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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31일 목요일

학생 K / 주희의 독서

K라는 젊은이를 1년동안 가까이했다. 당시 재수생활을 했는데, 중위권정도의 모의고사성적을 보이고 있었다. 어렷을때 부모가 결별하면서 보육원에 맏겨졌다고 한다. 그러니까 요즘 언어로 표현하면 흙수저도 아닌 가시수저를 입에 문 젊은이였다. 어려운 여건에서 공부를 어쩌구 하는 그런 관심이 아닌 학습태도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는데, 10개월정도의 학습기간의 태도가 마치 미륵보살 같았다. 대처수상의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을 자신과 동일시시키며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다. 여건이 안되니 친구들과 간식거리를 챙길수도 없고 꾸준히 책만 파고들었다. 1달에 한 번 보는 모의고사 성적이 꾸준히 10점정도씩 상승했다. 결국 한국 최고의 대학이라고 하는 S대와 P공대를 동시에 합격했다. 아마 지방신문에도 기사가 나왔다고 하는데, 못 보았다. 스스로 얻어낸 깨달음이 많았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훨씬 연상인 내게도 두고 두고 마음의 스승역할을 하고 있으니 배울 것은 어디에도 있다는 생각을 확인시켜준 젊은이였던것 같다.

그 이듬해 내게는 정신적으로 최악의 혼란을 겪는 사건이 생겼는데, 이념문제와 북파공작원문제가 얽혀서 본질을 알고자 하는 행위가 권력과 관련된 정치행위라는 누명을 썼던 모양이다. 정치행위가 봉사행위라는 내 혼자만의 생각은 그냥 내 혼자만의 생각이었던것 같다. 도청, 감청,통화방해, 미행등의 상대가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K라는 젊은이가 여름방학때 내려왔다가 길에서 잠시 마주쳤는데, 탁구를 집중적으로 배운다고 했다. 그 말에 힌트를 얻어 새벽에 일어나 검도와 사격훈련을 시작했다. 한 번은 어떤 은퇴한 특수요원과 언쟁을 벌였는데, 내가 머리속으로 아는 것만 있다고 한 말이 마음속에 아른 거렸다. 어린시절 곱상한 모양새의 부친께서 뜬금없이 동네팔씨름대회만 열리면 우승을 했는데, 생김새와는 달리 나도 무골(武骨)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스케이트와 수영을 익히면서 합기도의 전사경(轉絲勁)방식을 적용시키거나 부드러운 방식으로 에너지 손실을 최대한 줄일것이라는 원칙으로 연습을 했는데, 효과가 상당히 좋았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책을 100여권을 분해해봤다. 역시 독서도 중요했다.

송나라의 주희(朱熹 1130 ~ 1200)가 만든 주자학은 조선의 통치원리로 채택되면서 매우 관념적이고 비실용적이라는 누명을 썼다. 그러나 그것은 그 시대를 움직여 나가는 사람들의 수용태도에 따른 것이지 더욱 진보한 학문 자체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던 주희가 만든 성리학의 원리적이고 관념적인 모습은 명나라때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조금 더 실천적으로 변한 양명학으로 발전하고, 청나라때 들어오면 실증성과 과학성을 중시하는 고증학(考證學)으로 발전했다. 조선은 고증학을 실학(實學)이라는 학문으로 받아들였지만 보수적 세력들의 반대로 빛을 보지 못한 것을 보면 역시 사람들의 수용태도가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학문의 길에 이치를 끝까지 따지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다. 이치를 따지는 요령은 반드시 독서에서 시작된다. 독서법으로는 순서에 따라 치밀함에 이르는 것이 중요하다 치밀함에 이르는 기본은 삼가 차분하게 뜻을 유지하는데 있다. 성인의 책을 읽으려면 읽고 또 읽어야 하는데 매일 매일 읽으면 성현의 말씀이 점점 의미있게 느껴진다.

독서의 처음에는 의문이 생기는지 알지 못한다 조금 지나면 점차 의문이 생긴다. 중간쯤 가면 곳곳에서 의문이 생긴다. 이런 과정을 한바탕 치르고 나면 모든 것이 한데 모여 하나로 관통하게 되고 모든 의심이 없어진다.

독서법이란 별다른 것이 아니다. 뜻을 단단히 하고 마음을 비운 다음 반복해서 상세히 음미하면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다.

공부 기간은 융통성을 가지고 길게 잡되 공부 과정은 팽팽해야 한다. 공부는 강단 있고 과감하게 결단해야지 유유자적해서는 안된다.

뜻을 세우는 입지(立志)가 확고하지 않으면 어떻게 공부하겠는가?

주희가 독서와 공부에 관해 언급한 것을 몇가지 적어봤는데, 문득 산만하거나 때로는 천박한 생활속으로 매몰되어가던 중 K라는 젊은이가 생각나고, 내 자신을 추스리고 인식을 넓히기 위해서 서점에서 외교와 세계사 관련된 책을 몇권 골라왔다. 뜻을 잃으면 독서랑은 쉬이 멀어지게 되는 현상을 경험했는데, 생활속에 매몰되어 있으면 그 젊은이의 미륵보살같은 성실하고 꾸준한 태도는 보기 힘들고 경박하게 들뛰는 모습만 보기 마련이다. 물론 나 자신도 동조되어감을 느낀다. 그래서 책을 손에서 놓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어른은 아이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는 태도를 항상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2015년 12월 26일 토요일

이스라엘 정보국 모사드 / 비합리적인 문명

텔아비브의 테러리즘 연구소장 아리엘 메라리 박사는 빈라덴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빈 라덴은 이슬람 문명이 절정에 달했던 1200년대 안달루시아 문명을 재건하겠다는 꿈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스페인 도시 코르도바에는 900개의 공중목욕탕, 최고의 무슬림 책들로 가득 차 있는 70여 개의 도서관들 그리고 최고의 식당과 의사들이 있었을 정도였다. 마드리드에서 벌어진 3.11 열차 폭탄 테러는 이라크에 주둔해 있는 스페인군의 철수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사실은 이런 꿈의 실현과도 연관이 있었다.

