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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5일 토요일

중국군 93사단 / 이역

http://news.donga.com/NewsStand/3/all/20170225/83056131/1
http://hyeong-chun.blogspot.kr/2012/04/home-too-far.html

버려진 공작원들에 대한 관심이 많을때였는데, 자유중국의 반체제작가였던 백양의 넌픽션 소설인 [이역/A HOME TOO FAR]에 정서적인 도움을 많이 받았던 거 같다. 버려진 군대라는 이미지는 사라진 공작원들, 심지어는 정치적인 술수에 휩쓸려 자살하는 정보기관원이나 경찰요원들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갖게 만들기도 했다. 항상 북쪽의 고향을 그리던 나의 부친의 모습은 그런 고군(孤軍)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국공내전에서 국민당군은 연안전투에서 패배하자 공산군에게 밀려나 남으로 도주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때를 묘사하는 공산군측 넌픽션 소설인 두붕정의 [전사/연안을 보위하라]에는 공산군의 낙관적이고 패기 넘치는 분위기가 잘 묘사되어 있었다. 한 편으로는 국민당군이 남쪽으로 밀려나면서 대다수가 항복하고 항복하지 않은 윈난성에 바탕을 둔 이미 장군의 8군중 이국휘장군의 연대는 가족을 이끌고 뒤를 추격하던 중공군 진갱병단에 쫒겨서 굶주림과 학살에 가까운 손실을 입으며 남으로 남으로 쫒겨가는 과정이 영화로도 만들어져 눈물을 흘리면서 보았던 기억이 난다.  

남으로 패퇴하던 이국휘 장군의 부대는 미얀마와 태국접경의 정글을 거쳐서 미얀마북부에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는데, 자국영토로 들어 온 침략자를 용납할 수 없었던 미얀마는 인도의 친부족 용병(이들은 포로를 잡으면 무조건 목을 자르고 본다)까지 고용해가면서 국민고군을 공격해왔다. 공산군의 진갱병단 역시 국경을 넘어 와 국민고군을 공격해 왔는데, 후퇴할 곳도 없이 가족을 지켜야 하는 고군(孤軍)의 노력은 정말 피눈물 나는 과정이였다.

이국휘 장군의 휘하에 등극보라는 사색적인 초급장교가 있었는데, 미얀마군이나 공산군과 전투를 하는 와중에 자신이 데리고 온 두 아이까지 희생(한 아이는 포탄에 죽고 한 아이는 충격으로 정신이상)되어 비감했던 군인이었다. 등극보는 그런 상황을 항상 일기에 적어놓고 있었는데, 훗날 등극보의 일기는 중국반체제작가 백양(柏楊)에게 전해져 이역(異域)이라는 처절한 일대기의 소설로 출판되게 된다. 백양은 이 소설로 인하여 대만의 국민당 정부에 반기를 든 반체제 작가로 낙인을 찍히게 되고 이 소설은 대만의 젊은이들에게 이념과 국가등에 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만드는 바탕이 된다.

이국휘 장군의 연대가 공산군과 미얀마군을 상대로 싸우는 동안 태국에 있던  8군의 이미장군을 비롯한 국민군사령부는 이국휘와 등극보를 초청하여 대륙수복의 발판이 되어 달라고 부탁을 한다. 말하자면 싸우는 자와 지시하는 자의 격리감을 느끼는 장면이었는데, 등극보는 정글 가운데 남겨놓고온 가족과 동료들 생각에 이미 장군이 주최한 만찬의 음식에 손이 가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리 싸워도 절박한 고군을 이길 수 없자 미얀마정부는 유엔에 재소를 하게 되고 대만정부와 유엔의 결정에 따라서 철수작전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수송체계와 대만의 사정으로 모두 철수시킬 수가 없어 장교들 우선으로 비행기에 태우고 동료들과 큰 아이의 무덤을 버릴 수 없었던 등극보는 남아있게 되는데, 세력이 위축된 부대는 이리 저리 쫒겨서 정글 속에서 새소리로 대화를 대신하면서 살아갔다고 한다.

이들은 잔여분자라는 별명이 붙여졌는데, 아직도 이들의 후예를 수용하지 못하는 중국정부나 대만정부도 이념이라는 정신나간 관념때문에 오랫동안 비극을 만든 점에 있어서는 한반도와 막상막하인듯 하다.

