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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31일 수요일

중국과 북한의 제왕적 권위와 숙청

가끔 기업체에 입사원서를 내놓고 대표이사와 면접을 보는 자리에서 대표이사의 권위적인 모습과 마음의 여유정도를 내쪽에서 살펴보는 경우가 있었다. 한 번은 회사에 인터뷰를 간다고 연락을 하고는 회사 정문에 도착하니 넓은 마당 한쪽 끝에서 노인분이 열심히 마당을 쓸고 있었다. 공손하게 이것 저것 여쭙고 사무실에 들어가니 잠시후 대표가 왔는데, 그 노인분이었다. 나를 시험에 들게한 주체의 쏟아지는 질문에 감정의 변화도 없이 의연하게 대답을 하고 있었는데, 회사의 크기에 비해서 대표의 심리는 매우 '개인적'이었다. 나는 일을 원했지 나를 다스릴 '제왕'을 원했던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인터뷰는 실패했다. 몇번 그런일이 있고나서는 회사의 '높은 사람'과 맞닥뜨릴일이 없는 상대적으로 빈한한 일자리를 찾아서 일했는데, 마음이 편했다.

아직도 모택동을 숭배하는 중국인들이 많은 것을 보면서 중국인들이 이데올로기적 망상에 빠져있고, 제왕적 권위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로 받아들일 민주적인 자세가 안되어 있음을 생각하면 경제민주화에 정치민주화가 따를 수 없는 중국의 한계를 다시 생각해보곤 한다. 북한은 과도기적인 정치형태로 중국의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은 맞지만 중국 그 자체는 한계에 부딪힐 날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곤한다. 공산당의 지나친 권위는 협동과 화합을 끌어낼 수 없는 시스템을 만든것이고 액튼경(Acton)의 말처럼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진리를 낳는 것이 현실적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중국은 부패문제가 심각한데, 정치적인 참여를 할 수 없는 에너지는 경제적인 상승욕구로 과잉배출되는 문제가 있는듯 하다. 훌륭한 국가를 건설할 꿈과 희망은 많은 능력있는 이들의 마음속에 싹틀 수 없는 여건상 대단히 개인적이고 일탈적인 꿈을 꾸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엘리트들의 비리도 알고보면 상승욕구나 협동적인 참여욕구를 차단당했다는 자기기만이 작용했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이념과는 상관없이 대장정의 가혹한 시련을 벗어났음에 대해서 중국홍군의 끈질긴 생명력은 경이롭게 생각하지만 모택동에 대해서는 대단히 좋아하지 않았다. 봉건적이고 부패한 중국타도의 기치를 내걸고 혁명을 일으킨 지도자가 또 다른 제왕으로 군림하게 된 '왕조의 교체'이상의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주은래와 등소평같은 혁명의 목적을 제대로 알고 있는 지도자가 없었다면 또 다른 세습왕조의 탄생이라는 역사적인 오명을 벗어나지 못할뻔 했던 것이 중국혁명인듯 하다. 중국의 근대화보다는 계급의식이 중심이 된 이념으로 또 다른 제왕적인 권위를 갖고자 했던 모택동은 독서를 즐겼지만 중국 고전에 치우쳐 읽음으로서 봉건적인 제왕적인 이미지를 자신의 그림속에 그려넣을 수 밖에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1974년 2월 등소평은 뻬이징으로 소환되었다. 모택동의 시대가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지독했던 문화대혁명도 끝났다. 파괴는 전쟁보다 더 지독한 상처를 남겼다.산업은 절름발이가 되었고 교육은 사라졌으며 당은 난파선이 되어 있었다. 유소기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모택동의 건강도 아주 나빠서 정신 상태조차 매우 위험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모택동의 아내인 강청과 사인방의 세 추종자들은 잠시 충격을 받았으나 곧 반격태세를 갖췄다. 주은래는 암에 걸려 있었다.

모택동은 다시 이 부도옹에게 도움을 청했다. 모택동은 유소기에게 했던 것처럼 등소평도 녹초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다. 아니면 하룡의 경우처럼 의사를 시켜 죽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모택동은 등소평에게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그는 등소평을 불러들였고, 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등소평 은 아주 드믄 인재다. 그에게는 사상이 있다. 그는 무턱대고 문제에 달라붙지 않는다. 그는 해결책을 찾는다. 책임감을 갖고 어려운 문제를 풀어가는 것이다.

모택동의 말에 따르면 등소평은 훌륭한 전사였다. 그는 소련과 싸우는 법을 알고 있었다. 등소평같은 사람은 좀처럼 찾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 HARRISON E. SALISBURY [THE LONG MARCH] - 

그러니까 모택동 자신은 이념과 제왕적 권위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함을 인식하고 있으면서 등소평의 목적을 아는 태도는 인정하고 또 필요로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의지하고 있는 사람을 숙청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택동은 등소평을 '솜뭉치속의 바늘'이라고 평했다. 부드러움속에 감추어진 목적을 향한 일관된 통찰력이 깃들어 있음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북한은 최근에 김용진 내각부총리를 처형하기까지 4년간 100여명을 처형한 것으로 추측된다. 김정은 위원장의 집권초기에 경제대국화의 포부를 피력했던 이상과는 달리 문제는 개선이 안되고 있는데, 이념과 군사교육외에는 배운게 없는 북한 엘리트들에 대한 신뢰할 수 없는 마음이 개입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김정은은 2009년 봄부터 가을에 걸쳐 실시된 생산배가 운동 '150일 전투'를 비롯하여 같은 해 연말의 통화 단위 변경, 2011년의 경제개혁인 '6.28 조치'까지 다양한 경제정책을 펼쳐왔다. 그러나 그럴때마다 나라는 혼란에 빠졌고, 결국 조선인민군 보수파 중진들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하기를 거듭했다.

