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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30일 금요일

말을 다 못한 아담스미스, 말을 다 못들은 마르크스


갑자기 크게 발전해 나가는 전망있는 회사에서 일하던 정직하고 순박하기만한 가장이 '융통성이 없음으로 인한 회사와 동료들과의 부조화'란 이유로 제대로 일을 해 보지도 못하고 강제 퇴직당하는 일을 목격하였다. 비숫한 경험을 딛고 일어선 그 회사 사주(社主)의 집념과 속속들이 능률적으로 움직여 나가는 회사의 메커니즘을 보며 경제적인 효율성과 도덕적인 가치에 대하여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던 적이 있다.

동시에 당장 현실적으로 한국의 사회보장 장치가 일을 할려고 하는곳 마다 비숫한 이유로 쫒겨나오는, 아이 둘을 둔 저 둔한 가장을 구제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고. 모진 결심으로 사주와 같은 성공의 길을 갈 수 있을지, 아니면 가진것은 없지만 선하게 살았다는 세간의 지나가는 바람소리 같은 한 마디를 가치있은 삶으로 착각하며 별이 될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아이 둘을 둔 중년의 독신 여성이 이 어려움을 헤쳐 나간다면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진 곳에서 기회를 활용하라는 의도로 만들어진 성공학 책의 주인공으로 년년세세 등장할 법하다. 마치 미국의 메리케이 화장품 회사의 사주처럼......   

자유주의 시장경제학자로서 대칭사상인 마르크시즘까지 유발시킨 아담스미스의 경제이론은 순기능과 역기능을 확대시키면서 인류 경제사를 200년이나 주도해왔다. 프랑스의 마르크스 철학자 알튀세르( Louis Althuser 1918 ~ 1990 )는 경제가 역사의 흐름을 결정하지만 경제구조보다 위의 상부구조인 국가나 법률적, 이념적, 정치적 영역에도 상대적인 자율성과 독자성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담스미스 이후의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물질적인 성공과 시장실패, 그리고 시장실패가 낳은 과학적 사회주의(마르크시즘)의 팽창,그 이후에 나타난 두 경제 이론의 대립은 인류 역사상(특히 타고르가 극찬했던 동방의 등불인 어느 나라에서)다른 영역으로의 관심을 모두 흡수하는 블랙홀이었던듯 싶다.

원래 아담스미스의 자유주의 경제이론은 당시 청교도적인 도덕적 가치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던 시대에 만들어진 이론이다. 아담스미스는 자유주의 시장경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제 되어야 할 조건이 있다고 말했는데, 그 조건이란 바로 '도덕감정'이라고 말한다.

아담스미스는 인간은 사회 속에서만 살 수 있으며,모든 사회의 구성원들은 사랑과 호의라는 도덕적인 감정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런 도덕적인 감정은 타인의 행복을 침해하지 않는 '정의'와 타인의 행복을 증진하는 '인애'라는 개념으로 표현되는데, 이런 도덕적인 감정이 시장경제의 건전한 운영을 위해서 전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 아담스미스는 경제적인 능률성만 강조하는 분업시스템이 노동자를 우둔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기초 학문을 익혀서 창조적인 두뇌활용도 병행 할것을 권장하고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공공교육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좀 찌질하기도 한 개인적인 말이지만 단순한 기계적인 암기에 익숙치 못한체로 방황했던 내 젊은 날을 자책했던 적이 많았는데, 아담스미스의 생각을 알고는 아담스미스경제이론이 복음처럼 여겨질것을 걱정해야 할 일도 우려가 되는듯 하다.

경제학에 대한 논쟁이 아담스미스와 마르크스가 만든 이데올로기장치를 벗어나지 못하는것 같은데, 알튀세르는 학교, 종교, 매스미디어등 모든 사회제도가 이데올로기장치속에 갇혀 있다고 말한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각성함으로써 이데올로기의 형성과정을 분석하고, 행위적 수준에서 사회관계들을 변화 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말이 어려운데 미국 철학자이며 교육학자인 존 듀이( John Dewey 1859 ~ 1952 )의 말처럼 '사고는 실천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말을 염두에 두면 좋을 듯 하다.