북한의 문화교류국 선생들

J신문에 북한의 문화교류국에 관한 기사가 났다. '해박한 지식'으로 유사시에 남파되어 혁명역량을 축적시키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1992년 여간첩 이선실 사건, 2006년 일심회사건, 2011년 왕재산사건, 특히 1997년 김정일 위원장의 처조카 이한영씨를 암살한 공작기관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북한에서 이들은 '선생'이라는 호칭을 들으며 정치, 경제,국제,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뼛속'까지 공산주의 이념으로 무장된 공작원중에 선발된다고 한다.

이념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동서양의 철학부터 열심히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이념이란 프레임 안에서는 어떤 지식도 형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곤 했다. 이상하게 있는 지식도 단순 무식한 지식으로 변신되게 만드는 것이 이념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런 사실을 고등학교시절에 느꼈다. 당시 대학은 포기하고 수업시간에 알퐁스도데의 단편이나 헤르만 헤세의 소설, D신문의 신D나 J신문의 월간J, 주간J등을 읽곤 했는데, 대학시절에 아예 모든 것을 이해하는 '도사'처럼 지냈던 것 같다. 권위주의정부나 민주화운동이(흔히 우파나 좌파라고 일컫는 것이) 모두 '웃기는 인간사'의 한 부분으로 생각 되었다.

문화교류국요원들을 '선생'이라고 호칭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다. 더군다나 해박한 지식은 커녕, '뼛속'까지 공산주의 이념으로 무장되어 있다면서 무슨 해박한 지식이 있겠는가. 나같은 이념을 초월한 인간이 남조선에 많을텐데 남파되어 혁명역량은 무슨, 지금 북한의 현실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사상이나 지식체계부터 손을 봐야 할 것 같다. 항상 생각하지만 통일은 무슨, 나는 좌파든 우파든 사상이나 종교가 꼰대처럼 자리잡은 사람을 좀비보듯이 보는데, 함께 하는 것은 시간낭비같았다. 내 생각의 영토를 갉아먹는 귀찮은 존재들이었던 것 같다. 

북한은 점진적인 변화와 점진적인 한국과의 협력으로 빨리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상의 영토부터 넓혀야 할것 같다. 그건 남조선에서 잔류하고 있는 이념세력도 마찬가지다. 열심히 책을 읽고 열심히 근로현장에서 일하고 노동현장의 불합리한 행태등을 생각하면서 노동자이자 철학자인  에릭호퍼(Eric Hoffer)의 말이 생각났다. 에릭호퍼가 정규교육과정을 밟지 못한 사실을 학자들이 탓하자 에릭호퍼는 이렇게 말하였다.

"평생에 품한번 팔아보지 않은 마르크스도 노동자혁명에 관한 책을 썼는데, 내가 지식인에 대해서 쓰면 안될 빌어먹을 이유가 있을까"하고 말했다. 그러니까 북한이나 한국은 거국적으로 '농락'당한것 같다. 

2017년 2월 18일 토요일

내 님의 목표는 철 따라 흘러간다

오래전 급진 좌파적 이데올로기 단체와 그것에 대응하는 정보기관들의 행태를  부정적으로 본 적이 있다. 양편이 적대적인 공생관계처럼 본질에 집중을 하지 않고 서로에게 끌려 다니거나 짝사랑하는 행태를 보이는 것 같아서였다. 물론 이데올로기 싸움에만 매몰되어 있다는 표현이다. 세월이 흘러도 그 문제를 붙들고 생존의 양식으로 삼을 것 같았다.

한 번은 친한 지인들이 경쟁적인 시비를 걸어왔다. 자신들과 내가 누가 출세할 것이며 누가 누가 잘 먹고 사는지 두고 보자는 시비였다. 나는 댁과 댁의 가족들이 모두 걱정없이 알콩 달콩 잘 살기를 바라는 사회가 되기를 원한다는 말로 관점을 뭉개버렸던 적이 있다.

