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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31일 목요일

학생 K / 주희의 독서

K라는 젊은이를 1년동안 가까이했다. 당시 재수생활을 했는데, 중위권정도의 모의고사성적을 보이고 있었다. 어렷을때 부모가 결별하면서 보육원에 맏겨졌다고 한다. 그러니까 요즘 언어로 표현하면 흙수저도 아닌 가시수저를 입에 문 젊은이였다. 어려운 여건에서 공부를 어쩌구 하는 그런 관심이 아닌 학습태도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는데, 10개월정도의 학습기간의 태도가 마치 미륵보살 같았다. 대처수상의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을 자신과 동일시시키며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다. 여건이 안되니 친구들과 간식거리를 챙길수도 없고 꾸준히 책만 파고들었다. 1달에 한 번 보는 모의고사 성적이 꾸준히 10점정도씩 상승했다. 결국 한국 최고의 대학이라고 하는 S대와 P공대를 동시에 합격했다. 아마 지방신문에도 기사가 나왔다고 하는데, 못 보았다. 스스로 얻어낸 깨달음이 많았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훨씬 연상인 내게도 두고 두고 마음의 스승역할을 하고 있으니 배울 것은 어디에도 있다는 생각을 확인시켜준 젊은이였던것 같다.

그 이듬해 내게는 정신적으로 최악의 혼란을 겪는 사건이 생겼는데, 이념문제와 북파공작원문제가 얽혀서 본질을 알고자 하는 행위가 권력과 관련된 정치행위라는 누명을 썼던 모양이다. 정치행위가 봉사행위라는 내 혼자만의 생각은 그냥 내 혼자만의 생각이었던것 같다. 도청, 감청,통화방해, 미행등의 상대가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K라는 젊은이가 여름방학때 내려왔다가 길에서 잠시 마주쳤는데, 탁구를 집중적으로 배운다고 했다. 그 말에 힌트를 얻어 새벽에 일어나 검도와 사격훈련을 시작했다. 한 번은 어떤 은퇴한 특수요원과 언쟁을 벌였는데, 내가 머리속으로 아는 것만 있다고 한 말이 마음속에 아른 거렸다. 어린시절 곱상한 모양새의 부친께서 뜬금없이 동네팔씨름대회만 열리면 우승을 했는데, 생김새와는 달리 나도 무골(武骨)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스케이트와 수영을 익히면서 합기도의 전사경(轉絲勁)방식을 적용시키거나 부드러운 방식으로 에너지 손실을 최대한 줄일것이라는 원칙으로 연습을 했는데, 효과가 상당히 좋았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책을 100여권을 분해해봤다. 역시 독서도 중요했다.

송나라의 주희(朱熹 1130 ~ 1200)가 만든 주자학은 조선의 통치원리로 채택되면서 매우 관념적이고 비실용적이라는 누명을 썼다. 그러나 그것은 그 시대를 움직여 나가는 사람들의 수용태도에 따른 것이지 더욱 진보한 학문 자체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던 주희가 만든 성리학의 원리적이고 관념적인 모습은 명나라때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조금 더 실천적으로 변한 양명학으로 발전하고, 청나라때 들어오면 실증성과 과학성을 중시하는 고증학(考證學)으로 발전했다. 조선은 고증학을 실학(實學)이라는 학문으로 받아들였지만 보수적 세력들의 반대로 빛을 보지 못한 것을 보면 역시 사람들의 수용태도가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학문의 길에 이치를 끝까지 따지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다. 이치를 따지는 요령은 반드시 독서에서 시작된다. 독서법으로는 순서에 따라 치밀함에 이르는 것이 중요하다 치밀함에 이르는 기본은 삼가 차분하게 뜻을 유지하는데 있다. 성인의 책을 읽으려면 읽고 또 읽어야 하는데 매일 매일 읽으면 성현의 말씀이 점점 의미있게 느껴진다.

독서의 처음에는 의문이 생기는지 알지 못한다 조금 지나면 점차 의문이 생긴다. 중간쯤 가면 곳곳에서 의문이 생긴다. 이런 과정을 한바탕 치르고 나면 모든 것이 한데 모여 하나로 관통하게 되고 모든 의심이 없어진다.

독서법이란 별다른 것이 아니다. 뜻을 단단히 하고 마음을 비운 다음 반복해서 상세히 음미하면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다.

공부 기간은 융통성을 가지고 길게 잡되 공부 과정은 팽팽해야 한다. 공부는 강단 있고 과감하게 결단해야지 유유자적해서는 안된다.

뜻을 세우는 입지(立志)가 확고하지 않으면 어떻게 공부하겠는가?

주희가 독서와 공부에 관해 언급한 것을 몇가지 적어봤는데, 문득 산만하거나 때로는 천박한 생활속으로 매몰되어가던 중 K라는 젊은이가 생각나고, 내 자신을 추스리고 인식을 넓히기 위해서 서점에서 외교와 세계사 관련된 책을 몇권 골라왔다. 뜻을 잃으면 독서랑은 쉬이 멀어지게 되는 현상을 경험했는데, 생활속에 매몰되어 있으면 그 젊은이의 미륵보살같은 성실하고 꾸준한 태도는 보기 힘들고 경박하게 들뛰는 모습만 보기 마련이다. 물론 나 자신도 동조되어감을 느낀다. 그래서 책을 손에서 놓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어른은 아이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는 태도를 항상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2015년 12월 26일 토요일

이스라엘 정보국 모사드 / 비합리적인 문명

텔아비브의 테러리즘 연구소장 아리엘 메라리 박사는 빈라덴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빈 라덴은 이슬람 문명이 절정에 달했던 1200년대 안달루시아 문명을 재건하겠다는 꿈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스페인 도시 코르도바에는 900개의 공중목욕탕, 최고의 무슬림 책들로 가득 차 있는 70여 개의 도서관들 그리고 최고의 식당과 의사들이 있었을 정도였다. 마드리드에서 벌어진 3.11 열차 폭탄 테러는 이라크에 주둔해 있는 스페인군의 철수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사실은 이런 꿈의 실현과도 연관이 있었다.

빈 라덴은 아프카니스탄과 파키스탄국경의 토라보라 산 동굴에 숨어 지내며 아시아로부터 스페인 너머에까지 이르는 무슬림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꿈을 꾸고 있다. 이런 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빈 라덴이 위험한 것이다. 그는 이 꿈의 실현을 위해 살육을 마다하지 않는다. 몽골의 칭기스칸, 십자군, 나치 독일, 러시아의 소수 민족 학살을 능가하는 규모의 학살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위험한 인물이다.

- 기드온의 스파이 중에서 -

중동에서 벌어진 일이나 중동발 사건들은 대부분 종교적인 이상과 무관하지 않은 듯 하다. 종교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의 과정을 거치는 수고로움없이 현실적인 욕망들을 신념화시킬 수 있는 좋은 도구이기도 한것 같다. 건설적이냐 파괴적이냐 하는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민족의 고난과 건국에 관한 사건도 종교적인 이상과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면이 종교적인 이상이 자주 위험할 수 있는 이유인듯 하다.

모사드의 분석관들은 찰레비 케이스를 통해서 부시 행정부의 업무 처리 방식에 대해 다시 한 번 놀랐다. 9.11 사태 이후 워싱턴의 정책결정에는 종교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9.11 사태가 발생한지 4일 후 빌리 그래함 목사가 백악관을 방문했다. 부시 가문과의 오랜 친구 관계인 그래함 목사는 테러리즘의 악마성과 이를 분쇄하는 '정당한 분노'에 대해 부시 대통령과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그러고는 "내가 블레셋인들에게 손을 뻗는 것을 보라. 내가 그들에게 복수를 가했을 때 내가 주인인 것을 알게 되리라"라는 성경 구절을 소개했다. 또한 '정당한 분노'를 행사하는 권리가 명시된 성경 구절에 표시를 한 포켓 사이즈의 성경을 대통령에게 선물로 주었다.

부시 대통령은 에스겔 선지자의 말씀에 위로를 받고 힘을 얻었다. '정당한 분노'라는 개념이 부시 대통령의 사고 속에 깊이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2002년 부시 대통령이 의회나 군 지휘관들을 상대로 행한 모든 모든 연설 그리고 주간 라디오 연설에는 이런 사고 방식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부시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은 하나님이 승낙하신 전쟁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라크에 대한 '예방적 전쟁'도 부시대통령의 종교적 신념에 기초해 있었다.

- 기드온의 스파이 중에서 - 

바로 이런 점이 문제다. 테러리즘 자체가 비합리적이고 비 이성적이며 무엇보다도 '파괴적인 악'이라는 점 때문에 방어하거나 예방해야 하는 것이지 종교적 신념을 정당성의 원천으로 사용한다면 분쟁의 골은 더 깊어지기만 할 뿐이라는 사실이다. 이래 저래 중동발 사건들은 종교적 신념이 얽힌 문제가 되버린듯 하다. 이런 문제와 관련해서는 한반도의 이념분쟁도 유사한 모습을 보이는듯 하다. 중동은 문명 자체가 종교적인 성향이 강하다고 할 수 있는데, 아마 교육이나 생활 속에서 종교적인 억압이 지나치게 강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이란같은 경우도 팔레비국왕의 합리적인 정부(적어도 지금의 이란에 비해서는 그렇다는 표현이다)를 호메이니의 종교적인 정부가 대체하고 나서 문화자체가 비합리적으로 퇴보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과거에 비해서 너무 어두워진 이란 문화에 대해서 이란 국민들은 후회하고 있지만 이성적인 사고를 할려고 하지 않은 댓가를 크게 치루고 있다는 생각이다. 쉽게 갈려다 망한 경우라고 봐야할 것 같다.

중동은 왜 종교적일까. 애초부터 다른 문명들과 쉽게 교통할 수 있는 비옥한 반달지대의 개방형 문명이라서 과학도 발달하고, 전쟁도 잦았다고 한다. 이집트문명이나 인더스 문명, 황하문명에 비해서 국가의 이합집산이 잦았는데, 문명의 지혜로움에 비해서 척박한 자연환경이 부족들간의 결집체를 쉽게 만들어내지 못하고 정신적인 연대감이라도 필요해서 그런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점은 한 반도에서도 마찬가지인듯 한데, 이념이란 것이 외세의 침략이나 변동하는 사회문화의 산만함에 대응하여 정신적인 연대감을 추구할려는 욕망을 불러 일으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점에서는 중국은 중화사상, 일본은 전통적으로 일관성있는 내부문화등이 있는데 비해 한반도는 그런 문화가 없는 것이 이념적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반도라는 지리적 위치는 가장 큰 문제의 원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듯 하다.

개인적으로 생각을 해봐도 어려운 시절에는 마음의 중심을 찾기 위해서 뭔가 믿고 의지할 만한 신념을 찾고자 시도하는 일이 있었는데, 나 자신뿐만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을 겪는 것을 보았다. 물론 늘어나는 지식만큼 신념들이 세련되어지고 객관화된다는 사실도 경험한듯 하다. 개인적으로는 '신념'들이 가져다 주는 파괴와 광기에 대해서 많이 경계하는 입장인데, 그래서 다방면의 지식이나 인문학적 철학적인 교육등이 국민들에게 필요하다고 역설하기도 한다.

1995년 10월 모사드의 안가에서는 이슬람 지하드의 종교책임자인 파디 시카키에 대한 암살작전이 계획되고 있었는데, 시카키는 25년동안 오만건이상의 테러사건을 배후조정해 400명 이상의 이스라엘 사람이 희생되고, 10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시카키는 아랍인들에게 영웅적인 존재로서 코란을 뒤져서 탄압을 받는 자는 가해자에 대해 새로운 힘으로 대항해도 된다는 논리를 끌어내어 자살을 금지한 이슬람 율법에도 불구하고 10대청년들이 몸에 폭탄을 두르고 자살공격에 뛰어들도록 유도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지도자들이나 시카키같은 이슬람지하드 지도자들은 이런 말을 자주 한다고 한다. "우리는 싸운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 이유다." 

뭐 이것 저것 생각하기 싫다는 말이다. 

2015년 12월 25일 금요일

지도자의 합리성과 직관

생각해보면 10여년 이상 내 머릿속은 실리(實利)와 같은 합리성과 이념과 같은 비합리성의 대칭관계에 시달려온듯 하다. 지난 10월말경인듯 한데, 북한의 지도자 김정은이 "북남관계의 개선기회를 걷어차면 저주를 받을것"이라는 언급을 하여서 어안이 벙벙하게 만든적이 있었다. 내 생각으로는 이념은 허구적인 관념이라고 생각하는데, 한국가의 지도자라는 사람이 저런 초합리적인 발언을 하니 솔직히 표현하면 좀 그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것 같았다. 그러나 북한만이 그런것이 아니고 한국지도자에도 힘차게 시달리며 살아온 경험이 있는바, 망국적 병폐가 한반도에 깊었다는 독설이 절로 나오기도 한다.

정치적인 행위를 하는데 직관이란것이 대단히 중요한듯 하다. 어쩌면 정치행위의 모든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이 직관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초합리적인 성향을 가졌다고 해서 극단적으로 완전한 종교행위나 비합리적인 관념으로 몰입되는 비극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언젠가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무거운 선배에게 3년만 돌아볼 것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민생(民生)의 격렬하게 어려운 부문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배짱좋게 이야기 하고 있지만 이리저리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쫒겨다녔다. 그러나 인내심을 키우기 위한 훈련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이겨낸듯 하다. 물론 오래전에도 간간히 그런 경험이 있지만 일부로 내 자신을 몰아넣은 것인지 어쩌다 타의에 의해서 그렇게 된 비극인지는 잘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규명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마음에 와 닿기 시작하고 그것이 점점 목적과 연관하여 구체화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추상적인 느낌같은 초합리적인것들이 합리적인것으로 구체화된다고 표현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국민의 행복같은 목적을 가지지 않은 지도자가 이념이나 종교같은데 몰입하는 것은 아직 지도자로서 자격이 미완성되었다는 생각이 나는것 같다.

정치적인 문제를 인식하여 구체적으로 적용시키는 방법은 두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목적을 먼저 인식하고 거기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해결방법을 끌어내는 합리론적인 방법(연역적인 방법)과 경험을 통해서 그때 그때 대처해 나가면서 해결해나가는 경험론적인 방법(귀납적인 방법)이 있는듯 하다. 목적은 철학과 관련있고 본질과 관련이 있다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취급받아서는 안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정치에서는 어떤 사건이 터지면 그때서야 비로서 예방하는 법안이 발의되어 통과되는 경험론적인 상황이 연속되는듯 하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400여개가 넘는 장마당이 들어서고 있는데, 시간이 지나면 자본주의 체제로 변했다는 것을 지도자가 가장 늦게 인식하는 상황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초합리적인 발언을 하는데서 유추를 해 볼 수가 있다. 인내력을 가지고 합리적인 생각을 안해봤다는 의미인듯 하다. 물론 국민을 위한 목적같은 것은 다른 분야보다 발달한 인공위성을 타고서 먼 우주로 날아갔을 것이다.

정치적인 직관을 발휘해보라고 지도자로 선출을 하니 이상한 초합리적인 생각으로 국고(國庫)를 탕진한 한국의 어떤 지도자를 생각하면(주어는 없다) 사회의 밑바탕을 돌아보는 행위는 경험을 통해서 직관을 얻고 직관을 얻어서 좋은 결과로 구체화시켜야 한다는 의미를 둘 수도 있을 것 같다. 결론을 말하자면 목적이 있는 직관은 합리적이고 목적이 없는 직관은 초합리적이라는 의미다.  

2015년 12월 24일 목요일

이스라엘 정보국 모사드 / 다간

각국 정보기관들의 최고모델은 이스라엘 정보국 모사드로 알려져 있다.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국들간의 관계는 세계의 운명을 결정짓고 그 배후에 모사드가 있는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 모사드가 세계의 운명을 결정짓는다고 확대해석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정보기관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10여년전 북파공작원이었던 부친의 일로 이리저리 얽히는 바람에 잠시 알려지지 않은 세상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표현 그대로 역시 여러 일들이 알려지지 않을 것 같다. 알려질 것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그들의 세계에서는 그들만이 공유하는 '판단'이 있기 마련인데, 그것들은 어떤 원대한 목적, 예를들면 '애국'이나 '국가안보', 누군가의 '안전'을 한계삼아 성심성의껏 지략을 전개시키기 마련인듯 하다.

주로 고든 토마스가 저술하고 이병호 현국정원장이 번역한 [기드온의 스파이]라는 서적과 미카엘 바르조하르와 니심 미샬이 공저한 [모사드]라는 서적을 기반으로 몇가지 이야기를 서술하고 해석하고자 하는데, 특히 다간의 취임사발언은 한국의 남재준 전국정원장이 취임사에서 인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다간은 취임사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레바논에서 한 가족 내의 싸움이 어떤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목격한 일이 있습니다. 한 족장의 뇌가 깨어져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고 그 주위에는 부인과 몇 명의 어린 아이들이 시체가 흩어져 있었습니다. 내가 손 쓸 사이도 없이 죽은 족장의 한 아들이 그 뇌를 한움큼 손으로 잡더니 삼켰습니다. 이것이 레바논 사람들이 집안싸움에서 하는 행동입니다. 뇌를 먹어 삼켜라. 그렇게 그의 힘의 근원을 마셔라"

"나는 여러분의 뇌가 먹히기를 절대 원치 않습니다. 뇌를 먹는 사람은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 기드온의 스파이중에서 -

국가안보에 관한 결심을 자극하기 위해 상당히 자극적인 예를 들었는데, 다른 국가의 정보요원들과는 달리 이슬람극단주의자들에 대항하여 '키돈'이라는 암살팀을 운영하고 있는 모사드로서는 절박한 필요성과 심정을 대변하는 표현일 수 있을 것 같다.이스라엘이 암살공작을 할때는 Talio의 법칙(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 합당한 응징원칙에 따른다고 한다. 복수주의는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법전에도 나와 있는것처럼 중동지방의 문제해결방식으로 풍토처럼 자리잡은 원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스라엘의 역사와 바빌로니아가 전혀 무관하지 않고, 유대교를 근거로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파생된 것처럼 근본은 같지만 결국은 이해관계가 기반이 된 영역투쟁과 감정싸움이 국가간 분쟁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이 어렴풋이 생각된다.

알고보면 좀 사소한 어떤 문제를 가지고 정보기관의 안가에서 상담을 한 적이 있었는데, 상담 중간에 수도기술자나 청소부가 얼굴도장을 찍곤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그저 그렇게 보였지만 그들의 세계에서 떠돌던 사람 눈에는 수도기술자의 눈빛이나 청소부의 골격, 걸음걸이, 그리고 왜 그렇게 드나드는지를 생각하게 했을 것이다. 특히 특별훈련을 받은 사람들이나 무성무기(단검등)등을 많이 잡아 본 사람들은 적대적인 상황을 항상 가정하고 있기 때문에 수도기술자나 청소부의 등장이유를 금방 이해하곤 했을 것이다. 정보국에서 파견나온 상담요원의 안전을 보장해야 했을거라는 생각같은 것이다.

그 유명한 모사드에서도 유명한 전설적인 인물이라면 2002년부터 모사드의 수장을 지닌 다간(Meir Dagan)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다간에게는 이념이란 관념적인 문제에 대해서 숙원관계(熟怨關係)인 나처럼 나치와 선대의 악연관계가 있었다. 다간은 항상 벽에 사진을 걸어놓고 있었는데, 그 사진속에는 그의 조부가 곤봉과 총을 들고 서 있는 나치장교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사진이었다. 다간은 방문객에게 그 사진을 볼때마다 유대인대학살을 생각하며 그런 불행한 사태를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해야 한다고 설명하곤 했다고 한다.