 - 일본 동아시아연구가 곤도다이스케 -

거칠게 표현하면 배운것도 없고 생각도 없는 쓸모없는 인물들이 김정은 위원장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억한 심정까지 생기게 만든 것이다. 생각해보면 김일성 주석이나 김정일 위원장시대까지 엘리트들의 교육을 소홀히 한 나쁜 효과를 김정은 위원장이 떠맡게 된 결과가 된 것같다. 몇 번 서술한 바 있지만 효과가 늦지만 확실하게 나타나는 교육정책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사태인듯 하다. 프랑스의 르노자동차 공장에서 작은 체구로 육체노동을 하면서까지 배움의 열정에 빠져들었던 등소평과 같은 참모가 없는 것이 김정은위원장의 큰 고민인 것 같다. 개방이나 개혁을 할려니 일을 할 인재가 없고, 이념과 체제, 선군정치에 몰입한 엘리트들이 체제를 받쳐주는 인재들이자 체제를 무력화시키는 인재들이기도 한 이중적인 성격을 감당할 수 없는듯 하다.

몇년전 한 번 언급한 바 있지만 김정은 위원장은 고문정치를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중국혁명기에는 국민당쪽이나 공산당쪽에서 많은 서양인 군사적 정치적 고문들이 있었는데, 정작 고문들의 생각이 그릇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하여도 어떤 문제들을 해결하는 실마리로서의 다양한 지식과 반대의견을 유발 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논의의 다양성'을 유발할 인재라도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2016년 8월 29일 월요일

경제학지식의 진보

몇년전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의 선택과목인 경제와 법을 교습한적이 있었다. 학창시절부터 꽤 오랫동안 경제원론이나 미시경제학과 거시경제학 서적을 꽤 많이 읽었던것 같다. 조순교수의 경제원론부터 시작하여 수험용경제원론의 바이블 같았던 박홍립교수의 경제원론은 수십번을 읽었던것 같다. 이학용교수의 미시경제학이나 정운찬교수의 거시경제학까지 경제수학까지 따로 공부하면서 줄기차게 읽었는데, 요즘 대학입시용 경제학은 차원이 달랐다. 풍부한 내용을 얇은 교재속에 함축시켜 놓아서 많이 어려웠다. 공부 잘하는 학생과 진검승부를 겨룬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후 깨달은 바가 있어서 좀 더 최신의 경제관련서적을 하나 하나 사서 읽기 시작했다. 대충 즐겨봤던 서적은

1.NEW IDEAS FROM DEAD ECONOMISTS
2.CAPITAL IN THE TWENTY - FIRST CENTURY
3.THE ACCIDENTAL THEORIST
4.FORECAST
5.THE LOGIC OF LIFE
6.THINKING FAST AND SLOW
7.KEYNES KARA KURUGMAN MADE 14NIN NO MONOGATARI(일본 경제저널리스트가 쓴 책이라서 원 제목이 일본어다.)
8.경제학강의 / 장하준

등이다.

많이 발췌해서 글에 인용을 했는데, 책 내용의 선진성에 비해서 한반도의 현실이 많이 모자른듯 하여서 좌절했다. 더구나 '사'자 들은 시험을 준비하겠다고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놓고 저따위 정말 필요한 책만 읽었다. 그 이후 좀 더 현장의 현실을 익히고자 3년전(10월달이면 3년이다) 낡은 지프를 몰고 경기도의 한공단으로 구직을 하면서 다녔는데, 역시 현실은 어두웠고, 밝은 미래는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게다가 3년을 현장경험하면서 지적인 활동을 부차적인 것으로 미루어놓다보니 다시 그 시절의 매우 '보수반동적'인 두뇌로 퇴보하는듯 하였다. 한 편으로는 만약에 경제관료를 비롯하여 경제정책가들이 끊임없는 학습을 하지 않는다면 요즘 고등학교 3학년의 경제학에 대해서도 장담할 수 없는 사태가 올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교육관료의 반교육적실언사건이 있고나서는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 편으로는 이렇게 진보해도 부족한 지식과 응용의 공간에서 북한같은 경우는 경제개방을 하여 경제성장을 시작할려고 해도 인재의 부족으로 좌절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곤했다. 

2016년 8월 27일 토요일

독서와 마음의 여유

한 번은 12시간이나 일해야 하는 저녁이 없는 일을 한 적이 있었는데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지식과 생각은 휘발성이 있는지 다시 깜깜한 세상에서 헤맨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덜컥 병이 났다. 몸과 마음이 조화롭지 못했다. 독서는 다른 세상으로의 여행인데, 여행을 가지 못하니 답답한거였다. 마음 한 구석으로 에드가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에 나오는 모택동의 회고가 생각났다. 이념이나 말년에 보여준 행태로 좋아하지 않는 인물이지만 독서에 대한 열망만은 존경할만 하였다. 

