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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10일 화요일

고독속에서 자아(自我)와의 연결고리를 끊다 / 호세무히카


남미의 강소국인 우루구아이의 대통령은 호세무히카다.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는 그는 젊은 날을 도시게릴라활동과 그로 인해 수감생활을 하면서 보냈다. 급진좌파적인 이미지를 벗을려고 노력하면서 대통령이 되었고, 유일하게 등록된 재산인 20년된 자동차 한 대를 빼고 나머지 재산과 월급을 공익을 위해 '기부'하고 있다. 대통령으로서 모든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으며,우루구아이는 호세무히카 대통령의 임기동안 정치와 경제가 안정된 나라로 평가받고 있다.

언젠가 등소평이 문화대혁명 당시, 숙청을 당해 시골의 공장노동자로 있으면서 시간만 나면 뒷산에 올라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호세무히카도 14년의 수감생활동안 많은 것을 생각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편향성, 아집, 욕망은 강력한 자아의 산물인듯 하다. 고독한 시간동안 끊임없이 자아를 두들겨서 마음을 비운 경험이 있는 지도자는 국가와 국민이 필요로 하는것이 무엇인지 알게된다는 해석을 하는것이 무리가 아닌듯 하다. 욕망이 부글거리는 땅에서 지혜의 샘은 솟아나지 않는다는 확대해석을 해 보았다.

2014년 6월 7일 토요일

At the DMZ


At the DMZ

At the spot,
Around which even the sky
Seems to have the smoke of bullets
And the blurred smog of war,
The wiggling life of spring
Is suspended like a dead volcano,
And so cold

The spirits of trees
Lose their minds before the muzzle of brothers'guns
Being hostile to one another, hating......
And the violet lilac
Waves in the spring wind
Flapping around the DMZ,
Only with strange moves without fragrance.

The father of daddy
Already buried at the spot,
Daddy
As a fine young man,
Walked down to a south
Looking at the northern sky for about 60 years,
Before passing away.
Today
I came here
Along the ridge-line of history.

Looking at the flag of North Korea
Waving before my eyes,
Even my allegiance to our national flag of Korea
Carved a seal in my heart,
I can,t be reconciled to two ideologies.

In the place,
Feeling
The tension of a charged bullet,
I got up
During short the 2 hours' film.

Somehow
Forever-,
Doubting our unification of north and south,
I look
Only at the vacant sky,
Fretfully, in an an anxious state of mind

- Lee Dok-mill -



하늘도
탄환의 연기가 남아
전쟁의 스모그가 뿌우연
그곳에는
봄날의 꿈틀거리는 생명이
사화산처럼 정지되어
그렇게 차디찼다.

나무의 정령은
반목하고 증오하는
형제의 총부리 앞에 정기를 잃고
보랏빛 라일락 나무는
향기 없는 서름한 움직임만
DMZ를 휘돌아 부는
봄바람에 날렸다.

아버지의 아버지는
이미 그곳에 묻히시고
아버지는
해맑은 청년으로
남하하여
육십 여년, 북녘 하늘만 바라다
돌아가시고
오늘
역사의 능선을 따라
나 이곳에 왔다.

눈앞에 펄렁이는
인공기를 보며
내 가슴속에 각인된
태극기에 대한 맹서는
두 개의 이념을 화해시키지
못했다. 

무덤 속같이 고요한 이곳
자유의 마을에
장전된 총알의 긴장을
느끼며
두 시간짜리 짧은 영화속에서
깨어났다.

어쩌면
영원히 - ,
통일을 의심하며
답답한 가슴에
어찌할 줄 몰라 초조히
빈 하늘만 바라본다

- 이독밀 -

2014년 6월 6일 금요일

경쟁과 불안 / 해리 설리반


협력과 공정성에 관한 교육이 부재한 탓인지 자신과 타인의 우열(優劣)을 비교하면서 천국과 지옥을 들락거리는 불안정한 성격을 가진 이들을 많이 본다. 그런 이들은 우월감을 가질 수 있는 환경에서는 무한한 행복을 느끼지만 자신보다 더 거대한(?)것이 다가오거나 쇠락의 지점에 이르러서는 무한한 절망으로 빠져드는듯 하다. 하지만 인성이 성장하는 학창시절부터 우열의 분위기에 익숙한 탓인지 쉽게 고쳐지는 성격이 아닌듯 하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인 해리 설리반(Harry S. Sullivan 1892 ~1949)은 성격이 고정된 구체적인 구조를 갖는것이 아니라,일시적인 사회적 상황과 교류하며 형성되는 진행적인 모습을 지닌다고 말한다. 때문에 개인의 성격에 대한 해석은 사회속에서 대인관계의 틀을 살펴봄으로서 규명될 수 있다고도 말한다.

