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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24일 토요일

정보기관과 코끼리아저씨

어렸을때부터 곡마단의 작은 기둥에 묶여있던 코끼리는 성장하고나서 힘이 넘쳐도 작은 기둥을 뽑지 못한다. 정신이 제압당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도 그렇다. 장기간 세뇌를 당하면 자신도 모르게 자립심을 잃어버리고 묻어들어간다. 한국인들은 이념과 종교가 작은 기둥역할을 했다. 인습이나 습관도 작은 기둥역할을 하는데, 나이가 들면 자신은 똑똑하다고 착각을 하는데, 인습이나 습관의 노예가 되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들, 부와 명예 그리고 평안한 삶조차도 작은 기둥이 되어 우리의 발목을 묶는 경우가 많다.

난 신기하게 생각되는 것이 국정원장은 대통령에게 보고해야 할것을 우수석에게 보고하고, 장성급 인사를 정보사령부 수장으로 임명하는 것을 최선생이 결정했는데, 이 지경이 되도록 똑똑한 고위관료들은 무엇을 했나 싶다. 지위와 명예, 인습, 습관, 일상이 모두 코끼리를 묶는 작은 기둥이 되었을 것 같다. 물론 그 이면에는 이념적인 사고가 현실을 정당화 시켜주는 핑계거리로 작용을 했을 것이다.

우수석의 말대로 열심히 존경하면 안된다, 열심히 공부한 당신들 말아먹으면 안된다. 

2016년 12월 23일 금요일

17년전


17년전 최씨와 대통령의 대화에 관한 기사가 났다. 그 쯤에 나도 의미있는 일을 겪었는데, 출중한 기세로 폼을 잡으며 타인의 정신세계에 군림할려는 이들을 몇몇 만나보고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열심히 자기 길이나 가라고 충고하던 때였다. 겸허하고 유순해 보이는 어린 사람의 입에서 느닷없이 그런 말이 나오자 놀라 까무라치는 종교인이나 이념론자, 유사종교인들의 모습을 보며 이 사태를 예측했던 것 같다. 

요즘에는 혼자 애써서 될 일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몸은 청춘을 달리고 마음은 17년의 곱절로 흘러갔다. 개성공단을 폐쇄시킬때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은 받았는데, 확신이 매우 출중한 이상한 최선생이 있을줄이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다고 할 수 없다

피부치료가 노화(老化)를 멈추는 것이 아니다. 노욕(老欲)을 버리는 것이 훨씬 더 젊어질 수 있는 것 같다. 노화도 멀리할려고 할수록 다가오는것 같다. 

한동안 노인분들과 함께 일했다. 과거 냉전시대 군사문화의 희생자가 되어 노폭(老爆)이 된  노인도 보았고, 젊게 살고 싶은 욕망은 있는데, 자기 관리하는 방법도 모르고 노력한 바도 없어서 그냥 부산스럽게 ADHD성향을 보이는 노인분도 있었다. 반면에 노인분들이 가질 수 있는 장점들, 이해심, 안정감, 학습할려는 태도등을 가진 노인분들은 함께 있는 것이 즐거웠던것 같다. 그때는 적지 않은 나이의 내가 젊은이가 되어 기댈 수 있는 곳이었다.

촛불집회속에 우파든지 좌파든지 이념적 스팩트럼이 강한 표현이 나오면 '웬 노인분들이 또'하는 생각이 든다. 이슈가 중요한거지 이념이 숟가락을 얹을 장소가 아니다. 그런데 여당 중요인사가 '좌파정권의 탄생을 막기 위해서'운운한다. 뭘 잘못했으면 인정하고 피드백시켜서 교정하고 새로운 정책 이슈를 찾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다급한 김에 이념적 결집체를 만들어 최소한의 지지율을 지키자는 노인의 소극성과 고집을 보여주고 있는듯 하다.

야당이라고 구태의연한 노인정치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정책이슈와 무관하게 맹목적인 대중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대중정치성향으로 분위기를 이끈다면 '노인정치'가 될 것이다. 

2016년 12월 20일 화요일

확신범

대상포진이 걸려 누워있다가 일간신문에 나와있는 선명하고 매몰찬 눈빛의 최씨 사진을 보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져서 벌떡 일어났다. 대통령을 움직인 힘이 저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많이 고민해왔던 것들, 사회유지에 비협조적인 생각들이 이념과 종교등에 기반해서 확신에 찬 생각들로 변신할 수 있었던 사정들이 최씨의 얼굴에 모두 나타나 있었다. '네 믿음대로 되리라'는 종교적 경구는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믿음과 확신과 집중이 삼위일체가 되었는데, 어떤 일을 못해낼까 싶다. 심지어는 한 국가를 혼란에 빠뜨리는 일까지 가능한듯 싶다.

그러나 세상에는 방향이 다른 많은 확신들이 있다. 무너뜨릴려는 확신,일으켜볼려고 애쓰는 확신, 이기고자 하는 확신, 지지 않을려는 확신등 서로 대칭적이기도 한 확신들이 균형을 이룬채 사회는 유지되고 있는듯 하다. 권력은 견제할 힘이 없으면 그런 균형을 가장 쉽게 무너뜨리는 확신이 된다. 선의의 권력이 아니면 아주 심각한 악으로 화(化)한다. 

2016년 12월 18일 일요일

한국에서 권력욕구와 사회교육

지난 겨울, 싸고 좋은 옷, 그리고 젊어보이는 옷을 많이 샀다. 복장을 급격히 변화시킴으로서 나의 새로운 변화로 인한 사회적 시선을 감지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 실제로 변화가 있었다. 사람들에게 새로운 내 모습이 투사됨으로서 나의 생각도 변해갔다. 부유한 복장을 하고(부유해보이되 어느 정도 절제된 복장을 하고) 분양하는 아파트모델하우스를 방문하거나 고급승용차를 선전하는 곳에 가면 소비의도가 있는 사람으로써 오해(?)받는 적이 많았다. 순간 잠시 남이 알아주니 더 이상의 '부(富)'는 필요없을 것 같다는 웃긴 생각이 잠시 들었다.

최종적으로 오명(汚名)을 뒤집어쓸 확률이 많은 권력에 집착을 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저런 행태는 단순하게 욕심이라고 표현하기보다 뭔가 다른 문제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곰곰히 해봤다.

침팬지는 식량 채집에는 놀랄 만큼 적은 시간을 소비하며, 나머지 시간을 분주한 사회생활로 보낸다. 고릴라가 그들보다 작은 침팬지에 비해 비교적 덜 사회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고릴라도 단단하게 결속된 사회집단을 이루며 개체사이에 중요한 연대감을 지니고 있다. 고릴라와 침팬지가 편안한 삶을 영위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중의 하나는, 그들이 다 자라기 전에 자신에게 요구되는 것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갖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주변의 지리를 잘 알아서 어떤 형태의 음식물이 어떤 시기에 풍부하게 있는 가를 알 뿐 아니라, 어떠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가도 알고 있다. 그들이 어린 시절 오랜 기간에 걸쳐 어미나 다른 성숙한 놈들로부터 많은 것을 학습했기 때문에 이처럼 많은 지식을 갖게 된 것이다.

학습기간이 길어지고, 안정된 사회집단에서 생활하게 됨으로써 대유인원의 - 또한 인류의 - 지능이 개발될 수 있었다. 그 학습은, 배워야 할 것을 배우는 것으로 고도의 지능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학습이란 복잡한 사회적 상호작용 - 이것은 지성의 실제적 기민성을 필요로 하는 집단 생활에서 필수요소이다 - 을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이다. - 중략 - 한 무리의 침팬지는 최소한 3대에 걸친 성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또한 10개의 가족을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무리들 중 새끼들은 서로 간에 가장 많은 접촉을 하며, 가족 사이에 다툼이 끊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영속적인 결합을 이룬다. 가족생활의 안전은 다른 가족의 개체들에 관해 학습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며, 이러한 관련 속에서 지위가 성립될 수 있다. 

 - Richard E. Leakey and Roger Lewin의 [ORIGINS]중에서 -   

한때 노인분들이 많은 일터에서 일해본적이 있었다. 그때 대단히 권위적이고 수직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 분들을 많이 보았는데, 주인이냐 노예나 대장이냐 부하냐 하는 극단적인 관점으로 매몰되어 있었고 뭔가 통합적인 관점을 갖출 수 있는 사회적 교육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났다. 물론 자각하지 않고 살아온 분들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한국의 역사라는 것이 사회적 관계를 학습하고 자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은 것 같다. 지위라는 것이 공동체에 대한 책임과 관련된 학습으로 생성되는 것이 아닌 지배적 욕구에 몰입하는 모습은 조선왕조를 벗어나고 일제강점기를 거쳐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받았던 세대의 뼈아픈 현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문제에 관해서 몇 번 글을 쓴 적이 있지만 결과적으로 어떤 형식의 교육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남이 알아주지 않고 존경하지도 않는 권력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냥 불안한 사회관계속에서 제대로 된 사회학습이 없던 결과이며 습성인듯 하다. 좀 모질게 표현하면 3대에 걸친 침팬지 집단의 교육에도 못미치는 학습을 받은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한국의 교육시스템과 내용이 바뀌지 않으면 북한과 같은 심각한 문제를 지닌 공동체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2016년 12월 10일 토요일

飛효율성과 飛공정성

'공(公)적인 지위에서 사(私)적인 활동을 하였다.'

한국에서 지난 10년의 정부의 성격을 위와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반대로 사적인 지위에서 공적인 생각을 하면서 느낀 것인데, 이념을 핑계삼아 피드백환경을 틀어막아놓고 사익(私益)추구에 몰두했던 지난 10년의 정부는 정부수반뿐만 아니라 그 근본이 되는 주변의 영향력을 끼치는 개인이나 세력부터 확실하게 색출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원래 한국에서 이념대립의 경제적성격은 효율성과 공정성의 양립하기 어려운 성질의 대립이 이념으로 변질되어 표현된 것인데, 지난 10여년은 매우 효율적이지도 않고 공정하지도 않았다. 이익집단과 개인들의 사사로운 욕망은 효율성과 공정성문제를 깨끗하지 못하게 해결해 버렸다.

자유주의 이념은 효율성을 추구하고 사회주의 이념은 공정성을 추구하는 것으로 나누어서 인식이 되는듯 하다. 그러나 이 두가지는 함께 추구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노벨상수상자인 미국의 경제학자 케네스 애로우(Kennert Arrow)는 효율성과 공정성의 양립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정부가 조세정책을 통하여 출발선을 다르게 만드는 방법을 제안하고 있다. 적절한 정액세와 보조금으로 불리한 사람에게 출발선을 앞당겨 준다는 이론이다.

경제학자의 해결책은 매우 좋은 것이었지만 무능하고 부패가 심한 사적(私的)정부에서 효율성과 공정성의 조화라는 과제를 다 뭉개버렸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생각하기 싫었던 모양이다. 이념이나 종교는 그런 고민을 한 방에 해결해주는듯 하다. 기도하거나 봉헌하여 하느님께 나라를 맡겨버리거나 생각하는 사람들을 모두 적색분자로 매도해버리는 매우 편리한 방법을 취했던듯 하다. 그리고 뒤로는 매우 사사로웠다. 국민이 화가 나는 것은 이런 문제였던듯 하다.

사사로운 이익을 돌보느라고 효율성과 공정성이 날아갔다. 飛 하였다. 

2016년 12월 3일 토요일

이념과 공급중시경제학

미국의 레이건대통령은 반공주의자였다. 많은 나이에 대통령이 된 것도 반공주의자인 이데올로기성향이 크게 기여하였다. 비둘기파였던 지미카터대통령의 평화주의 군축정책같은 것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절대 포기하지 않을 소련의 팽창주의에 뒷통수를 맞은터라 그에 대한 반동으로 레이건이 대통령이 된것은 상대적인 것이 교대로 주도권을 잡는 사이클상 당연했던 것 같다. 한국은 북한이 존재하는 탓으로 이데올리기문제를 이슈의 전면에 끌어올리면 다른 정책이나 재능등을 무시해도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쉬운 여건을 가졌는데, 그동안 위정자들은 그런 상황의 수혜자가 되었다. 이런 면은 우파와 좌파가 적대적인 공생관계의 헤택을 입은듯이 말도 안되는 편향성을 가지고도 국회의석수를 차지하는 결과가 되었는데, 어쩌면 북한, 우파진영, 좌파진영이 물고 물리면서 시대적에너지를 소모시키는 마이너스앙상블을 이룬듯 했다.

마국의 경제학자인 래퍼(Arthur Laffer 1940 - )는 세율을 인하하면 기업의 생산활동이 촉진되고 근로자의 근로의욕이 증진된다고 했다. 그러니까 정부가 세금으로 돈을 빼앗지 않으면 개인이 일할 의욕이 더 생겨난다는 것인데, 특히 고소득층일수록 그런 효과가 더 커서 부자감세를 적극 추진해야 한다고 하였다. 레이건 정부는 이 학설을 현실 경제에 적극 받아들였고 효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당시 군비확장이나 대외정책등으로 재정적자를 누적시키고는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마주친 반대편 손바닥이었던 소련의 아프칸 침공이나 여러가지 팽창주의 정책등으로 레이건 행정부의 대외정책은 피치못할 상황이었다고 생각하는데, 래퍼의 부자감세학설같은 것은 레이건의 이념성향의 기반위에서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수용되었던듯 하다. 그럴듯 하지 않은가. 복지를 후퇴시키고 재정규모를 줄이면서 세금도 덜 받고, 기쁜 마음으로 그 돈을 투자하여 더욱더 노력하여 더 많은 돈을 벌어서 세금을 더 내면 결과적으로 재정이 풍족해지고, 복지도 더 증대될 수 있으며 나중엔 모두 부우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느 천년에

결국 멍청한 한국의 전 정부에서는 이 학설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부자감세정책같은 것을 취했는데, 문제는 경제활동의 기반은 중산층이거나 그 이하의 경제적계층이라는 사실을 깜빡 잊은것이다. 이념과 학설에 얽매여 잠간 한 눈을 파는 사이 수요측면이 엉망진창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듯 했다. 기업의 물건은 누가 사 줄 것이며 애초부터 서민은 기쁜 마음으로 미래에 투자를 할 자본같은 것을 형성하기는 커녕 그냥 숨쉬기도 바쁜 현실을 잊어버린듯 했다. 부자감세의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기전에 부자든지 빈자든지 기업이든지 소비자든지 서로 연결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했다. 그런 사실은 전 세계적인 관점으로 봐도 마찬가지인데, 수요측면을 무시하고 공급측면을 중시하는 사이 전 세계적으로 수요가 감소하고 불경기가 오고, 동방의 아시아 국가들은 이상한 정치지도자들이 등장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게 된것 같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복지를 강화시키고, 경제적인 관점을 통합적이고 연결된 것으로 이해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이념과 정치와 학자가 트리오로 전 세계 경제를 침체시킨 사실을 빨리 인지해야 할 듯 하다.  

2016년 12월 2일 금요일

미세한 다이얼 / 프리드만

촛불집회의 대단히 온건하고 질서정련한 모습은 문제는 정치가들이지 국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 주었다. 얼마전까지 대중정치의 얄팍하고 극렬한 모습을 인식속에서 떨쳐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정부와 민중이 서로 파괴적인 모습을 보일까 우려했는데, 정작 꾸준히 이상한 모습을 보여온 것은 정치인들이지 국민들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많이 발전하고 많이 생각하는 국민들의 모습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이 와중에 또 이념적 숟가락을 얹어볼려고 했던 사람들이 겸연쩍어지는 상황이 발생했다는 것도 유쾌한 상황이었던것 같다.

통화론자이자 신자유주의 경제학자인 시카고대학의 밀턴 프리드만(Milton Friedman)교수는 우파돈벌레와 좌파선무당을 모두 거부했다고 한다. 특히 좌파선무당에 대해서는 "미세하게 다이얼을 조정해 원하는 결과를 얻어야 한다."고 말하며 경제와 인구가 성장하는 속도에 따라서 서서히 통화공급을 늘리는 방안을 주장했다.

이념이나 종교적인 사고의 큰 문제점은 단기간에 비용이 들지 않는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특성때문에 극단성이나 편향성을 띄기 쉬운 문제가 있는듯 하다. 그러나 생각보다 결과는 훨씬 증폭되어 나타났는데, 북한이나 한국이 앓고 있는 문제의 기본은 이런 이념이나 종교의 특성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도대체 상황과 지향해야 할 목적을 함께 고려하며 토론하여 가능한한 좋은 결과로 유도할 수 있는 자세가 안되어 있었던듯 하다. '기도하거나 불바다로 만들어서 문제가 해결되면 얼마나 간편할까 하는 상상을 현실로 증폭시켜놓고 생각하니 풍비박산이 되있더라는 훗날의 회고가 있을법하다.

중립적인 태도와 고려하는 태도는 다르다. 프리드만의 말처럼 상황을 좀 더 연속성의 관점으로 생각하여 미세하게 다이얼을 조정해 볼 일이다. 내 생각으로는 좀 더 바람직한 결과는 좀 더 소위 좌편향적이겠지만 이유는 좀 더 평등하고 공정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윤리관과 도덕심에 따른 것이기도 하고, 실제로 경험해 보건데, 공정한 사회는 능률성있는 사회를 의미한다는 확신을 여기저기서 얻어보기도 한다.

요즘 들어서 좋은 근로자들을 보기도 하고, 좋은 기업인들의 이야기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요즘 일어난 대통령과 관련된 사건들은 긍정적으로 해석하자면 한국사회의 고질병들을 끊어낼 수 있는 획기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이 된듯 하다. 문제가 미세하게 다이얼을 조정하듯 점진적으로 변화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고, 웬만해서는 현정부에 대해서 모난 생각도 안할려고 했지만 이런 충격적인 상황은 이념이나 종교가 안고있던 원죄적인 특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한국이나 북한은 '이상한 생각'과 그 생각으로 증폭되는 '이상한 행동'을 멈추고 인내심으로 고려하고 미세하게 다이얼을 돌려 볼 일이다. 

2016년 11월 26일 토요일

논리실증의 중요성 / 마하

나는 왜 한반도를 풍비박산으로 만든 비합리적인 이념과 종교같은 관념의 세계를 비판하게 됬는지 생각해보니 그 세계를 너무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렵고 힘든 날 초합리성의 세계를 생각해 본 적이 있었던것 같다. 비합리성이 아니고 초합리성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의 이성과 의지가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잊지않았기 때문에 설령 내 의식이 종교적인 색체를 띈다고 해도 노력이라는 것을 중시하는 것은 변함이 없었던 것 같다. 중학시절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지드의 '좁은문'을 읽다가 힘든 길을 의미하는 '좁은문'의 의미를 빨리 깨달았던것 같다.

현상은 관찰자와 관련되어 나타난다는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마하(Emst Mach 1836 - 1916)의 말처럼 내가 그런 사람이 되지 않고서는 그런 세상을 이해못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 되어 그런 세상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때로는 노동자로서, 때로는 학자처럼, 때로는 정치인처럼, 때로는 스포츠인으로서 변신을 시키면서 국가와 사회의 근본문제인 이념의 문제를 이해할려고 노력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는게 참 많아진것 같다. 겸손과 오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르던때에 비교해서 그렇다는 의미다.

전 정부의 대통령을 보면서 소싯적의 고난을 이기고 성장하여 권력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공감보다는 수직적인 관점에서 비롯된 열등의식의 반동으로 대통령으로서의 중요한 목적을 잊어버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현 정부의 대통령을 보면서 굴러보지 않은 국민대다수 서민의 세계를 절대 공감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내 생각이 옳았던것 같다. 짧은 인생이지만 내가 간간히 경험한 세계이기 때문에 국가의 본질적인 문제를 생각하는 입장에서 정치지도자의 입장을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기도 하다. 이해하거나 옳다는 호의적인 입장이 아니고 스스로에게 냉철하지 못한 대통령들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 하층 서민이자 노동자인 내 삶이 너무 힘든 탓이기도 하다. 그리고 많은 국민들의 마음이 나와 같을 것이다.

