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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9월 30일 월요일

공동체의 가치 / 아렌트




부산에서 60대의 여성이 숨진지 5년이 되는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다. 기초수급대상도 되지 않아서 사회복지공무원 조차도 찾아갈 일이 없었으니 국가나 사회공동체의 일원들이 모두 책임을 면하지 못할 일인듯 하다.

"보이지 않는 정부가 어두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만들어낸다."는 독일의 정치학자 아렌트(Hanna Arendt 1906 - 1975)의 말처럼 정부의 관심이 닿지 않는 곳에서 스러져가는 불운한 삶이 어딘가에 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2차대전이 끝나고 나치의 유태인학살에 대한 사후처리와 전범재판이 이루어지고 있을때 세계는 나치의 만행에 대한 비난과 유태인에 대한 동정의 여론이 크게 확산되고 있었다. 그러나 유태인 출신인 아렌트는 유태인 책임론을 들고나와 수천년동안 국가를 이루지 못한 유태인들의 반성을 촉구했다.

아렌트에 따르면 유태인은 수천년동안 타국의 재정을 관리하면서 부를 축적하는 노하우를 쌓아왔는데, 결국 타민족국가의 권력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시킨 부로 인하여 유태인을 사회에 기여하지 않고 부를 탐내는 수전노로 인식되도록 했다는 것이다. 유태인들이 이런 상황을 빨리 인식하고 국가를 결성했더라면 막을 수 있는 참사를 막지 못한것이 유태인의 실수라고 말한다.

아렌트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공동체에 속하여 권리와 의무의 상호작용을 꾸준히 유지하는데 있다고 말한다.

전쟁난민, 불법취업자와 같이 정부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어두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말고도 한 국가공동체의 테두리 안에서도 참사가 일어났다는 사실은 많이 불행한 사태인듯 하다. 아직도 우리세대까지의 시민들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권리나 의무에 관한 인식,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되는 행복이나 불행에 대한 인식보다는 공동체와는 완전히 별개의 개체로서 '나만의 행복', '나만의 승리'를 탐하는것 같다.

공동체와 개인이 서로 관심을 가지는 사회는 좌파적인 사회도 아니고 전체주의나 국가주의 사회도 아님이 시민들에게 인식되어야할 것 같다.

2013년 9월 28일 토요일

한국에서 빈사상태가 된 생산자들


언젠가 공무원인 지인과 사기범죄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세상에 정당한 근로와 거리가 먼 사기가 만연해 있다는 이야기가 오고 가고 있었는데, 대화중 공무원이란 직업의 안정성이 역설적으로 사기범죄와는 거리가 먼 청정구역을 만들었다는 지인의 공무원에 대한 변론이 있었다. 실제로 한때 친했던 공무원인 지인은 나를 포함한 공무원밖의 세상을 자신의 안정된 생활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인식하는 바람에 영원히 인연이 끊어진 경우도 있었다.

공무원의 내집단화를 비평하고자 글의 서두를 이렇게 시작한것이 아니다. 실제로 공무원의 안정성은 국민 모두가 지향해야할 '이상적인 삶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생산성의 바탕이 될 수 있다는것은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문제다.

니스카넨(W.A. Niskanen)은 비지니스맨들이 수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투쟁하듯이 관료들은 월급이나 특전, 권력, 권위, 퇴직후의 조건등을 위해서 투쟁한다고 말한다. 이런 조건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관청의 예산을 확장하는 방법으로 권력을 얻어내는데, 이번 정부의 대통령도 임기 초반에 공무원의 협조를  크게 구했을 정도로 단기적인 임기의 정치지도자가 장기적인 임기를 가진 관료들을 통제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것 같다. 언젠가 러시아 황제가 "러시아는 짐이 아니라 1만명의 서기들에 의해서 다스려진다."고 말했을정도로 1차적인 생산성이 아닌 세금을 소비하는 2차적인 생산성을 가진 관료들의 힘은 막강하다.

그렇다고 정치적인 집단이 관료들의 성향과는 반대로 국민에게 이익이 되는 게임만 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을 한국의 지난 정부의 4대강정책과 같은 예산을 낭비만하고 생산성이 전혀 없는 것으로 입증된 실책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공익과 헌신이라는 정치의 본래 목적을 찾아 복지에 예산을 투입할려고 해도, 이미 정치적 비지니스에 희생된 예산은 시차를 두고 정부를 괴롭히고 있는듯 하다.

복지라는것이 수혜자인 국민의 입장에서는 무척 필요한 것이다. 삶에서 공무원과 같은 안정성을 얻어낸다는것이 개인에게는 무척 소중한것이다. 미래에 대한 확신과 희망이 일터로 나가는 아침공기를 새롭게 해줄것이기 때문이다.

결국은 예산이 필요하다. 쉽게 표현하면 돈이 중요하다. 그 돈은 쾌락적인 소비를 위해서 욕망의 노예를 만드는 타락한 돈이 아니고 건전한 생산성을 통해서 얻어낸 건강한 돈인듯하다. 정부는 어떻게든 복지예산을 만들어내어 국민들의 생활에 이바지해야할 의무가 있지만 예산을 구성하여 재정적자를 이룬들 후대의 세대까지도 건강한 돈을 만들어내야하는 시달림을 받게 될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가끔은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이 생산성이 있는 일터에서 살고있을까. 어떤 정치지도자는 국가의 예산을 재생산을 전혀 하지 못하는 곳에 투입한 일로 비난받으며 골프를 치러 다니는 장면이 목격 되기도 하였다. 골프장에 캐디도 부가가치를 생산하고, 어제는 인근 골프장에서 경비를 구한다는 생활정보지 광고도 있었다. 낮에 스타벅스에 앉아있다가 밤에 출근하는 국민도 모두 생산의 현장에 있다.

