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wered By Blogger

2011년 10월 5일 수요일

공평과 불공평에 관한 석학들의 논쟁


1.레이거노믹스를 지원했던 신자유주의자인 시카고대학의 프리드먼 교수는 불공평을 수정할려고 노력해서는 안되며, 그 불공평과 더불어 사는 법을 터득하고, 그 결과 생겨나는 이익을 즐겨야한다고 한다.

2.분배의 형평성을 주장하는 롤스는 자연의 분배방식은 공정하지도 않고 불공정하지도 않으며, 공정이나 불공정은 제도가 그런 요소를 다루는 방식에서 생겨난다고 말한다.

3.후쿠야마교수는 과거에 레이거노믹스를 옹호했지만 정세가 바뀌었으니 지금은 다른 방식의 정책을 펴야 한다는 요지의 인터뷰를 했다.

4.롤스의 정의론이 궁극적으로 실패하든, 그 이론은 미국정치철학이 아직 내놓지 못한, 좀더 평등한 사회를 옹호하는 설득력있는 주장이란 견해는 하버드대학의 마이클 센델교수의 주장이다.

학자들은 자신의 견해를 변화시키기 어렵다. 견해를 변화시키는 것을 학문적 변절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러나 말 그대로 변절을 해버린 후쿠야마교수의 말대로 정세는 변하는 것이다. 센델교수의 말처럼 지금 미국의 정치철학은 이미 한계에 도달한  불공평한 미국사회에 대한 변화를 의도하고 있다는 견해같다.

사실 나도 수백년 산다면 지금처럼  복지국가를 선호하지는 못할 것이다. 언젠가는 지금 필요로 하는 복지문제는 세월이 흘러 부작용을 낳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때는 그때대로 다시 신자유주의같은 정치철학이 다시 발생할 것이라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지금 한국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지금 이 순간의 정의라는 것이다.  

정치철학은 국가현실이 항상 동태성(動態性)을 띄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서 논의되어야 한다. 그 동태성이라는 것은 개인이 만든 것은 아니며 국민과 사회구성원의 발전적합의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 합의라는 것이 교통과 통신과 지식수준의 발전에 따라 시간이 지날 수록 점점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것도 전제해야 한다.



자살

인간의 감정이라는게 늪과 같습니다. 저는 자살에 대해서  주변에 처한 상황에 책임을 묻고 싶습니다. 자살할것 같지 않은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자살합니다. 비관적인 감정에 한 번 빠지면 감정이 감정을 잡아 먹습니다. 자신만을 위한다는 이기심이나 가족을 생각해야 하는 이타심에 관한 생각은 오히려 여유있는 생각이라고 해야하겠네요.

가끔 주변에 힘들어서 자살하고 싶어하는 청소년들을 봅니다. 자신의 감정에서 탈피하는 기술을 미처 배우지 못한 탓입니다. 특히 가정환경이나 교육환경때문에 트라우마를 입거나 고통받고 있는 청소년들이 자살할려는 경향이 많습니다.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지 못한까닭입니다. 환경으로 부터 자신을 의지력으로만 방어하다가 스스로를 방어할 기술을 못배운 까닭입니다.

사실 저도 나이가 많지만 청소년이나 젊은 사람들의 자살은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사회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한 기성세대에도 책임이 크다고 봅니다. 

자살 상황을 이겨내고 시간이 지나가면 자살도 허망한 일이지만 그런 상황을 이겨낸 자신과 세상에 대한 감정이 더욱 잔잔해질것으로 생각됩니다. 모든 고통은 각자의 것인것 같습니다. 힘든 사람에게는 힘든 일이 세상의 전체모습이지요. 어려움을 이겨낸 사람을 보면 존경스럽지만 좌절한 사람은 이해가 됩니다.

마음의 고통은 타인이 존재하고, 자신이 한 사회인이라는 전제에서 생겨나기 때문에 사회인들은 모두 자살 하시는 분들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쉽게 설명 드리면 칭찬할 일은 못되지만 누구도 그 분들을 비난할 수는 없을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청년취업문제 때문에 자살하고픈 분이 많다고 하는데 개인적 감정에만 책임을 지울것이 아니고, 빨리 취업이 잘 되는 경제상황을 만들어야 할텐데 하는 생각입니다.