다간은 역사책을 열심히 읽었다고 하는데, 이스라엘민족의 고난과 건국,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애국적 공동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끔 하는 사실인듯 하다. 다간뿐만 아니라 모사드요원들은 퇴직하고 나서도 역사책을 보는 것으로 소일한다고 하는데, 애국심은 그들의 임무를 독려하는 에너지의 원천이며 애국심을 조성하는데는 역사책이 큰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듯 하다. 그러니 한국에서도 역사교과서의 국정교과서 문제가 큰 이슈가 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역사적 사실은 사상적인 세계를 조성하고, 사상적인 세계는 국민의 행동을 지배한다는 연결고리를 생각하면 이해가 되는 문제인듯 하다.

다간은 채식주의자이기도 한데, 내 자신이 15년 이상을 '채식위주'로 생활을 해보니 정보활동에는 채식위주의 식생활습관이 상당히 유용한 면이 있을 것 같다. 우선 육식을 지나치게 하게되면 감정이 격해지는 문제가 있는데, 항상 중립적이고 냉철한 기반에서 판단을 시작해야 하는 정보요원들은 이미 판단이 깃든 격한 감정들이 전혀 도움이 안된다는 사실을 다간은 알고 있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육식을 하면 자신과 싸워야 하는 과정을 한 번 더 겪어야 되는 낭비가 있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돈을 우선시하는 사람은 모사드의 캇차로 채용되지 못한다. 지나친 열정은 임무를 명확히 이해하는데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모사드업무는 차분하고 정확하며 분별력 있는 판단과 균형있는 안목을 필요로 한다.

- 기드온의 스파이중에서 -

다간은 6일전쟁때 지뢰를 밟아 다리를 절었다고 한다. 지팡이를 짚은 채 권총과 기관총을 들고 아랍인들이 많은 가자지구를 여유있게 돌아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심지어 다간은 한 손으로 소변을 보면서 다른 손으로 빈 콜라캔을 정확히 사격한다는 소문도 있는데, 다간은 사실이 아니라고 하지만 초인적인 집중력은 채식위주의 식생활이 기반이 되어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생각을 해보면 애국적 결심, 그리고 그것들을 계속 다지기 위한 모든 노력들이 기반이 되어 정보활동이나 공작활동이라는 행동으로 나오게 되고, 그 행동들이 결과를 낳고, 역사적인 사실들에 영향을 끼치게 되는 연결고리를 '모사드'라는 유능한 정보기관에 관해 알게 되면서 제대로 이해하는 도움을 받게된듯 하다. 한 편으로는 다른 국가의 정보기관들이 모사드의 활약상을 통해서 많은 기술과 직관을 얻게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실제로 그렇다고 한다. 다간 한 사람만 생각해도 직관과 용맹성의 결집체인듯 하다. 

2015년 12월 19일 토요일

인간과 인간사이 (2)

5. 설득과 강압

토론과 협상능력은 한국인을 비롯한 동북아시아인들에게 많이 부족한듯 하다는 글을 쓴 적이 많다.직접 생활현장에서도 느끼는 바 있고, 전통적으로 수직적 문화에 길들여져 온 사람들이 합리적 문화에 익숙해져 온 서구인들과 같을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합리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는 권위적인 조직문화의 결말은 좀 과장해서 표현하면 거지왕초가 이끌고 있는 집단의 모습으로 귀결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능력없는 보스가 강압적인 태도로 집단의 창의성을 망가뜨리는 모습을 많이 보아오고, 그런 기이한 정신상태와 충돌한 적이 많았던 경험으로는 온건한 설득의 방식이 가져다 주는 신뢰성에 대한 그리움이 많았던 것 같다.

자기들의 설득에 유리한 내용만을 말하는 방법을 일방적 제시, 반대의 주장을 말하는 것을 양면적 제시라고 한다. 호브랜드 등에 따르면 원래의 태도와 같은 방향으로 설득하는 경우에는 일방적 제시가, 반대의 태도를 설득하는 경우에는 양면적 제시가 효과적이었다고 한다. 또한 설득을 듣는 쪽의 지적능력에 따라 효과가 다르고,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에게는 양면적 제시가, 낮은 사람에게는 일방적 제시가 효과적이었다고 한다.

- 미나미 히로시 -

지적능력이 없는 사람들끼리의 문제해결방식은 권위주의적이고 강압적이기 쉬운듯 하다. 생활현장에서 인간이 자신의 관점으로 환경을 해석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사실을 경험한 적이 많은데,설득보다는 권위주의적인 태도로 문제를 해결할려는 사람들이 정상적인 정신상태를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으로 보인적이 많았다. 자칫하면 문제해결이란 목적보다는 자신의 우월관계를 확보하고자 하는 이기적인 광기(狂氣)로 상황을 잘못 인도할 가능성이 많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점을 이해하면 더욱 그런듯 하다.

많이 경험하고 토로해 왔지만 권위적인 정치지도자의 공과(供過)는 별개의 문제로 생각을 해도, 두고 두고 그 잔상이 남아 구세대들이 자신을 그때 그 지도자의 모습과 동일시하며 꼴값(뭐 달리 표현할 적절하고 세련된 단어가 생각이 안남을 이해하소서)을 떨면서 자신과 주변인들의 역량을 소모시키는 장면을 많이 목격하고 충돌하기도 했던것 같다. 무엇보다 마음아픈 일은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실제적인 역량과 타인의 잠재력이나 지적능력에 대해서 많이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6. 사회적 행동

인간은 사회적 동물(정치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인간은 사회속의 사람들을 떠나서 존재가 무의미해진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누구나 좀 더 협동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마음이 둥글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사회속의 나'라는 정체성을 이해해가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회적 규범의 압력이 강해지면 인간은 동조, 반항, 도피라는 세가지 태도중 한 가지를 택일하게 된다고 한다. 동조의 태도가 모범적이고, 반항이나 도피는 병리적행위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 원인을 분석해서 사회규범과 개인의 태도들을 종합적으로 수렴하게 해 주는 것이 사회발전이란 단어로 표현되는듯 하다.

7. 암시와 기대효과

감수성이 예민한 학생들에게 기대되는 장래를 암시했을때 실제로 그렇게 되는 현상을 많이 목격했다. 반대로 인생을 엉망으로 살아 온 노인분의 과거행적을 주의깊게 수집을 한 적이 있었는데, 부모에게서는 반사회적 성향의 나쁜 태도를 물려받고, 학교에서는 말썽꾸러기로 낙인찍혀 나쁜 암시를 극복하지 못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특히 노인분들의 사회병리적 태도는 치유가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는데, 미래에 대한 회의적 기대감이나 경직된 지적, 심리적 상태때문에 더욱 그런것 같다. 

나플레옹은 이탈리아령 코르시카섬 출신으로서 어릴때부터 가장 신뢰하던 할아버지가 나플레옹은 황제가 될 것이라는 암시를 주었다고 한다. 물론 이 글에서는 황제가 되었다는 사실보다 서로의 신뢰감에서 비롯된 암시의 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수직관계나 상하관계, 출세,권위적인 태도를 가진 정신나간 사람들에 대한 노이로제가 나에게 있는듯 하다)

2015년 12월 18일 금요일

인간과 인간사이 (1)

다음은 일본 코넬대학 문학박사인 미나미 히로시(南 博)박사의 저서인 [PSYCHOLOGY]의 내용을 연계하여 조직내부에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형성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한반도의 이념문제를, 특히 북한사회의 경이로울 정도로 유탈하면서도 무탈한 모습에 대해서 큰 의구심을 품었는데, 그런 문제들을 화두삼아 비숫한 조직문화나 아니면 대칭적인 조직문화를 직간접으로 접하면서 문제의 근본은 인간 개인의 심리상태와 민감한 연계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확인한 적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런면이 잘못하면 결국 인간 내면의 윤리문제나 철학문제, 심지어는 직관이나 종교와 같은 초합리적인 문제로 귀결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지게 되지만 심리학이나 회사조직, 넓게는 국가조직같은 광범위한 합리적 영역으로의 접근방법을 취하면 좀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는 편인듯 하다.

1. 경쟁관계로부터의 도피

시험공부때가 되면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컴퓨터게임이나 만화같은 잡기에 빠지는 아이들처럼 어른들의 긴장된 직장생활이나 사회생활도 향락적인 방과후 생활에 도피하게 만드는듯 하다. 일이라는 것은 중요하긴 하지만,(이 점에 있어서 칼라힐은 일은 인류에게 끝없이 따라 다니는 모든 질환과 비참으로부터의 구원이라고 말했다) 개인의 삶의 모든 것이 되서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사실은 진리인듯 하다.대체로 많은 개인들이 일을 자아실현 정도의 가치로 여기기보다 생계를 위한 도구로 여기는 환경에서 일은 곧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원인이라는 인식은 당연한듯 하다. 일만 중시하는 한국보다 가정이나 여가시간을 중시하는 유럽에서 능률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란 기계가 아니고 감정적인 인격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1924년부터 32년간에 걸쳐 미국의 웨스턴 일렉트릭회사의 호손공장에서 실험한 결과에 따르면 자부심, 집단적인 인간관계, 연대의식등이 의욕과 사기를 높인다는 결과를 얻어냈는데, 회사조직이나 국가조직이 경직된 계층체제가 아닌 협동체로 운영되어야 하는 이유를 잘 설명해주는듯 하다. 동료는 적이 아니다. 적어도 일터에서는 서로 돕는 관계여야 한다는 사실을 주지 시켜주는 것이 조직을 운영하는 관리자가 알아야 하는 사실인듯 하다. 모진 일과가 끝나고 베풀어주는 회식자리보다 일터에서의 온화한 분위기가 능률성을 높인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할듯 하다.

2. 근로자의 건강

과로에 시달리는 근로자의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고 한다.

언제나 활발하고 시간에 쫓기는듯 분주하며 본인도 초조감을 감추지 못한다.
성공에 대한 욕구가 강하고 업무에 정력적으로 노력하며, 자신이나 타인의 업적에 신경을 쓴다.
업무가 지연되면 견디지 못하고 흥미가 없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하여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상사에게 충실하고 일에 대한 불평은 별로 하지 않으며 감정을 억제하는등의 특징을 겸비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로이젠맨등의 연구에 따르면 위 유형의 사람들은 반대유형의 사람들보다 관상동맥성 심장질환에 걸릴 비율이 두 배나 높다는 연구결과를 얻었는데, 여러 일터에서 공통적으로 본 바에 다르면 성과등에 성마르게 민감한 근로자는 나이보다 많이 늙어 보이는 현상을 본듯하다. 근로자만 문제가 아니고, 관리자의 성마른 관리태도는 근로자의 잦은 이동과 비능률의 결과로 귀착되어 오히려 기업조직에 부정적인 결론을 안겨주는 일을 많이 본듯하다. 아마 천리마 운동이나 어떤 운동등으로 국민을 끊임없이 독려해도 국민의 개인적 감정을 무시하는 북한사회자체가 건강하지 못한 사회로 퇴보한 이유는 유물론적 입장에 있는 이념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겠다.

3. 자신의 주장과 PR

발전하는 회사조직과 퇴행하는 회사조직의 차이를 보면 퇴행하는 회사조직의 근로자들은 보수적이며 내향적이고, 무엇보다도 자기주장이나 자기PR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회사에서도 용인하지 않는 성향이 있다. 특히 동양권의 문화에서는 점잖은 침묵의 미덕을 중시하고 있는데, 정치적인 영역에서도 일본이나 한국의 정치문화가 자기 표현보다는 지시와 복종을 무조건 따르는 권력문화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는 점은 사회가 발전하지 못하는 심각한 장애물로 여겨지기도 한다. 언젠가 한참 보수적이거나 퇴행적인 사고를 지닌 근로자가 있는 곳에서 시간을 함께 보내봤는데, 대게 연령이 높은 계층일수록 변화를 싫어하고, 계급관계나 권력관계의 관점을 가지고 있는 현상을 보았는데, 아직도 한국사회에서 생각보다 흔한 모습이라는 사실에 경악한 적이 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정치하겠다고 나서는 장래의 지도자후보들 조차 그런 모습을 지녔다는 점은 더욱 경악할 만했던것 같다.

가끔은 나 하나만이라도 그런 꼰대의 모습을 지니지 말아야 국가와 사회에 폐를 끼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긴장하지 않으면 동조되어 버리는 정신세계의 특징상 한국사회의 정체성은 특별한 계몽이나 교육이 없으면 예정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4. 잘들을 줄 아는 사람

자신의 이야기만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왕따를 당하게 되는 일을 많이 본다. 사람은 누구나 남이 자기의 일을 알아주고 이해해주기 바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 또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일은 상대방의 공격성을 약화시킨다는 연구결과도 있다고 한다. 남에게 신뢰받고 이지적이며 호의적이 되려면 상대방의 주장을 잘 들어주는 것이 중요한듯 하다.

언젠가 일터에서 라이벌관계에 있는 연장자 두 사람이 권력투쟁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쪽이 최종 승리를 얻어내는 것을 보면서 자기 말만 옳다고 주장하는(시민들 사이에서 들어보면 아예 짖는다고 표현하더라)정치인에대한 경계심과 들어줄줄 아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자극을 받은 적이 있었다. 또 무식할수록 자기 말이 옳다고 큰 소리를 내는 현상을 보았는데, 승리를 얻어내는 방법에 있어서 매우 미숙한 것은 보통 시민들이나 정치인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수준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가끔은 독서를 하지 않는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생각해보곤 하는데,남의 말을 들어주지는 못할 망정 한 번 더 깊이 고려해보기 위해서는 많은 지식을 통한 경우의 수를 생각해야하고, 많이 알수록 신중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 같다.

대칭세계(A symmetrical world) 5 / 극단성

언젠가 IT회사같은 가장 혁신인 일터에서 기술이 필요없는 현업에 종사하는 매우 보수적인 사람들을 대할 기회가 있었는데, 혁신을 기대하는 사람들과 보수적인 사람들의 분위기는 매우 달랐다. 그냥 달랐다고 표현할 정도가 아니고, 무한한 극단성을 띄고 반대로 달려가는 폭주기관차들같은 기분이었다. 우스운 것은 혁신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이미 알려져 있는데로 혁신을 위해 끝없이 달려가는 입장에 있는것은 이해가 가지만,보수적인 사람들이 극단적으로 보수적으로 애써 달려가는 모습은 인상깊었다. 그러니까 변화하는 세상에 발을 맞추어 분위기에 편승만해도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는데, 노력하여 변화를 막을려고 하는 작위적인 모습이 좀 충격적이고 인상깊었다.

물론 나이나 학력의 차이가 혁신과 보수의 모습을 크게 판가름하기도 하지만 삶의 철학에 있어서 다져온 습관이 너무 차이가 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예를들면 이런 식이다. 일터에 대한 인식을 협동의 장소라기보다 갈등의 장소로 인식하거나 조직관계를 협력관계로 인식하지 않고, 권력관계로 인식하는 것과 같은 오류를 범하는듯 하다. 결국 자신을 보수로 몰고온 과거의 행적들을 살펴보면 게으름과 퇴행적인 사고들이 퇴보하고 있는 미래를 예고해 왔을텐데 아무런 대책없이 보수적으로 흘러들어와서는 변화할려는 사람들의 발목까지 붙들고 늘어지곤 한다.

우리들은 대게 어느 편에 서지 않음을 회색주의자라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담백함과 중용의 태도는 적어도 최소한의 안정성을 가져다 주는 진정한 보수의 모습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때가 많다. 한국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보수와 진보의 대립에 관해서 말하자면 국제환경이나 기술환경등에 맞추어서 사회도 변해가면 그것이 보수라고 말할 수 있을텐데 보수와 진보라는 프레임을 짜놓고 변화할려는 노력을 진보라고 칭하고, 변하지 않을려고 하는게 아니라 옛날로 돌아갈려고 노력하는 반동적(反動的)입장을 보수라고 칭하는듯한 생각이다.

인간 개인이나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살펴보면 매우 사납지 않으면 매우 교활한 모습을 보는 경우가 많은데, 한 개인의 내면에서 그 두가지 성향이 번갈아 나타나는 경우가 있고, 조직이나 집단내에서 사나운 자가 있으면 교활한 자가 있어서 조직이나 집단 내부의 균형을 잡아주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가지 성향이 운명처럼 있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한 가지에 나오고서 가는 곳 모르는 부정적인 성향으로서 없는게 정상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는듯 하다. 사회과학에서는 1970년대 중반쯤에는 갈등이 조직의 추진력에 도움이 된다는 갈등조장론까지 나오곤했는데, 사교육현장에서 공무원이 될려고 했던 젊은이들에게 이 사실을 수업하면서도 계속 의아했던 점은 갈등이라는게 무조건 피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나 혼자만의 독특하고 단순한 결론이 아니고,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을 학자들이 문자로 장식하고 있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은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왜 사나움과 교활함은 함께 가는 것일까. 그 둘은 투쟁과 승부같은 비숫한 부정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는듯 하다. 사나운 자가 공격할때 교활하게 대응하거나 교활한 자가 공격할때 사납게 대응하는 싸움에 있어 상대방이 없는 무기를 내놓아야 하는 불가피한 상황일 것이다. 이렇한 싸움의 장에서도 담백함과 중용의 회색주의가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 사나움과 교활함은 탐욕과 투쟁이라는 한 가지에서 발현한 태도일것인데 그 두가지를 희석시키고 미타찰(극락)으로 인도할 담백한 태도가 비난받을 이유는 없을 것 같다.

어떤 미국인사가 미국인은 불독같고, 일본인은 치와와같고, 한국인은 들개와 같다고 한 말이 떠 오른다. 반도와 같은 지리적 환경, 4계절과 같은 자연적 환경, 매운 음식, 외세의 빈번한 침략등이 한국인들의 기질을 그렇게 만들어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특히 외압적 권력에 대항하여 끊임없이 대응하거나 상승욕구를 발현해 온 전통으로는 담백하고 평온하기 어려운 사회분위기를 가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가끔 정치하고자 하거나 리더가 되고자 하는 이들의 마음이 들뛰거나 이상한 말실수를 수시로 하는 모습을 보면 저런 의지로 사회를 이끌고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곤 하는데, 대중사회의 개인들이 대부분 그렇다면 저런 이상한 모습들도 평범한 모습으로 용인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용인하면 별로 좋은 일이 없는 것은 확실한듯 하다.

2015년 12월 12일 토요일

협동과 갈등

연장자가 많은 일터에서 일할때, 나이많은 분들은 협동적인 관점보다 갈등적인 관점을 많이 가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니 보수는 경쟁을 통한 우열관계나 지배 피지배 관계에 집착을 하고, 진보는 계급투쟁에 빠지게 되는 이유가 생기는 것이다. 협동과 평등은 결국 한 가지로 만나지만 이야기를 꺼냈을때의 분위기는 다르다. 그러니 평등하게 대해달라는 말보다 함께 협력하여 일해보자는 요구가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매우 권력지향적인 노인이 있었다. 그 권력을 통해서 타인의 에너지를 빼앗아서 기운을 유지해나갔다. 보다못한 젊은이가 대들어서 노인의 에너지를 꺾었더니 노인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젊은이는 노인을 수구골통이라 칭하였고, 노인은 젊은이를 빨갱이라 칭하였다. 싸우기 싫은것은 노인과 젊은이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문득 한국사회의 저출산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는데, 반드시 경제적인 문제로 결혼을 안하고 아이를 안낳는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운것 같다. 사회에 만연하는 긴장된 갈등관계에 힘겨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운동을 하고 있는데, 운동장의 비공식적인 보스로 알려진 노인이 이것 저것 운동기술과 장비관련 기술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노인의 눈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위압감과 공격성이 느껴졌다. 녹녹치 않자 인신공격성 발언까지 하며 에너지를 빼앗으려고 했다. 나는 곧 냉소적으로 큰소리를 내며 웃었고, 마음을 들킨 노인은 어리광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 노인이 주축이 된 동호회의 동호인들이 왜 모두 동호회활동을 그만두었는지 알것 같았다.갈등관계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일터의 부담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운동장에 와서 또 다른 일터의 모습을 보는것이 싫었던 것이다.

