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가 분열되는 습성을 가진 근본적인 이유는 공감능력의 상실때문이 아닌가 생각될때가 있었다. 사회의 어느 부문을 살펴봐도 더불어 살아간다는 생각을 가진 시민들은 드믄듯 하다. 우군과 적군, 위와 아래에 대한 구분이 강하다. 본질적인 목적에 대한 집중은 힘들다. 항상 싸움을 생각해야 한다. 누르는 자에 대한 저항, 상대편과의 승부에 대한 생각들로 어지럽다. 나중엔 그런것들이 진정한 목표가 된다. 직장에서 관리자는 일이 잘 되게 하는것 보다 가학성을 띄는 경우가 있다. 그저 윗자리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그것이 삶의 목적이고 언젠가 그런 날을 위해서 좋은 세월을 피학성을 지니며 와신상담하고 살았던듯 하다.
매우 지적(知的)이지 못한 동료와 관리자는 매우 권위적이다. 설득과 포용이란 개념은 아예 모른다. 공감능력은 없고, 그것은 정서지능이 없기 때문인듯 하다. 한국사회는 그런 모습을 골통이라든가 무뇌충이라고 표현한다. 그런 면에서 한국사회는 뭔가 한 발 늦었다. 20세기는 과학과 인지혁명의 시대였지만 21세기는 정서의 지혜나 감성공학이 각광받는 시대이다. 한마디로 인간답게 사는 것이 중요한 시대라는 것이다. 복지가 중요한 것은 경제적인 것을 나누는 문제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일을 해야 하고 일하는 시간이 즐거워야 한다. 복지라는 것은 일터의 즐거움과 생활의 즐거움을 모두 표현하는 단어인듯 하다.
예일대학 심리학교수인 셀러베이(Peter Salovery 1958 ~ )는 정서적으로 지능적인 사람일수록 자신이 고용한 근로자가 더 큰 만족을 느끼도록 하며 의사소통이 원활하며 미적감각을 가진 결과물을 산출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위 아래만 생각하는 즉 권력관계만 생각하는 사회속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속에서 어떤 산출물이 나올 수 있을까. 사람들은 나쁜 기분에 젖어 있다. 위에 서 있건 아래에 서 있건 나쁜 기분은 마찬가지다. 정서지능이 없어서 머리가 안돌아가기 때문이다.
언젠가 유명 정치인이 사회의 평범한 일상을 사는 나 자신의 시각으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황당한 말을 많이 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말들을 대충 살펴보면 복지가 나라를 망하게 한다거나 젊은 이들이 아무 일이나 안할려고 한다는 등 그런 말들이었는데, 그때 느낀 생각은 어려움을 겪지 않은 정치인의 문제점이 심각하다는 사실이었다. 국민의 행복은 본질적인 목적이다. 국가는 정치인이 다스리라고 만들어진것이 아닌듯 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정치인이 있다면 요즘 매우 중요한 지능중 하나인 정서지능이 파탄난 상태로 있는 인물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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