어느 젊은 사람들이 많은 웹에 올린 댓글이다. 가끔 운동장에 가면 이혼이나 병고로 인한 좌절감을 극복할려고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본다. 나이든 어른이 스스로를 챙기는 면에 있어서 다르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나도 수없이 많은 고비를 느끼고 살았고, 살아서 성장해 생(生)의 편에 서게된 사람으로서 사(死)의 편에 서게된 사람에 대한 마음은 다를게 없다. 누구나 살기좋은 환경이 되어야 할텐데........

정치인의 허영심

정치는 두뇌로 행하는 것이지 다른 부분이나 정신적으로 행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정치가 경박한 지적 유희가 아니고 인간의 진정한 행위라야만 한다면, 정치에의 헌신은 정열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있으며 정열에 의해서만 육성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거리감에 대한 습성이 양성되지 못하면 정열적 정치가를 갈라서 <불모의 흥분>에 도취하고 있는 정치적 딜레탄트로부터 그를 구별하는 그 강한 정신의 제어는 불가능할 것이다.

한 정치적 <인간>의 <강도>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앞서 말할 바와 같은 자질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가란, 일이 아니다. 시시각각으로 자기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극히 사소한 너무나도 인간적인 적을 극복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적이란 몹시 천박한 허영심이라는 것으로서, 이것이야말로 일체의 사무적 헌신 및 일체의 거리 - 에 대해서 불구대천의 원수인 것이다.

 - 막스 웨버 -

정치라는 것은 권력과 함께하기 때문에 허영심을 조심하라는 막스웨버의 말이다. 허영심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혼자서 연구하는 학자와는 달리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는 일에 있어서는 천박함이 가중 된다는 설명을 부연하고 있다. 정치인은 카리스마나 멋 이런 것을  허영심으로 추구해서는  안되고, 주어진 일의 본질적인 목표에만 전념해야 한다는 내용인듯하다.  

2011년 10월 4일 화요일

미국의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두 이념은 교차한다. 공동체주의자인 샌델교수의 특강이 미국과 한국에서 널리 알려지는 현상은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이념중 어느 한쪽의 편향성에 균형을 맞추는 현상일 수 있다. 가장 자유주의적 국가인 미국과 자유주의적인 보수정권이 자리잡은 한국에서 있을 수 있는 당연한 현상이다.

이념의 편향성은 사회현상으로 나타나고 그것을 피부로 느끼는 사람들에 의해서 거부되거나 균형을 맞출려는 행위가 시도된다. 어떤 이념도 완전한 것은 없다. 다만 당시의 문제점을 개선하는 과정에서 대척점에 있는 생각이 제기될 뿐이다.

미국의 자유주의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듯하다. 미국은 사회를 움직이는 창조적인 3퍼센트의 시민들을 제외한 나머지 국민들, 예를들면 할렘의 뒷골목에서 농구만 하는 흑인 청소년과 일을 마치고 오면 햄버거와 콜라를 들고 티브이앞에 앉는 가난한 노동자를 비롯한 97퍼센트의 능력을 끌어내지 못하는 문제점이 점차 상대적 국력감소라는 문제점으로 나타난다.

그래도 잘살았지 않냐고 한다면 미국이 참으로 복받은 나라인것을 말하고 싶다. 많지 않은 인구와 넓은 영토, 풍부한 자원, 거대한 공업 잠재력으로 축적된 자본은 투자와 수익을 반복하며 미국이란 거대한 나라를 지탱하여 왔다. 또한 다른 나라의 영토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투입된 엄청난 미국의 군수품등은 미국경제에 눈덩이 굴리기식 승수효과를 가져왔다.  실제로 미국에 많은 부가가치를 안겨준 우주항공산업등은 군사분야와 뗄수없는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달리는 두발 자전거처럼 미국은 어떤 일(?)이 또 발생하여 소비를 하고, 생산을 하며, 고용을 하는 정세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국가도 시민도 살아있는 생물체와 같다. 피로하면 쉬는 시간이 필요하다. 미국의 근면한 엘리트들은 미국의 영웅이되어 많은 미국인들을 먹여살렸다. 이제 자아실현과 복지에서 소외된 시민들을 깨워야 할때다. 미국을 말하는것 같지만 한국도 비숫한 상황이다. 공동체주의는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여져야한다. 이념이라고 칭하면 사회주의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에 이념이란 용어 자체는 피하는게 좋다.