예산이 처음으로 만들어지는 곳을 한강의 근원인 황지연못을 찾아가듯이 찾아가보면 그곳엔 2차산업의 생산현장이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세계에 무역활동이 멈추었을때  무역 의존도가 높은 한국이 타격을 입는다면 생산현장에서 문제는 시작되고, 세계에 식량기근이 왔을때, 한국인이 굶는다면 한국의 농업에서 문제가 시작된다.그러나 생산자들은 무기력하다. 정치적 게임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위해서,권력이나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을 위해서,그 외 3차산업이 발달한 선진경제구조의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증권시장, 부동산중계, 법률서비스등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돈의 원천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한다.

생산현장을 둘러보면 환경의 조악함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대기업 근로환경은 좋은데 안정을 보장받지 못하고, 영원히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돈의 원천인 비정규직이 너무 많다. 대기업의 하청업체나 협력업체인 중소기업은 근로여건이 나쁘고, 국민모두의 꿈인 안정을 보장받지 못한다. 언젠가 없는 살림에 사치품을 하나 샀더니 무척 아쉬워했던 어머니의 마음처럼 이익없이 낭비된 예산이 중소기업의 근로환경이나 근로자의 복지,시설설비에 투자되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정치인들이 얼마나 있을까. 이런 생각이 이념의 문제일까. 저런 조악한 환경에서 근로를 할려니 차라리 정신을 놓고 말겠다는 사람도 많이 보았는데, 어떤 젊은이는 군대가 행복했다고 하더라.   

한국의 성장동력이 멈추고 5년째 세계15위의 경제규모로 머물고 있는 까닭은 돈강(러시아의 돈강이 아니라 돈이 흐르는 강)의 발원지에서 돈이 만들어지지 않은 시차적 결과인듯 하다.


2013년 9월 27일 금요일

허상(虛狀)을 실상(實狀)으로 / 아들러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였던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 1870 - 1937)는 어린시절 학교앞 공동묘지를 지나가는것을 매우 두려워했다. 유전적인 질병으로 구루병을 앓아서 죽을뻔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죽음의 세계랑 친근한 공동묘지가 자신에게 의미있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서 의사가 된 아들러는 자신의 기억속에 존재했던 공동묘지는 원래 없던거라는것을 알게 되었다. 아들러의 기억외에는 어느 누구도 그 공동묘지를 본 사람은 없었다.

여기서 아들러는 사실  그 자체보다도 인간의 주관적 인식이 인간의 행동에 더 큰 영향을 주고 있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가끔 신앙심이 깊은 지인들에게 풍부한 상상력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없던 일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자신의 생각속에 고착시키곤한다. 때로는 긍정적으로 작용하여 인생의 밝은 비전으로 자리잡는 경우도 있지만, 어두운 기억들이나 비현실적인 정보들과 결합하여 평범하지 않은 사건과 인격을 낳기도 하는것 같다. 고요한 기도의 시간에 자신을 돌아보는 반성과 각오대신 인내가 수반되지 않는 기대와 상상이 자리잡는다면 문제가 될 수 있겠다 싶다.

게다가 평생 받아들여야 하는 정보는, 어떤 한 종류의 일관되거나 편향된 성향을 지님으로써 다양하고 비판가능한 사고의 훈련을 방해하는 문제가 있는것 같다.

신앙심깊은 지인이 한 가지 일을 끝내지 못하고 뭐든지 될것 같은 비전만 가지고 이일 저일 방황하는 모습을 보며, 또는 어린시절 마음의 상처를 준 사람의 모습을 자신의 주변인들에게 쉽게 찾아내어 회피하는 모습을 보며,크게는 정치적인 상상력과 종교적인 상상력이 결부되는것을 보며 허상을 실상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는것을 느낀다.

요즘 대학생들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반기문 사무총장이나 법정스님이라고 한다. 흔히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비전을 가지고 폭발적으로 현실화 시킨 분들은 아닌듯 하다. 조용하고 성찰하는 분위기의 멘토를 기대하는 심리가 반영된듯 하다. 한 편으로는 이념이나 종교가 주는 상상력에 취해서 허상을 쫓아 살아오던 습관을 가진 시민들의 사고가 점점 냉철해지는것 같은 생각이 든다.

살다보면 편히 가고자 할때 더 힘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인내심과 노력이 없는 상상력은 몽환적인 비전을 준다. 될것 같은데 안 이루어진다.

아들러는 병약한 신체적 콤플렉스에 좌절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여 정신과 의사가 되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내면적인 성찰을 통해서 자신의 내면을 정신연구의 기반으로 삼았다. 그래서 그런지 아들러는 열등감을 극복하는 태도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2013년 9월 23일 월요일

북한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선택과 존엄


북한의 퍼스트레이디인 리설주의 추문에 관련된 기사가 한국언론에서 보도되자 북한정부는 최고의 '존엄'을 해한 부당성을 성토하고 나섰다. 그만큼 북한으로서는 정치지도자의 존엄이 북한체제를 지탱하는 구심점이라는 사실을 입증한 셈이 된다.