마하는 이론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절대공간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사유의 가치가 없는 무의미한 것이므로 배제시켜야 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기독교철학으로 생각해보면 13세기 영국의 스콜라철학자 오컴은 복잡하거나 불필요하고 지지부리한 명제보다는 단순하고 간결한 명제가 진리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인간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무조건 인간은 원죄가 있으며 노력과는 상관없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부철학과는 달리 스콜라철학은 의지와 이성을 중시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는데, 신앙과 실증이 결합할 수 있는 여지를 스콜라철학에서 찾을 수 있을듯 하다. 어쨌든 오컴의 생각(오컴의 면도날)은 마하에게 받아들여져서 보이지 않는 것에 현혹되지 말라는 '현상주의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앞으로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은 이상한 세계에 의식의 발을 들여놔서 한반도를 풍비박산으로 만든 정치지도자들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할듯하다. 10여년전부터 주은래와 등소평의 노력을 통해서 매우 비현실적인 국가를 실증적인 과학강국으로 만들어가는 중국에 대해서 경이로운 생각이 들고 부러웠는데, 결과적으로 과학과 연계된 국방기술,산업과 경제, 모든 면에서 중국은 놀라운 발전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며 초라한 한반도의 자화상을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나마 산업과 과학기술분야에서 애쓰는 다수의 한국인들때문에 근근히 유지되고 있지만 '이념''종교''부패''비리,'권력'비선''공작'같은 이상한 말들이 주인이 된 정치판은 국가발전의 발목을 붙들고 늘어지는 원흉인듯 하다. 

2016년 11월 20일 일요일

정치 뒤의 정치 (Meta - politics)

공안검사는 왜 검사중에 속칭 끝발이 있었을까. 요즘 한국공안검사출신들의 권력에 대한 집착이나 실언(失言)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메카시즘의 잔상을 아주 오랫동안 가지고 있다가 그것이 소용없게 된 시대에 들어서서 방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냉전 시절의  공안 검사는 이념의 정점에 있는 권력가였다. 이념이나 종교와 같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는 이념이나 종교를 직관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자가 권력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 것들은 추상적이라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될 수 있는 다재다능한 적용도구로서 사용되고 있었다. 마녀사냥이나 스탈린의 대규모 숙청, 메카시즘에서 보듯이 수틀리면 옭아맬 수 있는 '매우 나쁜 도구'가 됨을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사회주의 국가의 정치장교처럼 한국의 공안검사는 배후인물로서 작용할 수 있는 조건을 가졌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습성은 꽤 오래갔다.

아주 젊고 패기 넘치던 시절에 종교집단으로부터 '능멸'을 당한적이 있다. 이미 종교애 몰입하여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같은 지인과 다수의 신자들이 성직자의 지시에 따라서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에 분노하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념문제와 맞닥뜨릴려면 이 상황이 맷집을 키우는 좋은 훈련장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6개월을  참여했는데, 실제로 많이 유익했다. 이후 대단히 이념적이고 종교적인 정치지도자시절에 호사를 누렸다. 이념이나 종교는 상상하는데로 그림을 그리면 수많은 적과 동지를 자유자재로 만들어낼 수 있는 암상(暗想)을 떠는 좋은 도구가 됨을 여러번 입증해보았다.

한반도의 정치적문제의 근본은 그거였다. 정치 뒤의 정치를 장악할 수 있는 정치가가 없었던듯 하다. 오히려 야합하거나 종속되어 좋은 상황도 뭉개버리기 바빴으며 때로는 주체사상처럼 스스로 만들어놓고 종속당하는 괴이한 짓도 멈추지 않았던듯 하다. 항상 그래왔지만 내 자신이 물려들어간 한국의 지난 10여년을 회고해보면 주어진 일은 하지 않고 정치적 그림을 그리기 바쁜 정치판을 보면서 굉장한 문제가 있으며 더 큰 문제가 다가옴을 느꼈고 실제로 그 거대한 문제가 다가왔다. 이전 정부가 끝나면서 이런 정부가 한 차례 더 반복되면 한국의 국운은 내리막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한차례 더 반복되었다.

우파정부라서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정치 뒤에 작용하는 것들이 지나치다. 대통령이 정치를 못하거나 실수를 하면 그것을 바로잡아 줄 수 있는 시스템이나 인재가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사익(私益)이 공익을 구축(毆逐)하면서 상황을 충분히 이용하여 개인의 이익을 챙기기에 바빴다. 이 번 기회에 이전 정부서부터 숨은 그 놈을 찾는데 전력을 다 해야 한국의 미래가 바로 설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2016년 11월 12일 토요일

주니어(Junior)

주니어가 통치자가 된 남북한이 모두 리더쉽의 부재(不在)를 앓고 있는듯 하다. 북한은 김정일 국방위원장때부터 한국은 전정부부터 리더쉽의 문제가 심화된 것으로 생각된다. 시니어와 주니어의 구분은 혈통적인 면에서도 그렇지만 시니어가 일으킨 조직이나 공동체에 편승한 주니어가 조직이나 집단 내부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져온 측면도 생각해볼때 국가나 재벌과 같은 기업경영모두에서 창조적인 입장에 있지 않았던 모두를 주니어라고 봐야할 것 같다.

주니어는 시니어보다 조직과 자신을 일체화시키는 능력이 부족한듯 하다. 시스템자체가 자신이었던 시니어의 각오와 인내심을 넘어설 수 없는듯 하다. 정치학자 골만(Goleman)은 조직의 효과나 업적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리더 개인의 능력함양과 원초적 감동 리더쉽(primal leadership)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리더가 될려고 하는 개인은 자신을 잘 파악하고 확신과 도전의식이 있어야 하며 자기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도전의식과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의미인데, 이들은 학문적인 연구활동이나 황태자교육등을 통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닌듯 하다. 그냥 불확실하고 위험한 공간에 내팽개쳐져 살아남는 가운데 터득해가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 도덕성이나 윤리성, 공감과 애정등이 성장해가는 리더의 마음에 뿌리를 내려야할듯 하다. 위험을 각오하거나 안일함이 가져다주는 나른한 행복을 거부하고 살았던 사람들의 마음은 나름 인간의 경지가 아니었던듯 하다.

2016년 11월 4일 금요일

숨은 그 놈 찾기 / 전문가

한창때 몸도 아프고 부친문제로 1년여를 세상과 단절되어 지낸적이 있었다. 좋은 것도 먹지 못하고 뛰고 운동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 후 부친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나는 병이 치료된 엇갈린 운명이 되었다. 부친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은 이유로 이념문제에 대해서 한 소리 하겠다고 잠재의식속에 결심을 꼭꼭 담고 나왔다. 그런데 하필이면 종교랑 랑데뷰하는 사건이 생겼다. 굉장히 훌륭한 성직자를 본 적도 있었고, 사이비종교의 교주와 같은 행태를 보이는 자를 본 적도 있었는데, 아마 내 마음속의 허전함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의식이 맑아져 그쪽 사람들의 세계에 발을 디뎌놓았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원래 책을 좋아해서 다방면의 지식이 많았던 이유로 최대한 학리적(學理的)인 관점을 가지고 관찰하고 시험하며 분석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당시 이념이나 종교와 인간의 심리관계를 파악하는데 영향을 준 소설책은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나르치스와 골드문트][크눌프]와 같은 작품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니코스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미칼레스대장][골육상잔][그리스도 최후의 유혹]같은 작품들이었다. 그런거 보면 어떤 종교에서 신자들을 외부의 교양서적과 완전히 단절시키려는 시도를 이해했다. 신자들이 아는 것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교세확장에 도움이 안될것이다.

이 세상에는 전문가들이 많다. 나는 실제로 초능력자들을 많이 보았던것 같다. 40년동안 지게차를 운전한 지게차의 달인, 모든 것을 상업적 마인드로 계산하여 그 분야의 귀재가 된 상인, 고시3관왕, 쪽집게학원강사, 천재시인, 힙합을 끝내주게 추는 청년, 하루 20시간 알바로 년봉 5천만원을 번 사람, 턱걸이 기네스북 기록자, 김연아 선수, 남극을 걸어서 횡단하는 사람, 그 중에 최고 나쁜 놈은 사이비교주인것 같다.

이들은 앉아서 남을 관찰하고 남을 움직이는 전문가다. 정신적인 허점을 보이면 치고 들어올줄 안다. 어차피 그 일만 한 숙련된 심리전문가이기 때문에 비숫한 능력이 없으면 말려들어가기 일쑤다. 그래서 시민들에게 인문학적이고 철학적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고, 꼭 사이비종교가 아니더라도 강하고 객관적인 의지가 없으면 구원을 위한 종교조차도 의타적이고 맹목적으로 기대는 상황이 생긴다. 한반도에서는 이념이 그 이상의 교조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 이념과 종교로 풍비박산이 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민들은 각자가 숨어있는 자신을 찾을 수 있어야 하고, 드러나지 않게 시민들의 의식을 지배할려는 심리전문가들을 엄정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협동과 공리(共利)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회가 더욱 발전할 것같다.  

2016년 10월 29일 토요일

사회시스템의 건강

꽤 오랜 기간동안 주로 몸을 움직이는 일을 많이 했다. 그리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생각을 했다. 한때 사람들을 잘 모르는 정치인이 말했던 것처럼 사회안전망을 갖춘 복지국가가 사람들을 게으르게 만들까 하는 문제를 항상 화두삼아 보았다. 그런데 현실을 그렇지 않았다. 내 자신만해도 안일한 삶을 싫어하기에 격한 일터로 다니는걸 좋아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랬다. 많은 재산과 학벌을 가지고도 험한 일터를 다니는 사람들도 많았고, 어려운 사람들은 어려운 사람들데로 근로의 즐거움을 느낄 줄 알았다. 언젠가 창업을 하더라도 일을 즐거워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병들지 않은 다른 세계가 있다는 신뢰감을 주었다. 그리고 내수진작으로 경제를 활성화 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것도 물론이다,

이제 즐거운 이야기는 그만하고, 근로하다가 힘들면 지난 시간을 회고해보곤 한다. 아련히 떠오르는 불운한 기억들은 주로 종교와 이념에 관한 아주 불쾌한 기억들이다. 직관이라는 명분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에 제압당하여 갈길을 헤메고 다닌 많은 시간들이 후회스러웠다. 정확히 표현하면 그것들과 맞대응하느라고 허비한 시간이 안타까웠다는 의미다. 사회의 어느 한 부분이 골병이 들거나 정신이 골병든 정치지도자가 등장을 해도 사회시스템이 굳건하면 단기간에는 별로 문제 삼을 것이 없어보인다. 이런 굳건한 사회시스템은 사회시스템 자체가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형성된 것이어야 하고, 민주화가 제대로 되고 다양성을 인정 받아야 만들어지는 시스템이다. 권력이 한 부분에 집중되면 액튼의 말처럼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경험을 하게되는데, 그 이유는 시스템의 치유기능이 망가지기 때문이다.

한 때 어느 종교단체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성직자의 카리스마가 신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가를 생각해 보았는데, 신자들의 다양한 지식과 다양한 경험이 부족할수록 카리스마 있는 성직자의 정신에 포획 당하는 현상을 보았다. 아마 국가도 그러할 것이다. 보수든지 진보든지 '추종자'나 '빠'같은 맹목적인 신뢰가 있는 국가는 골병이 들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자주 언급했지만 이념과 종교가 지배하는 한국사회는 교육개혁부터 시작해야 한다. 요즘 젊은이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고 말하지는 못한다. 사회가 흘러가는 모습을 보면 부정적인 사회교육의 역기능도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른들의 영향을 받아서 이미 망가져 버린 젊은이들의 정신도 생각을 해봐야 한다.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인 정신이 지배하는 사회시스템 안에서 이상의 날개를 펴는 일은 가당치도 않다.

불교나 기독교에서의 오랜 논쟁중의 하나는 구제나 은총을 받는 길이 '남의 힘을 빌어 이루느냐' 아니면 '자신의 힘으로 이루느냐'하는 문제인데, 아마 기독교에서 전자의 입장은 캘빈(Calvin)이나 루터(Luther)의 입장이고 후자의 입장은 카톨릭의 예수회입장으로 전해져 오고 있는듯 하다. 역사적인 종교사상가였던 파스칼은 프로테스탄트에 좀 가까우면서 구제받을 예정인 인간은 미리 신에 의해 정해져 있고 그 예정자가 정말로 구제받기 위한다면 노력을 해야 한다고 절충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만약 종교적인 입장에 있으면서도 노력이 없다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 하는 답은 이미 한반도에서 종교나 이념이 보여주는 현상으로 정확한 답이 나오는 듯 하다. 생각이 없는 맹목적인 종교적 세뇌속에서 사회시템 자체가 골병이 들어가고 있는 모습을 경험하고 있는듯 하다. 무조건 기도하면 될 일이 아니다. 특히 정치지도자는 홀로 설 수 있는 외로움을 견뎌야 한다.추종자가 있는 것은 비극이다. '빠'가 있는 곳에 '까'가 있다. 담백하고 객관적이며 중립적인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정신적인 균형이 필요한데, 많은 의지가 있어야 할 듯하다. 모범이 되는 정치지도자와 시민들, 그리고 건강한 사회시스템이 갖춰질 날을 기다려 본다. 

2016년 10월 28일 금요일

한반도의 종교와 이념의 미래 / 마빈해리스

몇 번 밝힌 바 있지만 종교와 이념은 상당히 유사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을 각자 믿는 이들에 의하면 상대방, 이념은 종교 종교는 이념이 대단히 적대적인 영역에 있을 것이다. 자신들이 믿어서 행복한 만족감에 기여하지 않고 오히려 방해하는 것이라면 배척해야 하는 것이 인간 본능상 당연한 것이다. 여기서 서로는 영역싸움과 세력싸움이 일어나게 되는데, 자본주의 이념은 좀 더 자유로운 영역속으로 종교를 포용하는 관대함이 있는 반면에 마르크시즘은 '과학적'이라는 명분으로 실증할 수 없는 종교적인 영역을 배척하게 된 것은 당연하다. 물론 상대성의 원칙에 따라서 종교를 포용하지 않는 마르크시즘을 종교가 배척하는 것도 당연한듯 싶다. 한반도는 이러한 대립구조가 뚜렷하게 표면으로 나타나는 공간이기 때문에 종교와 이념, 이 두 가지 문제가 해결해야 할 모든 이슈를 포식하는 부작용이 있었고 이런 문제로 국가가 발달장애를 일으킨 것은 유감이다.

유명한 인류학자 마빈해리스(Marvin Harris)는 이런 문제를  [OUR KIND]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소련의 국가정책은 종교를 지배 계급이 대중을 혼미케 하기 위해 퍼뜨리는 값싼  아편이라고 보았던 마르크스의 견해에 입각해 있었다. - 중략 - 그렇다면 소련이 붕괴되기 직전까지도 스스로를 태연히 무신론자라고 공언하기를 거부한 이가 적어도 1억명이 되었던 것은 무슨 까닭일까? 무신론자들이 신자들에 비해 특별히 잘살도록 보장하는 데 소련 체제가 실패한 것도 그 해답이 될 것이다.  - 중략 - 소련 경제는 소비자의 생필품 생산에 관한한 극도로 비효율적이었다. 고기, 야채, 과일의 만성적 결핍, 적절한 주거의 고질적인 부족, 그리고 조잡한 재화와 서비스로 인해 소련 체제는 비신자들에게 무신론적 입장을 견지하는데 드는 심리적 비용을 보상할 만큼 충분히 배려하지 못했다. 

- 중략 -

소련과 달리 미국에서는 신자나 비신자나 모두 자유롭게 전향 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의 무신론은 오랫동안 <하느님을 믿지 않는 공산주의>와 연계되어 생각되어 왔고, 그래서 미국의 적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천명하는 적개심 비숫한 것이 함께 따라 다녔다. 미국에서 종교를 공공연히 비난하거나 비웃고 무신론적인 믿음을 대놓고 옹호하는 사람들은 고용주나 상사로부터 미움을 받고 사회적으로 소외될 각오를 해야 하며, 근본주의적 신앙이 우세한 지역에서는 심지어 신체적인 학대를 받을 위험도 무릅써야 한다. 동시에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천명하는 법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조세 제도는 종교기관을 간접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 중략 -

미국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과 무신론에 대한 두려움을 연계시키는 것이 틀리지 않다면 냉전의 종식은 미국과 소련에서 신자의 비율을 수렴 시킬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소련이 자유 발언 운동의 일환으로 교회에게 선교의 권리를 부여했다면, 소련의 신자 수는 분명히 늘어날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공산주의자들이 집과 교회를 앗아가리라는 두려움이 미국인들을 더 이상 지배하지 않는다면, 신앙과 예배를 자유롭게 비판할 미국인들은 더 많아질 것이다.

- 중략 -

장기적으로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단 한가지 뿐이다. 종교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신앙과 불신앙 그 자체의 내적인 가치가 아니라, 컴퓨터 사회가 궁극적으로 발생시킬 특수한 정치 경제적 시스템과 관련된 신앙과 불신앙의 내적인 가치라는 점이다.

현대 사회가 다양성을 띄게 되면서 사람들에게 만족감을 주는 것들도 다양해진다. 하지만 냉전시대의 구태의연한 국가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한반도에서는 남북간의 이념대립이라는 문제와 연계되어 꽤 오랫동안 종교와 권력이 융합하여 사회발전을 가로막는 문제가 있었는데, 지난 10년은 그런 문제의 절정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든다. 단언컨데 시민들이 추구하는 다양한 가치에 호응하지 않는 이념이나 종교는 그 자체가 쇠망하든지 아니면 그것들이 지배하는 사회 자체가 쇠망하든지 하는 결과를 보게 될 것같다. 북한을 보고, 지금의 한국을 보면 답이 나오는 일이다. 

꽃 지는 팔도강산

어렸을때 흑백티브이로 본 드라마중에 [꽃 피는 팔도강산]이라는 프로가 있었다. 한참 경제가 용트림하던 시절에 희망과 웃음소리 가득한 드라마속 주인공들의 모습은 아직도 아련한 추억으로 남는다. 권위주의적 정치권력이라도 좋았다던 추억들은, 생각하기에는 너무  먼곳에 있는 정치적관점과는 전혀 다른, 상승하는 경제적인 현실이 좋은 추억으로 자리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 인연이 꼬리를 문 곳에서 국가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러잖아도 10여년 전부터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정치가 아닌 이념적이고 종교적인 정치의 위험성에 대해서 많은 시간과 기회비용을 들여서 알리고 설득하는 중이었는데, 애쓴 보람이 없다. 10여년째 국기(國氣)를 흔드는 종교적인 손에 한국이 흔들리고 북쪽에서는 이런 상황을 좋다고 비난하고 웃고 있다. 누군가가 내 처지를 보고서 눈이 한개 달린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는 눈이 두개 달린 사람이 등신이라고 하더라.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내 눈에는 남북한이 제정신이 아닌듯 하다. 

2016년 10월 21일 금요일

감정이입의 정치

여러가지 일에 시간과 관심을 배분하면서 특히 신경을 썼던 일중의 하나는 어느 한가지 일에 관점을 붙들어매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의 욕심과 의지가 담긴 자아가 강하면 그런 생각은 오랫동안 발목을 잡는듯하다. 그래서 극단적인 생각들이 탄생하는듯 하다. 극단성은 습관이며 늪처럼 빠져들어가는 암흑의 미로다. 어려운 시절, 정보기관의 사찰에 순응하지 않고 대응으로 맞섰던 일이 있었는데, 여러가지로 큰 도움이 되었다. 어떻게 하면 자아(ego)에 갖혀있는 상태를 빠져나올 수 있는지를 알게 된 것만해도 큰 수확이었다. 그때 줄기차게 운동을 했는데, 지금은 준수한 운동실력을 갖추게 됬으니 그때 그 정치지도자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가 쉽게 끝나지 않는 문제라는 걸 인식하고 있다. 개인에게도 버릴 수 없는 습관(때로는 전통이라고도 미화시켜 표현한다)이 있는것처럼 조직이나 집단, 때로는 정당처럼 동(動)적인 추세를 담고 있는 집단조차도 전통과 습관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매번 깨닫는다. 특히 요즘 대통령의 신변과 관련된 일이나 부패문제와 관련된 소식을 들으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흔히 잘 모르고 타인을 판단하는 경우가 많은데, 자신이 살아온 환경이나 생각, 지식의 깊이등이 판단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듯 하다. 뜻밖에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 타인을 세뇌시킬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거꾸로 판단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어떤 정치적인 문제도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념이나 종교적인 세뇌와 관련이 되어 있는데, 공감능력은 없으면서 확신만 가진 생각들이 세상을 교란시킨다. 심지어는 정치지도자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도 간혹 생각이 나는데, 어떤 생각이 권력의 정점을 지배하고 있으며, 그 권력이 지배하고 있는 시민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암울한 미래를 가진 땅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일단 정권을 잡으면 법률과 규칙을 제정하거나 개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여기는 합법적인 규칙, 상위 규칙, 법정 판결, 법령 또는 기타 법률이나 소송절차법등이 포함된다. 정치가들은 반대파의 제안을 물리치고 자신들의 제안(그들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을 관철하기 위해 싸운다. 이러한 정치활동은 조직화에 근거하고 있다.

