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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3일 토요일

사상의 진화 / 성리학과 한반도

실용적인 관점으로 생각하면 한국에 막심한 폐해를 안겨주었던 유교는 발상지인 중국에서는 진화를 거듭해 왔다.

 

원래 중국 춘추 전국시대의 어지러운 세상을 교정하려는 사상이 많이 나왔는데, 그 중에 유교(유가)는 가장 합리적이고 실용적이었다. 활국구민(活國救民/ Lets protect the national system and save the people)을 중시하고 그 행동강령으로 충(/loyalty to the king)을 중시하며 중앙집권성과 계급제도의 기반을 마련했다.

 

중국의 송나라를 건국한 송태조 조광윤은 당나라가 변방 사령관인 절도사들에 의해 망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중앙집권성을 강화하기 위해서 문신들을 최대한 활용하여 성리학이란 유학사상을 정립하여 왕권과 계급사회를 더욱 강화시키고 실용성을 줄여 나갔다. 덕분에 중국의 송나라는 변방 유목민족인 거란과 여진에게 조공을 바치고 침략을 당하다가 결국 유목민족인 몽골에게 멸망당하는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


하필이면 송나라에게 조공을 받던 거란은 고려침략에 실패해서 망하고 여진은 응전태세가 완벽한 고려의 국방력을 매우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말기에 송나라에서 들어온 성리학을 공부한 신진 사대부들이 많이 생겨서 이들이 조선건국의 기반이 되었다. 때문에 조선은 한층 더 강력한 중앙집권성과 한층 더 약화된 실용성을 기반으로 가늘고 길게 왕권을 유지하다가 폐업했다. 


그러나 성리학은 중국의 명나라때 와서는 지행합일(知行合一 /Knowing and acting must be combined)을 중시하는 양명학으로 발전을 하여서 조금씩 실용성을 갖추더니 유목민족인 만주족(여진족)이 건국한 청나라때 와서는 그 분위기에 맞게 실사구시(實事求是/ Seek truth based on facts)를 중시하는 고증학으로 진화였다.

 

청나라의 성군(成君/ Accomplished king)인 강희제는 본인이 직접 무예를 연마하며 과학기술을 연구하였다. 중국의 영토를 친히 정복을 하여 확장시키고 이후 옹정제와 건륭제까지 전성기를 보내다가 절대 다수이며 별로 강건하지 못한 피지배 민족인 한족에게 동화되어 폐업의 길을 가게 되었다.    


이형춘(Hyeong Chun Lee): 강희제에 대한 검색결과 (hyeong-chun.blogspot.com)


훗날 청나라 고증학의 실사구시 사상은 한국의 조선에 들어와서 실학(實學 / A practical study)이란 실용적 학문으로 연구되어 말만 살아있는 조선사회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워낙 성리학이 사회에 깊게 뿌리내린 조선은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성리학적 계급사회를 끈질기게 유지시켜 나갔다. 그래도 세종 같은 과학적인 조선의 군주는 한글을 만드는 등 후손에게 큰 유산을 물려주는 경우도 있었다. 

 

훗날 참혹했던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을 개혁시킨 저우언라이는 이 역사적 배경을 잘 이해하고 실사구시를 내세우며 오늘의 중국으로 개혁 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한국은 아직도 성리학의 계급주의와 중앙집권성 그리고 보수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이념이나 종교의 형태로 변성하여 말만 살아있는 한국으로 갈려는 움직임이 있어왔다. 한국의 민중들과 정치인들은 각성해야 한다. 요즘 한국에서 거란과 고려의 전쟁에 대한 드라마가 나와서 무척 재미있게 본 경험이 있다. 고려는 통일 한국의 모습이었고, 실용성 없는 말과 관념에 휘둘리며 분단된 한반도에 시사하는 점이 많다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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