설리반은 사회속에서의 불안이 정서적인 고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하는데, 이러한 불안에 대한 방어기제로 분리(dissociation), 병렬적 왜곡(parataxic distortion), 승화(sublimatin)를 말하고 있다. 분리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에게 위협적인 것을 의식에서 배제시키는 경우를 말하며, 이중인격, 몽유병, 잠꼬대, 건망증의 증상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병렬적 왜곡은 과거의 나쁜 경험이 나중에 비교할 수 있는 비숫한 상황에서 과거의 경험과 같은 상황으로 왜곡되어 해석되는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면 권위적인 가정의 나쁜 경험이 성장해서 직장상사와의 관계에서도 비숫하게 해석되는 경우를 말한다. 승화는 위협적인 충동이나 실패를 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양성적인 방법으로 해소하는 경우를 말한다.

사회집단의 성격은 개인성격의 종합이란 생각을 하면, 긴박한 상호경쟁과 배타적인 의식의 성장이 사회 전체에 미치는 나쁜 영향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사회 구성원들의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이중인격의 모습이나 수직적인 사회관계의 틀을 벗어날 수 없는 모습, 사회관계가 주는 위협을 피하기 위해서 '저 높은 곳으로'오르려는 출세지향적 사고는 모두 불안한 경쟁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보여주는듯 하다

2014년 6월 5일 목요일

파동(cycle)에 관하여 / 콘트라티에프


학창시절 친구들에게 미래를 알아맞춰보겠다고 장난을 치던 생각이 난다. 경제적으로 열등한 친구에게 반드시 부자가 될것을 예측했는데, 실제로 수십년이 지난 지금은 커다란 사업체를 운영하며 열등감과 극복의 사이클 순환을 고스란히 운명으로 받아들인것을 보면서 친구들끼리 나의 빛나는 선견지명을 칭찬하며 웃기도 하였다. 실제로 몸이 가장 약했던 내 자신은 친구들중 가장 건강한 모습이 되었다. 물론 건강 말고 다른 문제는 말하기도 싫다고 말하며 또 웃었다.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은 경기파동을 겪게 마련이다. 경제영역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을 장기적인 안목으로 살펴보면 파동의 규칙성을 경험하는듯 하다. 권위주의적인 정체(政體)가 무너지면서 갑자기 확산되는 자유에 대한 인식은 갈망의 정도에 비례하여 강력한듯 하다. 인류역사를 살펴보면 종교적인 권위가 지배하는 사회는 과학적 발견이라든지 르네상스와 같은 인간 중심적인 사고가 발전함에 따라서 급격히 붕괴되는 현상을 보이는데, 생명력을 가진 인간사회 시스템의 오류나 오류를 자정(自訂)하기 위한 노력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되는 문제인듯 하다.


경제학에서는 이 사이클을 이해하는게 무척 중요한듯 하다. 물론 현실 경제에 도움이 될 만큼 장기적이거나 거시적이지 않은 안목으로 이해하는것 도 중요하다고 케인즈는 말한다.


 그후 1936에 케인즈가 [고용과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이라는 책을 통해 일반적인 단기 경기변동과 대공황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였다. 그는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총 수요가 감소하면 경기침체나 불황이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케인즈는 오래전부터 고전학파의 거시경제이론이 경제정책의 장기적 효과밖에 설명할 수 없다고 비판해왔다. [일반이론]을 발표하기 몇 년 전에 케인즈가 고전학파 경제이론에 대해 쓴 글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장기 분석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장기에는 우리 모두가 죽는다. 경제학자들의 역할이 고작 태풍이 닥치는 계절에 "태풍이 지나가고 한참 있으면 바다가 잠잠해질 것이다."라고 말하는 정도에 그친다면 그 역할은 너무 쉽고 쓸모없는 것이다.