실존주의자인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 - 1980 )는 인간의 삶의 방식은 공통된 기준이 없으며 개인은 민족과 사회의 영향을 받으면서 아니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그때마다 스스로 자신의 삶의 방식을 결정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사르트르는 국가를 국민의 동화적 통합체로 보는 독일의 헌법학자 루돌프 스멘트와 같이 진행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듯 하다. 국가와 역사를 객관적인 변증법적으로 설명할려고 했던 헤겔의 주장을 반박하기도 했는데, 세월이 흘러 사상계에서 실존주의가 대접받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어도 실존주의는 더 근본적이거나 본질적으로 삶과 역사를 설명하는 사실적인 철학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북한은 '세계화'란 단어와 많이 안 친한듯 하다. 그런면은 이웃 선진국인 일본도 그런 성향이 있는 것 같다. 전 세계를 향하여 서로 주고 받는 관계, 표현하자면 소통의 관계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의미다. 그 소통 속에는 경쟁도 있을 것이며 협력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양성적(+)이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진행하면서 서로 발전하고 있는것 이다.

한국의 보수가 이데올로기에 치중하면서 사회를 서서히 붕괴시키는 과정이 그렇다. 원래 북한과 한국이 국력이 비숫한 대척 상황에 있을때에는 서로에게 이데올로기가 중요한 동일성의 표현이며 경쟁적 도구로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국이 상대적으로 커지면서 새로운 목표를 찾아서 이데올로기를 포괄하는 넓은 관점을 가진 새로운 사상으로 대체해야 하는 수순을 겪어야 했는데, 그 시기를 놓친것 같다.

국가공동체와 그 속에 살고 있는 개개인은 항상 발전적이고 움직이는 양성적인 목표를 찾을 필요가 있는듯 하다. 그것은 당위가 아니고 실존에 가까운 명제이며 더 본질적인 삶의 형태인듯 하다. 언젠가 대양해군을 지향했던 적이 있는데, 대양해군이 북한의 침략을 막아낼 능력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쉽게 납득이 가는 문제다. 공산주의와 대립하는 자본주의라는 명분으로 의식의 세계를 고착화 시켜놓고 사리사욕을 탐하는 엘리트들의 정신세계는 크게 개혁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듯 하다. 역시 단순암기식 교육의 폐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일본이 퇴락의 길을 걷고 있고, 북한이 이미 퇴락했고, 한국이 끝이 보이는듯 하는 길로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배경에는 새로운 목표를 찾지 못하는 과거 지향적인 이데올로기적인 사고가 큰 역할을 하였다는 생각이다. 

2017년 2월 17일 금요일

호랑이 등과 김정남 암살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심정은 이런 저런 이유로 호랑이 등을 탄 기분이다. 눈을 질끈 감고 한 편으로는 정신을 잃지 않고 내맡겨야 하는 정세, 한국이나 북한도 그렇지만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조선시대에는 왕자의 난이 몇 차례 있었다. 살인 그것도 형제끼리 죽여야 하는 일이 국가의 중심인 왕실에서 일어났다. 그 사건이 일어난 배경은 좀 더 복잡하다. 왕위를 승계받지 못한 어떤 왕자의 기질이나 왕위를 승계받지 못하면 국가운영의 계획이나 당사자의 입지가 위태로운 정세가 되어 마치 '호랑이 등위에' 올라 탄 상황이 설정되었다고들 한다.

김정남 암살의 배후인 북한 정찰총국의 40대 요원을 추적하고 있다고 뽑은 신문기사 제목이 있었다. 말레이 경찰은 외국정보기관 개입의 근거가 있다고도 한다. 아마 내 생각에는 모두가 암살 배후였을 것같다. 북한 정찰 총국요원인줄 어떻게 알겠는가. 암살 당한 건 사실이고 누가 죽였는가보다 왜 죽였는가를 알아보는 것이 좀 더 의미 있는 일인듯 하다.

세자로서 옹립되어 있다가 선왕(先王)의 눈밖에 나서 왕위승계를 놓쳐버린 김정남이나 왕위승계를 받은 김정은 위원장은 모두 호랑이 등을 탄 기분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북한의 후견인을 자처했던 중국이 김정남의 경호를 하면서 북한의 왕실에서 어떤 상황변화가 있으면 옹립하겠다는 의지가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는 만큼 북한으로서는 피의혐의의 일선에 있을 것이다.

