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wered By Blogger

2013년 10월 27일 일요일

사이버사령부와 하버마스




지난 10여년간 이념문제나 통일문제에 관해서 의견을 표명하다보니 한반도의 가장 중대하고 근본적인 사안인만큼 온오프라인을 통한 불협화음이나 간섭등을 느끼는 적이 많았던것 같다. 때로는 가시적인 증거를 확보해 놓기도 하지만 신뢰감없는 행위에 연루되는 일이 싫어서 크게 문제삼지 않았던것 같다.

10여년동안 수없이 인터넷기사를 보면서도 댓글을 단 적이 2004년도쯤에 다섯번정도밖에 없는것 같은데 주장하는 문제의 설득력은 신뢰감에서 힘을 얻으며 그 기준은 내 스스로가 지켜줘야한다는 생각때문에 자기검열을 한 것같다.

물론 인터넷댓글로 의사소통을 하는 의견들이 신뢰감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민주주의적인 정치참여와 의사결정에서 정치적 공론장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독일의 사회철학자 하버마스(Habermas 1929 ~  )의 말처럼 인터넷을 통한 의사소통은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버마스는 이밖에도 시민은 소통을 통해서 구조에 저항해야 하며 입헌주의 국가에서는 헌법이 시민들이 애국심으로 연대하기위한 구심적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하버마스의 이야기에서 저항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남북의 대치상황에서 이념대결이라는 합리적인 논리를 내세울 수 있는 사이버사령부지만 장기적인 안목으로 인과관계를 살펴서 합헌성(合憲性)과 실리(實利)를 생각해 본다면 적절하지 않은 방법을 사용했던것 같다.

국정원의 인터넷을 통한 적극적 정치형성행위가 문제가 되어 국정원해체의 여론이 생기자 북한정부도 한 몫 거들어 국정원의 해체를 주장하고 있는데, 현실적으로 한국의 적성정부(敵性政府)인 북한정부가 국정원해체를 주장하면 그 의견이 한국에서 받아들여져서 국정원해체에 힘이 될것이라는 생각은 북한정부는 전혀 하지 않는것이 좋을것 같다. 오히려 국정원존립과 개선의 의지를 견고하게 만들어주는, 북한정부로서는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를 끌어낸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이처럼 원칙을 지키지 않는 일들은 원인과 결과를 반드시 연결시키고 마는것 같다. 신뢰감이 없는 전 정부의 여러가지 일탈이 상대적으로 전 정부와 대비해서 신뢰감이 보여질수 있는 현 정부의 신뢰감까지 연대해서 피해를 입히는 결과를 예측하지 못했다는것도 의문스럽다.

여러가지 정보가 개방될수 밖에 없는 정보화 시대에서는 신뢰감에서 설득력과 권력이 힘을 얻을 수 있는것 같은데, 사이버사령부는 인터넷으로 여론을 형성하는 개개의 시민들보다도 신뢰감을 지켜야하는 중대함이 더 큰것 같다.

위의 북한정부의 국정원해체주장의 예에서도 보듯이 정부나 정부기관은 국민여론과 대치상황이 되버린 후에는 신뢰감의 상실로 설득력과 권력을 잃어버릴수 있는 사태를 실리적인 입장으로도 생각을 해 봐야할것 같다. 불순세력의 부정적이고 공격적인 여론형성에 같은 방법으로 대응했다는 사이버사령부의 입장은 이해가 가지만 방법에 있어서 무게의 수준을 같이 낮추어버렸다는 점은 실패한 방법인듯 하다.

2013년 10월 24일 목요일

성장동력 / 하이젠베르크


가끔 현실적인 생활문제에 부딪힐때마다 내가 미력하나마 힘쓰는 문제들이 결론을 보여줄 것인가하는 문제에 대해서 회의감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그때마다 다른 길을 가더라도 더 나을것이 없어 보이는 과거의 경험들이 뜻밖에 큰 힘이 되어주곤 하는것 같다.

또 노력들을 일깨우는 성장동력중 하나는 세상의 모든 사물, 엄격히 말하면 사물이라기보다는 사건들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런것들이 시간의 움직임과 단절되어 정지되어 있는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양자역학에 관한 이론들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독일의 헌법학자 루돌프 스멘트(R.Smend  1882 ~ 1975)의 동화적 통합이론이라는 헌법이론을 생각했던 것만으로 움직이는 세상과 그것의 한 부분으로서 움직여야 하는 숙명을 지닌 내 자신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던것 같다.