- N. Gregory Mankiw [ESSENTIALS OF ECONOMICS] -

러시아의 유명한 경제학자이자 통계학자인 콘트라티에프(Nikolay Dmitriyevich Kondratieff 1892~1938? )는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은 불황기,회복기,호황기,후퇴기의 4단계를 거치는 중기파동이 5,6차례정도 되풀이되면서 장기파동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그 원인은 혁신적인 기술과 발명때문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콘트라티에프는 1기 순환은 산업혁명, 2기 순환은 철강과 철도산업의 발달, 3기에는 전력, 자동차, 화학공업의 발달에 원인이 있다고 말한다.콘트라티에프는 1차 소련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입안을 도와 소련의 경제성장을 위해 노력했는데, 스탈린의 농업 집단화정책과 공업과 농업의 불균형적인 발전계획을 비판하다가 숙청되었다. 


생각해보면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의 경기순환을 잘 이해하고 있는 콘트라티에프로서는 지나치게 인위적이고 경직된 공산주의 경제정책의 미래가 불투명함을 생각했을듯 하다. 정치적인 가치판단을 배제해야 하는 경제학자의 주장은 스탈린에게 장애가 되었던것 같기도 하다. 경기순환을 정부가 조절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시장실패의 문제점을 해결할려는 시도가 스태그플레이션같은 정부실패의 결과로 나타나는 문제를 보면 콘트라티에프의 비판은 선견지명이 있었던듯 하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자유주의 경제시스템으로의 회귀'가 진리라고 할 수는 없는듯 하다. 정치적 또는 사회적 가치는 경제적 가치와 서로 깊은 관계에 있으며 자유주의 경제시스템의 문제는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이 그대로 물려받고 있기 때문인듯 하다. 달리 표현하자면 신자유주의 시스템의 문제점은 제거되고 개선되어야 하는 것이 또 하나의 순리적인 사이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스탈린의 정책에 반대한 콘트라티에프는 공산주의 경제정책에 대해서 정치적인 가치판단을 한 것이 아니라 경직된 시스템이 보여주는 반동(反動)적인 의지를 우려했기 때문인것으로 추정된다.


1.사이클은 모든 분야, 모든 영역에서 존재한다.
2.사이클은 오류의 조정과정이다.
3.어떤 경제이념이든지 경직성은 개선되어야 한다.


불운하다는 생각이 들때 "오늘 우는 자여 내일 웃으리라"라는 성서의 구절을 떠 올리기도 하는데, 사이클에 관한 깊은 의미가 성서속에 살아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웃기도 하였다.


2014년 6월 3일 화요일

공동체내에서의 역할분담 / 매킨타이어


한국은 선거때가 되어 교육정책을 위해 일할려는 고시3관왕의 전력을 가진 후보의 가족사가 이슈가 되었다. 비평하는 이들은 '인간'으로서 소중해야 할 가족관계보다 출세지향적인 후보의 성향을 탓하기도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건데 내 자신이 가정,건강, 머리 무엇하나 주어진게 없던 시절, 그 후보의 의지와 노력을 생각하며 법률서적을 읽던 시절이 잠깐 있었다.

생각해보면 부끄러울것도 없이 당시의 수직적이고 권력적인 한국사회의 가치내에서 모두 최선의 가치를 선택했던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먼훗날 나의 모친은 내가 운동에 특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뒷바라지 해줄만한 여건이 안되었음을 후회하기도 했지만 고백하건데 그런 여건이 됐으면 열심히 공부했을것 같다. 더구나 그 당시의 한국사회에서 권력적인 출세외에 다양한 가치는 지금보다 더욱 인정받기 힘든 시절이었기 때문인듯 하다.

사회가 형성하는 가치를 생각하면 고대 그리스의 정치와 사회시스템, 그리고 그런것들을 운영하는 인간의 도덕성은 2000년이 흐른 시대의 한국사회를 무안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은것 같다. 지금의 한국사회를 분열시키는 가장 큰 문제인 이념대립을 해소 시킬려고 노력했던 솔론이나  한 인간으로서 좋은 삶을 산다는것은 인간의 덕을 실현하는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사회적 역할을 중시했던 고대 그리스인의 눈으로 본다면 한국사회는 후진적인 '야만의 땅'인 동시에 '야망의 땅'이라고 불릴듯 하다.

