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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30일 수요일

루이 16세도 몰랐던 프랑스혁명의 배경


우리는 프랑스혁명에 대해서 루이 14세때부터 강해진 절대군주의 전제정치나 왕실의 사치, 그로인한 재정적자,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한 3부회 소집, 3부회에서 평민대표들의 인구수에 비례한 더 많은 표결권요구, 평민대표들의 국민의회 설립, 정부의 국민의회 해산시도, 시민군의 바스티유감옥공격, 루이16세의 도주, 루이16세 체포, 성난 시민들의 루이16세 처형정도로만 알고 있는것 같다.

절대군주제하에서 군주에게 집중된 권한과 관심만큼이나 혁명의 원인이 군주에게 집중되고 있지만, 군주도 인지하지 못했던 혁명의 사회적 배경에 대해서 훗날의 역사가들은 객관적이고 특히 종합적으로 냉철하게 평가하는 경우가 있는것 같다. 한 편으로는 문제는 다방면에서 종합적으로 발생하고, 결말을 짓는 사건은 감정적이고 격렬한 군중에 의해서 파도처럼 밀려오는것 같다. 

다음은 프랑스역사가 앙드레 모로아의 [프랑스사]를 읽다가 프랑스혁명부분에서 좀 의외의 내용이 있어서 요약정리를 해보았다.

프랑스혁명 당시에 프랑스가 그렇게 어두운 그림자가 깃든 나라는 아니었다고 한다. 혁명 전 해인 1788년 프랑스는 유럽 인구의 16퍼센트인 2천6백만을 가진 유럽 최강국이었고, 이 숫자는 대영제국의 1천5백만이나 프러시아의 800만보다 월등히 많은 숫자였다. 게다가 아메리카의 독립전쟁이 승리를 거둠에 따라 아메리카의 독립을 지원한 프랑스의 군사력도 다른 유럽국가보다 월등하였다고 한다. 이듬해 시민군이 프랑스혁명을 성공시킨 잠재력은 아이러니하게도 구체제의 모순이 아닌 구체제의 잠재력을 계승한 덕분이라고 앙드레모로아는 말하고 있다.

당시 프랑스국민들의 왕에 대한 감정은 매우 우호적이었다고 한다. 프랑스국민들은 진심으로 "국왕만세!"를 외치며 종교전쟁과 프롱드 동란 이후의 어지러운 상태를 국왕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회복하고 있었다고 한다.프랑스는 국가의 위상에 비해서 성문헌법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는데, 고등법원의 관습법은 시민들의 수호자로서 역할을 하지 않고, 특권계급의 수호자로서 역할을 하였으며, 정부의 일선 행정기관은 인망이 없었고, 카톨릭소교구와 일선기관은 왕실감찰관보다 강한 권한을 가지고 국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고 한다.

귀족들과 시민계급은 같은 독서와 교양을 공유하고 있었으며, 빈곤한 상태로 몰락한 귀족들도 있었고, 부유한 시민계급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귀족은 개화되었어도 무척 오만하였고, 국민들을 분노하게 만든 것은 전제정치가 아니라 귀족들의 계급적 편견때문이었다고 한다.

종교적인 문제도 심각하였는데, 당시 민중들은 교회와 사제교구에게 매우 충실하였으나 일선의 사제들은 매우 힘든 사역을 하는데 반해서 주교나 궁정의 성직자들은 탐욕과 사치에 물들어서 민중들의 적대감을 사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프랑스인들은 100여년전에 명예혁명으로 만들어진 영국의 입헌군주제를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듯이 보였고, 오히려 국왕이 전제군주로서 특권계급들을 견제하며 국민의 편이 되주기를 기대했으며, 당시 프랑스의 경제학자들은 절대군주제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고, 3권분립 사상을 제안해 미국식 대통령제의 바탕을 만든 몽테스키외나 미라보같은 사상가를 제외하고는 자유민주주의 사상에 대해서 생각해본 학자는 없었다고 한다.

