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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24일 목요일

행복의 나라로


몇일전 무척 화가나고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생활을 위한 지극히 소시민적인 전화통화도 방해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크게 당황했다. 고민할 문제가 생긴 이유로 많이 귀찮았다. 나는 우리모두가 처한 상황들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들에 촛점을 맞추었다.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문제를 객관적으로 또는 근본적으로 탐구할려고 노력했다.나에게는 보수나 진보, 좌나 우로 여겨지는 경향속에 어느쪽에서도 배울점과 낙관적인 장점을 찾을 수 있는 긍정심이 있었던것 같다.

지나간 일을 생각해보면 나는 한국인이 안고 있는 고민의 최일선에 서 있었던것 같다. 이념대립의 와중에서 많이 어두운 삶을 살았던 부모님과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어린 시절, 비정규직의 최 일선에서 느꼈던 전체적이고 불안정한 문제,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 내 자신과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값어치 없는 지성의 세계, 이런 모든 문제들을 생각해보건데 개선을 위한 노력은 이념적인 프레임에 얽매여 어떤 반짝이고 창조적인 생각을 용납 하지 않는듯 하였다. 그렇다고 구태(舊態)를 반복하지 말라는 제안을 반복하는것도 또 다른 구태(舊態)로 여겨질 수 있도록 오랜 참견을 해왔던것 같다.

겸손하고 존중심을 가질려고 노력하는 나의 관점으로 보는 세상이 반드시 내가 살아가는 세상과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깨달음을 얻은것도 하나의 배움이었던것 같다. 내 마음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의 단기적(短期的)인 이해관계가 이리저리 얽혀서 한국(북한은 더욱 그렇다.)을 근근히 지탱해가는것을 보면서 국가라는 공동체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구성원의 일인으로써 많이 고민을 했을 뿐이다.

나는 참으로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는 생각을 위해서 개인적인 인생의 다른 모든 것을 포기했었다. 그렇다고 열정은 커녕 걱정만 있었던것 같다. 내 자신의 행복보다는 한반도에서 살고 있는 나와 어떤 인연(혈연적, 지연적 인연이나 그 밖의 여러가지 인연)을 맺고 있는 많은 남북한 백성들의 행복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해왔던것 같다.

인연과 이해관계의 얽히고 섥힌 관계는 내 자신도 모르는 부분이 많음을 추정해볼때 내가 변화하기를 지향하는 세상과 누군가가 지키고자 하는 세상이 충돌할 것이라는 생각은 예상한 바가 있다. 심지어는 그 충돌관계가 신뢰에 관한 경쟁으로 비화될것을 우려해 준수한 스포츠실력을 갖추어놓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제기하는 문제들이 정치적인 편견이나 이익들과 결부되지 않기위해 '이념'문제를 벗어나지 않도록 많은 고려를 해왔던것 같다.

가끔 행복과 정의라는 두 단어가 시민들에게 얼마나 비중있는 단어로 받아들여질까 고민했던적이 있다. 아무래도 철학적인 교육이 부족하면 정의라는 이성적인 개념이 행복이라는 감성적인 개념에 압도당할 우려가 많은것이 현대 대중사회의 문제이기도 한것 같다. 행복이라는 개념을 말하는 사람은 많아도 정의라는 개념을 말하는 사람은 드믄것 같다.정의라는 단어는 왠지 무겁고, 의무감을 지우는듯 하며, 심지어는 투쟁과도 결부되기 쉬운 박복(薄福)한 단어인듯 하다. 그러나 고려할만한 가치가 있는 단어라는 사실은 누구나 부정하지 않고, 또 항상 현실에서 부족한 단어라는 사실도 부정하지 않을듯 하다.    

오늘 새벽 빗소리가 시끄러워 눈을 뜨고 불을 켜니 공허한 집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오랫동안 다져왔던 정의에 대한 개념보다 행복이라는 감성적인 개념이 마음을 흔드는 순간인것 같다. 이상과 고민이 인간적인 고독에 압도당하는 순간이 나에게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15년전의 어느 봄날, 불치의 암말기 판정을 받고 열차 플랫포옴에서 북녂하늘을 바라보며 담배를 꺼내 물던 부친의 모습도 생각난다. 정의라고 생각되어왔던 이념이라고 하는 인위적이고 이성적인 개념과 고향에서의 추억을 비롯한 행복이라고 하는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감성적인 개념이 충돌하여 감성적인 개념이 내 속에서 승리한 순간이었던것 같다. 그래도 그 순간은 항상 부족하고 짧고 강렬했었기 때문에 내 마음을 아직도 흔드는것 같다.        

행복이란 없는듯 하다. 그럼에도 지향해야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행복이라는 목표가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며 삶을 지탱해주기 때문인듯 하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항상 삶의 가장 저점(低點)을 찾아다닌듯 하다. 왜냐하면 행복하지 않은 과거가 항상 불행을 '각오'하도록 마음을 다져주었기 때문인듯 하다. 어떨때는 진정한 신앙으로 행복을 구하는 이들의 밝은 표정이 부러웠던적이 많다.

나는 파리의 한 복판에 살고 있다. 집을 나서면 나는 벌써 전원과 고독속에 들어간 것 같다. 그렇지만 내가 가야 할 길은 멀고, 또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에 만난 온갖 불쾌한 환경들이 내 마음을 우울하게 하고, 겨우 목적지에 도달할 때에는 벌써 그날 하루의 반이 고민 속에 지난 것이다. 그렇지만 목적지까지 갈 수 있다는 것만도 불행 중 다행인 것이다.

간사하고 악독한 인간들이 우글거리는 행렬로부터 빠져나왔다고 느낄 때에는 나는 무한한 기쁨을 느낀다. 그런데 자기자신이 나무 그늘이나 푸른 들판에 있는 것을 발견할 때면, 나는 내가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낙원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되며 또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나라고 생각하면 나 자신도 모르게 마음 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환희를 느끼게 된다. 

행복이라는 것은 항상 변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며 그것은 이 세상에서 오직 인간에게만 주어진 선물인 것같다. 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끊임없는 흐름 속에서 움직이고 있으며, 어떤 것이건 변하지 않는 모습을 지닐 수는 없게 되어있다. 

우리들 주위에 있는 것은 예외 없이 모두 소용돌이 속에 있으며, 나 자신도 그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다. 오늘 사랑하고 있는 것을 내일도 변함없이 사랑하고 있으리라고는 누구나 자신있게 말 할순 없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우리들 생활속에 행복을 원하는 그 자체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일시적이나마 정신적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그것을 즐기자. 우리들의 사소한 과실로 그 즐거움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 

- 루소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중에서 -

위에서 인용한 루소의 글은 루소가 "전 세계가 나를 박해하고 있다"는 피해망상에 시달리고 있을때 쓴 글이다. 18세기 후반의 부패하고 타락한 사회문명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던 루소가 정신적인 고독감을 이겨내기 위해 '행복'에 대해 고민했던 마음이 느껴진다. 지적(知的)인 루소보다 더 무지하고 스포츠를 좋아하는 내 자신은 루소만한 고독감을 느끼지는 않지만 한 인간으로서 '행복'이란 개념은 항상 고민하고 있는 단어임에는 틀림없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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