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때 개신교회를 다녔다. 불우했던 중학교 시절, 나를 개신교회로 인도했던 선배의 뒤를 이어 학교도서관의 도서출납을 맡아 일하면서 도서관의 책을 많이 읽은듯 하다. 나중에는 시내 서점의 책까지 섭렵을 했는데, '갈매기 조나산'이란 영화의 대본을 사서 읽고는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는 구절을 마음속에 각인 시키기도 하였다. 그런데 개신교인, 나, 독서와의 삼위일체적인 훌륭한 만남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인듯 하다. 세월이 흘러 더 어려움을 느끼던 시절, 쉴새없이 공격적이고 교활한 전도를 일삼는 개신교인들때문에 개신교와 인연을 끊었다.
가끔 친했던 지인들중에 전도를 할려다가 실패를 하면, 친구에서 적대자로 돌아서는 사람들을 몇 명 보았는데,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거나, 논리싸움에서 밀리게 되면 '자신을 괴롭히지 말아달라'고 피해자와 가해자 모드를 바꿔버리고 만다. 세월이 흘러서 다시봐도 한결같다. 변화없는 한 가지 직업을 일관성있게 가지고 있으며, 책이라고는 성경책 하나만 반복하여 읽은, 명색이 대학나온 친구와의 대화는 이유없이 남쪽에 로켓포 공격을 가하는 북한을 이해하는 것 만큼이나 어리둥절한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나는 절대로 피해를 준 적이 없고, 상대는 제멋대로 마음 편한것 같다는 사실은 양심에 손을 얹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개신교인이라고, 아니면 북한이라고 무조건 비난할 일은 아닌듯 하다. 가장 바람직한 관계는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동일성 안에서 서로간에 구해야 하는 평화와 이해라는 고귀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상태라면 가장 좋은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넓고 다양한 세상을 생각하지 못하거나 나아가 넓고 다양한 세상을 이해하지도 못함으로써 독선과 아집으로 마음을 닫아버린 공동체가 한반도의 상당부분을 구성하고 있다면 한반도의 미래가 어두운 것은 당연한듯 하다.
좋은 개신교 신자분을 만나면 언젠가 머리속에 심하게 각인된 부정적인 생각들이 잠시 혼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런데 세상과 단절시키고 자신들만의 길을 고집하며 공격성을 띄는 북한의 행태를 보면 이미 내 마음속에는 '주체사상'이나' 정치지도자에 대한 숭배'가 어디서 많이 본듯한 광기어린 신앙의 모습을 갖추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는듯 하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는 것은 중요한듯 하다. 한반도의 비극은 '무식함'에 근원을 두고 있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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