도덕성을 중시하는 정치철학자인 매킨타이어(Alasdair Mcintyre 1929 ~ )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타인과 연관을 맺고 살아감을 전제로 합리적이고 좋은 삶을 규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동시에 한 공동체내에서 살아가는 개인은 다음 세가지 사실을 항상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사회적 선을 추구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 둘째, 어떤 행위가 이루어진 이유에 대해서 끊임없이 규명할려고 노력함으로써 좋은 삶을 이끌어내는데 공헌할 것, 셋째, 전통을 축적하고 발전시켜 미래세대에 물려줄 것 등이다.

한때 도덕적 가치를 상실한 형식적 합법성이나 공동체주의로 많은 문제를 일으켰던 독일은 사회나 국가개조의 가장 근본적인 방법인 '교육'을 통하여 개선의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한다. 능률성과 충돌하여 문제가 되긴 하지만, 국민, 나아가서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잊지않는듯 하다.


현실을 살펴보건데 한국사회에서 수직적이고 권력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현상은 노블리스오블리제의 의무를 지니고 있는 지도층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저변에 속속들이 베어있는 병리적 현상인듯 하다. 선거권을 가지고 있는 시민이 그런 문제를 개선하는 속도가 느린 이유도 '모두가 익숙해진 학습효과' 때문인듯 하다. 각자의 사회적인 역할을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는 교육이 이루어진다면  모든 시민들에게 책임과 능력과 심지어는 도덕적인 감정도 갖추어질 것으로 생각된다.

국가개조는 교육부터 시작된다는 생각이 든다.


2014년 5월 30일 금요일

말을 다 못한 아담스미스, 말을 다 못들은 마르크스


갑자기 크게 발전해 나가는 전망있는 회사에서 일하던 정직하고 순박하기만한 가장이 '융통성이 없음으로 인한 회사와 동료들과의 부조화'란 이유로 제대로 일을 해 보지도 못하고 강제 퇴직당하는 일을 목격하였다. 비숫한 경험을 딛고 일어선 그 회사 사주(社主)의 집념과 속속들이 능률적으로 움직여 나가는 회사의 메커니즘을 보며 경제적인 효율성과 도덕적인 가치에 대하여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던 적이 있다.

동시에 당장 현실적으로 한국의 사회보장 장치가 일을 할려고 하는곳 마다 비숫한 이유로 쫒겨나오는, 아이 둘을 둔 저 둔한 가장을 구제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고. 모진 결심으로 사주와 같은 성공의 길을 갈 수 있을지, 아니면 가진것은 없지만 선하게 살았다는 세간의 지나가는 바람소리 같은 한 마디를 가치있은 삶으로 착각하며 별이 될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아이 둘을 둔 중년의 독신 여성이 이 어려움을 헤쳐 나간다면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진 곳에서 기회를 활용하라는 의도로 만들어진 성공학 책의 주인공으로 년년세세 등장할 법하다. 마치 미국의 메리케이 화장품 회사의 사주처럼......   

자유주의 시장경제학자로서 대칭사상인 마르크시즘까지 유발시킨 아담스미스의 경제이론은 순기능과 역기능을 확대시키면서 인류 경제사를 200년이나 주도해왔다. 프랑스의 마르크스 철학자 알튀세르( Louis Althuser 1918 ~ 1990 )는 경제가 역사의 흐름을 결정하지만 경제구조보다 위의 상부구조인 국가나 법률적, 이념적, 정치적 영역에도 상대적인 자율성과 독자성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담스미스 이후의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물질적인 성공과 시장실패, 그리고 시장실패가 낳은 과학적 사회주의(마르크시즘)의 팽창,그 이후에 나타난 두 경제 이론의 대립은 인류 역사상(특히 타고르가 극찬했던 동방의 등불인 어느 나라에서)다른 영역으로의 관심을 모두 흡수하는 블랙홀이었던듯 싶다.

원래 아담스미스의 자유주의 경제이론은 당시 청교도적인 도덕적 가치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던 시대에 만들어진 이론이다. 아담스미스는 자유주의 시장경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제 되어야 할 조건이 있다고 말했는데, 그 조건이란 바로 '도덕감정'이라고 말한다.

