 한다고 하는 나에게 많은 종교적인 사람들이 접근을 했는데, 대게 종교란 명분으로 욕망이 적절하게 합체된 변형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어서 나중에는 카톨릭교회도 냉담하고 종교랑 거리가 먼 삶을 살게 되었던것 같다. 간간히 무술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크리스찬이라고 엇갈고 크리스찬들에게는 나는 무술인이라고 엇갈았는데, 그냥 공학(工學/ engineering)을 공부하고 싶었다. 종교적 도덕이란 명분으로 이상하게 사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던 탓에 차라리 공학적 몰입으로 인한 부작위(nonintentional)가 최소한의 도덕적 가치를 지킬 수 있겠다 싶었다. 훗날 대통령들을 보면서 내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느꼈다. 도덕성이 결여된 종교는 그냥 욕망의 또 다른 배출구였을 뿐이었던 것 같다.

한 번은 순진한 크리스찬인 친구가 자신이 다니던 교회에서 동성애 반대운동을 하고 있으며 그 문제에 관한 입장좀 알려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말하고 싶긴하나 말해서는 안될 것 같은 말을 지금 하고자 한다. 대게 어떤 논제에 집중을 하는 것은 그 집단이나 개인의 관심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으면 그 사람과 대화를 많이 해보면 그 사람의 대화중에 자주 나오는 화제가 있는데, 그것이 그 사람의 관심사인 것이다. 나 자신은 별로 도덕적이지 않은 사람이지만 할 일이 많아서 비도덕적인 일을 별로 하지 못하고 있음은 내 관심사 탓일 것이다. 왜 하필이면 동성애에 그렇게 집중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 전에 어떤 교회를 가본적이 있는데, 그 교회는 형제님들과 자매님들의 관계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물론 훌륭한 가정, 순수한 사랑이라는 표현도 하고 있었다. 그것을 생각하면 동성애에 관심이 집중되는것도 무리가 아닌듯 싶었다. 자신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위반한 것이 동성애라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가치가 국가적 가치로 비화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다. 나는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해서 극도로 혐오하는 면이 있는데, 첫째 정권을 잡기위해 북파공작원을 이용해 선거운동을 했는데, 북파공작원을 폭력성을 가진 단체로 매도하고, 그 위세를 이용한 점에 있어서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둘째, 자신의 종교적 가치가 반공이라는 것을 비화시켜 통일작업이나 남북협력의 길을 막아버린 점, 셋째, 크리스찬임을 내세우면서도 보편적으로 비도덕적이었던 점, 넷째, 국정원등의 국가공동체를 위해서 사용해야 하는 정부기관을 자신의 정권유지를 위해서 대국민 공작정치에 사용했던 점등이다. 모든 사안에 대해서 옳지 않은 점이 있음을 일찍이 파악하고 막을려고 했는데, 내 역량의 부족으로 막지 못한 점이 아쉽기만 하다.

다음은 유명한 하버드 대학교수 마이클 센델(Michael J. Sandel)의 [WHY MORALITY]에 나오는 내용이다.  

한편 민주당은 공화당의 도덕적 성향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의 도덕적 판단을 거부함으로써 이러한 미덕의 정치에 저항했다. 공화당이 낙태를 금지하고 동성애자의 권리를 부인하고 교내기도를 장려할 때, 자유주의 진영은 정부가 도덕을 법률화하거나 국민의 도덕성에 관여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국가통치술이 영혼통치술로 전환되는 곳에 강압정치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치는 사람들에게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강요해서는 안 되며, 모두에게 자유로운 선택권을 부여해야 한다.

물론 마이클 센델은 현실적으로 정부가 도덕문제에 중립을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부연설명하고 있지만 보편적인 도덕이 아닌 독선과 아집으로 왜곡된 편향적인 도덕에 대해서는 공권력을 움직이는 힘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더구나 부정부패의 수단으로서 종교적 도덕이 사용되고 있다면 그것은 훨씬 큰 문제로 비화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종교적이고 부분적인 도덕을 내세워 국가공동체에 위해를 가함은 그 종교단체에도 자해(self-injury)적 결과가 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지난 날은 습관과 잘못된 판단으로 엄청난 결과를 보았지만 미래에도 이런 문제가 다시 발생한다면 국가적 자멸에 이르게 될지 모를 일이다. 북한이 가지고 있는 이상한 도덕적 오류를 한국도 가져서는 안되는 일이다.