- 중략 -

만약 정치적 의회가 감정이입에의 원칙에 근거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치가들을 선택하는 방식, 정치적 의회가 통치하는 방식, 정치가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에 혁명적인 변화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 중략 - 감정이입이란 당신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마음에 간직하는 것,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무시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감정에 민감해지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결국 집권하기 위해 "적대자와 싸운다"와 "적대자를 무찌른다"는 생각과 명백하게 모순된다.

- 중략 -

대립을 해결할 능력이 없는, 조직화하는 정치가들의 실례는 무수히 많다. 감정이입하는 정치가는 아마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와 데 클레르크(F.W.de Klerk)남아공 대통령을 본받을 것이다. 서로가 상대진영으로부터 테러리스트로 규정되어 있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고 감정이입하려고 애쓰면서 혐상테이블에 앉았다. 이런 행위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다른 사람의 감정과 동일시 함으로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 Simon Baron - Cohen(캠브리지 대학교 발달정신병리학교수) -  

꽤 오랫동안 어려운 근로자들의 삶을 체험하고 있는데, 사실 체험이라고는 하지만 내 자신이 어려운 근로자 그 자체이상이 아닌 처지로서 감정이입이 되는 건 당연했다. 여기서 근로자들의 입장이 단순하게 어렵다거나 기업이 어렵다거나 하는 이분법적인 생각은 나오지 않았다. 당사자가 되고보면 생각할 일이 훨씬 많아진다. 즉각적인 대응이 필요한 일에 휘말렸다는 긴박한 사정이 있기도 하고, 급한 문제는 냉철한 판단을 필요로 한다는 의무감이 개입하기도 한다. 어떤 진보주의자들이 생각하는 노동자는 무조건 힘들고 심지어는 노동자가 아름답다거나 하는 문제도 아니고, 반대로 어떤 보수주의자들이 생각하는 반대의 생각도 타당하지 않는듯 하다. 생각보다 미래의 적절한 해결책이 중요하다. 그래서 품질이 떨어지는 신앙이나 멘토를 참조하는 정치가 있어서도 안되고, 생각하지도 않고 공감에 미친듯이 환호하고 적대감에 부르르떠는 대중이 있어서도 안된다. 그런 얄팍한 사고는 이상한 확신에 포획되기 쉬운 문제가 있다. 한반도의 문제는 그런 것이다. 자아를 버리고 서로서로의 입장을 공감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2016년 10월 14일 금요일

독립경제 연결경제 / 경제포토폴리오

학창시절 일반선택과목으로 전공과는 다른 경제학과 4학년의 한국경제론을 수강했다. 20년도 훨씬 더 되었는데, 당시 소위 '운동권'의 논리와는 다르게 중소기업을 무시한 재벌위주의 경제성장정책을 비판하는 기말고사답안지를 제출하여 A플러스를 받았던 경험이 있었다. 당시 우연히 이내영씨가 지은  급진 좌파적인 시각에서 해석한 한국경제의 종속성이라든가 신식민지경제주의 한국경제의 문제점을 서술한 [한국경제의 관점]이란 책을 보았는데, 내 입장은 한국경제의 문제는 종속성문제는 아니고 포토폴리오 배분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숙하게도 연결과 소통이 경제활동에 있어서도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였던것 같다. 얼마후 신문기사를 보니 해외로 나가서 노동자와 외판원 생활을 하면서 나중에 영국에서 중계무역을 하며 통일연구회회장을 맡았던 장민웅씨의 기사가 나왔다. 장민웅씨는 '"회전과 출입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실패와 성공사이, 국경과 국경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는데, 그런 배짱있는 자세가 매우 부러웠고, 사람의 인생이나 국가의 생명활동도 그런것이 옳다는 생각을 했던것 같다. 그것은 경제적 정치적 민주화와 자본주의의 정상적인 운영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식민지주의나 종속성을 두려워해서 독립경제를 유지하고 있는 북한은 경제의 성장뿐만이 아니고 최소한 현실유지를 하기 위해서라도 시장성이나 무역과 같은 '경제적인 소통'이 기본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이념적인 관점으로 경제활동을 해석하기 때문인데, 보는 관점에 따라서 종속이론이나 식민지주의 경제현실이 맞을 수도 있지만 회피할 문제는 아니고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이익을 추구할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아주 오래전 기말고사 답안지에 일본과 대만의 중소기업본위의 경제정책을 본받지 않으면 언젠가 큰 위험에 빠질 것이라는 답안을 제출했다. 얼마후 대학총장까지 지내신 낙천적이고 익살스러운 경제학과 교수님이 한국의 성씨를 있는데로 다 쓰라는 작은 문제까지 내서 천방지축마골피까지 일사불란하게 쓴 덕에 학문적인 진의는 의심스러운 시간이었지만 당시 개인적인 소통이 안되어 건강과 가정환경이 모두 최악이었던 만큼 한국경제도 소통이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때 태어난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할 무렵인 지금 삼성전자와 현대조선소등 재벌기업이 흔들리자 한국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삼성전자 내부에서도 지나친 성과위주의 기업운영방식과 관료주의 행태를 자성하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데, 동양적인 종특(종족의 특성)인 만큼 사회전체가 수직적 관점이나 물량적인 성과에 집착하는 성향이 있는것 같다. 중소기업들을 여러군데 돌아보았는데, 혁신적인 모습이나 스마트한 생각은 없고, 기업과 종업원은 근근히 살아나가고 있었다.

온라인으로 SERI(삼성경제연구소)에 가입을 하여 종종 어떤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보았는데, 어느 날 가입해제가 되더니 새로운 연구결과나 내용이 개시되지 않았다. 도대체 SERI는 왜 입을 다물었을까. 경제정책전망을 함에 있어서 허구에 찬 장미빛 예상을 한 정부의 경제전망과는 달리 냉철한 저성장전망을 해서 정부의 미움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혹시나 어두운 경제전망의 미래가 연구소의 모태기업인 삼성과 같은 재벌기업의 불안한 미래에서 비롯될 수 있기 때문에 자승자박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혀서 입을 다물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덧붙여서 생각이 드는 것은 경영주의 2세승계문제와 관련해서인데, 국가도 그렇고 기업도 그렇지만 성장과 혁신요구에 시달리면서 창업을 한 시니어와는 다르게 국가와 기업을 승계받은 주니어의 능력은 시니어를 넘어설 수 없다는 생각도 든다. 많은 '다른 생각'들을 수용하여 다시 혁신의 길을 가야 하는데, 특히 중요하게 생각할 일은 국가시스템이나 기업시스템은 독자적인 것이 아니고 시민이나 소비자들 또는 하청업체들과 같은 그동안 소홀히 했던 모든 것들과 연결된 구조라는 것을 빨리 인식해야 할 것 같다. 개혁적인 자세나 소통과 관련된 태도가 이념이나 종교, 아니면 개별적 이익에 억압되어 순환이 멈추고 활력도 잃어서는 안될 것 같다. 

2016년 10월 8일 토요일

경쟁과 기여 그리고 통일 / 게잡는 노인

선의의 경쟁은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국지적이고 지엽적이고 이기적인 목적을 띄게되면 경쟁은 나쁜것이 된다. 시장경제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경쟁에서 이긴 승자의 태도가 생산물이나 세금을 통해서 사회공동체에 기여를 하기때문이다. 아마도 미국사회에서 기업경쟁의 최종승자인 MS나 구글같은 기업들과 기업주의 기부행위나 좋은 근로환경등의 기여가 없었다면 미국사회는 시장경제의 중심국가의 지위를 잃어버리고 다른 경제적 이념을 모색해야 할지 모른다. 한때 카네기는 기업경쟁에서 승리하고 나서 많은 비난을 받았고 미국사회가 자신의 승리에 그렇게 달가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고 한다. 결국 카네기 재단의 설립같은 많은 기부행위가 있고나서부터 평화로운 삶을 살게되었다고 한다. 자신의 성공이 무엇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는지를 깨닫는 기업인이 많은 미국사회는 빈부격차가 다소 있어도 승부에는 순응하는 성향이 있는 시민들덕에 그다지 격변적인 사태는 없는 편인듯 하다. 

후진국이나 신생국의 경쟁시스템이 제대로 발동하고 못하고 부정부패나 지하경제의 활성화로 왜곡되게 되는 이유는 국민각자가 승리의 바탕이 된 사회에 대한 인식과 기여에 대한 생각이 없기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러시아 같은 시장경제의 역사가 짧은 국가도 비숫한 상황을 겪는듯 한데, 정치적인 민주화와 더불어 경쟁보다 더 깊은 의미를 인식할 수 있는 시민이 많을수록 시장경제는 성공을 할 수 있는듯 하다. 핀란드와 같은 국가가 훌륭한 복지국가라고는 하지만 시장경제의 도덕을 완전히 내면화시킨 바탕위에서 이루어진 복지국가라는 점에서 세계적인 칭찬을 받는 사회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는듯 하다.

한 청년이 바닷가에서 게를 잡는 노인을 만났는데, 대바구니에 잡은 게를 집어넣고 뚜껑을 덥지 않고 내버려둔것을 보았다. 한 바구니에는 게가 한마리밖에 없었는데 뚜껑은 닫혀있고 한 바구니에는 게가 여러마리 있는데 뚜겅이 열려 있었다. 의아한 청년이 그 이유를 묻자 게가 바구니에 한마리만 있으면 기어나올려고 애쓰지만 여러마리가 있으면 나갈려고 애쓰는 게를 다른 게들이 끌어잡아 당긴다고 하였다.

시장경제의 도덕을 내면화시키지 못한 국가의 경쟁시스템은 게들의 견제와 같은듯 하다.

사실 혼자 있으면 할 일이 많아지고 아이디어도 많이 나오고 창조적인 태도를 유지 할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있어서 힘든 사회라면 그 사회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레드오션적 경쟁심에 대해서 재고를 해봐야 할듯하다. 이곳 저곳 많은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쓸데없는 일로 경쟁을 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호의관계보다는 적대관계가 우월하다. 남보다 앞서는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기여를 하기 위해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다면 능력은 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때가 많았다. 원래 모든 기업은 100퍼센트 글로벌기업을 꿈꾼다. 직원들 중에 쓸데없는 경쟁심으로 동료를 폄하하거나 권위주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직원이 있다면 그 직원이 분명히 기업의 에너지를 분산시켜서 기업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하게 될것이다.

국가도 마찬가지인듯 하다. 지역주의나 분파주의로 경쟁을 하는 정치인이나 권위주의적인 정치인이 있는 국가의 미래는 없는듯 하다. 한 편으로 세계적인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는 이가 어떤 지역의 민심을 얻기 위한 행보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갈길이 참으로 먼 땅에 살고 있다는 비관적인 마음이 들곤 했다. 어린 시절 시골에 살면서 다른 지역을 방문했다가 그 지역의 아이들과 싸움을 했던 생각이 난다. 우리 ㅇㅇ지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길래 일어서서 생각하고 있다고 빈정거리다가 싸움이 붙었다.

제대로 된 시민사회를 겪어본 역사가 없는 북한과 한국이 사회나 국제윤리를 내면화 시킬 시간이 없었기에 분단의 역사가 이렇게 오래가나 하는 생각이 든다. 통일을 지향하기는 하지만 냉정히 생각하면 장기간의 시회적 윤리를 개선시킬수 있는 기간이 없으면 급변 사태와 더불어 후유증이 엄청날 것으로 생각된다. 러시아처럼 공산쿠데타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예상도 해봐야 한다. 고착화된 생각이 어디 가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통일보다 중요한 것은 북한의 안정적인 개혁과 남북협력인듯 하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기간은 결코 짧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분단이 지속될 수도 있겠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남북협력이나 통일이나 뭐가 다를게 있겠느냐 하는 생각이 든다. 이념문제를 가지고 바구니속의 게들처럼 살다가 게잡이 노인같은 타국의 이익이 되는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2016년 10월 7일 금요일

한국사회시스템의 위기

"보이지 않는 것들에 충실하다." 오랫동안 북한문제나 이념문제에 관한 언급을 하면서 한국사회에 대해서 느낀 점이다. 많은 것이 그랬다. 근로의 현장에서는 열심히 근로해도 경제적인 여유를 얻을 수 없는 현실이 그랬고, 창업의 길을 모색해봐도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삶의 태도가 미래를 안전하게 보장할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알려지지 않는 범죄가 많고 부정부패가 만연되어 있다. 국정감사현장을 보면 과연 공부를 한 사람들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안알려져 있다가 밝혀진 사실들, 미성년자 운동선수성폭행 같은 사건들을 보면 한층 더 그렇다.

이런 한계에 부딪히게 된 이유는 한국사회가 합리성에 대해서 소홀히 한 결과인듯 하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자 노력한 바가 없었다는 의미다. 오랫동안 이념과 종교가 사회시스템을 유지하는 바탕이 되어왔기때문에 급변하는 세계에 좀 당황하는 면이 있는듯 하다. 북한은 아예 폐쇄시스템을 고수하기로 작정을 했다. 두렵기 때문이다. 정보통신의 발달로 사회시스템 자체가 개방적이고 합리적으로 자정(自定)해가는 과정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이념에만 충실했던 탓이다.

사회는 불합리한 점을 사회구성원들이 생각하고 개선의지를 가지고 협동적으로 애써 노력할때 발전을 한다. 그런데 그 과정을 뛰어넘었다. 기도하면 뭐든지 이루어질 일이 아니다. 형태는 다르지만 이념을 신앙삼아 기도하기는 북한은 한층 더 지독했다.

그러나 중국의 연결성은 불이익으로 작용하고 말았다. 어느 한 폭군의 결정은 당장 혁신을 중단시킬 수 있었고 또 실제로 그 같은 일들이 자주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와 대조적으로 유럽의 지리적 분할상태는 서로 경쟁하는 수십 또는 수백개의 독립 소국과 혁신의 중심지들을 만들어냈다. 그 중에 어떤 국가가 특정 혁신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또 다른 국가가 그 일을 했고, 따라서 이웃 국가들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남에게 정복당하거나 경제적으로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유럽의 장애물들은 정치적 통일을 막기에는 충분한 것이었지만 기술과 아이디어의 전파를 중단시킬 수는 없었다. 그리고 중국에서처럼 유럽 전역의 유통망을 한꺼번에 차단할 수 있는 폭군은 존재하지 않았다. 

- Jared Diamond의 [GUNS,GERMS AND STEEL]중에서 -

중국의 과학기술이 유럽에 뒤쳐진 이유를 설명하는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분석이다. 한반도에도 이념이라는 폭군이 존재하고 있었고 권위주의적인 통치는 또 그 이념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합리적인 개선의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개선하고자 하면 이념논리로 귀착된다. 개선이란 명목으로 이념을 내세우는 일도 빈번했다. 실사구시의 정신을 갖고자 스포츠에 열중하고 공학공부를 하며 근로현장에서 일을 하다가 실소를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내가 처해 있는 특수성때문에 전선없는 싸움을 하는것 같은 생각이 들때가 한 두번이 아닌듯 하다. 이전 글에서도 밝혔지만 먼저 실용적인 개혁을 하지 않는 국가는 어떤 형태로도 정복당한다. 제래드 다이아몬드는 그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한반도에서는 어떻게 하면 협동과 권리와 의무를 국민과 정치인에게 합리적으로 납득시킬 수 있을까 하는 큰 과제가 있다. 

중국의 북한에 대한 자아도취

꽤 오래전 경황이 없던 시절에 도움을 준 신앙인이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보는 앞에서 도움을 주고 나서 도움을 받는 사람 입장은 생각안하고 여기저기 소문을 내고 다니면서 자신의 우월감과 호의감을 과시하고 다녔다. 이후로 갚을래도 거절하고 다른 도움을 줄래도 거절하는 바람에 좀 헷갈린 적이 있었다. 때때로 어설프게 남의 일에 깊숙히 간섭을 하고 들어오는 오지랍도 있었는데, 그 순수한(?) 믿음과 자아도취적 속성을 은근히 한 번 더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하필이면 얼마후 종교적인 정치지도자시절에 비릿한 음성행위로 정신적인 고생을 막심하게 했는데, 그 믿음과 자아도취적 속성은 오랫동안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는 중이다. 


중국이 북한의 김정은 암살계획을 거론하고 나섰다는 소식이다. 북한은 중국의 안전에 위협이 될만한 근거도 주지 않았는데 중국은 왜 북한의 통치자를 암살할려고 할까. 우월적 혈맹관계의 지위에서 북한을 내국(內國)으로 만들겠다는 의도가 보인다. 오랫동안 중국이 후견국가처럼 생각되도록 흘러온 현대사의 안좋은 뒤끝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왜 이런 소리가 안나오나 했다. 우려할만한 일이기도 하고, 중국의 병아리계획이 서서히 거론되기 시작하는듯 하다.

친중파였던 장성택을 이용해 북한을 연착륙시킬려고 했다는 중국 정부관계자의 말도 있었다고 하는데, 사실 무근한 이야기같다.장성택을 처형한 것은 '감히'중국의 자존심을 건드린 행위라는 의미일 것이다.  중국은 처음부터 그럴생각은 없었다. 연착륙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부드러운 예속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할 바에는 오랫동안 구상했던 중국의 북한통치를 실행으로 옮기겠다는 의도로 봐야할 것 같다. 

2016년 10월 1일 토요일

덕밍아웃 / 몰입의 즐거움

몇일전 전기요금에 포함된 시청료때문에 한국전력에 연락을 했다. 15년동안 티브이를 안봤는데, 몇개월전부터 시청료가 다시 부과되기 시작했다. 무심코 전기요금을 납부하다가 살펴봤더니 모르고 시청료를 꽤 납부했다. 시청료를 반환받았는데, 꽤나 특이한 사람으로 여기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티브이를 볼 시간이 없었다. 항상 경제적으로도 풍족하지 못했고 보통 사람들이 누리는 여러가지를 잊고 살지만 항상 바빴다. 무엇인가를 항상 생각하면서 살았다. 내가 '덕후'였기 때문이다.

쉬는게 나쁘다는 소리가 아니다. 누구에게나 긴장을 풀고 시시껄렁한 소설을 읽고 소파에 기대앉아서 허공을 쳐다보거나 티브이를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인생의 다른 영역들과 마찬가지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연 적정선에 머물 수 있느냐이다. 수동적 여가가 문제로 부각되는 것은 그것이 자유시간을 보내는 유일한 방편으로 쓰이는 순간부터다. 그런 습성이 뿌리내리면 생활 전반이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 중략 - 티브이를 남달이 많이 보는 사람은 좋은 직장에도 못 다니고 인간 관계도 원만치 못한 경향을 보인다. 이 문제를 독일에서 본격적으로 조사한 적이 있다. 이 연구에서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몰입경향을 많이 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티브이를 많이 보는 사람은 몰입 경험을 적게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 Mihaly Csikszentmihalyi의 [Finding Flow]중에서 -   

한국에서는 어떤 일에 열정을 넘어서 광(狂)적으로 열중하는 사람을 덕후라고 한다. 주로 취미생활과 관련해서 사용하는 말인데, 화성인 바이러스라는 티브이프로그램에 인형을 사람처럼 사랑하는 인물이 소개되고 나서부터 덕후라는 존재가 부각되기 시작했다.

http://zum.com/#!/v=2&tab=home&p=0&cm=newsbox&news=0682016100133354636

시간이 나면 운동에 열중하곤 하는데, 하는 짓을 누군가가 보면 거의 덕후수준이라고 할 만하다. 건강과 집중력을 키우기 위해서, 즉 진짜 덕후질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운동이기 때문에 운동을 덕후질 하듯이 열중한다. 나는 이념문제나 남북한 문제에 관해서 덕후다. 수십년동안 생각이 떠나 있다가도 돌아오는 문제이며 그 문제가 인생의 가장 큰 목적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없어도 항상 바쁘다. 희생과 고민이라기 보다는 몰입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과제를 가졌다는 생각도 들기 때문에 목적 자체도 실용적이지만 개인적인 계산속도 실용적인 면이 있는듯 하다. 그래서 갈등보다는 조화와 협력을 많이 이야기 하곤한다.