북한은 과학적 사회주의나 주체사상과 같은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선택하면서 부차적으로 정치지도자의 존엄을 부각시켜서 인민을 통제하는 구심력을 견고하게 확립해온듯 하다. 과학적 사회주의를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선택한 모든 공산국가들이 이데올로기의 정당성을 잃어버리자 무너지고 말았는데,개인적인 수명이 짧은 지도자에 대한 우상화를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선택한 북한은 아직도 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니, 북한 지도부의 입장에서는  '현명한'선택을 하였다는 판단을 할법하다.

짧은 지도자의 생물학적인 수명을 혈연적인 승계로 보완하면서 체제를 유지하는 정치적 기술은 탁월한 면이 있는데,지도자가 바뀔때마다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견고하게 다지거나 유지하는 작업에 많은 국가에너지를 소비하는 '비효율성'을 생각하면 인민을 위한 경제발전을 우선의 과제로 삼은 현 북한정부의 결의가 무색해 보인다. 

터키의 지도자 캐말파샤는 자신에게 시스템이 집중되는 구심력을 확보했지만 '터키민족의 부흥'이라는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선택을 함으로서 좀 더 영속적인 터키민중의 지지를 얻게되고, 국가와 사회에너지의 낭비를 막은 효율성이 있었던것 같다. 더구나 개인이 오랜 구심점으로 역할을 하면서 일어날수있는 '혈연적인 승계'를 피하기 위해 자식도 따로 두지 않을정도로 장기적인 판단을 하였다고 한다.

터키는 아직 중동의 강국으로서 행세하고 있고, 케말파샤에 대한 터키국민의 사랑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북한의 전 지도자였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던 '통이 큰 정치'나 '강성대국'등의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현 지도자인 김정은은 다시 생각해봐야할듯 싶다. 지도자의 영속성이 국가시스템의 영속성을 견인하는것이 아니라 국가시스템의 영속성이 지도자의 영속성을 견인하는 현실을 빨리 이해해야할 필요가 있는듯 싶다.

최고의 존엄은 통일되거나 적어도 통일에 가까운 협력에 이른 한반도 민중의 영속적인 평화가 아닌가 싶다.  

2013년 9월 21일 토요일

정치사상과 휴머니즘 / 칼 슈미트


엘리자베스 1세의 신하였던 필립 시드니(1554-1586)는 외숙부인 레지스터를 따라서 스페인과의 전쟁에 참가하고 있었다. 당시 영국은 신흥국가로서 스페인이라는 대국을 맞아서 네덜란드지방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시드니도 이 전투에 참가해서 싸우다가 다리에 중상을 입고 출혈때문에 목이말라 물을 청했다.가져온 수통의 물을 마시려고 하는데, 옆에 빈사상태로 후송되어 온 한 병사가 물끄러미 시드니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드니는 물통을 병사에게 건네주며 "그대에게 더욱 필요한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시드니의 친구인 플크 그레빌이 증언하였다.

어느 날 간디가 기차를 타다가 신발 한쪽이 벗겨진 채로 기차가 출발하였다.  간디는 나머지 한 쪽 신발을 차창 밖으로 던졌다. 동행인이 놀라서 그 이유를 묻자 간디는 "서로 나누어진 신발 한 짝은 누구에게나 쓸모가 없지요. 그렇지만 저렇게 두 짝이 되면 누구에게나 쓸모가 있게 되지요.가난한 사람이 줍는다면 더욱 좋은 일이겠지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독일의 정치학자이며 헌법학자인 칼 슈미트(Carl Schmitt 1888 ~1985)는 적과 동지를 구분하여 '우리'라는 동질성을 가진 집단의 결속력을 다져가는 방식이 민주주의라고 한다. 당시 독일은 칼 슈미트의 이론에 의거하여 반유태주의나 범 게르만주의의 동질성을 추구하면서 내부민주화를 다지게 되었다.

어쩌면 위에 예시한 시드니도 외부집단인 스페인과의 전쟁을 통해서 동료애를 발휘하는 기회를 얻게되어 자신을 희생하는 민주주의적 가치를 보여주게 되고, 간디도 훗날 영국의 식민주의에 저항하는 지도자로서 인도민족에 대한 동료애를 보여주며 민주주의적 가치를 실현했다고도 할 수 있을것 같다.

그러나 칼 슈미트는 '인간성(humanity)'이 정치의 바탕이 될 수 없는 이유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이유란 인간성이란 처단해야 할 외부의 적 즉 동지가 아닌 집단을 처단할 수 없는 논리를 제공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칼 슈미트에  따르면 시드니의 동료애가 더 큰 인류애적인 범위에서 발휘되거나 간디의 무저항 비폭력주의는 대단히 "비 정치적인 행위'로 오해 받을 수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대단히 칼 슈미트 다운 발상인듯 하다. 칼 슈미트는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휴머니즘이라는 개념과 동등한 위치에 놓음으로서 둘의 가치를 대립시켜서 민주주의 같은 정치적인 가치가 휴머니즘 같은 더욱 근본적인 가치를 압도하도록 하는 나쁜 전통을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당시 독일뿐만이 아니다. 미국에서도 냉전시대에 정치적인 적이였던 공산주의가 무너지자 911사태를 도화선으로 이슬람세계를 정치적인 적으로 여기기 시작하였는데,이면에 불의나 테러에 대한 인간적인 혐오같은 휴머니즘의 감정은 정치적인 관점에 밀려서 서서히 표면에서 자취를 감추는 문제가 생기는것 같다. 물론 한국도 예외가 아닌듯 하다. 이념적인 정치적 갈등이 민주주의란 명분으로  정치의 주된 관점으로 휴머니즘을 압도하고 있는 기간이 무척 길다는 생각이 든다.

