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폴 크루그먼(Paul Krugman)프린스턴대 교수가 토마 피케티(Tomas Piketty)파리대학 교수의 후원자적 입장에서 비판자적 입장이 되면서 경제학계가 시끌벅적한듯 하다. 오래전 원론적인 경제학서적만 읽다가 크루그먼 교수의 [The Accidental Theorist]를 무척 재미있고 신선한 마음으로 읽었던 기억이 난다. 특히 그 중에 일본의 장기침체에 대해서는 공급측면의 문제가 아니라 수요부족이 원인이므로 화폐를 많이 찍어내어 인플레이션으로 맞불정책을 펴라는 주문은 명쾌하고 직설적인 크루그먼 교수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크루그먼 교수는 SF작가 아이작 아시모프의 'foundation'에 나오는 심리역사학자 해리셀던을 무척 동경했다고 한다. 그래서 역사학도 공부했다고 한다. 국제무역에 관해서 비교우위를 주장하다가 리카도의 절대우위에 가까운 이론으로 돌아가거나 1997년부터 시작된 아시아의 금융위기를 예측하고, 1993년 경기침체에 빠진 미국의 전망을 낙관적으로 예측한 것은 어느 정도 시간을 초월한 통찰이 가능했다고 생각하는데, 역사적인 시간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습관이 바탕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노벨상수상자이며 잘은 모르지만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파악한다는 평이 있는듯 하다. - 일본 경제저널리스트 히가시타니 사토시의 글에서 참조 -
토마 피케티교수의 저서 [CAPITAL in the Twenty - First Century]는 자본이 자본을 낳아 불평등이 심화된다는 이론으로 마르크스의 이론에 비유되는데, 현실적인 통계에 기초를 하여서 쓴 책임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이론이라는 이념적인 비유가 가세하여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던 것 같다. 물론 관심을 더 받아서 나쁠건 없지만 많은 속칭 우파경제학자들의 공격을 심심치 않게 받았던 것 같다.
그런데 크루그먼 교수가 토마 피케티 교수의 신간 [불평등 경제]를 비판하고 나섰다. '불평등 경제'에서는 부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과세정책이 19세기의 지대추구형경제를 막아주었다고 썼지만 '21세기 자본'에서는 돈 놓고 돈 먹는 자본수익이 높아져 상속재산을 쥐고 운용하는 것이 근로수단으로 벌어들이는 돈을 압도한여 지대추구형 경제를 초래한다고 써 있다는 것이다. 지대추구형 경제란 불로소득이 압도하는 경제를 말하는데, 내 생각에는 정부의 과세정책이 지대추구형 경제를 막아주기도 하고, 그렇지도 못한 경우가 있다는 생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예를 들면 정부의 과세정책의 강약의 변화, 자본수익의 강약의 변화등이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우파정부가 들어서면 자본수익이 강화되고, 좌파정부가 들어서면 과세정책이 강화되는 시계열 변화를 보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물론 신자유주의라는 이념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면 지대추구형경제가 나타난다는 사실은 필연적인 것으로 봐야 할것 같다.
크루그먼 교수의 시간을 초월하는 생각들이 피케티교수를 비판하는 관점을 세련되게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드는데, 아마도 학자로서의 단절되고 단호한 이론, 특히 과학적 통계가 받침이 되어야 하는 문제에 대해서 불만을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점은 나와 같은 가치판단을 하는 논객과 학자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크루그먼 교수가 노벨상을 받을때, 매스컴마다 선정이유가 달랐던 것처럼 피케티 교수의 이론도 좀 더 연속선상의 관점으로 봐 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뭣 보다도 크루그먼 교수의 매력은 시공을 초월한 번뜩이는 지혜에 있었던 것 같고, 피케티 교수의 이론은 피케티 교수의 이론 자체보다도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적인 요소가 중심이 되어 피케티교수의 의도와는 달리 인기를 얻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근로를 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의 생각이 중요한거지 피케티 교수의 이론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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