결국 혁명의 최종 희생은 국가의 표상이었던 국왕이 되었는데, 집권적인 위상을 가진 국왕이 민중의 기대를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사회저변의 부패와 혼란을 평정하지 못한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2014년 4월 26일 토요일

보고, 듣고, 배우고, 실행하다 / 알버트 반두라


오래전 어느 명문대 졸업생이 경제적인 문제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것을 보고 의외로 좀 놀란적이 있었다. 우파와 좌파를 양분하는 궁핍한 정치문화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켜 살아온 세대로서는 한 편으로 신선한 충격이기도 하였던것 같다. 하지만 그의 준거집단은 한국 최고의 엘리트집단이며 친구들은 부유했고, 자신은 가난한 가정에서 자란 촉망받는 수재라는 점을 생각하고는 곧 그의 조급한 마음이 이해가 되었고, 나보다 훨씬 뛰어난 수재로서 좀 더 다양하고 가치있는 삶을 생각하지 못하는 점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막장이라는 표현은 많이 들은 바 있지만 정작 15년 이상 멀리했던 티브이 드라마를 보다가 적어도 내가 살아가는 세계와는 많이 다른 비현실성에 놀랐다. 한국의 경제성장기를 견인했던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지향하는 내용은 여전했지만 그 이면에 인간의 복잡하고 내밀한 관계와 인물의 성격들로 일관하고 있는 점은 사회를 건전한 방향으로 끌고가지 못하는 점에 있어서 개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캐나다의 심리학자인 알버트 반두라(Albert Bandura 1925 ~ )는 유명한 보보인형실험을 통하여 보고, 듣고, 배우는것이 실행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관찰한 바가 있었다.

넘어지지 않고 오뚜기처럼 일어나는 보보인형을 괴성을 지르며 때리고 넘어뜨리는 어른이 등장하는 영화장면을 실험집단의 아이들에게 보여주자 보여주지 않은 통제집단의 아이들에 비해서 더 적극적으로 보보인형을 학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또 보보인형을 학대한 어른이 칭찬받는 장면을 본 아이들은 보보인형을 학대한 어른이 비난을 받는 장면을 본 아이들보다 훨씬 심하게 보보인형을 학대하였으며, 실제로 보보인형을 대하지 않으면 별다른 폭력적 징후를 보이지 않는다는 결과도 얻었다. 즉 실현불가능한 학습은 어떤 행동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결과도 얻었다고 한다.

드라마의 사회형성작용을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문제인것 같은데, 다행히도 어떤 신념이 자리잡은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모방과 학습의 효과가 덜 할것도 같다. 그런데 그 신념이라는것이 성장과정과  사회생활을 하면서 자발적이 아닌 환경으로부터 강제적으로 수용된 신념이라면 신념 자체가 모방과 학습의 효과를 일으킨 셈이 되었던것 같다.

적어도 강제적으로 주입되는 어떤 신념을 수용하지 않고 거부한다고 해도, 거부한다는 행위자체가 관점을 포섭하는 결과가 될 수 있다는 사실도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재미있는 (그러나 현실은 비극적인) 사실은 자유를 강력하게 외치기 시작했을때부터 통제의 시작이 되고, 구원을 외칠때부터 지옥이 시작되는 점은 관점을 가두어놓은 학습효과에 책임을 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특히 한국에서는 어떤 이념을 강력하게 이야기하면 대척적인 이념을 함께 성장시키는 토양을 만들 가능성이 생기기도 하고, 종교적인 구원을 강하게 바라는 백성들위에 구원을 하겠다는 명분으로 또 다른 억압을 성장시키는 자들이 자주 생긴다는 사실은 더욱 근본적이고, 공리(共利)적이며 선량한 관점을 보고, 듣고, 배우지못한 백성들의 흔들리는 마음에 원인을 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2014년 4월 25일 금요일

