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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30일 금요일

공공선과 도덕성 / 마이클 샌델

국사교과서 국정화논란에 대해서 해법을 제시한다고 블러그에 글을 쓴 것이 갑자기 일본독자들의 관심을 많이 끌고 있는듯 하다. 한 편으로는 일본인들의 제국주의적 침략주의에 대해서 국가공동체영역의 관점으로 묶어서 평가해야 한다고 서술한 점에 있어서 모든 일본인들의 부도덕성, 그러니까 침략적인 정부가 형성되는 것을 막아내지 못한 소극성까지 포함하는 부도덕성을 비평한 점이 있는것 같아서 일본독자들이 많아진다고 마음이 편한것은 아닌듯 하다.


그저 침략적인 일본정부를 막아내지는 못했을 지언정 훗날이라도 그런 나쁜 상황을 호기있게 배척하는 평가를 하지 못하는 복잡한 상황에 대해서 한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울 따름이다. 더구나 일본내에서 아베정부의 역사왜곡을 비난하는 시민단체가 만들어지고 있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생각해보면 한국사회에서는 참으로 오랫동안 공공선과 도덕성을 충돌하는 개념으로 사용하는듯 하다. 친일문제에 대해서도 그렇고 이념문제에 대해서도 도덕성을 문제시 하고 있는데, 공공선을 위해서 도덕성을 참으라는 요구가 있는듯 하다. 하지만 공공선은 도덕성을 기반으로 한 '자존심'이 지켜질때 확보될 수 있는듯 하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의 권리와 자격의 확대를 무조건적인 도덕적,정치적 진보로 간주한다. 반면 공동체주의자들은, 자유주의 프로그램들이 정치를 비교적 작은 형태의 연합에서 보다 포괄적인 연합으로 바꾸어놓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자유지상주의 자유주의자들은 사경제를 옹호하고, 평등주의 자유주의자들은 복지국가를 옹호하지만 공동체주의자들은 기업을 바탕으로한 경제와 관료국가에서 발생하는 힘의 집중을 우려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충성과 의무, 전통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공동선의 정치가 선입견과 편협한 태도로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현대의 민족국가는 아테네의 도시국가와는 다르다고 지적한다. 현대 생활의 다양성과 규모를 감안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윤리는 기껏해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유물에 불과하다. 최악의 경우는 위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선을 기반으로 통치를 하려는 시도는 전체주의적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서 공동체주의자들은 편협한 태도는 삶의 형태가 혼란스럽고 근원이 불안정하며 전통이 완성되지 않은 곳에서 가장 창궐한다고 대응한다. 나 역시 공동체주의자들의 이러한 견해가 옳다고 생각한다.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썼다. "대중사회를 견디기 힘들게 만드는 것은 그 구성원들의 수가 아니다. 그보다는 살아가는 세상이 그들을 결집시키고 관계시키고 분리시키는 힘을 잃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공공생활이 약해지고 공통적으로 연계되어 있다는 느낌이 희미해질때, 전체주의적 해법을 제시하는 대중정치에 빠질 위험이 높다. 공공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향해 그런 위험성을 지적한다. 공공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옳다면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도덕적, 정치적 과제는 우리의 도덕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 MICHAEL J . SANDAL의 [WHY MORALITY] 중에서 -

원래 한국내에서 친공(親共)과 친일(親日)을 배척하는 이유는 전체주의를 막아내고 도덕성을 회복하여 공공선을 달성하자는게 목적이었고, 일본내에서 아베정부의 역사왜곡이나 우경화에 대한 반대 여론이 크게 형성되어 있는 목적도 동일한듯 하다. 어떻게 보면 '도덕성'이란 시민각자를 넘어 국가와 사회를 초월한 공통적인 이상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근거도 되는듯 하다. 많은 일본인들 역시 일본이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 하여 일본인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상황을 반기지 않는듯 하다. 일본은 한국에게는 가해자이지만 스스로 큰 피해자이기도 한 것이다. 한국의 도덕적인 중심이 없는 대중정치성향은 외부의 관점으로는 많은 헛점을 보여줄듯 한데 친일(과거 침략적인 제국주의 일본에 대한 친일을 말한다)과 친공은 나쁘다. 도덕성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관점으로 그렇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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