옛날 옛날 사람은 원래 한끼만 먹었다. 그러나 청동기시대에 정복전쟁과 계급이 생기면서 노예를 부리기 위해 노예에게 두끼이상을 먹이기 시작했다. 먹어야 일을 하지.........좀 역설적이지만 타인을 부려먹기(?)위해서는 타인이 일할 여건을 만들어줘야하고 일할 마음을 가지도록 행복한 동기를 부여해야한다. 그것이 공동체주의다. 너도 살고 나도 살자는 방식이다. 내 생각에는 장차 미국이나 한국에서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는 삶의 방식인것 같다.   

중동돼지

중동에서는 돼지고기를 금기시 하고있다. 그 점에서는  다른 종교문화를 가진 유대교나 이슬람교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기원전 7천년경에서 2천년경에 이르는 동안 중동의 인구는 거의 60배로 증가하고, 가축을 사육할 수 있는 자연조건도 그와 같은 비율로 감소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자연조건을 훼손시킨 가축사육은 돼지였다.

중동은 돼지사육에 적합한 지역은 아니다. 돼지는 물을 많이 먹는다. 그래서 돼지고기는 귀한 음식으로 취급되었고, 그럴수록 먹고싶은 유혹이 커진다. 따라서 야훼와 알라신은 돼지고기가 불결하니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그러면 그 외 금기시하는 음식인 독수리, 매, 뱀, 달팽이등은 왜 금기시할까. 돼지고기와는 달리 독수리를 식용으로 하거나 사막에서 조개류등을 쉽게 얻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은 돼지고기와 같이 경제성을 따져서 섭취금지가 된 식량자원이 아니고, 금기를 준수함으로써 특별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게 하는 작용을 하였을 것이다.

 - 마빈해리스<문화의 수수께끼> - 참조

Header

차기 북한 헤더인 김정은의 사진을 처음 보았을때 북한의 분위기가 많이 바뀔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사납고 정기 넘치는 눈은 김정은의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는것 같다. 마약범은 무조건 체포하는 즉시 사형을 시키라는 지시를 내리는 것을 보면서 시작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헤더의 분위기는 국가정책과 인민의 분위기에 큰 영향을 준다. 집권기간이 길수록 더한것 같다.

키가 작은 콤플렉스를 가진 김정일국방위원장이 강성대국을 지향하면서 세계적 규모의 호텔을 짓다가 국력을 소모 시키는 일이 있기도 하고,아리랑같은 거대군무공연을 열기도 하고, 한 방을 노리면서 핵미사일 건조에 힘쓰는 것은 결국 개인적 성향과 관계되어 있다.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가 어떤 술을 마시거나 어떤 선글라스를 쓰면 따라하는 열풍이 있었던 것은 우리도 경험했던것 같다. 지도자의 건강한 면모는 국민정신을 건강하게 만들기도 한다.

백성은 지도자의 모습을 이미지화 시키면서 그와 자신들을 동일화 시키고 닮아가는 점에서도 그렇고, 지도자의 개인적 성향이 정책으로 표현되어 나오면서 백성에게 영향을 미치는 점에 있어서도 지도자의 책임이란 막중한것 같다. 

북한의 병력감축

실용주의는 생명력이고 확고한 목표의식이다. 국가의 발전과 인민의 행복이 목표라는 것을 확실히 하면 해결책이 제대로 나올 것 같다.