미국의 새로운 대통령인 트럼프는 북한에 대해서 강경책을 쓰겠다고 공공연히 말했다. 무력충돌로 인한 인명피해나 침략국가라는 불명예 없이 의지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보이지 않는 힘'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CIA의 계획과 구상으로 쿠바에 상륙군을 침투시켜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시키려고 했던 것처럼 정보기관이 나서서 직접적인 공작을 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좀 더 인텔리전트한 계획이 있었거나 상황이 그렇게 흘러갔다고 생각된다. 작위, 부작위,정세가 경계없이 혼미하게 얽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된다.

장성택 처형 이후에 급속하게 냉각된 북한과 중국의 관계를 생각하면 중국 정부도 김정은정권에 그렇게 호의적이지는 않았을 것 같다. 트럼프와 시진핑이 북한문제에 대해서 일치된 의견을 보여주고 있다면 그리고 그 상황을 북한이 포착했다면 김정은 위원장은 형인 김정남을 암살하는 것이 적은 희생으로 큰 우려를 없앨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을 것이다. 미국이나 중국이 어떤 정치적 공작을 한 것도 아닌데 정세가 공작이 되어 김정남 암살로 귀착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끊임없이 고립되어가는 북한이나 북한과 대치상황에 있는 한국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협력으로 나가야 한다. 휘둘리는 태극기나 휘둘리는 인공기가 있어서는 안된다. 어떻게 생각하면 강대국이 손도 안댔는데, 정세에 휘둘려서 막장으로 가는 패착을 두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닌듯 하다. 이것이 상대적인 약소국의 불운한 운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2017년 2월 11일 토요일

학생과 꼰대

노인분들이 모인 곳에서 모든 분란의 시작은 권력지향적인 사람이다. 심지어는 국가권력과 관련되어서도 그렇다. 국가와 사회가 패망하는 시발점은 권력지향적인 인물이나 권력지향적인 사회성향으로부터 비롯된다. 권력지향성이 사회의 중심프레임인 경우에는 다른 발전적인 꿈을 꿀 수 있는 여지를 억압한다. 

나이 든 사람들에게 가장 큰 문제거리는 배우기를 멈추는 것 같다.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경험으로 남은 인생을 우려먹을려고 한다. 그러니 꼰대가 된다. 변하는 사람들의 시선으로는 이미 경험하고 생각해봤던 일을 꼰대들은 재탕 삼탕해서 반복한다.경험과 도전을 낭비라고 생각한다. 특히 정치적 권력이나 경제적 권력을 지향하는 세대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차이는 극명하다. 그런 모습은 빈익빈 부익부의 원천이기도 하다. 가지고 있는 사람은 주인으로서의 능동적 역할을 하고 있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노예로서 수동적 역할에 충실하다. 그래서 대중조작을 쉽게 설계하고 대중조작에 쉽게 물든다.

만약 한국의 기성세대들이 단순하게 잘 먹고 잘 살려는 꿈이나 권력지향적 꿈말고 다른 여러가기 원대한 꿈이 있었고 그런 꿈들이 인정받는 사회였으면 '이 지경'이 안됬을 것 같다. 모든 꿈이 말살된 상태에서 갑자기 해방을 맞아서 이념을 능동적으로 이용하는 자들의 노예가 된 북한주민들과도 같이 한국도 번번이 위기를 넘긴다.

사람은 죽는 날까지 학생으로서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 같다. 배우고 때로 익히니 즐거운 것도 있고, 권력을 감시하거나 권력이나 지식을 이용한 지능적 범죄들을 감시할 수 있는 혜안(慧眼)도 갖츨 수 있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수명은 유한함으로서 목적은 선명해야 하지만 반드시 달성하리라는 보장은 없을 수 있다. 그런데 노력이 만든 성과물은 다음세대 누군가의 수고를 덜어줄 수 있다. 결국 열린 사회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런데 아(我)의식에 사로잡힌 꼰대들은 그런 사실을 이해못한다. 오로지 내것이 아니면 없는 것이다.