만약 자유주의 시장경제이론은 도덕적 감정이 전제되어야 하며 창의성이 중요하다는 아담스미스의 주장이 경제이론의 전제조건으로서 많이 알려졌다면, 물질적이고 기계적인 마르크스의 경제이론이 등장하지 못했을 법하다. 결국 인간의 도덕적인 감정을 불신하는 마르크스는 해답을 '시스템(장치)' 으로 해결할려고 했고, 그 두 이념내지는 경제이론이 인간의 도덕적인 감정을 배제 시키고 인류 역사상 엄청난 재난을 가져 올 줄은 아무도 몰랐던것 같다.

한국에서는 두 이념의 기계적인 대립이 계속되는동안 인간적인 도덕감정을 찾는 시도가 종교심을 구하는 민중의 마음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듯 한데, 오늘도 회사에서 쫒겨나고 사회보장시스템에서도 배제된 어느 아이들의 어머니가 냉엄한 현실을 기도와 눈물로써 위안을 받고 있는줄 모를 일이다. 내가 생각하기는 반드시 그랬을 것이다.    

2014년 5월 23일 금요일

타성과 습관의 늪에 빠진 북한


노인은 습관으로 사는듯 하다. 노인이 되면 평생 살아온 방식은 습관이 되어 노인의 삶을 지탱하는듯 하다. 좋은 습관은 경험 또는 지혜라는 바람직한 사회가치를 창출하고, 나쁜 습관은 변화를 거부하게 만드는 망령이 되어 노인의 삶과 주변에 우울한 그림자를 드리우는듯 하다. 그래서 노인이 살아온 삶의 궤적속에서 쌓아온 내공(內功)의 성질에 따라 극단적이고 상반된 성질의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는듯 하다.

북한은 아주 오랫동안 외부의 자극을 회피하며 지탱해 온 노후화된 국가인듯 하다. 이념이라고 부르는, 그다지 고귀하지 않은 도그마로 변해버린 가치로 외부의 자극을 통제해버린 결과는 한 국가의 운명을 완전히 망가뜨린듯 하다. 북한을 생각하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만드는 사상이나 이념, 철학, 종교등의 네거티브적인 위상을 다시 한 번 느껴보곤 한다.

가슴에 훈장이라고 이름붙은 망상덩어리를 주렁주렁 매달고 국가행사에 참여하는 북한군 장성들의 모습은, 완벽하게 어두운 북한의 운명을 보여주는데, 가끔은 그런생각이 든다. 저들이 그 사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습관과 타성속에서 흐른 시간의 되돌릴 수 없는 한계를 느끼고 있는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니체는 고귀한 문화를 가진 공동체가 새로운 문화를 수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니체는 미래의 문화는 현재의 천재들이 과거의 천재들이 이루어놓은 문화를 거부하면서 만든다고 말한다. 니체는 과거의 문화를 거부하고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것이 나약하고 비천한 자들이 이루어놓은 문화에서나 혁명 또는 반란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지, 능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는 장소에서는 더욱 고귀한 문화로의 도약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런 면에 있어서는 한국도 경각심을 가질 일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2014년 5월 17일 토요일

한국에서 다양성의 인정과 사회발전 / 밀


전제적인 군주와 종교적인 억압에 의해서 다양성을 인정받지 못하던 시절,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중세크리스트교 세계의 오랜 암흑기를 르네상스, 과학적 발견, 실존주의 철학등이 흔들기 시작하며 종교적인 사회의 정체된 모습은 종말을 고하기 시작했던것 같다.

부족의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게르만족이 로마의 영토를 차지하게 되면서 받아들인 크리스트교가 봉건제로 인하여 분권적인 정치구조를 계속 유지할 수 밖에 없었던 게르만 사회의 통합에 매우 유용했던것 같다. 로마의 선진문화가 게르만족에게 준, 또 하나의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물'이었던것 같다. 그러나 크리스트교에 대한 게르만족의 '사랑'이 깊어감에 따라 '타성과 습관의 부작용'이 점차 나타나기 시작했던것 같다.