나는 제 1중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교과목도 한정되어 있었고 교칙도 못마땅했지요. 나는 [어비통감]을 읽은 후 독서를 하면서 독학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어요. 나는 6달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후난 성립도서관에서 매일 책을 읽는 독서계획을 짰지요. 나는 이 계획을 매우 규칙적으로 성실하게 지키면서 6달을 보냈는데, 지금 생각해도 이 6달은 나에게 대단히 귀중한 시간이었어요.- 중략 - 이 독학 기간 중에서 나는 많은 책을 읽었고 세계지리와 세계사를 공부했습니다. 

나는 이 도서관에서 처음으로 세계지도를 구경하고 대단히 흥미를 느끼면서 공부했어요. 나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과 다윈의 [종의 기원],존 스튜어트 밀의 [윤리학] 책을 읽었습니다. 또 루소의 저작과 스펜서의 논리학, 몽테스키외의 법에 관한 저술을 독파했어요. 나는 러시아, 미국,영국,프랑스, 그 밖에 다른 나라의 역사와 지리를 진지하게 공부하면서 아울러 시와 전기 소설, 고대 그리스의 신화도 읽었습니다.

 - EDGAR SNOW [RED STAR OVER CHINA] -


잠시 주입식 공부만한 적이 있었다. 그때 뭘 크게 잘못 생각한 것이 있었는데, 공부에 대한 흥미와 뚜렷한 목표의식이 결여된 상태에서 의지력과 서두르는 행위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다. 당연히 될 일이 없었고 나중에 사격등의 운동에도 그래봤는데, 당연히 될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승부에 집착하여 이것만 달성하면 나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고는 희망이나 비젼을 갖고자 해도 그것들이 성취욕으로 돌변하여 서두르게 만들곤 했다.그리고 처음 일을 갖게 되었을때 잠도 안자고 열심히 일을 했다. 성과가 안나오던 과거를 게을러서 그랬던 것으로 왜곡하여 해석했다. 그래서 더욱 부지런해졌다. 부지런한 것은 좋지만 마음의 여유가 너무 없었던 것은 큰 문제였다. 다른 생각을 갖거나 다른 세상을 엿볼 기회가 전혀 없었다. 더불어 변화할 수 있는 여지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내 주변이 전부 그랬다. 지위와 명예, 권력, 부를 위해서 쫓겨다녔다. 그러다가 약간이라도 그것이 주어지면 '행세'를 했다. 그러니 없던이가 갖게 되면 행세한다는 말이 나오게 된 것 같다. 그것때문에 시달렸으니 그것에서 어떤 이익이라고 챙겨야 된다는 강박이 있는듯 했다. 그래서 권력에 집착하는 이를 보면 언젠가 핍박받은 과거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되고, 갑질이 만연하는 사회는 을의 역사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 북한은 강한 나라가 되고자 하는 의지와는 반대인 현실이 나타나는지, 왜 어떤 종교는 그 종교밖의 다른 사회와 섞이지 못하고 영역의 경계를 뚜렷이 하는지, 한국사회에서 왜 여가를 경시하고 부지런한 노동만을 요구하고 있는지, 비용편익계산보다 중요한 '인간의 행복'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모두 병리적이고 실패한 사회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지난 주 내 구글 블러그의 검색기록란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남도'의 검색기록이 떠서 좀 당황하였다. 지능과 사격에 관한 글이 주목을 받게 되었는지, 아니면 난수방송에 관한 글을 통하여 내가 너무 깊고 깊은 곳을 치고 들어간게 문제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내 고민 모두는 독서로 해결하여 온 듯 하다. 학생교습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사회과학이나 법률, 역사, 지리책을 100여권읽었고, 몸이 아프면 치료에 관한 서적을 100여권 읽었고, 운동실력이 필요하면 관련 책을 100여권을 읽었고, 정보전에 휘말리면 그에 관한 책을 100여권 읽었고, 심지어 일하다가 병이나면 Ernie J. Zelinski의 [적게 일하고 많이 놀아라]란 책을 읽을 정도였다.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의 관점은 부족함을 느끼면서도 넓고 객관적인듯 하다. 북한사회나 한국사회의 이면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국민의 시간속에 독서가 차지할 곳을 이념이나 그것에서 비롯된 획일적인 관심사가 차지하고 있는 비극이 있는듯 하다. 국가의 미래는 구성원들의 광범위한 독서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든다. 

2016년 8월 26일 금요일

남북한의 실패한 게임

남북한의 분단에 관한 문제는 남북한사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연결되어 있는 가장 큰 문제인듯 하다. 더구나 미래에 한반도의 성장동력을 얻어낼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인듯 하다. 여태까지 있어왔던 '다양한 방법'들은 '획일적인 이념'의 문제에 갇혀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식하고 있는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듯 하다.

한국사회가 지향했던 재벌위주의 성장의 방법들은 중소기업의 성장과 국민개인의 경제적인 삶을 많이 왜곡시킨듯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천대받는 비정규직인력이 경제산업현장에서는 현실적으로 가장 필요한 곳에 끼워넣어진 필요적인 인력이라는 사실은 노동시장의 유연성확보라는 구실을 빙자해 우회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중인듯 하다.

