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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29일 토요일

국가와 종교의 이중구속 / 베이트슨

20여년전에 재미있는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한 종교단체에서 보이기만 총명해 보이던 나를 '영입'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여러 신자들을 동원하여 엮기 시작했다. 다행히 타고난 성품 자체가 反黨의 鼻穴(벤댕이 콧구멍 - 열하일기 참조)이 아니어서 그런지 호기심으로 몇개월을 동참해봤다. 그리고는 뭔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는 그동안 구경을 잘 했다는 인사와 함께 발을 뺐다. 정상적이지 않아 보이는 이유는 윤리와 도덕이라는 가치를 본질로 하는 종교에서 술수를 동원하여 신자를 모집하는 모습이 신기하게 인상적이었는데, 나 자신은 분노와 심술을 함께 느끼면서 정신적인 체질강화에 노력했지만 많은 선량한 신자들은 그런 방법을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는지 궁금했다. 그때 강화시킨 정신적인 체질은 훗날 국가권력을 동반한 '헷갈림'을 이겨내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던것 같다.

정신분열증을 연구한 인류학자 베이트슨(Gregory Bateson 1904 - 1980)은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패러독스가 인간을 정신분열증에 빠지게 만든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부모가 어린 아이에게 "너는 이제 어린 아이가 아니니까 스스로 해라"라는 명령을 하고는 곧 "너는 어린아이라서 혼자서 하는 것은 무리다"라는 명령을 하게 되면 두 명령사이의 파라독스를 감당하지 못한 어린아이는 정신분열증에 걸린다는 '이중구속'이론을 내놓았다. 정신분열증 환자에는 현실로 부터 이탈하는 망상형, 모든 것을 그대로 수용하는 파과(破瓜)형, 자신의 내면에만 집중하는 긴장(緊張)형이 있는데, 베이트슨은 이들 모든 유형이 이중구속을 벗어나기 위한 전략으로 파악하고 있다.

당시 내가 본 신자들의 모습이 비정상적이었다는 의미는 위의 3가지 정신분열증의 모습을 띄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목소리 크고 카리스마 넘치는 성직자가 한편으로는 '재난'이라는 생각도 했던것 같다. 훗날 북파공작원문제나 정부의 정책분위기의 문제점을 거론하는 일과 관련해서 유난히 종교적이고, 내국인을 상대로 한 정보활동과 같은 음성적인 분위기가 강했던 정부에서 비숫한 '헷갈림'을 경험했는데, 몇 종목의 스포츠를 차근 차근 몰두하며 수월하게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란 윤리의 최종집합체'라고 이야기 한 것이 기억이 나는데, 국가에 충성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진 국민에게 정부가 비윤리적인 모습을 보이거나 엘리트가 비윤리적인 모습을 띄게 되면 국민은 가치관이 붕괴되고 헷갈리며 정신분열증 비숫한 증상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듯 싶다. 목적하는 바가 원래 윤리적이었던 이념도 국민을 이중구속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한반도가 이념때문에 지독히 헷갈리고 있었음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인듯 하다.  

2015년 8월 28일 금요일

노인의 습관

창조적인 삶이란 습관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삶을 말하는듯 하다. 일정한 생활패턴이 반복되면 몸과 마음이 퇴보하는 것을 느낀다. 아마도 사람들의 끊임없는 상승욕구(발전욕구)는 습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인듯 하다. 그런데 대부분의 노인분들은 상승욕구에 대한 기대를 접는다. 삶의 유한성(有恨性)을 깨달은 탓인듯 하다. 오래살고 싶으면서도 죽음을 적극적으로 준비한다. 건강한 자극을 수용하지 않을려고 한다. 자극과 노력은 '수고'로 착각을 한다. 부작위(不作爲)의 삶을 이상향으로 꿈꾼다. 아마도 과거 젊은 날의 노력들을 보람보다는 수고로 생각하고 살아온 탓인지도 모른다. 오늘 일터로 끌려가서 하루 종일 노동을 해야 하는 의무감은 먼 훗날 편히 쉬고자 여생을 부작위로 뭉개버리는 노인을 탄생시킬 것 같다.

젊은이는 현재의 삶이 고통스러워도 언젠가는 개선될 시간적인 여유를 생각한다. 하지만 노인은 이제는 현재의 기쁨을 미래에 맡겨놓을 시간여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손해보는 일을 참을 수 없고, 때로는 방탕과 이기심에 빠지기도 한다. 아주 가끔 만나는 어떤 노인분들은 도전하는 삶을 즐긴다. 그래서 하루 하루가 소중하다. 당신과 이웃을 존중한다. 당신의 시간을 아낄 수 밖에 없는듯 하다. 하지만 현재의 상태가 과거의 삶을 뚜렷하게 알려주는 타성속에서 사는 노인분들은 당신들이나 이웃에게 많은 고민을 안겨준다.