종교사상과 인간의 욕망은 항상 적대적인듯 하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미처 발견하지 못한 고차원의 '욕망'들이 점차 발견되기 시작했는데, 종교적인 억압을 받는 욕망이란 대게 가장 기본적인 욕망, 미국의 인본주의 심리학자 매슬로우(A.H.Maslow 1908 ~1970)의 욕구 5단계설을 인용하자면 생리적 욕구나 안전의 욕구쯤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것 같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루터도 "인간이 자기 뜻대로 사는 것은 죄악이다.'라는 입장을 설파하면서 종교적인 관점의 내부에서 개혁을 시도하고자 노력했는데, 중세 카톨릭의 부정적인 결과가 교황을 비롯한 성직자들의 욕망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루터로서는 당연했었던것 같다.

영국의 철학자이며 사상가인 밀(John Stuart Mill 1806 ~ 1873)은 인간은 욕망이 강해서 문제가 되는것이 아니고 양심이 없어서 문제가 된다고 말한다. 신의 뜻대로 사는 것이 이상적이라는 칼벵의 생각에 신이 인간을 선한 존재로 만들었다면, 선한 존재로서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을 모두 사용하는 것이 신의 의지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밀은 인간의 다양성과 개별성을 인정할 것을 주장하고 있는데, 다양성과 개별성을 억압받는 사회는 발전이 정체된다고 말한다.

밀의 아버지이자 공리주의 철학자인 제임스 밀로부터 아들인 존 스튜어트 밀은 "나는 소년이었던 기억이 없다."고 말 할 정도로 그리스 고전, 미적분과 기하학등을 입체적이고 다방면으로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는데, '좀 더 자율적인 지적 호기심의 발휘'를 매우 그리워했던것 같다.

하지만 이념과 종교적 관점에 억압되어 있는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내 자신을 비롯한 많은 이들은 150여년전에 밀이 새벽별처럼 깨달은(표현이 종교적이라서 一笑함)문제가 부럽기만 한 것이 현실인듯 하다. 밀은 중국이 고대문화를 일찍 성장시키고도 다양성을 인정하는데 서양보다 한 발 늦어서 사회발전의 시기를 놓친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개별성과 다양성도 인정하지 않고, 철학도 없고, 과학도 없고, 창의적인 교육도 없고, 이념과 종교적인 억압만 '창궐'하는 한국사회의 미래는 낙관적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2014년 5월 9일 금요일

진정한 적과 동지


불의(不義)의 반복은 인간을 낙담하게 만든다. 패러독스가 인간을 미치게 만든다는 '이중구속이론'의 창시자인 미국의 인류학자 베이트슨(Gregory Bateson 1904 ~1980)의 말처럼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어깨를 짓누르게 되면 사람들의 정신은 도피처를 찾아 떠나거나 구세주를 찾는다.

정의에 대한 신념을 가져야 하는데, 반복된 학습으로 확신이 없어지면 이제는 무엇인가에 기댈려고 한다. 그 돌파구는 이념, 종교, 돈, 명예, 권력등 여러가지가 있는데, 선용(善用)하면 좋은것이지만 한 편으로는 악용(惡用)의 여지가 많은것들이기도 하다.

어렸을때 기차안에서 누군가가 책을 팔았다. '적과 동지'라는 정치실록 비숫한 종류의 책이었는데, 사실 수십년전인 그때도 한국인들은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아니 엄격히 말하자면 '권력'에 관심이 많았던것 같다. 책의 제목은 권력자와 그 주변의 견제세력에 대해서 누가 옳은지 판단해 달라는 내용같았는데, 세월이 지나고 생각해보니 '적과 동지'는 둘 다 사람이 아닌 그 사람을 지배하는 정신과 철학의 문제였다는 생각을 깨닫는 바가 있다.

이것은 공손함이 약하다는 징조는 아닙니다. 성실성은 언제나 입증되고야 만드는 것을 양 진영이 함께 기억하면서 새로이 시작하여 봅시다. 우리는 결코 두려움 때문에 협상하지는 맙시다. 그렇다고 하여, 협상하기를 두려워하지도 맙시다. 우리는 우리를 분열시키는 문제에 주력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단결시킬 수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연구하여 봅시다. - 중략 - 우리 양 진영은 과학의 공포가 아니라 과학의 신비성을 찾아냅시다. 우리는 서로 협력하여 별을 탐험하고, 사막을 정복하고, 질병을 박멸하고, 깊은 바다를 개발하고, 예술과 산업을 장려합시다.

