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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30일 금요일

회고록 / 상상력의 비합리적 결말


고등학교시절 대학을 포기하고 이것 저것 읽을거리를 눈에 띄는데로 읽고 있었다. 그때 잡지(주간조선)에 NLF(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고급간부였다가 전향한 트루옹누탕의 회고록이 연재가 되고 있었다. 그 연재물을 빠짐없이 읽으면서 신념이 무엇을 위해 포기되어지는가에 대해서 어렴풋이 생각한 적이 있었다. 간난신고를 겪은 '반체제 인사의 투항'은 어린마음에 현실이 신념을 값어치없게 만들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동시에 그 잡지에 우스운 기사가 함께 나왔는데, 어떤 사업가가 서울과 춘천사이의 항공노선을 개설할려고 허가신청을 했다는 기사였다. 그 사업가의 정체는 베일에 가려져 있고, 중국이 아닌 중공시절에 중국어를 하는 여성이 사무실에 드나든다는 기사였다. 그 사업가를 인터뷰하니 당시 육상교통이 포화상태에 있던 서울과 춘천사이의 항공노선은 군용비행장을 함께 사용함으로써 충분히 타당성이 있다는 말도 있었고, 사업가가 교통부에 신청한 사업허가 신청서류가 번번히 반송되었다는 내용도 있었다.

나중에 그 사업가는 과대망상의 인물로서 목적없이 제스츄어만 취한것으로 밝혀졌다. 그 사업가는 어렸을때부터 큰 인물(무엇이 큰 지는 모르지만)이 될것이라는 주위의 예측을 듣고서 자라 출세나 큰 인물에 대한 강박관념이 컸던것으로 판단된다는 기사가 나왔다.

이념이나 종교적 상상력이 합리성과 연결이 안되면 큰 혼란이 빚어지는듯 하다. 더구나 정치지도자의 자질이 비합리적이거나 목적을 망각하면 더욱 혼란이 클 것은 당연한듯 하다. 몇가지 검증을 해본 결과 대중은 비합리성에 더욱 크게 반응하는듯 하다. 본질과 검증을 향한 수고를 하지 않겠다는 얄팍한 계산의 결과이기도 한것 같다.

형이상학적인 생각이 난무하는 정치나 종교의 세계에서는 목적을 잃어버린 정치인이나 종교인, 그리고 생각하지 않는 대중이 '삼위일체'가 되어 파국을 향해 달리는듯 하다. 논리와 검증, 끊임없이 제시되어야 하는 목적과 본질을 향한  의문은 교육단계에서부터 익숙해져야 할듯 하다. 그렇지 않으면 일을 저지른 사람도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모르고, 피해를 본 대중들도 뭔가 기분나쁘지만 뭐가 잘못되었는지 설명하지를 못한다.

사고없는 주입식 교육과 상명하복의 사회분위기가 만든 폐해때문에 뒤늦게 거국적으로 쓴 맛을 보는듯 하다.
 

2015년 1월 16일 금요일

북한과 일본의 첩보전


일본의 북한 전문가인 와다 하루키 교수(Wada Hruki 1938 ~ )는 2차대전 패전후 극심한 생활고를 겪은 일본인은 북한을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북한은 김일성의 건국만주항일전쟁의 정신을 국가에너지의 근원으로 삼는 유격전 국가라고 말한다.그래서 북한은 남파공작을 유격대 국가노선의 행동방법으로서 중요시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러가지 사건과 와다 하루키교수의 언급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봤을때 북한과 일본은 첩보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국가사회주의 성향이 있는 북한과 극우적인 정치세력이 전혀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일본의 유사성, 한마디로 국가주의 성향이 강한 국가들의 첩보전력은 다른 국가들보다 집중력이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얼마전 한국대통령의 7시간의혹을 산케이신문에서 언급한 사건에 대해서 의구심이 든적이 있었다. 왜 하필이면 한국언론이 아닌 산케이신문일까. 어째서 산케이신문은 한국대통령의 자취를 추적하고 있었을까. 단순히 저널리즘이 발휘한 호기심 이상의 무엇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물론 그 이상을 생각하는 내 자신의 의혹도 고려해볼만 문제이기도 하였다.

미국지도자들이 외국의 자기상대를 알고 싶어 하는 욕구는 한계가 없다. 미국 지도자들은 상대방의 정책은 물론 그들의 성격까지 알고 싶어 한다.그들의 인간됨을 파악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CIA는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투입한다.

외국 지도자들은 크고 화려한 호텔 스위트룸에서 호사를 누린다. 이는 그들의 책무, 또는 그들의 지위와 외교 의전에 따라 예상할 수 있는 사항이다. 또한 그들은 자국 대사관에 가까운 호텔을 선호한다. 이런 조건을 만족시키려고 하다 보면 특정한 지리적 범위내에서 값비싼 호텔이라는 유형이 반복된다. 정보기관에게 예측가능성은 축복이다.