권위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여성이 권위적인 짝을 선택거나, 알콜중독 가정에서 자란 아이가 어느 정도 술을 즐기는 연인을 찾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는 불만족스럽고 성공과 거리가 멀더라도 우리는 익숙한 것에 집착한다. 바로 익숙하기 때문이다. 특정한 스타일을 배운 예술가들은 그 스타일이 퇴조하고 다른 스타일이 그 자리를 차지했음에도 애초에 배운 스타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새로운 스타일을 선택하면 성공에 더욱 가까이 갈 수 있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 중략 - 이렇듯 우리는 모두 습관의 존재다.

- 제임스 크록(미국의 예술가) -

이런 습관의 부작용은 작게는 개인으로부터 크게는 사회나 국가에까지 널리 물들어 있다. 더구나 수직적인 사회구조에 익숙한 동북아시아의 국가들에게는 '늙은 습관'을 교정할만한 자극이 전혀 주어지지 않는다. 동북아시아의 국가들이 보수적이거나 퇴행적인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이유중 하나는 늙은 습관들에 대해서 교정과 비판의 길이 닫혀 있는것이 문제인듯 하다. 게다가 동북아시아 국가들의 젊은 인생은 끊임없는 희생과 수고를 강요당한다. 젊은 날을 눈물로 보냈는데, 늙어서 여유롭지 못하면 대단히 손해보는 일이다. 그 여유를 젊은이에게 양보할 수 없다. 젊은 이들도 우리처럼 고생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젊은이도 일을 즐겁게 해야 하고, 노인도 즐거운 일을 가져야 한다. 기왕이면 그렇다. 삶을 대하는 자세도 물려받을 필요는 없는듯 하다.

2015년 8월 22일 토요일

사회적 연대감 / 법조문화와 친일발언

사법시험존치에 관한 법안이 발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법조계에서 일하는 지인에게 법조문화가 어떻게 변했는지 물어봤다. 오래전 보다는 많이 수평화되었다고 말한다.20대에 최종고교수가 쓴 김홍섭판사의 평전을 읽고서 감동받아 법조인이 되고자 하는 꿈을 가진적이 있었다. 당시 공부하는 사람의 입장으로 본 법조문화는 대단히 '야망'스러웠던 생각이 난다. 사명감보다는 권력과 출세에 관점이 집중되어 있던것 같은데, 공부하면서도 내내 뭔가 갑갑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더 넓은 세상에 대한 그리움 같은것이라고 부드럽게 표현해 보기도 하는데, 사회적 연대감이나 사명감을 가지고 공부하는 지인들을 보기 힘들었고, 내 마음도 김홍섭판사의 마음과는 반대로 달려갔다. 건강등을 비롯해서 여건도 안되고 해서 그만 두었는데, 상당히 오랫동안 공부한걸로 생계를 유지하며 동시에 막노동판같은 대칭세계를 오가며 체력과 정신력을 단련시킬려고 애썼던것 같다. 생각해보면 어떤 분야를 봐도 공유된 가치를 찾아볼 수 없고, 내 집단화된 부분만 보이니 나름 전체적인 관점도 생긴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법조계에서 일하는 분들과 이야기 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우리 법조계에서는'이라는 뿌리깊은 내집단 의식을 표현하는 것을 보며 법원이나 검찰의 '제식구 감싸기'에 대한 비난은 전혀 사실 무근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캐나다의 정치사상가인 테일러(Charles Taylor 1931 ~ )는 시민이란 강력한 연대의 힘으로 뭉친 사람들이며, 애국심이란 공유된 가치를 가지고 있는 통합된 공동체가 개인의 자유를 가장 이상적으로 실현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한다. 테일러는 공화국내에서 같은 운명을 지녔다는 공유된 가치를 함께 누리는 시민들은 그 자체로 서로에 대해 헌신하는 마음과 자유를 함께 누리게 된다고 말한다.

한국에서 가끔 문제가 생기는 유명인들의 친일발언에 대해서도 사회적인 연대감과 관련해서 해석을 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의 한국지배가 무조건 정당하지 않지는 않다거나 이해할만한 부분이 있다는 발언들은 적어도 기본적으로 침략행위가 잘못되었다는 가장 중요한 문제외에도 발언 자체가 한국사회의 사회적인 연대감을 손상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스러운 문제인듯 하다. 그렇다고 해서 내 생각이 전체주의적인 사고는 절대 아니며,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서 서로에 대해 헌신할 수 있는 연결고리를 끊어 버릴 수 있다는 우려감때문인듯 하다.