독일의 과학자 하이젠베르크(W.K.Heisenberg 1901 ~ 1976)는 어느날밤 원자를 연구하다가 자신의 연구결과가 자연을 해석한 것이 아니고 자연을 '형성'하였다는 깨달음을 얻고서 놀랐다고 한다. 철학과 자연과학과 신학이 합체하는 진리를 엿보았다고 할 수도 있을것 같은데,동양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정중동(靜中動) 동중정(動中靜)의 원리와 같은, 세상이 정지되어 있는것 같지만 한 편으로는 끊임없이 모든 개체들이 세상을 형성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것 같다.

다음은 하이젠베르크의 제자인 오일러가 하이젠베르크가 우라늄 프로젝트에 관한 공동연구원으로 지원할것을 권유하자 나찌공군에 자원입대했음을 이유로 거절하면서 둘 사이에 오고간 대화다.

 선생님은 제가 승리를 위해서 자원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저는 승리의 가능성을 전혀 믿을 수 없으며, 둘째로는 국가사회주의 정권인 독일의 승리는 핀란드를 점령한 소련의 승리만큼 가공스러운 일입니다. 권력자들이 단지 좋은 기회가 왔다고 해서 자기들이 국민 앞에 선포한 모든 원칙을 하루아침에 뒤집어버리는 그 후안무치한 행동에는 더 이상 어떤 희망도 걸 수 없습니다. 물론 저는 사람을 살상하여야만 하는 그런 부대에 지원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사격을 하거나 폭탄을 투하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무의미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제가 원자에너지의 이용에 대해서 연구한다 해서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저는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내가 반박하였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파국에 대해서는 아무도 어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네도 무력하고 나도 무력할 뿐이다. 그러나 파국이 지나간 다음에는 여기서도, 소련에서도, 그리고 미국이나 어느 곳에서도 다시 생활은 계속될 것이지만, 그때까지는 매우 많은 사람들이 파멸할 것이 틀림없다. 유능한 사람, 무능한 사람, 그리고 죄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들이 수없이 죽어갈 것이다. 그렇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때에 더 나은 세상을 재건하기 위하여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별반 좋은 세상이 온다고 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전쟁은 거의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사실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적어도 몇 가지는  개선할 수 있을 것이고, 몇 가지 잘못은 시정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째서 자네는 그러한 자리에 있으려 하지 않는단 말인가?     

- 하이젠베르크[부분과 전체] -

선(善)을 향한 낙관적인 성장심(成長心)을 하이젠베르크의 대화에서 엿볼 수 있는데,선의의 노력이란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과도 같은 것임을 과학자인 하이젠베르크는 깨달았다고 할 수 있을것 같다. 그 깨달음은 또한 하이젠베르크뿐만이 아니라 내 자신을 비롯한 사회의 부분인 개인과 개인이 모인 전체인 사회의 깨달음이었으면 바람직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2013년 10월 17일 목요일

군(軍)과 이념


과학자가 에술가보다 고귀한 이유 - 과학은 예술보다도 훨씬 고귀한 천성의 인간을 요구한다. 그들은 단순하고 야심을 모르고 소극적이고 조용하고 죽은 다음의 명성에 마음을 쓰지 않으며, 모든 것을 무릅쓰고 일에 몰두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 프리드리히 니체 - 

이념이나 종교의 부정적인 문제를 생각하다보면 그런 관념들이 일으킨  편견과 오해의 적나라함에 반발하는 경우가 있다. 니체와 같은 직관을 가진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이념이나 종교가 인간을 주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마리오넷(꼬두각시 인형)으로 만드는 허위의식이라고 생각할만 했던것 같다.

이념이나 종교가 사회와 인간을 더 나은 방향으로 개조할려는 선의의 목적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종을 요구하는 또 다른 의미의 정신적 권력으로 작용하면서 시민의식 발달을 저해하는 작용을 하는것에 대한 반발심이 니체와 같은 철학자의 생각에서 보이는듯 하다. 어차피 그럴바에는 과학과 같이 무념 무상의 집중이 필요한 세계로 사람들의 의식을 인도하여 모든 편견을 떨쳐버리고 새롭게 시작하자는 의도가 엿보이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니체와 같은 이유로 군인과 과학기술자의 복잡하지 않은 내면을 사랑하기도 했던것 같다.  