빈 라덴은 아프카니스탄과 파키스탄국경의 토라보라 산 동굴에 숨어 지내며 아시아로부터 스페인 너머에까지 이르는 무슬림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꿈을 꾸고 있다. 이런 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빈 라덴이 위험한 것이다. 그는 이 꿈의 실현을 위해 살육을 마다하지 않는다. 몽골의 칭기스칸, 십자군, 나치 독일, 러시아의 소수 민족 학살을 능가하는 규모의 학살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위험한 인물이다.

- 기드온의 스파이 중에서 -

중동에서 벌어진 일이나 중동발 사건들은 대부분 종교적인 이상과 무관하지 않은 듯 하다. 종교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의 과정을 거치는 수고로움없이 현실적인 욕망들을 신념화시킬 수 있는 좋은 도구이기도 한것 같다. 건설적이냐 파괴적이냐 하는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민족의 고난과 건국에 관한 사건도 종교적인 이상과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면이 종교적인 이상이 자주 위험할 수 있는 이유인듯 하다.

모사드의 분석관들은 찰레비 케이스를 통해서 부시 행정부의 업무 처리 방식에 대해 다시 한 번 놀랐다. 9.11 사태 이후 워싱턴의 정책결정에는 종교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9.11 사태가 발생한지 4일 후 빌리 그래함 목사가 백악관을 방문했다. 부시 가문과의 오랜 친구 관계인 그래함 목사는 테러리즘의 악마성과 이를 분쇄하는 '정당한 분노'에 대해 부시 대통령과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그러고는 "내가 블레셋인들에게 손을 뻗는 것을 보라. 내가 그들에게 복수를 가했을 때 내가 주인인 것을 알게 되리라"라는 성경 구절을 소개했다. 또한 '정당한 분노'를 행사하는 권리가 명시된 성경 구절에 표시를 한 포켓 사이즈의 성경을 대통령에게 선물로 주었다.

부시 대통령은 에스겔 선지자의 말씀에 위로를 받고 힘을 얻었다. '정당한 분노'라는 개념이 부시 대통령의 사고 속에 깊이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2002년 부시 대통령이 의회나 군 지휘관들을 상대로 행한 모든 모든 연설 그리고 주간 라디오 연설에는 이런 사고 방식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부시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은 하나님이 승낙하신 전쟁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라크에 대한 '예방적 전쟁'도 부시대통령의 종교적 신념에 기초해 있었다.

- 기드온의 스파이 중에서 - 

바로 이런 점이 문제다. 테러리즘 자체가 비합리적이고 비 이성적이며 무엇보다도 '파괴적인 악'이라는 점 때문에 방어하거나 예방해야 하는 것이지 종교적 신념을 정당성의 원천으로 사용한다면 분쟁의 골은 더 깊어지기만 할 뿐이라는 사실이다. 이래 저래 중동발 사건들은 종교적 신념이 얽힌 문제가 되버린듯 하다. 이런 문제와 관련해서는 한반도의 이념분쟁도 유사한 모습을 보이는듯 하다. 중동은 문명 자체가 종교적인 성향이 강하다고 할 수 있는데, 아마 교육이나 생활 속에서 종교적인 억압이 지나치게 강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이란같은 경우도 팔레비국왕의 합리적인 정부(적어도 지금의 이란에 비해서는 그렇다는 표현이다)를 호메이니의 종교적인 정부가 대체하고 나서 문화자체가 비합리적으로 퇴보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과거에 비해서 너무 어두워진 이란 문화에 대해서 이란 국민들은 후회하고 있지만 이성적인 사고를 할려고 하지 않은 댓가를 크게 치루고 있다는 생각이다. 쉽게 갈려다 망한 경우라고 봐야할 것 같다.

중동은 왜 종교적일까. 애초부터 다른 문명들과 쉽게 교통할 수 있는 비옥한 반달지대의 개방형 문명이라서 과학도 발달하고, 전쟁도 잦았다고 한다. 이집트문명이나 인더스 문명, 황하문명에 비해서 국가의 이합집산이 잦았는데, 문명의 지혜로움에 비해서 척박한 자연환경이 부족들간의 결집체를 쉽게 만들어내지 못하고 정신적인 연대감이라도 필요해서 그런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점은 한 반도에서도 마찬가지인듯 한데, 이념이란 것이 외세의 침략이나 변동하는 사회문화의 산만함에 대응하여 정신적인 연대감을 추구할려는 욕망을 불러 일으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점에서는 중국은 중화사상, 일본은 전통적으로 일관성있는 내부문화등이 있는데 비해 한반도는 그런 문화가 없는 것이 이념적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반도라는 지리적 위치는 가장 큰 문제의 원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듯 하다.

개인적으로 생각을 해봐도 어려운 시절에는 마음의 중심을 찾기 위해서 뭔가 믿고 의지할 만한 신념을 찾고자 시도하는 일이 있었는데, 나 자신뿐만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을 겪는 것을 보았다. 물론 늘어나는 지식만큼 신념들이 세련되어지고 객관화된다는 사실도 경험한듯 하다. 개인적으로는 '신념'들이 가져다 주는 파괴와 광기에 대해서 많이 경계하는 입장인데, 그래서 다방면의 지식이나 인문학적 철학적인 교육등이 국민들에게 필요하다고 역설하기도 한다.

1995년 10월 모사드의 안가에서는 이슬람 지하드의 종교책임자인 파디 시카키에 대한 암살작전이 계획되고 있었는데, 시카키는 25년동안 오만건이상의 테러사건을 배후조정해 400명 이상의 이스라엘 사람이 희생되고, 10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시카키는 아랍인들에게 영웅적인 존재로서 코란을 뒤져서 탄압을 받는 자는 가해자에 대해 새로운 힘으로 대항해도 된다는 논리를 끌어내어 자살을 금지한 이슬람 율법에도 불구하고 10대청년들이 몸에 폭탄을 두르고 자살공격에 뛰어들도록 유도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지도자들이나 시카키같은 이슬람지하드 지도자들은 이런 말을 자주 한다고 한다. "우리는 싸운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 이유다." 

뭐 이것 저것 생각하기 싫다는 말이다. 