시도한 열가지 일 중에서 마지막 열 번째 일은 아주 손발이 잘 맞고, 순탄하며, 여유가 있고, 무위로 모든 것이 해결되어 행동을 하면 반드시 결과가 있으니, 이것은 감탄할 만한 일이며 만족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앞서 아홉 가지 일은 변화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 중국문호 왕멍의 [나는 학생이다]중에서 -  

2017년 2월 6일 월요일

기회주의 실용주의

지독한 곤란을 많이 겪은 후에는 행복을 바라지 않게 되는듯 하다. 그저 나빠지지 않게만 해달라는 소극적인 마음을 갖게 되는데, 그럼에도 허우적 거리던 습관은 있어서 열정은 살아있게 되는듯 하다. 물론 그 열정은 겸손을 아는 차분하고 조용한 열정인듯 하다.

'조용한 열정'이란 말은 참 좋은 말인것 같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의 평전 제목이기도 한데, 제목이 좋아서 책을 구입하고 외교관들의 자서전을 몇 권 구입해 보았다. 느낀 점은 그들만의 세계라는게 확고하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여러가지 일을 전전하고 여러가지 사건에 고개를 디밀어 본 바로는 어느 직업군이든지 그들만의 세계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고시'라는 한 방의 관문을 뚫고 새로운 세계에 입성한 이들의 세계는 더욱 그럴 것 같았다.

반 전 사무총장이 차기 대선 주자로 나설때 우려되었던 점은 국내의 '다른 세계' '서민세계'등은 경험해보지 못한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국내정치행보에 첫 발을 디딜때부터 강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라는 것은 순수한 마음으로 건너기에는 '머나먼 다리'인듯 하다. 특히 이념 논쟁이 첨예한 한국 정치판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진보적 보수나 보수적 진보 같은 회색빛을 발하는 표현을 하면 기회주의자로 낙인 찍히기도 한다. 기회주의와 실용주의의 차이는 기회주의는 이기적이고 실용주의는 이타적인 면이 있다는 생각이다. 그 생각을 하지 못하거나 국민들에게 납득을 시키지 못하면 감당할 수 없는 말인듯 하다.

안정된 시스템이나 지위에 갇혀있던 이들이 정치에 나서기 위해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자신들의 지위를 지켜주거나 보호해주거나 떠받들어주는 인적환경인듯 하다. 언젠가는 그 환경이 자신들을 곤란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게 되면 종속되게 되는 것은 당연한 듯 하다. 그래서 '까'도 조심해야 하지만 '빠'도 조심해야 할 것 같다. 이러나 저러나 조심해야 할 것은 '목적'을 잊는 것인듯 하다. 나도 힘들고 너도 힘들고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모두 힘든데, 정치를 위한 정치인 말고 목적이 선명한 정치인이 차기 대권을 잡기를 간절히 기원해보기도 한다. 

2017년 2월 4일 토요일

모든 것의 빈익빈 부익부

꿈많은 학창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이 카카오톡이나 밴드등으로 서로를 찾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벌써 그럴때가 되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친구야 옛추억을 생각하며 어쩌구' 하는 말은 질색을 하면서 싫어한다. 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학창시절 꿈이 없다기보다 가정환경이나 허약한 신체때문에 꿈을 억압받고 살아온 반동으로 나이가 들어서 할 일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조금 덜 늙는다는 소리를 듣긴하는데, 과거를 돌아보기에는 뼈아픈 일만 있으니 돌아봐봤자 별로 좋은 일이 없는 처지인것 같다.

그시절 학교에는 세부류의 친구들이 있었다. 공부를 잘 해서 학교를 와야 기쁨을 느끼는 친구들, 그래서 동기들이 성적때문에 손바닥을 맞을때 안도감과 에너지를 살릴 수 있는 친구들, 공부를 못 하니까 주먹과 깡이라도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그걸로 한 몫하여 에너지를 살리는 친구들, 그리고 이것도 저것도 없어 존재감이 없는 친구들, 실제로 존재감이 없는 친구들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을 보니까 잘 생겼는데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 소수의 아이들과 존재감이 없는 다수의 아이들로 나누어져 있는 것 같다. 기계적 학습과 성적지상주의 교육이 시차를 두고 효과를 나타낸듯 하다. 나쁜 일도 파도처럼 밀려오고 좋은 일도 파도처럼 밀려 오듯이 인간은 상황이나 환경에 몰입되어 더욱 더 깊이 '그 길'로 나아가기 마련인듯 하다.