군 복무기간을 줄여서 북한의 병력을 대량 감축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카운터 펀치를 날릴만한 최신예 무기와 방사포전력 같은 것만 남기고 재래식 전력을 감축하면 될 것이다.기왕에 만들어진 장거리 미사일은 킴의 위치와 북한이라는 국가정체성을 유지 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남한의 입장에서야 다 없애는게 좋겠지만서도 현실성이 없는 생각이니까)

병력감축으로 남아도는 노동력은 미국과 사이가 안좋은 아랍국가나 러시아등에 노동자로 보내면 된다. 석유가 고갈될 것이라는 예측때문에 모든 경제인프라를 재건설하고 있는 아랍국가의 주머니를 털어 올 마지막 기회다.이미 진출해 있는 남한의 기업과 궁합이 잘 맞을 것이다. 실제로 남한의 기업들은 동남아시아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있다. 남한의 공업중에서 노동력지향형 공업을 적극 유치하면서 서로의 상생을 도모하면 될 것같다.

쟈스민혁명이 일어날 것 같지만 이윤동기등을  순차적으로  부여해주면서 인민들에게 더 나은 생활을 유도한다면 지금의 중국같은 경제적으로는 자유로우나 정치적으로는 어느 정도 통제 받는 정치경제모델로 갈 것이다. 

2011년 10월 2일 일요일

긍지와 우려

우리 부모님 세대를 보면 그래도 한국을 지탱시켜온 힘을 다시 한 번 생각한다. 일제시대의 참혹한 탄압, 6.25의 참상, 그리고 그 이후 가난을 오래 겪으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으신 부모님들의 세대는 눈물겹다. 부모님들의 과거를 생각하면 다른 불만도 과거속에 녹아서 없어진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도 생각해봐야 한다.안겪어도 될 고난은 겪지 않는게 좋다. 똑같은 사건을 역사책에 반복해서 쓰지 않는 것이 현명한 국민의 역사다.  

1980년 정보기관의 에너지승리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강력한 통치권한이 모든 국가에너지를 대통령에 집중되게 하였다. 그동안 다른 통치기구들은 에너지를 키울만한 정치적이고 제도적인 여유가 없었다. 급기야 대통령의 서거로 에너지의 중심체가 붕괴되자, 가장 강한 에너지를 가진 보안사령부의 수장이 집권을 하게된다.

정보기관이란 외부에서 파악할 수 없는 그림자같은 모습으로 자신들의 에너지유출을 막는다. 한편 눈에 보이지 않는 감시와 정보수집으로 외부에너지를 빼앗아온다. 불안한 정치현실에서는 정치인(예를들면 야당의원)까지 정보기관의 에너지수입의 대상이된다. 국민의 지지라는 가장 큰 에너지가 도움을 줄 수 없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사회현상을 살펴보다 보면 일방향성의 정보전달이 조직이나 집단의 상층부에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획득하게 하는지 볼 수 있다.    

종교인의 에너지수입

오래전 똑똑하고 젊은 사람 한명이 교주가 되고 싶어하였다. 다른 사람의 정보를 부지런히 수집하는데 힘쓰고, 자신에 대해서는 어떤 사람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고 있었다. 모른척하고 몇 년을 살펴보았다.

어떤 종교인이 온갖 카리스마적인 기교를 부리며 신자들의 에너지를 빼앗고 있는걸 본 적이있다. 호통과 지옥불이야기를 결합시켜 세트메뉴로 내놓고 있었다.  맹신과 복종을 요구하기전에 사랑과 편안함을 먼저 주어야 하는것 아닌가.

종교나 정치권에서 애써 자신의 노력으로 뭔가를 얻을려고 하지 않고, 레드오션적인 에너지 싸움으로 노획물을 얻을려는 군상들을 많이 보면서 이 사회의 미래가 어둡다는 것을 느낀다.  

복지국가는 신뢰다

가진자의 것을 빼앗아 나누는 제로섬개념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고, 가지지 않은 자에게 발전할 수 있는 여유를 주자는 개념, 그래서  더 많은 생산과 발전으로 유도하여 사회를 안정화시키고 성장시키겠다는 개념으로 이해해야한다. 그런 바탕위에서 논의가 이루어져야한다.

