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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15일 금요일

인간주의 경제 / 하이예크

얼마전 버스운전을 하기로 마음먹은 이유중의 한가지는 버스운전자의 자격조건이 30세 이상으로 제한되어 있었던 이유다. 즉 기성세대의 모습을 진실되게 볼 수 있는 현장이라는 이유였다. 오랫동안 청년층들과 함께 하는 일터에서 지내온 결과 뭔가 불균형한 관점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세상은 비교적 아름다웠으며 나쁜 현실은 변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 젊은이들이 세상에 나갈 무렵이면 생명력있고 깔끔한 세상이 만들어지리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이후 7년동안 개선은 되야 하지만 퇴출되어서는 안되는 산업현장에서 일하면서 꿈도 없고 희망도 없고, 그래서 젊은이들도 별로 없는 어두운 세계속에서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교적 노동하는 사람들은 건강한 몸과 건강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근로현장은 건강하지 못한 모순이 있었다. 반대로 근로현장이 존중받고, 사회적인 지위를 인정받는 곳에서는 개인의 몸과 마음이 건강하지 못한 모순이 있었다.     

오랫동안 법률을 공부하거나 사설학원에서 헌법, 행정학등을 지도하며 책을 놓지 않아서 그런지 정치권이나 법조계의 현실은 항상 친밀(?)했다. 요즘 한참 문제가 되고 있는 고위검찰간부의 성적일탈문제나 대법원장의 일탈, 여배우의 자살사건과 연루된 구세대 엘리트들의 광란적인 행태는 동조와 사회교육의 형태로 신세대 아이돌까지도 교육시켰다는 해석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김학의 전 법무차관혐의사건, 배우 장자연씨 자살사건, 승리,정준영 사건은 '근본적으로' 얽혀있는 사건인것 같았다.

22년전에 주물공장의 용광로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혁신이란 없었고, 인건비와 노동력에서 모든 이익을 얻을려고 했다. 500만원을 들여 그라인더 몇개만 도입해도 품질은 뛰어나게 향상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사업주는 인건비에만 신경쓰고 있었고, 인건비를 아끼겠다고 중국에 공장을 지었다. 그리고 얼마후 회사가 폐업을 했다. 세월이 20년이 흘렀는데도 한국경제의 스타일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일하는 사람도 인간이고 기업주도 인간이며 상품을 구매하는 수요자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자꾸 잊는 경향이 있다.

한 번은 소규모의 버스회사에서 일하면서, 운행횟수를 줄이고 버스기사의 휴식시간을 더 부여하면 어떤 이익이 있을지를 시험해봤다. 혁신적인 기업주와 혁신적인 간부, 혁신적인 기사들이 삼위일체가 되서 나온 결과는 매우 긍정적이었다. 승객은 운전이 안정적인 버스를 선호했고, 승객들에게 쓸데없는 불평거리를 주지 않은 덕에 버스기사들의 정신적 복지도 좋아졌다. 물론 사고도 없어졌다. 서비스상품의 품질이 매우 향상되었음은 물론이다.

오스트리아태생이고 영국경제학자인 하이예크(Hayek, Friedrich August von)는 계획경제나 지나친 공리주의를 경계했다. 그리고 과학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실증주의도 경계했다. 인간을 위하는 실질적 민주주의에 반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다보니 하이예크가 케인즈의 경제사상을 비판하는 일까지 있었는데, 아마도 하이예크는 정부의 재정지출 증대로 복지정책을 추구하는 케인즈의 경제사상이 지나치게 확대되어 큰 정부가 완전히 사회주의화될것을 우려한것 같다. 그러면서도 헌법학자 켈젠의 (Kelsen,Hans) 법실증주의를 '법의 역사적 형성'이라는 관점을 포기한, 달리 표현하면 자연법적인 인간주의를 말살한, 지나치게 과학성이 담긴 사상이라고 비판했다.  


하이예크는 경제학자지만 사회철학자의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내 자신이 저번 글에서 몇 번 썼던 단어인 '가치규범성'을 중시하는 학자였다고 할 수 있다. 몇 개월전 몇몇 경제학자들의 영문원서를 구입하여 읽으면서 이렇게 부지런히 경제학책을 읽으면 나중에 좋은 대학원에 다니면서 학위도 받을 수 있겠으나 내 생각은 점차 실증적이고 합리적이라는 명분하에 인간적인 생각이 날아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잠시 한적이 있었다. 그러나 하이예크는 이런 우려를 해결해주고 있었다. 

폴 크루그먼(Paul Krugman) 교수나 한국의 김상조교수처럼 경제학자가 가치규범성이나 사회철학적인 모습을 띄면 진보주의 경제학자로 매도당할 수 있지만 하이예크교수는 실증성을 반대하면서도 보수주의 성향을 띈다. 결국에는 진보주의 경제학자나 보수주의 경제학자나 경제학은 인간을 위한다는 가치규범성을 띄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할 수도 있겠다. 

극도의 자본주의,극도의 사회주의,광신적인 종교는 모두 인간성을 상실할 위험을 안고 있다는 생각은 모든 것의 결론일 것이다.

케인즈가 하이예크의 저서 [노예에의 길]을 읽고서 칭찬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도덕적으로나 철학적으로 당신에게 동의하오. 문제는 어디에 선을 그어야 할 것이오." "당신은 어디에 선을 그어야 할지 어떤 방향도 제시하지 않았소."  

아마 인간이 극단으로 가는 길을 경계한 것은 하이예크나 케인즈의 일치된 생각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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