남북한간에 원래 분단이 안 되었어도 괜찮은 상황들이 이념이라는 정체성이 애국심이나 민족애라는 정체성을 대신하여 한반도를 어려운 상황에 빠뜨렸는데, 사실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연대감과 같은 감정적 가치는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인듯 하다. 그러니까 이념처럼 이런 방식의 제도를 떠나서는 어떤 이상적인 사회도 만들 수 없다는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테일러는 자신이 혼자 집에서 레코드로 음악을 듣는 것과 콘서트홀에서 많은 청중들과 심정적인 연대감을 가지며 함께 감동을 느끼는 것이 다르다는 표현을 하고 있는데,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생각을 해 봐야 한다는 뜻인듯 하다.

한반도는 이곳 저곳에서 연대감을 해치는 생각과 사건들이 끊이지 않는듯 하다. 

2015년 8월 21일 금요일

북한의 도발과 교류의 방식

머리속이 한참 경화(痙化)되어가는 직장동료가 있었다. 고시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아주 오랫동안 처의 경제력에 의존하여 살다가 경제활동에 뛰어들었는데, 일터에서 이만저만 말썽을 피우는게 아니었다. 타인과의 의사교류능력이나 공감능력이 퇴화되었는지 '협동'이란 개념을 전혀 이해 못하고 있었다. 이상적인 사회적 지위를 꿈꾸던 바탕은 있어서 매사에 권위적이고 싶어하거나 자존심을 내세우며 동료들과 다투기 일쑤였다. 급기야는 동료들이나 고객들과 자연적인 교류가 중단되자 폭력적이거나 공격적인 의사표현을 하는 습관이 생겨나서 결국 일터를 망가뜨렸다. 아이러니하게도 특정 종교를 독실하게 믿고 있는터라 사람들로 하여금 그 '특정 종교'에 대한 부정적인 고려를 하도록 하는데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듯 하였다.

자유시장경제를 바탕으로 외부의 세계와 교류를 할 가능성이 없어진 이념국가인 북한은 잦은 도발로 교류를 대신 하는듯 하다. 사실 어떤 개인이나 집단도 교류없이는 존재를 할 가능성이 없는듯 하다. 마이클 셔머의 말처럼 상품은 국경을 넘지만 군대는 국경을 넘지 못한다. 하지만 북한은 무리해서 상품이 국경을 넘지 못하는 사회를 만들고, 무리해서 군대가 국경을 넘는 사회를 만들었다. 어떤 방식을 사용해서라도 외부세계와 기본적인 교류를 해야 하는 절박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진화경제학, 행동경제학, 신경경제학 같은 새로운 과학들이 제시하는 자료에 의하면, 사람들이 자유롭게 협력하고 거래할 때, 그들 사이에 신뢰가 쌓이게 된다. 그 신뢰는 옥시토신 같은 결합 호르몬을 방출하는 신경 경로를 통해 더욱 강화된다. 따라서 생물학적으로 자기들이 협력하고 거래하는 상대와 싸우거나 서로 죽일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 마이클 셔머 (Michael Shermer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의 컬럼니스트) -


교류라는 것은 참 중요하다. 발전을 위해서 서로 협력하고 거래하다보면 그냥 평화로운 시간은 기본적으로 주어지는듯 하다. 국가간의 융통성있는 경제적, 외교적, 정치적인 교류는 평화를 위해서 중요한듯 하다. 자유시장경제체제라는 것은 어느 정도 이런 조건을 충족시켜준다. 물론 지나친 자유시장경제는 힘의 논리에 의한 경직된 시스템으로 다시 회귀하는게 문제가 있긴 하지만 어쨌던 기본적인 필요조건임에는 확실한듯 하다.

2015년 8월 20일 목요일

책을 한 권만 읽은 자

어렸을때 개신교회를 다녔다. 불우했던 중학교 시절, 나를 개신교회로 인도했던 선배의 뒤를 이어 학교도서관의 도서출납을 맡아 일하면서 도서관의 책을 많이 읽은듯 하다. 나중에는 시내 서점의 책까지 섭렵을 했는데, '갈매기 조나산'이란 영화의 대본을 사서 읽고는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는 구절을 마음속에 각인 시키기도 하였다. 그런데 개신교인, 나, 독서와의 삼위일체적인 훌륭한 만남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인듯 하다. 세월이 흘러 더 어려움을 느끼던 시절, 쉴새없이 공격적이고 교활한 전도를 일삼는 개신교인들때문에 개신교와 인연을 끊었다.