여가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여 공동체의 붕괴를 모면하려는 현상은 로마 제국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서양 최초의 역사가인 그리스의 헤로도투스는 [페르시아전쟁사]에서 소아시아의 리디아 왕인 아티스가 잇따른 흉년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백성의 관심을 호도하기 위해 이미 삼천 년 전에 구기(球技)를 도입했다고 전한다. "기근에 대처하기 위해 마련한 전략은 하루 종일 경기에 몰두하게 하여 식욕조차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먹을 것은 시합이 없는 그 다음날에야 나왔다. 이런 식으로 십팔년을 끌었다."

 - Mihaly Csikszentmihalyi의 [Finding Flow]중에서 -   

북한정부는 이런 식으로 60년을 끌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철 지난 스포츠강국 운운하는 것에 대해서 말을 많이 했던것 같다. 언젠가 북한의 사격선수와 스스로 여가시간에 몰입하여 연습하는 나와 사격경기가 이루어진다면,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 자신할 수 없다면 북한의 집단 논리는 내 자신의 개인 논리를 극복할 수 없는 사태가 올 수 있는듯 하다. 그래서 자발적인 몰입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중이다. 아마 그래서 북한은  내 구글 블러그를 방문했을듯 하다.  

사실 덕후의 길은 어렵다. 몰입의 즐거움을 위해서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그렇지만 포기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으면 됬다고 생각한다. 물론 한국도 덕후들의 몰입을 활용할 수 있는 사회시템으로 빨리 개혁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2016년 9월 30일 금요일

신문스크랩

20대의 아주 어려운 날에 신문스크랩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신문에 유익한 부분을 오려서 일기장에 붙여놓곤 했다. 특히 지금도 자주 들춰보는 내용은 혼자서 썰매를 끌고 남극점을 다녀온 프랑스의 로랑스 드 라 페리에트라는 여성에 관한 기사였다. 당시 허약한 몸과 마음을 한 번도 극복해 본 적이 없는 내 자신을 몸시 부끄럽게 만든 기사였다. 그날 이후로 남극을 혼자 횡단한 다른 여성의 체험기나 남극을 횡단한 육십대 후반의 노익장을 과시한 탐험가의 기사를 보면서 마음을 추스리기도 했는데, 아마 육체적인 강인함에 매료되었던 것보다 고독함을 극복한 인간승리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경구의 대가인 리히텐베르크(1742 - 1799)도 어느 해 그 해의 신문을 모아서 스크랩하여서 책처럼 읽어보려고 하였는데, 1년을 그렇게 하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이제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것이다. 애쓴 보람이 없다. 그 속에는 50퍼센트의 잘못된 희망과 47퍼센트의 틀린 예언과 3퍼센트의 진실밖에 없었다."

무려 1700년대에 언론의 진실성을 문제삼은 이 말이 꽤나 오랫동안 인용이 되곤 하는데, 같은 기사를 놓고서 좌파적 시각과 우파적 시각의 상반된 시각으로 신문기사를 쓴 것을 양쪽 성향의 신문을 비교해가면서 읽으면 신문기사와 진실의 정체를 알게 되는듯 하다. 가치가 담긴 기사가 진실이기는 어려운 듯 하다. 그런데 남극을 다녀왔다는 기사는 100퍼센트 진실이었다. 

충동과 의지

히틀러는 꽤나 채식에 열중하였고 동물을 사랑하였다. 처칠은 꽤나 말썽꾸러기인 학창시절을 보냈다. 폭풍전의 고요함과 폭풍후의 고요함을 경험한 두 사람의 인생행보는 역사적으로 크게 다른 결과를 보여줬다. 가끔은 선행을 이야기하고 선행을 행하고 있으나 불안한 사람이 보이고, 충동적이고 악해보이나 비련의 동정심이 보이는 사람이 있는데, 되도록 깊이 간파하여 상대를 하곤 하였다.

의지력이 강한 인간은 자신을 선(善)과 악(惡)의 주체로 끌고가는 능력이 뛰어난듯 하다. 아마 에너지와 열정이라는 도구를 마음대로 휘두를수 있는 능력이 있는듯 하다. 반면에 뜻밖에 유약한 인간이 문제를 일으키고 여론의 돌을 맞는 장면은 많이 볼 수 있는듯 하다. 엘리트범죄가 심각한 결과를 불러오는데도 장기적이고 지능적이며 냉철하고 강한 의지의 콩껍질에 쌓인 악이기 때문에 평가하기 매우 어려운 면이 있는듯 하다.

2016년 9월 26일 월요일

이성과 정치적 자율성 / 칸트

언젠가 가능한 사람을 상대하지 않는 일을 할려고 의도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엔지니어일을 할려고 노력하고 공학공부를 할려고 노력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타인과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기계나 육체적인 일과 대화하는 것보다 불합리한 인간과 대화하는 것은 다소 곤혹스러운 면이 있었던것 같다. 그런 모순이 가장 두드러진 사회가 이념문제에서 비롯된 분단된 한반도의 현실이라는 사실에 많이 놀랐던 적이 있었다. 예를들면 평등을 지향하는 공산주의 이념으로 건국된 북한이 매우 불평등한 사회라는 사실, 가장 안보를 중시하는 현실에서 안보를 가장 저해하는 내부의 적, 방산비리같은 문제가 뜻밖에 일사분란하게 척결되지않는 한국사회는 건국기반과 국가의 입지가 그렇게 튼튼하지 않다는 점과, 그런 문제로 외세에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국가임을 스스로 용인하고 있는 불합리성이 있다는 문제가 보인듯 하다. 

도대체 북한은 핵을 통하여 강성대국을 건설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선후를 바꾸어서 생각해보면 국가존립의 최저조건에서 꺼내든 비장의 카드라는 생각, 부패를 저지르는 한국의 엘리트들은 생존조건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심약한 사람들이라는 불합리성이 해석되기도 한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본의아니게 관찰해본 경험에 의하면 안일함을 구하는 나약한 심성을 가진 사람들이 쉴새없이 작은 이익들을 구하고 부패의 가능성을 많이 보여주었던 것 같다. 

칸트는 인간은 도덕적으로 자율적인 존재라고 말한다. 칸트는 모든 개인에게 이성이 있고, 그 이성을 토대로 도덕적인 결정을 한다고 말한다. 칸트는 국가생활에서 시민은 정치적 자율성을 발휘하게 되는데, 시민이 선출한 대표자들이 보편적 이성을 사용하여 만든 헌법이나 법률에 복종하는 자유를 정치적 자율성이라고 말한다.시민의 도덕적 자율성은 도덕적인 인간들이 제대로 된 대표자를 선출하여 국가 구성원들의 이익과 입장을 대변하는 헌법과 법률을 만듦으로서 도덕적 자율성과 정치적 자율성이 일체화 된다고 말한다. 

만약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서 이상한 정치방향을 몰고간 지도자를 선출했다면 그것은 국민의 도덕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듯 하다. 언젠가 준법보다 경제적인 성과의 우위를 염두에 둔 국민이 대국민 사기극에 걸려들었다는 사건들을 생각해본적이 있는데, 이성적이지 못하고 철학없는 국민이 주어진 정치적 자율성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는 결론이 나왔다. 생각해보니 이 문제는 시민사회의 기본교육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듯 하다. 이성, 철학, 절제가 많이 필요한 사회에 살고 있는듯 하다. 

2016년 9월 24일 토요일

ORIENTAL VERSUS

10여년전 김위찬교수와 르네마보안교수의 [블루오션 전략]이라는 도서가 전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었다. 충분히 이해할 만 했다. 갈등보다는 조화와 화합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장소에 살고 있는 내 자신이 봐도 문제의 해결책을 명쾌하게 제시해주는 내용인듯 했다. 개인적으로 생각을 해봐도 레드오션 전략은 관점을 좁히고 생리적인 우울함까지 안겨주는 악마의 전략인듯 하다.

우선 레드오션 전략과 블루오션 전략의 차이점을 김위찬교수와 르네마보안 교수의 저서를 빌어 서술하자면 1. 레드오션 전략은 기존시장안에서 경쟁, 블루오션 전략은 새공간 창출 2.레드오션전략은 경쟁에서 이기는게 목적, 블루오션전략은 경쟁을 무의미하게 만듦 3. 레드오션 전략은 기존 수요시장 공략, 블루오션 전략은 새 수요시장 창출 및 장악등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 기업 경영과 관련해서 두 가지 더  비용문제와 관련해서 이야기 하고 있지만 국가나 개인의 블루오션 시장은 좀 더 경제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을 수 있으므로 생략을 했다.

한 번은 연장자 두 분이 오랫동안 싸우는 장면을 목격했다. 한 사람은 매우 폭력적이었고, 한 사람은 매우 교활했다. 그런데 싸움은 폭력적인 이가 먼저 시작을 했고, 폭력으로 상대할 능력이 없는 다른 이는 술수를 사용했다. 실제로 나는 이 상황을 겪어 본 적이 있는데, 오래전 지인 중에 매우 교활한 이가 있어서 골머리를 앓았는데, 어느 날 보니 내가 그이를 거칠게 상대하고 있었다. 아마 상대방도 비숫한 생각, 저 사람이 거칠기 때문에 나는 좀 더 두뇌플레이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의 근원을 생각해보니 바로 '경쟁'이 문제였다. 상대방을 제압하고자 하는 의도나 상대방의 우위에 서고자 하는 의도가 일으킨 문제였다.

어떻게 보면 한국사회는 매우 나쁜 레드오션의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는 것 같다. 갈등론이 지배하는 과학적 사회주의국가인 북한, 그리고 국가윤리가 국제질서에 조화되지 않는 특이한 국가심리를 내면화 시킨 일본, 패권을 지향함을  직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중국등 즐겁지 않은 이웃을 두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블루오션전략이라는 분위기에 익숙치 않은 듯 하다. 항상 작은 왕이든 큰 왕이든 경쟁사회의 최후 승자인 왕을 지향하고 있는듯 하다. 시민사회의 역사가 짦은 동북아시아 각국이 국가간의 관계에서나 국내의 시민상호관계가 수직적인 권력관계에 몰입하는 이유는 환경생태론적인 결과인듯 하다. 특히 제왕적 정부형태의 북한이나 오랫동안 권위주의 정부의 통치를 받았던 한국인들이 수직적 관계에서 자유롭기는 쉽지 않은듯 하다. 크게는 국가간의 관계부터 시작하여 국내 정치관계나 개인간의 관계가 연쇄적으로 수직적인 형태로 연결이 되어 있는듯 하다.

[블루오션 전략]에서는 블루오션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지속적으로 창조된다고 말한다. 지리적 영토만 영토가 아니고, 경제적 기술적 영토도 창출되고, 경제적 부유함을 넘어서 삶의 질문제를 중시하게 되는 추세에 동북아시아가 미래 희망이 보일 수는 없는듯 하다. 이런 정세에 한국과 북한은 서로만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 심하게는 북한, 어느 정도의 한국의 동양적인 고질병은 크게 극복해야 하는 문제인듯 하다. 독재, 민주화 기타 식상한 단어로 표현되어 있지만 꼭 그런 관점 말고, 개선의 가능성이 없도록 시야를 협소하게 만드는 관점에 집중을 해보면 바쁘고 할 일 많은 세상에서 '이상한 짓'만 하다가 시간과 경제비용을 낭비하고 있는 형국이 된 듯 하다. 

2016년 9월 16일 금요일

실사구시(實事求是)

SBS 방송프로에 대기업의 고액연봉에도 불구하고 경직된 조직문화를 견디지 못해서 사표를 쓴 젊은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20여년전 어느 일본계제조회사에 현장직에서 일하다가 관리직으로 옮겨준다는 제안에 놀래서 회사를 그만둔 기억이 났다. 조직에 몰입하는 순간 생각이 끝이라는, 형편에 비해서 만용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는데, 파란만장한 시간을 보냈으면서도 지금 후회는 없는듯 하다. 한 번 살다가는 인생인데, 후회없으면 모두 좋은 경험이다 싶었다. 조직문화가 가장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아재들의 관점으로는 세상을 특이하게 산다는 생각도 할 법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있지 않고서야 세상이 발전을 하겠나 싶다.

한 번은 네덜란드의 200킬로미터 스케이트 마라톤대회에 나가보고 싶은 꿈이 있었는데, 체격이나 체력을 만드는데 한계가 보였다. 그래서 체드 헤드릭(Ched Hedrick)이라는 더블푸쉬(Duble push)라는 특이한 방법을 사용해서 세계인라인 챔피언을 독점했던 선수의 기술을 빙상에 접목시켜 보았다. 물론 이 선수도 그런 방식으로 토리노동계올림픽에서 장거리스케이팅부문에서 금메달을 땄다. 연습을 해보니 중심이동간격이 작아서 에너지소모가 덜 했다. 전통적인 방식보다 스피드는 안나지만 남들이 보기에 긴 시간을 설렁설렁 쉽게 탄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름 초장거리에서는'발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런 기술을 만드는데는 사격훈련을 위해서 스케이트균형훈련을 한게 큰 도움이 되었던것 같다. 사격과 스케이트를 다 잘하는 방법을 찾다가 결국은 찾게되는듯 싶었다.

가끔은 스스로 찾아가는 길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모든 일은 실사구시에 맞게 안정적으로 처리해야 한다."

저우언라이는 언제나 이렇게 주장했다. 1953년에 시작된 중국의 제 1차 5개년 게획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국민들도 이 5개년 계획으로 경제가 성장하면서 생활의 질이 향상되자 모두 기뻐하며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국가전체는 활력이 넘쳐났다. 당시 정부의 모든 사업계획은 실사구시의 원칙에 따라 계획 추진되었다. 실사구시란 경제건설 분야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1956년 1월에 열린 전국정치협상회의에서 저우언라이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현실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할 때 현실성 없는 일을 목표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현실과 동떨어지고 불가능한 일을 추구하면 조급증이 발동하고 이 조급증은 일을 그르칠 수밖에 없습니다.

저우언라이는 부강한 중국을 만들기 위해 그의 장년기를 모두 쏟아 부었다. 나라가 부강해져야만 이제 생겨난 신생 중국을 안정화시킬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너무 조급하게 서두르며 급진적인 모험을 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당시 저우언라이는 '많이, 빨리, 좋게, 그리고 절약하는 것이 노동의 효율성을 높이는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관념이 아니라 현실에 뿌리를 둬야 한다고 했으며 가장 좋은 방법은 실사구시라고 재차 강조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저우언라의 뜻대로 일이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 김상문 저 [유엔이 감동한 위대한 지도자 저우언라이]중에서-  

저우언라이의 생각은 우경화를 반대한 마오쩌뚱에 의해서 배척되었는데, 마오쩌뚱의 카리스마적인 제왕적 권력은 중국발전에 많은 한계를 가져다 주었다. 중국을 대기근으로 몰아넣은 그 유명한 참새박멸사건이나 목표량에만 신경쓰다가 쓸모없는 철강제품을 대량 생산한 사건들은 이미 이념적으로 고착화된 생각들이 어떻게 파탄을 가져올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던것 같다. 만약 마오쩌뚱이 말년에도 권력을 놓지 않고 계속 꼰대성을 발휘하고 있었으면 오늘 날 중국의 방향은 많이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가끔 북한에 대해서는 갑작스런 붕괴나 통일같은 비현실적인 몽상을 하는것 보다는 일단 북한내부의 개혁과 개방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최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엘리트들의 혁신적인 변화가 중요하고, 이미 만들어지고 있는 시장경제를 제도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든다. 배척이 아닌 세수(稅需)의 원천으로서 시장경제를 제도적으로 받아들이고 법이나 징세제도를 마련한다면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 있는 실사구시의 방편이 마련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저우언라이와 같은 개혁주의자는 과거 청나라에서도 있었는데, 강희제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다. 젊은 시절 환관정치를 극복하고 황제가 되어 실사구시의 정신을 발휘하여 청나라를 내실(內實)있고 부강한 국가로 만드는데 최선을 다했는데, 국사(國事)에 매진하느라 제대로 된 수면도 취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훗날 저우언라이 총리의 모습으로 재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2016년 9월 9일 금요일

주은래에서 흥남부두까지

UN도 감동한 중국지도자 주은래는 공산혁명군지도자였지만 모택동보다 훨씬 지혜롭게 중국을 개혁시킨 지도자로서 자유진영을 비롯한 전 세계인의 존경을 받고 있는듯 하다. 사실 모택동에 대해서는 혁명지도자로서의 카리스마적인 자질이, 욕망이 강한 다혈질적인 기질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혁명지도자로서는 적합하나 혁명이후의 중국사회를 안정화시키기에는 역부족인 자질을 갖고 있다고 해도 될 것 같다. 더구나 모택동의 통치권아래서 한반도가 통일될 기회를 놓친것을 생각하면 모택동의 이념적 아집에 대해서는 감정적으로도 좋지않은 생각이 든다. 모택동의 집권을 또 다른 왕조의 탄생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무리가 아닌듯 하다. 개인적인 욕망과 이념적인 정당성을 교묘히 결합하여 중국민들을 홀린 인물로 평가받아도 될듯 하다.




반면에 주은래는 중국인민해방군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하기 시작한 초기부터 냉철하고 지성적인 태도로 목적을 잊지않는 인물이었다. 인민해방군창군기념일인 난창봉기때 주은래의 지도력에 대해서 평전에서는 부하병사들의 이야기를 빌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행군을 하면서 잠깐씩 휴식시간이 주어졌을 때 심한 피로로 모두 곯아떨어지곤했다. 가끔씩 잠에서 깨어 눈을 뜰 때면 저우언라이 동지께서 등불을 밝혀놓고 일을 하거나 서성이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계신 것이 보였다. 우리는 저우언라이 동지의 명령이라면 무조건 복종했다. 이는 저우언라이 동지가 부하들에게 매우 엄격하기도 했지만 그 자신에게는 그보다 엄격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때 장진호전투에 참가했던 미군조종사의 체험소설인 [FROM THE COCKPIT]을 뒤적거리다가 장진호전투에서 흥남철수까지의 과정들을 이리저리 알아보았다. 나의 외조모는 장진호 서쪽이 고향이었고, 철수하는 미군을 따라서 남바위를 쓰고 솜옷을 입고 종종걸음으로 피난하는 기록영화속의 어린 소녀가 함흥근처의 정평으로부터 피난 온 내 모친의 어린시절 사진과 닮아서 더욱 감정스러운 사건이었다. 국민당군을 대륙에서 몰아내고나서 갑자기 커진 인민해방군을 소모시키기도 할겸, 동아시아에서의 이념적 패권도 얻어낼겸해서 참전시킨 중공군들이 겨울 장진호의 혹한속에서 열배넘는 병력으로 미군을 포위하게 되는데,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는 미군과 포위한 중공군의 많은 수가 영하 40도 가까이 되는 혹한속에서 희생되었음을 생각하면 어느나라 국민이든지 정치의 본질에 대해서는 긴장하고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는듯 하다.




혹한속의 장진호전투에서 속옷 위에 동복 하나만 걸치고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싸운 중공군 포로는 한쪽 발이 얼음 덩어리로 변한 경우도 있었고 동상으로 귀와 코가 없어진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방한준비를 제대로 갖춘 미군도 동상으로 죽은 인원이 엄청난데 인원파악이 제대로 안되는 중공군이야 오죽 많았을까 생각된다.




몇년전 어느 날 밤 11시쯤, 동해안에서 양구를 거쳐 배후령을 넘어오고 있는데, 한 노인이 차를 세웠다. 인가도 없는 배후령 중턱에서 차를 세운 기괴한 노인을 태웠는데, 산속에서 기도를 하고 온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산 위를 가리키는데, 촛불이 일렁거리는게 보였다. 노인은 뭘 좀 보는게 있어서 기도를 할 때 많은 중공군손님이 찾아와서 시끌벅적하게 놀다 간다는 것이다. 이국땅에서 떠도는 원혼들을 위해서 눈물로 평안을 빌어보곤 한다는 것이다.




한이 맺힌 개인의 삶은 상당히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명분을 가진 핑계를 기반으로 휘둘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자신의 개인적인 과거사도 그랬지만 누구나 깊고 냉철한 생각을 하지 않고는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으리라고는 보장할 수 없는듯 하다.




