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방송프로에 대기업의 고액연봉에도 불구하고 경직된 조직문화를 견디지 못해서 사표를 쓴 젊은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20여년전 어느 일본계제조회사에 현장직에서 일하다가 관리직으로 옮겨준다는 제안에 놀래서 회사를 그만둔 기억이 났다. 조직에 몰입하는 순간 생각이 끝이라는, 형편에 비해서 만용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는데, 파란만장한 시간을 보냈으면서도 지금 후회는 없는듯 하다. 한 번 살다가는 인생인데, 후회없으면 모두 좋은 경험이다 싶었다. 조직문화가 가장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아재들의 관점으로는 세상을 특이하게 산다는 생각도 할 법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있지 않고서야 세상이 발전을 하겠나 싶다.
한 번은 네덜란드의 200킬로미터 스케이트 마라톤대회에 나가보고 싶은 꿈이 있었는데, 체격이나 체력을 만드는데 한계가 보였다. 그래서 체드 헤드릭(Ched Hedrick)이라는 더블푸쉬(Duble push)라는 특이한 방법을 사용해서 세계인라인 챔피언을 독점했던 선수의 기술을 빙상에 접목시켜 보았다. 물론 이 선수도 그런 방식으로 토리노동계올림픽에서 장거리스케이팅부문에서 금메달을 땄다. 연습을 해보니 중심이동간격이 작아서 에너지소모가 덜 했다. 전통적인 방식보다 스피드는 안나지만 남들이 보기에 긴 시간을 설렁설렁 쉽게 탄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름 초장거리에서는'발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런 기술을 만드는데는 사격훈련을 위해서 스케이트균형훈련을 한게 큰 도움이 되었던것 같다. 사격과 스케이트를 다 잘하는 방법을 찾다가 결국은 찾게되는듯 싶었다.
가끔은 스스로 찾아가는 길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모든 일은 실사구시에 맞게 안정적으로 처리해야 한다."
저우언라이는 언제나 이렇게 주장했다. 1953년에 시작된 중국의 제 1차 5개년 게획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국민들도 이 5개년 계획으로 경제가 성장하면서 생활의 질이 향상되자 모두 기뻐하며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국가전체는 활력이 넘쳐났다. 당시 정부의 모든 사업계획은 실사구시의 원칙에 따라 계획 추진되었다. 실사구시란 경제건설 분야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1956년 1월에 열린 전국정치협상회의에서 저우언라이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현실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할 때 현실성 없는 일을 목표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현실과 동떨어지고 불가능한 일을 추구하면 조급증이 발동하고 이 조급증은 일을 그르칠 수밖에 없습니다.
저우언라이는 부강한 중국을 만들기 위해 그의 장년기를 모두 쏟아 부었다. 나라가 부강해져야만 이제 생겨난 신생 중국을 안정화시킬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너무 조급하게 서두르며 급진적인 모험을 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당시 저우언라이는 '많이, 빨리, 좋게, 그리고 절약하는 것이 노동의 효율성을 높이는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관념이 아니라 현실에 뿌리를 둬야 한다고 했으며 가장 좋은 방법은 실사구시라고 재차 강조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저우언라의 뜻대로 일이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 김상문 저 [유엔이 감동한 위대한 지도자 저우언라이]중에서-
저우언라이의 생각은 우경화를 반대한 마오쩌뚱에 의해서 배척되었는데, 마오쩌뚱의 카리스마적인 제왕적 권력은 중국발전에 많은 한계를 가져다 주었다. 중국을 대기근으로 몰아넣은 그 유명한 참새박멸사건이나 목표량에만 신경쓰다가 쓸모없는 철강제품을 대량 생산한 사건들은 이미 이념적으로 고착화된 생각들이 어떻게 파탄을 가져올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던것 같다. 만약 마오쩌뚱이 말년에도 권력을 놓지 않고 계속 꼰대성을 발휘하고 있었으면 오늘 날 중국의 방향은 많이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가끔 북한에 대해서는 갑작스런 붕괴나 통일같은 비현실적인 몽상을 하는것 보다는 일단 북한내부의 개혁과 개방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최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엘리트들의 혁신적인 변화가 중요하고, 이미 만들어지고 있는 시장경제를 제도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든다. 배척이 아닌 세수(稅需)의 원천으로서 시장경제를 제도적으로 받아들이고 법이나 징세제도를 마련한다면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 있는 실사구시의 방편이 마련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저우언라이와 같은 개혁주의자는 과거 청나라에서도 있었는데, 강희제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다. 젊은 시절 환관정치를 극복하고 황제가 되어 실사구시의 정신을 발휘하여 청나라를 내실(內實)있고 부강한 국가로 만드는데 최선을 다했는데, 국사(國事)에 매진하느라 제대로 된 수면도 취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훗날 저우언라이 총리의 모습으로 재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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