민주주의란 가치는 휴머니즘이란 가치와 결코 동등한 위치에 놓을 수 없는 개념인듯 하다. 휴머니즘이 보다 근본적이고 포괄적인 가치로서 민주주의란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칼 슈미트를 비롯한 정치학자들이나 정치적인 인물들과 정치적인 사건들은 오랫동안 정치적인 명분을 위하여 휴머니즘을 희생시키고 있었던것 같은데, 호전적이고 불안한 상황을 겪은 현대민주주의의 고민이라고 할 수 있을것 같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지만 아담스미스가 인간은 무조건 이기적이라는 가정만 하지 않고, 휴머니스트인 인간을 가정했다면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가 발 붙일 수 있는 여지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아마 인간을 생각하는 경제이념이 탄생하여 극단이 반대편의 극단을 낳는 오류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많은 실패를 겪어야 합의점을 끌어내는 인간의 무지(無知)와 그 무지를 학문적인 포장으로 선동하는 학자들의 죄가 큰것 같다.


2013년 9월 12일 목요일

치유되지않는 사회의식 / 융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융(1875~1961)의 병원에 망상형분열증 환자가 나타났다. 이 환자는 융을 창가로 데려가서 "태양에는 페니스가 있으며, 그것이 움직임으로 인해 바람이 생긴다." 라고 말하였다. 4년이 지나서 융이 로마시대 미트라교의 기도서를 읽다가 같은 문장이 있는것을  발견하였는데, 그 남자의 교양수준이나 기도서가 출판된 년도를 생각하면 그 남자가 기도서를 읽을 확률은 없었다.

융은 위와같은 사례를 연구하면서 모든 사람들에게는 공통된 이미지나 주제를 품고있는 마음의 층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것을 보편적 무의식이라고 칭하였다.

요즘 들어와서 한국사회에서 이념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한국사회의 보편적인 무의식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육이오가 가져다 준 상처가 오랫동안 국민들의 무의식속에 자리잡은 이유도 있겠고, 지배와 피지배관계로 인한 상처가 오랫동안 국민들의 무의식속에 남아있는 까닭에 전자는 우파라는 명분으로, 후자는 좌파라는 명분으로 표출되기도 하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종교또한 경제적인 위상에 비해서 대단히 초합리적이고 비현실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과학적인 물질문명이 국민들의 의식속에 늦게 자리잡은 이유라는 생각이 든다. 종교와 관련된 면에 있어서는 신도라는 명목으로 귀신을 숭배하는 일본국민도 초합리적인 모습을 띄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이나 일본의 근대화기간이 짧은 만큼의 깊이인것 같다.

생각해보면 메시아에대한 기대는 역사적으로 한국만큼 간절한 나라가 없었던듯 한데, 과거에는 미륵신앙이라는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현대에는 이념이라는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하는 것 같다. 그 이면에는 수많은 외침과 싸우거나 계급적인 사회구조로 고통받던 민중들의 무의식이 면면히 표출된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념과 종교같은 내면적인 구속을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승화시키지 못하는 국민들에게 정부기관이나 지식인 또는 종교인들이 앞장서서 우파나 좌파의 영원한 대립, 망상적인 종교활동같은 '치유불가능한 상태'로 몰아가는 일은 없었으면 좋을것 같다.

2013년 9월 10일 화요일

동조와 복종 / 솔로몬 애쉬

가끔은 내 성격에서 경이로운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어느 자리에 있어도 그 상황과 동조를 잘하는 성향이 있다.아마 어린시절부터 안정된 가정환경을 모르고 자라서 그렇기도 하고, 성장을 해서는 개인적인 상황으로 어쩔수 없이 이일 저일을 산만하게 손을댄 습관때문인지도 모른다.

청년시절, 신자확보에 급급했던 어느 종교단체에 몇개월 앉아 있었다. 딱히 편한 시절도 아니었기에 신앙이 가져다 주는 마음의 평안함을 비롯한 여러가지 부가적인 수입을 탐하는 계산이 있었던것 같다. 그런데 몇개월동안 지극히 일체감을 가지고 종교인 이상의 신앙인으로 탈바꿈을 하는것 같았는데, 도무지 해당 종교인분의 설교 내용에는 공감이 안갔다. 초조해진 종교인분은 '순종'하라고 소리높혀 외쳤지만 순종이 안되는 상황을 낸들 어찌하냐고  함께 소리높혀 외치고나서 그만 두었다. 다음에 또 방문하니 맞지 않으면 오지 말지 왜 오냐고 또 소리높혀 외쳤다. 비용편익계산을 해보고는 시간이 많이 아까웠다.  