2015년 12월 25일 금요일

지도자의 합리성과 직관

생각해보면 10여년 이상 내 머릿속은 실리(實利)와 같은 합리성과 이념과 같은 비합리성의 대칭관계에 시달려온듯 하다. 지난 10월말경인듯 한데, 북한의 지도자 김정은이 "북남관계의 개선기회를 걷어차면 저주를 받을것"이라는 언급을 하여서 어안이 벙벙하게 만든적이 있었다. 내 생각으로는 이념은 허구적인 관념이라고 생각하는데, 한국가의 지도자라는 사람이 저런 초합리적인 발언을 하니 솔직히 표현하면 좀 그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것 같았다. 그러나 북한만이 그런것이 아니고 한국지도자에도 힘차게 시달리며 살아온 경험이 있는바, 망국적 병폐가 한반도에 깊었다는 독설이 절로 나오기도 한다.

정치적인 행위를 하는데 직관이란것이 대단히 중요한듯 하다. 어쩌면 정치행위의 모든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이 직관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초합리적인 성향을 가졌다고 해서 극단적으로 완전한 종교행위나 비합리적인 관념으로 몰입되는 비극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언젠가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무거운 선배에게 3년만 돌아볼 것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민생(民生)의 격렬하게 어려운 부문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배짱좋게 이야기 하고 있지만 이리저리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쫒겨다녔다. 그러나 인내심을 키우기 위한 훈련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이겨낸듯 하다. 물론 오래전에도 간간히 그런 경험이 있지만 일부로 내 자신을 몰아넣은 것인지 어쩌다 타의에 의해서 그렇게 된 비극인지는 잘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규명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마음에 와 닿기 시작하고 그것이 점점 목적과 연관하여 구체화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추상적인 느낌같은 초합리적인것들이 합리적인것으로 구체화된다고 표현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국민의 행복같은 목적을 가지지 않은 지도자가 이념이나 종교같은데 몰입하는 것은 아직 지도자로서 자격이 미완성되었다는 생각이 나는것 같다.

정치적인 문제를 인식하여 구체적으로 적용시키는 방법은 두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목적을 먼저 인식하고 거기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해결방법을 끌어내는 합리론적인 방법(연역적인 방법)과 경험을 통해서 그때 그때 대처해 나가면서 해결해나가는 경험론적인 방법(귀납적인 방법)이 있는듯 하다. 목적은 철학과 관련있고 본질과 관련이 있다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취급받아서는 안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정치에서는 어떤 사건이 터지면 그때서야 비로서 예방하는 법안이 발의되어 통과되는 경험론적인 상황이 연속되는듯 하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400여개가 넘는 장마당이 들어서고 있는데, 시간이 지나면 자본주의 체제로 변했다는 것을 지도자가 가장 늦게 인식하는 상황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초합리적인 발언을 하는데서 유추를 해 볼 수가 있다. 인내력을 가지고 합리적인 생각을 안해봤다는 의미인듯 하다. 물론 국민을 위한 목적같은 것은 다른 분야보다 발달한 인공위성을 타고서 먼 우주로 날아갔을 것이다.

정치적인 직관을 발휘해보라고 지도자로 선출을 하니 이상한 초합리적인 생각으로 국고(國庫)를 탕진한 한국의 어떤 지도자를 생각하면(주어는 없다) 사회의 밑바탕을 돌아보는 행위는 경험을 통해서 직관을 얻고 직관을 얻어서 좋은 결과로 구체화시켜야 한다는 의미를 둘 수도 있을 것 같다. 결론을 말하자면 목적이 있는 직관은 합리적이고 목적이 없는 직관은 초합리적이라는 의미다.  

2015년 12월 24일 목요일

이스라엘 정보국 모사드 / 다간

각국 정보기관들의 최고모델은 이스라엘 정보국 모사드로 알려져 있다.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국들간의 관계는 세계의 운명을 결정짓고 그 배후에 모사드가 있는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 모사드가 세계의 운명을 결정짓는다고 확대해석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정보기관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10여년전 북파공작원이었던 부친의 일로 이리저리 얽히는 바람에 잠시 알려지지 않은 세상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표현 그대로 역시 여러 일들이 알려지지 않을 것 같다. 알려질 것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그들의 세계에서는 그들만이 공유하는 '판단'이 있기 마련인데, 그것들은 어떤 원대한 목적, 예를들면 '애국'이나 '국가안보', 누군가의 '안전'을 한계삼아 성심성의껏 지략을 전개시키기 마련인듯 하다.

주로 고든 토마스가 저술하고 이병호 현국정원장이 번역한 [기드온의 스파이]라는 서적과 미카엘 바르조하르와 니심 미샬이 공저한 [모사드]라는 서적을 기반으로 몇가지 이야기를 서술하고 해석하고자 하는데, 특히 다간의 취임사발언은 한국의 남재준 전국정원장이 취임사에서 인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다간은 취임사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레바논에서 한 가족 내의 싸움이 어떤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목격한 일이 있습니다. 한 족장의 뇌가 깨어져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고 그 주위에는 부인과 몇 명의 어린 아이들이 시체가 흩어져 있었습니다. 내가 손 쓸 사이도 없이 죽은 족장의 한 아들이 그 뇌를 한움큼 손으로 잡더니 삼켰습니다. 이것이 레바논 사람들이 집안싸움에서 하는 행동입니다. 뇌를 먹어 삼켜라. 그렇게 그의 힘의 근원을 마셔라"

"나는 여러분의 뇌가 먹히기를 절대 원치 않습니다. 뇌를 먹는 사람은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 기드온의 스파이중에서 -

국가안보에 관한 결심을 자극하기 위해 상당히 자극적인 예를 들었는데, 다른 국가의 정보요원들과는 달리 이슬람극단주의자들에 대항하여 '키돈'이라는 암살팀을 운영하고 있는 모사드로서는 절박한 필요성과 심정을 대변하는 표현일 수 있을 것 같다.이스라엘이 암살공작을 할때는 Talio의 법칙(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 합당한 응징원칙에 따른다고 한다. 복수주의는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법전에도 나와 있는것처럼 중동지방의 문제해결방식으로 풍토처럼 자리잡은 원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스라엘의 역사와 바빌로니아가 전혀 무관하지 않고, 유대교를 근거로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파생된 것처럼 근본은 같지만 결국은 이해관계가 기반이 된 영역투쟁과 감정싸움이 국가간 분쟁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이 어렴풋이 생각된다.