2017년 11월 24일 금요일

노력과 잡음(파라젯 / noise)

"지금 겪고있는 힘든 상황을 벗어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겠지"하는 생각은 결국 기만이다. 좋은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다만 좋은 날이 오도록 노력할 뿐이다. 이념과 종교가 주는 파라다이스에 대한 약속을 믿을때 그 약속이 주는 평화로운 혜택을 입는 사람들은 '노력'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 기만당하고 자신이나 하느님, 또는 타인을 원망하며 삶을 종결짓게 될 것이다.

독일의 대문호 괴에테(1749-1832)의 철학적인 문학작품 [파우스트]에는 이런 말이 있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헤메고 있다], [쉽지않은 고생을 하고 온갖 학문을 닦고 그런데도 이 모양이야,가엾게도 나라는 바보가 옛날보다 조금도 영리하게 되어 있지 아니잖나.]    

파우스트의 고민은 인간 모두의 고민일 것같다. 그리고 그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서 메피스트의 꼬임에 넘어가지만 결국 고민은 고민으로 남을 뿐이다.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욕망이 존재의 이유고 의식의 저변에 자리잡은 인간의 한계일 것이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은 생존할려는 욕구의 덩어리고 인간은 많은 고차원적인 방법을 통하여 좀 더 생각하고 노력하며 생존할 뿐일 것이다.  

노력의 뒤에는 그 노력을 방해하는 잡음이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과학철학자 세르(Michel Serres 1930 - )는 완벽한 시스템은 없다고 말한다. 만약 있다면 파라젯(노이즈)을 배제함으로서 만들어낸 형식일 뿐이라고 말한다. 열린 시스템에서는 노이즈의 간섭이 있고 그 간섭에 저항하며 창조성이 정돈되어 간다고 말한다. 노이즈는 한낮 짐일 뿐이지만 존재하게 만드는 이유일수도 있다고 해석해도 될 것 같다. 

사회적 잡음을 차단시키는 국가시스템은 발전할 수 없으며, 고생해보지 않은 인간 역시 발전할 수 없다는 구체적인 해석을 해도 될 것 같다. 사회와 개인의 보수성은 노이즈를 원천 차단시킬려는 허황된 노력으로 정체와 퇴보를 만드는 원인이 된다. 북한 사회는 잡음을 제거할려고 스스로 고립시킴으로서 퇴보의 길을 걷고 있고, 한국사회 역시 이념을 구실삼아 안일하게 주저앉아 잡음 제거에만 힘쓴다면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태어나서 어려운 일을 겪고, 고민하며 발전해 나가는 것은 인간의 숙명일 것이다. 인간과 사회는 정적(停的) 시스템이 아닌 동적(動的)시스템임을 인식해야 한다. 어쩌면 진보와 보수의 적절한 대립은 서로 노이즈의 역할을 함으로써 사회발전의 도구가 되어줄 수 있음을 생각하게도 한다. 고민하는 것이 아무 생각없음보다 나을것같다. 

2017년 11월 19일 일요일

slow 부탄 quick 북한

1972년에 부탄의 국왕이 "나는 GDP가 아닌 국민들의 행복지수를 기준으로 나라를 통치하겠다"고 선언했고 부탄은 실제로 국민이 가장 행복한 나라가 되었다. 그런데 국명이 비숫하게 발음되는 북한은 비숫한 GDP를 가지고 국민이 가장 불행한 나라가 되었다. 인간에 가치를 둔 국가와 이념에 가치를 둔 국가의 차이가 아닌가 싶다.

활력이라는게 속도로 해결되는 것이가를 오랫동안 살펴보았는데, 그게 아닌듯 하다. 한국에서는 근로자들이 어느 정도의 임금을 받고서 노동생산성은 저조한데, 속도에 시달리고 있는 현장을 많이 보았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라는 명분으로 인생의 모든 여력을 갈아넣고 있었다. 많은 임금과 적은 노동시간으로 국가브랜드 1위를 달성한 독일은 기술이 발달하여 "외계인을 갈아넣었다"는 익살스런 오해도 받는다. 나찌시절과 같은 많은 진통을 겪으면서 '인간'을 소중히 여기는 국가를 만든 결과일 것이다.

욕망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속도는 한계가 있다. 한번은 수영과 스케이트같은 운동을 통하여 실험을 해봤다. 그러니까 천천히 하는 훈련을 해봤다는 것이다. 생각하고 보완할 여력이 있었다. 언젠가 한국빙상장에서 중국국가대표선수들이 훈련을 왔다가 느리고 보지못한 기술을 구사하는 내모습을 보고 넋이 빠지게 쳐다보던 생각이 난다. 원래 느리지만 근대화의 요구에 시달린 이후 느린것이 신기해진 중국의 생각을 읽는것 같았다.