생각하지 않는 신화와 이성


참담한 사태의 와중에 사태의 배경이 될 수 있는 종교와 사태의 본질을 흐트릴 수 있는 분단과 관련된 이념적인 관점으로 관심을 유도하는 유명논객의 이름이 인터넷 검색어의 순위에 나란히 올라 있는것을 보며 사람들의 고통이 종교적 믿음이나 이념보다 가치가 없는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이 와중에 이런 글을 쓰고 있는 내 자신도 그렇지만,인간은 욕망이 강할수록 종교에 포섭되기 쉬우며 지식이 많을수록 현학적 사고에 포섭되기 쉬운 역설적인 주제들이 엄청난 한 사건속에 어김없이 표현되어 나오는것이 신기하게 예측했던 바가 있다. 도대체 한국에서 일어나는 재난에 종교나 이념이 관여하지 않는곳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정치학자인 아도르노(Theodor Wiesengrund Adorno 1903~1969 )와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 1895~1973)는 공동으로 저술한[계몽의 변증법]이란 저서에서 신화의 신비적인 요소가 도덕적인 효과를 가져오는데,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하는 합리적인 성질을 가졌다는 계몽사상은 신화로부터의 탈출이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생각하지 않는 독단으로서 새로운 전체주의로 변질된다고 말한다. 당시 두사람이 겪었던 극우적인 성질의 파시즘과 극좌적인 성질의 공산주의의 야만성과 학살극을 경험하면서 두 사람은 합리성이란 이름으로 인류를 불행으로 몰아넣는 이념에 대해서 환멸을 느꼈던것 같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러서 한국에서는 도덕적이지 못한 신화가 만든 재난과 그 재난을 합리적이라고는 하지만 전혀 합리적이지 못하고 구태의연한 독단으로 이념적인 해석과 계몽을 하는 진부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것은 매우 못마땅한 일인듯 싶다. 누가 뭐라 해도 고통의 시간은 고통 자체가 본질인 시간이기 때문이다.

2014년 4월 19일 토요일

고통으로부터의 자유 / 빅터프랭클


좀 더 자율적으로 성장한 젊은이들이 어떤 위기에 닥쳤을때 의연한 태도를 보이는것과는 달리 사회적인 지위와는 상관없이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어른들이 타인의 절망에 대하여 무지(無知)한 언행(言行)을 일삼는 경우를 보기도 한다. 그 이면에는 한국사회가 그동안 쌓아온 획일적인 사고의 내공(內功)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것 같아서 마음이 쓰리기도 하지만 그럴수밖에 없었던 역사적인 환경에 희생당한 세대들의 '스스로를 치유할 수 없었던'고통들에 대하여 연민의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이자 철학자인 빅터프랭클은 2차대전중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 3년을 보냈다. 그는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고, 살아가야 할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독일군의 손짓 하나로 생사의 갈림길에  서야하는 겨울 수용소의 새벽기상 시간에 젖은 신발에 발을 넣는 고통을 이기기 위해서 전 날 남겨 두었던 빵을 씹으며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기 위해서 노력했다고 한다.

가끔 힘든 일터에서도 능률을 재촉하는 어두운 얼굴의 갑(甲)과 신앙이나 가족,주말에 대한 기대, 운동등으로 고통을 회피하는 을(乙)의 예상과는 달리 뒤바뀐 현실의 운명을 보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빅터프랭클이 생각이 났다.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이 없이 이념과 물질적인 번영, 권력, 지위, 명예, 경쟁적인 시험 위주의 교육등에 시달려 온 세대들의 획일화 된 사고는 어떤 위기 상황에서 도움이 안되거나 때로는 위기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스스로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내면을 통찰 할 수 있는 긍정적인 경험이 부족했던 탓이라는 생각이 든다.

