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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28일 토요일

동북아의 위기와 통일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소시민으로서 답답하고 힘든 일이 있다면 사회의 상부구조부터 하부구조까지 서열과 위계질서같은 수직관계가 지배한다는 점인것 같다. 한국뿐만 아니라 서양의 시민혁명과 같은 평등한 사회를 위한 강렬한 변화를 겪어보지 못한 동양사회가 앓고 있는 병적인 문제인듯 하다. 상부와 하부, 위와 아래, 변동되지 않는 계층구조가 동양삼국(한반도, 중국,일본)인들의  의식구조를 지배함으로서 성취감과 고민의 척도로서 작용하는듯 하다.

지휘나 통솔같은 것이 전혀 필요없는 일터에서도 '윗 자리'에 대한 열망과 저항감으로 고민하는데 시간을 보내는 옛날 사람들을 보면서 수직관계때문에 생기는 사회병리현상이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지 않은 나이에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힘든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여러방면으로 노력하는 것을 보는데, 가만히 살펴보면 그 이면에는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압박을 받는 나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허망한 몸부림으로 보인다. 어느 날 어떤 큰 기업의 CEO와 임원들이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좋아서 하는 일과 관련된 생명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한국사회의 중산층으로 살아가는 지인의 가장 큰 고민은 윗사람과 관련되어 있으며 극복해야 할 유일한 문제인듯 하다.

동양 삼국이 상층부의 부패현상을 보이고, 정치와 경제부문에서 모두 정체가 되기 시작하는듯 하는데, 창조성이 발현되지 않는 수직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는듯 하다. 내 자신은 글을 쓰던 책을 읽던 동양서적을 인용하거나 읽는 것조차도 회피하는 버릇이 있는데, 이유는 그 가운데 항상 왕과 백성, 왕과 신하, 권력과 속박, 지략과 모사, 주군, 장악,인정받음등의 단어들이 정신세계를 병들게 하고 있음이 느껴지기 때문인듯 하다.

얼마전 구글 전회장인 에릭 슈미트(Eric schmidt)의 저서인 [How Google Works]의 표지에 "계급이 아니라 관계를 형성하라"라는 구절을 보았는데, 강력한 한 마디인듯 하다. 미국의 한 기업의 경제규모가 한 국가의 경제규모를 넘어선다면 그 이유는 바로 이런 열린 의식이 바탕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사회자체가 수직관계에 시달리는 한국과 북한은 모두 통일에 관한 관점의 바탕에 흡수통일, 지배, 기득권, 체제수호, 종북등의 어두운 단어들이 문제의 본질을 어지럽히는 현상을 보이는듯 하다. 사실은 통일이란 단어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닌듯 하다. 한국과 북한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미래를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양국의 정치적 안정은 경제협력을 이끌어 내어 경제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이며, 양국의 협력은 기술과 자본이 있는 한국과 노동력과 자원이 있는 북한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구조로 상승효과를 일으킬 것이다. 한국과 북한이 통일이 되던 말던 그건 의식적인 요식행위일 수도 있는듯 하다. 서로 안정되고 평화로운 협력관계만 진행시켜도 서로는 서로에게 적어도 지금보다는 많은 도움이 될 것은 확실한듯 하다.

현대사회는 영토, 민족, 국가같은 경계성 단어들이 점점 흐려지는 사회인듯 하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점차 그런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는듯 하다. 그러나 동북아에서는 그런 경계성영역을 더욱 확고히 구축할려고 노력함으로써 스스로 자멸을 자초하고 있는듯 하다. 일본의 극우정치성향은 선진국으로서의 위상만큼이나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듯 하다. 내 추측으로는 일본의 극우적 태도는 장기적으로 일본에 나쁜 영향을 주게 될듯 하다. 국가의 구성원인 개인은 단기적 상황을 옹호하고 지원하기도 하지만 보이지 않는 장기적 상황을 끌고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구조는 냉정한 판단과 냉정한 결과를 보여주는듯 하다. 그래서 북한과 같은 나라는 이념에 속아 온듯 하다. 당장 이렇게 하면 좋은 일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만 사회실험의 결과는 장기적으로 나타나고 냉혹하고 참혹하다.

너무 장기적으로 진행되어 온 부정적인 결과는 되돌리기도 힘든 일인듯 하다. 정치지도자 한 사람만 망가진 사건이 아니고 사회구조, 경제구조, 정치구조, 그리고 그것들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 국가 구성원들의 의식구조가 서로 얽혀서 무너진 탓인듯 하다. 현재는 과거와 다르고 현재 할 일과 과거에 한 일도 달라야 한다.  