가끔 친했던 지인들중에 전도를 할려다가 실패를 하면, 친구에서 적대자로 돌아서는 사람들을 몇 명 보았는데,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거나, 논리싸움에서 밀리게 되면 '자신을 괴롭히지 말아달라'고 피해자와 가해자 모드를 바꿔버리고 만다. 세월이 흘러서 다시봐도 한결같다. 변화없는 한 가지 직업을 일관성있게 가지고 있으며, 책이라고는 성경책 하나만 반복하여 읽은, 명색이 대학나온 친구와의 대화는 이유없이 남쪽에 로켓포 공격을 가하는 북한을 이해하는 것 만큼이나 어리둥절한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나는 절대로 피해를 준 적이 없고, 상대는 제멋대로 마음 편한것 같다는 사실은 양심에 손을 얹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개신교인이라고, 아니면 북한이라고 무조건 비난할 일은 아닌듯 하다. 가장 바람직한 관계는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동일성 안에서 서로간에 구해야 하는 평화와 이해라는 고귀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상태라면 가장 좋은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넓고 다양한 세상을 생각하지 못하거나 나아가 넓고 다양한 세상을 이해하지도 못함으로써 독선과 아집으로 마음을 닫아버린 공동체가 한반도의 상당부분을 구성하고 있다면 한반도의 미래가 어두운 것은 당연한듯 하다.

좋은 개신교 신자분을 만나면 언젠가 머리속에 심하게 각인된 부정적인 생각들이 잠시 혼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런데 세상과 단절시키고 자신들만의 길을 고집하며 공격성을 띄는 북한의 행태를 보면 이미 내 마음속에는 '주체사상'이나' 정치지도자에 대한 숭배'가 어디서 많이 본듯한 광기어린 신앙의 모습을 갖추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는듯 하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는 것은 중요한듯 하다. 한반도의 비극은 '무식함'에 근원을 두고 있는듯 하다.   

2015년 8월 15일 토요일

자기 만족감에 빠져든 이념과 종교 / 오리아나 팔라치

어떤 사람이 닭을 잡아먹을려고 털을 뽑았는데 닭이 털이 뽑힌채로 도망갔다. 결국 잡을 수 없게 된 그가 중얼거렸다. "도망 가 봤자 저만 춥지......." 일상속에서 객관적인 시야를 갖출 수 있는 여유가 없었던 많은 이들이 자기만족을 위해서 타인과 비교하고, 타인에게 없고 자신에게 있는것을 찾아내어 만족감을 얻는다. 시간이 흘러보면 자신에게 만족감을 준 것들때문에 불만족한 시간이 닥칠거라는 사실을 예측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더 넓은 세상을 통찰하지 못한 지혜의 부족때문이기도 하고, 욕망이 지혜로운 시선을 갖추는데 장애가 된 경우이기도 한것 같다. 이런 성품을 가진 이들은 자신의 만족감에 장애가 된다는 생각을 하면 타인의 발목을 붙들고 넘어지는 '물귀신 작전'도 서슴치 않는듯 하다.

자신과 환경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해야 하는 의무를 잃어버린 이념과 종교적 믿음은 자기만족감속에서 방황하다가 갈 길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은듯 하다. 생각을 해 보면 나에게 이념이나 종교적인 믿음이 가져다 주는 영광스러운 세상을 설파했던 많은 이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불만족한 상황에 빠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제대로 살아간다는게 노력이란 댓가없이 거저 얻어지는게 아님을 문득 깨닫게 해주기도 하는듯 하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국가나 거대한 종교공동체에서도 발견되는 경우가 많은듯 하다. 다음은 유명한 종군기자였던 오리아나 팔라치(Oriana Pallaci 1931 ~ )가 911테러를 일으킨 이슬람세계에 대한 비난과 서방세계의 관대한 대응을 비난한 책 [ LA LABBIA EL'ORGOGLIO ]의 내용 중 일부이다.

기독교도와 무슬림 사이의 친교와 신뢰구축을 논의하기 위하여 1999년 10월 바티칸에서 교황청이 주최했던 한 종교회의에서 저명한 한 이슬람 학자는 자기만족감으로 가득한 모욕적인 선언으로 청중들을 아연케 하는 연설을 했다.

"당신들의 민주주의를 수단으로 하여 우리는 당신들을 침략할 것이며, 우리의 종교를 수단으로 우리는 당신들을 지배할 것입니다. (이 우려스러운 보고는 회의 참석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스미른스에 있는 터키 교구의 대주교인 주세페 베르나르디니예하의 제보에 의한 것이다)."