다른 종교, 다른 종교인과의 관계에서도 '순종'을 권유받는 일이 있었는데, 다소 어려운 환경에서 이성이 강해진탓인지 신앙과는 별개로 종교인들에게 찰떡같이 순종하는 양이 되주지 못한것에 대해서 다소 죄송스럽기도 한것 같다. 문제는 내가 아니고 많은 신자들의 공허한 눈빛인것 같았다. 평안하고 행복한 삶을 구하는 사람들,그래서 동조하고 복종하는 삶을 살면서도 구하고자 하는 삶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며 많이 안타까웠던것 같다. 한 편으로는 정신적인 권력관계를 엿본 까닭도 있는것 같다. 

이념이나 종교같은 보이지 않는 관념의  허구성에 깊이 반발하는 이유는 여러가지 과거의 경험들이 바탕이 된것 같은데, 인과의 법칙은 콩심은데 콩난다는 말처럼 진리인듯 하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인 솔로몬 애쉬(1907~1996)는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반응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타인을 따르려는 성향이 있는데,이것을 동조라고 말한다. 누군가의 의견이나 행동, 심지어는 표정, 자세,목소리까지도 따라할려는 성향이 생기는데 이를 카멜레온 효과라고 부르기도 한다. 때로는 이념이나 종교의 내부에서 유난히 결집을 요구하기도 하는데, 동조현상은 집단의 결집이 강할수록 심해지며 반발자가 생기면 급속히 와해되는 성향이 있다고 한다.

애쉬는 동조의 이유로 두 가지를 들고 있는데, 첫째는  결정을 내리기 힘든 상황에서 타인의 결정이 쉽게 참고 된다는 점이고, 두번째는 다수와 의견이 다를경우 집단으로부터 배척됨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편 사회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1933~1984)은 복종에 관한 실험을 했는데, 사람들이 자신들의 소신과 사회규범에 어긋날지라도 권위있는 인물의 명령에 복종하는 이유는 자신의 책임도 없어질뿐더러 자신의 행위에대한 결과보다는 복종관계를 더 중시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만약에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는 권위자의 합법성이나 동기에 허점이 보이거나 누군가 복종하지 않는것을 보면 복종행위는 훨씬 줄어든다고 한다.

솔로몬 애쉬와 스탠리 밀그램의 연구결과를 보면 일본의 군국주의와 독일의 홀로코스트처럼 왜 사람들이 집단으로 엄청난 비윤리적이고 비 인간적인 행위를 하게 되는지 이해를 할수 있을것 같다.  

실제로 이념과 종교는 동조와 복종을 본질로 하는것 같다. 실제로 동조와 복종을 이루고 난 다음에 목표가 변질될 경우 많은 폐해를 발생할 수 있는데,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일들이 이념과 종교같은 선량한 목적으로 탄생해서 동조와 복종을 이끌어낸 다음에 변질되어간 관념들의 부작용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고 하겠다.

주체적이고 스스로의 자아를 확립시킬 역사적 기회가 부족했거나 잘못된 교육으로 정신이 재산이나 명예,권력같은 저열한 가치에 지배를 받게된다면 동조와 복종현상이 일어나기 쉬운 바탕이 되기도 하는것같다. 정치인은 이념을 이용하고, 종교인은 신앙을 이용하여 동조와 복종을 이끌어내기도 하고  때로는 주체적이거나 반대하는 소수를 억압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거나 사회붕괴나 갈등의 수단으로 사용되는것 같다.   










2013년 9월 7일 토요일

한국에서 인적자원배분의 왜곡


80년대 한국에서 고시열풍이 불었다. 권위적인 정치환경에서 사회의 수직적차별에 민감했던 젊은 인재들이 너도 나도 고시에 뛰어들었다. 심지어 명문공대생의 많은 수가 법과목을 수강하고 고시에 뛰어들었으며 재학중에 3대고시를 합격한 어느 수재의 합격기는 그런 추세에 기름을 부었다. 어린시절 공학자가 꿈이었음에도 개인적인 상황때문에 수직적 또는 권력적 차별관계에 무척 민감했던 시절이라 2년정도 공부를 해보았다.그리고 오랫동안 그로인해 생계를 유지했는데, 직업의 사회공헌도에 대한 고려나 개인적인 적성과 관련해서 시행착오를 크게 겪었음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는 시절이었던것 같다.

90년대에는 미국에서 어려운 여건에서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얻은 어떤 공학자는 대덕연구단지에서의 열악한 환경과 열악한 처우로 공학박사학위를 얻는데 들어간 만큼의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 사법시험을 합격한 기사가 신문에 실린것을 보았다.

세월이흘러 많은 시민들이 '교양인'이되고 수직적인 사회관계가 점차 수평적인 관계로 바뀌며, 정보통신의 발달로 젊은이들의 불같은 열정을 끌어낼수 없을정도로 '고시'의 가치는 평범해진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안정된 직업인 '공무원'이란 직업에 관한 열풍이 생겨나 많은 젊은이들을 공무원시험공부에 열중하도록 만들고 있다.

아담스미스의 자유주의 경제사상,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케인즈의 큰정부주의 경제사상, 프리드먼의 신자유주의 경제사상이 경제학의 이념적 틀을 짜주면서 사회를 경제와 관련하여 이념적인 관점으로 견인했던것 처럼 고전학파와 신고전학파경제사상은 인간의 가치보다는 '생산성'과 '비용편익'의 계량적인 관점으로 견인했다.