아담스미스는 인간은 사회 속에서만 살 수 있으며,모든 사회의 구성원들은 사랑과 호의라는 도덕적인 감정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런 도덕적인 감정은 타인의 행복을 침해하지 않는 '정의'와 타인의 행복을 증진하는 '인애'라는 개념으로 표현되는데, 이런 도덕적인 감정이 시장경제의 건전한 운영을 위해서 전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 아담스미스는 경제적인 능률성만 강조하는 분업시스템이 노동자를 우둔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기초 학문을 익혀서 창조적인 두뇌활용도 병행 할것을 권장하고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공공교육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좀 찌질하기도 한 개인적인 말이지만 단순한 기계적인 암기에 익숙치 못한체로 방황했던 내 젊은 날을 자책했던 적이 많았는데, 아담스미스의 생각을 알고는 아담스미스경제이론이 복음처럼 여겨질것을 걱정해야 할 일도 우려가 되는듯 하다.

경제학에 대한 논쟁이 아담스미스와 마르크스가 만든 이데올로기장치를 벗어나지 못하는것 같은데, 알튀세르는 학교, 종교, 매스미디어등 모든 사회제도가 이데올로기장치속에 갇혀 있다고 말한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각성함으로써 이데올로기의 형성과정을 분석하고, 행위적 수준에서 사회관계들을 변화 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말이 어려운데 미국 철학자이며 교육학자인 존 듀이( John Dewey 1859 ~ 1952 )의 말처럼 '사고는 실천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말을 염두에 두면 좋을 듯 하다.

만약 자유주의 시장경제이론은 도덕적 감정이 전제되어야 하며 창의성이 중요하다는 아담스미스의 주장이 경제이론의 전제조건으로서 많이 알려졌다면, 물질적이고 기계적인 마르크스의 경제이론이 등장하지 못했을 법하다. 결국 인간의 도덕적인 감정을 불신하는 마르크스는 해답을 '시스템(장치)' 으로 해결할려고 했고, 그 두 이념내지는 경제이론이 인간의 도덕적인 감정을 배제 시키고 인류 역사상 엄청난 재난을 가져 올 줄은 아무도 몰랐던것 같다.

한국에서는 두 이념의 기계적인 대립이 계속되는동안 인간적인 도덕감정을 찾는 시도가 종교심을 구하는 민중의 마음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듯 한데, 오늘도 회사에서 쫒겨나고 사회보장시스템에서도 배제된 어느 아이들의 어머니가 냉엄한 현실을 기도와 눈물로써 위안을 받고 있는줄 모를 일이다. 내가 생각하기는 반드시 그랬을 것이다.    

2014년 5월 23일 금요일

타성과 습관의 늪에 빠진 북한


노인은 습관으로 사는듯 하다. 노인이 되면 평생 살아온 방식은 습관이 되어 노인의 삶을 지탱하는듯 하다. 좋은 습관은 경험 또는 지혜라는 바람직한 사회가치를 창출하고, 나쁜 습관은 변화를 거부하게 만드는 망령이 되어 노인의 삶과 주변에 우울한 그림자를 드리우는듯 하다. 그래서 노인이 살아온 삶의 궤적속에서 쌓아온 내공(內功)의 성질에 따라 극단적이고 상반된 성질의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는듯 하다.

북한은 아주 오랫동안 외부의 자극을 회피하며 지탱해 온 노후화된 국가인듯 하다. 이념이라고 부르는, 그다지 고귀하지 않은 도그마로 변해버린 가치로 외부의 자극을 통제해버린 결과는 한 국가의 운명을 완전히 망가뜨린듯 하다. 북한을 생각하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만드는 사상이나 이념, 철학, 종교등의 네거티브적인 위상을 다시 한 번 느껴보곤 한다.

가슴에 훈장이라고 이름붙은 망상덩어리를 주렁주렁 매달고 국가행사에 참여하는 북한군 장성들의 모습은, 완벽하게 어두운 북한의 운명을 보여주는데, 가끔은 그런생각이 든다. 저들이 그 사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습관과 타성속에서 흐른 시간의 되돌릴 수 없는 한계를 느끼고 있는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니체는 고귀한 문화를 가진 공동체가 새로운 문화를 수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니체는 미래의 문화는 현재의 천재들이 과거의 천재들이 이루어놓은 문화를 거부하면서 만든다고 말한다. 니체는 과거의 문화를 거부하고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것이 나약하고 비천한 자들이 이루어놓은 문화에서나 혁명 또는 반란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지, 능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는 장소에서는 더욱 고귀한 문화로의 도약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런 면에 있어서는 한국도 경각심을 가질 일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