2015년 3월 27일 금요일

잘못된 상상력과 성숙한 인격

언젠가 특별한 상상력을 가진 사람과 오랫동안 함께 일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 만났을때 동료들을 카리스마로 휘어잡고,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변덕과 돌발적인 공격성으로 주변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평화로운 심성의 동료들은 싸우기 싫어서 회피하거나 복종하거나 하는, 뚜렷이 양면적인 대응을 하고 있었다. 천천히 과거사를 유도해서 들어보고는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정신적인 문제임을 인지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끊임없이 돌발적인 격정을 가라앉혀주며 일을 한 적이 있었다. 아쉬운 것 없이 성장하고, 연극 영화같은 예술적 기질이 있어서 그 길로 갈뻔했다는 과거사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 상상력과 현실, 의지력이 조화가 되지 못한 상태가 교정되지 못하는것 같았다.

사담(사담후세인 전 이라크 통치자)의 다중적 성격 가운데 폭력에 대한 집착은 가장 무서운 부분이었다. 그는 고문당하다가 처형되는 사람들의 비디오를 몇 시간씩 감상할 정도로 고통이 발생하는 과정에 집착을 가지고 즐겼다. 고문의 방법은 다양하고도 잔인했다. 산 채로 파묻기도 하고 긴 못을 희생자의 귀에서 머리로 박아 넣는 방식도 사용되었다. 교수형으로 빨리 죽이고 싶지 않은 희생자는 산 채로 사막에 파묻혔다.

고문에 대한 사담의 집착은 10대 초반의 아들들에게도 이어졌다. 그의 두 아들 우다이와 쿠사이는 고문과 처형을 보기 위해 매주 바그다드 감옥을 방문했다. 이런 잔인한 성향의 사담은 친구나 친척 그리고 두 명의 사위마저 처형토록 지시를 내린 후 공개적으로 울었다. 1979년 권력 장악 후 바트 당원을 숙청할 때는 연단에 서서 공개적으로 울었다. 한 사람씩 처형될 때마다 회의실은 그의 흐느낌으로 가득 찼고 연단의 마이크 때문에 더 크게 들렸다. 기이하고도 무시무시한 연출이었다. 

- 고든 토마스 [GIDEON'S SPIES] -

기이한 상상력과 그것들을 바쳐주는 권력의 앙상블로 발생한 장면이다. 이런 비숫한 상황들은 2차대전때 유태인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전략적인 실수를 많이 했던 히틀러가 화가의 전력이 있다는 점, 나름 한 국가의 개척자로서 역할을 했던 김일성에 비해서 현실 대응능력이 떨어져 고난의 행군시절을 겪은 북한의 이전 지도자 김정일이 영화광이였다는 사실등은 잘못된 상상력이 확신과 권력을 만나게 되면 아주 크고 아주 나쁜 파장이 인다는 예를 보여주고 있는듯 하다. 한국의 이전 정부때도 냉철하지 못한 종교적 상상력과 사고가 정세를 지배했던것 같다. 이념이나 종교가 나쁘다는 의미는 아닐뿐더러 그런것과는 별개의 문제인듯 하다. 

이념이나 종교와 같은 관념이 가져다 주는 부작용(긍정적인 작용이 아니라 부작용이다.)을 무척 싫어하게 된 이유중 하나는 그런 관념들이 가져다 주는 비젼(VISION)의 문제점을 깨달은 바가 있었기 때문인듯 하다.

심리학자 올포트는 성숙된 퍼스낼리티(personality)란 다음과 같은 점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1.자신의 충동이나 쾌락을 뛰어넘어 자기 외부의 가족, 친구, 일, 정치활동 등 추상적 가치로 자기를 확대시킨다 
2.타인과 공감하여 타인의 감정을 잘 이해하고 타인의 약점이나 단점에 너그럽다.
3.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어떤 욕구불만의 상태도 견딘다.
4.적절하고 현실적인 과제를 갖고 인생을 의미있게 산다.
5.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6.장기목표를 갖고 미래지향적이다.

의지력이 없는 기대는 스스로를 사기치는듯 하다. 이념이나 종교가 보여주는 비젼이란 자기 성찰과 노력이란 바탕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서는 그것들이 가져다 주는 과실에 대한 기대만 있는듯 하다. 물론 기본적으로 학교교육이나 사회교육이 여러가지로 미비한 면이 있는 탓이기도 한 것 같다. 사담 후세인이 10대초반의 아들들을 고문의 현장으로 인도한 것과 같은 가정교육의 부재이기도 한듯 하다.