노벨상수상자인 경제학자 베커(1930~ )는 '인적자본이론'을 내세워 시행착오를 겪는 경제학적 연구의 오류 이면에는 일을 하는 노동자인 '인간'에 대한 관심이 소홀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마르크스의 '노동자'를 위한 경제이론도 비판하고 있는데, 당위에만 그쳤지 실제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지 않은 면을 지적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도 특히 한국에서는 '노동자'의 존재가치나 처우개선을 위한 여론이 마르크스의 계급주의 경제사상에 연루되어 '좌파적인 의견'으로 왜곡되기 쉬운 문제가 있는듯 하다.

한국에서  인적자원배분이 장기적으로 왜곡되는 문제의 이면에는 다양한 직능집단이 국회에 진출하거나 또는 정당등을 구성하는 정치적 투입기능을 상실한 면이 있다는 생각이다. 대체로 법률이나 이념적인 사상학습을 받은 인문학적 인재들은 정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여론형성의 역할을 하기쉬운데 공학자나 기술인 또는 그밖에 여러 직능집단의 인재들은 정치적 센스와는 거리가 먼 인재로 취급당하는 면이 있다는 생각이다.

한국에서 '현업'과 관련된 인재들(흔히 이야기하는 노동자)들의 처우나 근무환경에 대한 요구는 '좌파'라는 누명을 쓰기 쉬운 이념적 프레임에 갇힌 정치환경이  한국의 인적자원 배분을 왜곡시키는 주범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매번 현업의 현장에서 심각한 문제를 느끼면서 살고 있지만 개선의 길은 한없이 먼 현실을 느낀다.

인적자원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기 위한 노력등이 국회를 비롯한 정치권내에서 정치인의 개인적인 이익과 연루된다면 더욱 개선의 여지가 없을듯 하다. 정치인은 한 시대의 주목받는 직업군들로 구성되어있기 때문이다. 사실 근원을 캐어보면 경제의 바탕은 '적재적소에서 일을 하는 인간'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은 진리인듯하다.   

미국의 꺼지지 않는 성장동력을 본받고자 하는 한국내의 견해는 미국의 경제가 오랫동안 탄탄하게 구축되어온 과학기술인적자원들로 지탱하고 있음을 잊은것 같다. 미국의 자유주의 경제의 모습을 말하기전에 햄버거와 콜라를 먹고 티브이를 보며 여가를 보내는 뚱뚱한 주민들의 이면에는 치열하게 노력하여 뛰어나게 성장하는 미국의 과학기술인력이 있다는 사실을 잊은듯 하다. 미국은 완전한 자유방임주의 경제라서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는것이 아니라 많은 자원과 실속있는 인적자원배분, 국방과학기술이 견인하고 있는 기술력등이 미국경제를 지켜주고 있는것 같다.  


2013년 9월 6일 금요일

도피로부터의 해방 / 에리히프롬


정신분석학자인 에리히프롬(1900~1980)은 한 사회의 경험은 특정무의식적인 내용이 의식화되는것을 사회적인 여과장치로 거르는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이런 사회적인 여과장치는 이데올로기속에 숨겨져 위험한 또는 위험하다고 여겨지는 사상에 대한 사회적인 억압이 생겨난다고 말한다. 에리히프롬은 이런 사회적인 억압을 도피하기 위한 메커니즘으로 권위주의, 파괴성, 자동화기계라는 사회심리학적 개념을 이야기 한다.

권위주의는 인간이 자아의 독립성을 포기하고 타인을 지배하거나 복종하는 관계가 되어 사회적인 고독감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한 용도로 발휘된다고 한다. 파괴성은 자신과 비교가 가능한 대상을 제거할려고 발휘되며, 개인이 자동화기계로서 역할을 하며 타인과의 갈등을 소멸시키고 고독감으로부터 보호받을려고 한다고 말한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이념적인 정치사건들을 보면서 이념을 대체시킬 정신적 해방구의 필요성이 시급하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한국에서는 권력과 권위,지배 이런 단어들이 제시하는 관점으로부터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하는것 같다. 조선왕조의 봉건적인 지배복종관계, 일제시대의 억압적인 통치, 연이은 권위주의 정부형태등으로 인해 시민의 자발적인 주체성이나 독립적인 사회정신을 함양하는 기회를 갖지 못한 탓인것 같다.

에리히프롬은 현대사회의 인간소외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랑의 기술'을 제안하며 사람들이 자신에게 '진실된 마음'을 쏟을것을 제안하고 있다. 에리히프롬이 이야기하는 사랑은 자신을 희생시키는 극단적인 형태도 아니며 자신에게 살아있는것을 전해주며 서로 관심을 가지고 이해하는 가운데 사회가 풍요로울것이라고 말한다.

한국사회는 격렬하다. 억압을 하거나 반발한다. 이기거나 진다. 동지가 되거나 적이 된다. 희생을 하거나 착취한다. 지배하거나 지배당한다.살거나 죽는다.

사실 한국의 격렬한 사회심리상태는 어떤 정신적인 도움도 받지 못했던것 같다. 억압하는 자는 격렬하게 비난받고, 맞선자는 영웅이 되며 사회정신을 이끌고 있었던것 같다. 종교는 사회정신의 부재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억압수단이 되기도 한다. 수고스럽더라도 자신이 중요하다는것을 인식하는 길만이 해방구로 나아가는 길인것 같다.