한달 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남도에서 내 구글블러그를 찾아왔기에 북한의 함경도에서 인터넷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이 어딜까 구글어스로 찾아보았다. 한군데는 원산항근처 비행장과 호텔등 휴앙시설이 있는곳, 한 군데는 통천에 있는 나의 부친고향근처 해변가의 휴양지(시중호역앞바다근처)로 추측되는 곳이다. 매우 대칭적인 인연인것 같다. 마음이 우울할때는 북한과 가까운 화진포의 이승만대통령과 김일성주석의 별장을 가보곤 하는데, 내 자신의 개인적인 관점으로 봐도 그렇고 한반도와 세계의 평화적 공존이라는 관점으로 봐도 이건 옳지 않은 역사인것 같다. 문득 덧없고 짦은 인간의 삶속에서 별 일이 다 있다는 뭘 아는듯한 생각이 아주 잠시 지나쳤다. 

2016년 9월 7일 수요일

S사와 한국의 소비자

언젠가 S사의 냉장고의 문을 열다 모서리부분이 각이 져서 머리를 찧었다. 세번을 반복해서 찧으면서 세번을 모두 서비스센터에 연락을 했다. "이것은 제안이다. 모서리부분을 둥글게 만들면 어떻겠느냐." 세번째 돌아온 대답은 방어적인 표현이 담겨 있었다. 아마도 내가 속이 상한 나머지 손해배상이라도 청구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문득 옛날 서비스센터가 아니라는 생각이 났다. 한참 경제성장기에 그 회사의 서비스센터는 정말 극진했던것 같다. 미안하게도 경제적 사정으로 컴퓨터등은 그 회사것을 못쓴다. 사정이 있어서 컴퓨터를 자주 바꾸는데, 애프터가 안되도 저렴한 중국산을 쓰고 있는 중이다.

오늘 뉴스에 S사는 프리미엄급 스마트폰에 집중하는 동안 성능이 아주 조금 떨어져도 가격이 저렴한 중국산 스마트폰이 국내에 들어와 팔리기 시작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요즘  마이크로버스와 대형버스의 중간크기인 귀가 양쪽으로 나온 중국산버스가 눈에 자주 띄기 시작하여서 한국의 대형버스시장과 마이크로버스시장이 모두 잠식당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스마트폰시장도 그리될 것 같았다. 품격과 차별성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욕망만을 끌어내고자 하는 자본주의의 어두운 속성이 '실용성'에 제압당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역시 그런것 같다. 한국사회가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경쟁적이고 차별적인 트렌드가 공산주의에서 시작하여 실용적인 트렌드로 바뀌는 중국에 제압당하는 뼈아픈 순간을 보는 것 같았다.

지난 3년간 사회의 밑바닥에서 이일 저일을 해보면서 일터를 그만두고 나올때는 회사에 고쳐야 할 점을 지적해주고 나오곤 했다. 요즘 많이 지쳤다. 내가 좌파인지 모르지만 중소기업도 그렇고 그곳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의 세계는 차별적인 욕망과는 거리가 멀었고, 스마트폰의 특별한 기능을 알지도 못하고 사용할 시간도 없는 여유없는 사람들 뿐이었다. 그 좋은 스마트폰을 누가 사줄 것 같은가. 한 번은 어느 재벌이 운영하는 스키장에서 청소원으로 일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틈틈이 고객과 회사의 행태를 살폈다. 그리고 그만두고 나오면서 두가지를 지적해주고 나왔다. 진입로 입구에 표지판이 없어서 많은 사람들이 찾지 못하고 근처에 다른 스키장으로 가버린다는 사실과 스키를 타러 오는 젊은이들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여 스키장에서 사는 젊은이들이 아니고 가끔 조금 별러서 겨울낭만을 즐기는 젊은이들이 스키장의 주고객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집에 S사에 관한 책이 몇권있다. [S사가 두렵다] [S사의 몰락] [S비전 2020]등인데, 창의성보다는 모방을 기본으로 한 일본산업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실용적인 면을 간과함으로써 한국보다 먼저 무너진듯 하다. 그 실용성이란 내수(內需)의 근본은 평범한, 아니면 그 이하의 시민이고 수출을 많이 할려면 인구가 많은 개발도상국의 소비자들에게도 인기가 있어야 했다. 고비용구조로 그것이 실패하면 일본의 내수시장을 활성화시켜야 했다. 사회의 경제적구조는 부동산에 집중하게 만들어서 내수도 망가뜨리고 나중에 부동산 거품까지 일으킨 차별적 사회구조를 가진 국가가 계속 발전할리는 없을 것 같다.그래서 [S사가 두렵다]는 책을 쓴 저자는 일본인인데, 두려워 할 것 없다. 한국도 따라하고 있으니까.  

S사가 몰락하던지 비젼을 갖던지 그것은 소비자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S사가 몰락해서는 안되지만 잠재적 소비자들의 특성을 간과하는 아니면 적어도 소비자들과의 내실(內實)있는 연결구조를 전체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경영은 문제가 있는듯 하다. 한국경제는 이중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상층부와 하층부가 텔레토비와같이 자신들만의 세계에 갇혀있다. 아마 근본적으로 우파와 좌파가 섞일수없는 이데올로기세계를 가진 한반도의 특성상 순화된 표현으로는 '분배', 모진 표현으로는 '뺏을려는 자와 빼앗기지 않을려는 자'의 관계로 재벌과 시민의 관계를 오해하고 있는듯 하다. 시민은 모두 잠재적 소비자이다. 경제학적으로 '수요자'라는 단어의 의미는 구입하거나 구입할 의도가 있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2016년 9월 6일 화요일

법조계의 봄 / 홍남순변호사

白玉堂前一枝梅
今朝忽見數花開
我家門戶重重閉
春色緣何入得來

백옥당앞 한그루 매화나무
오늘 아침 문득 두어송이 꽃피었네
내가 대문을 굳게 닫아놨는데
봄빛은 어디로 파고들어오는고

어느 당나라 시인의 시인데, 홍남순변호사가 생전에 좋아하던 시라고 한다. 권위주의적인 정부에 항의하면서 곤란을 겪은 청렴하고 곧은 변호사로서 법조계에 알려져 있다. 돈 버는 일에 관심이 없어서 1980년 계엄법위반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81년 크리스마스특사로 출감했는데, 모아논 돈이 없어 끼니걱정을 했다고 한다. 옳은 일은 옳은 결과를 낳는다는 순리를 신념으로 간직한 법조인의 예측과는 다르게 요즘 거대한 비리는 법조인이 모두 일으키는듯 하다. 법조계의 봄은 멀기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항상 느끼지만 잠재의식속에 출세라는 단어를 굳건하게 새겨온 법조인이라면 비리와 친근할 수밖에 없는듯 하다. 지식과 권력이 있는데, 소망을 이루어봐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자신과의 대화도 있음직 하다.

사회의 밑바닥에서 일을 할래도 일자리도 구하지 못하는 서민들의 원성이 정치인들에게만 향하는 이유가 있는듯 하다. 정치인은 투표로 통제가능하다는 전제를 인식하고들 있어서 정치인과 서민들의 관계는 좋든지 싫든지 항상 시끄럽다. 그러나 법조계는 고요하다. 제 3의 영역이다. 사법부는 헌법상 독립되어 있고 검찰은 기소권과 수사권을 모두 가지고 있는 권력체이다. 음지에서 싹트는 비리를 감지해서 통제할 수 있는 장치가 없는듯 하다. 대법원장이 참담한 심정을 토로할 정도로 법조비리의 심각성은 크지만 행정부도 간섭할 수 없고, 입법부도 간섭할 수 없고, 더구나 시민들이 선거를 통하여 통제가 불가능한 집단구성원들의 비리를 막는 길은 불가능할 것 같다.

내부자정노력이 있다한들 자칫하면 이념적 편향성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그런 노력도 쉽지 않을듯 하다. 예를들면 홍남순변호사의 고향이 광주고 권위주의정부에 항의했다는 이유로 좌파라는 평가를 받아 청렴함이 반감되는 문제가 있는듯 하다. 법조인들은 사법연수원에 들어갔을때부터 지역감정에 물린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다.  

법조계에 봄이 오기는 쉽지 않을듯 하다. 

2016년 9월 5일 월요일

Lost in memory / 북한의 이념과 종교

가끔 직장을 옮길때 이력서란에 무엇을 써야할지 갈등을 겪을때가 있다. 부지런하고 패기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지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줘야 할지는 한국민들이 짜장면과 잠뽕을 선택해야 하는 숙제처럼 간단하지 않은 문제인듯 하다. 갈등하다보면 내가 기업주였으면 어떤 인물을 원할 것인가 하는 결론을 보여주기 마련인듯 하다. 언젠가 창업하겠다는 의지가 있으므로 내가 운영하고자 하는 기업의 성격에 맞는 종업원이 되고자 노력해보곤 한다.

금수저냐 흙수저냐 하는 문제가 또한 한국사회의 출신성분분류의 풀리지 않는 난제인듯 한데, 누가 같은 민족이 아니랄까봐 백두산혈통 운운하는 북한처럼 사회적평등을 이루지 못하는 점에 있어서 매우 유감인듯 하다. 내 자신은 흙수저보다 못한 가시수저에 속하는 가족력을 갖고 있어서 그런 문제에 예민한것은 아니다. 내가 겪은 일을 생각하면 남북한 문제에 대해서 이해함도 있고, 해결해야 하는 점도 많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기 때문인듯 하다. 내 문제도 궁극적으로는 남북한 문제에 뿌리를 두고 있으니 궁극적인 문제에 매달린 것은 당연한듯 싶다.

한때 불운한 과거와 관련된 기억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수면도 제대로 취하지 못하고 일을 한 적이 있었다. 비용편익계산을 해보니 일이 힘들어도 마음이 편한 것이 좋았으므로 그 시점에서 나의 주어진 팔자려니 했다. 그 당시 특정 종교들을 대단히 싫어했는데, 자발적의지를 잃어버리고 성직자들의 완전하지 못한 의지에 억압되어있는 교인들을 매우 경멸했다. 그렇다고 내가 비종교적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후배의 말처럼 좋아하든 싫어하든 관심이 있다는 것은 내가 마음을 둔 곳이라는 표현일수도 있을 것이다. 그 당시 내 심리상태는 종교를 극도로 경멸하는 북한 같았다. 북한과 다른점이 있다면 내 자신은 이념과 종교를 다 경시하고 내 본질로 돌아오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고, 북한은 이념이 종교가 없는 자리를 대신하며 같은 하늘아래 이념과 종교가 공존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어쩌면 맹목적 믿음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비숫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참 젊을때 누군가 종교를 강요할려는 의도가 있으면 장난스럽게 "나는 무사도를 믿는다."라고 말했고, 교조화된 강인함을 보여주는 사람들, 무술인들이나 지나치게 남성성을 강조하는 마초같은 성격을 가진이들에게는 '나는 은총과 사랑이 필요해요."하면서 엇갈았던 기억이 난다.

사실 천리마운동이나 고난의 행군, 선군정치, 100일전투같은 강한의지를 보여주는 표현이 많은 선군정치하의 북한은 역사적인 트라우마의 산물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강대국사이에서 생존해야 하는 한민족의 불우한 과거에 반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트라우마에 지배자의 권력적의지가 개입하여 한층 더 문제가 심각해진듯 하다. 한국사회도 여러가지 사회심리학적 반응을 보여주는듯 한데, 수직적관계에 예민하여 누구나 남을 지배하고자 하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는 점이 그런것 같다. 강자에게 숙여야 하고 약자위에 군림하고 싶은 열망, 어쩌면 그것은 한민족이 이겨나가야 할 역사적 트라우마인지 모른다.

아직은 여건이 안되지만 가끔 창업을 꿈꾸곤 한다. 그리고 실험을 해보고 싶은 열망이 있긴하다. 구글이나 일본의 미라이 공업, 한국의 제니퍼소프트같은 회사를 운영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자신을 운영하는 일, 기업을 운영하는 일, 국가를 운영하는 일이 유사한 점이 있는듯 한데, 권위의식이 없는 정치지도자들, 핀란드 대통령 타르야 할로넨이나 우루구아이 전 대통령 호세무히카등은 어떤 '심리적인 불편사항'들을 잘 처리할 수 있는 성숙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끔 이념이나 종교에 몰입하여 정신적으로 변하지 않는 고정된 영역을 구축한 사람들이나 변하지 않을 의지가 확고한 사람들을 보면 울화가 치미는 이유는 내 자신이 아직도 과거사의 불편한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어서 그런것 같다.

2016년 9월 2일 금요일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 / 룰라의 정책

라틴아메리카, 특히 브라질 좌파정부의 몰락을 '원유에 기댄 퍼주기 정책의 한계'라는 제목으로 기사제목을 뽑은 모일간지의 기사제목을 보면서 우리 사회는 저널리즘까지도 이념의 덫에 걸려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기사의 내용은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정부들이 우향우하고 있는 이유를 복지포퓰리즘에 책임을 묻고 있는듯 하다. 전통적으로 빈부격차가 심했던 라틴아메리카에 룰라같은 정치지도자가 등장해서 뿌리깊은 문제를 해결하니 때맞춰 원유가격이 하락하고 원자재수출이 국가의 주요 산업이던 라틴아메리카는 국부감소의 직격탄을 맞게 되었는데, 이유가 복지정책때문이라는 기사는 매우 뒤틀려 있다는 생각이 든다.

복지문제를 분배의 관점으로만 생각을 할 것이 아니고 생산과 성장을 위한 기반이라는 관점이 통용되었다면 룰라대통령의 책임을 묻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흔히 우파정부라고 불리는 한국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이 멈추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말할지 궁금하다. 자원이 없는 국가라서 그 한계를 보인다고 말할 것인가? 그러면 브라질의 문제도 자원이 가져다 준 부의 여력이 원자재값 하락으로 동반하락한 것이라는 논리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라틴아메리카의 문제는 복지정책때문이 아니고 러시아와 같이 원자재의 수출이 국가산업의 주된 기반이었다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전 세계의 불경기가 총수요 감소, 특히 일본이나 중국과 같은 아시아의 많은 인구들이 소비보다는 '생산'과 '수출'에만 주력하고 있었던 문제가 한계에 다다른 시점이 되었다는 생각이다. 지구촌에는 만들어 팔려고만 하는 사람만 살지 구매할려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적어지는 한계에 도달했다는 문제가 있다. 일본과 같은 경제구조를 가진 한국도 그 한계에 부딪혔고, 그 길을 따르던 중국도 한계에 부딪히기 시작했다는게 문제다.

아시아에서 수요가 살아나지 않는 한은 원자재가격이 오를리 없고 그런 저발전적인 경제구조를 빨리 개선하지 않는 한은 어떤 정부가 들어서도 라틴아메리카는 경제적인 혼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시장경제를 강조하는 라틴아메리카의 우파정부는 경제성장도 멈췄는데, 빈부격차의 혼란까지 떠맡아야 되는 곤란한 상황을 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 권위주의적 정부가 탄생하는 순서를 밟게 될 것이다.

이쯤에서 룰라 대통령의 정책은 좌파적 시도가 아닌 '안정화 시도'였다는 해석이 나와야 할 것 같다. 

2016년 8월 31일 수요일

중국과 북한의 제왕적 권위와 숙청

가끔 기업체에 입사원서를 내놓고 대표이사와 면접을 보는 자리에서 대표이사의 권위적인 모습과 마음의 여유정도를 내쪽에서 살펴보는 경우가 있었다. 한 번은 회사에 인터뷰를 간다고 연락을 하고는 회사 정문에 도착하니 넓은 마당 한쪽 끝에서 노인분이 열심히 마당을 쓸고 있었다. 공손하게 이것 저것 여쭙고 사무실에 들어가니 잠시후 대표가 왔는데, 그 노인분이었다. 나를 시험에 들게한 주체의 쏟아지는 질문에 감정의 변화도 없이 의연하게 대답을 하고 있었는데, 회사의 크기에 비해서 대표의 심리는 매우 '개인적'이었다. 나는 일을 원했지 나를 다스릴 '제왕'을 원했던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인터뷰는 실패했다. 몇번 그런일이 있고나서는 회사의 '높은 사람'과 맞닥뜨릴일이 없는 상대적으로 빈한한 일자리를 찾아서 일했는데, 마음이 편했다.

아직도 모택동을 숭배하는 중국인들이 많은 것을 보면서 중국인들이 이데올로기적 망상에 빠져있고, 제왕적 권위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로 받아들일 민주적인 자세가 안되어 있음을 생각하면 경제민주화에 정치민주화가 따를 수 없는 중국의 한계를 다시 생각해보곤 한다. 북한은 과도기적인 정치형태로 중국의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은 맞지만 중국 그 자체는 한계에 부딪힐 날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곤한다. 공산당의 지나친 권위는 협동과 화합을 끌어낼 수 없는 시스템을 만든것이고 액튼경(Acton)의 말처럼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진리를 낳는 것이 현실적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중국은 부패문제가 심각한데, 정치적인 참여를 할 수 없는 에너지는 경제적인 상승욕구로 과잉배출되는 문제가 있는듯 하다. 훌륭한 국가를 건설할 꿈과 희망은 많은 능력있는 이들의 마음속에 싹틀 수 없는 여건상 대단히 개인적이고 일탈적인 꿈을 꾸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엘리트들의 비리도 알고보면 상승욕구나 협동적인 참여욕구를 차단당했다는 자기기만이 작용했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이념과는 상관없이 대장정의 가혹한 시련을 벗어났음에 대해서 중국홍군의 끈질긴 생명력은 경이롭게 생각하지만 모택동에 대해서는 대단히 좋아하지 않았다. 봉건적이고 부패한 중국타도의 기치를 내걸고 혁명을 일으킨 지도자가 또 다른 제왕으로 군림하게 된 '왕조의 교체'이상의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주은래와 등소평같은 혁명의 목적을 제대로 알고 있는 지도자가 없었다면 또 다른 세습왕조의 탄생이라는 역사적인 오명을 벗어나지 못할뻔 했던 것이 중국혁명인듯 하다. 중국의 근대화보다는 계급의식이 중심이 된 이념으로 또 다른 제왕적인 권위를 갖고자 했던 모택동은 독서를 즐겼지만 중국 고전에 치우쳐 읽음으로서 봉건적인 제왕적인 이미지를 자신의 그림속에 그려넣을 수 밖에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1974년 2월 등소평은 뻬이징으로 소환되었다. 모택동의 시대가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지독했던 문화대혁명도 끝났다. 파괴는 전쟁보다 더 지독한 상처를 남겼다.산업은 절름발이가 되었고 교육은 사라졌으며 당은 난파선이 되어 있었다. 유소기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모택동의 건강도 아주 나빠서 정신 상태조차 매우 위험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모택동의 아내인 강청과 사인방의 세 추종자들은 잠시 충격을 받았으나 곧 반격태세를 갖췄다. 주은래는 암에 걸려 있었다.

모택동은 다시 이 부도옹에게 도움을 청했다. 모택동은 유소기에게 했던 것처럼 등소평도 녹초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다. 아니면 하룡의 경우처럼 의사를 시켜 죽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모택동은 등소평에게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그는 등소평을 불러들였고, 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등소평 은 아주 드믄 인재다. 그에게는 사상이 있다. 그는 무턱대고 문제에 달라붙지 않는다. 그는 해결책을 찾는다. 책임감을 갖고 어려운 문제를 풀어가는 것이다.

모택동의 말에 따르면 등소평은 훌륭한 전사였다. 그는 소련과 싸우는 법을 알고 있었다. 등소평같은 사람은 좀처럼 찾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 HARRISON E. SALISBURY [THE LONG MARCH] - 

그러니까 모택동 자신은 이념과 제왕적 권위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함을 인식하고 있으면서 등소평의 목적을 아는 태도는 인정하고 또 필요로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의지하고 있는 사람을 숙청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택동은 등소평을 '솜뭉치속의 바늘'이라고 평했다. 부드러움속에 감추어진 목적을 향한 일관된 통찰력이 깃들어 있음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북한은 최근에 김용진 내각부총리를 처형하기까지 4년간 100여명을 처형한 것으로 추측된다. 김정은 위원장의 집권초기에 경제대국화의 포부를 피력했던 이상과는 달리 문제는 개선이 안되고 있는데, 이념과 군사교육외에는 배운게 없는 북한 엘리트들에 대한 신뢰할 수 없는 마음이 개입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김정은은 2009년 봄부터 가을에 걸쳐 실시된 생산배가 운동 '150일 전투'를 비롯하여 같은 해 연말의 통화 단위 변경, 2011년의 경제개혁인 '6.28 조치'까지 다양한 경제정책을 펼쳐왔다. 그러나 그럴때마다 나라는 혼란에 빠졌고, 결국 조선인민군 보수파 중진들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하기를 거듭했다.