국가경영의 목표인 잘먹고 잘사는 문제는 잘먹거나 잘사는 문제 즉 양자 중 하나를 택일하는 문제가 아닌듯 하다. OR의 관계가 아니라 둘 다 병행해서 추구해야 하는 AND의 관계로 인식해야 할 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경제성장과 같은 물질적 가치나 민주주의 같은 정신적 가치들을 택일적 관계로만 생각하는 이상한 발상들이 나온다. 

2015년 3월 24일 화요일

리콴유와 마키아벨리


싱가포르 수상인 리콴유가 91세의 나이로 타개했다. 등소평처럼 어려운 여건에서 실용주의 노선을 걷기위해서 지적(知的)트레이닝을 많이 한 탓인지 꽤나 장수했다는 생각이 든다. 자유와 경제성장이 충돌할 수 있는 신생국의 정치적가치를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바탕으로 경제성장의 편에서 싱가포르를 이끌어 왔다고 한다.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신생국 개발독재의 바탕이 되는 관점을 많이 도와주는것 같다.


사상은 관점을 만드는듯 하다. 인간을 악하다고 규명했을때부터 악한 인간이 되는듯 하다. 성악설과 성선설은 나와같은 일반시민들 조차도 끊임없이 자문(自問)해보는 화두인듯 하다. 어떻게든지 사람은 모두가 악하다거나 모두가 선하다거나 하는 편향적인 관점을 지닐려고 노력하는듯 하다. 그러나 뜻밖에 사람은 다양하고 악한 사람이 좀 더 다루기 힘들기 때문에 마키아벨리는 군주로 하여금 여우와 사자의 모습을 지녀야 한다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경험해 보건데, 선한 사람 100인보다 악한 사람 1인때문에 생각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 많은듯 하다. 군주나 정치지도자들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 가는 길을 방해하는 소수의 사람들때문에 인간이 악하다는 착시현상이 생겨나는듯 하다. 더구나 가는 길을 방해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악한 사람으로 보인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런것 같다.  인간을 혐오하는 사람들에게서 좋지 않은 모습을 보는 경우가 많은듯 한데, 자신의 모습이 타인을 보는 관점으로 투사된 것인지도 모른다.

리콴유수상이 마키아벨리즘을 신봉한 이유는 싱가포르발전을 위한 수단이었지 그 자체가 목적이거나 롤모델정도로 목적하는 신념과 일체된 관점은 아닌듯 하다. 누군가가 지도자가 되는게 꿈이라고 하다가 지도자가 되는 것과 당면한 국가나 민족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지도자가 되는 것의 차이를 생각해야 하는 것과 비숫한 문제인듯 하다.

2015년 3월 20일 금요일

교육에 대한 책임주체 / 노암 촘스키(Noam Chomsky)


일터에서 한 노인이 좀 험한 군대생활을 한 경력으로 폭군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에너지를 얻어내기 위해서 동료들을 모두 '비애국자'로 매도하며 괴롭히고 있었다. 고민끝에 내 자신이 더 심한 애국자로 코스푸레 하면서 노인의 폭력성을 겨우 잠재울 수 있었다.

학창시절 항상 위축되어 살던 친구가 이념이 불순해 보인다는 이유로 나를 포도청에 알렸던 사건이 생각났다. 좀 뜬금없는 소리를 잘 하던 내 탓이려니 하고 친구 원망은 하지 않았다.  자신의 에너지를 얻어내기 위해서 쉴새없이 타인의 결점을 찾아내야 하는 교육을 받은 친구에게 연민의 감정이 들기도 했던것 같다. 자신이 노동자와 민주주의를 위해 애쓰는 투사라는 이유로 그렇지 못한 나를 미워했던 친구는 타인의 도움으로 노동자와 전혀 격이 다른 부유한 학자의 생활을 하고 있는것도 보았다.     

MIT의 석좌교수인 노암 촘스키(Noam Chomsky 1928 - )는 [Noam Chomsky on MisEducation]이란 저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민주적 교육을 시행하고 있는가? 민주적 교육은 커녕, 가르침이라는 지적 영역의 가치를 폄하시키면서 교사를 교묘하게 길들이는 식민교육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식민교육의 주된 목표는 교사와 학생을 일종의 기계로 만들어 복잡한 절차와 기법으로 뒤엉킨 미로속을 아무 생각없이 걷도록 만드는 데 있다. 따라서 미국의 교육은 창조적 생각과 비판적 사고를 고취하는 시스템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민주적 학교라고 떠벌리는 곳이 기껏해야 도구밖에 될 수 없는 기술을 가르쳐주는 공장으로 전락해서, 세상을 비판적으로 읽고 현상뒤에 감추어진 관련 동기를 파악하게 해주는 창조적 사고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대체로 이처럼 도구주의적으로 접근된 교육은 객관식으로 치러지는 무의미하고 몰지각한 연습문제 그리고 우리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종잡을 수 없는 정신분석학적 개념들을 흉내내어 무슨 듯인지 알 수 없는 고매한 글을 써대는 교사들로 특징지워진다.  