인류역사상 초유의 갈등관계에 있는 집단이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탓에 한국사회의 갈등관계적 관점은 쉽게 고쳐지지 않을듯 하다. 그러나 고쳐져야 한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한국사회는 북한사회의 갈등관계적인 모습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한반도의 문제는 공산주의나 자본주의 문제가 아니다. 갈등이냐 협동이냐 하는 문제다. 

자존심

흔히 사회의 밑바닥에 살고 있다는 사람들은 많은 것들이 결핍되어 있는듯 하다. 희망으로 생기는 에너지, 딛고 올라설 수 있는 최소한의 물질적인 무엇, 그리고 무엇보다 자존심이 결핍되어 있는것을 많이 본다. 또 진정한 자존심이 무엇인지 오해하고 있는 것도 많이 본다. 진정한 자존심이란 누군가 타인이 챙겨주는 것이 아닌듯 하다. 성장하고자 하는 노력, 신념, 타인으로부터 착취하지 않고 스스로가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과 같은 것들이 자존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듯 하다.

실패한 사람들의 시간적 전후(前後)에는 타인과의 사소한 싸움들이 많은 것을 본듯하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면서 에너지의 산실(散失)을 막는듯 하다. 교육환경이 경쟁을 하게 만들고, 경제환경이 경쟁을 하게 만듦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자존심의 상처를 입는다. 사회의 기본적 구조가 모든 국민들(경쟁에서 이기거나 진자 모두)을 하층민으로 몰아넣고 있다. 남하고 경쟁하지 말고 자신과 경쟁하도록 유도해 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지도자의 자격이 있는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꼭 신경써서 간섭하지 않아도 진정한 자존심을 가진 이는 자기 설 자리로 돌아온다.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은 인생의 좋은 시간들을 타인을 통제하거나 간섭하거나 예의 주시하면서 사실상 그 타인의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춘다. 나는 인생이 너무 짧아 부정적인 일에 뭉갤 시간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데, 내 마음을 오해하고 나를 통제하겠다고 나서는 누군가가 있다면 결국 그런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평정심과 이념적 선동

마음이 들뛰는 사람들은 반드시 실패를 맛보게 되는듯 하다. 여러가지 감정과 생각으로 혼란스러운 마음이 집중력을 흐트리게 만들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치매환자가 자신이 치매임을 인지하지 못하듯이 나도 혼란스러운 마음을 내 자신이 모를때가 있었다. 어디서 보았는지 들었는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인내력을 발휘하는 운동에 매진하면 평정심을 갖출수 있다는 생각이 들때 과감히 실천에 옮겨서 운동을 열심히 하였다.

로마의 황제이자 철학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주위 환경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당신의 마음이 흐트러질때는 재빨리 자기자신에게로 되돌아 와서 필요 이상으로 당황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옴으로써 조화를 더 잘 유지할 수 있다고 [명상록]에서 조언하고 있다.

인내력을 발휘할 역경을 겪어보지 못한 이들은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많은 생각으로 마음의 중심을 흐트리는듯 하다. 물론 그래서 집중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에너지를 모으지 못하는 문제도 보인다. 국민들을 들뛰게 만드는 선동이나 국기문란행위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국민에너지를 분산시키는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있다. 국민과 국민사이를 조화롭지 못하게 하는 말들, 특히 이념적 선동은 어느 편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국민들의 관점에 간섭을 하지 말아야 한다. 

2015년 12월 11일 금요일

큰 사람으로의 교육

언젠가 동암문화연구소 이사장인 전혜성박사가 "생의 목적을 아는 아이가 큰 사람으로 자란다"라는 제목으로 쓴 책을 감명깊게 읽은 적이 있었다. 살아오면서 느낀 것들중 가장 중요한 것이 책의 제목에 함축되어 있는듯한 생각이 들었다. 비록 큰 사람이 되어있지는 못할망정 더 작아지지 않도록 마음을 추스리는데 자극을 주는 제목이기도 하다. 더구나 호기심과 과제, 그리고 여러가지 사정이 겹쳐서 높거나 넓은 세계보다 낮거나 좁은 세계를 지향하는 시간들속에 '생의 목적'이라는 단어는 내면 속에서 더욱 큰 가치를 발휘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다.

베트남이 당면한 경제적인 문제나 외세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대응보다 국민교육을 중시했던 호치민의 마음을 요즘들어 더욱 절실히 느끼는 바가 있다. 학력과는 별개로 내면적 가치나 철학등을 소홀히 한 한국교육의 문제점을 생활현장에서 절절히 느낀바가 있기때문에 더욱 그렇다. 어떤 인물,이념,종교,환경등에 쉽게 동조되는 이유는 무지(無知)함때문이라는 증거를 속속들이 발견해내곤 하는데, 지력(知力)이 떨어질수록 더욱 완고하며 본능적으로 변한다는 진리를 이해하면서, 인간이 적어도 퇴행적이지 않기 위해서는 능동적인 정신능력발휘를 위해서 얼마나 자기자신과 힘겨운 싸움을 거쳐야 하는지 내 자신을 통해서나 주변분들을 통해서 많이 생각하는 바가 있다.

흔히 영웅으로 알려진 나플레옹의 명언들보다 나플레옹을 격파한 웰링턴 공작의 "워털루의 싸움은 이튼의 운동장에서 이겼다."라는 명언이 인상깊었는데, 이튼 스쿨은 웰링턴 공작이나 훗날 처칠등이 배운 공립학교로서 그곳에서 중시했던 크리켓이나 풋보올등으로 체력과 정신력을 단련한 덕에 나플레옹을 격파할 수 있었다는 웰링턴 공작의 표현이다. 한때 영국이 세계를 재패할 수 있었던 까닭은 영국공립학교의 교육이 바탕이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특히 정치문제에 관해서는 이념등에 쉽게 동조되는 무지한 사람들과 누구나 똑같은 가치를 행사할 수 있는 한 표를 얻기 위해서 무지한 사람들을 동조하게 만드는 대중정치성향은 곧 이 사회를 병들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 될것이라는 안좋은 예감이 들기도 한다. 물론 근본적인 원인은 잘못된 교육에 있다는 증거를 많이 발견하기도 한다.

전혜성박사책의 서문에 "의무감과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한, 세상의 어떤 비난도 상처가 되지 않는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인생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인생의 목적이다."라고 한 처칠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념과 신념을 혼동해서도 안되며 의무감이라는 단어도 국가나 사회등의 자신을 떠난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담고 있는 단어로 해석해야 될 것 같다. 인간이 무지하면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무조건 목숨을 바치는 단순함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런듯 하다. 많이 그리고 넓게 알고 생각해야 하는 교육이 시급하다는 생각이 든다.  

2015년 12월 4일 금요일

경계를 그어 자유를 얻어내기

왜 정파(政派)는 정확하게 좌파와 우파로 나눌수 있을까. 인위적인 경계를 그어서 원하는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서 충분한 기능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사회적 약자라고 문제가 없는것도 아니며 강자라고 탐욕의 상징이 될 수는 없는듯 하다. 물론 반대의 경우인 사회적 강자라고 해서 칭송의 대상이 될 수도 없고 약자라고 해서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파는 약자에게 우파는 강자에게 가치를 집중하고 있다. 협동으로서 공리(共利)를 추구하는 새로운 정치적 이념을 위한 경계를 만들어 낼 수는 없는 것일까 하는 문제는 한국사회에서 꽤나 오래되고 심각한 고민거리인듯 하다.

그랙 매커운(GREG McKEOWN)[ESSENTIALISM]이란 베스트셀러저서에서 핵심적인 역량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경계를 분명히 그어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것이 중요한 일에 관심과 행동을 집중하는 좋은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에서 좌파와 우파의 구분은 철이 지나서도 꽤 오랫동안 집중을 위한 경계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으나 사실은 문제의 본질을 이해 못하게 만드는 망상덩어리로 사용되고 있다는, 즉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서 문제의 본질을 찾지 못하게 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듯 하다.

어느 날 내 자신의 세계와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 무엇인가를 찾아내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집중력이 떨어지니까 쉽게 동조되어 정신적인 역량이 무너지는 사태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을 명확하게 구분해야 된다는 사실을 다짐했던 일이 있었다. 쉽고 편안함만 추구하거나 집중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시간의 경계와 말의 경계를 잃어버리고 마음의 경계까지 잃어버리는 모습을 많이 본다. 신뢰감없는 말을 흘리고 다니며,시간을 건설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는 성향이 있다. 왜 그시절 그 추억만 되뇌이고 있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정신에너지가 소멸된 상태이기 때문인듯 하다.

인생에서도 분명하게 경계를 긋고 담장을 쳐놓지 않는다면, 우리의 영역은 다른 사람에 의해 정해질 것이다. 반면에 우리가 추구하는 본질적인 목표를 기반으로 분명한 경계를 마련하고 담장을 쳐둔다면, 그 영역 안에서는 - 그 영역은 우리 자신이 정하는 것이다 - 목표추구에 필요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 [ESSENTIALISM]중에서 -

북한사회나 한국사회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과거라는 시간에 동조된 것인지도 모른다. 정신에너지가 부족하니 과거의 이념에 매달려 경계를 그어 볼려고 하지만 오히려 시간의 경계(아니면 시대의 경계라고 표현해야 할지)를 긋지 못하고 끌려 다니면서 역량을 소모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직장의 고민거리를 집에까지 가져와서 고민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가정과 자신의 에너지를 뺏기는 어리석은 사람들처럼.......

2015년 11월 27일 금요일

유배지로부터의 사색 / 최용해

한때 북한의 2인자로도 알려져 있던 최용해 노동당비서가 백두산발전소붕괴의 책임을 물어 숙청되었다는 국정원발 뉴스가 있었다. 그 밖에도 청년정책에 관하여 김정은과 의견차이가 있는 이유도 숙청의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탄광이나 공장이 있는 시골로 추방되어 교화노동을 하고 있다는 추측인데 과연 다시 김정은의 은혜로 다시 재기 가능할 것인지는 의문이다. 북한의 혁명화교육이나 교화노동은 미래가치를 지향하지 않는 체제에 복종을 위한 순종적인 인간으로 변화시키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쉽게 표현하면 쓸모없는 인간으로 변화시키는 목적이 있다는 의미다. 1인 독재체제와 자유주의 국가의 관점의 차이는 이런 것인가 보다. 자유주의 국가일수록 미래지향적인 가치에 비중을 두고 쓸모있음을 판단하는듯 하다.

한반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이념문제를 거론하고 있는 내 입장으로서는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압박감이 유배지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곤 한다.. 언젠가 어느 어르신이 내게 정약용선생과 같은 유배생활을 한다는 생각을 하라고 조언했던 기억이 난다. 어떻게 하면 이 고립감을 창조적인 미래가치로 환원시킬 수 있을까 고민한 끝에 듣고 보이는 모든 것들의 문제점과 개선책을 생각해봐야 한다는 의지를 다진적이 많았다.

최용해의 유배는 사회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전혀 무용(無用)한 유배이고, 정약용선생의 유배는 현실로 적용할 수 없으되 훗날 호치민도 목민심서를 즐겨 읽었다는 소문이 있는만큼 사회적으로(즉 당대의 현실에서는) 무용하나 역사적으로는 대단히 유용한 유배였고, 나는 어떻게든지 현실적으로 유용한 유배생활을 할려고 애쓰는 형국이 되었다. 누가 뭐라한 것도 아니지만 이념적인 문제가 퇴행적인 길을 걷는 만큼 열패감(裂敗感)으로 시름 시름 앓곤 했다. 자신이 가장 노력한 곳에서 성과를 못보면 좌절하는 것은 누구나 당연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북한 사회가 참으로 놀라운 점이 있다면 결국에는 집권자 한 사람의 두뇌로 지탱을 하면서도 붕괴되지 않는다는 점인데, 역설적으로 표현하면 집권자가 능력이 있다는 궤변도 나올법 하다. 만약 집권자가 깨진 유리창이론의 깨진 유리창과 같은 역할을 하여서 온 국민이 동조와 모방을 하였다면 북한사회는 일찌감치 붕괴를 하였을 것이다. 김정일 시대에 집권자가 퇴폐적이고 감상적인 분위기가 심화되자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는 기회를 잃고 고난의 행군시기를 맞이한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국가를 발전시킬려고 노력하는 집권자는 인재를 미래가치에 바탕을 둔 교육을 시키도록 노력해야 하는데, 남은 여생을 공장이나 탄광노동자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최용해로서는 이미 버림받았다고 봐야할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항상 토로하지만 국가발전을 위해서는 인문학, 철학, 정치, 경제, 실무 모든 부문에서 다방면의 교육을 받은 인재는 절대적으로 필요한듯 하다. 모든 부문은 상호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결국 인간이 사는 세계의 일은 그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느냐 하는 점에 미래가 달려 있는것은 확실한듯 하다.

청년정책에 있어서도 최용해가 김정은과 의견차이가 있었다는 국정원의 첩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듯 하다. 현 북한군 장성들의 보수성(퇴보성), 무능함은 교육받은 지식의 내용과 양적인 면, 그리고 개선되지 않는 노년의 기질과 결합된 문제인 만큼 젊은 김정은과 불협화음을 보이는 점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된다. 최용해의 아버지 최현이나 할아버지 최화심이 군사적인 재능에도 불구하고 배운것이 없는 이유로, 최현은 초기 북한 인민군에서 최화심은 동북항일연군에서 공식적인 승진이 늦었다고 한다.그 때문에 최현은 최용해에 대한 교육에 신경을 썼지만 북한의 교육이라는 것이 이념교육과 군사교육에 일관하고 있어서 최용해도 조부나 부친과 별반 다름없는 무식한 세상에서 헤매다가 끝을 보게 된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언젠가 약간의 치매 증상이 있는 노인분을 유심히 본 적이 있는데, 의사표현의 능력이 부족하니 그 답답한 심정을 호전성(好戰性)으로 표현을 하고 있었다. 꼭 그 노인이 아니더라도 토론 문화나 자기표현의 문화가 부족한 한국사회에서 시민들의 감정이 울컥한 분노로 표현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북한군 장성들이 퇴행적인 모습을 보이면서도 북한에서 입지를 굳히고 있는 이유는 북한사회가 추구하는 선군정치와 같은 호전적인 문화와 상호작용하며 서로를 견인해주고 있는 까닭이라고 봐야 할것같다.

다방면의 자유로운 교육, 독서, 경험, 토론문화 이런 것들은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대단히 유용한 것들이다. 내 자신이 유배생활이 아닌 유배생활을 하면서 내 자신과 사람들을 관찰하며 그 필요성을 크게 느낀다.

2015년 11월 21일 토요일

IT분야의 노령근로자

어느 날 지방도시를 지나다가 50대 이상의 IT인력만 채용한다는 IT회사의 플래카드를 보았다.창업주의 발상이 참 좋아보였다. 언젠가 IT보안 기술을 배우기 위해 알아보던 중 어느 정도 나이가 있으면 직업으로 삼기에는 많은 장애요소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팀으로 움직이는 자율적인 조직구조에서 의사소통과 업무의 조화가 힘들수 있다는 기술학원원장의 말이 이해가 갔다. 서구유럽과는 달리 나이와 관련된 수직관계에 민감하거나 존대말구분이 강한 한국에서는 그럴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젊은 IT인력들은 연령이 많아지면 어떤 길을 가야할까 하는 궁금하기도 했는데, 선구적인 창업주의 창조적인 발상이 신선해보였다.

기업의 비용은 대체로 고정비용과 가변비용으로 나눌 수 있다. 고정비용은 생산을 하지 않아도 기업유지를 위해서 들어가는 기본비용을 말하고, 가변비용은 생산량에 따라서 변하는 비용을 말한다. 그런데 IT회사의 고정비용은 특별한 시설비용같은 것이 별로 안들고 기술인력비용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임금피크제가 사회분위기로 무르익는 요즘에 고령의 IT인력들을 다소 적은 임금으로 채용할 수 있다면 고정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일 수 있겠다 싶었다.

여기저기 돌아 본 운동장이나 일터에서 노령층과 젊은 층의 불협화음을 많이 보기도 하고 겪기도 한다. 즐겁게 운동을 하다가도 권세와 텃세를 부리는 노령의 스포츠맨과 그 점을 받아들이기 힘든 신세대의 불협화음때문에 위축되거나 없어지는 운동동호회를 본 적도 많고, 일터에서도 그런 모습을 많이 본다. 사회구조나 경제구조는 점점 수평화를 원하는데, 연령에 다른 수직적인 관계를 벗어나기 힘든 점은 한국이나 일본사회의 약점이기도 한것 같다.

노인이 많아지는 사회에서 노인인력을 어쩔 수 없이 필요로 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연령에 따른 갈등은 점차 개선되겠지만 2교대 6시간 근로제나 어렵거나 힘들지 않은 제조업분야에서 노령층의 인력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사회분위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2015년 11월 14일 토요일

환상적인 집단적 사고로부터의 자유

정신세계가 이념으로 갇히는 상황이나 집단적 사고에 개인의 사고가 매몰되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여러 분야를 '참여관찰'한 경험이 있다. 그 와중에 심신(心身)의 상태를 꾸준히 경쾌하게 유지하지 않으면 많은 어려움을 겪곤했는데, 그 때문에 스포츠랑 친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정신나간듯 한 권력자의 '이상한 행위'에 대응하여 나 자신을 지켜나간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비 이성적인 집단적 사고와 맞서는 행위는 꽤 여러번 꾸준히 해 온것으로 생각된다.

오래전 꽤나 카리스마 있는 무술인이 주먹과 지모(知謨)로 제자들의 정신세계를 장악해 나가는 모습을 보고는 그렇게 생겨먹지 못한 내 자신을 돌아보기도 하고, 그렇게 맹랑한 삶을 살고 있는 무술인과 우둔한 제자들에게 뼈아픈 충고를 했던적이 있었다. 그 무술인은 자신의 인생을 왜 내가 참견하느냐고 따졌지만 이념적 사고에 갇히는 사회를 상당히 우려했던 생각이 있어서 사회방위를 위한 역할을 한다는 핑계로 기죽지 않고서 대응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런 사건은 여러번 있었는데, 원리주의 종교단체에서도 그랬고, 특수한 군인들의 집단에서도 그랬고,노인분들이 많은 일터에서도 그랬다. 권위가 집단적 사고를 만들어내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편안한 삶을 위해서' 자유를 억압당하는 불편함을 참고 살았는데, 나중에는 그것 때문에 힘든 상황이 꼬리를 무는 것을 보았다.

1960년대 초 미국 정보기관인 CIA가 역사상 희대의 엉뚱한 짓을 저지른 사건이 있었다. 쿠바에 피델 카스트로의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백악관에서 CIA주도로 케네디 대통령과 주요 인사들이 망명한 반공쿠바인들 1400명을 쿠바 남부해안에 상륙시켜 카스트로 정권을 붕괴시키는 계획을 짰다. 그리고 계획은 실행되었는데, 보급품을 실은 배는 쿠바 공군의 폭격으로 침몰하거나 도주했고, 1400명중 200명이 사망하고 1200명이 포로로 잡혔다. 원래 계획은 상륙하고 나서 쿠바 중부의 에스캄브라이 산악지대로 가서 몸을 숨기고 게릴라전을 하는게 계획이었지만 그곳은 상륙지점으로부터 15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고, 그 사이에는 뚫고 넘어갈 수 없는 늪지대가 지도상으로도 나타나 있었다.