'운전'을 할 때 내가 오른쪽으로 달리고 상대도 오른쪽으로 달린다면 나는 만족스러운 보상을 받는다. 또한 내가 왼쪽으로 달리고 상대도 왼쪽으로 달린다면 마찬가지로 만족스러운 보상을 받는다. 하지만 만약 어떤 사람이 다른 선택을 한다면 나는 앰뷸런스에 실려가는 아주 나쁜 보상을 받게 된다.

- 파이낸셜 타임스 경제담당 논설위원이었던 Tim Harford의 [UNDERCOVER ECONOMIST]중에서 -

획일적인 사상적교육의 지도 아래서 균형에 맞지 않는 재정지출, 예를들면 중장거리유도탄이나 특정 체육시설이나 위락시설에 투자하는 북한이나 모든 젊은이가 공무원시험에 매달리고 비정규직인력등을 천시하는 한국사회는 나쁜 보상을 받는 게임을 하고 있는듯 하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시장경제를 매우 혐오하는 북한은 매우 나쁜 보상을 받았다. 경쟁이라는 이념하에 적재적소에 인력을 배치하는데 실패한 한국도 성장둔화와 인구감소라는 나쁜 보상을 받고 있는듯 하다. 

2016년 8월 20일 토요일

기후,습관,성격

언젠가 국민들 스스로 자신들이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나라는 어디일까 하는 질문에 의외로 방글라데시 국민들이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비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방글라데시 국민들 대다수가 호전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IS와 같은 이슬람교도인 사실을 생각하면 이슬람교도는 모두 어떻다는 획일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문제가 있는듯 하다.

사회의 많은 소집단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분위기를 이끌고 있는 리더의 성격이나 기존 집단의 역사적 성격에 따라서 구성원들 또는 새로 유입된 구성원들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을 느끼는데, 아무래도 문제의 근원을 살펴보면 원인없는 결과는 없는듯 하다.

현재 이슬람이 우세한 지역이 세계에서 가장 혹독한 사막 기후와 놀랄 정도로 일치한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유익할 것이다. 실제로 사우디아라비아, 파키스탄, 수단 등 가장 혹독한 자연환경에서는 가장 엄격한 형태의 이슬람이 번성하며, 인도네시아, 말레이반도, 방글라데시등 좀 더 온화한 환경에서는 그보다 온건한 이슬람이 지배적인것 같다. 

- 미시간 주립대 지리학교수인 Harm de Blij의 [Why Geography Matters] 중에서 -

하름 데 블레이 교수의 저서에서는 기후외에도 이슬람 교리에서 배교자에 대한 가혹한 처벌이나 과거 오스만투르크가 누렸던 영토적, 문화적 영광에 대한 향수적인 감정등이 이슬람테러의 근원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

항상 북한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민생조건인 식량에 대한 결핍을 어떻게 이겨내고 있는지 궁금했는데, 척박한 토양이나 냉대성 기후등으로 전통적으로 작물이 부족한 환경에 익숙한 탓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제강점기전까지 인구의 분포가 적은데다가 곡창지대인 남쪽으로부터의 식량이동이 가능한 사정이 있어서 식량문제에 대한 고민이 없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수탈로 전국이 식량부족에 시달리자 북쪽이 더 혹독한 상황에 직면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려운 식량사정은 계급의식을 더 강화시키고, 호전적인 내면세계를 발전시켰을 거라는 추측도 가능할듯 하다. 식량부족에 오랫동안 노출되어 온 북한이 풍족함에 대한 향수나 기대가 둔감해진걸로 생각되기도 한다.

일제강점기나 분단의 역사가 남겨준 후유증은 습관에 익숙하다는 또 하나의 병리적인 현상을 남겨놓는 것 같아서 마음이 씁쓸하다. 한국사회의 하층민들의 세계에서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은 빈부격차가 심해지면서 결핍에 익숙해져서 꿈을 잃고 공허해져가는 눈빛들인듯 하다. 이념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병리적 현상으로 해석해야 할듯 하다. 

2016년 8월 13일 토요일

지능

지능에 관심이 많았다. 불우한 성장기에 지능이 저하되는 것을 스스로 느꼈다. 그나마 감수성이 있는탓에 그 상태를 인지하고 스스로 대책을 세울 정도로 적극적인 성격은 도움이 되었다. 높은 지능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이 다 곤란을 겪었는데, 타고난 지능이지만 긍정적이고 좋은 환경에 있지 않으면 빛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고, 타고나지 않은 지능도 개발을 해서 빛이 나게 할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던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적극적이고 다양한 노력으로 뇌의 상태를 좋게 만들어주는 일이지 고정적인 뇌의 능력이 있거나 그런 뇌의 능력을 10퍼센트밖에 발휘하지 못한다는 정적(停的)인 개념이 아닌 동적(動的)인 개념으로 생각을 해봐야 한다는 사실이다.

