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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24일 토요일

정보기관과 코끼리아저씨

어렸을때부터 곡마단의 작은 기둥에 묶여있던 코끼리는 성장하고나서 힘이 넘쳐도 작은 기둥을 뽑지 못한다. 정신이 제압당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도 그렇다. 장기간 세뇌를 당하면 자신도 모르게 자립심을 잃어버리고 묻어들어간다. 한국인들은 이념과 종교가 작은 기둥역할을 했다. 인습이나 습관도 작은 기둥역할을 하는데, 나이가 들면 자신은 똑똑하다고 착각을 하는데, 인습이나 습관의 노예가 되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들, 부와 명예 그리고 평안한 삶조차도 작은 기둥이 되어 우리의 발목을 묶는 경우가 많다.

난 신기하게 생각되는 것이 국정원장은 대통령에게 보고해야 할것을 우수석에게 보고하고, 장성급 인사를 정보사령부 수장으로 임명하는 것을 최선생이 결정했는데, 이 지경이 되도록 똑똑한 고위관료들은 무엇을 했나 싶다. 지위와 명예, 인습, 습관, 일상이 모두 코끼리를 묶는 작은 기둥이 되었을 것 같다. 물론 그 이면에는 이념적인 사고가 현실을 정당화 시켜주는 핑계거리로 작용을 했을 것이다.

우수석의 말대로 열심히 존경하면 안된다, 열심히 공부한 당신들 말아먹으면 안된다. 

2016년 12월 23일 금요일

17년전


17년전 최씨와 대통령의 대화에 관한 기사가 났다. 그 쯤에 나도 의미있는 일을 겪었는데, 출중한 기세로 폼을 잡으며 타인의 정신세계에 군림할려는 이들을 몇몇 만나보고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열심히 자기 길이나 가라고 충고하던 때였다. 겸허하고 유순해 보이는 어린 사람의 입에서 느닷없이 그런 말이 나오자 놀라 까무라치는 종교인이나 이념론자, 유사종교인들의 모습을 보며 이 사태를 예측했던 것 같다. 

요즘에는 혼자 애써서 될 일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몸은 청춘을 달리고 마음은 17년의 곱절로 흘러갔다. 개성공단을 폐쇄시킬때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은 받았는데, 확신이 매우 출중한 이상한 최선생이 있을줄이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다고 할 수 없다

피부치료가 노화(老化)를 멈추는 것이 아니다. 노욕(老欲)을 버리는 것이 훨씬 더 젊어질 수 있는 것 같다. 노화도 멀리할려고 할수록 다가오는것 같다. 

한동안 노인분들과 함께 일했다. 과거 냉전시대 군사문화의 희생자가 되어 노폭(老爆)이 된  노인도 보았고, 젊게 살고 싶은 욕망은 있는데, 자기 관리하는 방법도 모르고 노력한 바도 없어서 그냥 부산스럽게 ADHD성향을 보이는 노인분도 있었다. 반면에 노인분들이 가질 수 있는 장점들, 이해심, 안정감, 학습할려는 태도등을 가진 노인분들은 함께 있는 것이 즐거웠던것 같다. 그때는 적지 않은 나이의 내가 젊은이가 되어 기댈 수 있는 곳이었다.

촛불집회속에 우파든지 좌파든지 이념적 스팩트럼이 강한 표현이 나오면 '웬 노인분들이 또'하는 생각이 든다. 이슈가 중요한거지 이념이 숟가락을 얹을 장소가 아니다. 그런데 여당 중요인사가 '좌파정권의 탄생을 막기 위해서'운운한다. 뭘 잘못했으면 인정하고 피드백시켜서 교정하고 새로운 정책 이슈를 찾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다급한 김에 이념적 결집체를 만들어 최소한의 지지율을 지키자는 노인의 소극성과 고집을 보여주고 있는듯 하다.

야당이라고 구태의연한 노인정치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정책이슈와 무관하게 맹목적인 대중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대중정치성향으로 분위기를 이끈다면 '노인정치'가 될 것이다. 

2016년 12월 20일 화요일

확신범

대상포진이 걸려 누워있다가 일간신문에 나와있는 선명하고 매몰찬 눈빛의 최씨 사진을 보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져서 벌떡 일어났다. 대통령을 움직인 힘이 저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많이 고민해왔던 것들, 사회유지에 비협조적인 생각들이 이념과 종교등에 기반해서 확신에 찬 생각들로 변신할 수 있었던 사정들이 최씨의 얼굴에 모두 나타나 있었다. '네 믿음대로 되리라'는 종교적 경구는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믿음과 확신과 집중이 삼위일체가 되었는데, 어떤 일을 못해낼까 싶다. 심지어는 한 국가를 혼란에 빠뜨리는 일까지 가능한듯 싶다.

