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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11일 금요일

피케티와 맨큐의 경제학


오래전 머리 좋은 직장동료가 주식투자를 하다가 실패하여 나락으로 떨어졌다. 10여년동안 가장으로서 역할을 처에게 맡겨놓고 고생하다가 전문직 시험에 합격하여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 주식투자로 인한 채무를 모두 갚고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자 다시 과거와 비숫한 시도를 하였다. 오랜만에 나에게 연락을 했는데, 배팅에 가까운 경제적인 시도를 하지 않고 소극적으로 생활하는 나를 비웃고 있었다. 자신이 곤란을 겪던 날, 끓어 오르는 배팅의 매력을 억누르기 위해서 '마음 다스리는 법'에 관한 책을 읽고 있을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한 편으로는 내 절친중에 스타일이 나와 같은 사람이 있는데, 평생을 질병과 같은 의도하지 않은 불운으로 고생하다가 엔지니어가 되어서 한국사회의 '을'보다 못한 '병'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병'의 대접을 받는 억울함은 자신이 토로한 불만이다. 열심히 일해도 생활이 안정이 안되니 공무원시험을 봤으면 하는데, 시험공부할 목돈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신 자본론'이란 저서에서  "역사적으로 자본이 돈을 버는 속도가 노동으로 돈을 버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기 때문에 부의 불평등은 심화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피케티의 책은 열풍을 불러 일으키고, 현실적으로 빈부격차가 심각해지고 있는 미국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소득재분배를 위한 자문을 얻기 위해 피케티를 초빙했다는 기사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부자에게 중과세를 부과할 것을 주장하는 피케티의 주장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버금가는 혁명적인 충격을 주었는데, 역시 '문제가 있는 경제현실의 개선'이라는 의미보다 '좌파적 경제이론'이라는  타이틀이 먼저 주어질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누구나 좌파, 우파에 관한 프레임이 짜여진 관점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특히 하버드 대학교의 그레고리 맨큐교수는 피케티의 주장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고 하는데, 맨큐교수의 저서 [ESSENTIALS OF ECONOMICS]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여러분은 경제학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실증적 주장과 규범적 주장의 차이를 항상 유의하기 바란다. 대부분의 경우 경제학은 경제가 어떤 원리에 의해 작동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종종 어떻게 하면 경제가 보다 잘 작동할 수 있는지를 제시하기도 한다. 만약 어떤 경제학자가 규범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면, 그는 과학자로부터 정책조언자로의 경계를 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미국의 트루먼대통령은 언젠가 제발 외팔이 경제학자를 만났으면 좋겠다고 이야기 한 적이 있다. 트루먼 대통령이 경제학자들에게 조언을 구하면, 그들은 항상 "한편으로는 이렇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다"고 답변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경제학자들의 답변이 종종 모호하다고 느낀 사람은 트루먼 대통령만이 아닐 것이다. 경제학자들의 이런 경향은 제 1장에서 살펴 본 경제학의 10대 기본원리의 하나에 기인한다. 여러분은 모든 선택에는 대가가 있다는 기본원리를 기억할 것이다.경제학자들은 대부분의 정책결정에 대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떤 정책은 효율을 위해 공평성을 희생할 수도 있다. 또는 미래세대를 돕고 현세대를 손해 보게 할 수도 있다. 정책결정이 쉬운 일이라고 말하는 경제학자가 있다면 그 사람 말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맨큐교수의 말대로 경제학자는 규범적이어서는 안되는듯 하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경제학 이론은 사회가치가 원하는 규범에 봉사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도구인듯 하다. 맨큐교수의 말은 냉철하게 사실관계를 규명해야 한다는  경제학자의 '규범'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트루먼 대통령의 언급에서 보듯이 규범적인 정책결정을 해야 하는 정치가로서는 좀 더 편하게 경제학자의 이론을 현실정치에 적용 시켰으면 하는 기대가 있을런지도 모른다. 정치가가 해야 하는 수고를 경제학자가 좀 더 많이 떠맡기를 기대하는듯 하다.

사실관계는 통계와 계량만 있는 것이 아닌듯 하다. 서두에서 언급한것 처럼 내 자신이 보고 들은 현실경제속에서 자본에 비해서 푸대접을 받는 노동의 가치를 피케티는 더욱 계량적으로 실증화 시킨듯 하다. 피케티의 이론이 빈부격차의 문제점을 교정하고자하는 내용이 있음을 이유로 규범적이라는 누명을 쓰고 있는듯 한데, 혹시 이런 우려의 내면에는 끊임없이 현대 인류의 '머리속의 진화'를 막고 있는 이념적 프레임이 바탕이 된 관점이 도사리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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