뇌의 활동중 우리가 의식할 수 있는 부분은 미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식하지 않는다고 해서 뇌가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가령, "낮에 레스토랑에 가서 메뉴를 보고, 먹고싶은 것을 주문한다는 단순한 행동만으로도 뇌는 많은 일을 한다. 메뉴를 보면 시각과 관련된 뇌의 부위가 작동하며, 균형있는 식사를 하기 위해 아침에 먹었던 것을 기억해 내려고 하면 기억에 관계된 뇌의 부위가 작동한다. 이러한 것들이 순서에 따라 하나하나 조금씩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굉장한 속도로 각각을 담당하는 부위가 연동하여 작동을 하는 것이다. - 중략 - 무릇 '뇌의 10퍼센트..........'라는 문장 자체가, 실은 근거 없는 내용인 것이다.

 - Chris Ravan외 2인 공저 [Joy of Psychology]중에서 -

10여년전 지능이 저하되자 지능에 관심이 많아졌다. 특히 내가 유발하지 않은 이념이나 북한관련 문제로 시달리자 회생이냐 희생이냐 하는 문제로 선택의 길에 서게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지능이 우수한 이들이 모인 멘사코리아 홈피를 자주 드나들었던 경험이 있다. 좋은 기분의 경험이었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멘사코리아시험방식인 레이븐메트릭스방식의 퍼즐을 장기간 훈련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봤는데, 시간이 없어서 건강도 함께 챙길 수 있는 스포츠지능을 높이는 일에 착수했다. 우선 사격실력을 높이자는 의도로 스케이트를 탔다. 스케이트를 신으면 균형훈련을 많이 했는데,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더구나 운동선수하고는 안드로메다만큼의 거리가 있었던 과거를 뒤집는 좋은 경험이었던 것 같다.

생활현장, 심지어 정치현장까지도 지능과 관련된 관점을 가지고 유심히 살펴보는 습관이 생겼는데, 안일함과 보수성은 지능을 감퇴시킨다는 사실도 알게되었고, 노인분들의 지능은 희망없이 현실에 안주함으로서 정체되거나 후퇴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항상 밝은 노인 분들은 지능의 순발력도 젊은이 못지 않게 좋았는데, 외고집이 있거나 우울한 노인분들은 그 반대인 경우도 볼 수 있었다. 물론 젊은이도 마찬가지인듯 하다. 특히 20대에서 70대까지 각연령층의 분들을 많이 만나며 40대가 큰 분수령이라는 사실도 느낀것 같다.

여태껏 써 온 글의 주제들, 이념, 종교, 심리, 심지어는 유명인들의 상태까지 지능과 연관이 있는듯 하다. 특히 세계 각국의 우경화되는 정치지도자들에 관해서는 지능과 심리적인 관점으로 많이 해석해보곤 하는데, 국가의 희망이 없으면 우경화되거나 좌경화되는 극단적인 이념적 스팩트럼을 띄게 된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는듯 하다. 사실 중용과 균형의 길이라는 것이 많은 정신적인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도 깨닫는데, '극단'이란 지능이 부족하거나 정신에너지가 없는 상태에서 가장 수월하게 문제를 해결할려는 의도로 발휘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생활현장에서 많이 부드러워질려고 노력하는데, 몸과 마음 상태가 안좋으면 너와 내가 모두 극단적으로 변하거나 다투게 되는 것 같다. 특히 근로시간 문제와 관련해서 6시간 근로제를 몇 번 제의한 적이 있는데, 반대로 장시간의 근로시간이 주는 심리와 지능의 역기능에 대해서 심각한 문제를 알게 되었던 것 같다. 

2016년 8월 12일 금요일

이미지정치와 올림픽

이스라엘 정보부 모사드의 부장이었던 다간은 그 분야의 뛰어난 인물이지만 자신과의 싸움에서도 뛰어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신체적인 장애가 있으면서도 자신의 역할을 잘 해내고 사격의 명수로도 알려져 있다. 관련 서적을 보면서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다간은 채식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마음을 좀 더 온건하고 예리하게 세우기 위해 채식위주의 생활을 15년정도 하다보니 뭔가 좀 달라지는 경험을 나도 한 적이 있는듯 하다. 그런데 좀 특별한 것은 만화주인공 심슨의 말처럼 종이에 포장했을때 기름이 묻어 나오는 육류로 만든 음식들은 여전히 입맛을 당기게 한다.그러니 먹고 싶은 것을 참는 노력도 한 일인듯 하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스포츠를 잘 한다는 것은 자신과의 싸움인듯 하다. 그런데 국가나 공동체가 그 싸움의 배후에서 나를 조정한다면 그때부터 타성적인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은 내 자신만의 오버인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조금이라도 권력, 부, 명예등에 대한 야심을 가지게 되면 그걸로 나를 조정하려는 이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대체로 알면서도 묻어들어가는게 인간사의 모습이지만 그렇다는 이야기다.