교육부가 규격화된 테스트를 통해서 커리큘럼에 대한 감독권을 거듭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이처럼 얼빠진 교육법은 더욱 힘을 얻어가는 반면에 자아와 공공생활의 관계 그리고 광범위한 시민의 요구에 부응하는 사회적 책임에 중점을 두는 교육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 

촘스키의 말은 맞는듯 하다. 그러나 항상 객관적으로 생각할려고 애쓰고, 현실에서 이념문제나 교육의 후유증 문제를 고려하면 문제는 시스템이나 이념의 문제라기보다 인간의 도덕적 성향이나 협동 또는 공존과 관련된, 그래서 좀 더 부드럽고 내면적인 부분을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식민교육'이라고 표현하거나 '시스템'의 문제라고 표현하면 근본적으로 '국민의 통합성'을 저해하는 결론이 벌어질뿐더러 문제의 본질을 왜곡할 수 있는듯 하다.  

미국사회가 좀 더 다양하고 개방적임을 생각하면 식민교육을 하는 주체가 누군지, 얼빠진 교육은 어떤 입법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지고, 그 입법자들은 누가 구성하는지 근본적으로 생각할 과제가 주어지는듯 하다. 심지어는 노암 촘스키 조차도 그런 교육시스템의 수혜자(受惠者)가 아닌지 하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촘스키 조차도 뭔가 '구분짓는다는' 덫에 걸린 이념논쟁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국민교육은 참 중요한듯 하다. 그 교육의 대상은 권력, 재산, 학식이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가릴 것이 못 되는듯 하다. 심지어는 미국과 같이 시민에 의해서 구성된 정부를 탓할 것도 아닌듯 하다. 생각보다 문제는 훨씬 인간적이고 본질적인데서 찾아봐야 할 듯 하다.   

2015년 3월 13일 금요일

목적있는 지략 / 모사드


중학교 시절 외국잡지(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이름없는 죄수 번호없는 감방]이라는 장편기사가 실린 것을 보았다. 하꼬보 띠베르만이라는 유태인 사업가가 아르헨티나 군부에 체포되어 고문이 포함된 가혹한 심문을 받고 독방에 갇혔다가 석방된 이야기였는데,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안 나고 심문관이 하꼬보 띠베르만에게 '시온주의자'인지 정체성을 다그치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에 남는다.

아마 뭔지는 모르지만 '시온주의자'라는게 아르헨티나 정부에 위협이 될만한 엄청난 이데올로기쯤 되는가 하는 생각을 했던것 같다. 이미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은 절대 안된다는 이념적 선택의 방향이 정해져 있던 '그 시절 그 추억'을 생각하면 '주의자'라는 것의 위험성에 대해서 예민한 생각을 했던것은 당연한듯 하다.

요즘 미국중앙정보부(CIA)나 일본의 정보기관들이 IS인질사건을 계기로 좀 더 능력있는 정보기관으로의 변화를 서두르고 있는듯 하다. 일본은 조정능력을 구실로 좀 더 집권적인 형태로 변화를 시도할려고 노력하는 반면 미국중앙정보부는 고질적인 관료주의 스타일을 벗어나고, 사이버대응능력을 강화시키고자 노력하는듯 하다.

한국은 지난 정부에 있었던 정보기관의 목적을 잊어버린 정치개입사건이나 이념적인 대응방식같은 문제점이 해결 안되는 고난을 치루는듯 하다. 사실 정보기관의 능력없는 정치적 수장들이 첩보를 모아서 정보를 생산해야 하는 원칙을 어기고 이념에 맞는 첩보만 포획하는 역기능을 하는데 앞장서는 경우가 있는듯 한데, 한국의 국정원이 그런 전형적인 경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이념적인 수장 관료적인 조직]이라면 금상첨화가 아닌 설상가상의 상태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관한 책들을 읽다가 처음엔 다이나믹한 모사드의 애국심과 민족주의적인 '과격함'에 놀란적이 있는데, 애국심과 민족주의적이라는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관점보다는 이스라엘의 '생존문제'와 관련있다는 생각으로 모사드를 보는 관점이 변해가고 있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스라엘 국민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은 이스라엘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듯 하다.모사드의 정보활동을 위해서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유태인들을 자유롭게 휴민트로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는 점은 분단된 나라에서 같은 생김새에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하는 한국과 비교해서 부러운 면이 있는듯 하다.

