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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31일 금요일

나쁜 인센티브 / 서열과 계급


내가 마르크스 이론에 가장 큰 문제점이 있다고 느낀것은 경제적인 계급을 나누는 관점과 유혈혁명을 통한 사회개선방법인듯 하다. 사회가 어느 정도 다변화되면서 연속적이거나 종합적 분류방식인 막스베버의 계층구분의 방식이 더 설득력있는 관점이 되었으며 유혈혁명보다는 설득과 계몽으로 문제를 해결해도 되는 시대에 이르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빈부격차문제나 자본가와 노동자의 갈등문제등은 좀 더 본질적인 문제로 근본을 찾을 수 있는 사회적 태도나 관점이 어느 정도 형성이 되어 있다고 생각한듯 하다. 러시아 혁명당시처럼 봉건적인 지배와 무지한 농노계급이 존재하는 사회가 아닌바에야 마르크시즘은 과장된 해결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계급과 서열의 수직적 문화는 아직도 한반도의 민중들을 끈질기게 괴롭히는 관점인듯 하다. 혹시 그래서 아직도 이념적인 문제가 이렇게 오랫동안 여운을 남기는게 아닌지 하는 생각도 해봤다.

 북한의 지도자인 김정은이 공군부대를 시찰할때 함께 한 비행장교들에게 군사칭호(계급)를 한등급씩 올려주었다는 기사를 보면서 무지한 백성을 계급이라는 인센티브로 다스리는 탁월한 영도력을 가졌다는 생각과 정말 유혈혁명이 일어날 계급적인 관점을 형성하고 있는 사회가 북한사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가끔 승진때문에 그외의 많은 가치를 잃어버리는 지인들을 본다. 오래전 어느 날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아무것도  없어도 오만한 태도를 놓치지 않는 나를 굴복시키기위해 찾아 오는 지인이 몇몇 있었다. 그때마다 "열심히 일하여 조직의 초석이 되어주렴"하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는데,이기지 못해 버들버들(柳柳) 떨며 가는 지인의 뒷모습을 보면서 심신이 건강해질것을 끝까지 당부했던 기억이 있다. 사실 남모르는 불행을 겪던 날(한국에서는 많은 이들이 겪은),삶이 짧고 허망함을 본능적으로 느낀탓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데, 가끔 그렇고 "나도 때로는 드라마에 나오는 부유한 주인공이 되고싶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계급과 서열문화는 경쟁문화와 더불어 긍정적인 결과보다 부정적인 결과를 더 많이 가져온다고 믿는다. 우리는 서로 갈등의 존재가 아니라 협동의 존재로 봐야 옳으며 생산자는 생산품을 통하여 타인의 사랑을 받으며, 정치인은 시민에게 봉사하여 사랑을 받으며, 선생은 잘 가르쳐서 사랑을 받으며, 연예인은 이뻐서 사랑을 받아서 얻고자 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이 사회인듯 하다. 한반도는 계급과 서열문화에 오래 길들여 온 탓인지 사회자체가 계급과 서열같은 부정적인 관점과 싸우는데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는듯 하다.

"내가 반드시 성공해서 복수할거야"하는 생각이나 "쩌퍼 쩌퍼 모두 죽여버리겠다"는 화산고 학생같은 사고방식은 안 그럴것 같은 사회에서 참으로 오랫동안 잔존해 있는듯 하다.

2014년 10월 25일 토요일

국가의 실존에 관한 질문/ 하이데거와 오레스테스의 신화


한반도에서 권력과 복종,통제와 자유,공산주의 이념과 자본주의 이념같은 대립되고 경직된 관점에 얽매여 있는동안 통치철학이나 인문사회학적 발전,또는 실존적인 질문이 담긴 고민을 하지않은 댓가를 크게 치루고 있는듯 하다.

하이데거는 정치체제가 존재의 의미에 관해서 사유하는 기능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하이데거는 고대 그리스체제를 실존적인 의미가 담긴 역사의 표본으로 여기는데, 아주 오래전, 우리가 야만의 시대라고 착각하는 시절에 그리스는 정치체제와 그것을 뒷받침 해주는 철학사상이 실존적인 고민으로 가득차 있음을 말하였다.

언젠가 방황하던 시절에 미국의 정신과 의사인 M.스콧펙이 저술한 [끝나지 않은 길]이라는 책속에 담긴 그리스신화의 한 내용이 오랫동안 마음에 여운을 남긴 적이 있었다.