알고보면 좀 사소한 어떤 문제를 가지고 정보기관의 안가에서 상담을 한 적이 있었는데, 상담 중간에 수도기술자나 청소부가 얼굴도장을 찍곤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그저 그렇게 보였지만 그들의 세계에서 떠돌던 사람 눈에는 수도기술자의 눈빛이나 청소부의 골격, 걸음걸이, 그리고 왜 그렇게 드나드는지를 생각하게 했을 것이다. 특히 특별훈련을 받은 사람들이나 무성무기(단검등)등을 많이 잡아 본 사람들은 적대적인 상황을 항상 가정하고 있기 때문에 수도기술자나 청소부의 등장이유를 금방 이해하곤 했을 것이다. 정보국에서 파견나온 상담요원의 안전을 보장해야 했을거라는 생각같은 것이다.

그 유명한 모사드에서도 유명한 전설적인 인물이라면 2002년부터 모사드의 수장을 지닌 다간(Meir Dagan)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다간에게는 이념이란 관념적인 문제에 대해서 숙원관계(熟怨關係)인 나처럼 나치와 선대의 악연관계가 있었다. 다간은 항상 벽에 사진을 걸어놓고 있었는데, 그 사진속에는 그의 조부가 곤봉과 총을 들고 서 있는 나치장교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사진이었다. 다간은 방문객에게 그 사진을 볼때마다 유대인대학살을 생각하며 그런 불행한 사태를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해야 한다고 설명하곤 했다고 한다.

다간은 역사책을 열심히 읽었다고 하는데, 이스라엘민족의 고난과 건국,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애국적 공동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끔 하는 사실인듯 하다. 다간뿐만 아니라 모사드요원들은 퇴직하고 나서도 역사책을 보는 것으로 소일한다고 하는데, 애국심은 그들의 임무를 독려하는 에너지의 원천이며 애국심을 조성하는데는 역사책이 큰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듯 하다. 그러니 한국에서도 역사교과서의 국정교과서 문제가 큰 이슈가 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역사적 사실은 사상적인 세계를 조성하고, 사상적인 세계는 국민의 행동을 지배한다는 연결고리를 생각하면 이해가 되는 문제인듯 하다.

다간은 채식주의자이기도 한데, 내 자신이 15년 이상을 '채식위주'로 생활을 해보니 정보활동에는 채식위주의 식생활습관이 상당히 유용한 면이 있을 것 같다. 우선 육식을 지나치게 하게되면 감정이 격해지는 문제가 있는데, 항상 중립적이고 냉철한 기반에서 판단을 시작해야 하는 정보요원들은 이미 판단이 깃든 격한 감정들이 전혀 도움이 안된다는 사실을 다간은 알고 있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육식을 하면 자신과 싸워야 하는 과정을 한 번 더 겪어야 되는 낭비가 있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돈을 우선시하는 사람은 모사드의 캇차로 채용되지 못한다. 지나친 열정은 임무를 명확히 이해하는데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모사드업무는 차분하고 정확하며 분별력 있는 판단과 균형있는 안목을 필요로 한다.

- 기드온의 스파이중에서 -

다간은 6일전쟁때 지뢰를 밟아 다리를 절었다고 한다. 지팡이를 짚은 채 권총과 기관총을 들고 아랍인들이 많은 가자지구를 여유있게 돌아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심지어 다간은 한 손으로 소변을 보면서 다른 손으로 빈 콜라캔을 정확히 사격한다는 소문도 있는데, 다간은 사실이 아니라고 하지만 초인적인 집중력은 채식위주의 식생활이 기반이 되어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생각을 해보면 애국적 결심, 그리고 그것들을 계속 다지기 위한 모든 노력들이 기반이 되어 정보활동이나 공작활동이라는 행동으로 나오게 되고, 그 행동들이 결과를 낳고, 역사적인 사실들에 영향을 끼치게 되는 연결고리를 '모사드'라는 유능한 정보기관에 관해 알게 되면서 제대로 이해하는 도움을 받게된듯 하다. 한 편으로는 다른 국가의 정보기관들이 모사드의 활약상을 통해서 많은 기술과 직관을 얻게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실제로 그렇다고 한다. 다간 한 사람만 생각해도 직관과 용맹성의 결집체인듯 하다. 

2015년 12월 19일 토요일

인간과 인간사이 (2)

5. 설득과 강압

토론과 협상능력은 한국인을 비롯한 동북아시아인들에게 많이 부족한듯 하다는 글을 쓴 적이 많다.직접 생활현장에서도 느끼는 바 있고, 전통적으로 수직적 문화에 길들여져 온 사람들이 합리적 문화에 익숙해져 온 서구인들과 같을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합리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는 권위적인 조직문화의 결말은 좀 과장해서 표현하면 거지왕초가 이끌고 있는 집단의 모습으로 귀결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능력없는 보스가 강압적인 태도로 집단의 창의성을 망가뜨리는 모습을 많이 보아오고, 그런 기이한 정신상태와 충돌한 적이 많았던 경험으로는 온건한 설득의 방식이 가져다 주는 신뢰성에 대한 그리움이 많았던 것 같다.

자기들의 설득에 유리한 내용만을 말하는 방법을 일방적 제시, 반대의 주장을 말하는 것을 양면적 제시라고 한다. 호브랜드 등에 따르면 원래의 태도와 같은 방향으로 설득하는 경우에는 일방적 제시가, 반대의 태도를 설득하는 경우에는 양면적 제시가 효과적이었다고 한다. 또한 설득을 듣는 쪽의 지적능력에 따라 효과가 다르고,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에게는 양면적 제시가, 낮은 사람에게는 일방적 제시가 효과적이었다고 한다.

- 미나미 히로시 -

지적능력이 없는 사람들끼리의 문제해결방식은 권위주의적이고 강압적이기 쉬운듯 하다. 생활현장에서 인간이 자신의 관점으로 환경을 해석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사실을 경험한 적이 많은데,설득보다는 권위주의적인 태도로 문제를 해결할려는 사람들이 정상적인 정신상태를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으로 보인적이 많았다. 자칫하면 문제해결이란 목적보다는 자신의 우월관계를 확보하고자 하는 이기적인 광기(狂氣)로 상황을 잘못 인도할 가능성이 많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점을 이해하면 더욱 그런듯 하다.