아시다시피 그들의 역방향 십자군 원정이 일어나거나 전개되기 위해서는 현대판의 흉포한 살라딘이나 나플레옹 같은 존재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살라딘이나 나플레옹과 같은 존재가 있건 없건, 그것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서방세계가 어리석게도 계속 먹이를 대주고 지원하고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점점 더 커지고 있는 현실 말이다. 그것이 바로 그 역십자군 전사들이 점점 더 많이 생겨나고, 점점 더 요구하는 것이 많고, 점점 더 우리를 쥐고 흔들게 하는 이유이다. 만약 우리가 계속해서 무기력하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있게 되면 그들이 언제나처럼 점점 더 생겨나게 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들은 언제나 점점 요구하는 것이 더 많아지게 될 것이며, 언제나처럼 점점 더 우리를 짜증나게 만들고 우리를 쥐고 흔들게 될 것이다. 우리를 정복하는 시점에 이르게 될 때까지 말이다. 따라서 그들과 협상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들과 대화를 시도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에게 관용을 보여주는 것은 거의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일이다. 그리고 내 말이 그렇지 않다고 믿는 사람은 누가 되었건 바보이다.


무슬림들의 자기만족감에 빠진 공격성향을 한반도의 이념이나 종교에 대입시켜보면 오리아나 팔라치의 분노는 매우 친근한 면이 있는듯 하다. 그 분노의 감정은 내 자신도 수없이 느꼈던 감정이라는 생각이 난다. 외부 세상과 단절되어 좁은 시야속에서 헤메는 북한이나 한국의 종교들은 넓은 세상을 살면서 대규모 전쟁과 지도자들을 취재하고 관찰해 온 오리아나 팔라치의 분노를 생각해 봐야 할 필요가 있는듯 하다.

2015년 8월 14일 금요일

개인과 국가의 퇴행성

언젠가 꽤 알려진 사이트에서 이념을 비판하면서 종교를 곁들여 비판을 하니 현대사회는 도덕적으로 어지러워서 종교가 평형유지를 시켜준다던 누군가의 말이 생각났다. 당시 정치적으로 퇴행성을 보이던, 그래서 국기(國氣)를 꺾던 정치현실에 섭섭치 않게 연루된 터라 바늘같은 응대를 한듯 하다. 그날 이후 아무리 생각해봐도 퇴행적인 환경만 보이고 열정은 어디에도 느껴지지 않았다. 남은 힘을 끌어모아 호전적인 북한, 노령화 되어가는 한국, 젊은 이들의 실업문제등이 사회를 퇴행적으로 보이게 하는데, 그런 문제를 적극적이고 합리적으로 해결할려는 시도보다 이념이나 종교적인 마인드로 문제를 해결(해결이라기 보다 회피)할려는 시도는 퇴행의 골을 더 깊게 만들고 있음이 느껴졌다.

이슬람종교의 원리주의적 행보로 퇴행성을 보이는 중동의 현실은 합리적인 접근을 하지 않는 사회가 어떻게 변하는지 실례를 보여주는듯 하다. 개인적으로도 퇴행적인 환경이나 내면과 싸우기를 멈추지 않는데, 끊임없이 새로운 영역의 독서를 시도하거나 운동방법을 개발하는등 혼자만의 개척정신을 발휘하면서 버티는듯 하다.

북한의 젊은 지도자 김정은의 뒷목의 주름이 잡힌다는 기사가 나왔다. 건강이 좋지 않은 것으로 예측된다는 언급도 있었다. 한국과 적성국가인 북한의 지도자가 건강이 나쁘다는데,무조건 축하할일이라고 손뼉칠 일은 못되는듯 하다. 1인 집권체제의 정치시스템에서는 그 1인의 컨디션이 국가의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는듯 하다. 그렇게 건강하다고는 할 수 없었던 이전 지도자 김정일의 통치하에서 북한이 고난의 행군시기같은 시련을 당한 것은 당연한 듯 싶다. 북한 지도자의 퇴행적인 심신상태는 북한의 전 인민들뿐만 아니라 국제정세에도 영향을 미친다. 한 사람이 세계에 어두운 메시지를 던져줄 수 있다는 연결고리는 나비이론보다 인과관계가 더 명확한듯 하다. 

2015년 8월 13일 목요일

국가의 열정과 동양의 꼰대국가

북한이 목함지뢰를 한국측 철책안에 설치해서 한국군 두명이 중상을 입었다. 평화, 분단현실등의 단어가 생각나는 상황이지만 '열정'이란 단어가 생각났다. 60년 이상을 한결같이 잔망스러운 사건으로 서로간의 열정을 어지럽히는 노후국가(老後國家)의 습관을 버리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미래에 대한 꿈과 열정을 잃어버린 노인분들이나 젊은이들을 본 적이 있는데, 노인분들은 부지런히 습관을 반복하고 있었고, 노인분들은 젊은이에게 그 습관을 가르치고 있었다.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나도 망가져 있었음을 알고 몸서리 친 적이 있었다.