2013년 9월 4일 수요일

항상소득가설과 정부의역할


소비라는것이 저축에 비견하면 서로 희생관계에 있는 상대적인 악(惡)으로 취급받겠지만 국가경제를 종합적으로 생각하면 선(善)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듯 하다. 소비의 증대는 생산의 증대로 연결되고, 생산의 증대는 고용의 증대와 또다른 소비의 증대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일본과 같은 선진국의 경제는 국내소비가 정체되는 현상이 저성장의 주된 원인이라는것은 널리 알려져있다.결국 다국적기업과 같은 해외생산방식을 통하여 기업은 탈출구를 모색하지만 기업의 분배기능이 해외에서 이루어짐으로 해외노동자의 소득소비증대와 현지국가기업의 생산을 증대시키는데 기여하고, 자국의 경제는 공동화현상이 일어나는 문제가 있다. 자국민의 소비활동이 어느정도 보장되므로서 국부유출을 막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이 가능한것은 알려져 있다. 

경제학자 프리드먼은 항상소득가설이라는 이론을 내놓았다. 고소득계층의 경우 변동소득의 비중이 높고, 저소득 계층일수록 월급과 같은 안정소득의 비중이 높다고 한다. 때문에 고소득 계층은 절대소비액의 비중이 높지만 소비성향자체는 저소득계층보다 낮은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소비자는 예측 가능한 소득에 소비의 기준을 두기 때문이다. 즉 항상소득이 소비를 결정한다고 말한다.

프리드먼은 경제에서 정부의 역할증대는 세금을 증대시키고 민간소비를 억제함으로서 경제성장을 방해한다고 말하는데, 항상소득가설을 생각하면 국민들에게 가능한 균등하게 일정액의 소득을 보장해주는것이 경제성장에 도움이 됨을 알수 있다. 소수의 부자들의 소비가 다수의 일정소득을 가진 소비자들의 소비를 압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산층을 두텁게 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국에서는 중산층이 형성되기 어려운 원인이 정치분야에서 시작이 되는듯 하다. 좌파와 우파의 이념논리가 지배하는 한국의 정책결정구조에서는 특정 경제계급의 경제적 이익으로 여론을 몰고가는 문제가 있는듯 하다. 수렴은 없고 기득권수호나 투쟁만이 정치적 관점을 지배하는듯 하다. 한편으로는 계층이동의 가능성이 어느정도 폐쇄되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서로간의 흐름이 물흐르듯이 원활하지 못함으로서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국민에게 일정한 소득을 보장해주는 역할을 하는것이 경제를 살리기위해 노력해야할 정부의 역할이 아닌가 싶다. 많은 소득을 위한 적은 일자리의 창출보다 일정한 소득을 위한 많은 안정된 일자리의 창출등에 정부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때는 정부의 역할을 민간경제와 동일한 선상에 놓아 프리드먼의 구축효과를 작은정부를 위한 논리로 인용을 했지만 작은 정부의 문제점은 케인즈의 승수효과와는 별개의 문제로 같은 프리드먼에 의해서 주장된 항상소득가설이 보여주기도 한다. 여기서 큰 정부란 분배의 역할에 어느정도 능동적인 간섭을 하는 정부를 의미함은 물론이다.

간략하게 표현하자면 많은 국민들이 일정량의 소비를 안정적으로 하는것이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니 정부가 그 역할을 해야 된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 문제는 좌파냐 우파냐 하는 문제도 아니고 그냥 경제성장에 관한 문제일뿐이라는 의미이기도 한것같다.   

어휘풀이

변동소득/ 주식이나 부동산으로 인한 소득처럼 불안정한 소득
구축효과/ 정부의 조세수입과 투자가 민간의 소비와 투자를 밀어내는 효과
승수효과/ 정부투자가 고용과 소비와 생산을 연쇄적으로 늘리는 시너지 효과

2013년 9월 3일 화요일

후광효과의 정치


미국의 교육심리학자 에드워드 손다이크(1874~1949)는 어느 실험에서 군 지휘관들이 사병들을 평가할때 어떤 항목의 평가가 다른 항목의 평가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지나간 일이지만 정치지도자에게 몹시 큰 불만을 가졌던 적이 있다. 민간인 사찰과 관련된 문제였는데, 하필이면 개인적인 문제랑 때가 겹쳐서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할애한 문제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이면의 다른 문제가 보이기 시작했다. 대통령임기 시작부터 이미지에 커다란 손상을 입고 직무를 시작했을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미지, 과거사,정책스타일을 일치시키는 부정적인 후광효과가 의도적이든 또는 비의도적이든 정치지도자와 국민사이의 원만한 관계를 끊임없이 괴롭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이미지정치나 대중정치의 성향이 강한 국내정치의 특성상 당연히 있을수 밖에 없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확대되는 현상을 감당하기에는 좀 힘겹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신념과 목표의식이 약할때는 주변에서 압박해오는 낙인을 감당하기 힘든 경우도 있을것 같다. 반대로 이미지가 좋으면 긍정적인 낙인이 찍혀 정책수행이 훨씬 수월할수도 있고, 좋은 결과를 가져올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개인은 긍정적인 행위나 표정으로 사회적 가치를 높일수도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수가 있는데,후광효과는 누군가를 평가하는데 타당성과 신뢰성, 객관성등을 손상시키지만 감정이나 감각같은 비합리적인 요소가 개입되기 쉬운 사회적관계의 특성상 과거와 현재뿐만이 아니라 기대되는 미래의 상황들까지도 크게 영향을 끼치게 되는것 같다. 특히 정치지도자의 부정적인 이미지는 영향력의 크기를 생각해볼때 국가와 사회전체에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수도 있겠다 싶었다.