오레스테스는 아트레우스의 손자입니다. 아트레우스는 신들보다 자신이 강력함을 입증하려고 음모를 꾸몄습니다. 신들은 아트레우스를 처벌하여 그의 모든 가문에 대한 저주의 하나로 오레스테스의 아버지, 즉 자기 남편인 아가멤논을 살해했습니다. 이 죄악은 다시 오레스테스의 머리에 저주를 가져왔습니다. 그리스의 명예 법전에 의하면 아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자기 아버지의 살인자를 죽일 의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에서 가장 큰 죄는 어머니를 죽이는 것입니다. 오레스테스는 자신의 곤경 대문에 고뇌를 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이 해야 될 것으로 보이는 일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결국 그는 어머니를 살해한 것입니다.

이 죄에 대해서 신들은 오레스테스를 처벌하고자 그에게 퓨리스를 보냈습니다. 퓨리스는 유령같이 생긴 새 하피를 시켜, 오직 오레스테스만이 보고 들을 수 있게끔 밤낮으로 꼬꼬댁거리는 비난과 무서운 모습으로 그를 괴롭히도록 했습니다. 그가 어디를 가든지 퓨리스가 따라다녔으므로 오레스테스는 자기 죄를 보상할 땅을 찾아 방황했습니다. 여러 해 동안의 외로운 자기 반성과 자기 파멸을 수행한 뒤, 오레스테스는 신들에게 아트레우스 가문에 대한 저주와 퓨리스를 통해 자기 위에 덜어진 그 천벌을 제거해 주도록 요청하고, 자신은 어머니를 살해한 죄가를 보상했다고 믿는다고 했습니다. 이 시련은 신들이 준 것입니다. 

오레스테스를 변호하던 아폴로는, 자신이 오레스테스로 하여금 어머니를 살해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빠지는 상황을 조성했으므로 오레스테스는 실제로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때 오레스테스는 펄쩍 뛰면서 자신의 변호자인 아폴로에게 반박하였습니다. "내 어머니를 죽인 것은 나이지 아폴로가 아닙니다." 이에 신들은 놀랐습니다. 그동안 아트레우스가에는 신들을 비난하지 않고 스스로 모든 책임을 떠맡은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마침내 신들은 오레스테스를 위해서 시련을 끝내기로 했습니다. 그에게서 아트레우스가문에 떨어진 저주를 제거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퓨리스를 통해 현명한 충고를 제시해 오레스테스로 하여금 계속해서 행운을 얻을 수 있게 하는 유메니데스, 즉 사랑의 정령으로 변화시켜 오레스테스 곁에 계속 머물게 했습니다.

하이데거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상반된 이데올로기로 표현되는 두 체제는 효용의 관점으로, 자유주의는 개인의 이익을 극대화하는데 봉사하며 사회주의는 특정계급의 이익을 극대화하는데 봉사한다고 말한다.이런 관점은 인간이 자신에 대하여 사유할 기회를 박탈했다고 말한다.

한반도에서는 전혀 의도하지 않게 휘말려버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만들어진 비극들을 체험하였는데, 이념문제는 그 비극들이 시간의 흐름에 의해 망각될 수 있다는 시간이 주는 특권마져도 무색하게 만드는 것 같다.남쪽만 바라보며 체제 경쟁을 하다 무너져가는 북한이나 북한에 대해서 대칭적인 존재라는 사유를 버리지 못하는 한국은 역사의 비극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운명을 지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권력만 있고 인민의 행복에 책임지지 않던 북쪽의 통치자, 국민의 공익보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던 지도자, 이념이나 종교등으로 사유의 편리성을 누리던 국민들 모두는 퓨리스의 저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끝나지 않는 길'을 가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2014년 10월 24일 금요일

미래가치 / 마르크스와 세이


꿈과 희망이 없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그리고 당사자가 되어보기도 했다. 신념이나 비젼이 없는 사람들의 세계는 어둡다. 그들은 자존심도 없고, 철학도 없으며 먹고 사는 일, 본능적 유희를 위해 시간과 노력을 헌신하며,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해지는듯 하다.

최소한의 기본적인 욕구, 즉 물질적인 욕구등이 충족되지 않았을 시대에는 그런것들의 충족을 기대하는 것이 미래의 가치였던것 같다. 호의호식(好衣好食)이라는 비젼을 이루기 위해서 전력을 다했던 한국의 중년이상의 세대들에게는 경제적인 문제를 넘어선 신념이나 비젼은 사치로 여겨졌던 시대를 인정할수밖에 없을듯 하다.