한 편으로 한국의 정치는 젊은 이들에게 창조와 세계화를 향한 열정을 준 적이 있는지 의문이 생겼다. 분단국가 현실에서 이념에 대한 열정, 민주화에 대한 열정등에 신경을 쓰느라 새로운 영역에 열정을 쏟지 못한 일들이 이제 부메랑이 되어 돌아 오는듯 하다. 지친 노인과 지친 젊은이들만 보인다. 그 와중에 정치적 열정을 끌어내겠다고 지뢰나 파묻고 있는 못난 국가의 젊은 지도자는 어디서 삶의 의미를 찾아서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 뿐만이 아니다. 한 때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었던 일본이 동양적인 보수성에 발목을 잡혀 성장을 멈추자 과거 제국주의 시대의 영광을 재현 하겠다고 부지런히 우경화되어 가고 있는데, 새로운 것을 찾아내지 못하고 좋은 시절만 회고하며 열정을 끌어낼려고 하는 노인국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듯 하다. 환경도 달라지고, 신체적, 정신적 능력도 달라지고 있음을 무시한 동양적인 꼰대국가의 전형적인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는듯 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프론티어(frontier) 정신을 체질화 시킨 미국을 일본이 이길 수 있다는 상상은 그야말로 망상인듯 하다.

독일의 정치지리학자인 프리드리히 라첼(Friedrich Ratzel, 1844 1904)은 진화하는 유럽민주국가를 생물학적 유기체에 비유하였다. 그는 민족이 살아 있는 존재의 집합체로서 개인의 라이프사이클을 반영하며, 다른 문화를 흡수하고 다른 영토로 확장하면서 그 자양분을 얻는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그는 식민지 획득이 국가에 이로우며 국경선이 규정되고 한정되어 있으면 바람직하지 않다고 제시하였다. 국가는 영토를 놓고 서로 각축을 벌여야 한다. 그런 여지가 차단되면 국가는 노인처럼 쇠하게 되며, 민족 또한 시들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역사적 분석을 근거로 이 유기체 국가 이론을 확립하였고, 이런 견해를 학술잡지에 발표하였다. 이런 관념은 머지 않아 그의 제자들을 통해 독일정치에까지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나중에 이는 나치 이데올로기의 일부가 되었으며, 특히 카를 하우스호퍼(Karl Haushofer)라는 전략가가 이 이론을 적극적으로 선전하였다. '지정학(geopolitik)이라는 용어는 그의 전매특허로서 악명을 얻게 되어 이후 수십 년간이나 학계에서 쓰이지 않았다.

- 하름 데 블레이(Harm de Blij) / 미시간 주립대학 지리학 교수이며 내셔널 지오그래픽 평생 명예회원 -



지금은 지리적 영토와 관련한 국가열정을 끌어낼때가 아닌듯 하다. 지리적 영토에 대한 열정은 전쟁과 같은 재난을 몰고 올 수 있는 위험한 시대로 변했고, 기술적인 창조성이나 우주개발과 같은 새로운 영역을 찾아서 영토화 시켜야 하는 시대인듯 하다. 미국이 우주개발에 막대한 투자를 하는 이유는 당장 돌아오지 않을 급부를 생각하면 이해 못할 일일수는 있으나 미국의 프론티어 정신과 국가열정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일듯 하다. 뭣 보다 동양의 꼰대국가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생각이다.

2015년 8월 8일 토요일

모범과 동조 / 노인과 성직자

학교 교사들의 성추행문제로 시끄럽다. 실제로 유명인들의 성범죄가 무탈하게 넘어가는 일이 있듯이 강력하게 대응해야 할 문제로 여기지 않았던 한국사회의 나쁜 습관중 하나로서 놀라운 일은 아닌듯 하다. 하지만 학생들을 훈육해야하는 스승의 위치에 있는 사람의 책임감을 생각하면 그 파장은 피해자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병든 사회를 경고하는 중대한 일일 수도 있는듯 하다.

오래전 연세 있으신 분들과 일을 할 때 노욕(老慾)으로 어지럽혀진 정신때문에 무척 고생한 적이 있었다. 사납고, 우울하고, 그게 아니면 하루종일 음담패설을 입에 달고 사는 노인들이 있었는데,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니지만 노인이라는 위치가 가져다 주는 권위때문에 동조되거나 모방할 수 있는(배우는) 사태가 벌어질까봐 노심초사한 적이 있었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환경이 가져다 주는 영향은 나도 모르게 나에게 젖어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가르침의 위치에 있는 성직자나 노인분들을 매우 싫어하는 마음이 있는 듯 한데, 역설적으로 사회초년생시절에 그것도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절에 좋은 성직자분과 좋은 노인분을 만난 것이 기준이 되어버린 탓도 있는 것 같다. 수면 시간도 갖지 못하고 환자를 돌보던 의사였던 외국인 성직자분을 뵌 적이 있었고,, 당신이 노인이면서 노인을 보살피고,젊은이를 존중하며, 끊임없이 일하고 공부하며 활력있게 사시던 노인분도 만났는데, 내 자신이 모방과 동조의 힘으로 지병(遲病)을 치유하기도 했던것 같다.