2014년 4월 12일 토요일

시장형태의 순환과 불완전경쟁시장


미국의 오바마행정부가 최저임금을 인상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는 기사다. IMF총재 크리스틴 라가르드도 지난 2월 한 국제회의에서 소득격차가 황무지사회를 만든다고 이야기한 바 있고,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특강에서 한국경제의 균형있는 성장을 이야기한 바 있다.

케인즈시대의 경제문제인 정부실패현상을 수정하기 위해서 프리드먼시대의 신자유주의 경제사상을 경제정책에 적용한지 오래되지 않았는데,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문제점을 인정하고 있는 모습이다. 문제의 발생과 교정, 원인과 결과의 시계열적인 의미를 생각하면 당연한 이치지만 타협하지 않는 경제사상의 프레임이 교체되어 가는 과정에서 상처입는 시민들의 지나간 삶은 보상받을 길이 없는것은 문제인것 같다.

자유주의 경제시장의 이상형은 완전경쟁시장이지만 뜻밖에 '자유경쟁'이란 토양이 '불완전경쟁'이란 거목(巨木)을 배양해 냄으로써 자유주의 경제시장이 추구하는 자발적이고 효율적인 자원의 분배를 방해하는 문제를 일으킨다는 사실은 1933년 미국의 경제학자인 에드워드 체임벌린(Edward Chamberlin)의 저서 [Theory of Monopolistic Competion : 독점적경쟁론]이나 영국의 경제학자 조안 로빈슨(Joan Robinson)의 저서 [The Econimics of Imperfect Competion : 불완전 경쟁의 경제학]에서 예고된 바 있었다.

한 예로 자유주의 경쟁시장에서 성장한 재벌이 독점적이거나 과점적인 불완전경쟁을 형성하여 자원의 균형분배를 왜곡하고 있는 현상은 조금 더 거시적인 안목으로 보면 당연한 흐름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이념적인 프레임과 대중정치적인 성향에 갇혀 그런 문제점을 인지하지도 못하고, 당연히 경제적인 요구를 정책으로 피드백 시키지 못하거나 반응이 느린 결점이 있는듯 하다.

사회의 밑바닥(밑바닥이라고 표현하고 기초적인 기반이라고 읽는다)을 살아가는 일인으로서 절실하게 느끼는 문제점을 사회시스템을 전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건과 의무를 지닌 정치인과 경제인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은 의문인것 같다. 로빈슨은 한 기업의 독점이 이루어질때 경쟁적인 균형시장에서 받을 수 있는 임금보다 저임금을 받게 되는 근로자들의 불이익을 '노동착취'(monopoly exploitation) 라고 하는데, 열심히 일하고 현실의 최저임금 받는 근로자들의 어려운 여건은 근로자들이 국가를 구성하는 '다수의 부분'이라는 점을 전제할때 '국가의 어려움'이라고 표현해도 좋을듯 하다.

2014년 4월 5일 토요일

행복이란 개념의 진화 / 알랭


사회적인 평가의 귀천(貴賤)을 묻지않고 한국의 일터는 치열하다. 사회에 대한 헌신과 공익보다는 경쟁을 강조하던 시절의 근로에 관한 인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듯 하다. 사회가 지속성을 갖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공존(共存)이란 가치를 인식할 여유없이 달려온 한국의 경쟁적 의식은 여러가지 부작용을 낳으며 서서히 사회붕괴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점이 여기저기서 느껴지기도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갈등관계'가 더 나은 세계를 만드는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은 진리인듯 하다.

"우리는 싸울 것이다. 바다에서도 싸우고, 산에서도 싸우고, 직장에서도 싸우고, 학교에서도 싸울 것이다."해서는 곤란한듯 하다.