군의 사이버사령부도 댓글공작에 한 몫했다는 기사를 보면서 정치적인 문제를 떠나서 군의 기질적인 순수함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기분이랄까 그런거 느꼈는데, 이념의 기만성에 지극히 반발하는 개인적인 입장으로는 군마저 그런 문제에 휘둘리는 모습을 보면서 사회분위기의 청정하지 못한 모습이 갈데까지 갔음을 생각해보기도 한다.

원래 북한이란 이념과 선군정치를 본질로 하는 집단이 존재함으로써 대척적인 성질을 띌수밖에 없는 한국군의 숙명과도 같은 모습은 이해하지만 방법에 있어서는 많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반공이란 이슈로 전의(戰意)를 끌어내기 보다는 애국(愛國)이란 이슈로 전의를 끌어내는 것이 훨씬 타당하고 세련된 세상에 살고 있다는것을 잊은듯 하다.

가장 오랫동안 이념의 부정적인 효과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정체(政體)가 북한이라는 점, 한국인들의 의식세계가 점차 그런 문제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점을 군(軍)도 빨리 인지해야 할것 같다.  

2013년 10월 11일 금요일

이념을 버리고 몰입을 찾아서


한 개인에 있어서 변화란 두렵고도 즐거운 경험인것 같다. 몸과 마음은 지나친 변화에도 지치게 되지만 지나친 정체에도 지치게 되는것 같다.

시카고 대학의 심리학교수 미하이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 1934~ )는 경험추출법이란 실험을 통하여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경험인 몰입에 관해서 연구를 하였다. 이 연구에 따르면 주관적이고 일시적으로 행복을 가져다 주는 활동은 식사,섹스,수다,사교활동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이러한 활동들이 행복을 위해서 최적인활동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여가나 운동같이 긴장과 이완상태, 과제의 난이도와 능력이 균형을 이루면서 몰입할 수 있는 상태가 가장 행복한 상태임을 보여주었다.

옛날 헬레니즘 철학의 양대 학파중 하나인 스토아 학파는 금욕과 이성이 필요한 아파테이아 상태를 행복의 조건으로 들고 있는데, 칙센트미하이 교수가 제시한 몰입의 상태가 쾌락주의 헬레니즘 철학인 에피큐러스학파의 아타락시아상태와 상반된 개념으로 표현되는듯 하다.

한 국가나 사회시스템도 시스템의 구성원인 개인들이 추구하는 행복의 방식에 따라서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시스템을 이끄는 개인의식의 종합체인 이념도 그와 같은 모습을 보이는것 같다. 이념이란게 개인이 만들고, 정치적인 주도자의 권력을 얻어서 세력을 확장시키곤 하지만 그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들의 동조나 적어도 '무저항'을 기반으로 확장되기 위해서는 비숫한 생각들을 하는 개인들의 무의식이 종합적으로 연결되어야 할듯 하다.

완전한 자유방임주의는 인간의 이기적인 속성과 결합하여 사회붕괴현상을 가져오거나 오랫동안 봉건적이고 정체된 사회가 사회변화를 요구하게 되는데, 과학적 사회주의와 같은 유물론적 사고는 탄생의 시대적 배경이 하나의 지배적 이념으로 작용하는것을 막을 수 없었으며, 한반도에서 가장 파란만장한 이슈가 되고 있음도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을것 같다. 

그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이 때로는 사회의 성장동력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사회구성원들에게 변화를 주지 못하고 권태와 심리적 무력감을 부여하게 되면 사회의 성장동력이 소진되는 현상을 보일 수 있는데, 북한이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한국도 이념문제가 소수의 정치 엘리트들(우파던지 좌파던지)에 의해서 사회의 지배이념으로 유지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는데, 빨리 덜어내야 할 사회의 부담으로 생각된다.  

자유로운 개인, 그러나 주체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이성적인 개인, 그래서 자발적인 공존의 협력을 끌어낼 수 있는 개인, 이러한 개인들이 모여 사는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2013년 10월 8일 화요일

가치없는 경쟁 / 필립 짐바르도


권력지향적거나 출세지향적인 지인이 있었다. 그러나 그 이면을 살펴보면 과거의 계급관계나 계층관계에 민감해질 수 밖에 없는 사회구조로부터 받은 트라우마가 잠재해 있는듯 싶었다. 누구나 존중받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과, 공영(共營)의 중요성을 습관으로 익힐 시간을 갖지못한 한국인들의 깊은 상처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권력지향적이거나 출세지향적인 사람들은 인간관계의 상호작용에 굉장히 민감하고, 윗 사람에 대해서는 과도한 충성심을 반복하며 자신보다 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냉혹한 평가와 대우를 서슴치 않는것 같다. 군주와 노예가 한 정신안에 머무르는것 같은 생각이 들때가 있다.

