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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10일 금요일

이념파라다임의 변화 / 동북아시아의 쇠퇴

참 오랫동안 우회적으로 이념 파라다임을 변환시켜야 할 것이라는 생각, 어쩌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그 길 밖에 없다는 '호소'에 가까운 글을 써 온듯 하다. 시민 행동의 프레임은 광의(廣意)의 이념, 즉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하는 것이 아닌 넓은 의미의 지도사상들에 의해서 사회가 유지되어 나간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사실들인듯 하다. 그러나 현실적이거나 감각적인 생활에 몰두하다보면 넓은 시야를 상실하고 내 자신의 이해관계에 관련된 문제로 생각의 폭이 협소해지는 것이 문제인듯 하다. 실제로 이념적 프레임의 정점에 서 있는 경제학자들이나 정치사상가들조차 자신이 살아 온 과거경험이나 처해있는 현실, 때로는 학문적인 명예같은 개인적인 전리품들을 위해서 이념 파라다임을 변화시킬려고 노력하는 것이 정치가들 못지 않은 듯 하다.

잠깐 파라다임이 무엇인지 짚고 넘어가보자.

원래 파라다임(paradigm)이란 단어는 그리스의 범례(paradeigma)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미국의 과학자인 쿤( Thomas Samuel Kuhn 1922 - 1996 )이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저서에서 사용했다고 한다. 즉 과학자들의 연구결과는 새로운 이론의 창조보다는 현실에 있는 이론들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고 한다. 예를들면 천동설의 범위안에서 천동설을 뒷받침하는 이론들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기존의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하는 행위에 익숙해져 있다고 한다. 그러다가 갈릴레이나 뉴우튼 또는 아인쉬타인 같은 과학자들의 창조적인 연구결과는 근본적인 프레임을 깨고서 새로운 바탕을 탄생시키게 되는데, 이런 변화행위를 '파라다임'을 변화시켰다고 말한다.

이념이나 종교같은 일방적인 관념의 맹목적인 사회적 요구는  정신적인 감옥을 만들고 더 나아가 현실적인 감옥같은 영역을 경계지워놓는 문제가 있는듯 하다. 특히 매번 설파하는 문제지만 한반도는 그런 문제의 가장 큰 '피해자집단'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어쩌면 '동양적인 보수주의'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한계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일본의 쇄퇴는 그런 문제를 안고 있고, 한국도 마찬가지로 그 길을 따라가고 있는듯 하다. 몇번 설명한 바 있지만 일본인들의 정신세계는 새로운 파라다임을 탄생시키기 위한 시도에 있어서 매우 부족한 면이 있는듯 하다. 혹자는 노벨상수상자나 과학기술의 발전등을 이야기하며 일본의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만 사회분위기나 국민들의 인성자체가 자발적인 구속이든지 역사적인 습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의미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자 하는 과학적인 분위기는 미국의 프론티어정신과 같은 형태로 서구사회를 끊임없이 발전시켜 왔지만 동북아시아의 정신머리는 모방하고 뒤따라가면서 앞지르자는 비창조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문제가 있다. 특히 북한과 같은 변칙적인 사회는 매우 보수적이라서 새로운 영역 자체를 매우 두려워한다. 역시 개인적이고 감각적인 현실의 전리품들을 위해서 정치지도자나 엘리트들이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뭉개버린 탓일 것이다.

내 자신은 동양사상에 대해서 적어도 서양사상보다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들을 글로써 옮기지 않는 이유가 있다. 경험을 통해서 결론을 얻어내거나 바꿔나가는 경험론적인 사고가 아닌 있는 사실들만 검증해 나가는 연역적안 사고방식이 동양사상적인 분위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왜 그랬는지'에 관한 의문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듯 하다. 모든  사고의 과정을 뛰어넘어 결론부터 인정하라는 종교적인 비합리성을 요구한다. 그런 파라다임을 깨지 못하는 사회에서 이념이 들어와서 역시 종교화되는 문제가 있는것은 당연한듯 하다.

동북아시아의 관료주의, 상명하복의 위계질서, 사리사욕을 위한 정치적인 부패, 비공리적인 사회유지는 파라다임을 변화시킬 수 없는 동북아시아의 태생적인 결과물인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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