링컨대통령은 40대가 되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을 했는데, 긍정적인 후광효과는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것이 아님을 시사하고 있는듯 하다.

2013년 9월 2일 월요일

건강한 성격과 프로프리움


미국의 심리학자 고든 올포트(1897~1967)가 유명한 선배인 프로이트를 찾아갔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올포트를 환대했으면서도 올포트에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올포트는 부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먼저 깨기위해 기차안에서 만난 결벽증이 있는 소년의 이야기를 하였다. 프로이트는 조용히 듣고 있다가 올포트에게 갑자기 말하였다. "그 소년이 당신 아니요?" 올포트는 프로이트에 실망해서 신경증에 집중하는프로이트의 연구방식과는 반대되는 건강한 삶의 필요조건인 프로프리움이라는 개념에 집중하는 연구를 했다.

가끔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웰링턴장군이 항상 고민했던 "저 언덕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와 비숫한 의혹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는 경우가 있다. 한국에서 해결되지 않는 심리적 과제중의 몇가지를 곰곰히 생각해보는 가운데 인간심리의 여러 모습을 증명할수 있는 기회가 많은것 같다.

아마 프로이트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되어 형성된 관점을 가지고 타인을 바라보는 잣대로 삼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듯 하다. 프로이트의 신경증과 같은 인간의 부정적 심리에 중점을 둔 연구도 자신의 어떤 경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부정할수 없을것 같다.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반복적으로 느끼는 경험중에 하나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잣대로 타인을 평가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조금만 더 냉철하게 생각해보면 상대방이 나를 평가하는 모습으로 상대방의 내면을 알아낼 수 있는 경우도 많다.아마도 프로이트는 올포트가 결벽증을 경험해서 소년의 결벽증을 포착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듯 하다.

생각해보면 관점은 비숫한 사람들끼리만 공유하는것 같다. 그래서 '그들만의 리그'에서 심각하게 진흙탕을 튀기고 싸우는데, 외부에서는 저 사람들이 왜 저러는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불가능한적이 많은것 같다. 그렇지만 싸우는 사람들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 대한 인식이 확실하다. 때로는 자기들만 이해할수 있는 영웅도 만들어진다.  

올포트는 프로프리움에 대한 일곱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의미있는 삶을 살면서 자아감을 확장할것, 둘째, 타인과 좋은 관계를 맺을것, 셋째, 정서적으로 안정될것,네째,현실적인 판단력을 갖출것, 다섯째, 성공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할것, 여섯째,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것 마지막으로 일관성있는 삶의 철학을 가질것등이다.

소수의 개인이 건강하지 못하면 포착이 쉽고 치유도 쉽지만 집단이 건강하지 못하면 보편성으로 취급받으니 그것을 시대정신이라고 하더라

2013년 9월 1일 일요일

해결안된 믿음 / 레온 페스팅거


누군가 닭을 잡기 위해 털을 뽑았다.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닭이 벌떡 일어나 털이 뽑힌채로 숲속으로 달아났다. 결국 닭을 놓쳐버린 사람은 안타까운 심정에 중얼거렸다. "이 추운 날 털없이 도망가면 저만 춥지......"

지인중에 행동이 경망스러워 남에게 비난을 받는 이가 있었다. 누군가 직접적으로 그 문제를 이야기 하지는 않고 버럭 화를 냈던 모양이다. 그랬더니 빠르게 사고의 전환을 하면서 중얼거렸다. "지금 저 친구가 사정이 안좋아서 저렇게 화를 내는거야......"

때로는 마음의 장난으로 문제의 본질을 임기 응변적으로 회피하여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영원한 방황의 길로 빠져 드는 경우가 있는듯 하다. 해결안된 문제는 또 다시 찾아올 것이기 때문에 인생이 고난의 연속이란 말이 나오는게 아닌가 싶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1919~1989)는 '인지부조화이론'에서 사람들은 사고와 행동이 불일치하게 되면 인지부조화가 일어나 긴장을 유발하게되고, 긴장의 감소를 위하여 사고를 행동에 맞추어 나간다고 말한다. 그가 이 이론을 내놓은 배경에는 1950년대 한 사이비 종교사건이 발단이 되었다. 

한 사이비 종교교주가 자신이 신탁을 받았는데 지구 종말이 오고 신도들만 비행접시로 구출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사람들은 직장을 그만두고 모든 돈을 그 종교에 기탁을 했다. 그리고 그 소식을 전하려 애썼다. 그러나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교주는 신도들의 믿음으로 세상이 구원을 받았다고 발표를 했다. 사람들은 기뻐하며 축제를 했다.

이념과 종교에 대한 지나친 믿음은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는데 도움(?)을 주는듯 하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끊임없이 동조자를 찾아 헤멘다. 그 습관이 계속 반복되면 문제를 해결할 능력조차 없어져 버린다. 그것이 개인의 범주를 떠나서 사회나 국가의 전체적인 모습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