2차대전때 일본군은 태평양전쟁에서 미군과 대략 10대 1의 교환비율로 인명을 경시하며 반자이(만세)돌격작전을 펼치거나 실패할 경우 전원 옥쇄작전을 펼치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했다. 특히 임팔작전같은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작전으로 수십만의 일본젊은이들이 제대로 된 전투를 치뤄보지도 못하고 이국땅에서 죽음을 당했는데, 작전을 지휘한 무다구치 렌야는 미국이 승리하는데 1등공신이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2001년에 스위스항공의 파산사태는 스위스항공의 고문집단이 성공에 대한 낙관적인 환상으로 의견이 일치하여 팽창전략에 대한 위험성을 누구도 지적하지 않았다는데서 원인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언젠가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던 엄청난 삽질(뻘짓 또는 비합리적인 사건)들을 통제하거나 지적할 수 없었을까. 가끔 정치권이나 경제권, 학계 모두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념성과 파벌성을 살펴보면 그 답은 나오는 것 같다. 심리학교수인 어빙 제니스(Irving Janis)가 1972년에 내놓은 집단적 사고에 관한 이론에 따르면 어떤 음모를 꾸미는 집단의 구성원들은 환상을 키우면서 소속감을 발전시키고, 행운에 대한 만장일치적인 믿음을 갖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망상이 반복되면 머리속에 현실처럼 자리잡게 되고, 그것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발현된다는의미다. 지난 한국정부가 종교적이거나 이념적인 성향이 지나치게 강한데 대해 반발한 것은 그런 우려 때문이었는데, 아쉽게도 우려한 것이 사실로 나타나고 말았던것 같다. 혹시라도 현 정부에서도 이런 문제점이 보인다면 시급히 개선되어야 할 문제인듯 하다.

집단적 사고의 문제점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예가 북한이란 사실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인과의 처참한 연결고리도 실증해주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서구사회에 비해서 집단적인 사고로 끌려들어가기 쉬운 전통을 가진 동북아시아 국가들의 미래에 대해서 신뢰가 가지 않는데, 먼 훗날 "내 생각이 맞았다"는 비극적인 말을 할까봐 두렵기도 하다. 국민 각자는 자율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그것들이 합리적인 조율과정을 거쳐서 '결정'되어야 하는게 이상적인듯 하다. 강력한 의견일치가 환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존재가치가 없을듯 하다. 그래서 사회가 발전할려면 다양한 의견을 수용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2015년 11월 13일 금요일

실무적 인간 (Homo practical man)

언젠가 운동장에서 운동을 하다가 낮익은 분이 있어서 인사를 드렸다. 만난적은 없고 신동아나 월간조선같은 잡지에서 서울시의 교통관련요직에서 일하시던 J선생에 관한 기사가 나왔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최말단 관료부터 시작하여 독서를 통한 실무능력을 키우고 공식적인 대학졸업은 60대에 하신 분이었다. 이력도 관료들을 비롯하여 많은 분들에게 귀감이 될듯하고, 나도 마음이 많이 끌려서 잡지기사의 사진을 꽤 오랫동안 기억에 담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성함도 꽤 특이하신듯 하다. 당시 그분은 얼굴이 안 알려져 있는 사정에 아는 척을 하는 이가 있어서 당황스럽기도 하고 반가워하기도 하셨던것 같다.

나중에 그 분에 관한 여러가지 사정을 알아보고, 내가 배우고자 하는 기본적인 현장을 가까이 하는 실무형 인간의 전형적인 실무형관료인점, 내가 무척 싫어했던 비실무적 집권자의 유일한 실무적 업적을 이루도록 도와준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좋은 분은 그저 좋은 분이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그 분 관련 기사를 자주 반복해서 보는 편이다.

이상하게 현장실무와 관련된 접촉을 하는 정치가나 고위관료들은 유능하고 사명감있다는 평가를 받는데 반하여 진보적인 성향, 즉 좌파적인 성향을 가졌다는 오해도 받게 만들기 쉬운 사회가 한국사회인듯 하다. 내가 좋아하는 실무형 정치지도자가 호치민이라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는 사회가 한국사회이기도 하다.실무형지도자나 민족주의자같은 이념중립적인 관점을 벗어나서 공산주의자라는 이념적인 평가가 중요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로뛰며 민생(民生)을 함께 느끼지 않는 지도자는 통찰력을 가질 수 없다는 관점만으로 호치민을 존경한다는 뜻이다. 공산주의라는 이념이 정당한 이념이 아니라는 내 관점으로는 좋지 않은 지도자이기도 하다. 호세 무히카처럼 조금 더 우회전 하면서 한 국가의 지도자로서 능력을 검증받은 이도 있다는 사실은 무척 중요한 사실이다. 이념이 중요한게 아니라 민생의 현장이 중요한 것같다.

파킨슨의 법칙때문인지 관료조직은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커지는 성향이 있는데, 한국에서는 경찰이나 소방조직같은 현장업무를 중시하는 관료조직조차도 단순하게 커지는 것이 아니라 관료조직내의 관리자만 비대화돠는 이상한 성향이 있는것 같다. 경찰조직에서는 간부계급이 지나치게 많아져서 계급은 간부인데 현장업무를 하는 일도 있고, 소방조직은 관리자만 많아지고 현장업무를 할 인원은 항상 부족하다고 한다. 한국사회자체가 실무형 인간을 천시하는 전통적인 습성을 가졌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고 느끼는 바 있지만 사회의 효율성면에서 따지면 아주 나쁜 현상인듯 하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저항적인 심정으로 가장 소홀히 대접받는 민생의 현장에서 일하면서도 그 와중에 어떤 무지(無知)스러운 인간도 관리자가 되고 싶어하는 성향을 가졌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사회가 아직도 지배와 피지배관계 또는 권력관계같은 비효율적인 전근대적관계에 병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한다.

정치지도자가 되겠다고 하는 정치인들이 하는 말들이 민생의 현장과는 너무 거리가 먼, 추상적이거나 전혀 공감대가 형성이 안되는 내용이라는 사실을 자주 깨닫게 되는데, 능력도 없어 보인다. 2세 3세의 능력이 창업주를 넘어서지 못하는 이유는 실무적인 인간으로서의 경험이 없는 탓이라는 생각을 한다. 특히 세습지배체제인 북한은 대표적인 예를 보여주는듯 하다. 

2015년 11월 7일 토요일

황혼에서 새벽까지 / 기다림

언젠가 좀비가 나오는 영화제목인 황혼에서 새벽까지라는 말이 굉장히 공포스럽게 머리속에 남기 시작했다. 아주 어려운 삶을 살던 시절에 '기다림'이라는 단어 하나에 매달려 시간을 죽였다. 그랬더니 즐거울때가 오기는 왔다. 역시 내 감수성이 조금 더 무뎌지고 세상을 보는 관점이 더 긍정적으로 변하면서 행복함도 찾아왔다. 행복하게 만드는 많은 원인들이 있었는데, 첫번째 운동이었고,두 번째 사교육 시장에서 젊은 이들의 밝은 모습을 볼때였다. 젊은 이들의 세계에서는 우울함 조차도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예비로 생각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운동장과 사교육 시장이 둘다 경쟁과 승부에 친하지만 나는 반골기질이 있어서 그런지 곧잘 흥이 나는 곳으로 만들어주곤 했다.

노인분들을 폄하하는건 아니지만 남은 세월을 젊은 이들의 그것과는 다른 또 다른 '기다림'으로 시간을 보내는 공허한 눈빛을 보면 공포심이 느껴지곤 한다. 자존심과 이상을 잃어버린 분들과 어떻게 상호교류를 하며 밝은 세상을 만드는 시도를 해야 할지 혼돈스럽기도 하고. 그런 노인분들을 볼때 나는 어떤 '기다림'을 가져야할지 혼돈스럽기도 하다.

언젠가 북한의 열병식에서 온갖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웃고 서있는 늙은 장성들을 보면서 공포심을 느낀적이 있다. 저 인격체들은 어떤 꿈을 꾸면서 살고 있을까.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보겠다고 한반도의 산야(山野)를 짐승처럼 기어다니던 이현상이나 하준수같은 빨치산 지도자의 이상과 저 인격체들의 현실과는 어떤 상관관계가 형성이 되어 있을까.인간이 해야 하는 일이란 업적을 남기거나 결과를 얻어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밝게 살아주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10여년을 반이념을 위해 많은 논리와 직관을 소모했는데, '교과서'같은 미래를 위한 교육수단에 다시 이념논리가 개입하는 어처구니 없는 현실을 보고 있는 기분은 참으로 우울하다. 마치 영혼이 없는 살아있는 시체인 좀비에게 쫓기다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새벽을 기다려야 하는 심정이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좀비는 영혼이 없지만 한반도의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념이 다른 영혼들을 추출해낸듯 하다. 내 눈에는 영혼이 없어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가슴에 황금색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사회주의 강성대국을 건설했다고 웃고 서있는 속칭 인격체의 모습을 한국에서는 경험하지 않기를 소망한다. 이것도 기다려야 하는가.

영혼이 빠져나간듯한 노인분이 잠든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그래도 살아 움직이며 세상을 휘질러 놓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러기는 힘들겠지만 어떤 노인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은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탐욕대신 꿈과 이상을 놓치지 않으며,당신도 후손도 즐거운 세상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드리고 싶다. 

2015년 11월 6일 금요일

보수적 성향의 원인

한국사회에서 진보와 보수의 문제는 거의 경제적인 기득권과 분배문제에 관해서 논의되는듯 하다. 그러나 자신의 이해관계를 떠나서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경제적인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자본가라고해서 무조건 보수적인 성향을 띈다거나 경제적인 약자가 무조건 진보적인 성향을 띈다는 생각은 전혀 옳지 않음을 경험으로 검증해본 적이 많다. 흔히 이야기하는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보수적인 성향을 띄는 사람들을 무척 많이 본다. 아니 대부분 그런것을 보았는데, 발전보다는 안일함을 구하는 태도로 인생을 살아가는 성향이 있는 이들은 노력과 발전에 관한 열정이 전혀 없다. 가장 대표적인 이들이 노인분들일 것이다. 그러나 젊은 세대들 중에도 그런 이들이 많은데, 여러가지 제도적인 문제와 경쟁에서 밀려나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삶에 대한 열정을 찾을 길이 없을때 보수적인 성향으로 눌러 앉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반면에 기업을 운영하는 이들에게서 진보적인 성향을 본 적도 많은데, 끊임없는 이노베이션에 관한 열정으로 변화를 갈망하는 이들도 많이 보았다. 그들은 자신의 열정에 국가제도나 시민사회의 변화가 보조를 맞춰주기를 바라는데, 그것이 뜻대로 안되면 열정이 없어지면서 보수적인 성향으로 눌러앉는 것도 보았다. 언젠가 어떤 중소기업에 잠깐 있었는데, 정작 퇴행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은 종업원들이었고, 항상 변화를 갈망하는 이는 고용주였던 것을 보았다. 고용주는 '항상 배운다'는 자세로 살아간다는 워크넷의 내 이력서와 나이 보다 젊어 보이는 사진을 참고하여 회사에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을 갈망하였는데, 막상 현장과 사무실등의 모습은 변화를 이야기하기에는 먼나라 일 같았다. 회사일의 체계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 기득권을 놓지 않는 간부사원부터 변화시켜야 하는데, 나이 든 간부사원들은 변화도 싫어하고 새로운 인물도 싫어하고, 열심히 일하는 것도 싫어하고 고용주의 논의도 싫어했다. 한편으로 중소기업의 고용주는 대기업과의 경쟁에서도 위축된 환경을 가지고 있는데, 열정이 없는 종업원들 때문에도 골머리를 앓고 있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그러나 종업원들의 입장에서도 중소기업의 고용환경은 대기업과 큰 격차가 있기 때문에 무조건 열정을 강요할 수는 없는것 같았다.

어설프게 엿본 대단히 혁신적으로 보이는 IT회사도 비숫한 고민을 하는듯이 보였다. 열정은 하부계층의 종업원들 보다는 간부사원에게서 느껴지고, 대기업과의 경쟁이 가장 큰 고민으로 보이는듯 했다. 오히려 대기업과의 경쟁에서 실패하면 기업주나 간부사원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회사의 혁신적인 변화보다는 개인적인 안일함을 구하는 보수성을 띌 가능성이 우려되기도 했던것 같다. 시차는 좀 있겠지만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성향의 결과는 번영이고, 보수적이거나 안일한 성향의 결과는 퇴보라는 원리를 생각하면 보수적인 성향은 사회공리적인 관점으로도 피해야 할 성향인듯 했다.

결론을 말하자면 보수성은 기득권때문이 아닌 좌절감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할것 같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이념적인 보수와 진보의 차이는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다. 시민 각자의 보수성은 국가전체의 퇴보를 가져 오는데, 일본은 그 대표적인 성향을 나타내고 있는듯 하다. IMF의 전망에 의하면 곧 일본의 일인당 구매력기준 국민소득을 한국이 추월할 것이라고 한다. 물론 한국정부나 일본정부에서 제공한 자료를 기반으로 전망을 하고 있지만 IMF에 제공한 경제적인 자료에서조차 일본은 조심스러운 보수성을 띄었을 것이다. 대체로 한국이 일본보다 덜 보수적이라는게 알려져 있는데, 그건 경제적인 후발주자로서 당연한 평가를 받는듯 하다. 하지만 요즘 추세를 보면 한국이 정치를 중심으로 혁신과는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장 문제는 정치적인 분위기와 노령층 인구의 증가, 청년실업과 같은 역동적인 에너지를 감쇄시키는 요인들이 많아지는 현상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보수와 진보의 논의조차도 있어서는 안될 것 같다. 혁신을 하고자 하거나 운명을 개척하고자 하는 개인들이 좌절을 하지 말아야 하는 국가를 만들어야 할 것 같다. 

에로스(Eros)와 정신머리

근래 몇 년동안은 중년이상 유명인들의 성추문사건이 자주 발생하는듯 하다. 성추문사건은 입에 담기도 민망하다는 이유로 공론적인 논의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면에서 한국사회에서는 가장 퇴행적인 모습을 보이는 분야이기도 하다. 이번 정부의 출범과 동시에 대변인의 일탈, 고위급 인사의 집단난교, 고위법조인의 병적인 일탈, 국회의원의 성추행, 급기야는 국정교과서를 집필하기로 한 학자의 성추행문제까지 발생하여 사회지도층이나 나이많은 사람들의 성윤리를 대변하는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듯 하다.

어느 날 나이 어린 여자친구가 많다고 고백하는 유명한 원로가수가 20대초반의 젊은 여성에게 입술을 내미는 장면이 인터넷에 뜨자 댓글을 다는 젊은이들의 증오심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어렸을때는 버릇없는 젊은이들이 문제였는데, 이제는 나이 든 사람들이 젊은이들의 윤리적인 비난을 받는 일이 빈번해진듯 하다. 언젠가 이념문제와 관련하여 나이 든 사람들의 '보수성'에 관해 관찰하기 위하여 노인분들이 많은 일터를 다녀봤는데, 노인들이 체면이나 자존심같은 것은 잃어버리고, 육체만 그럭저럭 움직이면 혼미한 정신에도 불구하고 야구동영상을 돌려보거나 여성들의 뒤를 쫓아다니는 추태를 부리는 장면을 많이 보았다. 간혹 젊은 사람들에게 보기 부끄럽다고 말리는 분들도 있었으나 요즘 노인은 많되 어르신이 없다는 가시돋힌 말들을 어렴풋이 느끼는 충분한 경험이 된듯 하다.

모든 조건이 다 갖추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지위를 제대로 얻지 못하는 지인이 있었다. 대화할때마다 성적인 내용에만 눈이 반짝이는 상태를 느끼고는 스포츠에 몰두하면 나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야말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말이 어울리는데, 정기(精氣)와 관심사는 제대로된 곳을 지향해야 한다는 생각에 아는척을 해봤다. 그러는 나는 고상하냐하면 그것은 아닌듯 하다. '일본의 성문화'라는 기사의 제목을 서둘러 클릭하고는 어쩔수 없이 일본 오사카성등의 여러 성벽들의 축조방식과 병력배치방식, 전투상황등을 공부해야 했던 익살스러운 경험이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불완전한 나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주변에 퇴폐적인 사람들이 있으면 질색을 하거나 스포츠에 일가견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조그만 업체를 운영하다가 고학력을 가진 중년직원들과 미인에 준(準)하는 여직원과의 얽힌 관계로 크게 곤란을 겪은적이 있었다. 마치 몇년전 주중 상하이 한국영사관을 쑥밭으로 만든 '상하이 덩씨'사건의 축소판으로 보면 되겠다. 예의 그 여직원이 말이 통하는듯 하다고 내게 자신의 가정사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내 연륜이 부족하여 그 이야기의 본질을 알아내지 못했던것 같다. 그 여직원은 아버지가 커가는 딸들과 조강지처를 두고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는 것이다. 성장과정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은 여직원은 성실한 남자를 만나 제대로 된 가정을 꾸미고 싶어했던것 같다. 그런데, 남자직원들에게 친절하게 대한다는것이 그만 동상이몽(同床異夢)상태가 되었다. 탐욕에 가득찬 중년아저씨들이 집적거리기 시작했고, 배신감을 느낀 여직원은 삼각관계, 사각관계, 오각관계를 형성해가며 분란을 일으키고 말았다. 결국 업체의 투자자까지 물려들어가서 헤매고 있었다. 얼마후 업체는 문을 닫았다, 직장을 잃은 그 중년 아저씨들은 두고 두고 나를 원망하고 있었다. 얼마후 전철안에서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이 내가 지나가자 아이의 이름을 일부러 크게 부르는 것을 돌아보았는데, 원하던 것을 얻었다는 표정을 짓고 있어서 내 나름대로 고개를 끄덕여 보았다. 

운동장에서 준수한(자꾸 준수한 스포츠실력을 가졌다고 말하는데, 실제로 그렇다)스포츠 실력을 뽐내다가 한동안 화려하고 날라다니는 점잖치 않은 복장으로 운동을 해봤는데, 주변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심지어 함께 운동하던 여성분의 극진한 관심까지 받게 되었는데, 염치불구하고 도망갔다. 운동이 더 좋아서 운동장에서는 운동만 해야겠다는 생각에 친절했던 분을 난처하게 만들었던것 같다. 그리고 복장도 건강하게 해야 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사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보니 공유한 지식과 그에 근거한 대화가 함께 하지 않으면 이성에 대한 매력을 못 느끼는게 내 경험인데, 입과 마음이 다르게 각자 각개전투를 하는 '정신머리'때문에 유명인들의 성추문 사건은 자주 일어나는듯 하다. 그저 건강한 혈기에도 건전하게 사는 젊은이들에게 미안할 뿐이다.