그러나 세상에는 방향이 다른 많은 확신들이 있다. 무너뜨릴려는 확신,일으켜볼려고 애쓰는 확신, 이기고자 하는 확신, 지지 않을려는 확신등 서로 대칭적이기도 한 확신들이 균형을 이룬채 사회는 유지되고 있는듯 하다. 권력은 견제할 힘이 없으면 그런 균형을 가장 쉽게 무너뜨리는 확신이 된다. 선의의 권력이 아니면 아주 심각한 악으로 화(化)한다. 

2016년 12월 18일 일요일

한국에서 권력욕구와 사회교육

지난 겨울, 싸고 좋은 옷, 그리고 젊어보이는 옷을 많이 샀다. 복장을 급격히 변화시킴으로서 나의 새로운 변화로 인한 사회적 시선을 감지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 실제로 변화가 있었다. 사람들에게 새로운 내 모습이 투사됨으로서 나의 생각도 변해갔다. 부유한 복장을 하고(부유해보이되 어느 정도 절제된 복장을 하고) 분양하는 아파트모델하우스를 방문하거나 고급승용차를 선전하는 곳에 가면 소비의도가 있는 사람으로써 오해(?)받는 적이 많았다. 순간 잠시 남이 알아주니 더 이상의 '부(富)'는 필요없을 것 같다는 웃긴 생각이 잠시 들었다.

최종적으로 오명(汚名)을 뒤집어쓸 확률이 많은 권력에 집착을 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저런 행태는 단순하게 욕심이라고 표현하기보다 뭔가 다른 문제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곰곰히 해봤다.

침팬지는 식량 채집에는 놀랄 만큼 적은 시간을 소비하며, 나머지 시간을 분주한 사회생활로 보낸다. 고릴라가 그들보다 작은 침팬지에 비해 비교적 덜 사회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고릴라도 단단하게 결속된 사회집단을 이루며 개체사이에 중요한 연대감을 지니고 있다. 고릴라와 침팬지가 편안한 삶을 영위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중의 하나는, 그들이 다 자라기 전에 자신에게 요구되는 것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갖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주변의 지리를 잘 알아서 어떤 형태의 음식물이 어떤 시기에 풍부하게 있는 가를 알 뿐 아니라, 어떠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가도 알고 있다. 그들이 어린 시절 오랜 기간에 걸쳐 어미나 다른 성숙한 놈들로부터 많은 것을 학습했기 때문에 이처럼 많은 지식을 갖게 된 것이다.

학습기간이 길어지고, 안정된 사회집단에서 생활하게 됨으로써 대유인원의 - 또한 인류의 - 지능이 개발될 수 있었다. 그 학습은, 배워야 할 것을 배우는 것으로 고도의 지능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학습이란 복잡한 사회적 상호작용 - 이것은 지성의 실제적 기민성을 필요로 하는 집단 생활에서 필수요소이다 - 을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이다. - 중략 - 한 무리의 침팬지는 최소한 3대에 걸친 성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또한 10개의 가족을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무리들 중 새끼들은 서로 간에 가장 많은 접촉을 하며, 가족 사이에 다툼이 끊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영속적인 결합을 이룬다. 가족생활의 안전은 다른 가족의 개체들에 관해 학습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며, 이러한 관련 속에서 지위가 성립될 수 있다. 

 - Richard E. Leakey and Roger Lewin의 [ORIGINS]중에서 -   

한때 노인분들이 많은 일터에서 일해본적이 있었다. 그때 대단히 권위적이고 수직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 분들을 많이 보았는데, 주인이냐 노예나 대장이냐 부하냐 하는 극단적인 관점으로 매몰되어 있었고 뭔가 통합적인 관점을 갖출 수 있는 사회적 교육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났다. 물론 자각하지 않고 살아온 분들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한국의 역사라는 것이 사회적 관계를 학습하고 자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은 것 같다. 지위라는 것이 공동체에 대한 책임과 관련된 학습으로 생성되는 것이 아닌 지배적 욕구에 몰입하는 모습은 조선왕조를 벗어나고 일제강점기를 거쳐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받았던 세대의 뼈아픈 현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문제에 관해서 몇 번 글을 쓴 적이 있지만 결과적으로 어떤 형식의 교육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남이 알아주지 않고 존경하지도 않는 권력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냥 불안한 사회관계속에서 제대로 된 사회학습이 없던 결과이며 습성인듯 하다. 좀 모질게 표현하면 3대에 걸친 침팬지 집단의 교육에도 못미치는 학습을 받은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한국의 교육시스템과 내용이 바뀌지 않으면 북한과 같은 심각한 문제를 지닌 공동체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2016년 12월 10일 토요일

飛효율성과 飛공정성

'공(公)적인 지위에서 사(私)적인 활동을 하였다.'