국가에너지가 상실되거나 저하된 국가는 엘리트체육에 신경을 쓴다. 선수의 싸움과 승리를 전국민의 그것으로 이입시켜 함께 영광을 누리고, 에너지를 상승시켜 역동성을 얻어낼려고 한다. 과거 소련이나 동구권국가들도 그렇지만 러시아의 푸틴대통령이 소치올림픽에서 보여준 스포츠에 대한 지나친 애국적 관심은 국가주의적인 성향이 강하게 국가를 운영하고 있다는 반증인듯 하다. 한 편으로는 러시아의 정치와 경제등 모든 면에서 탄탄한 길을 가지 못한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문제를 좀 더 관찰하고 분석하여 개선하는 대신 국민의 이미지세계를 바꿔놓는 미봉책을 쓰는 문제가 있는듯 하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이미지정치를 잘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공주의자인 레이건대통령은 스포츠를 통한 이미지정치에 힘쓴 당시 공산국가들과 상당히 유사한 정치를 했던것 같다. 결국 이념같은 관념이 정치와 스포츠까지도 추상적인 이미지로 흐려놓은 만행을 경험한듯 하다. 레이건대통령이 영화배우로서의 경험을 이미지정치에 잘 이용했던것 같다. 그런데 이제와서 한반도의 북쪽에서 철 지난 스포츠강국을 위하여 힘쓰고, 한반도의 남쪽에서는 정치인들이 수염을 기르고 서민들의 생활현장을 '바람처럼'떠돌아다니고 있는 것을 보면서 실용성과 합리성은 안드로메다에 보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그게 다 '이념'때문인듯 하다. 추상적인 사고의 습관은 성조기처럼 영원하면 안되는듯 하다.

푸틴대통령이 유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거나 총으로 호랑이를 사냥한 장면을 보여주는 경우가 있는데, 그 이면에는 '나는 강하다. 그러니 국민은 나를 따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듯 하다. 거기까지면 좋지만 더 심하면 "나는 위협적이다. 그러니 국민은 까불지 마라."까지 가면 문제가 있는듯 하다.  

사격을 하면서도 간혹 느꼈지만 건강이 매우 안좋은 시절에  저렴한 비용을 들여 목검 한자루와 무술에 관련된 책을 몇권 보면서 잠간 몰입을 한 적이 있었는데, 보는 너와 하는  내가 불편해지는 것 같아서 스케이트와 수영등의 종목으로 얼른 바꾼적이 있었다. 어떤 무술인이 그렇게 숨어서 하느냐고 시비를 걸기에(중국영화에서 처럼 자웅/雌雄을 가리자고 할까봐 엄청 당황했다.) 관점이 비숫한 사람끼리 만나는 법이라고 반론하고 검도 연습을 그만두었던 기억도 있다. 그러니 사격이나 무술을 할려면 일반인보다 선량함과 부드러움을 훨씬 더 갖추어야지 성공적인 이미지관리가 된다는 생각도 해본다.

평화로운 이미지를 보는 것이 가장 행복할것 같다. 

2016년 8월 10일 수요일

올림픽정신,스포츠정신

어제 올림픽과 사격관련글을 썼다가 삭제했다. 내용이 매우 급진적이었던 같다. 하지만 부드럽게 표현하지 못한건 문제가 있으나 본심이다. 스포츠는 자신과의 싸움이 되는 것이 가장 좋은듯 하다. 관중을 지나치게 의식하게 되면 경마장이나 경륜장에서 경기하는 처지가 되는듯 하다. 사행성을 띄게 되고 부자연스러워진다. 특히 스포츠강국을 꿈꾸는 국가가 적극적으로 키워낸 엘리트체육인일 경우는 금메달 못딴 죄로 평생을 '자고 나면 우울해지는' 인생이 될 수 있는듯 하다. 북한의 최용해 부위원장이 역도선수가 금메달 획득에 실패하자 역도감독에게 화를 내는 모습이 포착되었는데, 철 지난 스포츠강국에 대한 집착이 보이는듯 하다. 오래전 동독이 올림픽에서 2위를 할 때 어린 나이에도 선수들이 국가에 의해서 '사육'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유도 선수가 금메달을 따고 나서 어머니게 감사드린다고 말하고 나서 대통령각하께 감사드린다고 할때는 그냥 웃음이 나왔다. 후문에 의하면 대통령께 감사드린다는 말을 먼저 안했다고 끌려가서 맞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믿거나 말거나 그럴 수 도 있었던 때였다.

아주 늦은 나이에 혼란한 마음때문에 스포츠에 뛰어들었는데, 뜻밖에 운동신경이 있는듯 했다. 더 기분좋은 것은 올림픽에서 자신의 기록갱신만으로 기뻐하는 스케이트의 안나 로키타 선수나 개헤엄으로 올림픽에 출전하여 빠져죽지 않기 위해 완영을 한 모우삼바니 선수나 스케이트 실력이 없어 비틀대면서 500미터 스케이트코스를 완주한  카타르 선수, 넘어지고서도 다시 일어나서 완주했던 한국스케이트선수등은 올림픽정신에 대한 이해를 하게 만들기도 한다.

꽤 오래전 사격대회에 나갔다. 목표는 지옥훈련으로 부동심을 만들면서 참가할때마다 10점씩을 높인다는 계획이 있었다. 그리고 다른 운동을 녹초가 될때까지 했다. 연습장에서 표적지를 본 세계선수권금메달리스트가 깜짝 놀랐다. 600점 만점에 578(아마 운좋으면 국제대회입상도 가능한)을 쐈던것 같다. 겸손하게 잘 쏜 표적지만 모았다고 말했지만 마음속에서 쥐약같은 '야심'이 불타는 건 어쩔 수 없는것 같았다.  그러나 멘탈 스포츠는 연습과 실전이 매우 다르다. 진종오선수가 나팔 소리에 놀랐던 것 처럼 나중에 사격대회에 나갔는데 심판분들이 총알을 안넣고 쐈다는 이의를 제기해서 리듬이 깨졌다고 생각하고 기권을 하고 나왔다. 대회시작전에 창백한 얼굴로 묵상을 하고 있는 진종오선수는 인상에 남았다. 역시 세계 최고 였다.

