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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5일 금요일

의욕의 군주 / 강희제

30여년전 어느 깊은 밤, 시골의 열차역에서 내려 손전등도 없이 산길을 걷고 있었다.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가는 부친을 만나기 위해서 두어시간 겨울바람 소리를 들으며 걷고 있었는데, 어린 나이에 무섭다기 보다 화가 났다. 도대체 부친은 뭐 때문에 저러고 계시는지, 나는 이 밤에 왜 혼자 산길을 걷고 있는지, 알것같으면서도 말로 표현을 할 수 없는 감정이 복받쳐서 숲이 우는 소리도 감성적으로 들리지 않았다. 지금은 어느 정도 알고나서 정확히 언어로서 규명하건데 단순하지 않은 민초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이념이나 정치행태는 감성적인 문제가 아니라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교정해야 할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북한 이전 지도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요리사였던 후지모도 겐지의 회고록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매우 감각적이고 감성적인 김정일 위원장은 영화, 서커스, 술, 외로움,기쁨조, 미각등과 친근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었다. 그 전에도 무리해서 통큰 정치를 표방하며 동양최대의 유경호텔을 짓는다거나 아리랑대축전같은 거대공연등을 행사하는등 상징정책에 지나치게 치중하는 비합리적인 모습을 보이는 면이 있어서 비합리적인 군주로서 역할이 수백만의 인민들을 고난의 행군시기에 아사(餓死)시킨 비합리적인 결과를 이룬것은 당연한듯 싶었다. 군주국가와 같은 곳에서 군주같은 지도자의 파행은 국가와 인민의 파행을 의미하는 것은 당연했다. 후지모도 겐지는 차기 북한의 지도자로서 김정은 국방위원장을 예고하고 있었는데, 어린 나이에도 일본인인 후지모도 겐지에게 일본의 풍요로움과 북한의 궁핍함을 비교하며 여러가지 고민을 상담했던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문제와 해결방법을 일찌감치 배려하고 있었던 점에서 김정일 위원장과 다른 점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고, 한국이나 북한이나 마지막 희망은 서로에게 있는듯 하다. 이념이나 권력이 중요한것도 아닌듯 하다. 심지어는 통일도 중요하지 않은듯 하다. 상호간의 협력이 가져오는 시너지 효과로 굶어죽는 인민은 없도록 하고, 불행한 국민은 행복한 국민으로 만드는 일이 한반도의 정치적인 과제인듯 하다. 내 부친은 극단적인 경우지만 한반도의 민중들은 이념, 분단, 정치행태때문에 모두 불행한 피해자가 된듯 하다.

군주이야기가 나오니 청나라 황제 강희제(재위기간 1661~1722) 생각이 난다. 강희제는 스스로가 인재다. 중국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로 알려져 있다. 청나라는 만주족이 세운 나라인데, 만주족은 한족에 비해 강건한 기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소수의 만주족으로 백여배의 한족을 통치하기 위해서 항상 긴장을 하고 자기 성찰을 한 만주족의 황실은 매우 검소하고 절제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청나라 황실의 일년 비용이 명나라 후궁의 일년 비용이랑 비숫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 청나라의 황제중에서도 강희제는 더욱 엄격했다고 한다. 제대로 수면을 취할 시간도 없이 국사(國事)를 돌보며 꾸준히 무예수련을 하고, 외부 정복활동시에는 항상 친정을 하며 앞장을 섰다고 한다.

일곱살에 황제로 즉위한 이후 아버지 순치제의 유언에 따라서 색니(索尼), 소극살합(蘇克薩哈),알필륭(謁必隆), 오배(鰲拜)등의 신하가 고명대신(顧命大臣)으로 섭정을 했는데, 이들 중 오배가 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청나라는 건국한지 20년이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남쪽의 삼번세력과 대만의 정성공, 서쪽의 티베트, 북쪽의 몽골족, 동북의 러시아, 서북부의 준가르부의 압박을 끊임없이 받고 있었는데, 강희제는 열여섯살이 되어서 오배일당을 제거하고 친정(親政)을 하게 되었다.

오배일당에게 실권을 빼앗긴채로 지내던 어린시절의 강희제는 정치를 하지 않는(못하는)대신 독서와 사색과 무예수련을 하면서 자유롭고 폭넓은 관점을 지닐 수 있었다고 한다. 훗날, 유학을 고증학으로 발전시킨 사고전서나 강희자전을 편찬한 실사구시의 업적을 이룬 점이나 직접 독학으로 역법을 익혀 구역법의 오류를 지적하고 신역법을 추진하여 영리한 카리스마를 보여주며 대신들을 휘어잡을 수 있었던 문리적(文理的)인 능력도 자유로운 소년기의 자발적인 교육이 만들었다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삼번의 난을 평정할때는 조정의 대신들이 오삼계의 강한 반란군에 항복할 것을 권유하거나 장강 이남의 영토를 반군에게 할양하자는 의견을 보일 정도로 어려운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인질로 북경에 남아있던 오삼계의 두 아들을 주살함으로써 배수의 진을 치고 오삼계의 강한 반군과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하는 상황을 만드는 결단력을 보여줬다고 한다. 이때 상대적으로 적은 군대를 오삼계가 지휘하는 중군(中軍)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게 함으로써 나머지 반란군을 오합지졸로 만드는 전략을 펴서 반군을 진압했다고 한다. 이때 강희제의 나이가 28세였는데, 정치가로서 천부적인 소질이나 자발적인 교육의 결실을 일찍 보았다는 역사가들의 평이다.

현대국가의 정치지도자들이 아직도 관념이나 아집속에서 끈적거리고 있다면 강희제를 연구해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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