경쟁심리가 없어지면 부패도 없어진다. 국민들은 서로를 신뢰하고 사회를 신뢰할 수 있을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다. 신뢰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마음의 안정을 얻을려는 갈망은 국민 누구에게나 본능적으로 존재하는것 같다. 그래서 이념이나 종교 같은 곳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과도현상이 발생한다. 국민들은 맹신을 하고 나서 자신이 신뢰감을 얻었다고 착각한다. 그리고 그 신뢰감을 지키기위해 어떤 투쟁도 불사한다. 또 그런 대중의 행태를 이용해서 다른 것을 얻을려는 똑똑한 자들도 사회에 기생한다. 

그릇

큰 그릇은 왜 늦게 만들어질까. 죽을 고생을 한 다음에 작은 자극에 둔감해지라는 뜻일것이다. 하늘이 사람을 크게 쓸려면 뼛골이 닳는 고생을 시켜 마음을 두들긴다는 맹자의 말이 있다.

가끔 지인들중에 마음 편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죽을 고생을 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무슨 말을 해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사소한 문제는 달관해 버린 사람들이다. 사회적인 지위가 없어도 의지하고픈 사람들이다.

반대로 작은 희노애락에 웃고 우는 사람들은 작은 일로 쉽게 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대하기 무척 조심스럽고 복잡하다. 

2011년 10월 1일 토요일

야만적 교육현실은 보수나 진보의 문제가 아니다.

능률의 문제일 뿐이고, 그 능률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제대로 규명해야 하는 능률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문제다.

경쟁적 교육을 시켜서 단기적으로 효율성을 달성하는 것은 좋지만 장기적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후대의 사회에 얼마나 바람직한 삶의 질을 남겨 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설령 삶의 질문제가 우리 현실에 너무 비약된 가치라면, 삶의 양적인 능률조차도 경쟁적교육을 통해서는 장기적으로는 달성될 수 없을 것 같다.

어찌 보면 교육학자들을 비롯하여 카이스트총장까지도 경쟁적 교육의 장기적 비능률성을 알고 있을것 같다. 그러나 습성, 전통같은 장벽에 얽매여있는, 아니 안일하게 야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든다.  단언하면 시집살이를 모질게 겪은 시어머니가 며느리 시집살이를 모질게 시키게 되는 습성이다

쇼생크 탈출

영화에서 가석방심사 장면이 나온다. 자신이 지금은 올바른 사람으로 개선되었다고 아무리 어필해도 심사관은 가석방을 시켜주지 않는다. 그러다가 가석방의 희망을 포기하고, 나가봤자 좋은 일 없으니까 당신들 뜻대로 하라니까 가석방을 시켜준다.

쉽게 표현하면 감옥안에서 자신의 끓는 피를 제대로 다스렸는지 보는 것이다.

질문

"미국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이시도어 아이작 라비의 일화를 들려드리고 싶네요. 라비는 어떻게 과학자가 됐냐는 질문에 '어머니 덕분'이라고 답했어요. 어린 시절 주변의 다른 어머니들이 방과 후에 '오늘 뭘 배웠니'라고 묻는 것과 달리 그의 어머니는 '오늘 무슨 질문을 했니'라고 물었답니다. 좋은 질문을 하는 습관이 그를 과학자의 길로 이끈 거죠."

 - 레데스마 건국대교수 - 

천재

천재는 근면으로 길러진다.

 - 키케로 -

재능은 노력으로 길러지는게 맞다는 확신이든다. 전혀 다른 방향의 습관과 노력이 우리가 판단하기를 전혀 상관이 없는 또 다른 방향의 재능에 영향을 줄 지라도........어떤 일이든지 안하는것 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무사안일하게 게으름을 피우던 날들이 후회스러워 자꾸 스스로를 깨울려고 노력한다.

자기최면

분명히 아닌데도 그것이 옳다고 반복해서 상상하면 머리속에서 현실로 고착화되는 경우가 있다. 이념이나 종교에 민감한 한국사람들이 많이 앓는 병인데 그런 면은 '사회의 불안정'이란 피해를 입힌다. 극단적으로는 노르웨이 학살자인 안데르스와 같은 사람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