22구경 권총을 즐겨쏘는 실탄사격장에 가면 실탄이 없다고 해서 연습을 못하고 돌아오곤 했는데 한참 신변이 억압받을때라서 그런지 높은데서 총을 못잡도록 지시가 내려왔나 하는 의구심도 있었다. 그러나 세월은 흐르고 모두가 변하는듯 하다. 시간앞에서는 야심도 권력도 무상해지는듯 하다. 그냥 세월 지나서 목적있는 외국여행겸해서 국제대회에 참가를 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생각해보면 삶 전체가 스포츠 경기장같다. 중요한건 타인과의 경쟁이 아닌 자신과의 경쟁이다. 고통과 굴욕감은 견디고 나면 부동심(不動心)을 만드는듯 하다. 운동경기장은 그 마음을 표현하기 좋은것 같다.  

2016년 8월 9일 화요일

터키랩소디

말이 좋아 광시곡(狂詩曲/rhapsody)이지 대규모집단의 광기는 광기라고 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에르도안을 지지하는 전국적으로 100만명이 넘는 인파가 집회에 참석을 했다고 한다. '우리에게 죽음을 명하면 바로 시행하겠다.''에르도안 당신은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적힌 국기가 휘날린다고 한다. 강자에게 굴복하는 마음은 묘하게 왜곡되어 숭배하는 마음이 되는듯 하다. 노예가 되었다는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주인을 따라서 다른 노예를 핍박하는 못난 행태를 많이 보았는데, 터키국민은 그 마음의 정점에 서있는것 같다. 에르도안정부의 무차별체포에 공포감을 느끼면서도 정부주도 집회에 참석을 하는 애틋함이 있는듯 하다.

종교는 있으되 철학이 없던 터키사회가 이룬 쾌거(?)다. 저번에도 서술한 바 있지만 시작부터 북한사회와 비숫한 길을 걷는듯 하다. 러시아정부는 터키가 친러적인 성향을 갖을거라는 생각을 하면 잘못 생각한것 같다. 종교나 이념같은 관념으로 만들어진 결속력은 내적으로만 응축되지 외부로 발산되지는 않을듯 하다. 과거 사회주의라는 이념의 맹주국가였던 소련과는 달리 러시아는 이슬람교의 결속력을 도구삼아 만들어진 터키와 어떤 교류점도 없을 것같다. 세계역사에 새로운 골치덩어리가 등장을 한듯 하다.   

2016년 8월 8일 월요일

서민코스푸레

한 부잣집 젊은이가 하버드대학에 합격했다. 부모는 교육상 등록금은 대줄 수 없으니 스스로 해결하라고 말했다. 젊은이는 고민끝에 흑인들에게 주는 장학금을 받기로 했다. 그리고 화학약품을 사용해 백인을 흑인으로 코스푸레하는데 성공했다. 입학을 하고나서 다른 흑인처럼 농구를 잘 하는 줄 알고 농구동아리 여기저기서 스카우트제의가 들어왔다. 그러나 막상 흑인치고는 그렇게 농구를 못하는 학생도 없다는 비난을 들었다. 흑인 애인도 사귀고 흑인과 동일시하며 학교를 잘 다니다가 결국 들켰다. 학교징계위원회에 회부되었는데, 급박한 상황을 하버드 로스쿨에 다니는 백인인 단짝친구의 변론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징계위원회의 절차가 긍정적으로 끝맺음하면서 흑인교수인 징계위원장이 질문했다. "흑인으로서의 삶을 이해했는가?" 젊은이가 대답했다. "아니오 원래 나는 흑인이 아니었으니까요."

아주 오래전 학창시절에 본 소울맨이라는 영화의 한장면이 참으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그러면서 가끔 선거때가 되면 재래시장으로 또는 삶의 현장으로 바람처럼 떠돌아다니면서 서민코스푸레를 하는 정치인들을 보면서 그 영화의 마지막 대사를 생각했다. 서민의 삶을 진정한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의 코스푸레는 매우 회화화되어 선거결과에 역기능을 보였을것 같다. 솔직히 나는 서민의 삶이 고통스러워 이런 서민의 세계를 만든 근원을 분석하고 있지만 서민이 아닌 삶을 살아가면서 고통스러운 서민의 삶을 경험하기란 불가능한 일인듯 하다. 요즘 한국과 미국에서 꾀나 끈질기게 서민코스푸레들을 한다. 솔직히 보기싫다. 차라리 깔끔하게 면도하고 정리된 태도로 생각하는 정치인의 코스푸레를 하는게 표를 얻는데 좋을듯 하다. 