오랫동안 한국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진보와 보수논쟁이 이념과 관련이 있다는 착각은 전혀 타당하지 않은듯 하다. 진보와 보수의 문제는 관점을 얼마나 미래가치에 집중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의 기질과 미래에 대한 비젼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고려해보면 노인의 보수적 성향이나 젊은이의  진보적 성향은 당연한듯 하다.   

또 자본의 폭주가 문제가 되는 시대의 노동가치설에 관점을 집중한 마르크시즘의 등장은 당연한 것이며, 소비자들의 사용가치와 효용가치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며, 노동력을 제공한 사람은 여가의 효용을 희생했고, 자본을 제공한 사람은 사치의 효용을 희생했다는 프랑스 자본주의 경제학자 세이(Jean-Baptiste Say 1767 -1832)의 이야기도 타당한듯 하다.다만 그 시대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는 대중의 관점에 얼마나 설득력을 주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비젼을 주었는지에 따라서 마르크스의 이론이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집중을 받았던듯 하다.  

사실 마르크스와 세이의 이야기보다 중요한 무엇인가가 있는듯 하다. 인간의 삶에는 비젼의 존재와 비젼을 이루기 위한 노력은 상당히 중요한 듯 하다.각자의 꿈과 희망이 결집하여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이룬다고 생각할때 사회적 불평등이 커서 국민개인의 비젼을 형성하는 동력과 그 비젼을 이룰려는 의지를 억제하고 있다면 심각한 사회적 손실이라는 생각이 든다.

중요한 것은 빨갱이 이야기도 아니고 골통 이야기도 아닌듯 하다. 내 자신이 더 늙었을때 내가 내 비젼을 이룰 수 있는 세상, 우리들 세대가 즐겁고 활기찬 젊은이들이 꿈을 이루는 세상을 볼 수 있는 이야기가 중요한듯 하다. 아직도 옛 이야기를 반복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안된다.

2014년 10월 18일 토요일

기계적 마르크스 / 미완성균형곡


마르크스는 역사발전의 단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단계 : 노동자와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와의 갈등으로 기존사회가 해체된다. 2단계 :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다. 3단계 : 사회주의 국가가 완성된다.  

가끔 대학도서관에서 학위논문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단어들을 많이 본다. ~에 관한 고찰, ~에 관한 제고등 형식과 논리로 잘 짜여진 제목과 세부목차를 보고 있으면 17,18세기를 전후해서  과학혁명이 일어나던 시절에 만연했던 기계적 사고의 잔영을 보는듯 한 느낌을 받는다.

물론 검증되지 못하는 직관적인 사고에 모든 것을 의존해서도 안되지만 시작과 투쟁과 완성이라는 기계적으로 짜여진 틀 속에서 경제와 역사적인 관점을 형성해 나가는 마르크스의 이론은 과학의 명분을 빌려 교조주의적인 믿음을 얻기에 충분했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하물며 종교적인 두리뭉실한 직관의 시대에 환멸을 느끼는 그 시절의 분위기는 마르크스에게 더욱 힘을 실어주었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개인의 생각이 단조롭지 않은 것처럼, 그런 인간이 모인 사회도 그렇게 단조롭지 않은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만연한 고민거리를 해결해줄 방도를 찾기 위한 '복음'과 같은 것을 찾는듯 하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문제점이 만연하던 시절에 마르크시즘과 같은 투쟁적인 이념이 발생하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것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세상을 완성시키는 이념이란 있을 수 없는듯 하다. 오직 균형을 위한 노력만이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개인과 사회의 모습은 정지된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움직여 나가는 생물체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 듯 하다. 확고한 이념이란 대칭적인 이념을 낳게 마련인듯 하다. 말하자면 노이즈마케팅으로 서로 비판하면서 성장을 해나가다가 각자의 관점속에 갇힌채로 파국을 맞는듯 하다. 그나마 먼저 꼬리를 내리는 쪽이 승리하는것 같다.

