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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20일 금요일

교육에 대한 책임주체 / 노암 촘스키(Noam Chomsky)


일터에서 한 노인이 좀 험한 군대생활을 한 경력으로 폭군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에너지를 얻어내기 위해서 동료들을 모두 '비애국자'로 매도하며 괴롭히고 있었다. 고민끝에 내 자신이 더 심한 애국자로 코스푸레 하면서 노인의 폭력성을 겨우 잠재울 수 있었다.

학창시절 항상 위축되어 살던 친구가 이념이 불순해 보인다는 이유로 나를 포도청에 알렸던 사건이 생각났다. 좀 뜬금없는 소리를 잘 하던 내 탓이려니 하고 친구 원망은 하지 않았다.  자신의 에너지를 얻어내기 위해서 쉴새없이 타인의 결점을 찾아내야 하는 교육을 받은 친구에게 연민의 감정이 들기도 했던것 같다. 자신이 노동자와 민주주의를 위해 애쓰는 투사라는 이유로 그렇지 못한 나를 미워했던 친구는 타인의 도움으로 노동자와 전혀 격이 다른 부유한 학자의 생활을 하고 있는것도 보았다.     

MIT의 석좌교수인 노암 촘스키(Noam Chomsky 1928 - )는 [Noam Chomsky on MisEducation]이란 저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민주적 교육을 시행하고 있는가? 민주적 교육은 커녕, 가르침이라는 지적 영역의 가치를 폄하시키면서 교사를 교묘하게 길들이는 식민교육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식민교육의 주된 목표는 교사와 학생을 일종의 기계로 만들어 복잡한 절차와 기법으로 뒤엉킨 미로속을 아무 생각없이 걷도록 만드는 데 있다. 따라서 미국의 교육은 창조적 생각과 비판적 사고를 고취하는 시스템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민주적 학교라고 떠벌리는 곳이 기껏해야 도구밖에 될 수 없는 기술을 가르쳐주는 공장으로 전락해서, 세상을 비판적으로 읽고 현상뒤에 감추어진 관련 동기를 파악하게 해주는 창조적 사고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대체로 이처럼 도구주의적으로 접근된 교육은 객관식으로 치러지는 무의미하고 몰지각한 연습문제 그리고 우리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종잡을 수 없는 정신분석학적 개념들을 흉내내어 무슨 듯인지 알 수 없는 고매한 글을 써대는 교사들로 특징지워진다.  

교육부가 규격화된 테스트를 통해서 커리큘럼에 대한 감독권을 거듭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이처럼 얼빠진 교육법은 더욱 힘을 얻어가는 반면에 자아와 공공생활의 관계 그리고 광범위한 시민의 요구에 부응하는 사회적 책임에 중점을 두는 교육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 

촘스키의 말은 맞는듯 하다. 그러나 항상 객관적으로 생각할려고 애쓰고, 현실에서 이념문제나 교육의 후유증 문제를 고려하면 문제는 시스템이나 이념의 문제라기보다 인간의 도덕적 성향이나 협동 또는 공존과 관련된, 그래서 좀 더 부드럽고 내면적인 부분을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식민교육'이라고 표현하거나 '시스템'의 문제라고 표현하면 근본적으로 '국민의 통합성'을 저해하는 결론이 벌어질뿐더러 문제의 본질을 왜곡할 수 있는듯 하다.  

미국사회가 좀 더 다양하고 개방적임을 생각하면 식민교육을 하는 주체가 누군지, 얼빠진 교육은 어떤 입법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지고, 그 입법자들은 누가 구성하는지 근본적으로 생각할 과제가 주어지는듯 하다. 심지어는 노암 촘스키 조차도 그런 교육시스템의 수혜자(受惠者)가 아닌지 하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촘스키 조차도 뭔가 '구분짓는다는' 덫에 걸린 이념논쟁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국민교육은 참 중요한듯 하다. 그 교육의 대상은 권력, 재산, 학식이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가릴 것이 못 되는듯 하다. 심지어는 미국과 같이 시민에 의해서 구성된 정부를 탓할 것도 아닌듯 하다. 생각보다 문제는 훨씬 인간적이고 본질적인데서 찾아봐야 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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