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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3일 토요일

초인(over-man)과 고통


문제는 고통을 회피하는데서 시작된다. 고통을 정당하게 받아들이면 문제의 해결책을 알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이념과 종교에서 생겨나는 문제들은 문제의 해결책을 이념과 종교라는'자동장치'에 맡겨버린데서 시작된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념과 종교는 나름의 도덕을 지니고 있긴하다. 문제는 그 도덕에 대한 '지나친 확신'인듯 하다. 그 확신들은 의심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의심하고 성찰하고 개선할려는 의지는 '고통'을 수반한다.사람들은 그것이 싫은것 같다.

나는 너희에게 초인을 가르쳐 주노라. 인간은 극복되지 않으면 안되는 무엇이다. 인간을 극복하기 위해, 너희들은 무엇을 하였는가? 지금까지 모든 생물은 자기를 초월하는 무엇을 창조했다. 그러함에도 너희들은 이 위대한 만조(滿潮)가 간조(干潮)라고 여기는가? 그래서 인간을 극복하기 보다는 오히려 동물로 돌아가려고 여기는가? 인간에게 있어서 원숭이란 무엇인가? 웃음거리든가 아니면 비통한 치욕이다. 그래서 인간은 초인에 대해서 똑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 웃음거리든가 아니면 비통한 치욕이다.

- 니체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  

사람들의 일반적 수준화에 반기를 들었던 실존주의자 니체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성적일것을 요구했다. 그 당시 만연했던 서구의 기독교적 '순종'에 배치(排置)되는 사상이었기 때문에 반그리스도적인 사상으로 오인받기도 했던것 같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도 '고통의 신비'를 지향하는 지침이 있고, 스코트 팩과같은 정신의학자는 정신병리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열쇠로서 고통을 받아들일것을 권유하고 있다.

삶은 회피되어야 하는 것이라는,실로 대척적인 신념에 기초를 두고 있다. 나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나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나 일개인으로서는 나는 어떤 방법으로건 어디에 있어서나 삶을 탄(歎)한다. 생애의 어떤 시기에 있어 나는 매우 가난했었다. 나의 살림살이를 바라보아도 무엇하나 좋은 것이라고는 없고 인생으로 하여금 보람있는 것으로 여길만한 것은 단 한개도 없음을 솔직히 자인(自認)하지 않을 수 없는 시기가 있었다. 그렇긴 해도, 역시 인생은 살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너무도 많은 죽음을 목격했으므로 조금도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되었으나 그래도 어떤 종류의 죽음도 원하지 않는다.어떤 종류의 것이라도 좋으니까 될 수 있는 한 오래 삶을 유지하고 싶다. 이를테면내가 고통에 찢긴다고 해도 그 사이사이에는 고통에서 해방된,사는 보람이 있는 순간이 발견될 것이다. 나는 또 고통 그 자체를 더욱 사랑하며 살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 펄벅 -   

중국의 대기근 시기를 배경으로 한 [대지]라는 작품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펄벅여사의 '고통'에 대한 생각이다. 학창시절 [대지]를 읽은적이 있는데, 중국 대기근시기의 중국민중의 처참한 상황이 '인간의 존엄'이란 교과서적인 이상이랑 너무나 거리가 먼 상태에 감정이입이 되어 충격을 받은 경험이 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그런 상황들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근방'에서도 자주 찾아볼 수 있었고, 자주 충격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고통을 받기도 한다. 그때마다 고통을 수용하는 쪽으로 내 자신을 추스리기도 하고, 고통을 회피할려다 '노예에의 길'로 빠져드는 상황에 대해서 자극을 받을때가 많은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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