수정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균형점을 찾아 꼬리를 내린 자본주의는 살아있고, 기계적 투쟁을 강조하던 마르크시즘은 파멸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듯 하다.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념이란 '약을 파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프랑스의 철학자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 ~ 1962 )는 역사의 비연속성을 이야기 하지만 노이즈마케팅으로 인하여 서로 상반된 영역이 확장되어나간 자본주의와 과학적사회주의가 극단적으로 확장된 사건은 역사적인 흐름을 포괄적으로 생각해보면 강물처럼 도도하게 끊이지 않고 흘러갔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마르크스만을 비판할 것도 아니다. 노이즈마케팅에 걸려들어서 신자유주의라는 이념으로 깊이 빠져버리거나 반공이라는 이념으로 깊이 빠져서 다른 관점의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사회도 문제가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과거 보다는 미래의 가치를 고려하는 것이 좀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균형을 찾아서~~~

  

2014년 10월 17일 금요일

가을꽃

      가을꽃  / 이형춘  



     강변의 꽃길을 걸었다
     가을꽃은 바람에 흔들리는게 예쁘다

     그 꽃들속에 줄기는 시들고 망울이 채 열리지 않은

     슬픈 꽃이 보였다
        

     꽃송이에 눈길을 기대며
     아직도 욕망으로 가슴이 뜨거운 A노인과 내 모습을 생각했다.

     그런데 뒤에서는 ......석양이 밀려왔다.

     
     

2014년 10월 11일 토요일

(텅)빈체제 / 본질을 찾아서


북한의 지도자 김정은에 관한 여러가지 소문이 많은 가운데 북한군부의 실세 3인이 인천아시안게임폐막식을 참관하기도 했다. 정치적인 태도라기보다 유희적인 태도일 것이라는 추측대로 곧 연천에서는 총격전이 일어나서 남북관계의 기대할 수 없는 분위기를 확신시켜주기도 하였다.

김정은이 어떤 상황에 놓여도 북한체제에는 혁명적인 변화가 없을 것 같다. ( http://hyeong-chun.blogspot.kr/search?q=%EC%93%B0%EB%A6%AC%EC%BF%BC%ED%84%B0) 다만 장성택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와의 정쟁(政爭)에서 승리한 보수적인 군부세력(북한의 보수세력이란 김일성 주체사상과 같은 강력한 공산주의 이념에 의존하는 정치세력을 의미한다.)의 권력행사는 순조로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편으로는 한국에서는 인터넷통제가 이슈로 떠 오르고 있는데, 정부에 의한 인터넷통제가 정당성이 있느냐의 문제보다 국가와 사회의 생명력을 얻어내기 위해서 필요한 여론조성에 손상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용의 심각성보다 사회이슈자체가 통제와 반발이라는 관점으로 집중되는데 문제가 있을 듯 하다.

전에도 언급한 바 있지만 마르크스주의자인 누군가의 이름으로 탈 이념론적인 입장에 있는 내이름을 손상시킬려는 시도가 국내의 모든 검찰청 홈페이지의 자유게시판에 넘치고 있지만 사회의 저점(低点)에 있으면서도 본질을 찾을려는 역동성을 가지고 있는 처지에 구질서에 편입되어 방황할 이유가 뭐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고 보니 요즘 한반도와 내 주변이 모두 냉전 중심의 구질서로의 복귀를 시도하는 것 같아 쓴 웃음이 나온다. 본질을 잊은 정치사상과 정치행위가 다시 한반도를 지배하는 날이 오면, 우리는 다 함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동방의 조용해지는  석양의 나라'를 꿈꿔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익살스러운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가끔 블러그글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사상이나 루소의 정치사상과 같은 먼 과거의 정치사상을 인용하기도 하지만 그런 사상을 원칙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무감보다는 한 번 생각해보면 어떨까 하는 의도로 제시한 것 뿐인듯 하다. 영국의 정치역사 철학자 스키너(Quentin Skinner)의 말대로 정치적 고전안에 내재해있는 지적인 맥락에 따라서 좀 다양하게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보자는 의도였던것 같다.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본질을 찾을 수 있는 길을 열어줄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통찰력은 집착을 벗어나야 생긴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한 국가의 통치시스템 자체가 경직되게 흘러가는 것은 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요즘엔 좀 방황스럽다. 반동(反動)적으로 흘러가는 주변분위기에 희망을 느껴보지 못한 탓이기도 한 것 같다. 상황이 아무리 안 좋아도 본질을 향한 역동성은 나의 모든 재산이었던 듯 한데,그 재산이 흔들리고 있는듯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과거의 이념이나 분단현실에 의존하고 있던 사람들은 내 입장과 반대입장을 가질수도 있지만 희망과 미래라는 두 단어의 밀접한 연관성을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2014년 10월 4일 토요일

이념의 오리알 유희


북한 수뇌부의 3인이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에 참석했다.한 편으로는 '오리지날' 좌빨이 인천에 등장을 했다는 해학스러운 상상이 드는데, 심각한 한국의 좌우대립문제는 이 상황을 소용돌이같은 정국으로 끌고 들어가야 정상적이지 않나 하는 상상을 하면서 웃음이 나왔다.
 