한때 학교에 가기 싫었던 적이 있었다. 불우한 가정환경에 전학을 가서 적응이 안되는데 몸이 약해서 항상 에너지도 눌려 있고 진도범위가 전학교랑 달라서 시험성적도 안좋고 해서 어디 좋은 일이 없었다. 그 상황은 점점 깊어졌다. 학교가기 싫어서 홈스쿨링하는 아이들을 보면 그 마음이 이해되고 남았다. 서로 비교하며 에너지를 얻는정도가 심한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어려움이 대단할 것 같았다. 자발적인 마인드를 찾아서 이겨나가면 좋은 자산이 될 듯 하지만 실패하면 큰 부담이 생길 수 있는 위험성이 있기도 하다.  

보수와 진보 또는 이념, 종교등을 생각하며 느끼는 바는 극단적이거나 깊이 빠져드는 상황을 피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원래 인간이란 가던 길로 몰입하는 습관이 있어서 가지 않는 다른 길로 들어서는 것을 두려워 한다. 미지의 세계를 두려워 하는 안전의 욕구 탓인듯 하다. 귀신을 두려워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미지의 존재이기 때문이고 어느 길에 익숙해지면 속칭 전문가가 되어 지극히 보수화가 되는 현상은 자연스럽기는 하나 피해야 할 상황인 것 같다. 안주하게 되고 빨리 늙는 문제가 있다. 믿는 것, 재능, 금전, 명예, 권력, 모든 것들이 냉정함을 잃고 우둔해지면 몰입이라는 명분으로 찐득하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올라가야 할 저 높은 곳보다는 끌려다니지 않는 내 마음의 중심을 찾는 것이 더 힘들고 소중한 일인듯 하다.

한국사회가 겪어 온 일, 그리고 지금 미국사회가 겪어야 할 일, 냉정함을 잃은 대중들의 판단 이 모든 것들은 빈익빈 부익부(貧益貧 富益富)로 가는 과정인지 모른다. 오늘 우는 자 내일 웃어야 하는데, 가진자는 더 갖게 되고 잃은 자는 더욱 쪽박을 차게 되는 미래는 좋은 것이 아닌듯 하다. 

2017년 2월 3일 금요일

아웃소싱 / 폴 크루그먼

IMF구제금융을 받던 다음해부터 일자리가 없어서 방황하던 사람들에게는 역설적으로 좋은 일자리의 기회가 있었다. 바로 '공공근로'라는 것인데, 많지 않은 근로 시간에 많지 않은 임금을 받았지만 그래도 여유있는 모습으로 일을 하던 지인들이 생각난다. 그 즈음서부터 공무원준비생들의 시험과목인 행정학을 오랫동안 지도했는데, 구조조정으로 비롯된 아웃소싱에 대한 내용을 수업하면서 공공재의 아웃소싱과 정부규모 축소, 그리고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생각을 피상적으로 토로했던 생각이 난다. 아이러니하게도 보수진영에서 싫어하는 '좌파정부' 시절인데, 구제금융덕에 신자유주의 이념은 멀리 멀리 퍼져 나갔다.

시간이 흘러 실제로 공공재의 성격을 가졌으나 아웃소싱으로 민간에 맡겨진 분야에서 일을 한 적이 있었다. 근로자들은 저임금으로 힘든 일을 하고 있었고, 성과를 보는 생산업체와는 달리 저렴한 비용을 무기로 응찰하여 일을 수주 받은 아웃소싱업체는 장비 하나 풍족하게 쓸 수 없었다. 지방정부에서 마련하여 불하해준 기계장비가 부족하여 관리자들과 얼굴을 붉히는 경우도 있었는데, 우리집은 가난하여 정원사도 가난하고 가정부도 가난하고 그랜드 파아노밑에는 돈벌레가 먹을 것을 찾아서 방황하고 있다고 말하는듯한 어떤 재벌의 엄살과는 달리 정말 춥고 배고팠다. 근로자들과 관리자는 성과라는 공동목표가 없는 탓인지 어느때고 싸울 태세가 되어 있었고 조회시간은 관리자의 불평으로 시작하고 근로시간은 근로자들끼리의 의미없는 신경전으로 하루가 갔다. 나중에 근로자들의 노력과 최고관리자의 노력으로 자율적이고 행복한 근로환경을 만들자는 노력이 있어서 좋아지긴했지만 아웃소싱업체라는 서자의 태생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해 겨울 처음으로 따스한 실내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들을 스스로 내팽개치고 안전화를 신은 것에 대해서 처음으로 후회해본 것 같다. 하지만 그 고생이 어디 나뿐인가 하는 생각으로 견뎠던것 같다.