필립 짐바르도 교수(Phlip G. Zimbardo 1933 ~ )는 유명한 스탠포드 감옥실험(SPE)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내면에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선과 악이 함께 내재해 있다가 환경과 역할행동에 의해서 표면화 된다는 사실을 입증하기도 했다.

소소한 일상에서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악하거나 선하거나, 강자거나 약자거나, 가해자거나 피해자거나, 지배하거나 지배받거나에 대한 관심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가학적이지 못하면 피학적인 절망속에 자신을 던져놓은 사람들도 보았고, 상상력을 발휘하여 피학적인 절망을 깊은 한으로 승화시키거나 현실극복을 위한 에너지원으로 삼는 사람도 보았다.  

지배하는 보수와 지배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하는 진보의 대립같은 이념문제도 이런 뚜렷한 양가감정이 사회적으로 표현된 현상인듯 하다. 언젠가 어떤 종교의 사회적 비판이 심화되자, 핍박을 받아야지 다시 태어날수 있다는 해당 유명종교인의 논리를 보며 종교외부의 사회전체를 적대시해서 현실극복을 위한 에너지로 승화시키겠다는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적 감성'을 보는듯 하여 이념과 함께 종교가 한국사회의 내면성장에 좋은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한국사회가 우월감과 열등감을 속성으로 하는 경쟁의 굴레에서 방황할때 본질적으로 선량하거나 최소한 악하지도 않은 시민들을 썩은 사과로 만드는 썩은 상자역할을 하지 않는가 싶다.  

2013년 10월 6일 일요일

경쟁의 비용 / 사이먼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사이먼(Herbert Simon 1916~2001 )은 이전까지 경제학을 지배해왔던 기계적 합리성이, 경제주체인 인간이 가진 불완전한 정보, 인간의 본성이 내포하고 있는 비합리적인 충동과 비일관성에 의해서 제한받는다는 '제한적 합리성(bounded rationality)'라는 개념을 제시한적이 있다.

언젠가는 내 주변의 인적교류에 관해서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었다. 왜 어떤 사람은 만나면 기분이 안좋은지 곰곰히 생각해봤다. 그러고는 인간관계의 기본 바탕이 남과 비교하는데서 시작된 우월감과 열등감으로 가득찬 지인들과의 교류를 제한하기 시작했다. 짧은 인생인데 주변인들과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철학적인 의도가 있기도 하지만 능률성 문제를 생각해도 썩 좋은 일이 아닌것 같았다.

우선 경쟁과 비교는 협력이 필요한 인간관계를 적대적으로 만들어서 사회비용을 발생하게 하는것 같기도 하고,  마음의 여유를 빼앗아 창조적인 지적행위(知的行爲)를 방해하기도 하는것 같다.

경쟁이란 개념은 원래 인간이 합리적 사고를 한다는 가정으로 탄생한 개념이다. 상당히 '비합리적'이었던 시대를 '과학'이란 이름으로 종식시키던 시절에 탄생한 경제학과 같은 사회과학의 파라다임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가 호응을 얻은 배경도, 계량적인 비용편익분석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경제학이 탄생한 배경도 '과학적 분위기'에 힘입은 바가 있는것 같다.

그러나 사이먼이 생각하는 것처럼 인간이란 합리성을 추구하는 비합리적인 존재임을 인정할수밖에 없을것 같다. 사이먼은 수학, 심리학, 통계학, 경영학등 다방면에 정통한 통섭형 인간으로서 인간이란 현 존재 또는 인간이 추구하는 것들이 생각보다 다양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학리화(學理化)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

때로는 계량적 합리성이라는 시대정신의 문제점을 이념이나 종교같은 내면적인 관념으로 대체시킬려는 사회적 시도도 보이지만 인간을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이념이나 종교 자체의 문제가 해결 안된 면이 있는듯 하다.

모든 성인들도 말한 바 있지만 경쟁은 자기자신과 해야 되는 일인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