-  케네디 미국대통령의 취임사 중에서 -

권력과 철학의 이중적인 모습을 많이 보아 온 한국인들의 정부에 대한 불신은 협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불신이 커가고, 뜻있는 권력자가 노력한다 할지라도 이리저리 엮여서 인습으로 자리잡은 부정(不正)을 손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다. 현실은 이념의 문제도 아니고, 정부와 국민사이의 문제도 아닌것 같다. 정부내부에 속속들이 베어있는, 또는 국민내부에 속속들이 베어있는 생각의 문제이기도 한것 같다.

'적과 동지'는 사람이 아니라 생각인듯 하다.

원인과 결과의 연속성 / 바슐라르


인간의 역사는 이념이나 종교사상같은 관념적인 분야든지 과학가술과같은 현실적인 분야든지 반드시 단절되어 새로운것이 탄생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것 같다. 어떤 결과에는 어떤 원인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연속성의 개념은 끈기있고 이성적인의 노력의 정도만큼 실체를 드러내는것 같다.

어린아이는 이성보다 본능에 충실함으로써 현실적이 되고, 노인은 이성보다 습관에 충실함으로써 현실적이되고, 어린아이와 노인을 제외한 세대는 활발한 현실참여의 사명을 띄고 역사를 형성해 나가기는 한다. 그래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연속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프랑스의 철학자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 ~ 1962)는 뉴턴과 아인쉬타인의 과학적인 견해가 비연속성을 보이고, 아인쉬타인의 이론은 새로운 역사성을 창조해내었다고 말한다. 수학자이기도 한 과학철학자로서 좀 더 합리적이고 개혁적인 현실을 추구하기 위한 '역사형성의 의도'가 바슐라르의 의식속에 잠재해 있던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혁명적인 변화'라는 표현속에서도 과거의 문제점을 개선하고자하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는것을 볼때 과거와의 완벽한 단절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것으로 생각된다.

2014년 5월 5일 월요일

정민동일체의 원칙(政民同一體의 原則)


큰  국난(國難)을 겪으면 국민은 정부에 책임을 묻고, 정부는 사태가 겉잡을수 없이 확산될것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하는것은 당연한듯이 보인다. 자칫하면 국민의 요구는 반정부활동으로 왜곡되기도 하고, 정부의 태만은 강압과 권위의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하는것 같다. 게다가 이념논객들이 어느편을 감싸고 상대편을 공격하는 비약이 있게되면 문제는 '재난극복차원'을 떠나 분열의 감정을 비약시키고, 문제의 본질도 왜곡시키며 합의점도 찾지 못하는 경지까지 간다.

어른이 철이 없다는 사실은 이 와중에 정(政)과 민(民) 그리고 좌(左)와 우(右)의 분열을 유도하는 이들의 책임없는 언행으로 재난상황보다 더 희망없는 미래를 느끼게 하는것 같다.

원래 정부와 국민은 동일체로 생각되어야 정상이다. 민주주의 정부에서 국민이 형성한 정부와 국민이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분열되어 있을 이유는 없는게 정상인듯 하다. 그러나 현실은 당연하게 분열이 된다. 정치가나 국민의 마음속에 서로가 대립적인 주체로 자리잡은 일은 한국사회의 역사적인 비극중에 하나다.

이런 상황에서 싸워야 할 문제도 규명이 안되고, 싸워야 할 적이 누군지도(엄밀히 따지면 무엇인지) 모르는듯 하다.

정치가나 지휘관이 내려야 하는 최초이자 최고이며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칠 판단행위는 바로 그들이 시작하는 전쟁의 유형을 규명하는 것이다. 절대 그것을 그 본질에 맞지 않는 것으로 오해하거나 바꾸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모든 전략문제중 첫 번째이자 가장 포괄적인 문제이다.

-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전쟁론] - 

잊지 못하는 추억 / 경로의존성


보수와 진보의 개념이라는게 없어야 이상사회로 가는 열차의 속도가 빨라질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과거를 반복하는 구태(舊態)의 습관은 정체(政體)나 경제체(經濟體)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는 일반시민의 삶속에도 더 나은 삶의 형태로  개선하고자 하는 욕망은 있으나 무지(無知)와 습관은 지난 날의 교훈마저 포맷된 완전히 새로운 새벽을 맞게 만드는 것은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큰 고민중의 하나인듯 하다.