비용절감에 집중했던 수출주도형 경제구조가 낳은 문제점을 아웃소싱업체의 현실에서 볼 수 있었는데, Paul Krugma 교수의 [The Accidental Theorist]에 나와있는 내용이다.

세계화의 배후에서 작용하고 있는 추진력에 대해 내가 예로 들기를 즐겨하는 구체적 사례는 최근에 급성장하고 있는 짐바브웨의 야채수출 부문이다. 근래들어 하라레 인근의 채소 재배업자들이 런던시장에 신선한 야채를 공급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야채는 수확되자마자 즉각 공항으로 운송되고 비행기로 밤새 날아 히드로 공항에 도착해 다음날 아침이면 슈퍼마켓의 선반에 올라가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수출 산업의 성패 여부는 최소한 다음 세 가지 사항에 달려 있다. 첫째, 저렴한 항공운송이다. - 낡아빠진 구식 보잉 비행기라면 현대의 교역에서는 부정기로 다니는 증기 화물선이라고 할 것이다. 둘째, 현대적 통신이다. - 야채는 주문을 받고 공급된다. 그러니까 주문 메시지는 통신 체계가 잘 갖추어진 선진국들에서나 가능한 방식으로 재배 농부들에게 전달되지 않으면 안된다. 끝으로 당연한 일이지만 이 사업은 영국 시장의 개방성에 달려 있다. 만일 수입 쿼터제나 고율관세가 매매를 가로막고 있다면 거래는 있을 수도 없는 것이다.

이 모든 사항에 대한 소감이 어떠하신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보자 야채는 "고유 농법" - 즉 기계 사용은 거의 없이 손으로 재배되고 수확되는 노동 집약적 농법 - 으로 생산된다. 결과적으로 야채 재배농은 이 업종에 거의 전적으로 매달려 있는 짐바브웨 경제에 새로운 일자리를 별로 창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가격 경쟁력이 있다.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이 낮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그래도 행복하다. 다른 일을 할 기회 자체가 거의 없는 것이다.

아, 하긴 그렇구나. 노동자들은 흑인이고, 그들의 영국인 고객들은 백인이지. 뿐만 아니라 흑인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있는 농장주들도 신생 독립국 정권하에서 그대로 눌러앉아 살기로 작정한 식민지 정착민 백인들이고 .      

수출주도형 경제의 문제점, 내수(內需)를 소홀히 한 문제, 비정규직의 저임금, 기계적능률성 추구로 인한 근로자경시등의 문제점을 일본이 먼저 겪었지만 일본은 그 문제를 개선할려는 노력이 있었던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전통적으로 단체주의적 성격이 강한 일본 사회는 사회문제나 국가문제에 대한 대처도 공리(共利)를 우선시하는 성향이 있는것 같다. 지난 10년동안 보아온 한국보수정부의 경제운영을 되짚어보면 통계와 성과는 있었다고 강변하는데, 현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관념적 이념정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어디에서도 국민소득 30000달러의 위용을 찾아 볼 수 가 없었고, '국민의 삶'에 촛점을 두었다는 생각은 전혀 나지 않았다. 결국 피날래는 온갖 부패와 퇴락(頹落)으로 처참하게 장식했지만 많은 교훈이 될 법도 하다. 비싼 댓가를 치룬 교훈이지만.

이야기가 또 근본적이고 포괄적으로 어긋나고 있는데, 이제는 비용절감에 촛점을 두어 근로자들의 주머니를 털어 국가라는 거대기업의 성과를 보는 방식을 벗어나야 한다. '신자유주의'라는 이념보다는 근로자들의 일자리나 임금, 그리고 그에 따른 내수확장으로 인한 성장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지난 10년동안 내 자신에게도 정치적인 문제는 생계에  매우 음성적이고 나쁜 영향을 끼쳤는데, 일하여 임금을 받고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국민들이나 자영업자들에게는 정치가 마물(魔物)과 같은 존재였던 것 같다. 물론 이념문제는 그 첨병이었던 것 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