많이 경험하고 토로해 왔지만 권위적인 정치지도자의 공과(供過)는 별개의 문제로 생각을 해도, 두고 두고 그 잔상이 남아 구세대들이 자신을 그때 그 지도자의 모습과 동일시하며 꼴값(뭐 달리 표현할 적절하고 세련된 단어가 생각이 안남을 이해하소서)을 떨면서 자신과 주변인들의 역량을 소모시키는 장면을 많이 목격하고 충돌하기도 했던것 같다. 무엇보다 마음아픈 일은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실제적인 역량과 타인의 잠재력이나 지적능력에 대해서 많이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6. 사회적 행동

인간은 사회적 동물(정치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인간은 사회속의 사람들을 떠나서 존재가 무의미해진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누구나 좀 더 협동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마음이 둥글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사회속의 나'라는 정체성을 이해해가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회적 규범의 압력이 강해지면 인간은 동조, 반항, 도피라는 세가지 태도중 한 가지를 택일하게 된다고 한다. 동조의 태도가 모범적이고, 반항이나 도피는 병리적행위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 원인을 분석해서 사회규범과 개인의 태도들을 종합적으로 수렴하게 해 주는 것이 사회발전이란 단어로 표현되는듯 하다.

7. 암시와 기대효과

감수성이 예민한 학생들에게 기대되는 장래를 암시했을때 실제로 그렇게 되는 현상을 많이 목격했다. 반대로 인생을 엉망으로 살아 온 노인분의 과거행적을 주의깊게 수집을 한 적이 있었는데, 부모에게서는 반사회적 성향의 나쁜 태도를 물려받고, 학교에서는 말썽꾸러기로 낙인찍혀 나쁜 암시를 극복하지 못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특히 노인분들의 사회병리적 태도는 치유가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는데, 미래에 대한 회의적 기대감이나 경직된 지적, 심리적 상태때문에 더욱 그런것 같다. 

나플레옹은 이탈리아령 코르시카섬 출신으로서 어릴때부터 가장 신뢰하던 할아버지가 나플레옹은 황제가 될 것이라는 암시를 주었다고 한다. 물론 이 글에서는 황제가 되었다는 사실보다 서로의 신뢰감에서 비롯된 암시의 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수직관계나 상하관계, 출세,권위적인 태도를 가진 정신나간 사람들에 대한 노이로제가 나에게 있는듯 하다)

2015년 12월 18일 금요일

인간과 인간사이 (1)

다음은 일본 코넬대학 문학박사인 미나미 히로시(南 博)박사의 저서인 [PSYCHOLOGY]의 내용을 연계하여 조직내부에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형성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한반도의 이념문제를, 특히 북한사회의 경이로울 정도로 유탈하면서도 무탈한 모습에 대해서 큰 의구심을 품었는데, 그런 문제들을 화두삼아 비숫한 조직문화나 아니면 대칭적인 조직문화를 직간접으로 접하면서 문제의 근본은 인간 개인의 심리상태와 민감한 연계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확인한 적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런면이 잘못하면 결국 인간 내면의 윤리문제나 철학문제, 심지어는 직관이나 종교와 같은 초합리적인 문제로 귀결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지게 되지만 심리학이나 회사조직, 넓게는 국가조직같은 광범위한 합리적 영역으로의 접근방법을 취하면 좀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는 편인듯 하다.

1. 경쟁관계로부터의 도피

시험공부때가 되면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컴퓨터게임이나 만화같은 잡기에 빠지는 아이들처럼 어른들의 긴장된 직장생활이나 사회생활도 향락적인 방과후 생활에 도피하게 만드는듯 하다. 일이라는 것은 중요하긴 하지만,(이 점에 있어서 칼라힐은 일은 인류에게 끝없이 따라 다니는 모든 질환과 비참으로부터의 구원이라고 말했다) 개인의 삶의 모든 것이 되서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사실은 진리인듯 하다.대체로 많은 개인들이 일을 자아실현 정도의 가치로 여기기보다 생계를 위한 도구로 여기는 환경에서 일은 곧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원인이라는 인식은 당연한듯 하다. 일만 중시하는 한국보다 가정이나 여가시간을 중시하는 유럽에서 능률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란 기계가 아니고 감정적인 인격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1924년부터 32년간에 걸쳐 미국의 웨스턴 일렉트릭회사의 호손공장에서 실험한 결과에 따르면 자부심, 집단적인 인간관계, 연대의식등이 의욕과 사기를 높인다는 결과를 얻어냈는데, 회사조직이나 국가조직이 경직된 계층체제가 아닌 협동체로 운영되어야 하는 이유를 잘 설명해주는듯 하다. 동료는 적이 아니다. 적어도 일터에서는 서로 돕는 관계여야 한다는 사실을 주지 시켜주는 것이 조직을 운영하는 관리자가 알아야 하는 사실인듯 하다. 모진 일과가 끝나고 베풀어주는 회식자리보다 일터에서의 온화한 분위기가 능률성을 높인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할듯 하다.

2. 근로자의 건강

과로에 시달리는 근로자의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고 한다.

언제나 활발하고 시간에 쫓기는듯 분주하며 본인도 초조감을 감추지 못한다.
성공에 대한 욕구가 강하고 업무에 정력적으로 노력하며, 자신이나 타인의 업적에 신경을 쓴다.
업무가 지연되면 견디지 못하고 흥미가 없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하여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상사에게 충실하고 일에 대한 불평은 별로 하지 않으며 감정을 억제하는등의 특징을 겸비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로이젠맨등의 연구에 따르면 위 유형의 사람들은 반대유형의 사람들보다 관상동맥성 심장질환에 걸릴 비율이 두 배나 높다는 연구결과를 얻었는데, 여러 일터에서 공통적으로 본 바에 다르면 성과등에 성마르게 민감한 근로자는 나이보다 많이 늙어 보이는 현상을 본듯하다. 근로자만 문제가 아니고, 관리자의 성마른 관리태도는 근로자의 잦은 이동과 비능률의 결과로 귀착되어 오히려 기업조직에 부정적인 결론을 안겨주는 일을 많이 본듯하다. 아마 천리마 운동이나 어떤 운동등으로 국민을 끊임없이 독려해도 국민의 개인적 감정을 무시하는 북한사회자체가 건강하지 못한 사회로 퇴보한 이유는 유물론적 입장에 있는 이념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겠다.