사랑의 비의.....올바른 길로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이 일을 어려서부터 시작해야 하며, 또 아름다운 육체에 접근해야 하는 것입니다. 맨 먼저는 그의 지도자가 바르게 지도한다면 한 육체를 사랑하며 거기에 아름다운 언설을 낳아야 합니다. 그 다음엔 한 육체의 아름다움이 다른 육체의 아름다움과 비숫하다는 것과, 또 아름다움을 본질에서 추구하고 보면 모든 육체의 아름다움이 결국 동일한 한 가지 것임을 믿지 않는 것이 크게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모든 아름다운 육체를 사랑하는 자가 되어, 한 육체에 대하여 가볍게 생각하여 그것이 지극히 작은 것이라고 믿음으로서 그 한 육체에 대한 강렬한 정욕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다음에 정신의 아름다움이 육체의 아름다움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안 됩니다.그리하여 누구든 정신이 아름다운 사람이 있으면 설사 그 용모가 그다지 환하지 못할지라도 만족하여 사랑하고 보살펴주며,그리하여 자식을 낳고 또 그 젊은이들을 훌륭하게 해 줄 만한 이야깃거리를 찾아 이야기해 주어야 합니다.이와 같이 하면 그는 더욱 우리의 여러 가지 제도와 법률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보게 되며, 도 모든 아름다움이 결국 하나의 동일한 연줄로 서로 결부되어 있음을 이해하게 되고, 따라서 육체의 아름다움이란 것이 보잘것없는 것임을 잘 알 수도 있을 겁니다. 그 다음에 그는 제도나 법률 같은 것으로부터 지식으로 나아가, 여러가지 다른 종류의 지식 속에 있는 아름다움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아름다움을 하나의 전체로서 바라보도록 하여 다시는 노예처럼 한 가지 것에 얽매여 한 소년이나 한 인간이나 혹은 어떤 한 가지 일에만 만족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 플라톤[플라톤의 대화]중에서 -

사회적으로 저평가를 받는 일을 할 때였다. 사람들은 항상 작은 이익에 얽혀 싸우고 서로를 경멸하고 있었는데, 유난히 한 중년여성이 단아한 모습으로 묵묵히 맡은 일만하고 있었다. 얼마후 갑자기 높은 직급으로 올라가 쓸데없는데 에너지를 낭비한 사람들을 무색하게 하고 있었다. 만약 퇴폐적이며 출세한 사람이 있거나 출세하여도 퇴폐적이거나 정신머리를 놓아도 지위를 보전할 수 있는 사회라면 끝이 보이는 사회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2015년 10월 31일 토요일

사격장 가는 202번 버스와 노(老)

몇년전 태능에 사격장을 다녀올때였다. 당시 정신적인 어려움을 극복할려고 사격에 열중을 하고 있어서 사격원로분의 정신적인 후원을 많이 입고 있었다. 지금은 총이라는 무기가 가져다 주는 이미지와 내가 깊숙히 참견하는 북한문제와 연결고리가 생겨서 다른 분들이 불편해하실까봐 사격장에 얼굴을 못내밀고 집에서 새벽마다 공격발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여의치 않게 된게 어느 노인이 엽총으로 살인을 한 사건으로 총기를 영치보관하게 되어서 꿈 하나가 위태롭게 되었다. 중학교시절에는 북한의 사격영웅 소길산선수와 겨루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했는데, 나이가 꽤 들어서는 겨룬다는 것은 의미가 없고 나 자신을 제어하기 위해서 올림픽에 사격선수로 나갈 '꿈' 그리고 네덜란드에서 열리는 스케이트마라톤 대회에 나갈 '꿈'등을 간직하며 그저 그렇게 모나지 않게 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날 함박눈이 내렸다. 주말에 202번 버스는 육사생도들이 종종 타기때문에 눈이 즐겁다. 세련된 정복과 꽃같은 젊음이 버스안을 환하게 비추고 있는데,북조선의 지도자가 태어났을때 비췄다는 그 존엄스러운 하늘의 광채보다 더 영광스럽다는 익살스러운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잠시후 불암산을 다녀오는 60대로 보이는 등산객들때문에 버스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마 등산도중에 쌍쌍의 짝이 만들어졌고 그 와중에 파트너를 뺏고 빼앗기는 질투와 원한의 대 파노라마가 벌어졌던것 같다. 그리고 한 아주머니(옛날에는 할머니)에 의해서 등산스틱을 사용한 활극이 시작되었다. 어쨌던 이상한 상무정신(裳武情神)을 발휘한 활극으로 버스는 정차되어 경찰을 기다리게 되었고, 프랑스 샹송가수 아다모의 유명한 '눈이 내리네'의 가사속에 보이는 길이 막혀서 약속시간에 늦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고 '눈이 내리네'의 음율속에 들리는 눈 오는 날의 서정은 산산조각이 났다.

전철을 탈때마다 큰 소리로 떠드는 이들은 노인 분들이고, 술냄새를 풍기는 이도 노인 분들이다. 어제는 말도 안되는 정치이야기를 비합리적이고 감정섞인 이야기로 크게 떠들고 있었는데, '요즘 젊은 것들'을 크게 질책하면서 승객들의 눈살을 찌뿌리게 하고 있었다. 함께 탄 젊은이들은 생각보다 훌륭한 가르침을 받은듯 하다. 절대 저렇게 살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 같은 것이다. 항상 우려하는 일이지만 그 노인분들도 선거에서 한 표를 행사할 수 있고, 정치인이 그 한 표를 얻기 위해서 공약과 정책결정을 함께 수준을 낮추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니 벌어졌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각주- 위의 상무정신의 상(裳)자는 아랫도리 옷 '상'자다

2015년 10월 30일 금요일

공공선과 도덕성 / 마이클 샌델

국사교과서 국정화논란에 대해서 해법을 제시한다고 블러그에 글을 쓴 것이 갑자기 일본독자들의 관심을 많이 끌고 있는듯 하다. 한 편으로는 일본인들의 제국주의적 침략주의에 대해서 국가공동체영역의 관점으로 묶어서 평가해야 한다고 서술한 점에 있어서 모든 일본인들의 부도덕성, 그러니까 침략적인 정부가 형성되는 것을 막아내지 못한 소극성까지 포함하는 부도덕성을 비평한 점이 있는것 같아서 일본독자들이 많아진다고 마음이 편한것은 아닌듯 하다.


그저 침략적인 일본정부를 막아내지는 못했을 지언정 훗날이라도 그런 나쁜 상황을 호기있게 배척하는 평가를 하지 못하는 복잡한 상황에 대해서 한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울 따름이다. 더구나 일본내에서 아베정부의 역사왜곡을 비난하는 시민단체가 만들어지고 있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생각해보면 한국사회에서는 참으로 오랫동안 공공선과 도덕성을 충돌하는 개념으로 사용하는듯 하다. 친일문제에 대해서도 그렇고 이념문제에 대해서도 도덕성을 문제시 하고 있는데, 공공선을 위해서 도덕성을 참으라는 요구가 있는듯 하다. 하지만 공공선은 도덕성을 기반으로 한 '자존심'이 지켜질때 확보될 수 있는듯 하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의 권리와 자격의 확대를 무조건적인 도덕적,정치적 진보로 간주한다. 반면 공동체주의자들은, 자유주의 프로그램들이 정치를 비교적 작은 형태의 연합에서 보다 포괄적인 연합으로 바꾸어놓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자유지상주의 자유주의자들은 사경제를 옹호하고, 평등주의 자유주의자들은 복지국가를 옹호하지만 공동체주의자들은 기업을 바탕으로한 경제와 관료국가에서 발생하는 힘의 집중을 우려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충성과 의무, 전통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공동선의 정치가 선입견과 편협한 태도로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현대의 민족국가는 아테네의 도시국가와는 다르다고 지적한다. 현대 생활의 다양성과 규모를 감안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윤리는 기껏해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유물에 불과하다. 최악의 경우는 위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선을 기반으로 통치를 하려는 시도는 전체주의적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서 공동체주의자들은 편협한 태도는 삶의 형태가 혼란스럽고 근원이 불안정하며 전통이 완성되지 않은 곳에서 가장 창궐한다고 대응한다. 나 역시 공동체주의자들의 이러한 견해가 옳다고 생각한다.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썼다. "대중사회를 견디기 힘들게 만드는 것은 그 구성원들의 수가 아니다. 그보다는 살아가는 세상이 그들을 결집시키고 관계시키고 분리시키는 힘을 잃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공공생활이 약해지고 공통적으로 연계되어 있다는 느낌이 희미해질때, 전체주의적 해법을 제시하는 대중정치에 빠질 위험이 높다. 공공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향해 그런 위험성을 지적한다. 공공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옳다면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도덕적, 정치적 과제는 우리의 도덕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 MICHAEL J . SANDAL의 [WHY MORALITY] 중에서 -

원래 한국내에서 친공(親共)과 친일(親日)을 배척하는 이유는 전체주의를 막아내고 도덕성을 회복하여 공공선을 달성하자는게 목적이었고, 일본내에서 아베정부의 역사왜곡이나 우경화에 대한 반대 여론이 크게 형성되어 있는 목적도 동일한듯 하다. 어떻게 보면 '도덕성'이란 시민각자를 넘어 국가와 사회를 초월한 공통적인 이상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근거도 되는듯 하다. 많은 일본인들 역시 일본이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 하여 일본인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상황을 반기지 않는듯 하다. 일본은 한국에게는 가해자이지만 스스로 큰 피해자이기도 한 것이다. 한국의 도덕적인 중심이 없는 대중정치성향은 외부의 관점으로는 많은 헛점을 보여줄듯 한데 친일(과거 침략적인 제국주의 일본에 대한 친일을 말한다)과 친공은 나쁘다. 도덕성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관점으로 그렇다는 의미다.   

2015년 10월 24일 토요일

이것이냐 저것이냐 / 국정교과서와 이념의 선택

요즘 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가 뜻밖에 이슈가 커지면서 아직도 이념의 족쇄를 벗어던지지 못하는 의식에 대해서 참으로 신기한 면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친공(親共)과 친일(親日)이 모두 좋지않고, 혹시 이면에 있을 수 있는 사적(私的)인 이해관계나 사상적인 견해는 공적(共的)인 관점에 매몰되어 논의되어야 옳다는 생각이다. 해결책까지 이야기하자면 국정화를 시도할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검정과정에서 친일이나 친공적인 내용은 명확하게 배제해야 할 일인듯 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국의 사상적인 이슈는 일본의 침략과 공산주의 침략중 어느 한 가지가 선택되어 비난받는 것으로 약속되어 있는 관점을 가지고 있는듯 하다.

30여년전 미국시사주간지 타임과 뉴스위크지에서 레이건대통령이 유럽여행중 나찌 친위대 전몰자 묘지에 참배하는 스케쥴이 대서특필된 적이 있었다. 당시 유태인 수용소를 겪은 노벨상 수상작가 엘리위젤은 "당신이 갈 곳은 그곳이 아니고 희생당한 자의 옆입니다."라고 비평하며 2차대전에 독일과 적대적인 입장에 있었던 미국의 여론도 들끓었던 사건이 있었다. 당시 레이건은 나찌 친위대의 젊은이들도 희생자라며 폭넓은 이해를 구하는 변명을 했었다.

그런데 레이건대통령의 상식에 어울리지 않는 돌출행위의 이면에는 철저하게 반공주의자였던 성향과 제국주의(여기서는 극우주의라고 표현해야 이해가 쉬울듯 하다)에 대한 입장이 택일관계로 작용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니까 레이건의 생각속에는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이 강력하게 터잡고 있어서 침략적인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이 비집고 들어올 수 있는 여유가 없다는 택일관계같은 관점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좀 더 본질적으로 생각해보는 내 관점으로는 침략적이고 호전적인 공산주의와 역시 침략적이고 호전적인 제국주의는 둘 다 배척되어야 하는 이념이라는 생각이다.

한국에서도 가끔 일본에 대해서는 국민은 잘못이 없는데 위정자들의 잘못된 판단이 문제가 되었다거나 한국은 일본의 침략을 긍정적으로 해석해봐야 하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는 이상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돌출발언이 가끔 문제가 되기도 한다. 침략행위의 주체는 소수의 위정자가 아니라 국민을 포함한 국가공동체끼리의 관점으로 논의되어야 하는데, 레이건의 친위대원들도 피해자라는 발상은 기상천외한듯 하다. 그런 판단은 레이건이 독일국민이었을때 할 소리인듯 하다.

국사교과서에서 친공이나 친일적인 내용은 둘 다 확실히 배제되어야 한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문제가 아닌듯 하다. 

2015년 10월 23일 금요일

수학교육과 초합리성에 관하여

한때 경제학서적과 공학관련서적, 스포츠관련서적을 집중적으로 읽은 적이 있었다. 아마도 종교나 이념같은 초합리적인 정신문화에 대한 반감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던 것 같다. 어떻게 생각하면 미워하면서 닮는다고 이념문제나 종교적인 정부의 초합리적인 행태와 신경전을 벌이며 나 자신도 초합리적인 태도를 지니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때가 있었다. 그런 생각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학적(理學的)이고 논리적인 분위기가 한층 더 강해지고 있었으니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할 수 있을것 같다. (법학에서는 판단의 신중함을 고려한다는 핑계로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 없지 않다'는 표현을 많이 한다)

학창시절 수학을 무척 못했다. 가정적으로나 개인적인 건강등이 사고를 오래 지속할 수 있는 공부를 할 여건이 안되었던것 같다. 이것 저것 책을 많이 읽어서 학교 공부를 하지 않아도 시험을 잘 봤는데, 수학만은 바닥이었다. 고3때 포기하고 있던 대학을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은 몇개월동안 미적분과 통계,확률 부분만 빼고 나머지 부분을 확실하게 해서 딱 수학성적의 3분의 2만 얻었다. 미적분은 나중에 형설출판사의 수험용 경제수학을 따로 공부하며 보충했는데, 무겁고 비중있는 공부를 멀리 할 수록 정신세계가 초합리적이고 비논리적으로 흐르는듯 한 생각이 들어서 요즘도 공학공부나 경제학관련 공부는 틈틈이 하는 편이다. 비논리적인 세계에 너무 깊이 발을 들여 놓고 능동적인 태도를 취하면 사기꾼이 되고,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긴다는 내 나름대로의 지론(知論)을 가지고 있다.

오래전 부터 토로하는 말이지만 정치인과 종교인과 사기꾼의 두뇌구조는 형이상학적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듯 하다. 그래서 한 편으로는 정치인과 종교인은 도덕적인 의무감이나 합리적인 사고에 대하여 긴장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Homo swindler(슬기로운 사람이 아닌 사기로운 사람)가 되기 쉬운듯 하다. 지난 정부에서도 느꼈지만 권력을 가지고 고집을 부리면 사기를 사기라고 할 수 없는 홍길동의 마음을 공감하게 되는듯 하다. 요즘 교육계에서 학교 수학을 좀 더 평이하게 교육 시켜서 수학을 포기하는 학생을 줄이고자 하는 것 같은데 좋은 생각인것 같다.

한국사회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가 많이 필요한듯 하다. 이념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종교적인 일탈이 잦은 현실에 도움이 될듯 하다

2015년 10월 17일 토요일

독서이야기

몇일전 좋은 책이 있어서 가까운 몇몇 지인과 가족들에게 카톡과 문자로 책을 소개했다. 생일선물로 가장 나쁜게 책이라고 하는데, 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재난에 가까운 스트레스를 줄것같아서 소개할 대상을 엄선했다. 대체로 수험서외의 책을 잘 안 읽는 한반도 사람들에게는 책을 소개해주는 행위가 무관심으로 머쓱한 반응이 되어 돌아 올 확률이 많은 것은 예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려움에 처해서 멘토가 그리운 날 책을 소개해준 사람과는 상관없이 어렴풋이 떠 오르는 책이름을 생각하고 서점에서 찾아보고 크게 도움이 되었던 경험이 많기 때문에 내 자신의 인격의 품질은 보증할 수 없지만 책소개는 가끔 하는 편이다.

세상에 나처럼 책읽는 행위의 도움을 많이 받은 사람도 없는듯 하다. 어렸을때 어느 날 부친이 열차여행을 다녀 오면서 호두과자 미루꾸캬라멜 그리고 커다란 종이 두루마리 두개, 책 한권 그리고 술냄새를 가지고 오셨다. 당연히 어린 형제들에게는 종이 두루마리와 책 한권이 천덕꾸러기로 여겨졌지만 종이 두루마리는 곧 벽에 붙여졌다. 하나는 세계전도였고, 하나는 고조선때부터의 수백명의 한국의 위인들을 명함판 사진과 더불어 약력을 적어놓은 종이였다. 이순신장군은 사진이 잘 나왔는데, 이성계장군의 사진은 엄청 안나왔다는 생각, 고구려의 위기때 고국원왕을 구한 유유장군은 옆집 명자의 꽁지머리를 하고 사진을 찍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쨌던 몇년동안 종이 두루마리 두개는 벽에 붙여져 있었고, 나도 모르게 그걸 다 외우고 있었다. 책 한권은 오시림이라는 사람이 쓴 [적과 동지]라는 정치서적이었는데, 조숙하게도 국민학생이 그만 그것도 다 외우고 말았다.

훗날 지리와 역사관련된 지식은 생계유지에 도움이 되었고, 정치관련 서적은 일지감치 정치적인 마인드를 진화시키는 좋은 역할을 했던것 같다.그것말고도 몸이 아프면 건강관련 서적을 수백권 들춰보면서 치료하고, 운동이 필요하면 스포츠관련 서적을 수백권 들춰보면서 운동실력을 늘렸는데, 내 지적탐구의 중세시대같은 암흑기는 사법시험 공부한다고 법서를 보거나 버케블러리 33000같은 단어집을 깡으로 외우고 있을때였던것 같다. 농담아닌 진담으로 삶의 의미를 부여하지 못해서 사법시험공부는 그만두었는데,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합격할 수 있다는 생각을 그만둔 적은 없는듯 하다.

한 번은 친구가 책을 읽는 순간은 그 세계를 다녀 온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이 맞는듯 하다. 의사 소통도 안되고 신체의 움직임만 있는 일터에서 일과 시간이 끝나면 책이 있는 그리운 집으로 오는 길이 가슴뛰기도 했는데, 어떨때는 심리학 서적을 읽고 일터에서 있었던 인간사를 해석하고 정리하면서 현실의 갈등과 불편함을 해소하기도 하였다.

독서는 처한 현실과 다른 세계에 대한 탐구다. 하지만 많은 경험이 삶을 풍족하게 하듯이 시간과 장소의 한계를 깰 수 있는 또 다른 인생경험으로서 삶을 풍족하게 하는듯 하다. 사람은 읽는대로 만들어진다고도 한다. 물론 읽는 사람에 한해서이다. 적어도 독서를 하게 되면 현실에 동조하지 않는 고집이 생긴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할듯 하다. 북한사회는 그래서 국민이 다방면의 지식을 습득하지 못하도록 통제하였던 것이다. 결국 국민이 독서를 많이 하는 국가가 존재하는 한 국제사회에서 독서를 하지 않는 국가는 도태될 수 밖에 없는듯 하다. 앉아서 다방면의 경험을 하고 있는 인재가 많은 나라를 이념서적 한 가지만 읽고 있는 등신이 많은 나라가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정신적, 문화적으로 제압당하지 않으면 다행일 뿐일것 같다.

2015년 10월 16일 금요일

창조적 노인 / 베르나르 올리비에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나는 걷는다]라는 책을 읽다가 내가 본 노인분들 생각이 났다. 언젠가 일터에서 퇴행적이고 권위적인 노인, 야구동영상을 즐겨보며 여성들을 쫓아 다니는 노인때문에 골머리를 앓다가 집에 돌아왔는데,우리집 대문 앞쪽에 의자를 놓고 앉아 하루 종일 지나가는 사람들과 대문을 드나드는 나를 빤히 쳐다보는 노인분때문에 극도의 분노를 느낀적이 있었다. 말을 나누는 노인분들에게는 책을 읽으라고 강권을 하다시피 했는데, 공경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저열한 현실 사이에서 어떻게 대해야 할지 혼돈스럽고 난처한 일을 한 두번 겪은게 아니다. 어떻게 보면 경제적인 부흥에만 힘썼던 세대들의 서글픈 결과일 수도 있겠다 싶다.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가난으로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항만 노동자, 토목공,체육교사, 웨이터등 온갖 일을 하다가 독학으로 프랑스의 대학입시 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를 합격하고 [르 피가로]같은 언론지의 유능한 정치부기자로 일했다. 독학으로 공부한 사람들은 열렬한 독서광인데, 베르나르 역시 그랬다고 한다. 은퇴후에 이미 부인과도 사별한 상태였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여 고민하던 중, 즐겨 읽던 역사책등을 통하여 서양인들은 동양인들에게 빚을 졌다는 것을 인식하고 실크로드를 4년에 걸쳐서 도보횡단을 하였다. [나는 걷는다]는 그 여행의 결과물인데, 은퇴후에 비행청소년에게 도보여행을 통해 재활의 기회를 주는 쇠이유(seuil)협회를 설립하여 인세 모두를 운영비로 쓰고 있다고 한다.