2016년 8월 6일 토요일

트럼프

트럼프는 굉장히 거칠다. 말 실수를 아주 많이한다. 아마 대중적인 '멋'을 발휘했다고 자화자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미국사회가 대중문화에 깊이 빠져 이성을 잃고 있는것을 간파했는지도 모른다. 흔히 정치인들은 대중사회속의 대중의 분별없는 판단을 잘 이용하는 습성이 있는듯 하다. 때로는 그것을 정치적 능력이라고 착각을 한다. 그것이 통하는 사회는 골병이 든 사회지만 의무감이 없고 무책임한 정치인은 개인의 정권욕을 충족시킬 수 있는 최고의 기회로 생각을 한다.

트럼프가 미국의 '근본가치'를 흔든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미국은 썩어도 준치다. 천박하게 망가지는듯 한 대중이 있으면서도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의 지붕맡에서만 그렇다. 미국의 3퍼센트는 책임지고 사회를 이끌어간다. 노력하면 댓가가 주어지는 사회라는 인식은 아직 변하지 않은듯 하다. 망가진 대중사회인듯 하면서 언젠가는 바로 서게할 엘리트문화의 보호를 받고 있는듯 하다. 그런데 트럼프는 그것마져 망가뜨린다. 대중사회의 엔트로피현상을 저지하는 다른 미국엘리트들과는 달리 앞장서서 엔트로피현상을 이끈다.

문화보수주의자들이 대중문화의 악영향에 대해 우려하는 것은 지당한 일이다. 대중문화는 그것을 부추기는 광고와 더불어 소비에 대한 열망을 자극하고, 정치에 대한 소극적태도를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힘, 즉 족쇄풀린 시장경제의 파괴적인 힘을 놓치고 있다. 

- MICHAEL J. SANDEL [WHY MORALITY] 중에서 -

보수주의란 바로 이럴때 의미가 있는듯 하다. 사회안정화노력을 하는 보수주의와 정신없는 국민의 혼란한 머리속을 비집고 들어와 사회의 근본가치를 흔들어놓는 보수주의는 다른듯 하다. 다행히 트럼프의 '막말'은 점차 미국민들의 싫증을 불러 일으키는듯 하다. 빨리 일어서려는 자 빨리 망하고 입으로 흥한자 입으로 망하는듯 하다. 트럼프는 미국사회를 시험하는듯 하다. 

2016년 8월 1일 월요일

북한의 난수방송

북한이 16년만에 난수방송을 재개했다고 한다. 공작원들에게 임무를 지령하거나 귀환로를 유도하는 난수방송은 과거 한국이나 북한이 다 함께 사용하던 복고적인 공작암호방식이었다고 한다. 북한에서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다가 북한군에게 발각되어 쫓기던 우리측 공작원들도 난수방송으로 귀환로를 열어 무사히 귀환했다고 한다. 나의 부친은 난수표를 파란 천으로 돌돌 말아서 귀속에 넣고 다녔다는 이야기를 얼핏들은 바가 있는데 어린 아들이 영악하게 그걸 기억할 줄 알았다면 부친은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한국내에서 암약하는 북한 공작원은 단파로 방송하는 난수방송을 청취하며 받아적었기 때문에 어두운데서 악마같은 얼굴을 하고 라디오를 들으며 뭔가를 받아적는 아저씨는 반드시 신고하여 500만원 상금을 타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 한국측에서 쉽게 해석할 수 있는 복고풍이된 난수방송을 하는데 대해서 한국측 전문가들은 여러가지 의견을 내놓고 있는듯 하다. 심지어는 김일성 시대의 향수를 자극하기 위해서라는 낭만적인 해석도 나오고 있어서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매우 좋은 나라 국민의 관점인것 같다. 또한 우리측을 분열 시키고 긴장감을 조성시키기 위한 의도라는 분석도 있는데, 국민대다수가 알고 긴장하며 분열해야 되는데, 난수표가 뭔지도 모르는 국민이 99빠센트라서 타당하지 않은 내용인듯 하다.

요즘 갑자기 북한 엘리트층의 탈북이 많아진것과 난수방송은 밀접한 관련이 있는것 같다. 심지어 북한군 장성급인사의 탈북도 알려지고 있는데, 북한군 장성이나 외국주재 북한공관원들이 탈북을 했다면 난수방송을 알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 외에 실재로 훗날 북한의 난수방송을 들어야 할 사람이 탈북했을런지도 모른다. 물론 그 사람은 탈북자에서 대남공작원으로 신분이 변화할 사람이라는 의미다.

북한군 사단내의 한 대대씩 정찰대라는 남파공작부대를 운영하고 있는 것을 봐서 북한군 장성급은 난수표의 정체에 대해서 잘 알것이고, 재외공관원들은 비공식적인 공작원역할을 하는게 세계적으로 용인되고 있기 때문에 역시 난수표의 의미를 잘 알것이다.보통 어느나라 재외공관원이든지 화이트요원이나 그레이요원정도의 정보활동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은 난수방송을 함으로써 탈북한 엘리트들을 목표로 고정간첩에게 암살 지령을 내릴수도 있겠고 - 과거에 김정일 위원장의 처조카 이한영씨가 티브이방송에 나와 얼굴이 알려지자 고정간첩의 총격으로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암살지령이 아니더라도 탈북의 위험이 있는 엘리트들에게 난수방송을 시사함으로써(즉 흘린다는 이야기) 엘리트들의 탈북의도를 좌절시킬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종합해서 요약하면 난수방송의 목표는 탈북할 의도가 있거나 탈북한 북한 엘리트들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