3. 자신의 주장과 PR

발전하는 회사조직과 퇴행하는 회사조직의 차이를 보면 퇴행하는 회사조직의 근로자들은 보수적이며 내향적이고, 무엇보다도 자기주장이나 자기PR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회사에서도 용인하지 않는 성향이 있다. 특히 동양권의 문화에서는 점잖은 침묵의 미덕을 중시하고 있는데, 정치적인 영역에서도 일본이나 한국의 정치문화가 자기 표현보다는 지시와 복종을 무조건 따르는 권력문화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는 점은 사회가 발전하지 못하는 심각한 장애물로 여겨지기도 한다. 언젠가 한참 보수적이거나 퇴행적인 사고를 지닌 근로자가 있는 곳에서 시간을 함께 보내봤는데, 대게 연령이 높은 계층일수록 변화를 싫어하고, 계급관계나 권력관계의 관점을 가지고 있는 현상을 보았는데, 아직도 한국사회에서 생각보다 흔한 모습이라는 사실에 경악한 적이 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정치하겠다고 나서는 장래의 지도자후보들 조차 그런 모습을 지녔다는 점은 더욱 경악할 만했던것 같다.

가끔은 나 하나만이라도 그런 꼰대의 모습을 지니지 말아야 국가와 사회에 폐를 끼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긴장하지 않으면 동조되어 버리는 정신세계의 특징상 한국사회의 정체성은 특별한 계몽이나 교육이 없으면 예정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4. 잘들을 줄 아는 사람

자신의 이야기만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왕따를 당하게 되는 일을 많이 본다. 사람은 누구나 남이 자기의 일을 알아주고 이해해주기 바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 또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일은 상대방의 공격성을 약화시킨다는 연구결과도 있다고 한다. 남에게 신뢰받고 이지적이며 호의적이 되려면 상대방의 주장을 잘 들어주는 것이 중요한듯 하다.

언젠가 일터에서 라이벌관계에 있는 연장자 두 사람이 권력투쟁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쪽이 최종 승리를 얻어내는 것을 보면서 자기 말만 옳다고 주장하는(시민들 사이에서 들어보면 아예 짖는다고 표현하더라)정치인에대한 경계심과 들어줄줄 아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자극을 받은 적이 있었다. 또 무식할수록 자기 말이 옳다고 큰 소리를 내는 현상을 보았는데, 승리를 얻어내는 방법에 있어서 매우 미숙한 것은 보통 시민들이나 정치인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수준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가끔은 독서를 하지 않는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생각해보곤 하는데,남의 말을 들어주지는 못할 망정 한 번 더 깊이 고려해보기 위해서는 많은 지식을 통한 경우의 수를 생각해야하고, 많이 알수록 신중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 같다.

대칭세계(A symmetrical world) 5 / 극단성

언젠가 IT회사같은 가장 혁신인 일터에서 기술이 필요없는 현업에 종사하는 매우 보수적인 사람들을 대할 기회가 있었는데, 혁신을 기대하는 사람들과 보수적인 사람들의 분위기는 매우 달랐다. 그냥 달랐다고 표현할 정도가 아니고, 무한한 극단성을 띄고 반대로 달려가는 폭주기관차들같은 기분이었다. 우스운 것은 혁신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이미 알려져 있는데로 혁신을 위해 끝없이 달려가는 입장에 있는것은 이해가 가지만,보수적인 사람들이 극단적으로 보수적으로 애써 달려가는 모습은 인상깊었다. 그러니까 변화하는 세상에 발을 맞추어 분위기에 편승만해도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는데, 노력하여 변화를 막을려고 하는 작위적인 모습이 좀 충격적이고 인상깊었다.

물론 나이나 학력의 차이가 혁신과 보수의 모습을 크게 판가름하기도 하지만 삶의 철학에 있어서 다져온 습관이 너무 차이가 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예를들면 이런 식이다. 일터에 대한 인식을 협동의 장소라기보다 갈등의 장소로 인식하거나 조직관계를 협력관계로 인식하지 않고, 권력관계로 인식하는 것과 같은 오류를 범하는듯 하다. 결국 자신을 보수로 몰고온 과거의 행적들을 살펴보면 게으름과 퇴행적인 사고들이 퇴보하고 있는 미래를 예고해 왔을텐데 아무런 대책없이 보수적으로 흘러들어와서는 변화할려는 사람들의 발목까지 붙들고 늘어지곤 한다.

우리들은 대게 어느 편에 서지 않음을 회색주의자라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담백함과 중용의 태도는 적어도 최소한의 안정성을 가져다 주는 진정한 보수의 모습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때가 많다. 한국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보수와 진보의 대립에 관해서 말하자면 국제환경이나 기술환경등에 맞추어서 사회도 변해가면 그것이 보수라고 말할 수 있을텐데 보수와 진보라는 프레임을 짜놓고 변화할려는 노력을 진보라고 칭하고, 변하지 않을려고 하는게 아니라 옛날로 돌아갈려고 노력하는 반동적(反動的)입장을 보수라고 칭하는듯한 생각이다.

인간 개인이나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살펴보면 매우 사납지 않으면 매우 교활한 모습을 보는 경우가 많은데, 한 개인의 내면에서 그 두가지 성향이 번갈아 나타나는 경우가 있고, 조직이나 집단내에서 사나운 자가 있으면 교활한 자가 있어서 조직이나 집단 내부의 균형을 잡아주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가지 성향이 운명처럼 있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한 가지에 나오고서 가는 곳 모르는 부정적인 성향으로서 없는게 정상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는듯 하다. 사회과학에서는 1970년대 중반쯤에는 갈등이 조직의 추진력에 도움이 된다는 갈등조장론까지 나오곤했는데, 사교육현장에서 공무원이 될려고 했던 젊은이들에게 이 사실을 수업하면서도 계속 의아했던 점은 갈등이라는게 무조건 피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나 혼자만의 독특하고 단순한 결론이 아니고,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을 학자들이 문자로 장식하고 있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은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왜 사나움과 교활함은 함께 가는 것일까. 그 둘은 투쟁과 승부같은 비숫한 부정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는듯 하다. 사나운 자가 공격할때 교활하게 대응하거나 교활한 자가 공격할때 사납게 대응하는 싸움에 있어 상대방이 없는 무기를 내놓아야 하는 불가피한 상황일 것이다. 이렇한 싸움의 장에서도 담백함과 중용의 회색주의가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 사나움과 교활함은 탐욕과 투쟁이라는 한 가지에서 발현한 태도일것인데 그 두가지를 희석시키고 미타찰(극락)으로 인도할 담백한 태도가 비난받을 이유는 없을 것 같다.

