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10여년 이상 내 머릿속은 실리(實利)와 같은 합리성과 이념과 같은 비합리성의 대칭관계에 시달려온듯 하다. 지난 10월말경인듯 한데, 북한의 지도자 김정은이 "북남관계의 개선기회를 걷어차면 저주를 받을것"이라는 언급을 하여서 어안이 벙벙하게 만든적이 있었다. 내 생각으로는 이념은 허구적인 관념이라고 생각하는데, 한국가의 지도자라는 사람이 저런 초합리적인 발언을 하니 솔직히 표현하면 좀 그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것 같았다. 그러나 북한만이 그런것이 아니고 한국지도자에도 힘차게 시달리며 살아온 경험이 있는바, 망국적 병폐가 한반도에 깊었다는 독설이 절로 나오기도 한다.
정치적인 행위를 하는데 직관이란것이 대단히 중요한듯 하다. 어쩌면 정치행위의 모든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이 직관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초합리적인 성향을 가졌다고 해서 극단적으로 완전한 종교행위나 비합리적인 관념으로 몰입되는 비극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언젠가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무거운 선배에게 3년만 돌아볼 것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민생(民生)의 격렬하게 어려운 부문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배짱좋게 이야기 하고 있지만 이리저리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쫒겨다녔다. 그러나 인내심을 키우기 위한 훈련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이겨낸듯 하다. 물론 오래전에도 간간히 그런 경험이 있지만 일부로 내 자신을 몰아넣은 것인지 어쩌다 타의에 의해서 그렇게 된 비극인지는 잘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규명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마음에 와 닿기 시작하고 그것이 점점 목적과 연관하여 구체화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추상적인 느낌같은 초합리적인것들이 합리적인것으로 구체화된다고 표현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국민의 행복같은 목적을 가지지 않은 지도자가 이념이나 종교같은데 몰입하는 것은 아직 지도자로서 자격이 미완성되었다는 생각이 나는것 같다.
정치적인 문제를 인식하여 구체적으로 적용시키는 방법은 두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목적을 먼저 인식하고 거기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해결방법을 끌어내는 합리론적인 방법(연역적인 방법)과 경험을 통해서 그때 그때 대처해 나가면서 해결해나가는 경험론적인 방법(귀납적인 방법)이 있는듯 하다. 목적은 철학과 관련있고 본질과 관련이 있다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취급받아서는 안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정치에서는 어떤 사건이 터지면 그때서야 비로서 예방하는 법안이 발의되어 통과되는 경험론적인 상황이 연속되는듯 하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400여개가 넘는 장마당이 들어서고 있는데, 시간이 지나면 자본주의 체제로 변했다는 것을 지도자가 가장 늦게 인식하는 상황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초합리적인 발언을 하는데서 유추를 해 볼 수가 있다. 인내력을 가지고 합리적인 생각을 안해봤다는 의미인듯 하다. 물론 국민을 위한 목적같은 것은 다른 분야보다 발달한 인공위성을 타고서 먼 우주로 날아갔을 것이다.
정치적인 직관을 발휘해보라고 지도자로 선출을 하니 이상한 초합리적인 생각으로 국고(國庫)를 탕진한 한국의 어떤 지도자를 생각하면(주어는 없다) 사회의 밑바탕을 돌아보는 행위는 경험을 통해서 직관을 얻고 직관을 얻어서 좋은 결과로 구체화시켜야 한다는 의미를 둘 수도 있을 것 같다. 결론을 말하자면 목적이 있는 직관은 합리적이고 목적이 없는 직관은 초합리적이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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