까마득히 잊고 살다가도 권력을 행사하는 아니면 권력의 배후에서 탐욕을 부리는 성직자를 보거나 노욕에 찌든 노인을 볼때면 첫사랑(?)이 생각나는 것은 당연한듯 싶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인 솔로몬 애쉬(Solomon Asch 1907 - 1996)와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 1933 - 1984)은 동조와 복종에 관한 연구로 유명하다. 솔로몬 애쉬는 실험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모두 일부러 틀린 답을 하면 옳은 판단을 하는 사람도 함께 틀린 답을 내 놓는다는 결과를 얻었으며, 스탠리 밀그램은 실험을 통하여 명령을 하는 사람이 권위있는 인물이었다면 그 명령이 비규범적이더라도 복종한다는 결과를 얻었다. 그 이유는 자신에게 책임과 소재가 없다는 이유인 것을 찾아냈다.

요즘은 어른이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심지어는 시대가 변할 수록 나이 먹은 사람들이 점점 뻔뻔스러워진다는 이야기도 많이 한다. 종교인의 유일한 사회공헌방식인 도덕성이 없는 종교인도 늘어가는듯 하다. 물론 사회지도층이라는 말이 무색해진것도 오래 되었다. 그래도 한 편으로 사회가 평형을 유지하며 존재하는 이유는 본받을만한 분들이 있기 때문인듯 하다. 아직도 청년처럼 방황하는 내 자신에게 누가 스승이 되고 있는가 생각을 해보면 열심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면서 사회 공리(共利)를 위해서 헌신하는 분들인듯 하다. 

2015년 8월 7일 금요일

크루그먼 교수의 피케티 교수 비판

요즘 폴 크루그먼(Paul Krugman)프린스턴대 교수가 토마 피케티(Tomas Piketty)파리대학 교수의 후원자적 입장에서 비판자적 입장이 되면서 경제학계가 시끌벅적한듯 하다. 오래전 원론적인 경제학서적만 읽다가 크루그먼 교수의 [The Accidental Theorist]를 무척 재미있고 신선한 마음으로 읽었던 기억이 난다. 특히 그 중에 일본의 장기침체에 대해서는 공급측면의 문제가 아니라 수요부족이 원인이므로 화폐를 많이 찍어내어 인플레이션으로 맞불정책을 펴라는 주문은 명쾌하고 직설적인 크루그먼 교수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크루그먼 교수는 SF작가 아이작 아시모프의  'foundation'에 나오는 심리역사학자 해리셀던을 무척 동경했다고 한다. 그래서 역사학도 공부했다고 한다. 국제무역에 관해서 비교우위를 주장하다가 리카도의 절대우위에 가까운 이론으로 돌아가거나 1997년부터 시작된 아시아의 금융위기를 예측하고, 1993년 경기침체에 빠진 미국의 전망을 낙관적으로 예측한 것은 어느 정도 시간을 초월한 통찰이 가능했다고 생각하는데, 역사적인 시간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습관이 바탕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노벨상수상자이며 잘은 모르지만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파악한다는 평이 있는듯 하다. - 일본 경제저널리스트 히가시타니 사토시의 글에서 참조 -

토마 피케티교수의 저서 [CAPITAL in the Twenty - First Century]는 자본이 자본을 낳아 불평등이 심화된다는 이론으로 마르크스의 이론에 비유되는데, 현실적인 통계에 기초를 하여서 쓴 책임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이론이라는 이념적인 비유가 가세하여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던 것 같다. 물론 관심을 더 받아서 나쁠건 없지만 많은 속칭 우파경제학자들의 공격을 심심치 않게 받았던 것 같다. 

그런데 크루그먼 교수가 토마 피케티 교수의 신간 [불평등 경제] 비판하고 나섰다. '불평등 경제'에서는 부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과세정책이 19세기의 지대추구형경제를 막아주었다고 썼지만 '21세기 자본'에서는 돈 놓고 돈 먹는 자본수익이 높아져 상속재산을 쥐고 운용하는 것이 근로수단으로 벌어들이는 돈을 압도한여 지대추구형 경제를 초래한다고 써 있다는 것이다. 지대추구형 경제란 불로소득이 압도하는 경제를 말하는데, 내 생각에는 정부의 과세정책이 지대추구형 경제를 막아주기도 하고, 그렇지도 못한 경우가 있다는 생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예를 들면 정부의 과세정책의 강약의 변화, 자본수익의 강약의 변화등이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우파정부가 들어서면 자본수익이 강화되고, 좌파정부가 들어서면 과세정책이 강화되는 시계열 변화를 보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물론 신자유주의라는 이념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면 지대추구형경제가 나타난다는 사실은 필연적인 것으로 봐야 할것 같다.