어떤 미국인사가 미국인은 불독같고, 일본인은 치와와같고, 한국인은 들개와 같다고 한 말이 떠 오른다. 반도와 같은 지리적 환경, 4계절과 같은 자연적 환경, 매운 음식, 외세의 빈번한 침략등이 한국인들의 기질을 그렇게 만들어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특히 외압적 권력에 대항하여 끊임없이 대응하거나 상승욕구를 발현해 온 전통으로는 담백하고 평온하기 어려운 사회분위기를 가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가끔 정치하고자 하거나 리더가 되고자 하는 이들의 마음이 들뛰거나 이상한 말실수를 수시로 하는 모습을 보면 저런 의지로 사회를 이끌고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곤 하는데, 대중사회의 개인들이 대부분 그렇다면 저런 이상한 모습들도 평범한 모습으로 용인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용인하면 별로 좋은 일이 없는 것은 확실한듯 하다.

2015년 12월 12일 토요일

협동과 갈등

연장자가 많은 일터에서 일할때, 나이많은 분들은 협동적인 관점보다 갈등적인 관점을 많이 가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니 보수는 경쟁을 통한 우열관계나 지배 피지배 관계에 집착을 하고, 진보는 계급투쟁에 빠지게 되는 이유가 생기는 것이다. 협동과 평등은 결국 한 가지로 만나지만 이야기를 꺼냈을때의 분위기는 다르다. 그러니 평등하게 대해달라는 말보다 함께 협력하여 일해보자는 요구가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매우 권력지향적인 노인이 있었다. 그 권력을 통해서 타인의 에너지를 빼앗아서 기운을 유지해나갔다. 보다못한 젊은이가 대들어서 노인의 에너지를 꺾었더니 노인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젊은이는 노인을 수구골통이라 칭하였고, 노인은 젊은이를 빨갱이라 칭하였다. 싸우기 싫은것은 노인과 젊은이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문득 한국사회의 저출산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는데, 반드시 경제적인 문제로 결혼을 안하고 아이를 안낳는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운것 같다. 사회에 만연하는 긴장된 갈등관계에 힘겨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운동을 하고 있는데, 운동장의 비공식적인 보스로 알려진 노인이 이것 저것 운동기술과 장비관련 기술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노인의 눈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위압감과 공격성이 느껴졌다. 녹녹치 않자 인신공격성 발언까지 하며 에너지를 빼앗으려고 했다. 나는 곧 냉소적으로 큰소리를 내며 웃었고, 마음을 들킨 노인은 어리광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 노인이 주축이 된 동호회의 동호인들이 왜 모두 동호회활동을 그만두었는지 알것 같았다.갈등관계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일터의 부담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운동장에 와서 또 다른 일터의 모습을 보는것이 싫었던 것이다.

인류역사상 초유의 갈등관계에 있는 집단이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탓에 한국사회의 갈등관계적 관점은 쉽게 고쳐지지 않을듯 하다. 그러나 고쳐져야 한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한국사회는 북한사회의 갈등관계적인 모습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한반도의 문제는 공산주의나 자본주의 문제가 아니다. 갈등이냐 협동이냐 하는 문제다. 

자존심

흔히 사회의 밑바닥에 살고 있다는 사람들은 많은 것들이 결핍되어 있는듯 하다. 희망으로 생기는 에너지, 딛고 올라설 수 있는 최소한의 물질적인 무엇, 그리고 무엇보다 자존심이 결핍되어 있는것을 많이 본다. 또 진정한 자존심이 무엇인지 오해하고 있는 것도 많이 본다. 진정한 자존심이란 누군가 타인이 챙겨주는 것이 아닌듯 하다. 성장하고자 하는 노력, 신념, 타인으로부터 착취하지 않고 스스로가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과 같은 것들이 자존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듯 하다.

실패한 사람들의 시간적 전후(前後)에는 타인과의 사소한 싸움들이 많은 것을 본듯하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면서 에너지의 산실(散失)을 막는듯 하다. 교육환경이 경쟁을 하게 만들고, 경제환경이 경쟁을 하게 만듦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자존심의 상처를 입는다. 사회의 기본적 구조가 모든 국민들(경쟁에서 이기거나 진자 모두)을 하층민으로 몰아넣고 있다. 남하고 경쟁하지 말고 자신과 경쟁하도록 유도해 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지도자의 자격이 있는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꼭 신경써서 간섭하지 않아도 진정한 자존심을 가진 이는 자기 설 자리로 돌아온다.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은 인생의 좋은 시간들을 타인을 통제하거나 간섭하거나 예의 주시하면서 사실상 그 타인의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춘다. 나는 인생이 너무 짧아 부정적인 일에 뭉갤 시간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데, 내 마음을 오해하고 나를 통제하겠다고 나서는 누군가가 있다면 결국 그런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평정심과 이념적 선동

마음이 들뛰는 사람들은 반드시 실패를 맛보게 되는듯 하다. 여러가지 감정과 생각으로 혼란스러운 마음이 집중력을 흐트리게 만들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치매환자가 자신이 치매임을 인지하지 못하듯이 나도 혼란스러운 마음을 내 자신이 모를때가 있었다. 어디서 보았는지 들었는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인내력을 발휘하는 운동에 매진하면 평정심을 갖출수 있다는 생각이 들때 과감히 실천에 옮겨서 운동을 열심히 하였다.

로마의 황제이자 철학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주위 환경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당신의 마음이 흐트러질때는 재빨리 자기자신에게로 되돌아 와서 필요 이상으로 당황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옴으로써 조화를 더 잘 유지할 수 있다고 [명상록]에서 조언하고 있다.

인내력을 발휘할 역경을 겪어보지 못한 이들은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많은 생각으로 마음의 중심을 흐트리는듯 하다. 물론 그래서 집중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에너지를 모으지 못하는 문제도 보인다. 국민들을 들뛰게 만드는 선동이나 국기문란행위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국민에너지를 분산시키는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있다. 국민과 국민사이를 조화롭지 못하게 하는 말들, 특히 이념적 선동은 어느 편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국민들의 관점에 간섭을 하지 말아야 한다. 