내가 직접 뵌 노인분 중에는 틈틈이 검정고시 준비를 하며 의미를 찾아가는 노인분도 있었는데, 한국의 중년 이상의 많은 남성들이 그렇듯이 계속되는 알콜섭취와 퇴폐적인 마초문화에 길들여져 정신적으로 매우 빈한한 삶을 살고 있는 노인분들이 많았다. 한 편으로는 베이비 붐 세대가 노인으로 대량 배출되는 시기가 되면 노년을 예비하지 않는 중년은 시차를 두고 큰 사회문제가 될 것이라는 생각도 하였다.

'꿈꾸는 노년'이라는 말이 있는데, 꿈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의미가 있는듯 하다. 남이 알아줘서 문제가 아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다보면 몸과 마음의 건강도 지켜지고, 노년에 맞이하는 싦의 불편도 없어진다. 꿈을 완성하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고 꿈을 실현 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을 누리는게 의미있는 일인듯 하다. 내가 생각해도 그 이상의 행복한 시간은 없을듯 하다. 많이 살아보지는 않았지만 흔히들 행복한 삶이라고 정한 기준들이 막상 들춰보면 그다지 부럽지 않은 상태를 많이 목격을 한듯 하다.  

꿍꼬또 꿍꼬또 망하는 꿍꼬또 / 참여관찰법

인류학자들은 인류의 문화를 연구하기 위해 아직 미개한 부족을 찾아가서 그 부족의 일원으로서 생활하며 발전한 인류가 어떤 과정을 겪었는지 많은 모티브(motive)를 얻어 내기도 한다. 그런 연구 방법을 '참여관찰법'이라고 한다. 많은 어려움이 있고 관찰자의 주관이 개입하기도 하지만 추장의 눈에 들어 고향에 두고온 처자식의 사정과는 아랑곳 없이 추장의 아름다운 딸과 결혼해야 하는 행운도 생긴다. 그 부족에게 미인의 기준이 무지무지하게 긴 목인지 아니면 코에 코뚜레를 이쁘게 잘 뚫었는지는 알바가 아니고 추장 손에 목숨을 잃지 않을려면 장가를 두 번 가야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것이다.

동쪽 바다 건너 꼬린이라는 부족이 있었다. 다른 부족과는 달리 유난히 계급사회가 심하고 창이나 화살의 재료로 철을 사용하는 시기가 늦어 침략적인 짜판이란 부족의 침략을 당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계급사회와 짜판부족통제의 후유증인지 유난히 어떤 신을 믿어야 부족의 안녕을 기원할 수 있는지 관심이 많았다. 그 문제를 놓고 부족 내에서 전쟁이 벌어져 뿌깐과 따민꼬라는 부족으로 나뉘게 되었다. 뿌깐은 호전성을 띄고 기계적 평등을 추구하였으며, 따민꼬는 자유로운 사회와 자유로운 물물교환을 추구하는 성격을 지녔다. 뿌깐은 자신들의 사회특성에 맞는 꼬뮨이라는 신을 믿게 되고, 따민꼬는 께삐떨이라는 신을 믿게 되었는데, 따민꼬의 자유로운 분위기의 특성상 여러 잡신들을 믿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두 부족, 뿌깐과 따민꼬는 원래 추구하던 신들의 성격과는 다른 길을 가기 시작했다. 둘다 강한 추장이 등장하여 통제를 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꼬뮨과 깨삐떨이라는 신 대신에 추장 자신을 믿으라고 윽박지르고 그 말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죽이기도 하였다. 뿌깐부족이 훨씬 심했다. 따민꼬 부족은 추장보다 똑똑한 사람들도 많고 해서 추장과 부족의 구성원들이 싸우기도 했지만 추장과 부족원들이 노력하여 뿌깐보다는 훨씬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었다. 뿌깐은 키밀션이라는 추장이 자신을 신으로 만든 새로운 경전인 추 치오샤샨을 만들어 부족원들에게 그것만 강요하는 바람에 부족원들이 아무런 발전도 못하고 야만의 상태에서 해메다가 홀랑 망했다. 잘 나가던 따민꼬도 부족의 역사를 기술하는 문제를 두고 뿌깐과의 관계에 지나치게 촛점을 두다가 부족 내부가 분열되기 시작했다.

어떤 인류학자가 참여관찰법에 의해 꼬린이라는 부족을 몇 대에 걸쳐서 관찰해 본 이야기를 간략하게 서술했는데, 그 인류학자 말을 빌리자면 어느 날 뿌깐뿐만 아니라 따민꼬까지 망하는 꿍꼬따고 한다. 추장 딸과 결혼은 커녕 그 사이에서 장가도 못가보고 살아나가는게 위태롭다는 소문이다.    

2015년 10월 10일 토요일

국민의 정신장애 / 치매

공부와 경쟁에 찌들어가는 젊은이들의 우울한 모습들을 뒤로하고, 연장자분들이 많은 일터에 지원을 했던적이 있다. 혹시라도 노인분들의 안정적인 심리에 편승하여 개인적인 복지를 누려보자는 계산도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아주 나빴다. 스타워즈 영화에서 보았던 '새로운 희망'이란 제목과는 아주 거리가 먼 세계에 발을 디뎠다.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노인의 마음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이는 나도 먹는다. 나이가 들면 심신이 모두 퇴행성을 띄게 된다. 외부활동을 확산시켜 나가기 보다는 과거의 사람들과 가족내의 일로 관심의 범위가 좁아든다. 혈관기능이 약화되어 뇌로 가는 혈류의 길을 방해하게 되면 두뇌기능도 약해진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다보니 변덕이 심해지고 고집을 부리게 된다. 물론 이런 문제를 의지력 강하고 세련된 방법으로 극복하는 노인분들을 본 적이 있는데, 정말 무한히 존경스럽기도 하다. 내 자신의 노후의 희망을 보기 때문에 더욱 그런듯 하다.

치매는 65세 이상부터 5퍼센트 정도의 비율로 발생을 한다고 한다. 나이가 들수록 이 비율이 올라간다고도 한다. 그러니까 어느 때, 어느 정도부터 치매라고 할 수 있는것도 아니고 점차로 점증되어 가는 증상이라고 봐야할듯 하다. 노년기의 치매는 뇌신경세포의 손상으로 발생하는데, 의사들의 임상실험에 의하면 남아 있는 신경세포가 손상된 신경세포를 대신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 뇌세포가 끊임없이 손상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사용방법에 따라서 재생된다는 연구결과도 나오고 있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뇌 기능의 균형이 깨지기 때문에 치매가 심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치매환자들에게 질책과 비난보다는 따뜻하고 참을성 있는 대응이 필요하다고 한다.

아주 나빴던 경험중의 하나는 노인 한 분이 퇴행적인 두뇌 기능을 보이면서도 아주 난폭하고 권위주의적인 상태에 있었다. 게다가 성장기에 부유하고 자기 통제의 필요성이 없이 자라서 피터팬증후군이 있는 상태였다. 걸핏하면 주변인들과 싸우기 일쑤였다. 항상 주변인들은 불안해 했고, 노인은 이걸 즐기는듯 했다. 따뜻하게 대해야 한다는 내 자신과의 약속은 번번히 깨졌는데, 북한정부나 한국정부에서 혹시라도 누군가가 저런 모습을 보이는 정책결정자가 있다면......하는 끔찍한 상상을 할때는 나도 모르게 화가 나곤한다. 극단적으로 노인이 많아지는 사회에서 소수의 맨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다수의 치매환자를 따뜻하게 대해줘야 하는 부담까지 상상된다.

자기 관리는 늙어가는 우리 모두의 과제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들 자신만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국가와 사회와 이웃을 위해서도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국민의 정신장애 / 이념

10여년전 한반도의 공공부문과 보이지 않는 게임이 시작된 이유는 북파공작원이었던 부친의 보상문제와 관련된 일이 시발점이 되었던것 같다. 이념과 분단에 관한 의기충만한 불만이 보상문제와 관련된 불합리한 절차를 경험하자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공작원, 북한, 이념문제가 엮이면서 주변이 점점 음성적인 일에 빠져들고, 급기야 종교적이고 이념적인 정부수반(여태껏 정치 지도자라고 표현했는데, 좀 어색한 면이 있다)이 들어서자 매우 헷갈리는 환경이 조성되기 시작했던것 같다. 이런 문제를 건강하게 대응하기 위해서 나로서는 꽤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 스케이트, 사격, 수영등의 스포츠에 매진하기 시작했고, 출중한 실력을 얻고 심신의 건강도 얻었으니 결과는 매우 좋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수감되었던 국정원장과 앞으로 수감될 예정인 분들을 생각하면 이 게임은 확실히 내가 이긴 게임으로 생각된다. 이런걸 정신승리라고 하는가 보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과거에 겪었던, 안 겪었어도 될 불행에 대해서 인간적으로 속 쓰리다.

이번에 중국의 거창한 열병식에 감동(?)한 북한이 대규모의 열병식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이념이 가져다 준 호전성을 극복하지 못한 북한은 아직도 꽤 심각한 정신적인 열병(列兵이 아닌 熱病)을 경험하고 있는듯 하다. 어떤 학리적(學理的)인 분석과 해석이 필요하지 않는듯 하다. 자신과 사회를 바라보는 부정적인 관점 자체가 근본적으로 정신장애의 본질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때 이런 내 평가에 누군가가 불만을 품을 일은 없다고 생각된다. 긍정적인 개선책이란 사회와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 항상 수용하고 적용시켜야 하는 과제만이 있는듯 하다. (다행히도 지나보니 쌍십절 열병식이 그렇게 거창하지 않았던 것 같다.)

대체로 어떤 정신적인 프레임에 갇히다 보면 빠져 나오기는 힘들고, 빠져들기는 쉬운듯 하다. 개인적으로 많이 경험한 일인데,거국적으로 그런 덫에 걸려 있는것은 심각한 문제인듯 하다. 국가와 사회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이 있을때만이 그 덫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듯 하다. 이념이라는 프레임을 극복하기 위해서 많은 나라들이 노력했고, 버려가고 있지만 북한은 더디다. 아마도 권력적인 역학관계와 기득권 세력들의 보수성, 그리고 특히 습관과 타성이 조화되어 개혁과 변화란 이름의 분위기가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수문장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다. 특히 북한의 노쇄한 군부세력에 대해서는 북한 내부에서도 많은 고찰과 새로운 평가가 필요할 듯 하다. 알고 있는 지식세계의 한계, 몸과 마음의 퇴행적인 분위기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려해볼 문제인듯 하다. 북한과 같은 권위주의 사회에서 소수 엘리트의 병리적인 태도는 거국적이고 즉각적으로 심각한 결과를 맞게 되는듯 하다.  

2015년 10월 9일 금요일

분단과 허브네트워크(hub network)

진심으로 심각한 마음으로 항상 고민하지만 통일문제나 복지문제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서도 참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언젠가 모든 것은 인연으로 이어져 있다는 다소 불교철학적인 표현으로 통일과 복지의 당위성을 주장해왔지만 좀 더 과학적으로 서술하자면 세상은 네트워크로 이루어져 있다고 표현하면 좀 더 실증성 있어 보인다. 언젠가 복잡계(complex system)를 이해하는 방법으로 네트워크현실을 적용한 KIST의 정하웅교수의 글을 읽다가 정하웅교수의 말대로 세상에 겹겹이 깔린 네트워크를 파악하여 잘 활용하면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모두'의 편의성을 개선 시키는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수개월전 클릭수가 하루 1000단위까지 가던 내 블러그 중 하나가 어느 일요일 오후 두시에 20분의 1로 클릭수가 줄었는데, 원인은 여러가지로 가정해 볼 수 있겠지만 그냥 상상만으로 생각하건데 고속도로 연결망처럼 허브가 없이 이산(異霰)된 독자분포가 아닌 어느 집단의 성격을 띈 허브형태의 독자들이 갑자기 내 블러그에서 손을 떼었거나 아니면 내 블러그를 들어 오는 연결통로중 허브역할을 하는 부분이 차단된 것으로 상상하였다. 그리 유쾌하지는 않지만 내 머리속도 뭔가 허브 역할을 하는 중요한 관점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이런 저런 신경을 쓸 일이 없음은 불가피했던것 같다.

학연이 튼튼한 연장자(年將者)가 일터에서 그 학연을 믿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게 볼상사나워 한 번 건드려 봤다. 어떤 반응이 올까 궁금했는데, 그 학연은 또 다른 외부의 인연과 네트워크화 되어 있는데다가 그 연장자의 처신이 바람직하지 못하여 학연내에서 빈축을 사고 있었다. 아무튼 잘 건드린것 같았다. 실제로 연세대 김용학교수가 우리나라에서 누군가 만나고 싶으면 네 단계를 거치며 만나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그 사람이 안듣는다고 남에게 그 사람의 험담을 하면 안될것 같다.

동북아의 허브 공항, 허브 항만, 허브 자유무역지구, 허브 허브 하지만 남과 북이 분단된 상태에서는 남과 북이 다 허브역할을 하기엔 날샜다고 봐야한다(날샜다고 천박하게 표현하지만 하도 그 알량함이 우스워서 하는 말이다). 분단은 지리적 위치나 관계적 위치 모두 네트워크를 끊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허브 역할은 더욱 날샜다고 봐야 할듯 하다. 영웅적인 노력을 해서 사회주의 강성대국을 건설 하든지 좌파와 우파가 싸워 누가 이기던지 하는 것 보다 중요한 문제는 네트워크를 살리거나 보존하는 길인듯 하다.  

2015년 10월 3일 토요일

국가와 국민의 생각하는 시간

학벌은 꽤 있으나 쉴새없이 떠들고 욕심을 부리는 연배있는 이웃에게 큰 적의감(敵意感)을 느낀적이 있었다. 마음이 상해가는 내 감정문제와는 별도로 그렇게 시끄러운 본인 자신도 나이가 들수록 인격장애와 분노조절장애를 겪으면서 퇴행하고 있었다. 자주 가까운 이웃들에게 정치적인 문제나 통일문제같은 거국적(巨國的)인 문제들을 생활문제로 받아들이고 회피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할때, 먹고 살기 바빠서 그런 문제를 관심가질 이유가 없다는 말을 들으면 소수의 사람들의 정치적 노력에 편승되어 살려고 하는 뻔뻔스러움에도 화가 날때가 있는데, 정치를 권력관계로 보지 않고 생활관계로 보면 그런 태도는 '노예의 길'이 아닌 '도둑의 길'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사이비 교주에게 농락 당하거나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시민들이 정치적인 부정행위 즉 권위주의나 부패같은 문제들의 피해자가 되는 경우에 시민들의 책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듯 하다. 항상 토로하는 중이지만 생각하는 습관을 길러주지 않는 지식위주의 교육이나 물질적인 욕망에 대해 지나친 가치를 부여하게 되면 더욱 본질적이거나 폭넓은 이익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문제가 생기는듯 하다. 이런 문제는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집단도 경험하는 문제인데, 뭔가 좋아지겠다고 이념같은 관념적인 문제에 끌려 들어가거나 호전성을 보이는 성향, 경쟁심과 이기심이 만연하는 분위기등은 단기적으로 작은 것들을 얻어내기 위해서 장기적이고 큰 것들을 희생하는 오류로 판명되기 마련인듯 하다. 바로 그 '장기성'은 결과를 빨리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그다지 신뢰감을 주지 않기 마련인데, 흔히 보이는 분위기가 퇴행적이지 않고 발전적인 대국(大國)들은 국가의 분위기가 개척적이기도 하지만 장기적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듯 하다.

일상에서 경험해본 바로는 흔히 생각이 깊고 여유가 있을듯 한 연장자(年長者)분들의 성향이 뜻밖에 단기적이고 탐욕적인데, 아마도 남은 인생에 더 많은 것들을 누리려는 성마른 조바심이 그나마 남은 인생도 꼬이게 만드는 부작용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북한을 비롯하여 일본 그리고 어느 정도 한국도 지금 서술해 나가는 심각한 문제들에 봉착해 있는듯 하다.

아직 성장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던 1980년대부터 빌게이츠는 마이크로소프트사에 독서휴가를 도입했다고 한다. 회사가 발전하느라 아무리 바쁜 시기라 해도 1년에 두 번씩은 시간을 내어 독서휴가를 갖으며 여유있고 생각하는 시간을 갖도록 했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미국이란 국가에 끊임없이 역동성을 갖게 하는 원동력은 부분 부분에서 이런 여유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자주 이런 말을 하지만 나 자신도 많이 후회하는 문제인데, 이념에 휘둘려 분단상태로 있는 한반도나 우경화 되어가는 일본등의 동양적 퇴행성은 '무식함'에 근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2015년 10월 2일 금요일

북한의 시장경제 수용 / 스티글리츠

일본의 경제저널리스트 히가시타니 사토시의 글을 읽다보니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고 IMF부총재를 지닌 조지프 스티글리츠가 1996년 출간한 [시장으로 가는 길 Whither Socialism ?]에 이런 내용이 있다고 한다.

"나는 이 책에서 만약 신고전학파 모형이 경제에 관해 제대로 설명했다면, 시장 사회주의는 성공할 기회가 있었다고 논했다. 따라서 시장 사회주의가 실패했다는 것은 시장 사회주의와 마찬가지로 표준적인 신고전학파 모형도 옳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은 시장원리주의가 옳기 때문에 사회주의가 붕괴했다고 믿는다고 한다.그렇다면 경쟁시장을 받아들인 사회주의도 전부 성공해야 옳은데 러시아식 시장개혁은 실패했고, 중국식 시장개혁은 성공함으로써 스티글리츠는 경쟁균형모형이 부적절하다고 언급하는 내용도 있었다.

사회주의 경제가 시장개혁을 해서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하는 문제는 반드시 경제학적인 문제는 아닌듯 하다. 러시아의 시장개혁은 정치적인 급변사태와 더불어서 시작이 된 것이라서 시장개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정치적인 안정과 그에 따른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는 상태에서 시장경제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은 시장경제의 모순점, 지하경제, 부패, 독과점등의 문제점부터 앞서 드러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인간의 본질적인 경쟁심리라는 필요악적인 심리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 시장경제의 원리라면 제도적인 장치에 앞서 족쇄가 풀린 시장경제가 부작용부터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당연히 인정해야 할것 같다.