크루그먼 교수의 시간을 초월하는 생각들이 피케티교수를 비판하는 관점을 세련되게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드는데, 아마도 학자로서의 단절되고 단호한 이론, 특히 과학적 통계가 받침이 되어야 하는 문제에 대해서 불만을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점은 나와 같은 가치판단을 하는 논객과 학자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크루그먼 교수가 노벨상을 받을때, 매스컴마다 선정이유가 달랐던 것처럼 피케티 교수의 이론도 좀 더 연속선상의 관점으로 봐 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뭣 보다도 크루그먼 교수의 매력은 시공을 초월한 번뜩이는 지혜에 있었던 것 같고, 피케티 교수의 이론은 피케티 교수의 이론 자체보다도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적인 요소가 중심이 되어 피케티교수의 의도와는 달리 인기를 얻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근로를 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의 생각이 중요한거지 피케티 교수의 이론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2015년 8월 6일 목요일

눈과 관상(eye and physiognomy)

사람을 만나면 눈을 쳐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눈은 값을 한다. 잘 생기지 못해도 눈이 선명하고 뚜렷하면 성격도 그렇다는 것을 곧 알게 되곤 한다. 그리고 눈 한가지 때문에 신뢰감을 모두 주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또 반대의 경우도 있다. 언젠가 눈이 얕고 눈동자가 안정되지 못한 이에게 인간의 조악한 심리를 구경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의 부친의 성격을 그대로 닮고, 하는 짓도 대로 닮아가며, 눈빛도 닮아가며 변하는 것을 보았다.

슈텔룬이란 심리학자는 인간 성격을 유전과 환경의 상호작용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한다.(輻輳說) 또 젠센이라는 심리학자는 각 유전적 특성이 나타나는데는 환경적 요인이, 질이나 강약은 각 유전적 특성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 (환경역치설)

정기(淨氣)가 느껴지지 않고, 술수(術手)만 보이는 눈을 가진 사람에게 아주 많은 이들이 속는 경우를 보는데, 사회의 풍토가 흐려지면 구성원들의 판단력도 흐려지는듯 하다. 사납거나 교활하거나, 갈수록 이 두가지의 조악한 성품중에 한 가지를 선택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추세인 것 같다. 마음이 여유롭지 못한 사회는 구성원들의 눈빛을 망가뜨리는듯 하다. 

2015년 8월 1일 토요일

한반도의 미래지향적 자극

북한이 전승절을 맞아 성조기를 훼손하고 반미의 기치를 확고히 하며 새로운(새로운듯 하나 전혀 새롭지 않은) 각오를 다진다고 한다.

모택동은 책을 많이 읽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장개석을 대륙에서 구축(驅逐)하고 뻬이징에 입성할때 모택동의 가방속에는 [사기]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책을 많이 읽은 혁명가가 책을 많이 읽지 않은 장개석을 내쫓은 일은 지식과 통찰의 힘을 생각해 보면 당연할 수도 있겠다 싶다. 훗날 중공이 소련과 대립하면서 소련으로부터 교조주의적이라는 비난까지 받게 되거나 모택동의 통치방식에 헛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모택동이 읽은 책들의 종류를 살펴보면 알것도 같다. 모택동은 폭넓은 독서를 한다고 하였지만 즐겨읽은 책은 마르크스와 레닌의 저작물이거나 중국사와 중국의 고대문학이었다고 한다. 만약 모택동이 좀 더 세계주의적인 독서습관을 가졌다면 훗날 등소평대신 모택동이 중국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보면 모택동 역시 현실적인 변화보다는 이념에 안주해버린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가끔 북한이 보여주는 과거지향적인 행태나 한국의 보수지향적인 행태를 볼때면 한반도의 미래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을듯 하다. 남북관계의 협력은 한반도가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임에도 불구하고 이념적인 과거사를 붙들고 늘어지는 '여성적인 한(恨)의 모습을 보여주기 일쑤다. 인지심리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이고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심리학교수로 재직중인 이안 로버트슨은 What motivates you?(무엇이 당신을 자극하는가?)라는 물음을 중시한다고 한다. 국가와 사회와 개인은 모두 자극을 필요로 하는듯 하다. 자극은 신선해야 하며 미래지향적이어야 할 듯하다.

고령화된 일본이 우경화되고 보수화된 예에서 보여주듯이 앞으로 한반도에서 크게 우려되는 점은 개혁의 분위기가 중단되고, 죽음을 기다리는 자세(좀 극단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로 구태의연한 보수성을 띄게되는 분위기인듯 하다. 어떨때는 변화를 포기한 노인의 모습에서 한반도의 나쁜 미래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