한 편으로는 일상에서 버드나무잎과 같은 권력이라도 가져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기도 하는데, 좌우 어느 한쪽의 모습으로 들이대면, 사태는 거국적으로 비화되어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한 유용한 도구로 화()하는 장면을 본 것이 한 두 번이 아닌듯하다.
 
그럴때면 마치 생을 유희적으로 살아가는 일단의 사람들과 본질적이지 못하면서도 본질적이 되고자 발버둥치는 일단의 사람들과의 또 다른 국면의 계층성을 보는 듯한 생각도 든다.그런 장면을 보고 웃고 있는 사람이나 북한의 작은 국가와 사회를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우월한 권력자로 착각하는 사람들은 유희의 인간으로, 어지러운 시대(시대라고 추상적으로 말하지만 사실은 너, , 우리, 우리나라 대한민국이라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존재들)를 이념이라는 다소 본질적인 프레임으로 정리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은 본질의 인간으로 규정해 보았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라캉(Jacques Lacan 1901 - 1981)은 인간은 유아기에 거울이나 타자(他者)와의 관계속에서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자신의 모습을 찾아내다가 언어네트워크가 형성된 상징계에 진입해 주체성을 형성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라캉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반도의 민중들은 자신의 모습을 좌우이념적인 교육을 받고 그런 교육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다가 급기야 이념과 관련된 언어들의 네트워크속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형성해나갔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재미있는 것은 일단 상징계에 들어간 '나'가 네트워크속의 언어를 거부하면 외부와의 관계를 잃어버리고 자신도 잃어버리는 정신병상태가 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한반도에서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운 자는 불안한 사회를 포용할 수 있는 너그러운 聖賢과 같은 사람이거나 정신병이 있거나 하는 논리까지 비약이 될 수 있다고 하겠다. 말장난이 좀 심했지만 아마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세계의 정점에 있는 사람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좌우문제에 목숨걸고 살아가는 이유는 현실보다 본질에 정신을 두고자 하는 모습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발전하는 사회와 발전하는 교육은 그것마저 본질이 아님을 밝혀주고 있는데, 내 생각에는 '인간'이란 언어를 가장 본질적인 것으로 대접을 해야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심각한 사람들의 정점(頂點)에는 책상에 앉아서 뭔가 민중을 위해서 일을 하겠다는 명분으로 일신(一身)의 유희적 즐거움을 보전하기 위해 이념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사회적 약속


어느 해 겨울에 아래층에 아기를 데리고 사는 젊은 부부가 위층 아래층에 과일을 돌렸다. 별안간 받아든 과일을 들고 당황해하고 있는데, 아이가 울어서 미안하다고 말한다. 또 그때쯤 일터에서 연로한 근로자 한 분이 일처리에 허점을 보이고 있는데, 주변분들이 대신 일을 해 주면서 기업의 입장에서는 효용성이 없는 근로자분의 신변을 보호해주고 있었다. 또 퇴근 길에 폐지를 모은 리어카를 끌고 교통을 방해하는 노인이 있는데, 누구나 경적을 울리지 않고 기다리거나 피해갔다.
 
아무도 불평을 한 일이 없는데, 아이 울음소리로 이웃에 피해를 입혀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부부, 우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인식하고 있는 이웃들, 연로한 근로자를 보호하고 있는 동료들이 모두 효용성과 능률성, 이기심등의 기준을 내려놓고 암묵적으로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사회적 약속을 하고 있는듯 하였다.
 
그런 마음은 어쩌면 본능일 수도 있고, 때로는 국가와 사회가 입법적으로나 사회적 규약으로 지켜주기도 하는 약속인 듯하다.
 
한 편으로는 비숫한 시기에 젊은이들의 꿈을 꺾는 사회현실이 만들어지는 광경을 보기도 하고, 젊은이가 자신의 젊음과 성공가능성을 내세워 노인의 논리를 굽히게 만드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하였다.
 
어제는 근로자들의 휴일근로수당을 깎는 입법이 발의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휴일에 근로를 해야 하는 열등한 지위의 근로자들과 중소기업을 살리겠다는 목적으로 중소기업근로자들의 인건비로 균형을 맞추겠다는 논리를 보며 좌파적인 논리가 우파적인 논리에 압도당한다는 생각보다는 우리사회의 사회적 약속들이 점점 붕괴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부가 앞장서서 사회적 약속을 무너뜨려야 할 이유는 없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