영국의 경제학자이며 스탠퍼드 대학교수인 폴 데이비드(Paul A.Davide)는 1985년 논문 [Clio and QWERTY]에서 '경로의존성'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자동차연료로 휘발유가 사용되면서 전기자동차나 수소자동차등의 더욱 효율적인 자동차의 연구가 늦어지고, 휘발유자동차에 대한 연구만 활성화 되듯이 비효율적인 구관(舊官)이 부동(不動)의 명관(名官)으로 자리잡아 사회경제의 효율성을 저해하는 현상같은것을 이야기 한다고 생각하면 좋을것 같다.

한국에서 어떤 커다란 재난이 발생하고나서 그 근원을 찾아보니 양파껍질처럼 까도 까도 끝이 없이 엮여 나오는 총체적 부패현상에 모두가 놀란 바가 있을것 같다. 반복된 관행은 상식이 되고, 처참한 결과를 보기 전까지 누구도 문제라고 인식하지 않았다고 표현하는게 적절한듯 싶다. 한국의 역사를 뒤흔들것 같은 예감이 드는 이번 사건에 대해서 대통령은 '국가개조'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는데, 그만큼 문제의 근원은 총체적이며 종합적이고, 다방면으로 얽혀있는 문제라는것을 인식하고 있는것같다.  

토마스 셀링(Thomas Schelling)이라는 미국의 경제학자가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에 대해서 언급을 하면서 "우리는 계획을 작성할때 낯선 것을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오인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는데, 나쁜 습관을 바꾸는 일은 '위험한 일'로 오인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이 시점에서 개혁에 대한 열정적인 감정들이 또 '좌파적인 이념'이나 '광기'쯤으로 왜곡되어 개혁을 막는다면 한국의 미래는 영원히 구제받을 수 없는 경로로 어긋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건의 결과는 크고 명확하고, 개혁의 요구도 크고 명확하며, 개선을 위한 에너지도 크고 명확해야 벗어날 수 있는 '경로'로 생각된다.


불안한 별들의 고향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 ~1976)는 인간이란 자의와 상관없이 세상에 던져진 불안한 존재이며 필연적으로 맞이하는 삶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죽음을 의식함으로써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존재의 의미를 이해하고 실존을 추구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자신이 이야기한 '실존'이라는것을 행동으로 완성시키지 못하고 절대적인 애국심을 기반으로하는 나찌즘에 자신을 의탁해버리는 '의존'의 결론에 도착했던것 같다. 

한국에서 불안한 민중들이 이념이나 종교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며 인간은 불안한 존재라는 하이데거의 생각도, 나찌즘에 의탁해버린 하이데거의 행동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것 같기도 하고, 마음의 고향을 찾아서 나찌즘의 품에 안긴 하이데거를 이해하면 이념이나 종교에 자신의 영혼을 통째로 투척(投擲)해버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는듯 하다.

"교육받은 사람의 특징은 어떤 사고를 받아들이지 않고도 그것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라고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실존적교육은 건강한 시민을 만드는 최선의 길이라는 생각도 든다. 한국에서는 이런 교육이 많이 부족한듯 한데, 타인의 사고를 받아들이는 습관을 만드는 교육이 불안한 민중을 만드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불안한 개인이 그러하듯이 불안한 사회는 일탈의 가능성을 항상 안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한국에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보면 한국에서 끓어 오르는 '일탈의 열정'과 '불안'은 상호작용을 하면서 증폭되는것 같기도 하고, 그 외에도 불안한 역사적 과거, 변화무쌍한 4계절, 불안한 지정학적 위치등이 불안함의 원인중 한 부분을 담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2014년 5월 3일 토요일

초인(over-man)과 고통


문제는 고통을 회피하는데서 시작된다. 고통을 정당하게 받아들이면 문제의 해결책을 알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이념과 종교에서 생겨나는 문제들은 문제의 해결책을 이념과 종교라는'자동장치'에 맡겨버린데서 시작된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념과 종교는 나름의 도덕을 지니고 있긴하다. 문제는 그 도덕에 대한 '지나친 확신'인듯 하다. 그 확신들은 의심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의심하고 성찰하고 개선할려는 의지는 '고통'을 수반한다.사람들은 그것이 싫은것 같다.