 - 일본 동아시아연구가 곤도다이스케 -

거칠게 표현하면 배운것도 없고 생각도 없는 쓸모없는 인물들이 김정은 위원장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억한 심정까지 생기게 만든 것이다. 생각해보면 김일성 주석이나 김정일 위원장시대까지 엘리트들의 교육을 소홀히 한 나쁜 효과를 김정은 위원장이 떠맡게 된 결과가 된 것같다. 몇 번 서술한 바 있지만 효과가 늦지만 확실하게 나타나는 교육정책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사태인듯 하다. 프랑스의 르노자동차 공장에서 작은 체구로 육체노동을 하면서까지 배움의 열정에 빠져들었던 등소평과 같은 참모가 없는 것이 김정은위원장의 큰 고민인 것 같다. 개방이나 개혁을 할려니 일을 할 인재가 없고, 이념과 체제, 선군정치에 몰입한 엘리트들이 체제를 받쳐주는 인재들이자 체제를 무력화시키는 인재들이기도 한 이중적인 성격을 감당할 수 없는듯 하다.

몇년전 한 번 언급한 바 있지만 김정은 위원장은 고문정치를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중국혁명기에는 국민당쪽이나 공산당쪽에서 많은 서양인 군사적 정치적 고문들이 있었는데, 정작 고문들의 생각이 그릇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하여도 어떤 문제들을 해결하는 실마리로서의 다양한 지식과 반대의견을 유발 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논의의 다양성'을 유발할 인재라도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2016년 8월 29일 월요일

경제학지식의 진보

몇년전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의 선택과목인 경제와 법을 교습한적이 있었다. 학창시절부터 꽤 오랫동안 경제원론이나 미시경제학과 거시경제학 서적을 꽤 많이 읽었던것 같다. 조순교수의 경제원론부터 시작하여 수험용경제원론의 바이블 같았던 박홍립교수의 경제원론은 수십번을 읽었던것 같다. 이학용교수의 미시경제학이나 정운찬교수의 거시경제학까지 경제수학까지 따로 공부하면서 줄기차게 읽었는데, 요즘 대학입시용 경제학은 차원이 달랐다. 풍부한 내용을 얇은 교재속에 함축시켜 놓아서 많이 어려웠다. 공부 잘하는 학생과 진검승부를 겨룬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후 깨달은 바가 있어서 좀 더 최신의 경제관련서적을 하나 하나 사서 읽기 시작했다. 대충 즐겨봤던 서적은

1.NEW IDEAS FROM DEAD ECONOMISTS
2.CAPITAL IN THE TWENTY - FIRST CENTURY
3.THE ACCIDENTAL THEORIST
4.FORECAST
5.THE LOGIC OF LIFE
6.THINKING FAST AND SLOW
7.KEYNES KARA KURUGMAN MADE 14NIN NO MONOGATARI(일본 경제저널리스트가 쓴 책이라서 원 제목이 일본어다.)
8.경제학강의 / 장하준

등이다.

많이 발췌해서 글에 인용을 했는데, 책 내용의 선진성에 비해서 한반도의 현실이 많이 모자른듯 하여서 좌절했다. 더구나 '사'자 들은 시험을 준비하겠다고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놓고 저따위 정말 필요한 책만 읽었다. 그 이후 좀 더 현장의 현실을 익히고자 3년전(10월달이면 3년이다) 낡은 지프를 몰고 경기도의 한공단으로 구직을 하면서 다녔는데, 역시 현실은 어두웠고, 밝은 미래는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게다가 3년을 현장경험하면서 지적인 활동을 부차적인 것으로 미루어놓다보니 다시 그 시절의 매우 '보수반동적'인 두뇌로 퇴보하는듯 하였다. 한 편으로는 만약에 경제관료를 비롯하여 경제정책가들이 끊임없는 학습을 하지 않는다면 요즘 고등학교 3학년의 경제학에 대해서도 장담할 수 없는 사태가 올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교육관료의 반교육적실언사건이 있고나서는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 편으로는 이렇게 진보해도 부족한 지식과 응용의 공간에서 북한같은 경우는 경제개방을 하여 경제성장을 시작할려고 해도 인재의 부족으로 좌절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곤했다. 

2016년 8월 27일 토요일

독서와 마음의 여유

한 번은 12시간이나 일해야 하는 저녁이 없는 일을 한 적이 있었는데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지식과 생각은 휘발성이 있는지 다시 깜깜한 세상에서 헤맨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덜컥 병이 났다. 몸과 마음이 조화롭지 못했다. 독서는 다른 세상으로의 여행인데, 여행을 가지 못하니 답답한거였다. 마음 한 구석으로 에드가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에 나오는 모택동의 회고가 생각났다. 이념이나 말년에 보여준 행태로 좋아하지 않는 인물이지만 독서에 대한 열망만은 존경할만 하였다. 

나는 제 1중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교과목도 한정되어 있었고 교칙도 못마땅했지요. 나는 [어비통감]을 읽은 후 독서를 하면서 독학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어요. 나는 6달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후난 성립도서관에서 매일 책을 읽는 독서계획을 짰지요. 나는 이 계획을 매우 규칙적으로 성실하게 지키면서 6달을 보냈는데, 지금 생각해도 이 6달은 나에게 대단히 귀중한 시간이었어요.- 중략 - 이 독학 기간 중에서 나는 많은 책을 읽었고 세계지리와 세계사를 공부했습니다. 

나는 이 도서관에서 처음으로 세계지도를 구경하고 대단히 흥미를 느끼면서 공부했어요. 나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과 다윈의 [종의 기원],존 스튜어트 밀의 [윤리학] 책을 읽었습니다. 또 루소의 저작과 스펜서의 논리학, 몽테스키외의 법에 관한 저술을 독파했어요. 나는 러시아, 미국,영국,프랑스, 그 밖에 다른 나라의 역사와 지리를 진지하게 공부하면서 아울러 시와 전기 소설, 고대 그리스의 신화도 읽었습니다.

 - EDGAR SNOW [RED STAR OVER CHINA] -


잠시 주입식 공부만한 적이 있었다. 그때 뭘 크게 잘못 생각한 것이 있었는데, 공부에 대한 흥미와 뚜렷한 목표의식이 결여된 상태에서 의지력과 서두르는 행위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다. 당연히 될 일이 없었고 나중에 사격등의 운동에도 그래봤는데, 당연히 될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승부에 집착하여 이것만 달성하면 나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고는 희망이나 비젼을 갖고자 해도 그것들이 성취욕으로 돌변하여 서두르게 만들곤 했다.그리고 처음 일을 갖게 되었을때 잠도 안자고 열심히 일을 했다. 성과가 안나오던 과거를 게을러서 그랬던 것으로 왜곡하여 해석했다. 그래서 더욱 부지런해졌다. 부지런한 것은 좋지만 마음의 여유가 너무 없었던 것은 큰 문제였다. 다른 생각을 갖거나 다른 세상을 엿볼 기회가 전혀 없었다. 더불어 변화할 수 있는 여지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내 주변이 전부 그랬다. 지위와 명예, 권력, 부를 위해서 쫓겨다녔다. 그러다가 약간이라도 그것이 주어지면 '행세'를 했다. 그러니 없던이가 갖게 되면 행세한다는 말이 나오게 된 것 같다. 그것때문에 시달렸으니 그것에서 어떤 이익이라고 챙겨야 된다는 강박이 있는듯 했다. 그래서 권력에 집착하는 이를 보면 언젠가 핍박받은 과거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되고, 갑질이 만연하는 사회는 을의 역사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 북한은 강한 나라가 되고자 하는 의지와는 반대인 현실이 나타나는지, 왜 어떤 종교는 그 종교밖의 다른 사회와 섞이지 못하고 영역의 경계를 뚜렷이 하는지, 한국사회에서 왜 여가를 경시하고 부지런한 노동만을 요구하고 있는지, 비용편익계산보다 중요한 '인간의 행복'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모두 병리적이고 실패한 사회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지난 주 내 구글 블러그의 검색기록란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남도'의 검색기록이 떠서 좀 당황하였다. 지능과 사격에 관한 글이 주목을 받게 되었는지, 아니면 난수방송에 관한 글을 통하여 내가 너무 깊고 깊은 곳을 치고 들어간게 문제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내 고민 모두는 독서로 해결하여 온 듯 하다. 학생교습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사회과학이나 법률, 역사, 지리책을 100여권읽었고, 몸이 아프면 치료에 관한 서적을 100여권 읽었고, 운동실력이 필요하면 관련 책을 100여권을 읽었고, 정보전에 휘말리면 그에 관한 책을 100여권 읽었고, 심지어 일하다가 병이나면 Ernie J. Zelinski의 [적게 일하고 많이 놀아라]란 책을 읽을 정도였다.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의 관점은 부족함을 느끼면서도 넓고 객관적인듯 하다. 북한사회나 한국사회의 이면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국민의 시간속에 독서가 차지할 곳을 이념이나 그것에서 비롯된 획일적인 관심사가 차지하고 있는 비극이 있는듯 하다. 국가의 미래는 구성원들의 광범위한 독서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든다. 

2016년 8월 26일 금요일

남북한의 실패한 게임

남북한의 분단에 관한 문제는 남북한사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연결되어 있는 가장 큰 문제인듯 하다. 더구나 미래에 한반도의 성장동력을 얻어낼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인듯 하다. 여태까지 있어왔던 '다양한 방법'들은 '획일적인 이념'의 문제에 갇혀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식하고 있는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듯 하다.

한국사회가 지향했던 재벌위주의 성장의 방법들은 중소기업의 성장과 국민개인의 경제적인 삶을 많이 왜곡시킨듯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천대받는 비정규직인력이 경제산업현장에서는 현실적으로 가장 필요한 곳에 끼워넣어진 필요적인 인력이라는 사실은 노동시장의 유연성확보라는 구실을 빙자해 우회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중인듯 하다.

'운전'을 할 때 내가 오른쪽으로 달리고 상대도 오른쪽으로 달린다면 나는 만족스러운 보상을 받는다. 또한 내가 왼쪽으로 달리고 상대도 왼쪽으로 달린다면 마찬가지로 만족스러운 보상을 받는다. 하지만 만약 어떤 사람이 다른 선택을 한다면 나는 앰뷸런스에 실려가는 아주 나쁜 보상을 받게 된다.

- 파이낸셜 타임스 경제담당 논설위원이었던 Tim Harford의 [UNDERCOVER ECONOMIST]중에서 -

획일적인 사상적교육의 지도 아래서 균형에 맞지 않는 재정지출, 예를들면 중장거리유도탄이나 특정 체육시설이나 위락시설에 투자하는 북한이나 모든 젊은이가 공무원시험에 매달리고 비정규직인력등을 천시하는 한국사회는 나쁜 보상을 받는 게임을 하고 있는듯 하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시장경제를 매우 혐오하는 북한은 매우 나쁜 보상을 받았다. 경쟁이라는 이념하에 적재적소에 인력을 배치하는데 실패한 한국도 성장둔화와 인구감소라는 나쁜 보상을 받고 있는듯 하다. 

2016년 8월 20일 토요일

기후,습관,성격

언젠가 국민들 스스로 자신들이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나라는 어디일까 하는 질문에 의외로 방글라데시 국민들이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비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방글라데시 국민들 대다수가 호전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IS와 같은 이슬람교도인 사실을 생각하면 이슬람교도는 모두 어떻다는 획일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문제가 있는듯 하다.

사회의 많은 소집단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분위기를 이끌고 있는 리더의 성격이나 기존 집단의 역사적 성격에 따라서 구성원들 또는 새로 유입된 구성원들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을 느끼는데, 아무래도 문제의 근원을 살펴보면 원인없는 결과는 없는듯 하다.

현재 이슬람이 우세한 지역이 세계에서 가장 혹독한 사막 기후와 놀랄 정도로 일치한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유익할 것이다. 실제로 사우디아라비아, 파키스탄, 수단 등 가장 혹독한 자연환경에서는 가장 엄격한 형태의 이슬람이 번성하며, 인도네시아, 말레이반도, 방글라데시등 좀 더 온화한 환경에서는 그보다 온건한 이슬람이 지배적인것 같다. 

- 미시간 주립대 지리학교수인 Harm de Blij의 [Why Geography Matters] 중에서 -

하름 데 블레이 교수의 저서에서는 기후외에도 이슬람 교리에서 배교자에 대한 가혹한 처벌이나 과거 오스만투르크가 누렸던 영토적, 문화적 영광에 대한 향수적인 감정등이 이슬람테러의 근원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

항상 북한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민생조건인 식량에 대한 결핍을 어떻게 이겨내고 있는지 궁금했는데, 척박한 토양이나 냉대성 기후등으로 전통적으로 작물이 부족한 환경에 익숙한 탓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제강점기전까지 인구의 분포가 적은데다가 곡창지대인 남쪽으로부터의 식량이동이 가능한 사정이 있어서 식량문제에 대한 고민이 없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수탈로 전국이 식량부족에 시달리자 북쪽이 더 혹독한 상황에 직면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려운 식량사정은 계급의식을 더 강화시키고, 호전적인 내면세계를 발전시켰을 거라는 추측도 가능할듯 하다. 식량부족에 오랫동안 노출되어 온 북한이 풍족함에 대한 향수나 기대가 둔감해진걸로 생각되기도 한다.

일제강점기나 분단의 역사가 남겨준 후유증은 습관에 익숙하다는 또 하나의 병리적인 현상을 남겨놓는 것 같아서 마음이 씁쓸하다. 한국사회의 하층민들의 세계에서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은 빈부격차가 심해지면서 결핍에 익숙해져서 꿈을 잃고 공허해져가는 눈빛들인듯 하다. 이념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병리적 현상으로 해석해야 할듯 하다. 

2016년 8월 13일 토요일

지능

지능에 관심이 많았다. 불우한 성장기에 지능이 저하되는 것을 스스로 느꼈다. 그나마 감수성이 있는탓에 그 상태를 인지하고 스스로 대책을 세울 정도로 적극적인 성격은 도움이 되었다. 높은 지능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이 다 곤란을 겪었는데, 타고난 지능이지만 긍정적이고 좋은 환경에 있지 않으면 빛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고, 타고나지 않은 지능도 개발을 해서 빛이 나게 할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던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적극적이고 다양한 노력으로 뇌의 상태를 좋게 만들어주는 일이지 고정적인 뇌의 능력이 있거나 그런 뇌의 능력을 10퍼센트밖에 발휘하지 못한다는 정적(停的)인 개념이 아닌 동적(動的)인 개념으로 생각을 해봐야 한다는 사실이다.

뇌의 활동중 우리가 의식할 수 있는 부분은 미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식하지 않는다고 해서 뇌가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가령, "낮에 레스토랑에 가서 메뉴를 보고, 먹고싶은 것을 주문한다는 단순한 행동만으로도 뇌는 많은 일을 한다. 메뉴를 보면 시각과 관련된 뇌의 부위가 작동하며, 균형있는 식사를 하기 위해 아침에 먹었던 것을 기억해 내려고 하면 기억에 관계된 뇌의 부위가 작동한다. 이러한 것들이 순서에 따라 하나하나 조금씩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굉장한 속도로 각각을 담당하는 부위가 연동하여 작동을 하는 것이다. - 중략 - 무릇 '뇌의 10퍼센트..........'라는 문장 자체가, 실은 근거 없는 내용인 것이다.

 - Chris Ravan외 2인 공저 [Joy of Psychology]중에서 -

10여년전 지능이 저하되자 지능에 관심이 많아졌다. 특히 내가 유발하지 않은 이념이나 북한관련 문제로 시달리자 회생이냐 희생이냐 하는 문제로 선택의 길에 서게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지능이 우수한 이들이 모인 멘사코리아 홈피를 자주 드나들었던 경험이 있다. 좋은 기분의 경험이었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멘사코리아시험방식인 레이븐메트릭스방식의 퍼즐을 장기간 훈련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봤는데, 시간이 없어서 건강도 함께 챙길 수 있는 스포츠지능을 높이는 일에 착수했다. 우선 사격실력을 높이자는 의도로 스케이트를 탔다. 스케이트를 신으면 균형훈련을 많이 했는데,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더구나 운동선수하고는 안드로메다만큼의 거리가 있었던 과거를 뒤집는 좋은 경험이었던 것 같다.

생활현장, 심지어 정치현장까지도 지능과 관련된 관점을 가지고 유심히 살펴보는 습관이 생겼는데, 안일함과 보수성은 지능을 감퇴시킨다는 사실도 알게되었고, 노인분들의 지능은 희망없이 현실에 안주함으로서 정체되거나 후퇴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항상 밝은 노인 분들은 지능의 순발력도 젊은이 못지 않게 좋았는데, 외고집이 있거나 우울한 노인분들은 그 반대인 경우도 볼 수 있었다. 물론 젊은이도 마찬가지인듯 하다. 특히 20대에서 70대까지 각연령층의 분들을 많이 만나며 40대가 큰 분수령이라는 사실도 느낀것 같다.

여태껏 써 온 글의 주제들, 이념, 종교, 심리, 심지어는 유명인들의 상태까지 지능과 연관이 있는듯 하다. 특히 세계 각국의 우경화되는 정치지도자들에 관해서는 지능과 심리적인 관점으로 많이 해석해보곤 하는데, 국가의 희망이 없으면 우경화되거나 좌경화되는 극단적인 이념적 스팩트럼을 띄게 된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는듯 하다. 사실 중용과 균형의 길이라는 것이 많은 정신적인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도 깨닫는데, '극단'이란 지능이 부족하거나 정신에너지가 없는 상태에서 가장 수월하게 문제를 해결할려는 의도로 발휘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생활현장에서 많이 부드러워질려고 노력하는데, 몸과 마음 상태가 안좋으면 너와 내가 모두 극단적으로 변하거나 다투게 되는 것 같다. 특히 근로시간 문제와 관련해서 6시간 근로제를 몇 번 제의한 적이 있는데, 반대로 장시간의 근로시간이 주는 심리와 지능의 역기능에 대해서 심각한 문제를 알게 되었던 것 같다. 

2016년 8월 12일 금요일

이미지정치와 올림픽

이스라엘 정보부 모사드의 부장이었던 다간은 그 분야의 뛰어난 인물이지만 자신과의 싸움에서도 뛰어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신체적인 장애가 있으면서도 자신의 역할을 잘 해내고 사격의 명수로도 알려져 있다. 관련 서적을 보면서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다간은 채식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마음을 좀 더 온건하고 예리하게 세우기 위해 채식위주의 생활을 15년정도 하다보니 뭔가 좀 달라지는 경험을 나도 한 적이 있는듯 하다. 그런데 좀 특별한 것은 만화주인공 심슨의 말처럼 종이에 포장했을때 기름이 묻어 나오는 육류로 만든 음식들은 여전히 입맛을 당기게 한다.그러니 먹고 싶은 것을 참는 노력도 한 일인듯 하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스포츠를 잘 한다는 것은 자신과의 싸움인듯 하다. 그런데 국가나 공동체가 그 싸움의 배후에서 나를 조정한다면 그때부터 타성적인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은 내 자신만의 오버인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조금이라도 권력, 부, 명예등에 대한 야심을 가지게 되면 그걸로 나를 조정하려는 이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대체로 알면서도 묻어들어가는게 인간사의 모습이지만 그렇다는 이야기다.

국가에너지가 상실되거나 저하된 국가는 엘리트체육에 신경을 쓴다. 선수의 싸움과 승리를 전국민의 그것으로 이입시켜 함께 영광을 누리고, 에너지를 상승시켜 역동성을 얻어낼려고 한다. 과거 소련이나 동구권국가들도 그렇지만 러시아의 푸틴대통령이 소치올림픽에서 보여준 스포츠에 대한 지나친 애국적 관심은 국가주의적인 성향이 강하게 국가를 운영하고 있다는 반증인듯 하다. 한 편으로는 러시아의 정치와 경제등 모든 면에서 탄탄한 길을 가지 못한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문제를 좀 더 관찰하고 분석하여 개선하는 대신 국민의 이미지세계를 바꿔놓는 미봉책을 쓰는 문제가 있는듯 하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이미지정치를 잘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공주의자인 레이건대통령은 스포츠를 통한 이미지정치에 힘쓴 당시 공산국가들과 상당히 유사한 정치를 했던것 같다. 결국 이념같은 관념이 정치와 스포츠까지도 추상적인 이미지로 흐려놓은 만행을 경험한듯 하다. 레이건대통령이 영화배우로서의 경험을 이미지정치에 잘 이용했던것 같다. 그런데 이제와서 한반도의 북쪽에서 철 지난 스포츠강국을 위하여 힘쓰고, 한반도의 남쪽에서는 정치인들이 수염을 기르고 서민들의 생활현장을 '바람처럼'떠돌아다니고 있는 것을 보면서 실용성과 합리성은 안드로메다에 보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그게 다 '이념'때문인듯 하다. 추상적인 사고의 습관은 성조기처럼 영원하면 안되는듯 하다.