한국에서 지난 10년의 정부의 성격을 위와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반대로 사적인 지위에서 공적인 생각을 하면서 느낀 것인데, 이념을 핑계삼아 피드백환경을 틀어막아놓고 사익(私益)추구에 몰두했던 지난 10년의 정부는 정부수반뿐만 아니라 그 근본이 되는 주변의 영향력을 끼치는 개인이나 세력부터 확실하게 색출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원래 한국에서 이념대립의 경제적성격은 효율성과 공정성의 양립하기 어려운 성질의 대립이 이념으로 변질되어 표현된 것인데, 지난 10여년은 매우 효율적이지도 않고 공정하지도 않았다. 이익집단과 개인들의 사사로운 욕망은 효율성과 공정성문제를 깨끗하지 못하게 해결해 버렸다.

자유주의 이념은 효율성을 추구하고 사회주의 이념은 공정성을 추구하는 것으로 나누어서 인식이 되는듯 하다. 그러나 이 두가지는 함께 추구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노벨상수상자인 미국의 경제학자 케네스 애로우(Kennert Arrow)는 효율성과 공정성의 양립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정부가 조세정책을 통하여 출발선을 다르게 만드는 방법을 제안하고 있다. 적절한 정액세와 보조금으로 불리한 사람에게 출발선을 앞당겨 준다는 이론이다.

경제학자의 해결책은 매우 좋은 것이었지만 무능하고 부패가 심한 사적(私的)정부에서 효율성과 공정성의 조화라는 과제를 다 뭉개버렸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생각하기 싫었던 모양이다. 이념이나 종교는 그런 고민을 한 방에 해결해주는듯 하다. 기도하거나 봉헌하여 하느님께 나라를 맡겨버리거나 생각하는 사람들을 모두 적색분자로 매도해버리는 매우 편리한 방법을 취했던듯 하다. 그리고 뒤로는 매우 사사로웠다. 국민이 화가 나는 것은 이런 문제였던듯 하다.

사사로운 이익을 돌보느라고 효율성과 공정성이 날아갔다. 飛 하였다. 

2016년 12월 3일 토요일

이념과 공급중시경제학

미국의 레이건대통령은 반공주의자였다. 많은 나이에 대통령이 된 것도 반공주의자인 이데올로기성향이 크게 기여하였다. 비둘기파였던 지미카터대통령의 평화주의 군축정책같은 것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절대 포기하지 않을 소련의 팽창주의에 뒷통수를 맞은터라 그에 대한 반동으로 레이건이 대통령이 된것은 상대적인 것이 교대로 주도권을 잡는 사이클상 당연했던 것 같다. 한국은 북한이 존재하는 탓으로 이데올리기문제를 이슈의 전면에 끌어올리면 다른 정책이나 재능등을 무시해도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쉬운 여건을 가졌는데, 그동안 위정자들은 그런 상황의 수혜자가 되었다. 이런 면은 우파와 좌파가 적대적인 공생관계의 헤택을 입은듯이 말도 안되는 편향성을 가지고도 국회의석수를 차지하는 결과가 되었는데, 어쩌면 북한, 우파진영, 좌파진영이 물고 물리면서 시대적에너지를 소모시키는 마이너스앙상블을 이룬듯 했다.

마국의 경제학자인 래퍼(Arthur Laffer 1940 - )는 세율을 인하하면 기업의 생산활동이 촉진되고 근로자의 근로의욕이 증진된다고 했다. 그러니까 정부가 세금으로 돈을 빼앗지 않으면 개인이 일할 의욕이 더 생겨난다는 것인데, 특히 고소득층일수록 그런 효과가 더 커서 부자감세를 적극 추진해야 한다고 하였다. 레이건 정부는 이 학설을 현실 경제에 적극 받아들였고 효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당시 군비확장이나 대외정책등으로 재정적자를 누적시키고는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마주친 반대편 손바닥이었던 소련의 아프칸 침공이나 여러가지 팽창주의 정책등으로 레이건 행정부의 대외정책은 피치못할 상황이었다고 생각하는데, 래퍼의 부자감세학설같은 것은 레이건의 이념성향의 기반위에서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수용되었던듯 하다. 그럴듯 하지 않은가. 복지를 후퇴시키고 재정규모를 줄이면서 세금도 덜 받고, 기쁜 마음으로 그 돈을 투자하여 더욱더 노력하여 더 많은 돈을 벌어서 세금을 더 내면 결과적으로 재정이 풍족해지고, 복지도 더 증대될 수 있으며 나중엔 모두 부우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느 천년에