그에 반해 중국의 시장경제는 등소평이라는 걸출한 지도자의 영도아래서 정부주도의 시장경제가 만들어진 이유로 제도적장치가 정치적인 사회주의에 적절히 부합하며 시장경제를 연착륙의 상태로 중국에 자리잡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면 이미 자생적인 시장경제가 형성이 되고 있는 북한에서 북한정부가 취해야 할 태도가 추리되는듯 하다. 북한은 시장경제가 저절로 확산되어 정부의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까지 진전했을때 정치적인 혼란과 더불어 시장의 혼란까지 겹쳐서 북한의 급변상태(급변상태라고 표현하지만 북한이란 국가의 붕괴상태를 의미한다)까지 가는 것을 북한정부도 원치않을듯 하다. 역시 북한의 급작스런 붕괴는 남북한의 통일이라는 목적에도 그다지 바람직한 의미가 없는듯 하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 온 통일이라는 사태는 한국에도 재앙을 안겨줄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는듯 하다. 심각한 경제격차, 국민마인드의 차이,잔존한 사회주의 세력등은 통일 후 빠른 안정을 보장할 수 없을듯 하다.

북한이 정치적인 사회주의를 유지하면서 중국식 정부주도의 시장경제로 발전한다면 북한의 급격한 붕괴를 막을 수 있을뿐더러 경제에 있어서 남북한의 협력도 할수밖에 없는 여건이 조성될듯 하다. 통일이 의미하는 본질적인 목적이 통일이 안되었는데 통일이 되버린 상태까지 진전될 수 있는 여지가 보일듯 하다.

위의 스티글리츠의 언급은 자유시장주의냐 사회주의냐 하는 이분법적인 구분이 별로 유용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는듯 하다. 마찬가지로 북한과의 통일문제나 북한정부가 시장경제를 받아들이는 문제를 이념적인 관점으로 접근하면 안될듯 하다. 항상 생각하지만 실리적인 지도자였던 등소평의 정치스타일은 존경받을만 하다는 생각이다. 

2015년 9월 28일 월요일

법률로써 사회주의를 막을려고 했던 한스 켈젠(Kelsen, Hans)

가끔 이념문제나 복지문제를 이야기하면 사회주의로서 오해를 받는 일이 많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은듯 하다. 왜냐하면 이미 사회주의나 자본주의를 떠난 인간주의에 기초를 한 생각을 풀어놓기 때문인듯 하다. 더구나 힘들게 사는 사람들 속에서 함께 공감을 하며 살아가다보면 무조건 세상이 뒤집혀져야 한다는 적의감보다는 왜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지를 냉철하게 판단할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좀 쉽게 말하면 못사는 것도 이유 있고 잘사는 것도 이유가 있으며, 못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그림에 대해서 한 편으로는 대단히 불만족한 마음을 품을때가 많다. 물론 경제적으로만 잘 사는 사람들이 그리는 마음속의 그림에 대해서는 더욱 큰 불만을 품고 있을때가 많다. 이미 내가 판단하는 기준은 이념이라는 가치보다는 마음과 마음을 바꾸는 방법(교육같은)에 점차 비중을 두어감을 느낀다.

독일의 법실증주의 헌법학자 한스 켈젠의 명논문인 [민주주의의 재정의] 읽다보면 한스 켈젠이 법실증주의자로서 2차대전이 끝나고 한참 팽창하기 시작했던 공산주의에 맞서서 민주주의를 지켜내고자 하는 의도가 보이며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법률로써만 해결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공산주의라는 새로운 가치에 대항하기 위해서 실증으로 맞서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좀 더 냉혹하게 표현하면 자본주의에서 생산수단을 취급하거나 소유할 수 있는 힘이 법률로써 주어졌으니 그것을 바꿀 수 있는 방법도 법률로써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물론 법률은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의 가치가 현실화된 결과물이니 사람들의 가치가 변하지 않으면 생산수단을 국유화하거나 사회주의 운동같은 강력한 힘을 가진 세력이 나올 수 없다는 경고도 하고 있는듯 하다.

공산주의가 형편없는 가치로서 대접받고 있는 요즈음엔 그다지 신경쓸 가치가 아닌듯 하다. 통일이라든가 복지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오직 미래를 위한 방법일 뿐이고 미래를 위한 선량한 가치가 법률로써 재생산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항상 있다.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판단을 바꿀려는 이들은 더욱 근본적이기 때문에 항상 경계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어떤 생각이 입법으로 구체화됨으로써 개혁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한스 켈센의 생각은 옳은듯 하다. 

2015년 9월 27일 일요일

일터의 비극 / 겔브레이스

20여년전 조그만 집단의 교주로 행세하는 카리스마넘치는 사람과 다툰적이 있었다. 가장 후련하고 간략한 한마디로 최종승리를 했다. "이런 짓 하지말고 어디가서 일을 해라."하지만 여기저기서 일을 해 본 입장으로서는 그 어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사기성(swindle)이 가미(加味)된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주변머리를 이해하고도 남았다. 자존심은 강한데 사람들에게 시달리기는 싫었던거다. 결국 "왜 내가 살아가는 방식에 참견을 하느냐"고 반박을 하면서 기운이 떨어졌다.

똑똑하던 초등학교 단짝이 수십년만에 자폐증환자가 되어 나타났다. 친구의 어머니에게 단순근로현장에서 일을 하도록 해보라고 권유했는데, 사흘만에 울면서 집에왔다. 일은 힘들지 않는데 사람들이 무서웠다는거다. 일이라는 것이 아니면 사회속에서의 삶이라는 것이 더불어서 맺어가는 인연으로 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내 책임을 생각했다. 훗날 또 다시 장기간 뛰어든 단순한 일터에서 오는 사람마다 무능하다고 괴롭히던 노인이 힘이 떨어지자 젊은 사람에게 구박받는 것을 보면서 관계의 악순환을 이해하고 복지의 중요성과 즐거운 근로현장의 필요성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케인즈 경제학자였던 갤브레이스(John Kenneth Galbraith, 1908년 10월 15일 ~ 2006년 4월 29일)는 미국과 같은 풍요로운 사회가 빈곤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까닭은 시스템의 결함으로 보고 있다. 겔브레이스는 이렇게 말한다.

"소비자의 욕망은 기묘하고 경박하고 혹은 부도덕한 원천에서 비롯되기도 하는데, 그러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이 사회에서는 선(善)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욕망을 채우려고 노력하는 과정 자체에서 또 다른 욕망이 만들어진다면, 욕망을 위한 노력이 '선'이라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소비자의 욕망을 채워 주기 위해 생산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다람쥐(소비자)가 혼자서 열심히 쳇바퀴 돌리는 것을 보고 박수를 치는 구경꾼(대기업)과 같은 처지에 있기 때문이다."

일터가 원하는 본질적인 결과만 달성하면 되는데, 사람들의 경쟁심, 권력적인 욕구같은 과도한 욕망이 개입하여 쓸데없는 일들이 발생하고 무능하지 않으나 무능한 구성원을 만들어 내는 악순환을 반복한다. 일터의 문제만이 아니고 어쩌면 경쟁으로 움직여 나가는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2015년 9월 25일 금요일

북한과의 구상무역(Barter trade)

일본과 같이 장기불황이나 장기불황에 빠져드는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1000원샵과 같은 저가일용품을 판매하는 곳이 늘어난다. 자주 그런 상점을 이용하다보면 큰 기술이 필요치 않은 일용품들이 중국이나 동남아등에서 만들어져 그 나라들의 제조업에 상당히 기여를 하고 있는 듯 하다. 점차 한국의 제조업들은 경공업분야에서는 설 자리를 잃고 있는듯 한데, 그래서 개성공단과 같은 정치적으로 불확실 하지만 경제적으로 남북협력의 돌파구를 찾을려는 시도가 있는듯 하다.

그런데 정치적으로 불확실한 남북의 상황이란 케인즈가 말하는, 인간의 심리가 경제를 구성하며 인간의 심리는 소비자나 기업가같은 경제주체의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불확실성'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 이상으로 개성공단에는 무리수로 작용하는듯 하다. 남북간의 어떤 정치적인 변화에 의해서 보따리를 싸서 오르 내리는 인질극같은 볼쌍사나운 광경을 연출하면서 존속시켜야 할 이유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오히려 그보다는 북한 자체의 경공업을 활성화 시키는 방법을 북한정부가 선택을 한다면 저가의 경공업제품에 대하여 한국이 소비시장역할을 해줄 수 있고, 물건과 현금이 즉각적으로 구상무역처럼 교환된다면 어떤 정치적 변화에도 경제적인 교환관계는 도도히 지속되리라는 생각도 든다. 아니면 북한의 지하자원과 한국의 공업제품간의 구상무역(Bater trade)형태의 교환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남한과 북한의 경제협력은 두 나라의 미래에 대한 유일한 돌파구인듯 하다. 통일이냐 아니냐 하는 궁극적인 문제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긴급한 문제인듯 하다.  

실질적 문맹과 대중정치

오래전 어느 현업집단에서 일을 할때 기이한 장면을 목격을 했다. 학력이 필요없는 일터라서 그런지 저학력의 노동자가 많았다. 그런데 연배있는 근로자 한 사람이 학벌이 꽤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권력지향적인 마인드를 꽤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의욕과는 달리 실질적인 능력이나 지혜가 없어서 다른 근로자들의 비웃음과 동정을 사고 있었다. 오래전의 배움은 현재까지 갈고 닦지 않으면 전혀 무용하다는 것을 몸소 실천하고 있었는데, 학벌 좋고 권력지향적인 마인드가 넘치는 젊은 사람들과 일할 때 느꼈던 무지함에 나이라는 깡패가 힘을 합쳐 일터를 퇴행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갈등관계가 협동관계를 압도하는 일터란 발전이 없는 것은 당연했다.

흔히 문맹이라고 하면 글을 읽을 줄 모르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실질적 문맹이라는 것이 있다. 글을 읽을 수는 있지만 책을 오랫동안 멀리하여 독해수준이 떨어져서 새로운 정보를 글로 접했을때 문장이나 문맥을 이해 못하여 글을 못 읽는 문맹자와 똑같이 행동하는 상태를 말한다. 한국의 중장년층의 실질적인 문맹상태는 OECD 최고라고 한다. 여가시간을 독서보다는 텔레비젼시청으로 보내는 중장년층 이상의 세대가 많은 것으로 봐서는 독서 안하는 전통이 세워진 것은 꽤 오된듯 하다.

예의 그 학벌있고 연배있는 근로자의 일상은 일이 끝나면 친구들과 만나서 음주하며 육두문자섞인 대화를 하는게 전부였다. 그런데 그 근로자의 행태와 주변의 행태를 물끄러미 생각을 하다보면 자꾸 북한사회가 연상이 되었다. 물론 떨쳐버려야 할 한국의 사회습관도 마찬가지다. 다양하고 풍성한 지적(知的)정보를 받아들이지 않을려고 하고 권위적수직관계라는 못된 습관만 몸에 밴 사람들이 이끌어 가는 사회란 극단적으로 북한과 같은 퇴행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당연했다.

내 자신은 역설적으로 그 현업집단에서 일하는 동안 책을 가장 많이 읽었던 것 같다. 1년여에 100권이 넘는 책을 좀 서둘러서 읽었는데, 아마도 내 머리가 퇴행적으로 굳어가는 느낌을 받았던 것에 대한 반발심이었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위기의식을 느끼기도 했던 것 같다. 특히 정치적인 문제들을 생각하다보면 실질적인 문맹상태의 노인분들이 선거를 통하여 못마땅한 정치인을 통제하겠다고 말할때는 왜 한국사회에서 텔레비젼에 얼굴을 비치거나 쇼맨쉽이 필요한 대중정치성향이 만연하게 되는지 이해가 갔다. 한편으로는 시대를 능동적이고 발전적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정치인이 부족한 이유도 이해가 갔다.  

2015년 9월 19일 토요일

끝나지 않은 이미지 트레이닝

적은 연습량으로 몇가지 종목의 스포츠실력을 준수한 수준으로 높인 적이 있었다. 올림픽 수영 금메달리스트인 펠프스는 잠자기 직전과 잠깬 직후에 머리속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완벽한 레이스를 그려보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빼먹지 않았는데, 훈련을 하면서 펠프스가 조금 지쳐보이면 보우만 코치는 "비디오 테이프를 꽂아"라고 외치면서 펠프스를 기운나게 했다고 한다. 오래전 검도의 대련을 위한 이미지 트레이닝으로부터 시작해서 부드러운 수영, 스케이트더블푸쉬등을 위한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는 습관을 자주 들였는데, 실제로 상대가 필요한 실제연습을 하지 못한 검도는 포기했지만 혼자 연습할 수 있는 수영이나 스케이트실력은 크게 향상되는 효과를 보았던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며 양성적인 이미지 트레이닝이 아닌 수동적이며 소극적이고 음성적인 이미지 트레이닝에 걸려드는 경우가 많은게 문제인듯 하다. 나만의 문제가 아니고 정신세계가 빈곤한 모든 시민들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한동안 퇴행적인 환경, 미래에 대한 이상을 잃어버린 사람들, 과거지향적이며 보수적인 사람들, 탐욕적이며 이기적인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직장의 관리자일 수도 있으며 직장의 동료들일 수도 있고,표리부동한 종교인일 수도 있고, 매스컴의 일면을 장식하는 비리 정치인일 수도 있다)을 보며 그런 인간환경에 동화되어 가는 모습에 경악을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다급하게 독서를 통하여 돌파구를 찾기도 했던 것 같다.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내탓이오 내탓이라는 카톨릭의 진리도 있고, 좋아하는 책인 스코트 팩의 저서[끝나지 않은 길]에서는 자신을 통찰하고 극복하지 않고서는 자기완성으로 갈 수 없다고 하지만 평범한 일상속의 사람들이 얼떨결에 나쁜 환경의 이미지 트레이닝에 걸려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듯 하다. 좀 더 범위를 넓혀서 생각하면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이 빈곤한 북한체제속의 정치인이나 일반인들은 강력한 한계속에 갇혀 있을것이다. 자유로운 체제나 밝은 국가환경은 미래를 위한 이미지 트레이닝에 반드시 필요할듯 하다.  

2015년 9월 12일 토요일

정서지능과 권력

한국사회가 분열되는 습성을 가진 근본적인 이유는 공감능력의 상실때문이 아닌가 생각될때가 있었다. 사회의 어느 부문을 살펴봐도 더불어 살아간다는 생각을 가진 시민들은 드믄듯 하다. 우군과 적군, 위와 아래에 대한 구분이 강하다. 본질적인 목적에 대한 집중은 힘들다. 항상 싸움을 생각해야 한다. 누르는 자에 대한 저항, 상대편과의 승부에 대한 생각들로 어지럽다. 나중엔 그런것들이 진정한 목표가 된다. 직장에서 관리자는 일이 잘 되게 하는것 보다 가학성을 띄는 경우가 있다. 그저 윗자리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그것이 삶의 목적이고 언젠가 그런 날을 위해서 좋은 세월을 피학성을 지니며 와신상담하고 살았던듯 하다.

매우 지적(知的)이지 못한 동료와 관리자는 매우 권위적이다. 설득과 포용이란 개념은 아예 모른다. 공감능력은 없고, 그것은 정서지능이 없기 때문인듯 하다. 한국사회는 그런 모습을 골통이라든가 무뇌충이라고 표현한다. 그런 면에서 한국사회는 뭔가 한 발 늦었다. 20세기는 과학과 인지혁명의 시대였지만 21세기는 정서의 지혜나 감성공학이 각광받는 시대이다. 한마디로 인간답게 사는 것이 중요한 시대라는 것이다. 복지가 중요한 것은 경제적인 것을 나누는 문제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일을 해야 하고 일하는 시간이 즐거워야 한다. 복지라는 것은 일터의 즐거움과 생활의 즐거움을 모두 표현하는 단어인듯 하다.

예일대학 심리학교수인 셀러베이(Peter Salovery 1958 ~ )는 정서적으로 지능적인 사람일수록 자신이 고용한 근로자가 더 큰 만족을 느끼도록 하며 의사소통이 원활하며 미적감각을 가진 결과물을 산출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위 아래만 생각하는 즉 권력관계만 생각하는 사회속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속에서 어떤 산출물이 나올 수 있을까. 사람들은 나쁜 기분에 젖어 있다. 위에 서 있건 아래에 서 있건 나쁜 기분은 마찬가지다. 정서지능이 없어서 머리가 안돌아가기 때문이다.

언젠가 유명 정치인이 사회의 평범한 일상을 사는 나 자신의 시각으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황당한 말을 많이 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말들을 대충 살펴보면 복지가 나라를 망하게 한다거나 젊은 이들이 아무 일이나 안할려고 한다는 등 그런 말들이었는데, 그때 느낀 생각은 어려움을 겪지 않은 정치인의 문제점이 심각하다는 사실이었다. 국민의 행복은 본질적인 목적이다. 국가는 정치인이 다스리라고 만들어진것이 아닌듯 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정치인이 있다면 요즘 매우 중요한 지능중 하나인 정서지능이 파탄난 상태로 있는 인물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2015년 9월 10일 목요일

작은 대왕

언젠가 연배가 있는 사람들끼리 모인 일터에서 패기가 없어진 사람들이 더욱 권력적일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더 큰 권력에게는 복종하는 전형적인 소인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 편으로는 그런 집단은 고립상태를 심화시키면서 외부영역과의 교류를 단절하고 스스로 꾸려나갈려는 움직임이 큰 경향이 있었다.아마도 에너지의 고갈로 진취적인 사고를 결여한 탓인것 같았다.

어느 날 중국의 승전기념열병식의 귀빈석 귀퉁이에 초라하게 앉아있는 최용해 북한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의 모습을 보면서 연로한 집단의 권력을 보는 것 같았다. 더 큰 권력의 귀퉁이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인물이 본국으로 돌아가서 어떤 태도를 보여줄 것인지가 궁금하기도 했다.

인간이 권력지향적이 되는 이유는 에너지를 만들어 줄 사명감과 철학이 빈곤해서인것 같다, 권력자는 구성원들을 통제함으로써 내부에너지섭취를 위한 조건을 충족시키고, 나아가서 더 큰 외부에너지 유입을 위해서 호전성을 띄게 되는데, 대게 바른 에너지 생산의 과정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국가들이나 다른 세력들의 저지행위로 실패하고 퇴행성을 띄게 되는것 같다.

북한만이 문제가 아닐뿐더러 노령화되어가는 동북아시아 국가들이나 수직적인 권력관계의 습관에 빠진 동북아시아 국가들에게 사회붕괴를 안겨줄 위험신호로 해석해도 좋을 것 같다.  

2015년 9월 5일 토요일

카토흉내내기

고대 로마의 정치가 카토(Marcus Porcius Cato)는 자영농 출신으로 포에니 전쟁에 참가했다. 다른 병사들과는 달리 몸과 정신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 전투중에 물만 마시고 음식은 일체 손을 대지 않았다. 당시 로마는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페니키아의 식민지 국가로서 페니키아가 망한 후에도 북아프리카에서 상업국가로 크게 번성했던 카르타고와 경쟁을 하고 있었다. 카토는 카르타고에 사절로 다녀온 이후에 카르타고와 로마와의 숙명적으로 함께 할 수 없는 운명을 직감한 것으로 생각된다. 카토는 많은 연설을 했고, 전해오지 않지만 연설집도 책으로 엮어졌다고 하다.

카토의 연설에는 항상 "카르타고는 반드시 멸망 시켜야 한다."는 말로 끝을 맺는다고 한다. 카르타고와는 전혀 상관없는 연설도 반드시 이 말로 끝을 맺었다고 한다. 카토는 80세의 나이에 그리스원전을 읽기 위해서 그리스어를 공부했다고 플루타르크영웅전은 기록을 하고 있다. 카토의 배움은 끝이 없고 늙을 틈도 없는듯 하였다. 결국 죽기직전에 포에니 전쟁을 통하여 로마가 카르타고를 멸망 시키는 것을 보았다.

"한반도는 반드시 통일 되어야 한다."

카토 흉내를 내봤다. 카토흉내를 내 본것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공복에 운동을 하면 지구력이 샘솟는다는 사실도 스스로 입증해 봤다. 