- 전직 CIA요원 Hanry A Crumpton-

지금도 존재하는지 모르지만(원래 첩보기관이나 첩보원 양성기관은 존재해도 없어졌다고 하거나 명칭을 바꿔서 실체를 유지하는 습관이 있다.) 과거 일본의 첩보전학교인 나까노학교에서는 첩보원들을 양성하여 언론, 경제, 외교 각 분야에서 일본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나까노학교 출신들에게 임무를 부여할때, "궁극적으로는 일본인으로서의 자각에 의해서 행동하라"는 지시를 내린걸 보아도 일본 첩보원들에게 우국적인 충정이 크게 강조되는듯 하다.

산케이신문의 첩보가 실체적 진실을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도 한국사회에서 일어날 파문에 대해서 한국사회의 국론분열이라는, 한국으로서는 치명적인 상황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도 '일본인으로서의 자각'만큼이나 인지하고 있을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양국의 공격적 첩보활동의 사이에서 한국의 첩보기관은 생각하고 행동할 일이 넘칠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2015년 1월 9일 금요일

북한의 화폐개혁과 한반도의 보수적 재난


어느 날 조금이라도 나이 먹었다고 느낄때가 있다. 그때는 하잘것 없어 보이는 일을 하는 젊은이도 열린 사고를 가지고 나를 비웃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하는데, 가지고자 해도 가질 수 없는 많은 것들에 대한 열망을 들켰을때의 기분이란 그나마 더 변화의 가능성이 있는 젊은이와 경쟁선에서 섰다는 패배감으로 표현해도 될것 같다.

나이 든 사람은 가장 기본적인 자본인 '나이'라는 것에서 지고 있다는 생각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을 거스르고 욕망을 충족하거나 유지하기 위한 경쟁관계에 들어서게 되면 나이 든 사람의 연륜은 그가 얻어낸 사회적 지위와 확립시켜온 관점(나중에는 고집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만큼 사회에 어두운 영향을 주는것 같다.

노인과 함께 하는 시간에 힘든 일이 있다면 진취성을 잃어버린 탓에 과거의 습성속으로 관점이 매몰되어버린 마음을 볼때였던것 같다. 많은 노인분들은 어떤 다른 시각에 대한 관용을 불허(不許)하는듯 하다. 노인이 이야기하는 연륜이 만들어주는 지혜란 좀 더 근본적이고 긍정적인데 있지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정신을 악용(惡用)하는것 보다는 선용(善用)하는것이 노인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북한이 화폐개혁을 하다가 실패를 해서 화폐개혁을 입안한 실무자를 숙청하고 다른 어떤 경제적인 개혁을 시도할려고 하지 않는 행태를 보면서 나이 든 이들(북한의 이념적인 보수주의자들)의 횡포를 보는것 같았다. 나이 든 인재들은 이념에 관한 교육만 받았으며, 최근의 우수한 인재들은 사이버 전사같은 비생산적인 인재로 키워지는 북한에서 경제에 관한 기본학습조차도 제대로 받은 인재가 없다는 사실은 나이든 보수들이 책임져야 할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북한의 화폐개혁은 정부가 책임지지 못해 몰락해버린 배급경제의 빈틈을 어렵게 비집고 나온 시장경제의 싹을 잘라버리는 결과가 되었는데, 시장경제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본형성을 좌절시키고 조금이나마 형성된 자본들을 정부가 착취해버린 어이없는 일이 되어버린 사건이다. 이쯤되면 청나라 말기의 중국처럼 외국에서 경제고문이라도 초빙해야 할 정도로 국사(國事)를 위한 인재가 빈곤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한 국가의 개척적인 창설자인 김일성조차도 이념교육만을 시킨 젊은 인재들이 훗날 북한을 패망시키는 아니면 적어도 발전을 가로막는 방해물이 되리라는 예상을 하지 못했던것 같다.사실 과거 중국이 외부에서 초빙한 고문들조차도 변하지 않는 중국의 보수적 관점에 의해서 성공적인 도움을 줄 수 없었다고 하는데, 지나치게 보수적인 관점이란 보이지 않는 재난을 가져오는듯 하다.  

가끔 보수인지 진보인지 정체성을 묻는 질문을 받는다. 하지만 그것이 이념을 묻는 질문은 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전진 또는 후퇴, 생존 또는 패망같은 의미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 정치적 갈등은 아직도 이념적인 갈등관계를 벗어나지 못하는듯 하다. 어쩌면 완전 보수 반동으로 돌아선 북한에 하향평준화되어가고 있는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북한이 당한 보이지 않는 재난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국도 경험하고 있는것으로 생각된다. 프랑스에서는 좌파정부속에서 우파적인 경제정책을 제안하는 젊은 경제산업자원부 장관인 임마누엘 마크롱의 정책들은 외부에서 평가하기를 우파나 좌파라는 명칭을 부여할뿐 '프랑스가 당면한 문제의 해결'이라는 유연하고 선량한 목표를 지향하고 있지않나 하는 생각이든다.