세계 헌법의 기본권 사상이 자유권을 지나서 복지를 중시하는 사회권으로 발전하고, 이제는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지구촌의 인연과 결속을 무시할 수 없다는 '연대권'을 중시하는 시대로 발전하는 동안, 한국은 복지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복지란 개념이 좌우 이념과 연계되어 정쟁(政爭)의 도구로서만 사용되고 있는듯 하다. 그동안 일을 해도 벗어날수 없는 가난에 지친 백성이 하나 둘 스스로 사회의 구성원이 되길 포기하는 불상사가 발생하며 사회붕괴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점은 긴급히 시정되어야 할 문제인것 같다.

부정적인 관념이 지배하는 사회의 시민은 불행한듯 하다. 부족한 일자리중 하나를 구해서 기계적 능률성과 싸우고, 동료들과 밥그릇 경쟁을 하다보면 근로의 사회공헌적인 의미는 안드로메다에 있는듯 하다.

헌법상 기본권의 흐름이 자유권에서 사회권으로, 사회권에서 연대권으로 흐름이 진화하듯이 '행복'에 대한 인식도 자신의 이기적(利己的)인 행복에서 이타적(利他的)인 행복으로, 이타적인 행복에서 기타적(己他的)인 행복, 즉 나도 행복해지고 타인도 행복해져야 옳다는 진화된 의미로 생각해봐야 할것 같다.

다음은 시몬느베이유의 스승이기도 한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Alain Emile Auguste Chartier : 1868 ~ 1951 )의 행복에 대한 생각이다.

우리는 외투 정도로밖에는  관계가 없는 그러한 종류의 행복이 있다. 예를 들면 유산을 상속하거나 복권을 뽑아서 한몫보는 것이 그것이다. 명예도 그러하다. 명예는 우연에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힘에 의존하는 행복에 젖어 있는 것은 마치 양털이 붉은 색깔로 염색되어 있는 것 이상이다. 옛날의 현명한 사람들은 이웃 사람의 행복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행복을 구하였다. 

그런데 오늘의 현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자기 행복을 구하는 것은 고상한 일이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덕(德)은 행복을 모욕한다고 가르치지만, 이런 말을 하는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 다른 사람은 공동의 행복이 자기 행복의 참된 원천이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아주 공허한 말이다. 왜냐하면 마치 구멍이 뚫어진 그릇에 술이라도 부어 넣은 것처럼, 주위 사람들에게 행복을 부어넣는 것보다 더 공허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권태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즐겁게 할 수는 없다.반대로 조금도 탐내는 일이 없는 사람에게야말로 무엇을 줄 수가 있다. 스스로 강하고 행복한 사람은 타인에 의해 더욱 강해지고 행복해질 것이다. 그렇다. 행복한 사람들은 이득이 많은 장사나 거래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남에게 행복을 주기 위해서는 자기 내부에 행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행복해지려고 결단을 한 사람은 이러한 면을 잘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아무 소용에도 닿지 않는 사랑을 베풀지 않아도 된다. 자기 자신의 행복은 결코 덕애 위배되는 것이 아니다. 힘을 의미하는 이 덕이라는 아름다운 말이 표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란 옷이라도 벗어서 집어던지는 것처럼 다른 행복 같은 것은 서슴치 않고 던져 버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의 참된 행복은 절대로 내던지지 않는다. 행복해지기를 원하고 이를 위해서 애쓸 필요가 있다.

나의 행복과 타인의 행복은 연결이 되어 있고, 행복한 삶은 개인의 의무이자 권리이기도 하며, 개인이 모인 집합체인 국가의 의무이자 권리이기도 한듯 하다. 행복이란 개념 조차도 잃어버린 이념적인 정체(政體)인 '북한'이란 존재때문에 '복지'에 관한 논의가 행복이란 관점보다도 이념적인 관점으로 논의가 되어 한국민의 '행복한 삶'을 방해하는 사실조차도 타인의 행복과 나의 행복은 연결되어 있다는 속성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드는데, 궤변이 아니라 한국의 역사적 경험속에서 내부 갈등이 가져온 불행한 사태의 예는 많이 찾을 수 있는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