나는 너희에게 초인을 가르쳐 주노라. 인간은 극복되지 않으면 안되는 무엇이다. 인간을 극복하기 위해, 너희들은 무엇을 하였는가? 지금까지 모든 생물은 자기를 초월하는 무엇을 창조했다. 그러함에도 너희들은 이 위대한 만조(滿潮)가 간조(干潮)라고 여기는가? 그래서 인간을 극복하기 보다는 오히려 동물로 돌아가려고 여기는가? 인간에게 있어서 원숭이란 무엇인가? 웃음거리든가 아니면 비통한 치욕이다. 그래서 인간은 초인에 대해서 똑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 웃음거리든가 아니면 비통한 치욕이다.

- 니체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  

사람들의 일반적 수준화에 반기를 들었던 실존주의자 니체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성적일것을 요구했다. 그 당시 만연했던 서구의 기독교적 '순종'에 배치(排置)되는 사상이었기 때문에 반그리스도적인 사상으로 오인받기도 했던것 같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도 '고통의 신비'를 지향하는 지침이 있고, 스코트 팩과같은 정신의학자는 정신병리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열쇠로서 고통을 받아들일것을 권유하고 있다.

삶은 회피되어야 하는 것이라는,실로 대척적인 신념에 기초를 두고 있다. 나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나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나 일개인으로서는 나는 어떤 방법으로건 어디에 있어서나 삶을 탄(歎)한다. 생애의 어떤 시기에 있어 나는 매우 가난했었다. 나의 살림살이를 바라보아도 무엇하나 좋은 것이라고는 없고 인생으로 하여금 보람있는 것으로 여길만한 것은 단 한개도 없음을 솔직히 자인(自認)하지 않을 수 없는 시기가 있었다. 그렇긴 해도, 역시 인생은 살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너무도 많은 죽음을 목격했으므로 조금도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되었으나 그래도 어떤 종류의 죽음도 원하지 않는다.어떤 종류의 것이라도 좋으니까 될 수 있는 한 오래 삶을 유지하고 싶다. 이를테면내가 고통에 찢긴다고 해도 그 사이사이에는 고통에서 해방된,사는 보람이 있는 순간이 발견될 것이다. 나는 또 고통 그 자체를 더욱 사랑하며 살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 펄벅 -   

중국의 대기근 시기를 배경으로 한 [대지]라는 작품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펄벅여사의 '고통'에 대한 생각이다. 학창시절 [대지]를 읽은적이 있는데, 중국 대기근시기의 중국민중의 처참한 상황이 '인간의 존엄'이란 교과서적인 이상이랑 너무나 거리가 먼 상태에 감정이입이 되어 충격을 받은 경험이 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그런 상황들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근방'에서도 자주 찾아볼 수 있었고, 자주 충격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고통을 받기도 한다. 그때마다 고통을 수용하는 쪽으로 내 자신을 추스리기도 하고, 고통을 회피할려다 '노예에의 길'로 빠져드는 상황에 대해서 자극을 받을때가 많은것 같다.

2014년 5월 2일 금요일

망치효과


가진것이 망치밖에 없을때는 세상의 모든것이 못대가리로 보인다.
- 애이브러험 매슬로우 -

이념과 경제성장을 위한 경쟁심으로 시민들의 관점이 묶여있는 동안 인간, 행복, 철학, 창조등 한국사회와 세계의 미래사회에 간절히 필요한 바람직한 관점들이 희생당했다는 생각이 든다. 부정한 사건이 반복되어 사회습관이 되면 자극이 둔해지고 사회는 길들여지게 되는것 같다.

총체적으로 얽혀있는 부패를 알고도 묵인하는것이 아니라 관행으로 알고 서로가 입을 다물어주는듯 하다. 중요한 것은 '정의'가 아니라 '남보다 우월한 이익'이라는 관점이 뿌리깊게  가슴속에 자리를 잡아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줄도 모른다.

사방에서 성공하라고 재촉은 하는데,제대로 잘 살아보라고 재촉하는 이는 없다. 내 자신이 통일이나 이념문제라는 망치를 들고 있듯이 좋은 관점이든 나쁜 관점이든 한국민들의 관점은 이념이나 경쟁, 권력같은 과거로부터 항상 마음을 짓눌러왔던 문제들로부터 시작되는것 같다.

빈곤한 관심사, 빈곤한 관점, 빈곤한 마음,빈곤한 삶.......그 가운데 같은 사건이 반복되는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