푸틴대통령이 유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거나 총으로 호랑이를 사냥한 장면을 보여주는 경우가 있는데, 그 이면에는 '나는 강하다. 그러니 국민은 나를 따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듯 하다. 거기까지면 좋지만 더 심하면 "나는 위협적이다. 그러니 국민은 까불지 마라."까지 가면 문제가 있는듯 하다.  

사격을 하면서도 간혹 느꼈지만 건강이 매우 안좋은 시절에  저렴한 비용을 들여 목검 한자루와 무술에 관련된 책을 몇권 보면서 잠간 몰입을 한 적이 있었는데, 보는 너와 하는  내가 불편해지는 것 같아서 스케이트와 수영등의 종목으로 얼른 바꾼적이 있었다. 어떤 무술인이 그렇게 숨어서 하느냐고 시비를 걸기에(중국영화에서 처럼 자웅/雌雄을 가리자고 할까봐 엄청 당황했다.) 관점이 비숫한 사람끼리 만나는 법이라고 반론하고 검도 연습을 그만두었던 기억도 있다. 그러니 사격이나 무술을 할려면 일반인보다 선량함과 부드러움을 훨씬 더 갖추어야지 성공적인 이미지관리가 된다는 생각도 해본다.

평화로운 이미지를 보는 것이 가장 행복할것 같다. 

2016년 8월 10일 수요일

올림픽정신,스포츠정신

어제 올림픽과 사격관련글을 썼다가 삭제했다. 내용이 매우 급진적이었던 같다. 하지만 부드럽게 표현하지 못한건 문제가 있으나 본심이다. 스포츠는 자신과의 싸움이 되는 것이 가장 좋은듯 하다. 관중을 지나치게 의식하게 되면 경마장이나 경륜장에서 경기하는 처지가 되는듯 하다. 사행성을 띄게 되고 부자연스러워진다. 특히 스포츠강국을 꿈꾸는 국가가 적극적으로 키워낸 엘리트체육인일 경우는 금메달 못딴 죄로 평생을 '자고 나면 우울해지는' 인생이 될 수 있는듯 하다. 북한의 최용해 부위원장이 역도선수가 금메달 획득에 실패하자 역도감독에게 화를 내는 모습이 포착되었는데, 철 지난 스포츠강국에 대한 집착이 보이는듯 하다. 오래전 동독이 올림픽에서 2위를 할 때 어린 나이에도 선수들이 국가에 의해서 '사육'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유도 선수가 금메달을 따고 나서 어머니게 감사드린다고 말하고 나서 대통령각하께 감사드린다고 할때는 그냥 웃음이 나왔다. 후문에 의하면 대통령께 감사드린다는 말을 먼저 안했다고 끌려가서 맞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믿거나 말거나 그럴 수 도 있었던 때였다.

아주 늦은 나이에 혼란한 마음때문에 스포츠에 뛰어들었는데, 뜻밖에 운동신경이 있는듯 했다. 더 기분좋은 것은 올림픽에서 자신의 기록갱신만으로 기뻐하는 스케이트의 안나 로키타 선수나 개헤엄으로 올림픽에 출전하여 빠져죽지 않기 위해 완영을 한 모우삼바니 선수나 스케이트 실력이 없어 비틀대면서 500미터 스케이트코스를 완주한  카타르 선수, 넘어지고서도 다시 일어나서 완주했던 한국스케이트선수등은 올림픽정신에 대한 이해를 하게 만들기도 한다.

꽤 오래전 사격대회에 나갔다. 목표는 지옥훈련으로 부동심을 만들면서 참가할때마다 10점씩을 높인다는 계획이 있었다. 그리고 다른 운동을 녹초가 될때까지 했다. 연습장에서 표적지를 본 세계선수권금메달리스트가 깜짝 놀랐다. 600점 만점에 578(아마 운좋으면 국제대회입상도 가능한)을 쐈던것 같다. 겸손하게 잘 쏜 표적지만 모았다고 말했지만 마음속에서 쥐약같은 '야심'이 불타는 건 어쩔 수 없는것 같았다.  그러나 멘탈 스포츠는 연습과 실전이 매우 다르다. 진종오선수가 나팔 소리에 놀랐던 것 처럼 나중에 사격대회에 나갔는데 심판분들이 총알을 안넣고 쐈다는 이의를 제기해서 리듬이 깨졌다고 생각하고 기권을 하고 나왔다. 대회시작전에 창백한 얼굴로 묵상을 하고 있는 진종오선수는 인상에 남았다. 역시 세계 최고 였다.

22구경 권총을 즐겨쏘는 실탄사격장에 가면 실탄이 없다고 해서 연습을 못하고 돌아오곤 했는데 한참 신변이 억압받을때라서 그런지 높은데서 총을 못잡도록 지시가 내려왔나 하는 의구심도 있었다. 그러나 세월은 흐르고 모두가 변하는듯 하다. 시간앞에서는 야심도 권력도 무상해지는듯 하다. 그냥 세월 지나서 목적있는 외국여행겸해서 국제대회에 참가를 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생각해보면 삶 전체가 스포츠 경기장같다. 중요한건 타인과의 경쟁이 아닌 자신과의 경쟁이다. 고통과 굴욕감은 견디고 나면 부동심(不動心)을 만드는듯 하다. 운동경기장은 그 마음을 표현하기 좋은것 같다.  

2016년 8월 9일 화요일

터키랩소디

말이 좋아 광시곡(狂詩曲/rhapsody)이지 대규모집단의 광기는 광기라고 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에르도안을 지지하는 전국적으로 100만명이 넘는 인파가 집회에 참석을 했다고 한다. '우리에게 죽음을 명하면 바로 시행하겠다.''에르도안 당신은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적힌 국기가 휘날린다고 한다. 강자에게 굴복하는 마음은 묘하게 왜곡되어 숭배하는 마음이 되는듯 하다. 노예가 되었다는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주인을 따라서 다른 노예를 핍박하는 못난 행태를 많이 보았는데, 터키국민은 그 마음의 정점에 서있는것 같다. 에르도안정부의 무차별체포에 공포감을 느끼면서도 정부주도 집회에 참석을 하는 애틋함이 있는듯 하다.

종교는 있으되 철학이 없던 터키사회가 이룬 쾌거(?)다. 저번에도 서술한 바 있지만 시작부터 북한사회와 비숫한 길을 걷는듯 하다. 러시아정부는 터키가 친러적인 성향을 갖을거라는 생각을 하면 잘못 생각한것 같다. 종교나 이념같은 관념으로 만들어진 결속력은 내적으로만 응축되지 외부로 발산되지는 않을듯 하다. 과거 사회주의라는 이념의 맹주국가였던 소련과는 달리 러시아는 이슬람교의 결속력을 도구삼아 만들어진 터키와 어떤 교류점도 없을 것같다. 세계역사에 새로운 골치덩어리가 등장을 한듯 하다.   

2016년 8월 8일 월요일

서민코스푸레

한 부잣집 젊은이가 하버드대학에 합격했다. 부모는 교육상 등록금은 대줄 수 없으니 스스로 해결하라고 말했다. 젊은이는 고민끝에 흑인들에게 주는 장학금을 받기로 했다. 그리고 화학약품을 사용해 백인을 흑인으로 코스푸레하는데 성공했다. 입학을 하고나서 다른 흑인처럼 농구를 잘 하는 줄 알고 농구동아리 여기저기서 스카우트제의가 들어왔다. 그러나 막상 흑인치고는 그렇게 농구를 못하는 학생도 없다는 비난을 들었다. 흑인 애인도 사귀고 흑인과 동일시하며 학교를 잘 다니다가 결국 들켰다. 학교징계위원회에 회부되었는데, 급박한 상황을 하버드 로스쿨에 다니는 백인인 단짝친구의 변론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징계위원회의 절차가 긍정적으로 끝맺음하면서 흑인교수인 징계위원장이 질문했다. "흑인으로서의 삶을 이해했는가?" 젊은이가 대답했다. "아니오 원래 나는 흑인이 아니었으니까요."

아주 오래전 학창시절에 본 소울맨이라는 영화의 한장면이 참으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그러면서 가끔 선거때가 되면 재래시장으로 또는 삶의 현장으로 바람처럼 떠돌아다니면서 서민코스푸레를 하는 정치인들을 보면서 그 영화의 마지막 대사를 생각했다. 서민의 삶을 진정한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의 코스푸레는 매우 회화화되어 선거결과에 역기능을 보였을것 같다. 솔직히 나는 서민의 삶이 고통스러워 이런 서민의 세계를 만든 근원을 분석하고 있지만 서민이 아닌 삶을 살아가면서 고통스러운 서민의 삶을 경험하기란 불가능한 일인듯 하다. 요즘 한국과 미국에서 꾀나 끈질기게 서민코스푸레들을 한다. 솔직히 보기싫다. 차라리 깔끔하게 면도하고 정리된 태도로 생각하는 정치인의 코스푸레를 하는게 표를 얻는데 좋을듯 하다. 

2016년 8월 6일 토요일

트럼프

트럼프는 굉장히 거칠다. 말 실수를 아주 많이한다. 아마 대중적인 '멋'을 발휘했다고 자화자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미국사회가 대중문화에 깊이 빠져 이성을 잃고 있는것을 간파했는지도 모른다. 흔히 정치인들은 대중사회속의 대중의 분별없는 판단을 잘 이용하는 습성이 있는듯 하다. 때로는 그것을 정치적 능력이라고 착각을 한다. 그것이 통하는 사회는 골병이 든 사회지만 의무감이 없고 무책임한 정치인은 개인의 정권욕을 충족시킬 수 있는 최고의 기회로 생각을 한다.

트럼프가 미국의 '근본가치'를 흔든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미국은 썩어도 준치다. 천박하게 망가지는듯 한 대중이 있으면서도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의 지붕맡에서만 그렇다. 미국의 3퍼센트는 책임지고 사회를 이끌어간다. 노력하면 댓가가 주어지는 사회라는 인식은 아직 변하지 않은듯 하다. 망가진 대중사회인듯 하면서 언젠가는 바로 서게할 엘리트문화의 보호를 받고 있는듯 하다. 그런데 트럼프는 그것마져 망가뜨린다. 대중사회의 엔트로피현상을 저지하는 다른 미국엘리트들과는 달리 앞장서서 엔트로피현상을 이끈다.

문화보수주의자들이 대중문화의 악영향에 대해 우려하는 것은 지당한 일이다. 대중문화는 그것을 부추기는 광고와 더불어 소비에 대한 열망을 자극하고, 정치에 대한 소극적태도를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힘, 즉 족쇄풀린 시장경제의 파괴적인 힘을 놓치고 있다. 

- MICHAEL J. SANDEL [WHY MORALITY] 중에서 -

보수주의란 바로 이럴때 의미가 있는듯 하다. 사회안정화노력을 하는 보수주의와 정신없는 국민의 혼란한 머리속을 비집고 들어와 사회의 근본가치를 흔들어놓는 보수주의는 다른듯 하다. 다행히 트럼프의 '막말'은 점차 미국민들의 싫증을 불러 일으키는듯 하다. 빨리 일어서려는 자 빨리 망하고 입으로 흥한자 입으로 망하는듯 하다. 트럼프는 미국사회를 시험하는듯 하다. 

2016년 8월 1일 월요일

북한의 난수방송

북한이 16년만에 난수방송을 재개했다고 한다. 공작원들에게 임무를 지령하거나 귀환로를 유도하는 난수방송은 과거 한국이나 북한이 다 함께 사용하던 복고적인 공작암호방식이었다고 한다. 북한에서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다가 북한군에게 발각되어 쫓기던 우리측 공작원들도 난수방송으로 귀환로를 열어 무사히 귀환했다고 한다. 나의 부친은 난수표를 파란 천으로 돌돌 말아서 귀속에 넣고 다녔다는 이야기를 얼핏들은 바가 있는데 어린 아들이 영악하게 그걸 기억할 줄 알았다면 부친은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한국내에서 암약하는 북한 공작원은 단파로 방송하는 난수방송을 청취하며 받아적었기 때문에 어두운데서 악마같은 얼굴을 하고 라디오를 들으며 뭔가를 받아적는 아저씨는 반드시 신고하여 500만원 상금을 타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 한국측에서 쉽게 해석할 수 있는 복고풍이된 난수방송을 하는데 대해서 한국측 전문가들은 여러가지 의견을 내놓고 있는듯 하다. 심지어는 김일성 시대의 향수를 자극하기 위해서라는 낭만적인 해석도 나오고 있어서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매우 좋은 나라 국민의 관점인것 같다. 또한 우리측을 분열 시키고 긴장감을 조성시키기 위한 의도라는 분석도 있는데, 국민대다수가 알고 긴장하며 분열해야 되는데, 난수표가 뭔지도 모르는 국민이 99빠센트라서 타당하지 않은 내용인듯 하다.

요즘 갑자기 북한 엘리트층의 탈북이 많아진것과 난수방송은 밀접한 관련이 있는것 같다. 심지어 북한군 장성급인사의 탈북도 알려지고 있는데, 북한군 장성이나 외국주재 북한공관원들이 탈북을 했다면 난수방송을 알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 외에 실재로 훗날 북한의 난수방송을 들어야 할 사람이 탈북했을런지도 모른다. 물론 그 사람은 탈북자에서 대남공작원으로 신분이 변화할 사람이라는 의미다.

북한군 사단내의 한 대대씩 정찰대라는 남파공작부대를 운영하고 있는 것을 봐서 북한군 장성급은 난수표의 정체에 대해서 잘 알것이고, 재외공관원들은 비공식적인 공작원역할을 하는게 세계적으로 용인되고 있기 때문에 역시 난수표의 의미를 잘 알것이다.보통 어느나라 재외공관원이든지 화이트요원이나 그레이요원정도의 정보활동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은 난수방송을 함으로써 탈북한 엘리트들을 목표로 고정간첩에게 암살 지령을 내릴수도 있겠고 - 과거에 김정일 위원장의 처조카 이한영씨가 티브이방송에 나와 얼굴이 알려지자 고정간첩의 총격으로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암살지령이 아니더라도 탈북의 위험이 있는 엘리트들에게 난수방송을 시사함으로써(즉 흘린다는 이야기) 엘리트들의 탈북의도를 좌절시킬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종합해서 요약하면 난수방송의 목표는 탈북할 의도가 있거나 탈북한 북한 엘리트들로 추측된다.  

2016년 7월 31일 일요일

신과 개(GOD AND DOG) / 사막의 라이언

한참 주변이 어지럽던 시절, 나를 사찰하는 네트워크는 어디일까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정보기관과 치안기관이나 정부수반의 성격까지 고려했을때 종교네트워크까지 의심이 갔다. 어쨌거나 그 시절 나는 많이 성장을 했는데, 지금 터키의 운명이나 푸틴의 행보를 보면서 종교와 정보기관같은 하는 일의 경계가 추상적이면서 국기(國氣)를 어지럽히는 일에 대해서 경멸스러운 생각이 드는건 물론이었다. 거기다 생산근로의 현장에서 땀을 흘리거나 스포츠에 열중할때면 나에 대해서 작용하는 음성적인 부분들에 대해서 불필요악이라는 모진 생각이 들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못난 정치가 시키는데로 했던 연민을 가득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던것 같다.

한때 아랍인들에 대해서는 유목민들에 대한 감상적인 생각이 있어서 매우 호의적이었던것 같다. 게다가 어릴때 본 '사막의 라이언'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제국주의 침략에 항거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안소니 퀸이 배역을 했다)는 오랫동안 머리속에 남아서 한국 정치지도자와 비교 평가를 하는 척도가 되었던것 같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IS라는 신(GOD)을 개(DOG)로 만든 집단이 아랍 세계를 휩쓸고 다니면서 아랍에 대한 환상은 깨졌고, 라이언은 어디에도 없었다. 멀쩡하게 잘 살던 나라도 정치와 종교가 야합하여 암흑의 세계로 만들어 가는듯 하다.

왜 GOD라는 단어를 뒤집으면 DOG가 되는지 어원을 알것 같은 생각이 든다. 사실 종교인이나 신앙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적이 많았던것 같다. 좋은 이는 정말 신과 같았고, 조잡한 이는 정말 개와 같았던 것 같다. 구체적으로 실증되지 않는 영역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항상 선과 악이라는 극단적인 세계에 빠질 위험에 있는 것 같다. 종교와 정보기관, 정치가의 공통점은 형이상학적인 사고를 핑계로 악에 물들기 쉬운 성질이 있는것 같다. 조심해야 할 부분인것 같다. 이 시간 터키 어딘가에서 '사형' 심지어는 '참수'를 논의하는 정치가와 종교적인 시민이 있다면 심각한 문제인듯 하다. 게다가 푸틴이나 에도르안의 공작정치가 개입해 있다면 더욱 그럴것 같다. 

2016년 7월 29일 금요일

국가의 습관과 보수성

몇일전 구소련의 비밀경찰(KGB) 출신인 러시아의 대통령 푸틴의 정부가 터키나 미국에 공작활동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문제에 관해서 언급한 바 있지만 국가나 국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간의 습관, 그리고 그런 습성들의 고착화는 실제로 세계사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터키의 역사적인 쿠데타 습관이나 지정학적인 영향을 벗어날 수 없는 종교적 습관, 오랫동안 남진정책을 추진하면서 터키와 부딪혀야 했던 러시아의 터키에 대한 관계적 간섭등은 꽤 오랫동안 이해득실과 상관없이 인과관계를 맺어주는듯 하다.

왜 섬나라인 영국과 일본은 보수성이 강할까. 지정학적인 고립상태가 고착화된 습관을 지켜준 탓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혹자는 영국인이 미국으로 건너가서 프론티어정신의 개척성을 보여주었다고 말하지만 보수성을 견디지 못한 진보적인 청교도 집단의 탈출로 인식을 해야 할 것 같다. 미국의 공격적인 간섭을 받아서 문호를 개방한 일본이 스스로 강국이 되었다는 생각을 하자 보수적이고 국수적인 성향을 띄게 되는 것은 당연할 수도 있는듯 하다. 반대로 어떻게 생각하면 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는 보수와 진보의 투쟁이 끊일 수 없는 사정이 있는것 같다. 한반도에 대해서 좀 뼈아픈 문제는 강대국에 둘러쌓여 내부에너지의 팽창방향이 내부구성원 서로에게 향하는 문제가 있는듯 하다. 터키 국민들도 비숫한 덫에 걸려 있는데, 더 나쁜 것은 획일적이고 보수적인 종교마저 변화의 움직임을 억압하는 어두운 시대가 온 것 같다. 

2016년 7월 27일 수요일

터키군사쿠데타 실패이후 / 에르도안과 푸틴

터키쿠데타 실패의 이면에는 러시아가 에르도안에게 쿠데타가 발생할 것이라는 정보를 제공했다는 소문이 있는듯 하다. 한편 미국정보기관에서는 민주당해킹의 배후에 러시아 정보기관(FSB나 GRU)이 있다는 확신이 있다고 발표했다. 얼마전 한국에서는 정치지도자가 건설분야와 종교라는 자신이 몸 담고 있던 두 분야에 관련한 생각을 국가정책결정에 이입시켜 자신과 국민을 모두 곤경에 빠뜨린적이 있는데, KGB출신인 푸틴의 정부가 다른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정보전으로 해결할려는 익숙하고 쉬운길을 택했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터키문제에 관해서는 에르도안 정부가 서방측에 친화적인 성질을 갖고 있는 군사쿠데타를 막음으로서 러시아에 친화적인 길을 걸을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일 수가 있는듯 하다. 터키군사쿠데타에 관해서 미국과 유엔이 밝힌 입장처럼 에르도안 정부의 친러적인 편향성은 아직도 모호한 성향이 있는듯 하다. 게다가 에르도안 정부가 이란처럼 이슬람 원리주의 정부를 세운다면 북한처럼 어느쪽과도 친화적이지 않은 쇄국정책의 성향을 띌 가능성이 있을듯 하다. 이란의 호메이니는 친미적인 팔레비왕정을 무너뜨리고(심지어는 팔레비왕정을 수호하기 위해 미국은 끝까지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바 있다) 세운 정부라서 반미적인 성향이 강했던것 같다. 게다가 당시는 이념적인 대립이 뚜렷한 냉전시대였으니 반미국은 친소련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에르도안 정부의 성격은 대단히 개인적인 성향이 우선일 수 있을 것 같다. 호메이니처럼 종교권력이 개인권력을 압도할 수 있는 성향이 아닌 개인권력이 종교권력을 이용하는 성향일 것으로 생각된다. 오히려 이란보다 국수적(國守的)일 가능성이 있으며 협상과 조화보다는 지역분쟁에 앞장서는 세계평화의 골치덩어리가 될 가능성이 있을듯 하다. 더구나 터키는 중동최고의 군사강국이다. 에도르안 개인으로서는 서구의 도움과 쿠르드족독립운동의 긴장감을 이유로 건설한 국방력을 개인의 독재정권유지에 사용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지게 된 것 같다. 러시아의 푸틴정부가 터키군사쿠데타가 실패하도록 지원했다면 러시아에는 그다지 실익이 없는 일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어쩌면 정보전력을 쉽게 사용한 동기는 푸틴의 개인적인 습관이 동기인듯 하다. 터키의 국운이 에르도안이나 푸틴의 지극히 개인적인 성향에 의해서 어두워지고 있는것 같은데, 그래서 국민은 각자가 현명해야 할 필요가 있는듯 하다. 