2015년 12월 11일 금요일

큰 사람으로의 교육

언젠가 동암문화연구소 이사장인 전혜성박사가 "생의 목적을 아는 아이가 큰 사람으로 자란다"라는 제목으로 쓴 책을 감명깊게 읽은 적이 있었다. 살아오면서 느낀 것들중 가장 중요한 것이 책의 제목에 함축되어 있는듯한 생각이 들었다. 비록 큰 사람이 되어있지는 못할망정 더 작아지지 않도록 마음을 추스리는데 자극을 주는 제목이기도 하다. 더구나 호기심과 과제, 그리고 여러가지 사정이 겹쳐서 높거나 넓은 세계보다 낮거나 좁은 세계를 지향하는 시간들속에 '생의 목적'이라는 단어는 내면 속에서 더욱 큰 가치를 발휘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다.

베트남이 당면한 경제적인 문제나 외세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대응보다 국민교육을 중시했던 호치민의 마음을 요즘들어 더욱 절실히 느끼는 바가 있다. 학력과는 별개로 내면적 가치나 철학등을 소홀히 한 한국교육의 문제점을 생활현장에서 절절히 느낀바가 있기때문에 더욱 그렇다. 어떤 인물,이념,종교,환경등에 쉽게 동조되는 이유는 무지(無知)함때문이라는 증거를 속속들이 발견해내곤 하는데, 지력(知力)이 떨어질수록 더욱 완고하며 본능적으로 변한다는 진리를 이해하면서, 인간이 적어도 퇴행적이지 않기 위해서는 능동적인 정신능력발휘를 위해서 얼마나 자기자신과 힘겨운 싸움을 거쳐야 하는지 내 자신을 통해서나 주변분들을 통해서 많이 생각하는 바가 있다.

흔히 영웅으로 알려진 나플레옹의 명언들보다 나플레옹을 격파한 웰링턴 공작의 "워털루의 싸움은 이튼의 운동장에서 이겼다."라는 명언이 인상깊었는데, 이튼 스쿨은 웰링턴 공작이나 훗날 처칠등이 배운 공립학교로서 그곳에서 중시했던 크리켓이나 풋보올등으로 체력과 정신력을 단련한 덕에 나플레옹을 격파할 수 있었다는 웰링턴 공작의 표현이다. 한때 영국이 세계를 재패할 수 있었던 까닭은 영국공립학교의 교육이 바탕이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특히 정치문제에 관해서는 이념등에 쉽게 동조되는 무지한 사람들과 누구나 똑같은 가치를 행사할 수 있는 한 표를 얻기 위해서 무지한 사람들을 동조하게 만드는 대중정치성향은 곧 이 사회를 병들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 될것이라는 안좋은 예감이 들기도 한다. 물론 근본적인 원인은 잘못된 교육에 있다는 증거를 많이 발견하기도 한다.

전혜성박사책의 서문에 "의무감과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한, 세상의 어떤 비난도 상처가 되지 않는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인생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인생의 목적이다."라고 한 처칠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념과 신념을 혼동해서도 안되며 의무감이라는 단어도 국가나 사회등의 자신을 떠난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담고 있는 단어로 해석해야 될 것 같다. 인간이 무지하면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무조건 목숨을 바치는 단순함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런듯 하다. 많이 그리고 넓게 알고 생각해야 하는 교육이 시급하다는 생각이 든다.  

2015년 12월 4일 금요일

경계를 그어 자유를 얻어내기

왜 정파(政派)는 정확하게 좌파와 우파로 나눌수 있을까. 인위적인 경계를 그어서 원하는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서 충분한 기능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사회적 약자라고 문제가 없는것도 아니며 강자라고 탐욕의 상징이 될 수는 없는듯 하다. 물론 반대의 경우인 사회적 강자라고 해서 칭송의 대상이 될 수도 없고 약자라고 해서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파는 약자에게 우파는 강자에게 가치를 집중하고 있다. 협동으로서 공리(共利)를 추구하는 새로운 정치적 이념을 위한 경계를 만들어 낼 수는 없는 것일까 하는 문제는 한국사회에서 꽤나 오래되고 심각한 고민거리인듯 하다.

그랙 매커운(GREG McKEOWN)[ESSENTIALISM]이란 베스트셀러저서에서 핵심적인 역량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경계를 분명히 그어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것이 중요한 일에 관심과 행동을 집중하는 좋은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에서 좌파와 우파의 구분은 철이 지나서도 꽤 오랫동안 집중을 위한 경계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으나 사실은 문제의 본질을 이해 못하게 만드는 망상덩어리로 사용되고 있다는, 즉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서 문제의 본질을 찾지 못하게 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듯 하다.

어느 날 내 자신의 세계와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 무엇인가를 찾아내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집중력이 떨어지니까 쉽게 동조되어 정신적인 역량이 무너지는 사태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을 명확하게 구분해야 된다는 사실을 다짐했던 일이 있었다. 쉽고 편안함만 추구하거나 집중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시간의 경계와 말의 경계를 잃어버리고 마음의 경계까지 잃어버리는 모습을 많이 본다. 신뢰감없는 말을 흘리고 다니며,시간을 건설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는 성향이 있다. 왜 그시절 그 추억만 되뇌이고 있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정신에너지가 소멸된 상태이기 때문인듯 하다.

인생에서도 분명하게 경계를 긋고 담장을 쳐놓지 않는다면, 우리의 영역은 다른 사람에 의해 정해질 것이다. 반면에 우리가 추구하는 본질적인 목표를 기반으로 분명한 경계를 마련하고 담장을 쳐둔다면, 그 영역 안에서는 - 그 영역은 우리 자신이 정하는 것이다 - 목표추구에 필요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 [ESSENTIALISM]중에서 -

북한사회나 한국사회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과거라는 시간에 동조된 것인지도 모른다. 정신에너지가 부족하니 과거의 이념에 매달려 경계를 그어 볼려고 하지만 오히려 시간의 경계(아니면 시대의 경계라고 표현해야 할지)를 긋지 못하고 끌려 다니면서 역량을 소모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직장의 고민거리를 집에까지 가져와서 고민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가정과 자신의 에너지를 뺏기는 어리석은 사람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