2015년 8월 29일 토요일

국가와 종교의 이중구속 / 베이트슨

20여년전에 재미있는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한 종교단체에서 보이기만 총명해 보이던 나를 '영입'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여러 신자들을 동원하여 엮기 시작했다. 다행히 타고난 성품 자체가 反黨의 鼻穴(벤댕이 콧구멍 - 열하일기 참조)이 아니어서 그런지 호기심으로 몇개월을 동참해봤다. 그리고는 뭔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는 그동안 구경을 잘 했다는 인사와 함께 발을 뺐다. 정상적이지 않아 보이는 이유는 윤리와 도덕이라는 가치를 본질로 하는 종교에서 술수를 동원하여 신자를 모집하는 모습이 신기하게 인상적이었는데, 나 자신은 분노와 심술을 함께 느끼면서 정신적인 체질강화에 노력했지만 많은 선량한 신자들은 그런 방법을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는지 궁금했다. 그때 강화시킨 정신적인 체질은 훗날 국가권력을 동반한 '헷갈림'을 이겨내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던것 같다.

정신분열증을 연구한 인류학자 베이트슨(Gregory Bateson 1904 - 1980)은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패러독스가 인간을 정신분열증에 빠지게 만든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부모가 어린 아이에게 "너는 이제 어린 아이가 아니니까 스스로 해라"라는 명령을 하고는 곧 "너는 어린아이라서 혼자서 하는 것은 무리다"라는 명령을 하게 되면 두 명령사이의 파라독스를 감당하지 못한 어린아이는 정신분열증에 걸린다는 '이중구속'이론을 내놓았다. 정신분열증 환자에는 현실로 부터 이탈하는 망상형, 모든 것을 그대로 수용하는 파과(破瓜)형, 자신의 내면에만 집중하는 긴장(緊張)형이 있는데, 베이트슨은 이들 모든 유형이 이중구속을 벗어나기 위한 전략으로 파악하고 있다.

당시 내가 본 신자들의 모습이 비정상적이었다는 의미는 위의 3가지 정신분열증의 모습을 띄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목소리 크고 카리스마 넘치는 성직자가 한편으로는 '재난'이라는 생각도 했던것 같다. 훗날 북파공작원문제나 정부의 정책분위기의 문제점을 거론하는 일과 관련해서 유난히 종교적이고, 내국인을 상대로 한 정보활동과 같은 음성적인 분위기가 강했던 정부에서 비숫한 '헷갈림'을 경험했는데, 몇 종목의 스포츠를 차근 차근 몰두하며 수월하게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란 윤리의 최종집합체'라고 이야기 한 것이 기억이 나는데, 국가에 충성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진 국민에게 정부가 비윤리적인 모습을 보이거나 엘리트가 비윤리적인 모습을 띄게 되면 국민은 가치관이 붕괴되고 헷갈리며 정신분열증 비숫한 증상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듯 싶다. 목적하는 바가 원래 윤리적이었던 이념도 국민을 이중구속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한반도가 이념때문에 지독히 헷갈리고 있었음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인듯 하다.  

2015년 8월 28일 금요일

노인의 습관

창조적인 삶이란 습관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삶을 말하는듯 하다. 일정한 생활패턴이 반복되면 몸과 마음이 퇴보하는 것을 느낀다. 아마도 사람들의 끊임없는 상승욕구(발전욕구)는 습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인듯 하다. 그런데 대부분의 노인분들은 상승욕구에 대한 기대를 접는다. 삶의 유한성(有恨性)을 깨달은 탓인듯 하다. 오래살고 싶으면서도 죽음을 적극적으로 준비한다. 건강한 자극을 수용하지 않을려고 한다. 자극과 노력은 '수고'로 착각을 한다. 부작위(不作爲)의 삶을 이상향으로 꿈꾼다. 아마도 과거 젊은 날의 노력들을 보람보다는 수고로 생각하고 살아온 탓인지도 모른다. 오늘 일터로 끌려가서 하루 종일 노동을 해야 하는 의무감은 먼 훗날 편히 쉬고자 여생을 부작위로 뭉개버리는 노인을 탄생시킬 것 같다.

젊은이는 현재의 삶이 고통스러워도 언젠가는 개선될 시간적인 여유를 생각한다. 하지만 노인은 이제는 현재의 기쁨을 미래에 맡겨놓을 시간여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손해보는 일을 참을 수 없고, 때로는 방탕과 이기심에 빠지기도 한다. 아주 가끔 만나는 어떤 노인분들은 도전하는 삶을 즐긴다. 그래서 하루 하루가 소중하다. 당신과 이웃을 존중한다. 당신의 시간을 아낄 수 밖에 없는듯 하다. 하지만 현재의 상태가 과거의 삶을 뚜렷하게 알려주는 타성속에서 사는 노인분들은 당신들이나 이웃에게 많은 고민을 안겨준다.

권위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여성이 권위적인 짝을 선택거나, 알콜중독 가정에서 자란 아이가 어느 정도 술을 즐기는 연인을 찾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는 불만족스럽고 성공과 거리가 멀더라도 우리는 익숙한 것에 집착한다. 바로 익숙하기 때문이다. 특정한 스타일을 배운 예술가들은 그 스타일이 퇴조하고 다른 스타일이 그 자리를 차지했음에도 애초에 배운 스타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새로운 스타일을 선택하면 성공에 더욱 가까이 갈 수 있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 중략 - 이렇듯 우리는 모두 습관의 존재다.

- 제임스 크록(미국의 예술가) -

이런 습관의 부작용은 작게는 개인으로부터 크게는 사회나 국가에까지 널리 물들어 있다. 더구나 수직적인 사회구조에 익숙한 동북아시아의 국가들에게는 '늙은 습관'을 교정할만한 자극이 전혀 주어지지 않는다. 동북아시아의 국가들이 보수적이거나 퇴행적인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이유중 하나는 늙은 습관들에 대해서 교정과 비판의 길이 닫혀 있는것이 문제인듯 하다. 게다가 동북아시아 국가들의 젊은 인생은 끊임없는 희생과 수고를 강요당한다. 젊은 날을 눈물로 보냈는데, 늙어서 여유롭지 못하면 대단히 손해보는 일이다. 그 여유를 젊은이에게 양보할 수 없다. 젊은 이들도 우리처럼 고생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젊은이도 일을 즐겁게 해야 하고, 노인도 즐거운 일을 가져야 한다. 기왕이면 그렇다. 삶을 대하는 자세도 물려받을 필요는 없는듯 하다.

2015년 8월 22일 토요일

사회적 연대감 / 법조문화와 친일발언

사법시험존치에 관한 법안이 발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법조계에서 일하는 지인에게 법조문화가 어떻게 변했는지 물어봤다. 오래전 보다는 많이 수평화되었다고 말한다.20대에 최종고교수가 쓴 김홍섭판사의 평전을 읽고서 감동받아 법조인이 되고자 하는 꿈을 가진적이 있었다. 당시 공부하는 사람의 입장으로 본 법조문화는 대단히 '야망'스러웠던 생각이 난다. 사명감보다는 권력과 출세에 관점이 집중되어 있던것 같은데, 공부하면서도 내내 뭔가 갑갑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더 넓은 세상에 대한 그리움 같은것이라고 부드럽게 표현해 보기도 하는데, 사회적 연대감이나 사명감을 가지고 공부하는 지인들을 보기 힘들었고, 내 마음도 김홍섭판사의 마음과는 반대로 달려갔다. 건강등을 비롯해서 여건도 안되고 해서 그만 두었는데, 상당히 오랫동안 공부한걸로 생계를 유지하며 동시에 막노동판같은 대칭세계를 오가며 체력과 정신력을 단련시킬려고 애썼던것 같다. 생각해보면 어떤 분야를 봐도 공유된 가치를 찾아볼 수 없고, 내 집단화된 부분만 보이니 나름 전체적인 관점도 생긴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법조계에서 일하는 분들과 이야기 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우리 법조계에서는'이라는 뿌리깊은 내집단 의식을 표현하는 것을 보며 법원이나 검찰의 '제식구 감싸기'에 대한 비난은 전혀 사실 무근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캐나다의 정치사상가인 테일러(Charles Taylor 1931 ~ )는 시민이란 강력한 연대의 힘으로 뭉친 사람들이며, 애국심이란 공유된 가치를 가지고 있는 통합된 공동체가 개인의 자유를 가장 이상적으로 실현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한다. 테일러는 공화국내에서 같은 운명을 지녔다는 공유된 가치를 함께 누리는 시민들은 그 자체로 서로에 대해 헌신하는 마음과 자유를 함께 누리게 된다고 말한다.

한국에서 가끔 문제가 생기는 유명인들의 친일발언에 대해서도 사회적인 연대감과 관련해서 해석을 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의 한국지배가 무조건 정당하지 않지는 않다거나 이해할만한 부분이 있다는 발언들은 적어도 기본적으로 침략행위가 잘못되었다는 가장 중요한 문제외에도 발언 자체가 한국사회의 사회적인 연대감을 손상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스러운 문제인듯 하다. 그렇다고 해서 내 생각이 전체주의적인 사고는 절대 아니며,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서 서로에 대해 헌신할 수 있는 연결고리를 끊어 버릴 수 있다는 우려감때문인듯 하다.

남북한간에 원래 분단이 안 되었어도 괜찮은 상황들이 이념이라는 정체성이 애국심이나 민족애라는 정체성을 대신하여 한반도를 어려운 상황에 빠뜨렸는데, 사실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연대감과 같은 감정적 가치는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인듯 하다. 그러니까 이념처럼 이런 방식의 제도를 떠나서는 어떤 이상적인 사회도 만들 수 없다는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테일러는 자신이 혼자 집에서 레코드로 음악을 듣는 것과 콘서트홀에서 많은 청중들과 심정적인 연대감을 가지며 함께 감동을 느끼는 것이 다르다는 표현을 하고 있는데,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생각을 해 봐야 한다는 뜻인듯 하다.

한반도는 이곳 저곳에서 연대감을 해치는 생각과 사건들이 끊이지 않는듯 하다. 

2015년 8월 21일 금요일

북한의 도발과 교류의 방식

머리속이 한참 경화(痙化)되어가는 직장동료가 있었다. 고시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아주 오랫동안 처의 경제력에 의존하여 살다가 경제활동에 뛰어들었는데, 일터에서 이만저만 말썽을 피우는게 아니었다. 타인과의 의사교류능력이나 공감능력이 퇴화되었는지 '협동'이란 개념을 전혀 이해 못하고 있었다. 이상적인 사회적 지위를 꿈꾸던 바탕은 있어서 매사에 권위적이고 싶어하거나 자존심을 내세우며 동료들과 다투기 일쑤였다. 급기야는 동료들이나 고객들과 자연적인 교류가 중단되자 폭력적이거나 공격적인 의사표현을 하는 습관이 생겨나서 결국 일터를 망가뜨렸다. 아이러니하게도 특정 종교를 독실하게 믿고 있는터라 사람들로 하여금 그 '특정 종교'에 대한 부정적인 고려를 하도록 하는데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듯 하였다.

자유시장경제를 바탕으로 외부의 세계와 교류를 할 가능성이 없어진 이념국가인 북한은 잦은 도발로 교류를 대신 하는듯 하다. 사실 어떤 개인이나 집단도 교류없이는 존재를 할 가능성이 없는듯 하다. 마이클 셔머의 말처럼 상품은 국경을 넘지만 군대는 국경을 넘지 못한다. 하지만 북한은 무리해서 상품이 국경을 넘지 못하는 사회를 만들고, 무리해서 군대가 국경을 넘는 사회를 만들었다. 어떤 방식을 사용해서라도 외부세계와 기본적인 교류를 해야 하는 절박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진화경제학, 행동경제학, 신경경제학 같은 새로운 과학들이 제시하는 자료에 의하면, 사람들이 자유롭게 협력하고 거래할 때, 그들 사이에 신뢰가 쌓이게 된다. 그 신뢰는 옥시토신 같은 결합 호르몬을 방출하는 신경 경로를 통해 더욱 강화된다. 따라서 생물학적으로 자기들이 협력하고 거래하는 상대와 싸우거나 서로 죽일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 마이클 셔머 (Michael Shermer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의 컬럼니스트) -


교류라는 것은 참 중요하다. 발전을 위해서 서로 협력하고 거래하다보면 그냥 평화로운 시간은 기본적으로 주어지는듯 하다. 국가간의 융통성있는 경제적, 외교적, 정치적인 교류는 평화를 위해서 중요한듯 하다. 자유시장경제체제라는 것은 어느 정도 이런 조건을 충족시켜준다. 물론 지나친 자유시장경제는 힘의 논리에 의한 경직된 시스템으로 다시 회귀하는게 문제가 있긴 하지만 어쨌던 기본적인 필요조건임에는 확실한듯 하다.

2015년 8월 20일 목요일

책을 한 권만 읽은 자

어렸을때 개신교회를 다녔다. 불우했던 중학교 시절, 나를 개신교회로 인도했던 선배의 뒤를 이어 학교도서관의 도서출납을 맡아 일하면서 도서관의 책을 많이 읽은듯 하다. 나중에는 시내 서점의 책까지 섭렵을 했는데, '갈매기 조나산'이란 영화의 대본을 사서 읽고는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는 구절을 마음속에 각인 시키기도 하였다. 그런데 개신교인, 나, 독서와의 삼위일체적인 훌륭한 만남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인듯 하다. 세월이 흘러 더 어려움을 느끼던 시절, 쉴새없이 공격적이고 교활한 전도를 일삼는 개신교인들때문에 개신교와 인연을 끊었다.

가끔 친했던 지인들중에 전도를 할려다가 실패를 하면, 친구에서 적대자로 돌아서는 사람들을 몇 명 보았는데,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거나, 논리싸움에서 밀리게 되면 '자신을 괴롭히지 말아달라'고 피해자와 가해자 모드를 바꿔버리고 만다. 세월이 흘러서 다시봐도 한결같다. 변화없는 한 가지 직업을 일관성있게 가지고 있으며, 책이라고는 성경책 하나만 반복하여 읽은, 명색이 대학나온 친구와의 대화는 이유없이 남쪽에 로켓포 공격을 가하는 북한을 이해하는 것 만큼이나 어리둥절한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나는 절대로 피해를 준 적이 없고, 상대는 제멋대로 마음 편한것 같다는 사실은 양심에 손을 얹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개신교인이라고, 아니면 북한이라고 무조건 비난할 일은 아닌듯 하다. 가장 바람직한 관계는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동일성 안에서 서로간에 구해야 하는 평화와 이해라는 고귀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상태라면 가장 좋은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넓고 다양한 세상을 생각하지 못하거나 나아가 넓고 다양한 세상을 이해하지도 못함으로써 독선과 아집으로 마음을 닫아버린 공동체가 한반도의 상당부분을 구성하고 있다면 한반도의 미래가 어두운 것은 당연한듯 하다.

좋은 개신교 신자분을 만나면 언젠가 머리속에 심하게 각인된 부정적인 생각들이 잠시 혼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런데 세상과 단절시키고 자신들만의 길을 고집하며 공격성을 띄는 북한의 행태를 보면 이미 내 마음속에는 '주체사상'이나' 정치지도자에 대한 숭배'가 어디서 많이 본듯한 광기어린 신앙의 모습을 갖추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는듯 하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는 것은 중요한듯 하다. 한반도의 비극은 '무식함'에 근원을 두고 있는듯 하다.   

2015년 8월 15일 토요일

자기 만족감에 빠져든 이념과 종교 / 오리아나 팔라치

어떤 사람이 닭을 잡아먹을려고 털을 뽑았는데 닭이 털이 뽑힌채로 도망갔다. 결국 잡을 수 없게 된 그가 중얼거렸다. "도망 가 봤자 저만 춥지......." 일상속에서 객관적인 시야를 갖출 수 있는 여유가 없었던 많은 이들이 자기만족을 위해서 타인과 비교하고, 타인에게 없고 자신에게 있는것을 찾아내어 만족감을 얻는다. 시간이 흘러보면 자신에게 만족감을 준 것들때문에 불만족한 시간이 닥칠거라는 사실을 예측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더 넓은 세상을 통찰하지 못한 지혜의 부족때문이기도 하고, 욕망이 지혜로운 시선을 갖추는데 장애가 된 경우이기도 한것 같다. 이런 성품을 가진 이들은 자신의 만족감에 장애가 된다는 생각을 하면 타인의 발목을 붙들고 넘어지는 '물귀신 작전'도 서슴치 않는듯 하다.

자신과 환경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해야 하는 의무를 잃어버린 이념과 종교적 믿음은 자기만족감속에서 방황하다가 갈 길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은듯 하다. 생각을 해 보면 나에게 이념이나 종교적인 믿음이 가져다 주는 영광스러운 세상을 설파했던 많은 이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불만족한 상황에 빠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제대로 살아간다는게 노력이란 댓가없이 거저 얻어지는게 아님을 문득 깨닫게 해주기도 하는듯 하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국가나 거대한 종교공동체에서도 발견되는 경우가 많은듯 하다. 다음은 유명한 종군기자였던 오리아나 팔라치(Oriana Pallaci 1931 ~ )가 911테러를 일으킨 이슬람세계에 대한 비난과 서방세계의 관대한 대응을 비난한 책 [ LA LABBIA EL'ORGOGLIO ]의 내용 중 일부이다.

기독교도와 무슬림 사이의 친교와 신뢰구축을 논의하기 위하여 1999년 10월 바티칸에서 교황청이 주최했던 한 종교회의에서 저명한 한 이슬람 학자는 자기만족감으로 가득한 모욕적인 선언으로 청중들을 아연케 하는 연설을 했다.

"당신들의 민주주의를 수단으로 하여 우리는 당신들을 침략할 것이며, 우리의 종교를 수단으로 우리는 당신들을 지배할 것입니다. (이 우려스러운 보고는 회의 참석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스미른스에 있는 터키 교구의 대주교인 주세페 베르나르디니예하의 제보에 의한 것이다)."

아시다시피 그들의 역방향 십자군 원정이 일어나거나 전개되기 위해서는 현대판의 흉포한 살라딘이나 나플레옹 같은 존재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살라딘이나 나플레옹과 같은 존재가 있건 없건, 그것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서방세계가 어리석게도 계속 먹이를 대주고 지원하고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점점 더 커지고 있는 현실 말이다. 그것이 바로 그 역십자군 전사들이 점점 더 많이 생겨나고, 점점 더 요구하는 것이 많고, 점점 더 우리를 쥐고 흔들게 하는 이유이다. 만약 우리가 계속해서 무기력하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있게 되면 그들이 언제나처럼 점점 더 생겨나게 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들은 언제나 점점 요구하는 것이 더 많아지게 될 것이며, 언제나처럼 점점 더 우리를 짜증나게 만들고 우리를 쥐고 흔들게 될 것이다. 우리를 정복하는 시점에 이르게 될 때까지 말이다. 따라서 그들과 협상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들과 대화를 시도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에게 관용을 보여주는 것은 거의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일이다. 그리고 내 말이 그렇지 않다고 믿는 사람은 누가 되었건 바보이다.


무슬림들의 자기만족감에 빠진 공격성향을 한반도의 이념이나 종교에 대입시켜보면 오리아나 팔라치의 분노는 매우 친근한 면이 있는듯 하다. 그 분노의 감정은 내 자신도 수없이 느꼈던 감정이라는 생각이 난다. 외부 세상과 단절되어 좁은 시야속에서 헤메는 북한이나 한국의 종교들은 넓은 세상을 살면서 대규모 전쟁과 지도자들을 취재하고 관찰해 온 오리아나 팔라치의 분노를 생각해 봐야 할 필요가 있는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