한편으로 마음 아픈 일은 북한이나 한국이 주변정세로 인하여 빠른 근대화의 요구를 강요당한 일면도 있다는 것이다. 이념에 매몰되어 가면서 인간을 소홀하게 생각한 일들이 결국에는 경제성장의 하락, 경제성장률의 감소, 인구감소로 귀착될 것이라는 예상은 들어맞았다. 일본도 지나친 국가주의나 단체주의 사상이 인간의 가치를 대신하여 "나쁜 이념'으로 자리잡은 결과 이제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느리다는 것은 게으르다는 것이 아니다. 여유있게 효율성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효율성은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가끔 늙어서 죽을 날만 남은 사람들이 속도를 외치면서 성마른 얼굴로 허덕거리는 것을 보면 어떤 사람이나 시간과 욕망의 노예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여유를 찾지 못하면 타인에게 이용당한다. 독재권력이 생기는 이유중의 하나가 단기적 욕망에 구속된 사람들 때문이다. 평등을 구실삼아 독재권력밑에서 허덕이고, 영생을 구실삼아 종교적 억압에서 신음하고, 심지어는 한국에서 경제성장을 구실삼아 이상한 인간이 권력을 잡는 일도 있었다.

지난 몇년동안 한국의 근로현장을 보면서 북한과 상당히 유사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017년 11월 12일 일요일

활력의 가치와 북한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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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헌법강의를 듣다가 독일의 헌법학자 루돌프 스멘트((Rudolf Smend)의 헌법이론인 '동화적 통합론'부분에서 명상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교수님의 설명이 있었다. 당시 그게 무슨 의미인줄 몰랐다. 나중에 잠시 공무원수험생들이나 승진시험을 준비하는 분들에게 헌법을 지도한 적이 있었는데, 어느 정도 사회적 경험과 인생고민을 하고 난 후라서 '동태성'의 의미가 새롭게 인식이 되었다.

과학적 사회주의(공산주의)이론의 창시자인 마르크스는 어떤 상품의 진정한 가치는 그 상품이 지니고 있는 교환가치임에도 불구하고 그 상품 자체에 가치가 있다는,  속칭 '물신화(物神化)가 자본주의 사회에 깊이 내재해 있다고 말한다.

높이 솟아 오른 고층빌딩, 커다란 공장의 굴뚝, 첨단산업단지, 물류시설, 사통팔달로 뚫린 고속도로, 사람들이 붐비는 지하상가등 자본주의 사회가 이루어낸 경제적 규모들은 정지적인 관점으로 생각하기에는 그 이면에 무척 많은 역동성이 잠재해 있다. 바로 '움직이는 힘'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인생이나 국가의 생명주기는 움직이며 흘러가는 과정으로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스멘트의 이론은 '명상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본질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통찰하기 때문일 것이다.

북한사회가 정체된 이유는 바로 이 역동성을 만드는 '활력'을 무시한 까닭이고 한국정치에서 보수가 몰락하게 된 이유도 마찬가지다. 생명을 지닌 존재들은 활력을 끌어낼 수 있는 동기가 주어져야 한다. 자본주의가 성공한 것도 이런 동기를 부여하는데 성공한 까닭이고 자본주의가 실패한 점이 있다면 마르크스의 말처럼 물질이나 경제적인 부분들을 순환해가는 동체(動體 / moving body)로 보지 못하고 고정되어 있는 것 자체를 신앙화 시켰기 때문이다. 그런 물신화에 관한 말을 한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 역시 자본가와 노동자 관계를 기계적으로 해석하고 있고,  사회주의 혁명으로 변화를 이룬 후의 정지된 세계를 가정 함으로써 이념 자체를 신앙화 시킨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자본가들의 세계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 노동자들의 세계가 중요한 것도 아니다. 끊임없이 이윤을 추구하여 행복을 얻을려는 기업가의 움직이는 노력이나 열심히 일하여 경제적인 가치를 얻고 그것으로 행복을 만들어 내는 근로자의 노력이 모두 존중 받아야 하는 움직임이고 정부는 그 움직임들을 조화롭게 질서를 잡아줘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물신화 대신 이념을 신으로 모신 국가의 어두운 현실을 북한이 보여주고 있지만 한국도 하마터면 큰 일날뻔 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성질을 '활력'으로 보지 않고 '개인적인 이익추구'로 오해한 무리들의 부패행위가 한국의 발전을 정지시키고, 활력도 없이 죽은 사람의 사회를 끌고 나가는 북한이 존재하는 한반도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 북한은 오래전부터 인민의 활력을 끌어내기 위해 여러가지 선전 선동활동을 하고 있지만 좀 더 인간적이고 본질적인 측면에서 활력을 끌어내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