결국 멍청한 한국의 전 정부에서는 이 학설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부자감세정책같은 것을 취했는데, 문제는 경제활동의 기반은 중산층이거나 그 이하의 경제적계층이라는 사실을 깜빡 잊은것이다. 이념과 학설에 얽매여 잠간 한 눈을 파는 사이 수요측면이 엉망진창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듯 했다. 기업의 물건은 누가 사 줄 것이며 애초부터 서민은 기쁜 마음으로 미래에 투자를 할 자본같은 것을 형성하기는 커녕 그냥 숨쉬기도 바쁜 현실을 잊어버린듯 했다. 부자감세의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기전에 부자든지 빈자든지 기업이든지 소비자든지 서로 연결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했다. 그런 사실은 전 세계적인 관점으로 봐도 마찬가지인데, 수요측면을 무시하고 공급측면을 중시하는 사이 전 세계적으로 수요가 감소하고 불경기가 오고, 동방의 아시아 국가들은 이상한 정치지도자들이 등장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게 된것 같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복지를 강화시키고, 경제적인 관점을 통합적이고 연결된 것으로 이해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이념과 정치와 학자가 트리오로 전 세계 경제를 침체시킨 사실을 빨리 인지해야 할 듯 하다.  

2016년 12월 2일 금요일

미세한 다이얼 / 프리드만

촛불집회의 대단히 온건하고 질서정련한 모습은 문제는 정치가들이지 국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 주었다. 얼마전까지 대중정치의 얄팍하고 극렬한 모습을 인식속에서 떨쳐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정부와 민중이 서로 파괴적인 모습을 보일까 우려했는데, 정작 꾸준히 이상한 모습을 보여온 것은 정치인들이지 국민들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많이 발전하고 많이 생각하는 국민들의 모습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이 와중에 또 이념적 숟가락을 얹어볼려고 했던 사람들이 겸연쩍어지는 상황이 발생했다는 것도 유쾌한 상황이었던것 같다.

통화론자이자 신자유주의 경제학자인 시카고대학의 밀턴 프리드만(Milton Friedman)교수는 우파돈벌레와 좌파선무당을 모두 거부했다고 한다. 특히 좌파선무당에 대해서는 "미세하게 다이얼을 조정해 원하는 결과를 얻어야 한다."고 말하며 경제와 인구가 성장하는 속도에 따라서 서서히 통화공급을 늘리는 방안을 주장했다.

이념이나 종교적인 사고의 큰 문제점은 단기간에 비용이 들지 않는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특성때문에 극단성이나 편향성을 띄기 쉬운 문제가 있는듯 하다. 그러나 생각보다 결과는 훨씬 증폭되어 나타났는데, 북한이나 한국이 앓고 있는 문제의 기본은 이런 이념이나 종교의 특성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도대체 상황과 지향해야 할 목적을 함께 고려하며 토론하여 가능한한 좋은 결과로 유도할 수 있는 자세가 안되어 있었던듯 하다. '기도하거나 불바다로 만들어서 문제가 해결되면 얼마나 간편할까 하는 상상을 현실로 증폭시켜놓고 생각하니 풍비박산이 되있더라는 훗날의 회고가 있을법하다.

중립적인 태도와 고려하는 태도는 다르다. 프리드만의 말처럼 상황을 좀 더 연속성의 관점으로 생각하여 미세하게 다이얼을 조정해 볼 일이다. 내 생각으로는 좀 더 바람직한 결과는 좀 더 소위 좌편향적이겠지만 이유는 좀 더 평등하고 공정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윤리관과 도덕심에 따른 것이기도 하고, 실제로 경험해 보건데, 공정한 사회는 능률성있는 사회를 의미한다는 확신을 여기저기서 얻어보기도 한다.

요즘 들어서 좋은 근로자들을 보기도 하고, 좋은 기업인들의 이야기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요즘 일어난 대통령과 관련된 사건들은 긍정적으로 해석하자면 한국사회의 고질병들을 끊어낼 수 있는 획기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이 된듯 하다. 문제가 미세하게 다이얼을 조정하듯 점진적으로 변화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고, 웬만해서는 현정부에 대해서 모난 생각도 안할려고 했지만 이런 충격적인 상황은 이념이나 종교가 안고있던 원죄적인 특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한국이나 북한은 '이상한 생각'과 그 생각으로 증폭되는 '이상한 행동'을 멈추고 인내심으로 고려하고 미세하게 다이얼을 돌려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