과거부터 내려오는 권위주의적인 전통 아래서 이념적인 정치가 경제마저도 이념적으로 몰고가는 한국은 많은 변화가 필요한듯 하다. 물론 그 변화의 목표속에는 공리(共利), 국민의 행복, 갈등의 해소,목표들을 위한 인적쇄신까지 다양한 변화가 필요한듯 하다.  

    




2015년 1월 2일 금요일

보이지 않는 재난 / 도덕지능


오래전 일터에서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든 일을 겪은적이 있다. 일이 힘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구성원들이 자주 바뀐다는 이야기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처음부터 관심을 가지고 일을 시작했다.원래 우리사회의 직장문화는 일을 오래하지 못하고 그만두는 구성원에게 책임을 묻는 구조로 진행되어가기 때문에 놓칠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생각을 하였던것 같다. 

오랫동안 일을 하여서 중요한 구성원으로 대접받는 연배가 있는 보스격의 인물에게서 큰 문제가 있음을 알게된것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교육은 많이 받았으나 과거 우리사회의 '바람직하지 못한'경험중의 하나인 권위주의적이고 획일화된 정신구조를 가진 대표적인 표본으로 보였다. 이념적이고 권위적인 정치문화에서 학창시절을 보냈고, 어렵지 않은 가정에서 거침없는 성장과정을 겪었으며, 혹독한 군대생황을 오랫동안 하였다는 일대기는 훗날 알게 되었기에 당장 인식되는 행태를 살피는데 어떤 편견도 개입하지 않았다.

어려운 시간을 많이 겪어보았지만 진짜 어려운 일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일들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무지와 불통과 권위의식으로 불안한 일터문화를 만들어나가는 인물에게 혈기왕성했던 시절이라 참지 못하고 반기를 들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욕이란 욕은 다 먹었는데, 급기야 자신은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하다는 덜떨어진 영웅심리가 담긴 말에 발끈하여 한마디 간략하게 중얼거렸다. "사람이 되다 만 짐승이군"

한 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치적으로 굉장히 감수성(?)이 있는 인물이라서 하루종일 정치인들에 대한 욕을 멈추지 않았는데, 이념적이거나 권위적인 정치문화가 낳은 또 하나의 정신적인 괴물이라는 생각도 들고,  피선거권을 갖게 된다면 저런 이가 찍은 표를 어찌 소중한 한표라고 덥썩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상상도 하면서 웃음이 나왔다.

대체로 성장기에 형성되지 못한 도덕지능은 장기적으로 폐해를 가져오는데, 보이지 않는 문제이며 보이지 않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관심이 없었던것 같다. 특히 한반도의 교육문화는 '이념'이란 정신문화가 구성원들의 도덕적 감수성을 대체해 왔기 때문에 발전가능성이 없는 북한사회나 도덕적 진통을 겪으면서도 어렵게 발전해 나가는 한국사회에 시차(時次)가 있는 고민을 던져주고 있는것 같다.

두 해 전 여름, 나는  핀란드 교육부 초청으로 헬싱키에서 교사 교육을 한 적이 있었다. 미국과 핀란드의 차이에 대해 양국의 교육자들과 대화하는 시간은 정말 좋았다. 지금부터 소개하려는 내용은 그곳에서 나눴던 대화의 일부분이다.

몇몇 핀란드 선생님들이 교환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에서 강의를 했다고 한다. 그들은 자국의 아이들이 핀란드에서 사는 것을 얼마나 안전하게 생각하는지 말해주었다고 한다. 미국의 선생님들이 자신의 국가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강조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말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이 어른들은 두려운 존재라고 배운다면 과연 어른을 믿을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에서는 아이들이 어른을 존경해요. 어른을 믿으니까요." 그들이 말하려는 핵심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친구를 믿지 말라고 아이에게 주의를 줌으로써, 친절하고 올바른 행동을 하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의심많은 아이들로 키우고 있는 것이다.

-  미셸 보바 [도덕지능]중에서 -  

그때 겪은 경험으로는 작은 집단에서 분란이 멈추지 않았는데, 인식이 넓혀진 훗날에도 국가와 사회가 분란이 멈추지 않음을 볼 수가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도덕적으로 훌륭하거나 지혜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적어도 평생 개인과 사회가 다함께 노력해야만 이룰 수 있다.

- 존 몰린 Jon Molin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