그런 모사드가 처음엔 "너는 전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지략이 많음에 있느니라." (잠24:6)라는 좌우명을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니라."(잠11:14)로 바꾸더니 이제는 요원을 공개채용을 시작한다고 하여 점점 유연한 조직으로 변신을 시도하고 있는듯 하다.

사실 모사드는 다른 국가의 정보기관들과는 달리 지나간 정보활동들의 극적인 장면들을 여러가지 서적(기드온의 스파이, 모사드등)을 통하여 모두 공개하고 있는데,이는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과 국가의 생존과 자신들의 활동을 동일시 하는 모사드 요원들의 애국심,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언제든지 지나간 사건, 조직형태, 활동방향을 꼬리자르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변신에 능한 유연성에 대한 자신감을 표현하는듯 하다.

2015년 3월 6일 금요일

상대성과 전체성의 지략(知略) / 모택동


한반도에서는 이념이 지략(知略)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지만 중국은 이념조차 시기적절하게 변신시키는 능력이 있는듯 하다.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 북한의 정치스타일이나 한국의 심화되는 빈부격차를 생각하면 국가와 사회, 기업, 개인에게까지 대의적 경영철학이 빈곤함을 탓하지 않을 수 없는듯 하다.

특히 이번에 발생한 미국대사 테러사건을 보면서 개인의 충동적 테러도 아니고, 뭔가 '주의'라는 어설픈 이념이 엮여있는듯 하여 그 알량함에 민망한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사회의 '지엽적 지식인들'의 현실을 보는듯 하였다.

서점에서 잠깐 빼내 본 황금중국(강효백 지음)이란 책의 표지에서 이런 글이 보였다.

군사상의 전쟁과 상경계의 경쟁이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다. 상경계에서는 적을 궁지의 절망 상태로 빠져들게 하든지 씨를 말려서는 안 된다. 지혜로운 기업가는 라이벌의 목숨을 살려둔다. 경쟁이긴 경쟁이되 유한 경쟁이어야 할 것이다.

추구하고 목적하는 것들을 대하는 본질적인 자세를 잘  나타내주고 있는듯 하다. 하물며 이를 악물고 군사상의 전쟁과 같은 내부경쟁에 진력하고 있는 한반도에서라면 생각해봐야 할 내용인듯 하다.

혁명조급증에 걸린 동지들은 부당하게도 혁명의 주관적 역량을 과대평가하고 반혁명역량을 과소평가 한다. 이러한 평가는 대부분이 주관주의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것은 틀림없이 맹동주의의 길로 나아가는 결과를 가져 올 것이다.

지금 중국혁명의 주관적 역량은 비록 약하지만, 중국의 낙후하고 취약한 사회, 경제적 조직에 기초하고 있는 반동적 지배계층의 일체 조직(정권, 무장력, 정당등)도 역시 약하다. 이로 보아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즉 지금 서구 나라들의 혁명의 주관적 역량이 비록 중국혁명의 주관적 역량보다 좀 강할지는 모르지만 서구 나라들의 반동적 지배계층의 역량이 중국의 반동적 지배계층의 역량보다 몇 배나 강대하기 때문에 서구 나라들에서는 여전히 혁명이 즉시 폭발할 수 없는 상황이고, 현재 중국혁명의 주관적 역량은 비록 약하지만 반혁명 역량도 상대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중국혁명은 서구보다 더 빨리 고조될 것이다. 

- 모택동 평전 -

모택동이 일으킨 공산혁명이 옳고 그르다는 규범적인 해석을 떠나서 어쨌던 성공한 혁명지도자의 통찰력이 보이는 대목인듯 하다. 맹목적이지 않고 사물을 상대적이고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혜안(慧眼)이 있은듯 하다. 결국 혁명을 성공시키고 다시 모택동 자신이 '맹동적인' 우안(愚眼)으로 회귀하고 혁명정신을 보존하고 목적을 잊지 않았던 등소평이 경제적 자본주의를 인정함으로써 사실상 혁명정신을 '완성'시킨듯 하다.

국가와 사회를 좀 더 장기적인 관점으로 융합적이고 전체적이며 상대적인 관점으로 볼 줄 아는 능력이 한반도에서는 절실히 필요한듯 하다는 생각이 든다. 서로 서로가 생각보다 꽤 많이 연결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