2016년 7월 26일 화요일

한국제조업의 딜레마 / 여섯시간근로제

한 국가의 산업이나 경제의 근간은 제조업이다.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내수(內需)인데 한국경제는 이 두가지를 모두 박탈당해가는 느낌이다. 기술혁신과 같은 문제는 국내기술의 성장이나 국외기술의 도입등으로 쉽게 해결할 수 있기때문에 기술의 문제는 아닌듯 하다. 이면을 깊게 따지고 들어가보면 인간과 관련된 문제가 있다.

언젠가 가혹한 근로환경에서 일한적이 있었다. 근로자들은 수시로 잠시 사라졌다. 건강을 보전하기 위해서 쉬러간거였다. 생긴것 답지않게 건강한데다 회사내규를 착실히 지켜주는 내 자신은 꾸역꾸역 일을 했는데, 많지 않은 젊은 사람중의 한 사람으로서 모범이 될만했다. 얼마후 기업주는 한국에서는 노동임금이 비싼데다 과거에는 안그랬는데,요즘은 근로자들이 배가 불렀다는 불평을 하며 중국에 공장을 차렸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중국인들은 더욱 더 자주 사라졌다. 더구나 그 회사의 생산품과 비숫한 수준의 중국산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회사는 무너졌다. 중국에 있는 회사가 무너짐으로서 한국의 본사도 무너졌다. 살기위해 잠시 쉬러다니던 동료 근로자는 임금이 체불되자 공장굴뚝에 올라가서 자살소동을 벌여서 티브이스타가 되었다. 그 장면을 티브이로 보고 충격이 컸다. 그 당시 기술혁신이나 생산시설의 정비 특히 생산품의 품질을 개선할 생각을 안하고 근로자들의 노동력만 이윤추구의 근원으로 생각하는 고용주가 무척 어리석어 보였다. 먼 훗날 어떻게든 인간에 대해 신뢰할만한 자신이 서는때, 그리고 창업환경이 좋아지면 절대 저렇게 회사를 운영하지는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서 다시 제조업의 근로현장에 와보니 변한게 없다. 회사가 외국으로 나가는 대신 외국인 노동자가 많이 와 있었다. 근로환경은 여전히 안좋았다. 외국인 노동자는 적당히 임금을 체불하거나 지연시켜도 잘 참았다. 임금을 안준다고 밤에 사무실밖에서 서성대는 모습을 보고 늦게까지 경리를 보는 여직원은 무섭다고 했다. 사실 외국인 노동자는 좋은 사람도 많았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태국이나 스리랑카출신의 노동자들인데 예의바르고 한국인인 내가 신입으로 왔는데 알뜰살뜰 보살펴 주었다. 물론 어떤 외국인 노동자들은 눈빛이 사고칠 것 같아서 항상 거칠게 충돌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하는 외노자들도 있었다. 아마 그들도 험한 세상에 와서 부딪힌 삶이 모질다는걸 빨리 깨쳤을 것 같다.

제조업의 근로현장에는 젊은 사람이 없다. 젊은 사람이 일을 안할려고 하는게 아니라 근로환경이 일할 동기를 만들어주지 않는다. 인간을 기계취급하는 근로현장에 있는것 보다 자신만의 여유가 있는 피씨방이나 호프집 알바가 낫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점차 무너져가는 한국제조업의 사정상 훗날 일을 할려고 해도 일을 할 곳이 없어질 위기가 왔다. 한 번은 연세드신 근로자 한 분이 대단히 권위적이고 사나웠다. 오는 신입마다 이상한 방식으로 내쫓았다. 이제는 체력이 바쳐주지 않아서 화가 나있는데, 그 일터마져 보전할 수 없으니 무척 힘들어했다. 자신은 일을 배울때 인간대접을 못 받고 배웠는데도 잘 견뎠으니 신입들도 그래야 된다는 것이다. 그 아둔함은 그 근로자분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제조업 전체의 문제인듯 하다. 제조업현장 어디서든지 국민소득 삼만불의 위용은 찾아볼 수 없었다. 찾아 본 회사가 중소기업들이지만 대기업은 중소기업의 하청생산으로 이윤을 보고 있는 처지에 뭐 가릴 것이 있겠나 싶다.

회사를 그만둘때마다 고용주들에게 인간을 좀 더 긍정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부탁하지만 당장 단기적이윤이 급한 고용주들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어 보였다. 특성상 IT회사등은 인간의 여유로운 창의성과 생산능률이 쉽게 연결이 되지만 그 밖의 기업들은 그게 쉽지않은듯 하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여섯시간근로제를 활성화시키고 최저임금을 조금 높히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제조업에서는 6시간근로제로 2교대, 3교대, 4교대까지 가능하고, 근로자들은 건강이나 일에 대한 즐거움을 보존할 수 있을 것 같다. 게다가 앞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없는 노인인력들을 수용할 수 있고, 젊은이들의 제조업유입도 가능해질것 같다. 여섯시간을 근로하고 남는 시간에는 각자가 자기 계발에 힘쓴다면 국가의 부담도 많이 줄어들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자신에게도 느껴보고, 많은 사람들을 보아왔지만 인간은 그렇게 기계적이고 부정적인 존재가 아닌듯 하다. 여유롭고 즐거운 근로환경에서 집중력이나 창의성은 훨씬 상승하는 예를 많이 보아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행복에 대한 욕구는 누구나 가지고 있고, 근로의 최종목적은 '행복한 삶'이다. 과거에는 지금 힘들면 행복한 시절이 온다는 희망으로 어려운 근로를 참고 견뎠지만 빈부격차가 커져서 상대적 박탈감이 커지는 요즘은 희망이 없어보인다. 더구나 스리랑카출신 근로자는 한국에서 삼년만 일을 하면 여기서부터 저어어기 지평선까지 땅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있어서 한국에서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일하지만 한국근로자에게는 그런 희망이 없다.

제조업의 근로현장뿐만이 아니다. 다른 분야, 심지어는 공무원이나 대기업근로자들까지도 행복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을 찾을 수 있는 안정된 직장을 찾았을뿐이지 인간으로서 필요한 근로의 행복함을 찾지는 못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자꾸 개돼지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지만 인간은 기계나 개돼지가 아니고 존중받아야 하는 존재다. 내 글에서 빠질 수 없는 이념이나 종교 이야기를 하자면 근로의 즐거움이나 인간으로서의 행복을 못 찾게 되면 이념이나 종교의 광기(狂氣)가 스며들어오는 것은 당연한듯 싶다. 희망없이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의 특성상 피안의 저 너머 확실히 검증되지 못한 것이더라도 몸과 마음을 맡기고 싶은 것이 당연하지 않겠나 싶다. 

2016년 7월 22일 금요일

신분상승과 수평적자유

1층위에 2층, 2층위에 3층, ..........10층위에 옥상, 옥상위에 태극기,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장마철이라 날씨가 안좋아서 그런지 뭔가에 구속되어있는 느낌이 나서 각 분야의 영문원서를 대량으로 구입했다. 시간도 어학실력도 모자르지만  없는 시간이나마 쪼개서 마음은 넓은 세계를 달리게 하고 싶었다. 한국에서 번역되지 않은 책들도 많은데, 지구촌 다른 곳의 생각들을 읽어보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았다. 심지어 하버드대학 출판부에서 출간한 한국사책도 구입했는데, 외국인의 관점으로 보는 한국역사가 매우 궁금했다. 터키 국민들이 자신들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불나방처럼 억압의 굴레에 스스로 뛰어든것처럼 외국인의 눈에 한민족들이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지 궁금했다.

잘나가던 법조인이 권력을 이용해 대형비리를 저질렀는데, 티브이 화면에 비추어진 모습은 어떤 과오나 좌책감이 보이지 않고 날카로운 눈은 살아있고 당당했다.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오랫동안 위에서 아래만 내려다보고 산 사람들의 풍모가 그대로 느껴졌다. 공부 잘 해서 큰 인물이 될거라는 칭찬과 더불어 최고 명문대학을 나오고 사법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고, 권력기관에서 승승장구하고 했으니 기가 꺾일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자신이 옥상이 되보니 태극기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 같다. 출세를 꿈꾸는 많은 사람들이 미쳐 모르는게 한 가지 있는데, 수직적 관점을 갖게 되면 자신의 아래에 있는 사람들때문에 기쁜만큼 자신의 위에 있는 사람들때문에 고통스러운 날이 반드시 오게 마련이다. 그러니 능력은 있으면 어떤 방식으로든지 상승욕구를 해결할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데, 그런 노력이 때로는 일탈행위를 낳기도 하는듯 하다. 물론 어떤 이들은 서민을 위해서 어쩌구 하면서 정치적인 노력을 하게 되는데, 그럴때도 조심해야 할 것은 그 길이 상승욕구를 해결할려는 시도로 발디딘 길인지 냉철하게 판단해봐야 할것 같다.

오래전 용광로에서 일하다가 작업복을 입은채로 퇴근을 하기 일쑤였는데, 많은 천대와 동정의 분위기를 확연하게 느꼈다. 그런데 그 복장 그대로 어느 일본계 회사에 가서 일자리를 요청하니 볼것도 없이 채용하고 시간이 지나서 관리자로 내정을 해놓았다고 귀띰을 해주었다. 무척 고맙기는 하지만 자유를 찾아서 사설학원에서 공무원이 되고자 하는 젊은이에게 행정학학습지도를 하였는데, 시험에 붙지 못하고 오랫동안 도서관에서 마주치는 젊은이들을 볼때면 그 일도 할 짓이 못된다는 생각이 들곤했다. 내 자신이 스포츠에 뛰어난 숨은 재능이 있었던것 처럼 그 젊은이들도 공부말고 무엇인가 다른 능력이 있었을 것이고 그 능력이 공부 잘 하는 능력과 동등한 대접을 받는 사회에서 살았어야 했던 것이다.

국민은 생각이 없는 개돼지가 아니다. 생각이 없도록 만드는 교육시스템이 문제고, 흔히 말하는 1%도 그런 교육시스템의 피해자인지도 모른다. 속칭 높은 자리에 있는 중년이상의 세대들, 공무원이 되어 안정된 직장과 신분상승을 노리는 수많은 대한건아들, 그리고 내 재능을 찾지 못하고 젊은 날을 방황한 내 자신이 모두 잘못된 교육시스템의 피해자인듯 하다. 나이가 들어 정신적인 방황을 멈추게 된 이유는 한가지 목표를 세운 까닭인데, 통일한국의 사격선수로 올림픽에 나가 봤으면 하는 목표였다. 목표를 이루는 일은 부차적인 것이고 운동을 할때 내 자신과 대화할 수 있는 수평적인 환경이 매우 좋았더라. 나이가 한참 먹어서야 수레바퀴아래를 벗어난것에 대해서 마음 상하지만 다른 길을 갔으면 가히 우리속에 갇힌 개돼지신세로 전락할 수 있을듯 했다.내 자신도 가끔 공무원이 된다거나 안정된 직장을 꿈꾸는 경우가 있었는데, 바로 저녁시간을 위해서인듯 하다. 사실 직업은 인간의 본질적인 무엇, 가정, 교육, 취미등등에 비하면 부차적인 것이어야 한다. 직업이 모든 것이 되면 그 속에서 상승욕구가 꿈틀되고 행복해야 할 일터를 레드오션(blood sea)으로 만드는 문제가 있는듯 하다. 

2016년 7월 21일 목요일

터키의 종교독재 / 복잡계와 단순계에서의 국민사찰

오래전 사찰의 쓴 맛을 본탓인지 국가가 정보기관을 통하여 국민을 어떻게 통제하는지에 관심이 많았다. 어떤 일을 하든지 어떤 장소에 있든지 말(정보)의 돌고 도는 모습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한 편의 즐거움이기도 했던것 같다.

실용적군부의 쿠데타를 진압함으로써 새롭게 신정일치(神政一致)국가를 이룬 터키의 에르도안 정부는 수만명의 공무원과 군인 경찰들에대한 대규모의 숙청을 감행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쿠데타를 진압하고서 어떻게 저렇게 수많은 반대세력에 대한 살생부를 작성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훌륭한(?) 정보기관이 있지 않고서야 그 명부를 작성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도 그렇지만 이미 오랫동안 이웃과 이웃을 감시하고 통제하도록 하는 네트워크를 달성했다는 사실은 경이로운데가 있는듯 하다. 내 자신도 생각을 해보면 그런 이웃을 알면서도 오랫동안 따뜻한 애정으로 어루만져준 사실이 있었는데, 그렇지 못한 이웃과 이웃들은 풀뿌리 국민분열의 초석이 될수밖에 없을 것이다. 엄청난 사회분열을 조장하는 에도르안 정부가 수명이 길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시오니즘의 이념으로 뭉친 '카차'라는 방대한 민간 정보원의 도움을 받은 이스라엘의 정보기관인 모사드(MOSSAD)나 이념적인 결집체였던 국민을 모두 정보원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구 소련의 정보기관인 KGB와 같이 터키의 에르도안 정부는 종교네트워크를 이용하여 국민을 사찰하고 살생부를 작성했을 것이다. 종교와 이념은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는 사회의 점차 복잡계로 넘어가는 정보네트워크를 단순계로 정리하는 훌륭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 같다. 에도르안은 정작 SNS를 통하여 국민에게 반 쿠데타를 요청했지만 이미 종교네트워크를 이용하여 '종교에 반대되는' 세력이 아닌 '자신에게 반대하는' 세력에 대한 통제를 오랫동안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터키가 서구사회와 가까워지면서 이루어놓은 경제적 발전과 민주주의 특히 국민통합은 종교독재의 시작으로 퇴보하는 것은 확실한듯 하다. 터키의 미래는 어둡다. 종교나 이념에 매몰된 국민이 어떻게 자기 발등을 찧게 되는지 잘보여주는 사례인듯 하다. 

2016년 7월 17일 일요일

종교와 이념의 문화파괴행위(vandalism)

터키쿠데타의 와중에 시민들이 쿠데타군을 참수한 사건도 생겼다. 손쉽게 끔찍한  야만의 상태로 인간정신을 몰아넣을 수 있으니 알라는 위대하긴 위대한 모양이다. 아마 쿠데타군은 이러한 상황으로 터키문명이 흘러가는 것을 막을려고 했던 모양인데, 이런 상황의 희생자가 되 버린것 같다. IS가 걸핏하면 참수를 해서 그 동영상을 유포하며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더니 터키에서 그 모습을 다시 보게 되었다. 한반도에서 서로 죽창을 겨누는 끔찍한 전쟁이 일어난지 꽤 세월이 흘렀는데도 이념대립의 최전선에서 꽤 고생을 한 적이 있는데, 생각을 해보니 종교에 대해서도 만만치 않았던것 같다. 가장 현명해야 할 부분인데, 무지와 아둔함의 표상이 되버린 것이 이념과 종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 자신은 남과 다투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는 편인데. 생각을 해보면 이념문제나 종교문제로 다툰 기억만 있다. 상대가 옳고 나쁜 이야기가 아니고 이념과 종교에 관해서는 선과 악의 스팩트럼이 극단적으로 강해지는 이상한 현상이 생긴다. 아마도 독선과 아집으로 변한 까닭인지도 모른다. 어떤 대화도 통하지 않고, 타협이나 설득도 없는 정신세계에 매몰되어 있는 인간정신을 신뢰할 수 없었던 까닭인지도 모른다.

가끔 종교적인 지인들에게 연락을 하곤 하는데, 어떤 대화를 해도 어두워지고 극단적으로 흘러가는 성향이 있다. 종교와 이념은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 공감과 이해가 없는 것이 똑같다.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믿으면 그만이다. 정신은 믿고나면 자동장치에 의해서 해결될줄 안다. 고민도 할 필요가 없는듯 하다. 나와 같은 정신을 네놈도 같기를 바랄뿐이다.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고민할 수 있는 인문학과 철학에 대한 교육이 있었으면 종교와 이념이 문제를 일으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터키군부쿠데타실패와 역사적정당성

터키의 군부쿠데타가 일어나자 현터키정부의 성격을 생각할때 미국이나 유엔은 적어도 쿠데타측의 편을 들지는 않을 지언정 침묵이라도 할 줄 알았다. 그러나 즉각 민주적인 선거로 구성된 현 정부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내놓아 좀 의외였다. 혹자는 미국이 국익에 의해 반응한다는 평가도 있지만 유엔은 그렇게 해석이 안되는 점이 있었다. 아마도 쿠데타군이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줄만한 여건이 안되어 있다는 정보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쿠데타군이 일시적으로 승리를 한다고 해도 그 이후에 일어날 수 있는 종교적인 원리주의자들과 개혁파들의 투쟁이 내란으로 번질 위험이 있고, 한참 세력이 꺾이는 중인 IS(이슬람국가)세력이 내란의 틈새시장을 개척할 위험이 있다는 예측을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현 터키정부가 IS에 친화적인 이슬람원리주의 성격을 가졌기때문에 내란중 IS는 터키의 절반을 확보할 가능성이 있다는 예측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쿠데타의 시기가 별로 안좋았고(어쩌면 이런 문제로 쿠데타가 일어났겠지만), 육군보다는 공군쪽이 쿠데타의 주도세력이 되었다는 문제점이 있는듯 하다.

터키는 개혁파들의 오랜 쿠데타의 전통이 있다. 1908년 젊은 장교들이 주축이 된 청년투르크당이 진보와 통일을 외치며 무장혁명을 일으킨 적이 있는데(2차 입헌운동), 개혁과 더불어 청년투르크당의 성격은 패권주의를 주장하는 전근대적인 면도 있었다고 한다. 그날 이후 터키는 케말파샤라는 군사지도자가 쿠데타를 일으켜 의식있는 통치로 터키를 발전시킨 일이 있는데, 집권적인 통치에 대해서 그다지 거부하지 않는 민중이 많다는 점은 케말파샤의 존재때문에 생긴 역사적이고 의식적인 습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무슨 문제가 있으면 군사쿠데타가 잘 일어나는 이유도 매우 성공적인 군사쿠데타가 여러번 있었다는 역사적인 인식과 습관때문인지도 모른다. 청년투르크당의 쿠데타와 케말파샤의 등장은 개혁을 위한 쿠데타가 매우 좋을 수 있다는 인식도 심어주었기 때문인듯 하다. 물론 반대로 쿠데타로 만든 정부가 나쁘지 않을 수 있다는 의식도 함께 가져다 준 절묘함이 있는듯 하다.  

그러니까 투르크를 구한 전쟁영웅 케말파샤를 꿈꾸는 많은 쿠데타후보자들이 있을 것이고 그렇게 만들어진 정부를 지켜야 한다는 많은 국민들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양쪽이 다 좋은 명분을 가지고 대립하다가 힘에 의해서 정의가 판단되는 문제가 있는듯 하다. 그러나 터키 사법부의 인재들이 어떤 방식으로 쿠데타에 가입했고, 왜 대대적인 사법부숙청까지 있는지는 의문이다. 분명한 것은 종교국가가 되어 팔레비왕시대보다 문화적, 경제적으로 많이 어두워진 이란의 전철을 밟지 않는게 좋을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